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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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박시백의 대하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 제4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원전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각 권마다 20여 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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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금 위의 임금
헌릉 :: 대모산 자락에 자리한 헌릉.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묻혀 있다.
이중권력
급작스레 보위에 오른 스물두 살의 젊은 임금 세종은 두려웠다. 준비 없이 나라를 맡게 되어서가 아니라,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버지 태종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춘추 쉰둘이니, 아직은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때이건만. (개국 이래 세 임금이 모두 상왕이 되셨네 그려. 본래 군왕이란 눈을 감는 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임기를 다하는 법인데.) 정종은 이때까지 생존해 있어서 태종과 구분하여 노상왕이라 불렀다.
(내 비록 물러나지만, 주상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군사와 관련한 일은 내가 직접 챙길 것이고, 그 밖에도 나라의 중요한 의논에는 참여하여 주상을 도울 것이오.) 이때의 병조판서는 박습, 병조참판은 강상인이었는데, 강상인이 실세였다. 병조 일을 오래 해온데다가 태종을 대군 시절부터 따라다니며 모시, 말하자면 태종의 가신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강상인은 태종을 제쳐놓고 세종에게 보고하곤 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요사이 새로 만든 상아패랑 오매패는 무엇에 쓰는 게냐? 대신들을 부르는 데 쓰는 것이옵니다. 그럼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구나. 주상전에 갖다 드리거라.(태종) 여기에 둘 수 없는 물건이군요. 상왕전에 갖다 드리도록 하세요.(세종) 강상인을 당장 하옥하고 고문을 가해서라도 그놈과 더불어 의논한 자들을 낱낱이 밝히도록 하라!)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은 지 불과 보름만의 일로, 상왕인 태종의 힘을 새삼 일깨워준 사건이다. 조사가 끝나 강상인은 함길도에 관노로 보내지고 박습은 경상도로 유배된다.
계속되는 왕비가의 수난
세종이 즉위하고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이번에 중국으로 갈 사은사는 내가 보위를 물려준 사실을 설명해야 하니, 임무가 실로 막중하다. 사은사론 무릇 친척을 보내는 것이 상례이니 심온을 보내는 게 좋겠다!)
심온, 세종의 장인으로 심덕부의 다섯째아들이다. 심덕부는 태조와 위화도 회군을 함께했고 개국 후엔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 아들들도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으니 그의 집안은 실로 당대의 명문가라 하겠다. 심온은 그렇게 좋은 가문에 대군(세종)의 장인이라는 배경, 그리고 그 자신의 능력까지 인정받아 40대 초에 이미 이조판서의 지위에 올랐다. 태종이 또 명하기를, (심온은 주상의 장인이니 영의정에 앉혀라.) 외척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계심을 보여 온 태종이 아니었던가? (마흔넷에 영의정을! 우의정도 좌의정도 다 건너뛰고)
그렇게 심온이 임금의 장인이자 영의정 신분으로 중국을 향해 떠났는데... (강상인이 나를 제쳐놓고 주상에게 직접 보고한 일은 뒷날을 생각하여 미리 아첨을 한 것이다. 다시 불러다 국문하여 자세히 밝히도록 하라!) 사건이 종료된 지 두어 달이 지나서 태종은 느닷없이 강상인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냈다. 심온이 떠난 지 한 달 가까이 흐른 때였다.
전보다 더 강도 높은 조사가 시작되었다. 행여 불똥이 튈세라 세종도 거둔다. 네 차례나 압슬형이 가해지고 나서 마침내 강상인은 취조자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나라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박습과 의논했습니다. 이조 참판 이관도 동의했습니다. 동지총제 심정도 그랬습니다. 영의정 심온도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자 ‘옳다’고 했습니다.)
40대 중반에 이미 정승의 지위에 오른 마흔아홉 살 좌의정 박은! 그는 진작부터 심온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태종은 그의 주장을 수용하는 형식을 빌려 관련자 전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곧바로 집행해버린다. ‘거열’형이란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형벌. 강상인은 처형 직전 이렇게 절규했다. (나는 죄가 없는데 매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
고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한 달 뒤 심온은 압록강을 건너 귀국했고 즉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공의 지위나 권세로 미루어 오늘 국문하는 형세를 보면 짐작이 갈 텐데, 끝내 승복하지 않고 배겨내겠소?) 수사를 맡은 이는 전 영의정 유정현. 하루도 안 되는 사이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세 차례나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승복하지 않았던 심온이 유정현의 그 한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약을 받았다. 울음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을 왕비 소헌왕후 심씨. 유정현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어머니와 자매들은 관노로 전락하고, 심온 제거에 앞장섰던 박은 등은 왕비를 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야사에선 심온이 사약을 받아들고 이렇게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 박씨 집안과는 절대로 혼인하지 말아라!) 박은이 심온 제거에 앞장선 이유가 라이벌 의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상왕 태종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를 태조의 첩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따라 그녀의 무덤도 능에서 묘로 강등되었다. 지금의 정릉 자리에 이장하면서 봉분이 낮아졌고 (오늘날 정릉은 200여 년이 지난 현종 때 다시 왕비의 능으로 복원된 것) 석물들은 옮겨져 광통교 공사에 쓰였다.
능(陵) :: 왕, 왕비의 무덤
원(園) :: 세자, 세자빈, 왕의 부모 등의 무덤
묘(墓) :: 대군, 빈, 공주 등
대마도 정벌
세종은 자기 목소리를 죽이고 철저히 몸을 낮춰 모든 것을 상왕의 뜻에 따랐다. 신하들과 의논 끝에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한결같은 한 마디! (잘 알겠소. 아바마마와 의논하여 결정하겠소.) 대신들과 만나 정사를 의논하거나 대간들의 잔소리를 듣거나 하는 것은 모두 세종에게 맡겼고, 자신은 세종과 만나 여러 의견을 듣고 결정만 내려주면 되었다.
그런데 상왕 시절 태종이 직접 나서서 기획·추진하고 마무리한 일이 있었으니, 유명한 대마도 정벌이 그것이다. 1419년 5월,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정박 중인 병선을 불사른 다음, 상륙해서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들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며칠 뒤 황해도 해주 연평곶으로 몰려왔다. (중국으로 작업하러 가는 길인데 식량이 떨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은 할 수 없이 쌀을 보냈으나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식량을 갖고 온 인부들을 억류하는 등 행패가 극심했다.
보고 받은 세종. 태종의 염려대로 군사 분야에선 미숙함을 드러내 보였다. (병선이 있어도 방어가 안 되니 병선은 포기하고 육지만 지키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태종은 달랐다. (적들이 허술한 틈을 타서 본거지를 친 다음 거제도로 돌아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적도 친다.) 정보 누설과 교란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각 도에 있는 왜인들을 억류조치하고 대마도 정벌에 관한 포고령을 내렸다. 병선 227척, 군사 1만7285명을 3군으로 나누어 이종무를 3군 도체찰사로 삼았다. 선발대가 접근하자 대마도의 왜인들은 길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 줄 알고 환영하러 뛰어나왔다가 혼비백산하여 산 속으로 도주했다. 2000여 민가도 불살랐다. 저항하는 왜인들 114명을 죽이고 손쉽게 포구를 점령했다. 포로로 잡혀와 있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대거 구출했다. 급히 도주하느라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대마도인들, 그에 비해 해안을 장악한 조선군은 두 달치 식량을 준비해두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산 속 지형을 모르는데 섣불리 들어갔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어. 각 군에 소속된 3개 부대 중 1개 부대씩만 작전에 투입된다.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토벌대를 구성한다.) 그렇게 선발된 토벌대였으니 사기가 솟을 리 있을까? 갑자기 나타난 복병의 격렬한 공격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줄행랑을 쳐야 했다. 기세등등한 왜인들은 포구까지 쫓아와 도망치기에 바쁜 조선군을 죽이는데, 남아 있던 부대들은 거의가 배 위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나?! 이때 죽은 조선군은 모두 180여 명. 65일치 식량을 준비하고 떠난 정벌군은 보름 만에 철군하고 말았다. 이종무 등 출전 장수들은 특진의 기쁨을 누렸고 상왕과 왕이 직접 잔치를 열어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패전의 정황이 알려졌고 이로써 분위기가 일변했다. 대마도 정벌은 장수들의 공이기 이전에 태종 자신의 위업이다. (그런데 벌 줘버리면 뭐가 되겠어? 상을 줬다가 하옥시킨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냐? 더구나 그들은 승리도 거두었으니 더 이상 논하지 말라.) 결국 이종무는 유배되었다. 단, 대마도에서의 작전 잘못이 아닌 다른 시시한 일을 이유로. 토벌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정벌의 효과는 컸다. 태종은 여차하면 언제든지 재정벌에 나설 것이란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침 중국으로 갔던 왜구들도 중국 측에 의해 궤멸되다시피 하여 이후 100여 년 가까이 조선과 중국의 해안가는 모처럼 왜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모두 다 이루었으나
세종 2년(1420) 7월,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떴다. 소문날 만큼 성질이 드센 그녀였지만 남편의 냉혹함을 몇 차례 확인하고 나서는 조용히 숨죽여 지냈다.
(최복을 13일 째에 벗으라뇨?) 최복은 거친 베로 짠 상복으로 참최복과 자(재)최복이 있다.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24개월을 입는데 아버지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 상을 당하면 3년을 채우지 않는다. (옛 제도에 따른 것이옵니다. 전하께오선 12개월 동안 입어야 하나 한 달을 하루로 바꾸어 계산하는 ‘역월지제’에 따라 12일 간 입으시면 되옵니다. 상왕 전하의 뜻이옵니다. 3년 상을 다 청하진 못하니 산릉을 마친 후엔 벗을 것입니다.) 세종이 태종의 뜻을 거역한 유일한 사례다. 비록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능 곁에 절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에 없이 완강하게 자기주장을 폈다. 상왕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던 세종으로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대비가 죽은 이듬해, 세종은 대신들과 의논을 거쳐 태종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렸다. 태종은 동서남북 각 방면에 100여 칸 내외의 별장을 짓고(풍양궁, 낙천정, 연희궁, 연화방) 며칠은 이 궁, 다시 며칠은 저 궁 하는 식으로 옮겨 다니며 마음껏 취미생활을 즐겼다. 대비가 죽고 2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5월, 태종 역시 그녀와 같은 쉰여섯의 나이로 연화방 별장에서 눈을 감고 만다.
2. 태평성대를 꿈꾸며
옛 집현전 건물인 경복궁 수정전
새 임금 길들이기
(상 중에 황공하오나 임금이자 어버이이신 태상왕 전하께 죄 지은 양녕이 아직도 궁중에 있으니 실로 옳지 못합니다. 속히 내보내시어 출입을 끊도록 하소서.) 사헌부를 시작으로 사건원, 6조, 의정부가 연이어 글을 올리고 말씀을 올린다. (대비마마의 초상 대에도 졸곡을 보고 돌아갔어요. 졸곡이 끝난 다음 보낼 테니 그리 아세요.)
졸곡(卒哭) :: 이날의 제사를 기해 무시로 하던 곡(哭)을 아침, 저녁 상식(上食) 때에만 한다.
양녕의 폐세자되어 쫓겨난 이듬해 초의 일이다. 양녕은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서 돌연 사라져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양녕의 유모와 김한로의 첩 등은 양녕의 연인 어리를 찾아간다. 억울해서였을까? 자책 때문이었을까? 수모를 당한 그날로 목을 매어버렸다. 사라진 양녕은 아차산을 올랐다가 고작 그 이튿날 대궐의 종인 이견의 집에 나타난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게냐? 똑똑히 듣거라. 네가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고 나와 대비는 눈물을 흘렸고 주상 또한 눈물 흘리며 침식을 끊었느니라. 그러나 명심하여라. 내가 눈물을 흘린 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리의 자살 소식까지 담담한 얼굴로 듣고 난 양녕, 방으로 물러나 유유히 비파를 탔다 한다.
이때 태종은 대신과 대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일렀다. (아직도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저 모양이니, 내 부끄러워 경들에게 할 말이 없소. 앞으로 양녕을 의정부에서 회부하든 6조에서 다루든 나는 관여하지 않겠소!)
한 달여의 실랑이 끝에 양녕은 결국 이천으로 돌려보내졌다. 졸곡을 한참 남겨둔 때였으니, 세종의 판정패라 하겠다. 그런데 이천으로 돌아온 양녕은 세종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연달아 사건을 일으킨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무리지어 사냥을 다녀 세인들의 빈축을 샀는가 하면 집수리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는 술을 지나치게 먹여 사람을 죽게 한 일도 있었고, 남의 개를 훔치기도 했다.
사람이 죽은 일을 조사하려 하자 글을 올려 항의하기를! (이러시면 신과 전하의 사이가 멀어질 것이옵니다.) 개를 훔친 일에 대해선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이 어지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라고 강변했는데 거짓말이었다. 또다시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결국 양녕을 경기 밖인 청주로 내보낸다. 보내놓고는 못내 미안했는지 갖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홀로 서는 세종
세종에게는 사실 신하들을 일거에 장악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다. 그 카드란 바로 ‘심온 사건 재조사’였다. 세종은 장인의 억울함을 모르지 않았다. 핵심실세들이 제거된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조정이 태종의 신하들에서 세종의 신하들로 대거 물갈이될 것이다. 간신을 솎아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길이다. (자식으로서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럴 수야 없지.)
심온 제거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은 박은과 유정현. 절묘하게도 박은은 태종보다 하루 먼저 세상을 떴다. 살아남은 유정현. 심온을 직접 심문하고 심온의 처, 즉 임금의 장모와 일가의 여자들을 관비로 만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세종은 벼슬을 내리고 나라의 중대사에는 꼭 불러 의견을 구했다. 심온 제거에 앞장섰던 다른 이들도 누구 하나 그 일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니, 그들 속에서 새 임금 세종에 대한 충성심이 자라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유정현은 태종이 죽은 뒤에도 3년을 더 살았다.
그가 죽자마자 좌의정 이직과 우의정 황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 올리기를, (공비마마께오선 국모이신데 어머니 안씨가 노비 명부에 올라 있으니 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명부에서 삭제하고 직첩도 돌려주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그나마도 행여 태종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란 오해를 살까 봐 대언(승지)들을 불러 설명하기를, (선왕께선 본래 관비로 삼은 일을 옳지 않다고 여기셨어요. 헌데 유정현이 워낙 강력히 청하는 지라 마지 못해 응하셨던 것이오. 그런데 선왕께서 갑자기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미쳐하지 못하셨던 것뿐이오.)
하지만 심온의 억울함은 끝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심온의 사면은 다음 대인 문종 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종친들 중심의 잔치 때나 사냥을 겸한 정기 무예훈련인 강무 때엔 종종 양녕을 불렀고,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여지없이 들고 일어났다. (형님의 행동에 문제는 있지만 종사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초기엔 설명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형이 죄가 없는데 내가 왜 만나지 않겠느냐? 경들은 오히려 대면하지 않는 것을 잘못으로 생각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이러는가?, 세종 12년 10월) (또 똑같은 소리, 아예 목판으로 찍어두고서 때마다 올리는 것 아니냐?! 양녕의 일은 더 이상 간하지 못하게 하라!!, 세종 15년 12월) (양녕은 본디 모반한 죄가 없고 형제간에도 시기한 적이 없소. 오랫동안 외방에 쫓겨나 있어 종친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내 마음에 늘 미안했소.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그만 서울로 살도록 하고 우애의 정도 자주 나누도록 하겠노라!, 세종 20년 1월) 하여 20년 만에 양녕은 서울로 돌아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종실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명한 일화 한 토막, 효령이 재를 올리기 위해 회암사에 머물러 있을 당시 사냥을 마친 양녕이 들어왔다. 사냥해서 잡은 고기들을 절간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본 효령이 말한다. (신성한 산사에서 이 무슨 짓입니까? 형님은 정녕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님이고 죽어서는 불자의 형님인데 지옥이 두려울 리 있겠느냐?)
양녕은 세종보다 더 오래 살았다. 이는 세종의 너그러움 덕이겠지만 양녕 자신의 처신 덕이기도 하다. 만일 그가 조용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백성들 속에서 동정론이 일었을 테고 그럴 경우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었으리.
세종의 철학
태종 생존시에 이미 세종은 자기 시대를 끌고 나갈 쌍두마차를 마련했으니, 집현전과 황희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던 기관으로 유명무실한 상태였는데 세종 1년 좌의정 박은의 청을 받아들여 이듬해 본격 발족시켰다. (영전사, 대제학 등 겸직 6명, 부제학 직제학 등 학사 10명)
황희는 양녕을 편들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지방에 쫓겨나 있던 상태. 다행히 태종이 죽기 직전에 복귀를 허락해주었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예순이었다. 이듬해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복귀 4년 만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황희로 대표되는 노대신들과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학자 그룹을 양 날개로 삼아 세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200% 완수하게 된다.
세종의 정치철학은 어디까지나 유교였지만 유교만을 절대화하지도 않았다. 불교를 내심 신봉했으며 풍수학이나 민간 신앙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했다. 풍수학자 최양선이 이런 주장을 편 일이 있었다. (경복궁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승문원 뒷산이 주산으로 그 곳이 진짜 명당입니다. 창덕궁을 그 쪽으로 옮기시면 만세의 복이 될 것입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열혈 유학자들이 나섰다. (나라의 운명에 그토록 중한 것이라면 어찌 주공과 공자께서 한 마디 언급이 없으셨겠습니까? 지리의 서적이 비록 정통 경서는 아니어서 허황됨이 없지는 않으나 아주 버릴 수는 없소.) 그러고는 직접 산에 올라 내맥을 살폈다. 원칙주의자 허조가 나섰다. (최양선의 허황되고 마령된 발언에 대해 벌을 내리소서! 의견을 냈다고 벌을 주란 말씀이오? 그러면 언로를 막게 될 텐데요. 더욱이 양선은 자신이 공부한 것을 말한 것이니 이는 충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조께서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세우심에 모두 풍수지리를 쓰셨어요.) (부모를 장사지낼 묘자리 찾을 땐 대소 관료들이 다 풍수를 따르면서 나랏일엔 반대를 일삼는군. 정승을 지낸 유정현은 수륙재를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자기가 죽을 땐 아들에게 유언하여 수륙재를 성대하게 베풀더군.)
국무당을 혁파하라는 상소엔 이렇게 답했다. (하는 모양을 보면 어린애 장난 같지만 옛 풍속은 이미 오래된 것이니 모두 없앨 순 없소. 오래된 것, 많은 사람이 믿고 행하는 것은 그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주자를 평하면서는 이런 말도 했다. (주자라고 다 옳은 건 아니지.)
세종이 꿈꾼 유교이상사회는 막연한 덕치국가가 아닌, 제도와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법치국가에 가까웠다. 모든 일에 분명한 근거를 갖기를 원했다. 세종처럼 철저히 법과 나름의 근거에 따르려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대에 내 말이 곧 법인데 저렇게 한다는 건 스스로 내 권력을 줄이는 꼴이 되잖아.) 세종은 학문을 위한 학문, 연구를 위한 연구, 발명을 위한 발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현실의 필요만이 그를 자극했다. 때문에 조선 중심주의자가 되는 건 필연이었다! 과학, 농업, 의학, 군사, 음악 등 모든 분야에 세종의 ‘조선의 실정에 맞게’는 관철되었다.
새로운 카리스마
세종 중반까지는 태종이 구축해놓은 6조 직계제 체제로 운용되어 세 정승은 단지 자문기관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자문’에 특별한 무게를 두었다. 정승으로서 한 번 검증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썼으니, 여든일곱 살가지 영의정을 역임한 황희가 대표적인 사례다.
전문가를 중시한 것도 세종식 인사의 중요한 특징. 다음은 김종서 이전 함길도 방어를 맡았던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세종이 보낸 편지의 일부다. (... 경이 북방을 지키면서 군정이 날로 바로잡히고 여러 번 승전하여 백성들이 자못 편히 쉴수 있게 되었다. 경이 그곳에 간지도 2년, 규정대로라면 돌아와야 할 것이나 장수의 임무를 어지 경솔히 바꿀 수 있겠는가? 경이 나를 위해 더 머물면서 북방을 근심하는 나를 도와 달라.) 하경복은 그 뒤로도 무려 9년을 더 북방의 진중에 머물러야 했고, 인계받은 김종서 또한 7년을 머무르며 북방을 개척했다. 음악 분야에선 박연이 붙박이로 앉아 커다란 성과를 이뤄냈다.
세종은 또한 능력 위주의 인사를 했다. 능력만 있으면 신분이나 웬만한 허물도 문제삼지 않아서 노비 출신인 장영실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반면에 문제 많은 인물들이 조정의 중신으로 중용되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했다.
태종은 논쟁의 달인! 논쟁을 통해 신하들을 제압하고 저기 주장의 명분을 확보한다. 말하자면 토론을 명분 확보를 위한 장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세종은 토론 본연의 목표에 충실했다.
다음은 《고려사》 편찬 과정이다.
((세종 1년) 정도전의 《고려사》를 읽어보니, 공민왕 이후의 사실 관계에 왜곡이 많아요. 경(변계량)이 맡아 고치세요.
(세종 3년) 호칭이나 용어들이 왜 사실대로 쓰지 않았습니까? 다시 고쳐야겠군.
- 정도전은 《고려사》를 서술하며 황제를 칭한 것이 분수에 맞지 않다며 관련 용어들을 제후의 격에 맞춰 고쳐 기술. (조·종 -> 왕, 황제 -> 왕, 칙서 -> 교서, 태자 -> 세자 등) - 왕은 이를 사실대로 기술할 것을 요구했으나 변계량은 이제현, 이색 등도 정도전처럼 고쳐 썼다며 오히려 정도전이 채 고치지 못한 것까지 찾아 모구 고쳐 썼다.)
(세종 6년) ‘사실’ 대로 고쳤습니다.
(세종 7년) 변계량의 주장이 워낙 강력해서... 예전 정도전 식으로 고칩시다.
(세종 20년) 기전체 서술방식은 보기엔 좋아도 사실을 풍부히 담는 데엔 한계가 있소. 편년체로 다시 편찬해 주오.
(세종 24년) 완성했습니다.
(세종 28년) 새로 쓴 고려사를 보니 인물 평가의 공정성에 의문이 있소.
(세종 31년) 경들이 맡아 다시 쓰도록 하오. (김종서, 정인지))
고려사가 완성된 것은 문종 1년의 일로, 결국 세종은 완성된 《고려사》를 볼 수 없었다.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이 ‘고려사’가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그 《고려사》다. (기전체 서술로 제후의 격에 맞추기 위해 ‘본기’대신 ‘세가’에 왕기(王記)를 수록했죠. - 본기 : 제왕의 일대기. 세가 – 제후의 일대기)
《세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수도 없이 나온다. (정사를 보시고 윤대를 행하시고 경연에 나가셨다.) 윤대란 문무관원이 돌아가며 임금을 만나 질의에 답하던 일을 말한다. 윤대에서 행한 발언은 문제 삼지 않았으니 신하들은 의견은 물론 돌아가는 일을 기탄없이 말할 수 있었고, 이로써 세종은 신하들의 동향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경연은 대개의 임금들이 싫어했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세종에겐 즐거운 자리였다. 오히려 담당관원들에게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하루는 경연에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소. 무릇 배운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옳다 하겠지만, 모르는 게 없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용렬하다 할 것이오.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오.)
정기 무예훈련 때가 아니면 좀처럼 사냥을 떠나는 일도 없다. 그나마 취미생활이 있다면 종친들을 궐 안에 불러 타구(격구, 봉희라고도 한다)를 하는 정도였다. (그것도 젊었을 때) 말을 타고 하는 격렬한 방식보다는 걸어 다니며 하는 부드러운 방식을 즐겨했다.
사대외교의 설움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길목 길목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서울로 들어오면 임금이 백과노가 함께 맞이한다. 경복궁에서 칙서를 받는 예를 행한 다음, 중국 사신 전용 숙소인 태평관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푼다. 다음 날은 익일연을 베풀고 이후로도 하루 걸러 잔치다. 임금이 주최하는 잔치, 종친이 베푸는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떠날 때면 태평관에서 송별연을 베풀고 돌아가는 길목에서도 역시 연일 잔치다.
영락제의 등극으로 조·중 간의 갈등은 해소되었지만, 조선은 사대의 고통을 떠안게 되었다. 정벌에 쓸 비용 마련을 위해 국내적으로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조선에도 전쟁 비용 분담을 요구하여 왔다.
1423년 태종이 죽은 이듬해, 영락제는 북원 정벌을 위해 말 1만 필을 요구했다. 관마색을 설치하여 온 나라를 뒤져 말을 모으고 한 번에 700여 필씩 수십 차례에 나누어 요동으로 배냈다. 처음엔 158필, 다음엔 290필, 또 278필...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놓는 게 아닌가? (퇴짜맞은 수만큼 다시 보내자.)
영락제의 요구사항은 그 밖에도 많았다. 다행히 영락제는 내몽고 원정 중에 죽고 아버지의 팽창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1년 뒤엔 그 또한 죽고 말아서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선종)가 즉위한다. 선종도 영락제와 비슷한 요구를 계속해 왔다. 집집마다 자녀를 숨기고 나이를 속이느라 온 나라가 난리도 아니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던 조선 여인으로 한씨가 있었다. 그녀는 영락제가 죽자 순장을 요구받고 새 황제와 이별 인사를 나눈 뒤 목을 맸다.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환관들이 선덕제에게 아첨하기를, (죽은 한씨의 막냇동생도 절색입니다요.) 하여 뽑히게 된 동생 한씨. 그녀 또한 선덕제의 총애를 받았으니 신이 난 사람은 그 오빠 한확이다. 두 누이 덕에 출세한 그는, 나중에 세조와 사돈을 맺기에 이른다.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그의 딸이다.
선덕제는 정벌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 요구는 거의 사라졌다. 사냥 마니아였던 그는 대신 매, 개, 스라소니를 요구했다. 전국의 감사, 수령, 절제사들의 가장 큰 업무가 ‘해청(해동청)잡기’가 되어버렸다. 사신들이 중간에 농간을 부린 탓에 나중에는 아예 수백 명의 ‘해청 체포조’를 보내기도 했다. ‘해청 잡기’를 구실로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니는 그들을 먹이고 재워야 했던 조선 측의 고통이야 말해 무엇 할까?
이 시기 조선으로 오는 사신은 주로 조선 출신 환관들이었다. 황제의 요구에 따라 보내졌던 어린 내시가 황제의 사신인 칙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정승 판서쯤은 밑으로 보이고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쳐들 수 있게 된다. 환대 잔치 외에도 조선행은 엄청난 축재의 길이었다. 황제의 하사품 외에 개인 선물이랍시고 몇 가지 가져와 바치면 그 몇 배의 답례품을 받게 된다. 그 외 갖고 온 물건을 시중에 팔아 적지 않은 이문을 챙길 수도 있다. 급기야는 서너 궤짝을 갖고 들어와서 200개의 궤짝을 챙겨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궤짝 하나를 운반하는 데 일꾼 여덟 명이 필요했다.)
태종과 세종 시절 사신으로 가장 많이 왔던 인물 윤봉, 말년엔 세종의 부탁을 받고 조선의 조공품 내역에서 금·은을 뺄 수 있도록 힘써준 위인이기도 하다. 결국 윤중부란 이름의 그의 동생은 재상급에 이르게 되었고, 집과 땅까지 받아냈다.
사신들의 과도한 요구는 황제의 특명이 있은 후 상당히 줄어들었다. (짐이 요구하는 것 이외의 사신들의 사사로운 요구는 들어주지 말라.) 그리고 10여 년의 재위 끝에 선덕제가 죽고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비정상적인 사대관계도 많이 정리되었다.
3. 백화만발의 시대
《훈민정음 해례본》 ::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한 훈민정음 해설서다.
학문의 융성
세종의 집현전 사랑은 특별했다. 왕립도서관인 장서각을 지어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물품 공급도 아낌없이 했다. 초기 집현전은 경연 강의와 외교문서 작성이 주 업무였는데, 점차 기틀이 잡히고 인원이 늘면서 학문 연구, 저술, 국정 자문 등의 일을 맡게 된다. 효과적인 공부를 위해 사가 독서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자기 집에서나 절 같은 데 가서 업무를 잊고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 집현전의 자문은 단순한 자문을 넘어 새로운 정책 결정의 가부를 결정지을 만큼 권위를 갖게 되었다.
농업기술서(농사직설), 의원들과 집현전 공동으로 《향약집성방》이 편찬되고,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평가 받는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너무 방대해서 계속 미뤄지다가 성종 때에 가서야 처음 인쇄되었다.) 《8도지리지》, 《오례의》, 《동국정운》.
세종이 특히 중시한 책은 《자치통감》이다. (《자치통감》: B.C 403~A.D960 기간을 다룬 북송 시대 사마광의 편년체 역사서로 왕조의 흥망과 대의명분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어 서술한 책. 《자치통감 강목》: 송나라 주희가 쓴 자치통감 요약서로 의리를 앞세우고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는 데 치중해 사실 관계가 틀리거나 모순된 부분이 많다. 《통감강목》, 《강목》이라고도 한다.) 분량이 방대하여 보기를 꺼려하는 이 책을 경연을 통해 ‘강독’하더니 독자적인 해설서 편찬에 나선다. 여기에 쏟은 관심이 얼마나 컸던지 집현전 관원이 이 일로 인해 32명으로 늘었고(끝난 뒤 20명으로 축소됨), 세종은 눈병을 비롯한 각종 병에 시달리면서도 직접 밤늦도록 초고를 검토하고 교정도 했다. 이렇게 나온 책이 《자치통감 훈의》다. 《고려사》는 물론 《실록》 편찬 작업도 집현전의 몫이었다. 《삼강행실도》
세종은 인쇄술의 개선을 위해 책임자 이천을 달달 볶다시피 했다. 하여 탄생한 것이 조선 인쇄술의 빛나는 개가 갑인자다. 세종 이전엔 글자를 밀랍으로 고정했는데 몇 장 인쇄하고 나면 글자들이 움직여버려 낭패였다. 세종 초에, 글자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끼워넣어 고정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고, 갑인자에 이르러 더욱 개선되었다. 세종 이전보다 인쇄 속도가 20배나 빨라졌다.
과학기술의 도약
세종 4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서 임금과 백관은 인정전 앞에서 소복을 입고 구식례(일식, 월식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를 행했다. 그런데 이날 일식을 예보했던 담당관은 예보한 시각이 1각이나 틀렸다는 이유로 구식례가 끝나고 나서 곤장을 맞아야 했다. (우리가 쓰는 역서가 중국의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중국에서 관측하여 만든 역서를 그대로 쓰니 틀릴 수밖에.)
1각은 현재의 시간으로 15분이다(96각×15분=24시간). 96각법에서 하나의 시는 지금의 두 시간이며, 초와 정이 각각 한 시간으로 지금의 한 시간과 같다. 그러나 시의 이름은 자, 축, 인, 묘 등 12지(支)의 이름을 따랐다.
유교국가에서 제왕은 하늘의 대리자로서 하늘의 움직임에 대한 예보의 성격을 갖는 역서를 내놓아 백성들에게 정확한 농사 절기를 알려주는 것을 의무이자 권리로 여겼다. 또한 하늘의 변환을 사람의 일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 천재지변을 만나면 정치를 반영하는 계기로 삼았다.
결심이 선 세종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독자역볍 계획’을 진행시켰다. (정초, 이순지 등은 천문과 수학에 능한 이들을 모아 역서를 연구하고 관측기구 제작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라. 이천, 장영실 등은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여 필요한 관측기구들을 제작하라!) 양 팀의 협력으로 간의, 규표,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들이 만들어져 설치되었다. 이를 이용해 한양의 북극고도가(위도) 확인되고 칠정(해, 달, 수성, 금성, 화성, 토성, 목성)의 운행 궤도와 주기도 밝혀졌다. 마침내 조선은 독자적인 역법을 마련했으니 《세종실록》에 별책부록으로 실려 있는 《칠정산 내·외편》이 그것이다. 독자적인 관측치를 토대로 중국의 역서들을 비교 연구하여 만든 것이 《내편》이고 아라비아의 역서들은 연구해 만든 것이 《외편》이다.
천문 관측기구 제작과 맞물려 발전한 것이 시계 제작기술이다. 물시계인 자격루가 만들어지고 ‘일정성시의’란 이름의 천체 관측 기능을 겸한 별시계가 만들어졌다. 양부일구를 시작으로 다양한 해시계가 만들어졌으며 (세로줄엔 시각이, 가로줄엔 절기가 표시되어 있어 달력 역할까지 하는 시계였다.) 이를 대로에 설치하여 오가는 사람이 볼 수 있게 했다. 자격루가 시각을 알리면 경회루 남문, 광화문, 영추문, 월화문에서 이를 받아 북을 치니 밤에도 사람들이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세종 23년 8월, 호조에서 제안하기를, (8촌이 되게 그릇을 주조하여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깊이를 재게 하시고 지방의 각 고을에도 만들어 관청 뜰 가운데 놓고 수령이 직접 강우량을 재어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소서.) 이금해 5월 호조가 다시 올린 글에는 더욱 구체화되어 그 그릇을 측우기라 이름 지었다는 것. 비가 오고 갠 시간과 강우량을 각 고을에서도 기록에 남기도록 할 것 등을 청하고 있다.
그동안 측우기는 장영실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 들어 문종의 세자 시절 작품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음은 누런 비가 내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세종이 했던 말이다. (세종 23년 4월 29일로 측우기와 관련된 첫 기록이다.) (근년 이래로 가뭄이 계속되자 세자가 근심하여 비가 오고 나면 늘 땅을 파서 젖은 정도를 재곤 했다. 그러나 비가 온 정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자,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을 받고 고인 양을 자로 재곤 했다.)
강물의 수량을 재는 수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풍향계 등도 설치되어 기상 변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화포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지대해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개량을 독려했다. 마침내 화약 및 화포기술이 모두 중국을 앞지르게 되었고 실전에 투입되어 북방영토 개척에 크게 이바지했다.
두 천재 음악가
세종은 5례를 정비함으로써 예를 제도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허조가 태종 때부터 시작해 ‘길례’를 정리했고, 정척 변효문이 명을 받아 나머지 4례를 정리해 나갔다. 이러한 세종의 노력은 성종 때에 가서야 결실을 맺었으니 《국조오례의》의 완성이 그것이다. (길례는 왕실이 주관하는 제사, 흉례는 왕실의 장례, 군례는 군사훈련, 가례는 왕실의 경사, 빈례는 사신 접대에 관한 예절) 이 5례에 해당하는 모든 의식에는 음악이 필수적인 요소. (아악은 중국 주나라의 제례악에서 비롯된 음악. 당악은 당·송 시절에 들어온 고려화된 중국 음악. 향악은 고려 전통 음악)
유학자이면서 음악에도 정통한 이, 박연. 서른이 넘어서야 과거에 급제해 이즈음에는 의녀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궁중 음악의 정비라는 특명을 받고 악학별좌에 임명된다.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곧 담당관서의 공식 의견이 되었다.
고려 예종 때 송나라 황제 휘종이 제악에 필요한 악기들을 보내주었는데 이후 여러 난리를 거치며 망가지거나 없어졌다. (모양은 중국의 편경을 따랐고 소리는 제가 12율관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이칙(夷則) 1매 소리가 약간 높은 듯하구나.(세종)) 과연 갈고 다시 연주하니 바르게 되었더라. 박연은 흩어져 있는 아악의 정리에 힘써 《아악보》를 편찬하기도 했다.
(아악은 본래 우리의 음이 아니고 중국의 음이잖은가? 조상님들께선 생전에 향악을 주로 들었는데 제사엔 아악을 연주하니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소.(세종))
세종은 여러 곡을 만들어냈는데 《용비어천가》에 곡을 붙인 ‘여민락’, ‘취화평’, ‘취풍형’과 ‘보태평’, ‘정대업’ 등이 그것이다. 이를 신악이라 부른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조 때에 종묘 제례악으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다.이 신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새로운 악보법인 정간보를 창안하기도 했다. 신악에 대해 신하들은 은근히 못마땅해 하기도 했지만 음악을 모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악을 정리하고 궁중 음악을 정비한 공으로 뒤늦게 출세가도를 달린 박연, 그러나 세인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신부를 내쫓은 아들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는가 하면, 누이가 죽자 귀향했다가 장례를 대충 후딱 해치우곤 재산을 분배받아 싣고 왔다 해서 탄핵받기도 했다. 악공들을 이용해 영업행위를 한 일도 비난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문제를 일으켰지만 음악에 관한 한 워낙 독보적인 실력을 갖고 있는지라 여든 살가지 관련 일을 맡아 보았다. 여든한 살에 아들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낙향 조치되었는데 그 해 숨을 거두었다.
북방 개척의 시대 1
‘4군 6진’으로 불리는 북방영토 개척을 일궈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주도한 대마도 정벌과 그 효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북방! ‘야인’이라 불리던 여진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한때 금나라를 세워 위세를 떨쳤던 여진족은 여러 부족으로 쪼개져 응집된 힘을 갖지 못한 채 만주 일대에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엔 조선 정부에 토산품을 바치는 등 복속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떼를 지어 국경지방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곤 했다. 더러 귀화하는 이도 있었는데 나름대로 세력이 있는 자가 귀화하면 조선 정부는 벼슬과 집, 노비를 주고 심지어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사실 세종 이전부터 압록,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의 국경선이 ‘희미하게나마’ 그어져 있었다. 태종 시절에 이미 강계, 갑산, 어연군이 설치되어 압록강 중류지역에 통치권이 미쳤고 동북면지역도 마찬가지. 이미 정도전이 태조의 특명을 받고 와서 군현의 경계를 정하고 최북단 경원에 성을 쌓기도 했다. 실제 세종은 뒤에 방어의 어려움을 들어 대신들이 이런 주장을 펴자 (마천령 산맥을 국경으로 삼으시면 방비가 더 쉬울 것이옵니다. 무슨 소리요? 과인은 조종이 물려주신 땅을 단 한 치도 내줄 수 없소이다.) 이렇듯 압록강과 두만강이 이미 희미하게나마 조선의 국경선이긴 했지만 중앙의 통치력이 온전히 미치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
1432년(세종 14년) 1월, 이만주 휘하의 야인 기병 400여 명이 얼음 언 압록강을 건너 어연군을 공격하는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48명이 살해되고 75명이 납치되었으며, 마소도 100여 두가 끌려갔다. 만장일치의 추천에 따라 맹장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에 임명하여 보내고 세종은 연일 작전회의를 열었다. 군사를 처음 일으키는 것이 어찌 흥분되고 긴장되지 않았으랴. 현장의 의견을 중시할 줄 아는 세종이었다.
최종적으로 작전에 투입된 군사는 황해도 군사 5000을 포함하여 15000명. 총사령관 최윤덕, 중군 절제사 이순몽, 좌군 절제사 최해산, 우군 절제사 이각, 조전 절제사 이징석을 비록하여 7개 부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비록 적장인 이만주를 잡지는 못했지만 긴장 속에 준비한 군사작전은 조선 측의 이렇다 할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최윤덕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다른 장수들도 모두 승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조영무 이래 무인 출신 첫 정승) 다만 한사람, 좌군 절제사를 맡았던 최해산은 늦게 출전한 죄로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의 아들로, 대를 이어 화약 및 화포기술 발전에 기여한 그였지만, 무장으로서의 사명감은 좀 아니었다. 몇 년 뒤엔 강계 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첩과 계집종, 기생가지 데리고 가서 흥청거렸다. (누가 내 죄를 조정에 고해 파면해줬으면 좋겠다. 변방은 싫어.) 소원대로 파면은 되었지만 더 전방인 어연으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은 새로이 자성군을 설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직할의지를 분명히 했다. 무창군과 우예군이 설치된 건 그로부터 3년 뒤, 5년 뒤의 일이고, 4군의 하나인 어연군은 태종 때 이미 설치되었다.
세종은 이천을 시켜 2차 정벌을 감행하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리게 된다. 거주민들의 계속된 이탈 때문에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북방 개척의 시대 2
최윤덕의 정벌전이 성공하자 세종은 두만강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원부 홀로 섬처럼 떠 있던 이곳 최북방에 영북진(뒤에 종성군으로 바뀐다.)을 설치한 것이다. 영북진의 책임자는 10년간 경원을 맡아 온 무장 이징옥. 때마침 이만주 세력이 쳐들어와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고 이들을 납치해 간 일이 벌어졌다. (내분)
세종은 오랫동안 승지로 데리고 있으면서 깊이 신뢰하게 된 김종서를 불렀다. 김종서는 무신 출신도 아니고 체구도 작은 유학자! (동북면의 일은 개척이 주임무라네.) 함길도 최북단에 부임한 김종서는 곧장 새 진을 설치하는 일을 벌여 나간다. 진(鎭)이란 군사상의 필요가 우선하는 행정 구역으로, 변방이나 해안가에 설치되었다. 그렇다고 북서 4군과 동북 6진의 군과 진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김종서의 주도 아래 기존의 경원, 영북(종성) 외에 회령, 경흥, 온성군이 설치되었다. (부령은 김종서가 떠난 뒤 설치됨.)
사민정책이 실시되었다. 함길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국경의 새 고을로 강제 이주시키고 하3도(충청, 경상, 전라) 사람들이 함길도 남쪽을 채우는 방식이었다. 대상자에서 빠지기 위해 힘이나 돈 있는 사람은 로비를 했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자해를 하기도 했다. 원망과 분노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사민정책이었다. 세금이 감면되는 등 혜택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도 김종서도 흔들리지 않아 사민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동맹가첩목아 이후 이 지역 야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그의 동생 범찰, 황제에게 하소연한다. (파저강의 이만주에게 가서 같이 살고자 하옵니다.) 이에 범찰은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이만주에게로 도망가 버린다. 이쯤에서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들이기로 결심한다. 다른 오해도 작용했지만 김종서의 역할이 사실상 끝났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흉년을 당한 야인들을 구제하는 등 회유책을 펴며 귀화를 장려했고, 그렇게 두만강 남쪽은 실질적인 조선 땅이 되어 갔다. 김종서는 돌아왔고, 마무리로 투입된 황보인은 이후 문종 시절까지 끊임없이 한양과 변경을 오가며 장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품을 내높는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吏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그러나 이날 이전의 《실록》엔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단서가 될 만한 그 어떤 기록도 없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동안 훈민정음은 세종의 명을 받고(혹은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통설이었다. 3년 뒤에 나온 《훈민정음해례본(해설서)》을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했고, 이후 보급 과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실록》엔 집현전이 창제에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단 기사는 어디에도 없다. 《해례본》에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을 뿐.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例義)를 간략히 들어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했다.)
훈민정음이 공개되고 한 달 보름여동안은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이듬해 1444년 2월 16일,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은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고 세자와 안평은 감독을 맡아라.) 그리고 나흘 뒤 문제의 ‘최만리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문으로 최만리는 한심한 보수 세력의 대표란 오명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직언 잘하기로 이름난 중견 학자로, 오랫동안 집현전에서 일했고, 당시는 부제학이었다. 부제학 위로 제학, 대제학, 영사 등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겸직으로 비상근이고 부제학은 정3품 당상관으로 상근자 중에선 가장 품계가 높다. 말하자면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인 셈이다. 최만리가 부제학이 된 지 이미 3년도 넘은 상황이었으니 집현전 일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르게 비밀리에 훈민정음팀이 가동될 수 있었을까?
(첫째,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둘째,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통일시킬 방법이 없어 같은 글자가 여러 음으로 발음되는 현실이었다. 왜 사대 문제 등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최만리의 상소가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 또한 유학자인 만큼 정면에서 받아치기는 곤란했으리라. 이런 풍토에서 창제 작업을 공론화시킨다는 건 할 의사가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를 잘 알았기에 세종은 ‘직접,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해야 했다. 이이화 선생에 의하면 문종과 (성상문의 《해동잡기》에 세종과 문종이 창제했다는 서술이 있다.) 둘째딸 정의공주가 도왔다 한다. (죽산 안씨가에 시집갔는데 죽산 안씨 족보에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 수양, 안평 등의 대군들도 도왔을 것이다.
최만리 등 5인은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바로 석방했다. 다만 김문은 처음엔 찬성했다가 반대로 돌아섰다는 이유로 곤장을 쳤고, 정창손은 《삼강행실도》와 관련해 한 발언을 문제 삼아 파직처리했다. 그 뒤론 신하들의 반대가 더 이상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대간들을 중심으로 강력히 항의하는 것이 상례인데 잠잠했던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의 효용성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세종은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보급해 나갔다.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운회》언해본, 《월인천강지곡》 등의 책들을 출판하고, 하급 구실아치들을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 사용법을 넣도록 했으며, 정인지 등을 시켜 훈민정음 해설서를 만들어 보급하도록 했다.
세종 시대의 백성들
죄수들에 대해 보였던 태도를 보면 세종의 백성 사랑은 정말 각별하다. (재판을 끌어 오래 가두어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적용법규가 모호랄 땐 처벌이 가벼운 조항을 적용하라. 옥을 청결히 하여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병에 걸린 죄수는 치료해 주어라.) 당시의 관비들은 출산 시 산후 7일의 휴가를 받았다. (출산이 예정된 달은 물론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하라.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볼 것인가? 남편도 산후 한 달간 쉬도록 하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으로는 사대로 인한 것과 사민정책으로 인한 것을 우선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잘못된 정책에 따른 고통도 있었으니, 화폐정책이 대표적이다. 화폐 유통을 적극 추진했으나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사용을 꺼리니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그러니 더욱더 믿을 수 없게 된다. ‘믿음’을 주기 위해 강경한 조치가 취해진다. (가산 몰수, 벌금, 곤장...) 가산을 몰수해버리고 벌금을 내라 하니 무슨 돈으로 내란 말인지, 사채를 빌리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고 화폐에 대한 백성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세종은 저화(태종때 제정된 종이화폐) 저화 대신 동전을 주조하여 시중에 풀었다. 그러나 역시 백성들은 외면했고 정부는 다시 강경책을 쓰니 고통은 백성들 몫이었다.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도 백성들에겐 고통이 되었다. 이런 보수화 경향을 반영하여 나온 태표적 악법이 수령고소금지법이다. 허조. 강직하고 원칙적이며 할 말은 하는 사람. 뇌물, 축재, 여색을 멀리한 보기드문 도덕주의자다. 흠이라면 지나친 원칙주의로 인한 보수적인 시각이었으니 태종이 태상왕이었을 때 아뢰기를,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소서.) 세종도 그리하여 시행되었는데, 이 중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수령 고소를 금한 부분이었다. ‘수령고소금지법’은 재위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 그때마다 허조는 강력히 저지했고 세종은 소수 의견인 허조의 주장을 번번이 지지해 주었다. 태평성대는 사대부들에 한한 것이었다.
4. 명군을 도운 명신들
규표 :: 방위, 절기,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 관측 기기. 세종은 규표, 간의, 혼천의 등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으니 바로 《칠정산 내외편》이다.
황희 정승
황희, 무려 24년 간 정승으로 있었고 이 중 19년은 영의정으로 있었다. 실록에 묘사된 황희는 사뭇 다르다. 온화하고 인정 많은 모습은 곳곳에 보이지만 청렴과 두루뭉술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유배에서 돌아와 몇 해 안 있어 정승에 오른 황희는 불과 몇 달 뒤 곤혹스런 사건에 휘말린다.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길을 가다가 사고를 쳤다. (시골 아전 주제에 인사도 안 올리고 피해? 잡아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어라.) 종들을 시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는데, 이를 보고 동료 아전인 표운평이 항의했다. 이에 그도 붙잡아 매타작을 했는데, 다음 날 그만 죽고 만 것이다. 억울한 그의 아내가 감사에게 고발했고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황희에게 먼저 알렸던 모양. 황희는 오랜 벗이자 동료 정승인 맹사성에게 부탁했다. 맹사성이 나서서 피해자 가족을 설득하고 고을 현감에게 편지를 보냈다. 엉뚱한 이에게 죄를 떠넘긴 사건 보고서가 감사·형조(형조정랑-형조참판), 의정부에 올라가고 서달은 석방되었는데 (아무래도 이 사건은 이상하구나. 의금부가 나서서 재조사해 보고하라.) 하여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서달을 비롯해 수사를 맡은 감사와 5명의 현감들과 수사관원들, 형조좌랑 등이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받았고, 황희와 맹사성은 파면되었다. 1주일 후에 두 정승은 복직되었으나 깎인 위신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또 몇 해 뒤 황희는 제주 감목관으로 있으면서 말 천여두가 죽은 데 책임이 큰 태석균을 편들어주다 구설에 올랐고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세워 개간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면. 교하 수령에게 땅을 받는 대가로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비난을 사기도 했다.
황희의 아들들도 평판이 안 좋았을 뿐 아니라, 사고도 많이 쳤다. 서자인 황중생은 세자궁에서 일하면서 금띠, 금잔 등을 몰래 훔쳤다가 발각됐고 그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은 궁궐의 패물을 더 많이 훔쳐다가 애첩에게 주곤 했음이 드러났다. 화가 난 황희, 서자 황중생을 조중생으로 바꿔버리니, 이 또한 비난받았다. 이 사건으로 황보신이 과전을 반납하게 되자 형 황치신은 자신의 돌밭을 반납해야 할 황보신의 기름진 땅과 바꿔치기하려다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황희의 ‘청렴’ 이미지에 반하는 사례는 꽤 있다. 심지어 한 사관은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하였는데...) 이 기록은 뒤에 《세종실록》편찬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삭제되지 않아서 세종 10년 6월 25일자에 실려 있다.
처음 영의정에 제수되자 반대의견이 있었다. (비록 수신제가엔 흠이 있지만 치국평천하엔 꼭 필요한 인물.) 우선 황희는 혁신적인 세종의 견제자이자 보완자 역할을 했다. 늘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는 세종을 홀로 강력히 저지하여 포기시킨 적이 여러 번이었다. 또한 세종이 가장 신뢰했던 정치고문이기도 했으니, 실록엔 ‘황희 의견을 따랐다’는 구절이 수도 없이 나온다. 동료인 맹사성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의견을 내는 타입이라면, 황희는 거침없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타입, 그에 걸맞게 큰 일을 결단하는 데도 단호했다.
일흔을 넘기면서 황희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다. 여든 일곱에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아흔 살에 눈을 감았다. (문종 2년 2월)
과학혁명의 주역들
《농사직설》, 《삼강행실도》의 저자로 유명한 정초.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고 2년 뒤 중시에서 장원한 수재다. 경서뿐만 아니라 역산·복서 등에도 해박하여 《칠정산》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천 등과 함께 혼천의를 만들었고 각종 천문 관련 사업에 이론적 뒷받침을 했다. 예문관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관장할 정도로 문장에도 뛰어났지만 일찍 죽고 말았다.
세종은 독자적인 역법 연구를 맡을 인재를 얻을 요량으로 젊은 문신들을 몇 명 뽑아 역산을 익히게 했는데,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이가 있었으니, 이순지였다. 정초, 정인지 등을 도와 《칠정산》의 완성을 보았고, 간의, 규표, 해시계, 보루각, 흠경각 등의 제작·건립을 지원했다.
장영실은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다. 다음은 장영실이 자격루를 완성시키자 세종이 황희, 맹사성에게 그의 관직을 높여줄 뜻을 비치며 했던 말이다. (영실의 아비는 원나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솜씨가 뛰어나 태종께서 보호하셨고 나 또한 아낍니다. 워낙에 똑똑하여 강무 때엔 옆에 두어 내시를 대신해 명령을 전하게도 했지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옥루를 만들어냈고 이천이 지휘한 갑인자 제작에 참여했으며, 박연의 악기 제작을 돕는 등 정교함을 요하는 일엔 장영실이 있었다. 이런 공로에 힘입어 관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종3품 대호군까지 올라갔던 장영실은 그러나 어이없게 퇴장당하고 만다. 그가 제작한 안여가 부러지면서 곤장을 맞고 직첩을 회수당한 것. 안여(가마)가 부러진 날은 세종이 치료차 온천에 도착한 날로, 세종이 탄 상태에서 부러진 건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 안타까움과 함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유사한 경우가 최만리다. 훈민정음 반대 상소 이후 최만리 또한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최만리도 장영실도 이후 오래지 않아 사망한 게 아닐까? (더 큰 허물이 있어도 재주가 있으면 곧 불러 쓰는 게 세종의 스타일)
이천은 특이한 인물. 태종 초에 무과에 급제하고 중시에도 급제한 무장으로 평안도 절제사를 맡아 2차 양인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과학기술 방면에서 더욱 빛났다. 규표, 간의, 혼천의 등 천문기기 제작에 함께했고, 갑인자를 만들어냈으며 화포 개량에도 그의 역할은 단연 으뜸이었다.
정초 이후 과학기술 분야의 이론적 지휘자는 정인지였다. 열아홉 살에 ‘행운’의 장원급제를 한 수재로 일직 관직에 들어섰지만 행정 미숙으로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 그의 관직생활이 풀리기 시작한 건 세종 시대에 들어서였다. 역법 팀에 합세한 정인지는 곧 실력을 드러내 보인다.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고려사》와 《세종실록》 편찬을 맡았으며, 《훈민정음해례본》을 짓는 등 훈민정음 보급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세종 말년에 중국의 학자 예겸이 사신으로 왔다. 모처럼 환관이 아닌 학자가 사신으로 오자 조선의 학자들은 연일 찾아가 토론을 벌였다. 예겸의 주 상대자는 정인지였는데, 예겸 왈,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10년 동안 글공부하는 것보다 낫소.)
북방의 영웅들
최윤덕! 음직으로 벼슬을 하다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했다.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웠고, 이 시기 무장들이 흔히 저지르는 폭행 사건 같은 것도 한 번 없어서 문신들로부터도 존중받았다. 세종 시절 유일한 무장 출신 정승으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갑사로 들어와 근무하다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이징옥! 최북단 경원에 부임하여 군소리 한 마디 없이 10년 넘게 자기 자리를 지켰다.
사신 윤봉이 해청과 스라소니를 잡는다며 그의 관할지에 설쳐댈 때였다. 윤봉이 민가의 개를 사냥에 쓴다며 무단으로 끌고 가자 수하를 시켜 몰래 주인에게 돌려보내 버리고 잡은 해청을 풀어줘 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이징옥은 파면되어 2년 가까이 썩어야 했다. 대(對) 야인 강경파로 야인들에겐 공포의 대상. 김종서의 북방 개척 성공은 이징옥의 노련하고 강력한 무력에 힘입은 바 크다.
김종서는 오랫동안 대언(승지)으로 일했다. 찰방(암행어사), 사헌부 직원으로 보여준 강직함과 일솜씨를 평가한 데 따른 것이다. 여섯 대언들 중 김종서에게 보인 애정과 신임이 각별했는데, 세종은 짐승을 쏘라는 모호한 말과 함께 활을 선물로 내린다. 2년 뒤, 세종은 김종서를 북방으로 보냈다. 모친상을 당했을 대도 곧 다시 진중으로 돌아가야 했다.
잘 해 나가던 김종서가 어느 날 간절히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단지 5년 세월이 지겨워서가 아니다. 힘을 가진 신하가 변경에 오래도록 떨어져 있으면 위험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중앙정계엔 김종서에 대한 각종 악소문이 떠돈다. 회령 절제사 박호문이 퍼뜨린 것이다. 세종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의심을 품게 된다. 때마침 범찰이 300호를 이끌고 파저강 지역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는데, 범찰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평안도, 함길도 도 체찰사로 떠났던 황보인이 김종서의 해명 편지를 들고 돌아오자 임금은 미안해진다. 박호문에 얽힌 얘기와 함께 떠도는 풍문에 대해 자세하고도 근거가 분명한 해명을 해보였다. 세종은 박호문을 잡아다 국문하게 된다. 하마터면 불명예 퇴직을 당할 뻔했던 김종서는 형조판서에 임명되면서 중앙정계로 컴백했다.
5. 준비된 임금, 문종
자선당 :: 세종 9년에 처음 지어진 경복궁 내 세자궁으로, 문종은 이곳에서 20년 넘게 지내며 군주 수업을 받았다. 세종 말년엔 병환 중인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세종은 따로 계조당을 지어주었다.
성군을 위한 준비
세종의 장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세자 나이 열둘에 중국 사신들을 위한 하마연을 주관하니 세자의 거동을 지켜본 사신이 크게 칭찬했다. (개국 이래 첫 장자 계승) 아버지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중하고 차분하며 끈기 있는 세자였다. 세자로 있은 지 무려 30년, 스물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또 세종을 돕기도 했다. 마지막 8년은 병든 세종을 대신하여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실록은 준비된 문종의 자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수가 적고 말싸움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일단 논쟁이 일면 노성한 대학자도 당할 수 없었고, 문장은 일필휘지였으며, 글씨도 빼어나 다들 그의 글씨를 얻으면 천금같이 여겼다. 활쏘기도 했다 하면 백발백중, 천문을 잘 알아 일기예보가 매우 정확했다. 세종도 교외에 나갈 때면 꼭 세자를 찾았을 정도. 효성이 지극했고 역산, 음운학에 정통했으며 각종 기술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비극의 서막
문종이 세상을 뜬 건 서른아홉 살 때로 성종보다도 오래 살았다. (성종 38세) 그런데도 요절했다는 이미지를 남기게 된 건 재위기간이 짧았던데다 어린 단종을 두고 죽었기 때문이리라. (새종은 열여덟에 문종을 낳았는데 문종은 스물여덟에 단종을 낳았다.)
세종은 세자 나이 열둘에 변계량, 유순도를 불러 세자의 배필을 고르도록 했다. 심사숙고 끝에 세자빈이 결정되었는데 휘빈 김씨다. 그런데 용모 때문인지 세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자나깨나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골몰하던 그녀, 하여 마련한 방법이란 게 미신적이고 망측한 것들이었다.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그 가루를 술에 타서 남자에게 먹이면 된다 하옵니다.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시면...) 세자빈의 망측한 ‘노력’이 세종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세자빈을 불러다 물으니 순순히 인정한다. (폐출)
(가문이 중요하나 인물 또한 고와야 합니다. 그래서 창덕궁에 처녀들을 모아놓고 효령대군과 내관, 시녀들을 심사위원으로 삼아 뽑도록 할 생각입니다. 잠깐 보고 덕은 어찌 알겠습니까? 덕으로 뽑을 수 없다면 용모로 뽑지 않을 수 없겠지요.) 처녀의 집을 돌아다니며 예선을 하고 창덕궁에 모아 본선을 하는 조선식 왕비 선발제도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영예의 진으로 뽑힌 봉씨가 두 번째 세자빈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세자 부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으니, 성격 차이가 큰 이유였다. 차분하고 신중한 세자와 달리 직선적이고 다혈질적인 봉씨.
둘 사이에 아이가 없자 세종은 권씨, 홍씨, 정씨를 세자의 후실로 들여보냈다. 세자는 그녀들, 특히 권씨, 홍씨와는 잘 맞았다. 마침내 권씨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봉씨는 거짓 임신 소동을 일으키고 외간 남자를 엿보며 대낮부터 술타령을 하는 등 자포자기식 행동을 계속한다. (당장 내쫓고 싶지만, 그러면 벌써 두 번째 폐출이 되어 오히려 세자의 허물로 여겨질 게야.) 그러나 소쌍이라는 궁녀와 동성애 관계를 맺게 되고 소문이 나면서 두 번째 부인 봉씨도 폐출되었다.
(세 번째 세자빈으론 검증된 세자의 후궁들 중에서 고르는 게 좋겠습니다.) 권씨와 홍씨가 물망에 올랐다. 그렇게 하여 세자는 비록 딸이긴 했지만 세자의 아이를 낳아본 권씨와 세 번째 혼례를 치렀는데, 이후로도 5년 가까이 지나고 난 뒤 이윽고 세종 23년, 세자 나이 스물여덟에 간절히 바라던 왕자를 낳았다. 기쁨에 겨운 세종이 대사면의 교지를 발표하는 순간 양초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예감은 적중하여 이튿날 산모(현덕왕후)가 세상을 뜨고 만다.
말년의 세종
30대 중반을 넘기며 세종은 각종 병에 시달렸다. 세자에게 주요 업무를 이관하는 일을 잊을 만하면 또 제기하고 완강히 반대하기를 몇 년, 이 와중에 태종에 의해 시작된 6조 직계제가 의정부 서사제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세종의 병은 점점 더 깊어 갔다. 피병(避病)을 명목으로 경복궁, 창덕궁은 물론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대군들과 종친들의 집으로 옮겨다니며 지냈으며 온천행과 눈병 치료를 위해 초정리 약수를 찾은 것도 이때의 일. 세자궁에 첨사원을 두어 세자 전속 비서실 기능을 하도록 했다.(세종 24년, 1442) 강무를 대행시키고 종묘의 제사를 대신케 하더니 세자궁 안에 왕세자가 조회를 받을 건물을 따로 짓고 마침내 세종 27년(1445)에 이르러 본격적인 세자 섭정이 시작된다. 신하들도 결국 반대를 접었다. 조금만 나았다 싶으면 일을 찾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이때였다.(세종 25년(1443) 12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아들들은 모두 여덟으로 하나같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다. (세자 30, 수양 27, 안평 26, 임영 25, 광평 19, 금성 18, 평원 17, 영응 10 (1443년 당시 나이)) 세종은 세자는 물론 대군들에게도 일찍부터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세자가 정무를 대신하게 되고 병세가 더 심해지면서 신하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대신 수양과 안평을 가까이 두어 명령을 전하곤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까지의 일들은 비정치적인 분야였지만 이제 임금을 옆에서 보좌하고 명을 전하는 정치적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두 대군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실세로 부상하게 된다.
다섯째인 광평대군이 스무 살의 나이로 죽고(1444. 12.) 한 달 뒤엔 일곱째인 평원대군이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죽는다. (1445. 1.) 그리고 다시 이듬해엔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떴다. 왕자에게 시집왔다가 예정에 없던 왕비가 됐고 바로 그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여인, 그러나 끝까지 내명부를 잘 다스렸으며, 8남 2녀를 낳아 세종이 아무 걱정 없이 국정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그녀였다.
슬픔이 잊혀질 무렵, 세자의 등에 난 종기가 갈수록 커져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대신을 명산 대천에 보내 빌게 하고 자신은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정사를 맡아 처리했다. 보름 뒤 다행히 고름이 빠져나와 세자가 회복되었으나 한 달 남짓 지나 다시 등창이 돋았다. 세종의 병세까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러고는 손 쓸 겨를도 없이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눈을 감으니 향년 쉰넷이었고 재위기간은 31년 6개월이었다. (1450. 2. 17)
먼저 간 부인 소헌왕후의 능에 합장되었는데 능호는 영릉,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에 위치했다. 효성스런 세종이 생전에 수릉으로 직접 정한 곳이다. 그런데 이 수릉이 정해질 당시 논란이 있었다. 경복궁이 명당이 아니라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풍수가 최양선. (이 곳은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 : 후손이 끊어지고 장자를 잃는다) 할 땅입니다.) (제 마음의 눈으로 깨친 것입니다.) (벌 줄 것까지야 있느냐? 대신 앞으로 나라의 대사엔 양선을 쓰지 않겠노라.) 이에 예종은 세종을 오늘의 영릉(여주)으로 이장했다. 다만 묘호에 대해선 정인지와 허조의 아들 허후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세종은 역대로 중흥을 했거나 창업을 한 임금의 묘호입니다. 대행대왕께선 이 같지 않으니 문종으로 고쳐서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
어린 단종을 남기고
제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 문종은 직접 뜰에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부왕께 드리곤 했다는 효자 임금이다.
사실 말년의 세종은 잦은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장기집권에 따른 관성으로 인해 꽤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신하들의 비판을 무시한 대표적인 사례는 불교와 관련한 태도였다. 흥천사를 증축하고 중 신미를 좋아하여 침실로 불러들여 법사를 베풀기도 했다. 효성스런 문종은 부왕의 뜻을 존중하여 많은 예산을 들여가며 대자암을 증축하고 화엄경을 주조했으며 수륙재를 행하는 등의 불사를 벌였다. 세종 말년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언관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세종 후반기 집현전에서 일했던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등이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 이에 대해 문종은 비판은 성의 있게 들어주되 자기 입장은 끝내 고수하는데 유연하면서도 세련된 솜씨였다. (그대의 의견은 훌륭하다. 허나 부왕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돌이킬 수 없다. 3년상만 끝나면 다시는 없을테니.)
짧은 치세 동안 문종이 가장 역점을 두었고 또 성과를 낸 분야는 군사부문! 세자 시절부터 군사일과 병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직접 설계한 화차를 임영대군을 시켜 제작케 하고는 실험을 거쳐 변경지역에 배치하는가 하면, 매일같이 활쏘기장을 찾아 관람하고 격려하여 무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병조참판 황수신이 청하기를, (병사들이 벼슬을 하고 나면 무예를 게을리 합니다. 벌점제를 시행해 게으른 자들을 경계하소서. 열심인 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게 낫소.) 즉위 이듬해 문종은 직접 진법을 저술하여 수양대군, 김종서, 정인지에게 교정하도록 한 다음, 편찬하니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위진법이다. 이 오위진법의 이론에 따라 군사조직도 기존의 12사 체제에서 5사 체제로 개편하니, 이는 조선 전기 군사조직의 기본체계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재발하는 종기, 세손을 세자로 바꿔 책봉했지만, 자신의 건강과 세자의 어린 나이가 아무래도 걱정이었다. 문종은 시종일관 수양을 옹호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택했다. 재위 2년 3개월, 다시 종기가 재발했다. 급격히 악화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그렇게 홀홀단신 열두 살 단종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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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오늘의 눈으로 보면 훈민정음의 창제가 최고의 업적이겠지만, 당시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세종이 이룬 숱한 창조의 작은 일부일 뿐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