조선왕조실록 1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3580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박시백의 대하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 제1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원전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각 권마다 20여 권의 ��
book.naver.com
0. 머리말
포부는 거창하였고, 노력 또한 부그럽지 않을 만큼 하였으나 독자 여러분께 재미있고 유익할지는 자신이 없어 사랑을 고백할 때와 같은 떨림으로 삼가 이 책을 내놓습니다.
1. 북방의 호랑이
동북면의 실력자
5경은 오후7시~다음날 오전 5시까지의 10시간. 2시간씩 잘라서 1경.
3경 = 자시 = 오후 11시~다음날 오전 1시
약관 스무살의 이안사. 한 어여뿐 관기를 사랑했는데 이 일로 고을 수령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짐을 부린 곳은 삼척현, 오늘의 삼척시다. 낯선 땅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나 했더니, 전주의 그 수령이 삼척현 신임 사또로 부임해오는 게 아닌가? 다시 짐을 꾸렸다. 실록은 전주에서부터 이안사를 따라나선 이가 170여 가구에 달했다고 전한다.
항복을 권한다는 건 그를 어엿한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함이 아니던가.
이안사! 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고조로 용비어천가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목조다.
운명을 건 도박
고려를 등진 지 100년 만에 이안사 후손은 고려 국적을 되찾았다.
고려는 원이 빼앗아 쌍성총관부를 두고 통치해 오던 동북면 지역을 되찾기로 하였다. 이자춘에게 내려진 밀명은 고려의 공격에 내응하는 것.
공민왕의 개혁
빠이앤티무르는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원나라의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고 빼앗겼던 동북면을 되찾았다.
원의 반기를 든 한족 반란부대의 한갈래인 홍건군(적)이 원의 토벌에 밀려 쫓기다가 고려로 쳐들어 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성계의 화려한 등장
격구대회에서 신기에 가까운 말타기 솜씨를 선보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 활쏘기 등 그의 여타 무예솜씨도 자랑할 기회는 제법 있었을 것이다.
원에 쫓기던 홍건군(적)이 쳐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킨 건 이자춘이 죽던 그 해 겨울이었다.
나하추 ::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요동(遼東)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의 국세가 떨어진 말기에는 선양[瀋陽:奉天]을 근거지로 해서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원나라의 멸망 5년을 앞둔 1362년(공민왕11) 2월 고려의 반역자 조소생(趙小生)의 유인을 받은 그는 동북면(東北面) 쌍성(雙城: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삼철(三撤:北靑) ·홀면(忽面:洪原)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李成桂, 태조)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북원(北元)이 세워진 1368년 이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는데, 특히 전술에 뛰어났던 이성계를 깊이 존경하였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관위(官位)인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었으나 후에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져 윈난[雲南]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하추 [納哈出(납합출)] (두산백과)
전쟁의 천재
적이야 무찔러버리면 그만이지만 동료들로부터 고립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님을 뼈아프게 경험한 덕이다.
2. 혁명을 꿈꾸는 자
혁명의 씨앗
목은 이색은 일찍이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과거에 응시, 1,2,3차 시험에 각 1, 1, 2등을 한 당대의 수재. 모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귀국하자, 그의 집엔 공부깨나 한다는 새싹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순식간에 고려 최고의 명문학원이 탄생하였다. 국사 교과서에 신진 사대부라 명명된 세력의 대표주자들이 다 여기서 나왔다.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윤소종 등)
권세가의 종, 곧 노비가 되면 납세, 국방 노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는다. 독립된 인격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재산으로 간주되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권세가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농민들 스스로 땅문서를 들고 찾아온다.
이들 권문세족 못지않은 대토지 소유자들이 또 있으니, 바로 사찰이다. 땅 잃고 노비도 되기 싫은 사람들은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갔다. (스님도 세금, 병역, 노역 면제)
개혁의 실패
공민왕이 사부라 부르는 이 스님의 법명은 변조라 한다. 왕이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괴한이 나타나 자신을 찌르려 하는 게 아닌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홀연히 한 스님이 나타나 괴한을 물리쳐주었다. 다음 날 근신인 김원명이 스님 한 분을 모셔 왔는데 바로 꿈속의 그 스님이더란 얘기. 얘기를 나누어보니 청산유수에다 세상 일을 훤히 꿰고 있다. 그날 이후 가까이 두어 설법도 듣고 하다가 사부로 삼아 자문을 받고 있었다.
1365년, 이렇게 한 승려가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다. 신돈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머리를 길러 관복을 입도록 하였다. 비천한 출생인지라 친인척도 없고 귀족적인 불교사회와도 거리가 있는 사내. 바로 그 때문에 왕은 개혁 추진의 적임자로 본 것인데... 권문세족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신돈의 개혁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전쟁영웅 최영도 국문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성균관이 재건되었다. 총장격에 이색, 교수진에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이렇게 신돈의 개혁 결과 최대 수혜자는 이들 신진 사대부들이었다. 성균관은 그들의 이념을 단련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장이 되었으며 정비된 과거제도를 통해 대거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신돈과 생각이 같았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불교도 개혁 대상)
신돈 역모 사건이 터졌다. 핵심 측근들은 그 날로 목이 잘렸고, 잠시 유배되었던 신돈도 곧 뒤를 따랐다. 검거 4일 만이었다. 이 미심쩍은 역모사건은 공민왕의 작품이었다는 추정이 많다.
공민왕의 죽음
자제위란 고관의 자제들 중 용모단정한 아이들을 골라 궐 안에 살며 왕의 시중을 들도록 한 특별기구다. 그 시중이란 게 왕과 더불어 다양한 변태적 음란 게임을 하는 것이고, 왕의 지휘 감독 아래 후궁을 범하는 따위의 것들이었으니...
(익비마마께 태기가 있다 하옵니다. 홍륜의 아리하 하옵니다.) 왕이 지휘해 온 ‘사업’의 결실이다. (내일은 홍륜은 물론 익비와 관계했던 아이들을 깨끗이 죽여 없애야 겠구나. 그 애들을 죽여 입막음을 해버리면 익비의 아이는 자연 내 아이가 되지 않겠느냐. 최내관, 너도 이일을 알고 있으니 온전할 순 없겠구나.) 최중농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듣는 입장에서야 어디 그런가. 최만생이란 이름의 이 내시는 잠시 뒤 자제위로 달려갔다. 어이없는 최후, 1374년 9월이었다. 치밀하게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앉아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이란 고작 이런 정도였는데, (적들이 쳐들어 왔다! 전하께서 시해 당하셨다! 궐 밖에서 역도들이 들어왔다!) 처음엔 그게 먹혔다. 궐 안은 공포에 휩싸였고, 위병들도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다. 전갈을 받은 재상들도 숨기에 바빴는데, 총리격인 시중 이인임이 직접 진상 파악에 나섰다. 곧이어 시해 사건의 전모가 들어났다. 수사에서 사후처리까지를 이끌며 정국 주도권을 거머쥔 이인임.
공민왕은 정비나 후궁 어느 쪽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아이의 이름은 모니노, 이때 나이 갓 열 살.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왕을 신돈은 미모의 여종을 시켜 시중들게 하였다. 반야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그 후 얼마 뒤 아이를 낳았다. 곧 모니노다. 그러나 반야가 신돈의 집 여종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궁궐로 불러 후궁으로 삼기엔 찜짐했던 모양이다. 결국 모니노는 어미와 계속 신돈의 집에서 살았다. 신돈이 죽은 뒤 왕은 아이를 궁으로 불러 원자로 삼고 나서, 이인임에게 뒤를 부탁했다.
걱정된 왕은 어미를 바꿔버린다. (이 아이는... 일전에 죽은 궁녀 한씨의 아들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원자의 출생에 대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여불위 ::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거금을 모은 전국시대 대부호였다. 특히 여불위는 수완이 뛰어나고 이재에 밝았다. 여불위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만났다. 자초는 진나라의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이었다. 여불위에게는 여자가 있었는데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에게 주었다. 여불위는 자초가 진나라로 귀국할 수 있게 도움을 제공하였고 후일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그 공로에 의해 여불위는 진나라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죽자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始皇帝)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며 태후(太后:진시황의 모후이자 여불위의 첩)와 밀통관계를 유지하였다. 여불위는 이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를 태후에게 보내어 정을 통하게 하였다. 태자 정이 성장하여 이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여불위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되어 촉 땅으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여불위는 점점 압박해오는 진왕 정의 중압감을 못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BC 235).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여불위가 3000여 명의 빈객들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불위 [呂不韋] (두산백과)
어린 왕의 후견인
이인임은 권문세족 출신.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던 ‘음서’를 통해 시작하였다. 그는 진작부터 처신이나 정치감각이 출중했던 모양. 권문세가 출신임에도 신돈의 눈에 들어 개혁 실무 책임을 맡았고, 신돈 제거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이인임은 오히려 승진하였다. 이제 어린 왕의 후견인으로 권력을 한손에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개혁조치들이 폐기되고, 염흥방, 임견미 같은 측근들이 요직을 독차지한다.
1368년 대륙을 지배했던 몽고 세력이 수도를 버리고 북으로 달아났다. 이후의 원을 북원이라 부른다. 고아 출신으로 목동, 중, 건달 같은 이력을 가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중국의 새 주인이 되었다.
공민왕 재위시엔 명나라 홍무 연호를 쓰며 사대(事大)를 표했고, 북원을 멀리했다.
집권 세력은 북원과의 국교회복을 결정한다. 마침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에게 이 정보가 들어갔다. 이인임은 귀국하는 채빈의 행렬에 자객을 달려 보냈고, 자객은 임무를 완수하고 북원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북원으로부터 사신이 왔는데, 그의 도착 성명이 (공민왕은 우리를 배신하고 명에 붙었으니 그 죄가 매우 크도다. 그런 고로 우리는 공민왕을 시해한 죄를 용서하여 문제삼지 않겠다.) 젊은 피들을 끓어오르게 한 것이다. (정도전? 그놈더러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고 해.)
혁명아 정도전
정도전, 호는 삼봉. 경북 봉화 출신이다. 아버지 정운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던 인물. 고려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기록될 만큼 치부와 세력 쌓기 같은 일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명문가인 우현보 집안 여종의 외손녀. 어머니 쪽 가계로 인하여 두고두고 귀족 출신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색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당대의 명문 이색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로 정4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동료, 선후배들이 환송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친구인 핵심실세 염흥방이 사람을 보내왔다. (염대감이 이르시길, 경시중께 잘 말씀드려 노여움이 풀렸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랍니다. 아마도 좋은 전갈이 있을 거라 하였습니다. 이보시오! 이 정도전이나 경시중이나 소견은 다를지언정 나라를 위한 뜻은 한가지오. 하물며 어명이 이미 떨어졌거늘 내 어찌 당신 말을 듣고 아니 갈 수 있겠소?) 그러고는 자청하여 유배지로 떠나버린다. 정도전이 유배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등이 릴레이로 상소를 올렸고,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2년이 넘게 지나 마침내 그도 풀려났다. 그러나... (단, 개경에는 들어올 수 없다!)
도전은 북한산 자락에 학원을 차린다. 인근 재상가의 사람들이 와서 초막을 헐어버린다. 부평으로 옮겼더니 거기서도 헐리고 다시 김포로 집을 옮겼다.
3. 위화도회군
고려의 두 영웅
(최영! 영웅 중의 영웅이지. 허나... 우선 너무 늙은 데다 귀족 출신. 천지개벽을 도모할 사람은 못 되지. 어찌됐건 이인임과 한 부류 아닌가?
이성계! 전공도 백성들의 칭송도 제일 높건만 권력의 주변에 머물고 있는 사람.)
무력과 사상의 만남
1383년 가을, 이성계는 여진족 호바투군을 치기 위해 고향 땅 함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둘의 첫 만남을 실록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대사로 전하고 있다. (들어오면서 장군님의 병사들을 보았는데 엄정한 군기에 절도 있는 움직임,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 49세, 정도전 42세, 무력과 사상이 손을 잡은 것이다.
무기력한 우왕
이인임과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등 집권 세력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 집안의 종들은 아예 몽둥이를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남의 땅을 빼앗곤 했다. 저지하러 나섰던 고을 수령이 도리어 그들에게 얻어터지기도 했다.
권력을 잡은 최영
7세에 후견인이자 친아버지란 소문마저 돌던 신돈이 참수되고, 10세 때는 부왕인 공민왕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의 생모, 반야.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었건만 두 해가 지나가는데도 궁궐로 들어오란 전갈은 없고, 엉뚱하게도 왕의 친모는 죽은 궁녀 한씨라는 소문이 떠돈다. 태후전으로 달려가 울부짖었는데... (제가 주상을 낳았습니다. 한씨라뇨? 그녀가 대관절 누구란 말씀이옵니까?) 그날 밤으로 임진강에 던져져 고기밥이 되고 말았다.
(이인임이 아니었으면 보위에 오르기는커녕 어딘가에 유배되었거나 벌써 사약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내가 은혜를 입었지. 허나, 이인임이 어디 나를 위해 그런 것이었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 그런거지!)
그러던 차에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한 것이다. 왕은 은밀히 최영을 만나 이인임을 제거하자는 의사를 타진한다.
이인임의 측근들에겐 최영이 껄끄럽게 여겨졌다. (최영은 말일세. 우리랑 근본이 같은 사람, 친원 보수주의자! 그가 군사권을 갖고 있는 게 나라로 보나 우리의 이익으로 보나 안전해. 오히려 이성계 같은 자가 위험하지. 담백하고 우직한 군인, 정치가로 치면 아마추어. 내가 아마추어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실제로 이때까지 이인임은 최영을 잘 다루었고, 최영 또한 그의 부패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았다.
72세 최영.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후배 무장인 이성계를 끌어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의 실권자들인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와 그 일당들을 잡아 목베었다.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았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졌다. 이인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영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두드렸지만 최영은 마나주지 않았다. 대신 최영은 이인임을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 자식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요동을 정벌하라
최영만 내 편이면 안전하다고 왕은 생각했다. (후처의 자식과 우왕이 혼인)
홍무제는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내놓으라 했고, 사전 상의도 없이 들어와서 방을 붙였다. 분노한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한다. 왕과 최영은 결심을 굳힌 뒤 이성계를 불렀다. 그의 입에선 작정한 듯이 보이는 이른바 4불가론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침이 옳지 못하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이 옳지 못하며,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되고, 넷째, 장마철인 까닭에 활에 입힌 아교는 풀어지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어 옳지 못합니다.) 그 내용으로 보나 전후 정황으로 보나 이 4불가론은 이성계 집을 드나드는 정도전을 필두로 한 개혁적 신진 사대부들의 아이디어였으리라.
8도 도통사 최영, 좌군 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 조민수는 제거된 이인임 계열의 보수파다. (선왕께서 변을 당한 것도 경이 남쪽(제주도)로 정벌을 나가버렸을 때 아닙니까?) 그렇게 총사령관은 남은 채 정벌군은 떠났다. 아무튼 4만여 정벌군은 요동으로 떠났다.
말머리를 돌리다
이성꼐의 예츣대로 장마가 시작된 탓도 있지만, 위화도에 다다른 군대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질 않았다. 대신 거듭 들을 올려 우는 소리를 한다. 명분 쌓기다.
위화도 회군 때를 맞춰 이성계의 가족은 일종의 볼모로 왕의 처소에 있다가 소리 없이 이성계군 쪽으로 달아났다. 회군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최영은 고봉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군 세력에게 최영은 존재 자체가 부담이다. 결국 참수되고 만다.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4. 고려를 지켜라
선죽교 :: 고려 태조 왕건이 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만들어진 다리.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선죽교’라 불리게 됐다.
조민수와 이색
어둠을 틈타 내시 80여 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한 것이다. 하지만 허무한 실패로 끝나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조민수는 회군시 이성계와 약속을 한 게 있었다. (금상의 자식이 아닌 다른 종친 중에서 후계를 세웁시다.) 이색과 의기투합한 조민수는 대비의 입을 빌려 폐위된 우왕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곧 창왕으로 이때 나이 9세였다.
이색은 이성계의 야심을 경계했다. 왕과 함께 홍무제를 직접 알현하고 즉위 인사를 올려 정통성을 굳건히 하려 한다. 하지만 대비가 완강하게 반대한다. 그리하여 이성계와 함께 가려 하자 이성계는 이방원을 서장관으로 데려가자 제안한다.
우왕을 몰아내다
조준. 권문세가 출신인데도 음서가 아닌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으며, 왜구 토벌에도 공이 컸다.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회군 후 이성계를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이 되었다. 이성계의 천거로 대사헌에 오르더니 상소 한 방으로 조민수를 날려버린다. 옛날 방식으로 땅 욕심을 부리다가 탄핵된 것.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득후란 자가 여주로 가서 우왕을 만났다. (내 일찍이 곽충보를 잘 봐주었는데 한번 만나 일을 도모해보아라.) 함께 이성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 다음, 곽충보는 이성계에게 뛰어갔다. 함정인 줄 모르고 이성계의 집 안으로 뛰어든 김저와 정득후.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김저는 옥에 갇혔다. 여기까진 대체로 사실이다. 이성계 측에게 걸림돌로 여겨지는 우왕, 창왕, 구세력을 한꺼번에 내쳤다. 자백한 김저는 급사해버린다.
폐가입진 :: 거짓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운다.
어린 창왕은 폐위되어 아비가 있던 강화에 유배되고, 45세의 정창군, 거듭 사양하다 등 더밀려 보위에 오르니,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자 제 34대 공양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다
토지 문제를 개혁하는 일은 정도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근본적이고 급진적이어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에 대폭 완화한 타협안을 조준이 내놓았는데도 이마저도 만만찮은 반대를 겪었다. 왕년의 개혁파 수장격인 이색도 반대편에 섰다. 정몽주는 태도 표명을 유보했다. 그러나 그것은 창왕 때의 일. 개혁안이 통과되자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과전법이 실시된 것이다. 1391년 1월의 일이다. 그 해 9월엔 이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옛 토지대장이 개경 거리에서 불태워졌다. 뒤이어 조세제도도 크게 개선되었다.
만만찮은 공양왕
과전법의 실시로 구세력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대신에 이성계파의 신진 세력들은 공신전, 녹봉 등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윤이, 이초의 사건이란 게 터진다. 조반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충격적인 정보를 가지고 왔다. (윤이, 이초란 자가 명나라 조정에 와서 참소하기를, ‘이성계가 왕요(공양왕)를 새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사실은 종실이 아니고 이성계의 친척이다. 왕요가 이성계와 더불어 명을 치려 하자 이색 등이 옳지 않다 하여 이색, 조민수, 이림, 변안렬, 이숭인, 권근 등은 살해하고 우현보 등은 유배하여... 라고 했다 하옵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맞지 않은 황당한 참소였지만 그 사안이 너무 중한지라, 유배지에 있는 이색, 이림, 이숭인, 권근 등을 가두어 국문케 했다. 그런데 그날 마침, 새벽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옥사까지 잠겨버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자, 왕은 얼른 이성계 등을 불러 설득했다. 이성계 세력으로선 민심만 잃고 얻은 것 없이 끝내야 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성계는 사직 쇼를 벌인다.
고려를 지키려는 자
흥국사 9공신 ::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폐가입진)
정몽주, 자는 달가요, 호는 포은이다. 이색학원에서 공부하였는데 단연 출중하였다. 일찌감치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는데 세 번의 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이었다. 원 사신 접대 문제로 신진 세력이 이인임 정권과 한 판 붙었을 때 그는 선두에 섰고, 유배되었다. 정도전보다 일찍 풀어나긴 했지만, 그건 이인임 세력이 그를 예뻐해서가 아니라 물먹이려는 의도에서였다. (녀석을 왜에 사신으로 보내 노략질을 금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오. 성공하면... 좋은 일이고 실패하여 그곳에서 죽어도 할 수 없고?) 직전에 떠났던 사신들도 몇 달째 소식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몽주는 왜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후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가 고려인 포로들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몇 년 뒤엔 명나라에 황제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된다. 애초 이 일엔 진평중이란 위인이 선정되었다. 홍무제의 심술로 인해 목숨이 보장할 수 없는 명나라 사행길. 진평중은 노비 수십 명을 권력실세인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빠지고, 정몽주가 대타로 가게 딘 것이다. 오랜 벗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픽업하여 기일 내에 당도했음은 물론, 홍무제를 설득하여 억류되어 있던 전임 사절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이성계와 인연은 이성계 – 정도전의 관계보다도 20년이나 일찍 시작되었다. 초년 관료 시절 이성계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했던 것을 시작으로, 황산대첩을 거둘 때도 이성계 밑에 있었다. 정도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하여, 선후배를 떠나 (정몽주가 5년 선배이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서로를 믿고 아껴온 사이.
정몽주의 반격
이색, 조민수 등의 대한 조치를 위한 군신합동 대 토론회가 열린다. 왕과 정몽주는 어떻게든 무죄 쪽으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열세. 다만 한 사람, 정언 김여지만이 거들었는데, 이 말을 얼른 이어 받아 왕은 이색은 무죄로 하고 조민수는 폐서인한다.
사헌부의 우현보 탄핵 사실이 아직은 대외비였는데, 정도전이 이 사실을 몇몇 측근에게 흘린 사실이 드러난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숨직이고 있던 반 이성계파 대간들이 움직였다. 좌천으로 끝내는 듯하다가 정도전의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유배한다. 그의 두 아들의 벼슬도 빼앗고 폐서인한다. 이색, 이숭인, 우현보, 심덕부, 이종학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을 대거 유배지에서 불러들여서는 삽시간에 조정의 요직들을 장악해버렸다. 이로 인해 조정은 뚜렷이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5. 역성혁명
위기의 이성계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 지체 없이 상소를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왕은 다소 움츠러들었다. (참수가 아닌 유배) 그의 다섯째 아들, 스물여섯의 이방원. 모친상을 당해 3년 여막살이 하고 있던 그가 서둘러 아버지가 있는 벽란도로 달려갔다.
피를 묻히지 말고 평화적으로 현 임금의 양보와 백관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는 것은 회군 이후 이성계 측 내부의 확고한 원칙이었을 것이다.
선죽교의 피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화, 둘째아들 방과, 사위 이제, 심복 퉁두란. 조영규. (퉁두란은 반대) 변중량이란 이가 있었다.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사위여서 일가이긴 하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스승의 신변을 염려한 그는 그 길로 달려가 정몽주에게 알렸다. 암살 음모를 전해들은 정몽주는 돌연 이성계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4월. 개경 선죽교. 그의 나이 56세였다.
고려 멸망 카운트다운
방원!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의 촌놈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덜어준 아들. (정녕 나를 위해서였다면 소리 없이 해치웠어야 할 일이거늘 마치 행사 치르듯 한 건 무슨 꿍꿍인가? 내가 반대할 수밖에 없는 걸 뻔히 알면서 나한테 미리 알리고, 형제, 삼촌, 매형 내 심복들에게까지 알린 다음, 백주대로, 그것도 오가는 이 많은 선죽교에서 일을 벌여...? 공은 모두 제가 챙기고, 욕은 모두 내가 먹게 되질 않았는가.)
정몽주는 참수되어 개경거리에 내걸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500년 고려 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를 대체할 인물도 없었을 뿐더러, 걸리적거리면 테러까지 불사하는 슈퍼파워 이성계 당 앞에 저항의지가 솟아나긴 어려웠으리라.
이제 기댈 데라곤 없는 왕은 궁리 끝에 이방원 등을 불러 기상천외한 명을 내린다. (왕과 신하사이의 동맹)
이성계, 왕이 되다
이성계 당 핵심들은 대비전을 찾아간다. 이제 고려의 종말을 고해야 할 처지의 왕대비 안씨, 그녀의 고단한 궁중생활도 끝나가고 있었다. 안극인의 딸로 공민왕 15년에 후궁이 되었다. 말년에 이르러 총기를 잃은 왕이 자제위 소년들을 시켜 범하려 하자 머리를 풀고 목ㅁ을 매려 함으로써 저지했다. 우왕은 이런 소릴 종종 했다. (나의 후궁들은 어찌하여 모씨(母氏)만한 미인이 없누?) 그러고는 종종 안씨의 처소를 찾아 안씨를 곤란하게 했다. 우왕이 유배된 뒤 그의 아들 창왕을 세우는 교지는 그녀의 몫이었다. 폐가입진으로 창을 폐하고 고양왕을 세운 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였다.
군주제 나라에서 임금 위에 누가 있으랴마는 왕대비 이름으로 왕을 폐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말도 안 되는 절차지만 이런 때에 누가 따질 수 있으랴.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졌고, 옥좌는 그 후 4일 동안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1392년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백관들은 그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 집을 찾았다.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들어가 마당을 점거하고 옥새를 대청에 놓자 더 이상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이성계가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몇 번식 사양하는 모습을 보인 뒤, 마지못한 듯 승낙하였다.
다음 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시대사상을 대표하는 이성계와 정도전, 둘이 만난 때로부터 9년, 역성혁명을 통한 새 왕조, 새 세상 건설이라는 꿈을 절반은 이룬 것이다.
+.
《개국》 연표
1352년 9월(공민왕 1년), 근신이었던 조일신이 반역했다가 다음 달에 죽임을 당하다. :: 이 사건은 공민왕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상황에서 터진 반란 사건인 데다가 조일신은 원나라 시절부터 자신을 시종했던 근신이기 때문이다. 조일신은 왕의 처소를 포위하여 숙위군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우정승이 되었는가 하면, 자신의 일파로 요직들을 메워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왕의 밀지를 받은 이인복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1370년 11월(공민왕 19년), 이성계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요성을 치고 처명을 얻다. :: 뒷날 4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두 번이나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를 쳤었다! 그 이유는 원이 망하자 기철의 아들이 요동과 심양지역을 다스리던 이들과 더불어 원나라 잔당을 규합한 후 북쪽 변방을 침입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때 항복했던 중국인 장수 처명은 이후 평생의 친구이자 부하로 이성계와 함께했다.
1389년 11월(창왕1년), 김저, 정득후가 우왕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다. 이성계, 심덕부, 정몽주, 정도전, 조준, 지용기, 설장수, 성식린, 박위 등 이른바 흥덕사 9공신이 흥덕사에 모여 폐가입진의 논리를 내세우며 정찬군 요를 새 왕으로 추대하다.(공양왕)
세계의 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총 1893권 888책,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작가 후기
40이 넘은 나이에 청춘 시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함주 막사로 찾아가는 정도전의 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