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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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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전 20권 분량으로 나올 대하 역사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두번째 권. 앞으로 3개월에 한 권씩, 5년에 걸쳐 완간될 예정이다. 2003년 5월 한국문화콘텐츠 진흥원에서 뽑은 '우수 기획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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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국과 역성의 세월

 강화대교 :: 옛 강화 나루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강화대교. 야사에 의하면 고려왕조를 이끌었던 왕씨들이 이곳 강화 앞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성계가 왕이 된 다음 날엔 비가 내렸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인지라 혁명 세력은 하늘의 축복으로 여겨졌겠지만,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무려 475년이나 이어온 왕씨의 고려 아닌가? 태조는 민심을 고려해 조심스레 처신했다. 궁궐로 즉각 이사하지 않고 출퇴근을 하는가 하면 조회도 선 채로 받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고려로 하고 의장과 법제 또한 고려의 전례에 따른다.) 이 또한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한 조치였다. 

 권력 인수 과정만은 달랐다. 즉위한 그날로 왕조 교체 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명에 파견했고 다음 날엔 각 도의 군사지휘권을 종친과 공신들에게 맡겼다. 다시 이틀 뒤엔 청을 수락하는 형식을 빌려 왕씨들을 격리시켰다.

 명나라로 떠났던 사신이 3개월여 만에 돌아왔다. 정도전이 다시 사신으로 가고 전갈이 오기를 나라 이름을 어떻게 고쳤는지 알려달라 하였다. 논의 끝에 ‘조선’으로 하기로 했다. 별다른 조건 없이 그냥 알리라 했으니 알려주기만 했어도 될 일을, 굳이 두 개를 지어 홍무제에게 하나를 찍어달라고 청했다. (조선, 화령)

 

 절개를 지킨 사람들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청하기를 (정몽주와 한때를 이뤄 전하와 저희를 몰살시키려 했던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56인은 모두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태조는 내키지 않아 곤장형 정도로 하자고 했다. 총대는 정도전이 멨다. 지난날, 정몽주가 자신들에게 가하려 했던 바로 그 방법이다. 볼기를 치기로 되어 있는 곤장이 툭하면 허리 위로 향했다.

 그렇게 이숭인은 세상과 이별했다. 향년 46세. 14세 어린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6세에 대과에 합격한 수재!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 높았으며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쳤다 한다. 홍무제도 인정할 정도였다. 줄곧 스승인 이색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젊은 날엔 정도전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으나, 바로 그 절친했던 친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될 줄이야. 

 이숭인처럼 곤장 맞고 죽은 이는 이종학, 김진양, 우홍수 등 8명이나 되었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고, 우홍수는 보수파의 수장 우현보의 아들이다. 우현보는 이때 아들을 셋이나 잃었다. (이건 정도전의 사적인 복수야. 우현보의 아들들이 정도전의 핏줄을 들먹거리며 자주 멸시했거든. 자기 집안 여종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이야. 실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정도전 깎아내리기의 의도도 있어 보입니다.)

 반 역성혁명 진영의 정신적 지주, 이색! 태조의 배려로 목숨은 건졌고 몇 달 뒤에 유배조치도 해제된다. 다시 얼마 뒤 태조가 불러 도움을 청했다. 태조는 이를 거부한 이색을 죽는 날까지 존중해 주었다. 1396년 신륵사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이방원이 뒷날 불러서 벼슬을 주려 했다. 하지만 거부하고 낙향한 후, 후세 교육에 힘써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힘을 길러 장차 조선의 주인이 될 줄은 길재 자신도 몰랐으리라.(사림)

 

 오백년 도음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에 목적(牧笛)에 부쳐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 운곡 원천석

 

 원천석은 고려가 멸망할 기색이 보이자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했다. 한때 그에게 배운 바 있던 태종 이방원이 벼슬을 주려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직접 찾아갔어도 자리를 피하고는 만나지 않았다 한다. 고려 말의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책 6권을 남겼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의 책이 사라진 이유로 야사에서는 증손대에서 정부의 공식 입장과 너무도 다른 역사서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증조부의 책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신규, 조의생, 임선미, 서중보 등 수십 명은 벼슬을 버리고 개경 북쪽 두문동이란 골자기에 들어가 은둔했다. 끝끝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니, 뒷날 이들을 일러 ‘두문동 72현’이라 했다. 

 

 공을 세운 사람들

 태조는 큰 공이 없었던 중간파 그룹의 원로들(배극렴, 김사형)까지 정치적인 고려로 1등 공신에 선정했다.

 

 1등 공신 :: 토지 150~220결, 노비 15~30명

 2등 공신 :: 토지 100결, 노비 10명

 3등 공신 :: 토지 70결, 노비 7명

 한편, 당시 왕자들에게 주어진 건 과전 100결이다. (과전이란 해당 토지에 대한 수조권, 즉 나라 대신 세금을 거두어 쓸 권리인데 세금은 수확의 10%.) 

 하지만 공신이 받은 토지는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에 직급에 따라 과전도 따로 받았다. 공신의 자식들은 과거 없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의 특전을 받았고, 죄를 짓더라도 영구히 용서한다는 보장을 받았다. 

 

 왕자들은 공신책봉에 분노했다. 태조에겐 본래 부인이 둘 있었다. 첫째 부인은 뒷날 신의왕후로 불리게 된 한씨로, 동북면의 세력가인 한경의 딸이다. 열다섯에 태조와 결혼해 6남 2녀를 낳았다. (첫째 이방우(진안군), 둘째 이방과(영안군, 정종), 셋째 이방의(익안군), 넷째 이방간(회안군), 다섯째 이방원(정안군, 태종), 장녀 경신공주, 차녀 경선공주, 여섯째는 어려서 죽었다.) 그녀는 남편이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그만 죽고 말았다. 

 

 비극의 씨앗, 세자 책봉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족 강윤성의 딸로 개국과 함께 현비에 봉해진 신덕왕후 강씨다. 태조보다 21세나 연하인 그녀! 2남 1녀를 낳았다. (이방번(무안군), 이방석, 경순공주) 권문세족인 현비의 처가로부터 태조가 많은 도움을 받았으리란 해석이 있지만 그녀의 오빠들이나 친인척 중 개국공신에 포함된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걸로 보아 무리한 해석이라 여겨진다. 태조에게 도움이 된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태조는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불러 정식으로 세자 문제를 제기해 방번으로 결정했다. (굳이 중전마마의 소생으로 세자를 삼아야 한다면, 차라리 방석 왕자님이 낫질 않겠소?) 왕비의 욕심이야 그렇다 쳐도 산전수전 다 겪은 건국의 두 주역(이성계, 정도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런 결정이 가져올 위험성을 못 느꼈던 것일까? (이성계는 자신의 힘을 너무 믿었고, 정도전은 왕은 재상에 대한 인사권만 갖고 실제 국정의 주요 문제들은 능력과 도덕이 검증된 우수한 재상들이 책임지고 풀어나가는 재상중심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지나치게 똑똑한 정안군(이방원)보다 방석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왕씨들의 비극

 태조는 점점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었다. 보름 넘게 궁성을 비운 채 온천을 찾곤 한 것도 자신감의 한 표현이리라. 새 왕조에 대한 자신감은 마침내 왕씨들에 대한 관용조치로 이어졌다. (섬에 있는 왕씨들은 육지로 나오게 하고 재능 있는 이에겐 벼슬도 주겠노라.) 

 

 1394년 1월, 작은 사건 하나가 불거지는데, 이 작은 사건이 어마어마한 참극을 불러오게 된다. 문하부 참찬 박위. 밀양 사람으로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왜구를 치는 데 공이 컸다. 위화도 회군시 태조를 따랐으며 공양왕을 세운 흥국사 9공신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후 정몽주 편에 서서 이성계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웬일인지 새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중용되었다. 이흥무라는 맹인 점쟁이에게 이성계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물어보게 된다.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줄을 서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어찌된 일인지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긴급 체포된다. 이에 대간과 형조가 합동으로 청하는데 그 내용이 자못 기이하다.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들을 벌 주라는 게 아닌가? 잘난 왕씨는 위험하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태조의 불허가 계속되자 대간, 형조는 업무 거부를 선언한다. 이에 마지못한 듯 귀양지로 보낸다. 그런데 사실 태조는 집무 거부를 해도 봐줄 만큼 대간에 관대했던 왕이 아니다.

 몇 달 전 세자빈 유씨가 폐출되고 내시 이만이란 자가 참수된 사건이 있었다. 어린 세자에게 시집온 세자빈이 내시랑 정을 통하다 들통난 모양이다. 대간과 형조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았다. 결국 공신을 제외한 대간들은 국문을 받고 나서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영리한 대간들은 태조의 마음을 읽었다. (불허만 하실 뿐 성내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의 청을 거부하시는 게 진심은 아니란 뜻일세.) 왕화, 왕거도 삼촌인 중 석능과 함께 직접 이흥무를 만나 점을 쳤다는 수사 결과가 나왔고, 이에 왕화, 왕거, 이흥무, 김가행, 박중질 등이 참수되었고, 대간, 형조는 왕씨들을 모두 제거하라 청한다. 무기한 농성이 계속되자 태조는 일종의 직접투표 방식에 맡긴다.

 섬으로 보내 살게 하자고 제거 반대 의견을 낸 쪽은 전의감, 서운관, 요물고 등에 소속된 하급관리들뿐이었다. 반면 고려에서 잘 나갔고 오늘도 고우ㅐㅣ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모두가 왕씨 제거에 표를 던졌다.

 

 전의감 :: 의료 행정과 의학 교육을 담당하던 부서.

 서운관 :: 천체, 지리, 역 등을 관장하던 부서.

 요물고 :: 궁중 음식을 관리하던 부서.

 

 석연치 않은 여러 의혹에다 박위에 대한 믿기지 않는 처리! 그를 벌하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태조는 끝내 그를 용서한다. 그가 시작한 일로 인해 관련자들이 모두 참수되고 이제 애궂은 왕씨들이 모두 몰살당하게 되었는데 정작 주모자는 용서받아 관직에도 복직되는 이 불합리한 상황. 왕씨들은 이렇다할 저할 한번 못해본 채 강화나루에, 거제 바다에 던져졌다. 

 야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하의 튻별한 배려로 그대들의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대신, 정해진 섬에 들어가 조용히 살아야 할 것이다.) 왕씨들을 태운 배는 섬을 향해 출발했지만, 정작 섬에 다다른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잠수부들이 배의 밑창을 모두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두 아들과 함께 삼척에서 교살되었다. 전국에 영을 내려 살아남은 왕씨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 수색 작업은 몇 년 뒤까지 계속되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왕씨들은 왕(王)자가 들어가는 전(全)씨, 전(田)씨, 옥(玉)씨나 왕을 상징하는 용씨로 성을 바꾸어 자손을 이었다고 야사는 전한다. 

 

 

 

2. 새 술은 새 부대에

 태조의 리더십

 실록은 기본적으로 태조를 겸손하고 후덕한 정치가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가끔 어리버리하고 우유부단한 인상도 풍긴다. 

 의문은 태조실록의 편찬 주체를 보면 풀린다. 1408년(태종 8년) 태조가 죽고, 그 이듬해 태종은 실록의 편찬을 지시한다. 이에 편찬의 책임을 맡은 이가 하륜이다. 자연 실록은 태종과 태종이 일으킨 쿠데타를 옹호하고 반대자들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서술한다. 정도전은 간신, 역적이 되고 태조는 간신에게 휘둘린 왕으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다

 개국 초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한 일이었다. 먼저 계룡산이 새 도읍지 후보로 떠올랐다. 

 

 계룡산에 새 도읍 건설 공사를 시작한지 10개월 지났을 때였다. 하륜! 이색 학원 출신의 또 다른 수재. 1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년배 중에서 가장 발리 출셋길을 달렸다. 그러나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유배되었고 위화도 회군 뒤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추방당하기도 했다. 개국을 둘러싸고 이성계 당과 정몽주 당이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땐 전라도 순찰사로 있으면서 한 발 비겨서 있었다. 조선이 들어서고 중간파를 회유하려는 태조의 정책에 따라 경기도 관찰사를 맡게 되었는데, 하륜은 그 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 그러나 바야흐로 개국공신들의 세상! 중간 그룹이었던 하륜이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 

 하륜은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이지만 동시대의 유학자들은 경시했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음양, 의술, 천문, 지리 등... 연구가 깊어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계룡산의 땅은 산은 서북쪽에서 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갑니다. 일찍이 송나라의 대 풍수학자 호순신은 이런 곳을 일러 곧 쇠망할 땅이라 하였사옵니다. 더구나 계룡산은 나라의 중앙에 있질 않고 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어지 도읍이 될 수 있겠습니까?) 새 도읍 건설은 중지되었고, 하륜은 정도전, 권중하 등과 함께 후보지 선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뒤이어 떠오른 후보지는 무악, 지금의 신촌 일대였다. 이후 왕씨 제거의 피바람이 이는 6개월 동안 천도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1394년 8월, 왕씨 제거가 어느 정도 완료되자 태조는 다시 천도 문제를 꺼냈다. 함께 간 재상들에게 글로써 의견을 밝히게 하였는데, 모두 반대하고 하륜 홀로 찬성했다. (이만하면 궁궐 터로 좁지 않습니다. 나라의 중앙에 있고 한강을 끼고 있어 조운도 수월합니다. 옛 선현들의 비기나 중국 전문가들의 이론에 부합되는 땅이옵니다. 한때의 인심에 순응해 민폐를 덜려면 송도에 있을 것이지만,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 한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정도전의 주장은 반대론들 중에서도 가장 논리적인데다 하륜의 주장과 전면적으로 부딪치고 있다. 사전에 양자간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과 논쟁의 승자가 정도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곳은 중아에 위차하고 조운이 통하는 건 좋으나 자리가 좁아, 무거운 데서 가벼움을 맞이하는 왕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신은 음양, 술수의 학설을 배우지 않아서 평소에 배운 바에 따라 말씀 드리면... (중국의 역사에서 여러 실례를 들고는) 사람에게는 잘 다스림과 그렇지 못함이 있지만 땅에는 성하고 쇠하고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까지 수많은 나라들이 일어서고 망하고를 거듭했으나 도읍은 관중, 금릉, 낙양, 연경뿐이었음이 이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옛 도읍으론 경주, 전주, 평양, 개경이 있으나 경주와 전주, 평양은 한 곳에 치우쳐 있습니다. 새 나라가 세워졌으나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백성의 힘을 길러야 할 때입ㄴ디ㅏ.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의 말은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들은 것이며 신이 드리는 말씀도 옛 사람이 겪은 것이옵니다. 술수를 하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나이까? 깊이 헤아리소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정도전마저 천도를 반대하고 나선다. 다음 날은 현재의 경복궁 근처를 찾았다. 고려 숙종 때를 비롯하여 여러 번 천도할 목적으로 기반 공사를 했던 곳이다. 야사에선 도읍지를 정한 이를 무학대사로 전하고 있으나, 실록은 태조 자신의 선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뒷일은 일사천리였다. 곧바로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더니 설계도가 나오기 무섭게 천도를 결정지었다. 음력 10월 25일이니 계절은 이미 초겨울. 궁궐 공사가 아직 시작도 안 됐는데 새 나라 조선의 수도는 그렇듯 무모하리만큼 과감하게 옮겨왔다. 한양부 객사가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공사를 시작한지 1년이 채 못되어 종묘와 궁궐이 완성되었다.

 

 정도전이 꿈꾼 나라

 궁궐의 완공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는데, 술이 오른 태조가 정도전에 명했다. (경은 궁전의 이름을 지어 나라와 함께 영원토록 빛나게 하오.) 이에 정도전이 일어나 즉석에서 지은 이름이 바로 경복궁이다. (시경(詩經) 주아(周雅)편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렀어라. 임금이시여. 만년토록 큰 복(경복(景福))을 누리소서.’의 시구 중 ‘경복’을 따서 경복궁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이후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는데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용문루, 용무루 등이다. 

 정도전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야! 그리고... 나는 조선의 장자방!) 장자방, 즉 장량은 진시황에게 멸망한 한나라의 재상가 출신으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목표를 위해 유방을 활용한다. 천하제패에 성공한 유방은 건국의 일등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에 장량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숙청의 칼날을 피했다. 그러나 조선의 장량임을 자처했던 정도전은 물러나기는커녕 새 왕조의 건국사업 전면에 나섰다. 

 

 태조는 동조자이면서 적극적 후원자였다. 판삼사사(재정)에 임명하였고, 판의흥삼군부사(병권)에 앉혔으며 세자 교육까지 책임 지웠다. 나라의 중요한 일들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었다. 그 와중에도 당대의 누구보다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냈다. 왕명을 받들어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고, 〈문덕곡〉, 〈몽금척〉, 〈납씨곡〉 등의 악사를 지어 조선 초기 궁중음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뒷날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 《경제문감》을 지은 것도 이때였으며, 병서인 《사시수수도》와 《진도》 등을 지어 군사훈련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금의 각별한 총애나 독보적인 활약은 시기와 질시를 불렀고, 그가 추진한 정책들은 불만 세력을 양산했다.

 

 이방원과 하륜의 결합

 세자 책봉, 공신 책봉이 끝난 다음 어느 날, 왕세자와 왕자들, 개국공신들이 한데 모였었다. 혹시나 있을 분란을 사전에 막자는 맹약식이었다. 그러나 뒷날의 격돌을 생각해보면, 이날의 맹약은 마치 그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분란의 우려가 크다는 뜻이기도 하지.)

 

 조영무, 말단 졸병이었으나 힘과 무예 솜씨를 보고 태조가 픽업하여 장수로 키웠다. 조온, 태조 누이의 자식.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태조가 거두어 키웠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태조와 함께 전장을 누빈 동북면 출신 무장들이다.

 

 민제. 고려 말 권문세족 출신으론 드물게 주자학을 깊이 공부했으며, 정안군 이방원의 장인다. 그의 집엔 구세력들이 드나들었다.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와 조카들을 비롯한 종친들도 투덜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꼭 나쁜 상황만은 아닌 듯하다. (큰 형님이 세자가 되었다면 오히려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방석이가 세자가 되었다는 건 자칫하면 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만, 아직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된다.) 방원은 표나지 않게 불만 세력들과 접촉했다.

 

 어느 날 변중량이 이화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로부터 군권과 정권은 한 사람이 겸할 수 없는 것이오. 지금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군권과 정권을 다 쥐고 있으니 문제올시다.) 이 말을 전하는 방식으로 반정도전 진영의 이화가 태조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대노한 태조는 변중량 등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답했다.

 

 하륜은 정도전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힘없는 정치 유랑자 정도전이 자신의 머리를 믿고 힘을 구해 함주 막사로 찾아갔듯이. 민제와 친했던 관계로 하륜은 진작부터 방원을 잘 알았다. 

 

 

 

3. 제3의 변수, 홍무제

 명나라의 압박

 명 황제 홍무제. 황후가 낳은 황자는 모두 다섯이었다. 능력이 출중하고 개국에 공도 큰 이는 넷째인 ‘주체’였지만, 장자 상속의 명분을 좇아 첫째인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모질찌 못한 황태자를 걱정한 홍무제는 10년 전 종결난 사건(호유용 모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더니,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죄목을 붙여 최고 공신인 이선장을 비롯하여 만여 명이 넘는 공신들을 죽여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작심하고 벌인 대숙청이 끝나자 정작 황태자가 죽고 말았으니...

 

 호유용 :: 안후이성[安徽省] 출생. 태조(太祖)가 원(元)나라를 무찌르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 태조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명나라 성립 후 차차 벼슬이 높아져, 마침내 좌승상(左丞相)이 되어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는 이선장(李善長)과 결탁, 일본인 및 몽골인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탄로나 관계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자만도 3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중서성(中書省)이 폐지되고 황제의 독재체제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유용 [胡惟庸] (두산백과)

 

 황태자의 아들 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었다. 하여 다시 황태손을 위해 대숙청을 단행하니, 이때도 만 명이 넘는 신하들이 사라졌다. 

 친명사대를 내걸고 들어선 신생국 조선을 보는 시각도 의심이 많아 이성계의 새 왕조를 인정해 주었으면서도 고명(사령장)과 금인(도장)은 끝내 내주지 않았다. 

 (조선은 들어라! 국경을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꾀어 정탐하고 여진족을 유혹해 조선 땅으로 데려가는 등 네놈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는 우호를 깨뜨리고 짐을 업신여기는 행위다. 즉각 데려간 여진인들을 돌려보내라!) 정탐 행위는 서로 간에 늘 있어온 일, 특히나 약소국의 입장에서 강대국의 정황을 살피고 대비하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일이다. 여진족 문제는 국경지방의 가장 큰 불안 요인, 아마도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해 회유책을 썼던 모양이다. 조선은 나름대로 성의를 표했다. 그러나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이념이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거의 죽도록 얻어맞았다.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엔 말을 내주지 않아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조선 조정의 분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홍무제는 조선 사신의 입국을 불허하는 조치를 내렸다.

 

 뒤이어 괴상한 사건이 터졌다. 명나라 측의 주장에 의하면,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들 천여 명이 11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명나라 섬에 들어가 해적 행위를 하고 군사시설을 불태우는 등 난동을 피우다 진압되었다는 것이다. (붙잡은 자들을 심문하자 조선 왕이 지시한 일이라고 자백했다.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너희의 대답을 들어야겠으니 첫째나 둘재 왕자가 직접 와서 해명하라!) 왕자를 보내긴 해야겠는데 술 좋아하던 첫째 방우는 개국 이듬해 결국 술을 마시다 죽고 말았다. 냉혹한 권력의 생리가 싫어 술에 탐닉했으리란 해석이 많다. 둘째 방과는 황제의 물음에 조리 있게 답하기 힘들거라 생각해 방원을 보낸다. 사지로 보내는 것 같아 왕도 신하들도 미안했을 것이다. 이렇게 명나라 행으로 인해 방원은 재야의 실력자에서 현실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예상과는 달리, 홍무제는 방원을 두 번 세 번 접견하는 등 국빈으로서 최상의 예우를 했고, 한 술 더 떠 명나라의 학자들은 방원을 조선 세자라 부르며 극진히 환대한 것이다. (세자는 아님) 추궁은커녕 환대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자, 신료들은 크게 굴렁거렸으리라. 

 

 표전문 정국

 이방원은 중국 방문으로 잠시 완화되었던 조·명 간의 갈등은 이른바 표전문 문제로 인해 다시 악화되었다. (사신으로 갔던 정총이 억류돼? 황제께서 이르시길, ‘조선이 보낸 표문과 전문을 보니 경솔하기 이를 데 없고, 심지어 짐을 모욕하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당장 작성자를 잡아 보내라!’) 표문이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고, 전문은 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이다. (표문은 정탁이, 전문은 김약항이 지었사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이 중국과 다른데다 학식이 얕아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니 고의가 아님을 헤아려주소서.) ...라는 해명글과 함께 김약항만 보냈다. 정탁은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작성에 관여한 자 모두를 보내라. 특히 교정 책임자 정도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권근이 대신 가기를 주청했다. 권근! 이색학원의 막내뻘로 역시 소문난 수재. 이숭인과 절친했고 이색 계열인 관계로 고초를 많이 겪었다. 그러나 개국 후 태조의 부름에 부응해 새 왕조에 협력한다. 이리하여 하륜의 인솔 하에 권근, 정탁, 노인도가 명나라로 떠났다. (정도전은 각기병과 배가 부어오르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다 당시 교정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교정 책임자이긴 했지만 다른 일로 바빠 권근과 정총이 대신 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노인도가 보증합니다.)

 

 중 50여 명을 내전으로 불러 불공을 드리게 하고 2급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는 등 정성을 쏟았지만 현비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만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예순 두 살의 태조, 흰 삿갓에 흰 도포를 걸치고 직접 묻을 자리를 찾아 안암동으로, 행주로 돌아다녔다. 결국 결정한 곳이 취현방, 지금의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다.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존호를 신덕왕후라 정했고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흥천사를 크게 지어 자주 찾았다. 

 

 억류 7개월 여 만에 권근이 홀로 귀국했다. 홍무제는 앞서 보낸 3인 중 병든 정탁만 하륜 편에 돌려보냈고, 권근과 노인도는 이미 억류되어 있던 정총 김약항과 함께 붙잡아두었다. 그런데 권근의 경우, 말이 억류였지 실제로는 상당히 후한 대접을 받았다. 홍무제가 특별히 불러 시를 주고받기까지 할 정도였다. (권근이 학식도 풍부하고 착실하여 너희도 모두 돌려 보낼 생각이다.) 

 (그런데 어째서 같이 오질 못했소?) 하직하는 날 권근은 홍무제가 준 옷을 입었지만, 다른 셋은 현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흰 옷을 입은 것이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뒤이어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갖고 온 문서에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정도전의 측근이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방원 쪽 인물인 권근에 대한 각별한 대접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홍무제의 대조선 정책은 정도전 제거에로 맞춰져 갔다.

 

 다시 요동으로

 중국은 예를 갖춰 섬기고!(사대) 다른 주변국들과는 우호관계를!(교린)

 

 조선 초기 :: 사대란 큰 나라를 섬겨 우리의 독자적 생존과 평화를 보장 받는 것! 약소국의 생존 철학이지.

 조선 중기 :: 사대란 중화의 나라 명을 정성으로 받드는 것!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같고 어쩌면 무조건적인 신앙과 같은 거라네.

 

 홍무제와 대척점에 있는 정도전이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제안했다. 실록엔 홍무제의 위협에 겁을 먹은 정도전이 제 한몸 살아보려 벌인 일로 기록하고 있다. (태조 실록 편집 책임자 - 하륜) 진실에 좀더 가까이 가려면 홍무젠느 왜 그리 남의 나라 재상인 정도전을 제거하려 했으며, 정도전의 무엇이 그토록 홍무제를 화나게 하고 의심하게 만든 건지에 대한 의문부터 던져야 하지 않을까.

 정도전이 역점을 두어 추진했던 정책을 보면 힌트가 보인다.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어 힘을 쏟았던 병권집중 사업. 이를 위한 방편으로 다그친 것이 이른바 진법훈련이다. 직접 그린 진도에 따른 훈련을 통해 각 병사들마다 서로 다른 신호를 통합하여 단일 군대로서의 지휘체계를 마련해 나갔다. 태조 또한 병권집중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 후원하였다. 그 자신이 사병의 힘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사병의 위험성을 잘 알았던 것. 그 결과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런 조선의 움직임, 정도전의 움직임을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 게 아닐까?

 

 정도전은 개국 초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산해위를 지나며 한마디를 던진다. ((명과의 관계가) 잘 되어 간다. 만일 잘 안 풀리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해주지)

 (조선이 요동을 치면 인근의 여진이 들썩거릴 테고, 무엇보다 북원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좌정승 조준! 조준과 정도전은 개국 과정에 태조의 왼팔이요, 오른팔이었다. 같은 1등공신이었지만 공신 서열은 조준이 더 상위였고 벼슬 또한 조준은 정도전과 동급이거나 한 등급 위였다. 태조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변방 출신인 자신을 따라준 조준이 고마웠고 그의 재주 도한 높이 샀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믿고 독주하다시피 하는 정도전을 질투하게 된 걸까?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홍무제의 요구에 어제의 단짝 동지를 사지로 내몰 것을 주장하였으니... 그 일로 이미 둘 사이는 틀어진 뒤였다. 조준은 태조를 찾아 요동정벌에 강력히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우정승 김사형도 반대했다.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태조는 위축되었다. 그런데 억류되었던 정총, 김약항, 노인도 등이 결국 홍무제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태조의 마음은 다시 요동정벌 쪽으로 기울었다. 

 

 잠저(潛邸) :: 나라를 처음으로 이룩한 임금이나 또는 종실(宗室)에서 들어와 된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이나 또는 그 동안에 살던 집을 이르는 말 용잠(龍潛) 잠룡(潛龍).

 

 태조와 정도전의 우정

 1398년 초봄. 도전은 동북면 도순무사의 역할을 부여받고 떠나 있었다. 삼사 판사의 자리도 판의흥삼군부사의 지위도 다 내놓아 사실상 백의종군한 상태였다. (예전에 충숙왕이 자신을 거사라 일컬으며 아끼던 신하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인도 봉화백(정도전)에게 거사란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고 싶어. 호는 잠저시절의 헌호인 송헌으로) 

 

 봉화백!

 헤어진 지 오래 되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신중추를 보내 노고를 위로하려 하던 차에 최긍이 와서 안부를 듣게 되니 적잖아 위로가 되었소.

 찬바람이나 막게 옷 한 가지를 보내니 받아주오. 이 참찬과 이 절제사에게도 옷 한 가지씩 보내오.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알려주오. 

 나머지 이야기는 신중추에게서 듣도록 하오. 

 이른 봄추위에 몸조심하고 변경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소.

 더 적지 않겠소.

 - 송헌 거사

 

 한 장의 편지에서 전하의 극진한 가르침을 받았고 옷은 대궐에서 내리셨어도 신의 몸에 꼭 맞았습니다.

 술도 두 항아리나 내려주시어 감사함과 부끄러움으로 말을 하자니 눈물이 따라 흐릅니다.

 신은 본래 우매하고 배운 게 부족해 움찍(?)만 하면 비방이 사방에서 일어나 목숨을 보존하기도 어려웠는데, 전하의 보살핌 덕에 목숨을 이어가고 있나이다.

 임금이 되시기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힘을 다해 자그마한 충성이라도 바쳐보려 했건만 재주가 모자라고 배움이 부족해 털 끝 만한 도움도 드리지 못해 부끄러울 다름입니다... (하략)

 - 정도전

 

 실제로 도전은 그렇게 비방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부정축재 따위로 지탄을 받은 적은 없었다. 

 

 

 

4. 왕자의 난

 광화문 ::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 거리가 1차 왕자의 난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위기는 기회

 1398년 윤 5월 10일, 홍무제가 죽었다. 그러나 조선에 소식이 전해진 건 10월이 되어서였고, 6월, 7월, 8월, 조선은 내내 전시동원 체제가 이어졌다. 태조와 정도전 측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병권집중의 마지막 단계에 나섰다. (왕자, 종친,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병을 해산하고 관군에 편입시킨다.) 이방원 진영으로선 결정타를 맞은 셈인데, 요동정벌 분위기에 밀려 저항할 수도 없었다. 이때 방원의 나이 서른둘. 세자는 어느새 자라 나이 열여섯, 얼마 전엔 아들도 낳았다. 

 정몽주를 제거할 때 보았듯이 방원은 명분에 얽매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필요하면 행동한다. 명분이란 행동하고 난 뒤 적당히 만들 수 있지만, 행동은 때를 놓치면 어려운 법!) 

 

 기록과 진실

 실록은 왕자의 난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도전 남은 등이 임금의 병을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인 다음, 궁궐 노비, 갑사 등을 동원하여 공격하고 자신들도 밖에서 응하기로 계획하였다... 계속 기록을 따라가 보자. 1398년 8월 26일. 방원은 방의, 방간, 이화, 이제 등과 근정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있었다. 비슷한 시각, 아우 민무질과 밀담을 나누고 있던 방원의 부인 민씨는 얘기를 마치자 종을 불러 대궐로 가서 이방원을 불러오게 한다. (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여라.) 집으로 와서 부인, 처남과 밀담을 나눈 방원은, 결심을 굳히고 다시 대궐로 갔다. 

 

 (전하께오서 피병(避病)하고자 하니, 왕자들과 종친들께선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이화, 이제 등은 들어갔으나 방원은 형들을 붙들었다. (궁문 앞에 불이 켜져 있질 않습니다.) 궁문에 불이 꺼져 있다는 게 쿠데타의 직접 명분이 된 셈이다. 셋째 형 방의와 넷째 형 방건은 말이 없어 넘어져가며 방원을 뒤따랐다. 가다 말고 방번에게도 알렸다. 동생에게 세자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던 방번. 방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방원의 쿠데타를 안에 알리지도 않았다. 방원의 집 앞엔 이날의 주역들이 이미 보여 있었다. (이숙번, 이거이 부자,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형제) 실록에 기록된 총 병력 규모는 40여 명, 시간이 지나며 합세한 인원을 합해도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병 해체의 와중에 방원의 부인 민씨가 몰래 숨겨두었던 무기로 무장시켰는데, 그나마 충분치 않아 창을꺾어 둘로 나누어 가졌고 10여 명은 그것조차 없어 막대기를 쥐었다 한다.

 세자 방석! 수하를 시켜 광화문에 올라 반란군의 군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남산까지 군대가 꽉 들어차 있다는 말에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실록은 귀신이 도왔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실은 진실의 일단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동원된 군대는 최소 수백 명 이상이라는 것!

 

 피병(避病) :: 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일

 

 광화문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난 쿠데타군은 남은의 첩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일부 병력만 움직였을 것이다.) 노비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고 도전과 남은 등은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다. 왕자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하고선 한가롭게 모여서 호위무사도 없이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니... 심효생, 장지화 등은 뛰쳐나오다 현장에서 피살되고, 정도전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돼 있다. 도전에겐 아들이 넷 있었는데 두 아들은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다 거리에서 죽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결하였다. 적의 수뇌인 정도전을 살해한 방원은 조준, 김사형을 불렀다. 조준 등 재상들이 반대편에 서지 못하도록 붙잡아두고는 궁궐 수비를 책임진 조온과 박위를 불렀다. 동북면 출신 조온은 이미 방원 쪽 사람, 방원의 뜻을 좇아 휘하의 수비대를 무장 해제시켜버리고, 왕씨 대학살을 몰고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박위, 그는 쿠데타군의 군세도 살필 겸 나왔다가 살해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임금에게 청해 방원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아니되오.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려면 적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안군 형님을 모셔오세요. 그... 그래. 내가 맡아 처리해야겠구나.) 알쏭달쏭한 대답과 함께 영안군 방과가 승낙했다.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을 꾀해 왕자와 종친들을 해치려다 발각되었다. 공이 비록 크지만 죄를 가리지 못해 모두 주륙되었다. 억지로 그들을 따른 무리는 죄를 묻지 말라. 

 

 숱한 의문점들과 사관들이 재치 있게 끼워놓은 여러 단서들, 그리고 현대 사가들의 연구 성과가 있어 우리는 이날의 진실에 좀 더 가가이 갈 수 있다.

 하륜은 20여 일 전 관찰사가 되어 충청도로 떠났다. 그를 위험시한 정도전 진영이 취한 조치였다. 그러나 하륜은 과연 만만치 않았다. 다음은 야사의 기록. 하륜은 환송연에서 실수를 가장하여 방원에게 술상을 엎어버리고는, 사과를 핑계로 뒤따라가 단둘이 만났다. 안산 군수 이숙번을 방원에게 소개한 것도 하륜이다. 태조의 때맞춘 병환은 이들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숙번 휘하의 정규군에 쿠데타 주역들의 가노(家奴)들과 미해체 사병들이 주력이 되었다. 부인 민씨가 배아프다는 핑계로 방원을 부른 것은 정도전 등이 무방비 상태로 술을 마시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병한 쿠데타군은 가장 먼저 적의 수뇌들을 제거하고 재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합법적 지휘체계를 장악한 뒤, 궁궐 수비를 무력화시켰고 마지막으로 세자를 교체한다.

 

 길고 긴 하룻밤

 실록은 도전이 매우 비굴하게 최후를 맞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와는 많이 다른, 다음과 같은 장면도 바로 뒤에 실어놓았다. (내가 이쪽을 배반하고 저 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목 베이기 직전에 읊었다는 시 한 수는 더욱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자조(自嘲)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하여 살면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거스르지 않았다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일

 송현방 정자 한잔 술에

 그만 헛일이 되었구나.

 

 향년 57세. 죽은 뒤 정도전은 쿠데타 세력의 필요에 의해 철저히 폄하되었다. (태조를 표적으로 삼을 수는 없으니.) 정도전이 어린 세자를 끼고 임금에게 아첨하며 전횡을 일삼다가 마침내 왕자들마저 제거하려 하였으므로!! 500년 내내 그랬다. 반면 정도전의 옛 벗이자 정적이었던 종몽주는 태종 이방원의 필요와 뒷날 사림세력의 집권으로 (사람은 정몽주, 길재의 후학들이다!) 인해 높이 받들어졌다. 조선 말 대원군에 의해 정도전은 마침내 신원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탁월한 혁명가로,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개혁 정치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남은은 다혈질의 행동주의자. 위화도 회군 때 참모로 활약했고, 열렬히 역성혁명을 주창하였으며 줄곧 태조, 정도전과 행보를 함께 해왔다. 용케 도망쳐 성 밖으로 나왔는데 자진출두를 결심한다. 뒷날 태종이... (아! 남은이 살아 있다면 좋았을걸. 남은이 보고 싶어,)라고 말했듯이 실제 그는 강경한 행동주의자로 살아왔으면서도 적이 별로 없었다. 향년 45세였다.

 

 조준, 질투심으로 정도전에 등을 돌렸던 그는 그 와중에 점쟁이를 불러 어느 쪽이 이길지를 점치라 했다나 어쨌다나. 일굴의 정승이자 군 최고 사령관의 몸으로 쿠데타군의 대장일 뿐 군주도 세자도 아닌 이방원의 말발굽 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이후 그는 죽는 날가지 여러 번 정승을 하며 부귀와 공명을 누렸지만 이전처럼 실권을 가져보지는 못했다. 

 

 남재는 남은의 형, 동생과 달리 이방원과 가까워서 살아남았다.

 

 이무,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갈 적에 정도전은 직접 《감사요약》을 지어 선물했을 정도로 이무를 아꼈다. 늘 같이 어울렸고 그날의 술자리도 함께 있었는데 방원은 이무를 살려주었다. 그가 이미 이방원 맨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그는 정도전 측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방원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

 

 어머니인 죽은 현비의 욕심으로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어,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울며불며 붙잡는 세자빈을 뒤로 하고 폐세자 되어 궁성을 나섰는데, 이거이 등이 도당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죽여버렸다. 뒤이어 한 살 위의 형 방번도 궁문을 나섰다. 자신을 제치고 세자가 된 동생에 대한 시기심에 눈이 멀었던 그도, 결국 동생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흥안군 이제, 태조의 사위. 그러니까 현비가 낳은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개국 과정에 공이 컸고 태조가 친자식 못지않게 아꼈고 개국 후엔 처남인 세자 쪽, 즉 정도전 진영의 일원이었다. 한 집안끼리의 피흘림은 피하고 싶은 태조의 반대와 이방원 사람인 이화의 교란으로 무력 대응은 접어야 했다. 상황이 종료된 후 집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군사들이 뒤따라와 죽였다.

 

 

 

5. 임시 군주 정종

 근정전 :: 경복궁의 정전으로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하던 곳이다. 이방원은 1,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드디어 이곳에서 왕으로 즉위한다.

 

 무욕의 처세

 난이 있고 나서 여드레 만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는다. 권력의 비정함에 환멸을 느낀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이방원 세력의 압박에 따른 것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상왕이 되어서도 호위란 명목으로 상당 기간 철저히 감시당해야 했다. 

 

 조선의 2대 왕이 된 영안군 방과, 즉 정종은 태조의 둘째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 난이 있던 날 밤엔 부왕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정도전 측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오긴 했지만, 아우 방원처럼 생사를 걸고 싸울 의사도,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어느 쪽에도 휘말리기 싫었던 그는 성 밖 김인귀라는 자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세자가 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정종은 나라의 중대사를 방원과 대신들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틈만 나면 사냥이나 격구를 즐겼다. 대간들이 문제 삼으면 (과인은 무인으로 자라서 오래 들어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고 병이 생기오. 격구라도 해야 건강관리가 되지 않겠소?) ...라고 변명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잦은 격구놀이는 아우인 방원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실권자 이방원

 방원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도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형인 정종을 내세웠을까? 

 우선 쿠데타시 내세운 명분 때문이었다. (적장자를 제쳐놓고 서자를 세자로 삼은 건 잘못이다!) 사실 방석과 방번은 서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인 현비 강씨가 태조의 정식 왕비였지 않은가? 또한 이 시대만 해도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한다. 마땅한 명분이 없었던 방원은 계모인 현비 신덕왕후를 아버지의 첩으로, 그 아들들은 서자로 단정 짓고는 반란의 근거로 내세웠던 것이다. 

 두 번째로, 아버지의 분노를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사병을 가진 형제들과 종친들의 존재도 형을 대신 내세워야 했던 이유였다.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정종은 비록 아들이 많지만 모두 ‘서자’일 뿐이고. 정실부인인 정안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는 아직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혼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기진 않겠지?)

 

 심복인 이숙번을 왕의 비서관인 우부승지에 앉힌 것도 의도가 엿보이는 행동이다. 다시 문란해진 사병도 정리하였는데, (방원, 방의, 방간, 이거이, 이저, 조영무, 조온, 이천우를 제외한 종친과 공신들은 사병을 거느릴 수 없도록 해라.) 형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방원 측근들이다.

 

 2차 왕자의 난

 정종이 즉위한 직후 어전 뜰에서 남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안군을 당장 세자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정종은 왕이 된지 1년이 넘게 지나도록 세자의 ‘세’자도 꺼내지 않았다. 욕심보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자로 삼으면 왕위를 넘겨 달라고 할 텐데. 넘겨주고 물러났다가 공양왕 꼴이 될 수도 있잖아.) 방원 쪽에게도 딜레마가 있었다. (무슨 명분으로? 위로 두 분 형님이 계신 걸 모르고 하는 소린가?) 3남 방의, 4남 방간. 순서로 따지면 그들이 우선이다. 웬걸! 바로 위 형 방간은 은근히 자신이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는 눈치.

 

 이럴 즈음 방원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줄 사건이 터진다. 박포! 방원의 부관 출신으로 오랫동안 충성을 다했으며, 1차 왕자의 난 때도 공을 세웠다. 헌데... 공신 책봉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곤 한다. 별반 기여가 없는 조준이 1등공신에 책봉된 반면, 가장 공이 컸던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이 모두 2등공신에 책봉된 것도 그런 경우다. 이런 사정에 대한 고려도 없이 박포가 불평하고 다니자 화가 난 방원은 그를 귀양보내 버린다. 

 유배에서 풀려난 박포는 방간 쪽에 접근했다. 결심을 굳힌 방간은 세력 확대에 나섰다. 처의 양아버지인 내시 강인부가 눈물로 말렸고, 처조카 이래도 극력 반대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래는 우현보의 문생, 우현보의 집으로 가서 말했고, 고려 말 구세력의 리더 우현보는 아들을 시켜 방원에게 방간의 계획을 알렸다.

 1400년 1월 29일 산군부에서 공·후들로 하여 제사에 쓸 날짐승을 사냥하도록 했는데 방간은 이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합법적으로 군대를 모을 수 있거든.) 이래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뒤, 하륜 등과 함께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그래 놓고선 새삼스러 형제끼리 싸울 수 없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방간은 정종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고 태상전을 지나면서 아버지 태조에게도 알렸다. (도승지는 얼른 가서 나의 뜻을 전해라. 지금이라도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대궐로 들어오면 과인이 책임지고 살려준다고. 네놈이 방원이랑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이 소같이 미련한 놈아!) 

 

 이지란, 이화, 조영무, 이숙번, 이천우 등이 사전 계획에 따라 포위망을 좁혀 왔다. 방원 또 예의 그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형님을 보거든 활을 쏘지 마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연기만은 아닐세. 진짜로 형을 죽일 마음이 없단 말야. 그랬다간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홀로 도망갔던 방간이 붙잡혀 왔다. (네 죄는 용서될 수가 없다. 허나 형제의 정으로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고 지방에 가서 살도록 해라.) 방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정종과 방원, 그리고 태조까지 한 마음으로 살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방간을 대신하여 죽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박포가 잡혀와 충동질한 것을 자백하고 주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당일 박포는 집에 있었다.) 아무렴 방간이 단지 박포의 세치 혀에 놀아나서 군사를 일으켰을까? 적어도 그의 충동질이 통할만한 낌새나 그럴싸한 소문이 나돌았을 것이다.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 누가? 왜 그런 소문을? - 방원이?) 

 

 3남인 익안대군 방의는 정치와는 일정거리를 두고 지내 왔다. 술자리에서 시국 얘기가 나오면 아예 입을 봉해 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건 당시 그는 병 중이었는데, 즉시 절제사 도장과 군인 명부를 삼군부에 바쳐 관련이 없음을 증거했다.

 

 방원, 드디어 왕이 되다

 이방원 세력은 다음 날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정말 딴 마음이 있는 걸로 오해하겠지?) 한 발 더 나아가 정종은 군 통수권을 완전히 넘겨주어 그 어떤 욕심도, 미련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내용상으론 세제가 맞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이제 나는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노라.) ... 하여 더 이상 재론되지 않았다. 

 

 방원은 자신의 등극을 위한 마지막 마무리 공사에 들어간다. 사병 문제다. 아버지로 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고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할 수 있게 해준 힘, 사병! 대사헌 권근 등이 글을 올렸다. 사병을 보유한 절제사들은 모두가 1, 2차 왕자의 난에 공이 컸던 이들, 그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고, 군인 명부를 숨기거나 사병을 빼돌리기도 했다. 심지어 조영무는 무기를 수거하러 온 수령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이천우, 조온은 파직되었고 조영무, 이거의, 이저 등은 지방으로 좌천되어 떠났다. 세자 이방원의 강경한 태도 앞에 누구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고려 말 이래 정국의 불안 요인이었던 사병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그 해 겨울, 정종은 마침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즉위 2년 2개월 만이었다. 아버지 태조에게 효성스러웠고,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부인 정안왕후와 끝까지 금슬이 좋았다. 상왕으로 물러나 취미인 격구를 맘껏 즐기며 20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죽고 나서는 서운한 대접을 받았다. 묘호를 받지 못해 오랫동안 공정왕으로 불려야 했다. 묘호란 신주가 종묘에 들어간 후 그 신주를 일컫는 이름이다. 왕의 이름은 묘호를 맨 앞에, 그 뒤로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후대 왕이 올린 존호, 신하들이 올린 시호 등이 따라 붙는다. 

 

 태조(묘호)강헌(명나라가 내린 시호)지인계운(정종이 올린 존호)성문신무(신하들이 올린 시호)정의광덕(뒤에 숙종이 올린 존호)대왕

 (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高大王)

 

 정종은 묘호는 물론 존호도 시호도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왕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줄곧 명에서 내린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정종이란 묘호를 얻게 된 것은 260년이 지난 숙종 때에 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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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후기

 어느 시대에서든 역시 과욕은 금물, 순리를 따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