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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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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우리는 왜 사유해야 하는가!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하이브리드 총서」제 1권 『사유의 악보: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이 책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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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사유의 악보―기형과 잡종의 글쓰기를 위한 하나의 서문

우리는 어쩌면 지난 20세기 전체를 말 그대로 ‘우울증의 세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우울증이 지난 세기의 우울증과 유달리 다른 점은, 아마도 우리의 시대는 이미 그 자신이 우울증을 앓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무감각함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일 것이다(그리고 그 무감각은 일종의 ‘삶’의 한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멋진cool’ 스타일, 곧 무엇보다 하나의 ‘lifestyle’이 되었다).

 

우리의 시대는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며,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

 

이미지들이 범람한다는 경고가 닳아빠진 수사법이 될 정도로 그러한 범람은 이미 ‘범람’이라는 부정적인 술어로 이해되지 않으며 많은 이들이 이미 장사 지냈다고 공언했던 언어는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들과 함께 더더욱 넘쳐나는 세상에서, ‘역설적’이게도 사유를 소환할 수 있고 또 소환해야만 하는 지점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소위 ‘인문학자’들이 잔뜩 겁을 주며 ‘철학의 빈곤’을 한탄하며 경고하지만, 우리에겐 반드시 사유해야 할 당위성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다시 옮기자면, 옮겨서 제한하고 소거하자면, ‘왜 사유해야 하는가‘라는 저 질문에 대한 대답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

 

이 ‘우리의 시대’라고 하는, 저 근거가 희박한 시대 의식 또는 세대 의식, 그리고 이 ‘새로운’ 사유라고 하는, 저 ‘오래된’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 있고 흩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악보들은 그 자체로서는 절대 ‘음악’이 아니며(물론 ‘절대 음악’도 아니다)

 

악보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음악이 아니며 단지 표기의 한 형식이자 약속

 

나는 ‘우리’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내가 속해 있을 이 ‘우리’들은 오히려 우리를 ‘그들’이라고 말할지도 모를 터

 

“나는 오히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안을 찾았습니다. 나는 불안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이 바로 불안의 넘침 속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책은 하나의 서곡overture과 하나의 종곡finale, 그리고 13개의 악장들movements과 8개의 변주곡들variation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악보이다. 그러나 이 악보는 굳이 순차적인 질서로 연주될 필요도 없고 하나의 주제 악구로 통합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산개되어 있는 주제들과 음표들 사이에서 독자讀者/毒者들은 하나의 길을 발견하고 또한 그 하나의 길을 발견하고 또한 그 하나의 길을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악보들을 통해서 하나의 ‘음악’이, 또는 몇 개의 서로 다른 ‘변주’들이 탄생할 수 있다면, 작곡가에게 그만한 기쁨은 또 없을 것이다.

 

부디 이 매뉴얼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이론을 ‘사용’하고 사유를 ‘구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문자들과 음표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러나 또한, 더욱 근본적으로는, 도대체 사유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고 그 사유 자체의 ‘사유 가능성’을 제시하고 실험하는 하나의 방편方便, 하나의 허주虛舟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차라리 더 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두고 “모두를 위한,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하나의 책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나는 나의 이 책이 하나의 전염병이 되기를, 역병처럼 창궐하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또한 그렇게 믿는 대로 쓴다.

 

버릴 것은 버렸고 바꿀 것은 바꿨지만 크게 고친 곳은 없다. 현장적인 글들이 지닐 수 있었고 또 지녀야 할 미덕들이 시간이 흘러서 심지어 하나의 거대한 악덕으로 변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 각각의 글이 작성될 당시에 지니고 있었던 짧은 목적과 넓은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며(그러나 어쩌면 내가 나의 글쓰기를 통해 상상하고 구현했던 현장성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현장성의 개념과 충돌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만이 그 글들이 지니고 있고 또 지녀야 할 ‘유한한 무한성’을 보장할 수 있는 하나의, 아마도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썼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시포스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의 첫 장에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밖에는 없다고 썼지만(“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가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살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실존주의적이었다.

 

인간은 그럴 수 있기에는 너무 복잡한 생명체이며 또한 그럴 수 있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동물이다.

 

카뮈가 자살을 이야기할 때 가졌던 똑같은 철학적 절실함과 절박함을 갖고 나는 이 ‘절멸’의 문제를 발음하고 발설한다.

 

아포리아 :: 아포리아란 철학 용어의 하나로 어떠한 사물에 관하여 전혀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해결이 곤란한 문제, 즉 모순이나 해결 불가능한 역설 등을 일컫는 말이다. 아포리아는 고대 철학자들에 의해서 의미가 확립된 용어로서, 그리스어의 본디 뜻은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려 무지의 상태를 자각시켰다.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린다는 것은 즉 상대방의 의견에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아포리아에 의한 놀라움에서 바로 철학이 시작된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플라톤(platon)은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아포리아라고 명명한 바 있다.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되고, 그 질문에 답을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전체와의 관계를 맺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문학적으로 적용했을 때, 해체론자(解體論者)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아포리아는 하나의 텍스트의 언어적이고 철학적인 일관성과 그 일관성에 장애물이 되는 전복적인 모순 및 역설 사이의 간격을 말한다. 즉, 아포리아란 대개 어떠한 텍스트의 해석을 어렵게 하는 내재적 모순이나 서로 화해시킬 수 없는 패러독스(paradox)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다.
텍스트의 일관성을 저해하는 전복적인 요소들이 해석을 역전시키고 결정 불능으로 만들어 체계화 작용을 교란하는 데 비해 아포리아적 텍스트는 텍스트를 지배하고 포괄한 철학적 개념성에 대한 저항의 구조를 표시하고 조직하는 것으로 보이는 텍스트와는 구별된다. 문학 작품에 대한 해체적 독법을 사용하고 있는 힐리스 밀러(J. Hillis Miller)는 '최종적 아포리아'를 들춰내는 비평적 방법에 따라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의 텍스트를 읽는데, 밀러의 결론은 어떠한 문학 텍스트이든지 '해결할 수 없고', '모순적인' 의미의 끊이지 않는 작용, 즉 끝없는 아포리아의 작용이라는 것이다.(강진호)
[네이버 지식백과] 아포리아 [Aporia]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많은 이들이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하는, 그러나 또한 거기에 어떤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는

 

악보란 그 자체로는 음악이 아니며, 일종의 표기법, 문자/글쓰기écriture의 한 형태이다. 내 글의 문체는 말하자면 나의 작곡 어법이며, 작곡된 하나의 악보가 그 음악 어법과 분리될 수 없듯이, 이러한 어법이 나의 언어 혹은 사유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발기시키는 어떤 마취제이자 흥분제였다.

 

대위법 :: 서로 다른 2개의 선율을 결합하는 작곡방법.
단성음악(單聲音樂, 호모포니) 기법을 가르치는 화성법(和聲法)과 함께, 다성음악(多聲音樂, 폴리포니)의 기법으로서 오늘날에도 작곡 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모방대위법'은 어떤 성부의 선율을 타성부가 그대로 모방하여 악곡을 전개하는 방법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위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이 두 스승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음악과 함께할 수 있었고 또 여전히 음악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내 옆에 있어준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반대로 세상을 저주하곤 했지만, 그 ‘저주’의 힘은, 저 원한의 감정ressentiment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게 ‘버틸’ 수 있는 어떤 힘을 주었다.

 

현상학 ::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철학사상(哲學史上)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여 왔다. 1764년 《신기관:Neues Organon》에서 현상학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독일의 철학자 J.H.람베르트는 본체(本體)의 본질을 연구하는 본체학과 구별하여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현상학이라고 하였다.
그 후 I.칸트는 물자체(物自體:본체)에 관한 학문과 구별되는 경험적 현상의 학문이라 하였고, G.W.F.헤겔은 감각적(感覺的)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의 발전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을 특히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E.후설을 중심으로 하여 잡지 《철학 및 현상학적 연구 연보(年報)》에 참가한 M.가이거, A.펜더, A.라이나흐, M.셸러, M.하이데거, O.베커 등 이른바 현상학파라고 불리는 학자들의 철학운동을 뜻한다. 이 운동은 당초 ‘사상(事象) 그 자체로’라는 표어와 같이 의식에 나타난 것(현상)을 사변적(思辨的) 구성을 떠나서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直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한다는 공통적인 지향성(志向性)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기술적 현상학(記述的現象學)은 19세기 후반의 신(新)칸트학파와는 달리 그 주관적인 구성주의(構成主義)를 배제하여 ‘객관(客觀)으로의 전향(轉向)’을 의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실에 한정시키는 것을 근본적 입장으로 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에도 반대된다. 현상학자들은 본질 파악의 방법에 의하여 논리학·윤리학·심리학·미학·사회학·법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후 주창자인 후설이 선험적(先驗的) 현상학의 입장을 취하여 학문의 기초를 자아(自我) 의식의 명증성(明證性)에 구하는 데카르트의 사고방식과 칸트적인 구성주의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학파로서의 공통적인 일치는 무너졌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이 순수의식(純粹意識)의 현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사물의 존재를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괄호(括弧) 속에 넣은 다음[現象學的判斷中止], 남아 있는 순수의식의 본질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현상학자 사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으나 의식의 본질을 지향성에서 구한 후설의 생각은 현대철학, 특히 실존철학(實存哲學)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임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대상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대상이 의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상관관계(相關關係)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 상관관계의 분석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서는 오로지 인식론적 시야(視野)에서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에, 더구나 자아의 의식이라는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버렸으나, 그 후 인간학적 ·존재론적 시야에서 인간과 세계와의 본질적인 존재구조를 밝히는 유력한 방법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존재를 ‘세계 내 존재’로 파악하는 M.하이데거나 J.P.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 계승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상학 [phenomenology, 現象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머리로는 의문과 회의를 품으시겠지만, 가슴으로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실 분들이다(그리고 나는 그 점이 언제나 가장 소중하고 감사하다).

 

사랑의 마음이란 이 작은 책의 이 작은 사족으로는 도저히 다 말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려는 이 헛된 시도의 그 헛됨 자체로 오히려 내 사랑과 감사의 가늠할 수 없는 크기를 증거하고 싶다.

 

이 모든 감사의 말들은, 앞서 말했던바, 어쩔 수 없는 ‘사족’들이겠지만, 그러나, 만약 뱀의 몸에 지네처럼 많은 발들이 돋아난다면, 그 또한 얼마나 멋지겠는가, 마치 또 하나의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반복하자면, 너무나 길어진 이 뱀의 발들처럼, 그렇게 모두들, 산개하고 만개하기를, 넘쳐나고 창궐하기를.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윤리인가 불가능성인가: 폭력의 아포리아와 유토피아

1. 폭력에 대한 글쓰기: 아포리아를 사유한다는 것

폭력에 대해 말하고 쓴다, 아니, 말하지 않고, 쓰기만 한다, 쓰디쓰기만 하다.

 

 

  • 환대법歡待法
  • 말은 언제나 하나의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Our word is our weapon”라고 말하는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
  • ‘predicament’
  • ‘카눈’
  • 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e는 소설 『부서진 사월』에서 ‘카눈’, 그 끝없이 이어지는 숙명적 복수와 폭력의 역사에 관해 쓰고 있다. 주인공 그조르그는 형의 원수를 갚음으로써, 곧—‘카눈’의 언어로 말하자면—형이 흘린 피를 회수함으로써, 이번엔 오히려 그 자신이 복수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카눈’의 경제다. 여기서 폭력의 순환은 지연되거나 연기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지불’ 자체가 불이행되는 일은 없
  • 없는, 그런 면책 없는 하나의 ‘경제적’ 순환이다. ‘카눈’ 안에서는, 누군가가 흘린 피란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 의해 회수되고 상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복수는 대물림되며 일종의 ‘폭력의 역사’를 구성한다. 한 복수의 피가 또 다른 복수의 피를 부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복수의 피가 가문의 피 안에 새겨져 있다는 이중의 의미(혈흔)에서, 그러한 폭력의 역사는 또한 피의 역사, 핏줄로서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 “그러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네 형의 피를 회수
  •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그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니!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라야 그의 삶이 이어질 거라니!”
  • 삶은 죽음으로 형용되고 수식되며 오로지 죽음이라는 술어를 갖는 한에서만 ‘삶’이 된다.
  • 폭력과 반대되는 비폭력이 따로 있
  • 있다기보다, 죽음과 구별되는 삶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폭력은 그 자체로 내재적 양가성을 띠고 있는 이중의 개념인 것이다.
  • 데카당스
  • 죽음이 삶의 최고 형식이 되듯이, 또한 비폭력 혹은 대항폭력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폭력의 최고 형식
  • 형식이 되고 있는 역설적 장면
  • 흘레붙고
  • 우리에겐 ‘미개한’ 폭력과 ‘계몽된’ 폭력이라는, 혹은 ‘불법적’ 폭력과 ‘적법한’ 폭력이라는 두 개의 대립항으로 구성된 하나의 분류법이 존재한다.
  • ‘비지non-savoir’
  • 서로 중첩되면서 또한 평행한다. 이 두 개의 선은, 서로를 쫓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비껴가는, 두 개의 길과 겹쳐진다.
  • 근대적 법체계는 ‘미개하며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카눈’적 복수의 원환/원한을 그 자체로 중지할 것을 ‘정당하고 적법하게’ 요구한다. 따라서 이는 폭력에 대한
  • ‘합법적’ 중지의 명령이라는 외양을 갖춘다. 그러한 체계의 공인된 폭력 앞에서 기존의 관습법적이고 개인적인 폭력의 순환은 일견 무력하고 낡은 듯이 보인다
  • 하지만 외려 근대적 법체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제거하고자 했던 폭력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이라는 사실에 이러한 폭력의 ‘폭력적’ 분류법이 지닌 역설이 있다.
  •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근대적 법체계가 ‘합법’과 ‘불법’이라는 폭력의 분류법을 시도하며 또 그것에 나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그 폭력의 모든 항목들을 나열할 수 있고 그 모든 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마치 관객처럼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당신의 책들,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이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소. 십중팔구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어떤 젊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당신은 그것이 살인의 미학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오. 당신은 내게 러시아 위선자들의 궁전에서 상연되던 연극을
  • 연상시키오. 그곳의 무대는 수백 명의 연기자들이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반면, 객석은 오직 왕가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당신이 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그 위선자들이란 말이오. 한 민족 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 그가 이러한 자신만의 관념과 감정 안에 빠져서 보게 되는 것이 ‘환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이 ‘실재’라는 사실이다.
  • 폴리페모스Polyphemos
  • 오클로스Ochlos
  •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 그 이름은 우선 가명과 가면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를 감추고 있지만, 그 이름이 상환하고 그 이름으로부
  • 있지만
  •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과거를 지운 채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룬다고 해도, 청산하고 지불해야 할 피의 청구서는, 그 편지는, 언제나 목적지에, 수신자에게, 정확히 도착한다.
  • ‘카논canon’
  • ‘감시자들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the watchmen?’라는 질
  • 질문은, ‘폭력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혹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 그 질문에 대해 정확히 거꾸로 선 거울상의 모습으로 제기되는 물음, 동시에 대항폭력이 지닌 아포리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물음이 된다(그러나 감시자를 만든 것은, 고양이를 창조한 것은 누구인가, 혹은, 고양이보다는 쥐의 목에 방울을 달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진 세상 아닌가).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행한다.”
  • 그렇다면 폭력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 이러한 지극히 ‘기본적인’ 믿음이 죽음과 희생을 통해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증명된다는 이 영화적 사실은 그 자체로 지극히 역설적이지 않은가, 합법적 폭력의 이상성은 그 자체로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므로
  • ‘가장 큰 폭력’의 정당한 행사는 바로 ‘법치’의 개념 안에서 구현된다.
  • 정언적 명령
  •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문제는 오히려 이차적인 것인데, 이러한 법치 자체가 일종의 ‘가장 큰’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법치라는 개념이 ‘목적의 왕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휘둘릴 때, 그 법치를 보장하는 법은 바로 그 자신의 ‘목적성’이 지닌 ‘맹목적’ 폭력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수행성遂行性
  • ‘법치’를 공포스럽게 공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폭력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 ‘슈레버’
  • 법이란, ‘당신들의’ 무기와 방패가 될지언정 ‘우리들의’ 우산과 그늘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법의 통치가 오히려 가장 ‘적법하고 합법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법 자신이 ‘불법적’인 것이라 규정하는 하나의 폭력이 아니겠는가. 곧 법 자체가 가장 유력한 ‘폭력 유발자’가 된다는 이 가장 역설적인 의미에서
  • ‘대위법’
  • ‘화성법’
  • “만약 그들〔신과 인간들〕이 각자 그 자신들만의 완전성을 지켰다면, 곧 인간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한쪽에는 신이, 또 다른 한쪽에는 인간들이, 그렇게 각각 끈질기게 자신들만의 고립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들이 함께 피 흘리고 서로를 찢어발기며—수치심의 극단적 한계에 이르기까지—모든 부분을 서로 문제 삼았던 어느 죽음의 밤은 그들 사이의 합치communion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 곧, 바타유가 말하는 ‘소
  • ‘소통communication’이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폭력과 상처, 또는 죄와 악을 그 필요조건으로 하여 가능해지는 어떤 인간적이고도 종교적인 합치communion의 경험이다.
  • 아니라 이질적 악惡에 의한 균열과 불일치에 기초하는 관계 방식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경험이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의 ‘소통’은 또한 역설적으로 일종의 ‘사랑’에 가닿는다.
  • “이렇게 해서 ‘소통’은 죄에 의해 보장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소통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것
  •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소통’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바로 그 사랑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는 자들을 더럽힌다.”
  • 흔히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러한 법칙들은 대상을 포착하고 주체와 동일화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 이미 오히려 “대상을 부수는” 법칙이 되고 만다(이것이 바로 폭력의 첫 번째 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주체와 대상은 서로 ‘같아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합치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유한성과 논리성의 세계관이 그러한 세계관을 벗어나는 무한성과 광대함의 질서에 속한 사물과 현상들까지 자신의 문법 안으로 포착하려는 ‘폭력적’ 시도에 있다. 바타유가 말하는 소통과 합치의 폭력이란 이러한 유한성과 유용성의 폭력과 거리를 두는 개념이다(이것이 바
  • 바타유가 강조하며 천착하고 있는 폭력의 두 번째 용법이다). 
  • 바타유에게서 주체(동일자)와 대상(타자) 사이의 통일과 합일이란, 다시 말해 그들 사이의 어떤 ‘소통’이란, 결국 유한성과 유용성의 제한적인 질서를 벗어나 무한성과 무용성의 광대한 ‘일반적’ (무)질서
  • 무한성과 무용성의 광대한 ‘일반적’ (무)질서를 경험하는 체험 속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 “희생물은 죽고, 그럼으로써 희생 제의의 참가자들은 그 제물의 죽음이 계시해주는 하나의 요소를 공유하게 된다. 이 요소는 종교역사가들을 따라서 성스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성스러움이 바로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존재의 연속성이다.”메모르네 지라르 폭력의 성스러움?
  • 불연속적 개체로서의 존재는 또 다른 불연속적 존재의 희생과 죽음 속에서 비로소, 그것도 순간적으로, 연속성을 경험한다. 바타유가 의미하는바 소통은 바로 이러한 폭력과 상처와 죽음을 통해 불연속적 존재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연속성의 순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이러한 일종의 ‘눈멂’ 속에서 비로소 신, 타자, 성스러움의 질서와 ‘소통’이라는 방법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 희생 제의 안에서 우리와 비슷한 존재의 한계는 부정되며, 바로 그 희생 제의 안에서 작용하는 폭력을 통해 불연속적인 존재는 순간적인 연속성을 체험한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의 연속성을 희구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의 완전한 연속성이란 오직 죽음에서밖에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궁극적’ 연속성이 아닌,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연속성, 곧 삶을
  •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연속성, 곧 삶을 서술하는 술어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빈사로서의 죽음이다.
  • 폭력은 존재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반대로 동시에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존재의 연속성을 삶 속에서 만나게 해주는
  • 유일한 역설적 수단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이러한 폭력은 ‘존재’의 차원에 있다기보다는 ‘사건’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닌가).
  • ‘소통’은 존재들에게 상처를 내거나 존재들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 따라서 예수의 희생은 악의 또 다른 표현이며, 신과의 소통 또한 그러한 악의 존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설적인 성질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희생에 의해서 인간은 그 자신이 불연속적인 존재로서 지니고 품을
  • 수밖에 없는 어떤 심연을 순간적으로 벗어나서 연속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 “예수의 희생만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희생은 일반적으로 말해 죄의 감정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은 악의 편에 있는데, 그것은 선에 있어서 필수적인 악이다.”
  • 이러한 선과 악의 양가적이고도 역설적인 관계는, 일반경
  • 일반경제의 관점에서는 생산의 영역과 그에 대비되는 소비의 영역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에로티즘의 관점에서는 개체와 사회를 보존하는 금기의 영역과 그러한 금기를 통과하여 완성시키는 위반의 영역 사이에서 공명하고 있다.
  • 이 지점에서 서로 공명하며 또한 충돌한다.
  • 벤야민은 두 가지 맥락에서 각각 두 가지의 폭력을 구분하고 있다.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그리고 더 나아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일종의 순환적 ‘표리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이 이 아포리아의 첫 번째 얼굴을 이룬다. 그리고 이보다 더 ‘순수하고 극단적인’ 아포리아, 곧 두
  • 번째 아포리아의 얼굴은, 법정초적/법보존적 폭력으로서의 신화적 폭력에 ‘순수한’ 신적 폭력을 대립시킴으로써 드러나게 되는 더욱 ‘극단적인’ 것이다.
  •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분류법이 그 자체로 양가적임을 지적해야 할 텐데, 여기서 폭력은 법을 정립하는 동시에 보존하기를 반복하는 하나의 기원, 하나의 가능 조건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이미 법의 기원 안에, 하나의 ‘유전자’처럼, 하나의 ‘카눈’으로, 각인되어 있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에, 법의 법에, 법의 기원에
  • 속해 있다.”
  • 법을 정립하고 정초하는 폭력이 바로 그 정립과 정초에 뒤이어 바로 그 법 자체를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폭력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법/폭력의 내재적 가능 조건이자 동시에 가동 조건이 되고 있는 것.
  • 비록 경찰이 법을 공포하지는 않지만, 경찰은 근대의 입법자를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근대 안의 입법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 곧 도처에서, 심지어 이곳에서도, 우리는 보존적 폭력과 정초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을 구분할 수 없으며, 바로 여기에 치욕스럽고 추잡하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애매성이 있다.
  • “도식화하자면, 두 개의 폭력, 두 개의 경쟁적인 Gewalt가 존재한다. 한편에는 (정당하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등의) 결정이, 곧 법과 국가를 넘어서지만 결정 가능한 인식이 없는 정의가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구조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영역, 곧 신화적 법과 국가의 영역 안에서 결정 가능한 인식과 확실성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결
  • 결정 가능한 확실성이 없는 결정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에는 결정이 없는 결정 불가능한 것의 확실성이 존재한다. 어쨌거나 양쪽 모두의 형식에서 각각 결정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곧 인식이나 행위의 폭력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인식과 행위는 언제나 분리되어 있다.”
  • “신적 폭력은 범죄자에 대해 군중이 행하는 신의 재판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쟁에서im wahren Kriege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화적 폭력, 곧 통치하는schaltende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정초적rechtsetzende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법보존적rechtserhaltende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
  • 관리적verwaltete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신성한 집행의 징표이자 봉인이지만 결코 그러한 집행의 수단은 아닌 신적 폭력은, 주권적waltende 폭력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최초의 명명이 지닌 폭력적인 힘이 곧 주권적이다”
  • “폭력을 행하는 자, 곧 창조하는 자, 말해지지 않은 것 안에서 새로운 행을 시작하는 자, 생각되지 않은 것 안으로 깨고 들어오는 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일어나도록 강제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나타나게 만드는 자, 이러한 폭력을 행하는 자는 언제나 모험/위험Wagnis 속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그가 존재를 극
  • 극복Bewältigung하고자 감행하는 모험/위험 속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 조각나 부서지는 것, 불안정성, 어울리지 않는 것das Un-gefüge, 무질서der Unfug 등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적 현존재의 산봉우리가 높게 솟아 있을수록, 심연이 더 크게 아가리를 벌리게 되는데, 이 심연은 다만 출구도 없고 처소도 없는 혼란으로 몰고 갈 뿐인 비역사적인 것das Ungeschichtliche, 그것으로의 돌연한 추락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 어떤 손쉬운 믿음과 순진한 신념.
  • 국가와 정부는 이러한 기만적 치환의 대가大家이자 대가代價가 되고 있는 것.
  • 첫째, ‘불법’과 ‘폭력’을 동일시함으로써 국가는 바로 그 시민들의 원리인 비폭력을 일종의 ‘predicament’ 혹은 아포리아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며, 둘째, ‘정치’를 ‘불순한 것’으로 세속화함으로써 정부는
  •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를 더도 덜도 말고 딱 자신들이 이해하는 만큼의 ‘정치’로, 곧 그만큼 불순하고 더럽고 역겨운 수준의 정치로 ‘하향 평준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법적 치환의 기술은 그 자체로 이중의 구속을 이루는데, 시민들의 ‘폭력’을 ‘불법’과 동일시함으로써 한쪽(시민)의 폭력을 세속화함과 동시에 다른 쪽(국가)의 폭력을 신성화하는 효과를 낳게 되고, 또한 ‘정치’를 ‘불순한 것’으로 세속화함으로써 ‘정치’를 모종의 ‘불능성’과 동일시하면서 정치 그 자체를 기원적이고 원천
  •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이러한 기술보다 더 교묘하게 ‘폭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는 또한 저항이 폭력에 대한 비폭력 혹은 대항폭력이라는 틀을 벗어나 반폭력이라고 하는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 순진하고 순수한 비폭력의 ‘유토피아적’ 상상 앞에서 우리는 어떤 ‘폭력’을 사유하고 행사하며 또한 제한/제안해야 할 것인가. 비폭력의 ‘미학’보다는 반폭력의 ‘정치’를, 비폭력의 ‘윤리’보다는 반폭력의 ‘불가능성’을 우리가 더 깊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물음 안에 존재하고 있다.
  • 왜 이 시대는 저 시대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으로, 곧 하나의 반복되는 거울로서 경험되고 작용하게 되는 것인가
  •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이라는 무응답
  • 혹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반폭력이라는 일종의 응답성/책임성respons-abilité으로 답하는 일, 아마도 이 가장 시급하고 결정적인 과제 안에 우리가 폭력에 관해 쓰고 또 쓰게 되는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용서하는가? 그러나 그것 외에 다
  • 다른 무엇을 용서할 것인가?”
  • ‘환대법’
  • 용서란 실로 ‘웃음’과 ‘눈물’이 함께 하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일 것인가
  • 칸트의 말을 비틀어 차용
  • 차용하자면, 윤리 없는 불가능성은 공허하지만, 반대로 불가능성 없는 윤리는 맹목적이다.
  • ‘소렐’
  • 『공산당 선언』 안에
  • 안에서 부르주아지에게 ‘공산주의’가 하나의 ‘유령’이었고 ‘유령’일 수 있었던 이유와 ‘상동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맥락과 시간 안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폭력’이 더도 덜도 아닌 그러한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규정되며 비난받고 불법화되어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마치 하나의 유령처럼. ‘민주주의’가 그 기원에서 하나의 ‘욕설’이었듯이, 여기서는 ‘폭력’이 그러한 ‘욕설’과 ‘비하’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폭력’은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법치국가와 경찰국가 안에서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으며, 그 유령은 이제 ‘폭력’이라는 일반명사를 일종의 고유명처럼 갖게 되는 것. 그러므로 또한 폭력에 대한 어떤 사유와
  • 실천은, 바로 이러한 폭력의 ‘본래적’ 유령성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 폭력에 대한 말을 하나 더 더하기 위해 펼쳐졌던 이 모든 이론적이고 문학적인 ‘여담’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새로운 폭력의 이론이라기보다는 폭력의 새로운 실천이지 않겠는가.
  •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레닌과 철학」에서 제시했던 저 유명한 정식을, 곧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에 대한 어떤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실천이다”
  • 우리는 폭력
  • 폭력에 관한 이러한 일종의 체념, 혹은 폭력에 대한 이러한 일종의 허무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인가?
  • 살의와 호의를 동시에 포함하는, 적대와 환대가 동시에 공존하는, 하나의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예감이 인다.
  • 사상捨象
  • 그들은 또한 혁명의 이러한 현실을 ‘부인’한다(여기서 나는
  • ‘그들’이라는 주어를 ‘우리’라는 대명사로 슬쩍 치환한다).
  • 혁명의 윤리란 일종의 “열광”에 근접하는 것이지만, 혁명의 현실이란 어쩌면 ‘환멸’만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기에,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 끊임없이 염려되는 것이기에.
  • 페티시즘이란 무언가를 망각하고 부인하는 것
  • 윤리가 사상捨象이라고 하는 일종의 망각과 부인의
  •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윤리란 저 사상에 의해 완전히 사상될 수는 없는 어떤 잔여물과 침전물을 고려함으로써만 탄생할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란 그 자체로 일종의 페티시즘적인 ‘선택’이며 또한 그렇게 페티시즘을 ‘통과’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무엇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페티시즘」
  • 페티시는 거세 위협과 관련하여 ‘있는’ 것으로 상정된, 곧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설
  • 설정된 어머니의 남근을 대체하는 사물 혹은 신체라는 것.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페티시는 단순한 음경Penis의 대체물이 아니라 페티시즘 환자의 어린 시절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가 나중에 상실되어버린 아주 특별하고 구체적인 음경의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 페티시는 남자아이가 한때 그 존재를 믿었던 여성의 남근Phallus, 혹은 어머니의 남근의 대체물이다.”
  • 페티
  • 페티시즘이란 결코 이러한 하나의 ‘믿음’, 하나의 ‘상상’, 하나의 ‘허구’에만 머무르지도, 침몰되지도 않는다. 페티시즘은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운동, 이중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페티시즘은 한편으론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을’ 남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론 그러한 믿음을 ‘없는 것으로’ 폐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중적으로 움직인다.
  •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런 믿음
  • 믿음을 계속 보유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포기하기도 한다.”
  • 따라서 일견 가장 먼저 하나의 ‘도착증’으로 파악될 페티시즘의 이러한 이중적 특징은 정신병Psychose보다는 신경증Neurose의 어떤 형태와 경향에 더욱 근접하는 것인데, 페티시즘이 현실의 ‘상실’보다는 현실의 ‘대체’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티시즘의 심리적 기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체’의 환유적métonymique 작용이다.
  • ‘환자’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때론
  • 마치 그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중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페티시즘의 논의가 ‘직립 보행’이라고 하는 진화론적 논의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 인간의 직립 보행과 함께 하나의 ‘윤리’가 시작되었다고. 첫째, 가장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층위에서, 본능에 대한 어떤 포기는 양심으로 대표되는 모종의 ‘윤리의식’을 창출해왔기에. 둘째, 보다 부차적이지만 또한 역설적인 층위에서, 이러한 윤리는 단순한 도덕
  • 도덕의식이 아니라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뒤틀린 유물론적 심급을 담보하며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에.
  • ‘초월超越’하지 않고 ‘포월匍越’한다.
  • “성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의 선택과 관련하여, 냄새를 맡는 데서 억압으로 인해 소멸된 분변기호증
  • 분변기호증적 즐거움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이다. 발과 머리카락은 모두 후각적인 느낌이 불쾌해져서 버려진 뒤, 성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승화된 강한 냄새를 지닌 물건들이다. 따라서 발에 대한 페티시즘에 부합하는 성도착에서 성 대상이 되는 것은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발일 뿐이다. (……) 발에 대한 페티시즘의 여러 사례들에서 분변기호증적 본능은 아래쪽에서부터 그 대상(원래는 생식기)에 도달할 방법을 찾다가 금지와 억압으로 인해 중도에서 멈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발이 ‘아래의’ 것 혹은 ‘저속한’ 것, 곧 천상의 정신에 대비되는 지상의 ‘냄새 나는’ 육체를 가장 잘 대표하는 하나의 ‘페티시’로 기능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직립 보행이라는 인간의 물리적/사상적 ‘입장立場’ 때문인 것이다.
  • 프로이트는 「강박신경증의 한 사례에 대한 고찰」(일명 ‘쥐인간’의 증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일반론적인 질문을 하나 하겠다. 즉 사
  • 사람이 직립하게 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냄새를 맡는 기능이 퇴화했는데, 그 결과 냄새를 맡는 즐거움이 신체적으로 억압되고, 그렇게 된 것이 사람이 신경증에 쉽게 걸리는 이유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명이 발달하면서 왜 하필이면 성생활이 억압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성 본능과 냄새 맡는 기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러한 억압, 이러한 신
  • 신경증은 무엇보다 ‘진화’의 어떤 특정한 방향과 같은 궤도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 궤도상에 있는 감각의 지도에서 후각은 시각에게 자신의 영토를 내어주고 ‘낮고 저속한’ 곳으로 내려간다. 이러한 후각의 ‘전락’과 시각의 ‘등극’은 단순히 동물적 감각 능력들 사이의 물리적인 전도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는데, ‘수치심’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의 층위가 그러한 이행의 궤도 속에서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본능에 대한 ‘포기’와 ‘망각’은 이러한 윤리의식(양심 혹은 수치심)의 성립을
  • 위한 하나의 가능 조건이 된다.
  • “후각적 자극이 쇠퇴한 현상 자체는 인간이 대지에서 몸을 일으켜 직립 보행한 결과인 것 같다. 이렇게 되자 전에는 감추어져 있던 생식기가 눈에 띄게 되어 보호할 필요가 생겼으며, 그것은 인간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문명의 결정적인 변화는 인간이 직립 보행 자세를 채택한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후각적 자극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리 중인 여자를 격리
  • 격리하는 시대를 거쳐 시각적 자극이 우세해지고 생식기가 눈에 띄게 되는 시대까지, 거기서 다시 성적 흥분이 지속되고 가족이 형성되는 시대를 거쳐 인간 문명의 문지방에 도달할 때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론상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의 생활 조건과 관련하여 주의 깊게 검토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중요하다.”
  • 직립 보행의 문제와 관련된 이러한 프로이트의 논의들이 거의 모두 ‘각
  • ‘각주’의 형식으로만 다뤄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차적인(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하겠다. 말하자면 이는 우선 곁가지의 ‘주변적’인 문제를 다루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또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각주’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글이 지닌 ‘무의식’이기도 할 것이므로.
  • 이러한 시각의 우세에 대해 후각은, 마치 하나의 죄의식처럼, 하나의 수치심처럼, 억압된 것의 회귀처럼, 다시 돌아온다. 어쩌면 눈이
  • 그 냄새를 맡지 못하고 오직 그것을 징후적으로만 ‘목격目擊’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바로 저 시각의 ‘증상’과 후각의 ‘매혹’이 있을 것이다.
  •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보다 더 멀리, 더 ‘극단’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술 운동에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정당성을 확보해줄 새로운 주체의 자리에 광인을 등극시킨다.
  • 광인을 치료와 격리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이성적 주체와 대등한, 어쩌면 그러한 이성적 주체를 초월하는 또 다른 주체로 평가하는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초현실주의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대의cause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광인은 오히려 ‘가장 윤리적인’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것. 이는 피해자의 복권이자 죽었던 자의 귀환이며, 반면 동시에 피해자의 피해의식
  • 피해의식을 ‘발명’하면서 가해자의 가해의식을 ‘전도’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 문제는 초현실주의자들 자신은 그들이 찬양해마지않는 그런 ‘광인’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광인에 대한 그들의 이런 공감과 예찬은 단순히 그들만의 ‘짝사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첫째, 사실 초현실주의의 ‘광인 예찬’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으로 열어놓은 여러 방향성들 가운데 하나의 방향성, 곧 ‘낭만주의 미학’이라는 줄기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에게서 천재란 기존의 규칙과 질서에 입각하여 예술을 제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에 〔새로운〕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
  • 의미하는 것이다. 곧 초현실주의의 어떤 ‘낭만주의’ 안에서
  • 어쩌면 칸트의 저 ‘천재’는 브르통의 ‘광인’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
  • ‘자동기술법automatisme’
  • “신경증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무시하는 반면, 정신병은 현실을 부정하고 그것을 바꾸려 한다.”
  • 혁명의 윤리가 신경증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병적인 어떤 것이라면?
  • 둘째, 우리는 초현실주의 안에서 광인이라는 새로운 예술주체가 부르주아적인 예술주체와 대비되고 있음에 또
  • 또한 주목해볼 수 있다. 이러한 대립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초현실주의가 겨냥하고 있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예술 제도에 대한 하나의 ‘영웅적’ 대립항으로 설정된 광인이라는 이 ‘주체 아닌 주체’가 그러한 체제와 제도와 ‘무관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 부르주아적 질서와 그 예술에 대한 안티 테제이자 해독제로서 등장하고 제시된 광인-주체는 ‘더러운’ 것으로 상정된 시장의 논리와 계산적 체계로부터 초탈해 있는 어떤 ‘순수한’ 외부로 상정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천재’의 개념에 이어 칸트의 ‘무관심성’ 개념이 변형/왜곡되고 있다.
  • 이러한 사실은 또한 역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어떻게 공산주의자들과 ‘그토록 쉽게’ 연대할 수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잘 해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서로 구체적인 지향이나 이상에서는 차이를 보였지만 자본주의 경
  • 경제 질서와 부르주아적 예술 제도라는 공동의 적敵을 갖고 있었던 것.
  •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실상’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어떤 ‘이상’이자 ‘윤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그 예술 제도에 대한 초현실주의자의 시각은 그 자체로 페티시즘적이다. 초현실주의는 그 ‘윤리’ 안에서 광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예술주체와 그 주체가 불러올 상상력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초현실주의란 그러므로 새로운
  • 낭만주의임과 동시에 어쩌면 새로운 유토피아주의이기도 했던 것.
  •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주의가 오히려 그 자신이 가장 혐오해마지않는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물신성에 더욱 가깝게 밀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하나의 역설이. 초현실주의는 그 예술적 행위로써 자본주의를 벗어
  • 벗어나고자 한다. 말하자면 초현실주의는 예술이 상품이 되어버리는 부르주아적 예술 제도를 거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의 시장성을 회의하고 거부하는 만큼, 딱 그만큼 거꾸로 다시 그들의 예술은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예술 관념인 ‘예술가’와 ‘예술 작품’으로 회귀하는 모순을 노출한다. 어떤 것이 ‘예술’임을 말할 때부터 그러한 발화와 명명의 행위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적 예술 제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의 존재와 진위 여부
  • 여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전제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예술관은 그 자체로 또한 일종의 페티시즘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 그노시스주의
  • 물질은 정신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며 이질적인 것이다. 바타유는 이 ‘낮음’ 자체가 지닌 고유한 성격과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낮음’과 ‘높음’ 사이에 이미 하나의 위계를 전제하고 있는 관념론적 체계와 결별한다.
  • 고양의 위계적 이분법을 넘어 발생하는 유물론은 그 자체로 페티시즘적인데,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낮음과 높음의 위치를 서로 치환하거나 전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두 극의 위계와 한계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위반하고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내의 맨발을 직접 보는 것을 금기시하는, 여자의 발을 〔눈으로〕 바라보는 일 자체를 일반적으로 부도덕하게 생각하는
  • 중국의 풍습 안에는, 페티시즘적인 사물에 대한 어떤 공포와 유혹이, 그리고 그에 대한 거부와 수용의 이중성이 있지 않은가?
  • 이를 좀 더 ‘은유적’으로 바꿔 묻자면, 빨간 구두에 담긴 발은 도끼에 의해 잘려나간 후에도 왜 그 춤을 결코 멈추지 않는가?
  • 바타유는 인간 행동 전반을 전유appropriation와 배설excrétion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의 대립 구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 전유와 배설은 인간 충동의 가장 근본적인 두 극을 이루는 것이며, 이러한 극성極性의 이원론은 바타유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다른 주제들, 곧 성과 속의 관계, 신성한 것과 더러운 것 사이의 근접성,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사이의 지양 없는 변증법 등에 대응하는 또 다른 도식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타유가 ‘위반transg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운동이 인간의 한계와 금기를 파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 그것들을 ‘확인’하고 ‘완성’시키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 “위반은 금기의 부정이 아니라 금기를 통과하여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 비천함의 유물론은 무엇보다 존재나 현존이 아닌 부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낮음(저속함)’과 ‘비천함’을 논하는 유물론이 부재의 형식을 띠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동질성의 사회가 배제하려고 하는 이질성에 대한 이론, 곧 그렇게 배제된 이질성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재로서의 이질성은 동질성을 초과하며 오히려 그러한 동질성의 조
  • 조건을 규정한다. 부재가 존재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질성이 동질성 자체의 가능 조건이 되는 것이다.
  • 동질성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리비도라면 이질성은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타나토스다.
  • 바타유가 말하는 ‘불가능한 것’의 개념은 단순한 저항성의 상징이나 진보에 대한 순진하고 낙관적인 믿음을 넘어선다. 진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한계와 불가능의 확인과 완성 과정의 진전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 직선적인 역사
  • 역사관은 순환적인 것으로, 금기와 위반의 반복이 그려내는 나선형의 운동으로 변용된다. 따라서 바타유가 위반이라는 개념을 통해 겨냥했던 것은 단순히 무조건적인 전복이나 낙관적인 진보가 아니라 ‘불가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인간과 사회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직시에 다름 아니다
  • ‘코기토Cogito’
  • 바타유는 『내적 체험L'expérience intérieure』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성 속에는 하나의 맹점tache aveugle이
  • 존재한다. 그것은 눈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눈 안에서처럼 지성 안에서도 우리는 그 맹점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의 맹점이 보잘것없는 것임에 반해 지성은 본성상 자신의 맹점이 그 안에 지성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를 원한다.”
  • 지성이 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바로 이 “맹점”은 곧 불가능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의 지성은 그 맹점에 도달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언제나 지성의 표상 작용으로부터 벗어나며 불가능이
  • 차지하고 있는 영역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 바로 이 맹점인 것이다.
  • 실재라고 하는 것은 상징계의 제도적이며 코드화된 질서로는 포착될 수 없는 어떤 ‘바깥’의 경험, 현실
  • 현실의 전부라고 여겨지던 언어적 구조로서의 상징계가 맞닥뜨리게 되는 일종의 “기묘한 현실l'étrange réalité”
  • 의미한다. 따라서 실재라고 하는 전혀 다르고 낯선 이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적인 세계가 조화와 질서와 언어에 의해서 약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혼돈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 바타유의 불가능성과 라캉의 실재 개념이 공히 머금고 있는 의의는, 불가능 또는 실재에 대한 환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은폐 작용이 결코 완벽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의식을 초과하며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실재는 끊임없이 의식의 장으로 넘어오면서 상징계라는 질서의 공간에 흠집을 낸다. 이러한 ‘불가능’의 세계, 멈추지 않는 실재의 침입으로 파악되는 세계는 분명 유토피
  •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불가능성과 실재의 개념은 이상주의와 진보에 대한 순진한 신념을 상정하지 않으며 초현실주의자들보다 존재사태의 ‘실상’과 ‘현실’에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 지젝은 이데
  •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과 은폐의 장치로서만 파악하는 평면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대척점에 라캉을 위치시킨다. 우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임의적인 환상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현실을 현재의 상태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를 ‘모르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현실적 차이들을 사상함으로써만, 즉 모든 노동을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으로 환원시킴으로
  • 환원시킴으로써만”
  • 물신숭배의 기저에 숨어 있는 폭력적이고 임의적인 동질화 과정이 가능해진다고 말했을 때, 동등한 것으로 교환될 수도 없고 동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는 노동이 바로 상품 물신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실재’, 곧 우리가 그러한 교환 과정 안에서 ‘알고자 하지 않는’ 실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바로 이어 마르크스가 또한 “그들은 이것〔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생산물들을 교환을 위해 가치로서 동질화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Sie wissen das
  • nicht, aber sie tun es”
  • ”31라고 말했던 것은, 곧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행하게 되는 어떤 행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이는 행위/실천praxis의 층위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실재를 ‘알고’ 있지만 마치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양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 는 것.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어떤 배후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이다.
  • 실재를 알면서도 그것을 직시하거나 인식하고자 하지 않는 이러한 이데올
  • 이데올로기의 작용과 심리는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페티시즘과도 맞닿아 있는데, 그 작용의 메커니즘이 상징적 세계가 결코 전체가 아니며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즉 ‘실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페티시즘의 가장 ‘전형적인’ 양태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대립항으로서의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부르주아 예술관을 ‘대체’하는 듯이 보이는 바로 그 지점으로
  • 지점으로부터 다시금 ‘무관심성’의 근대적 낭만주의 미학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실재를 은폐하려는 낙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 윤리의 자리는 페티시즘적이며 환상의 논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부인
  • 부인한다. 윤리가 언제나 어떤 선택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윤리적 행위란 바로 그 선택의 가장 근본적인 심급, 곧 공포의 중핵이라는 최종심급에 가장 근접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곧, 공포란 우선적으로 최대한 피해야 하는 무엇일 테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공포를 통해서만 윤리가 가능해진다면? 마치 죽음충동에 대한 ‘대항마’가 리비도적인 것이나 에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이듯.
  • “‘구대륙’에서는 자유라는 집시가 왕 노릇을 했지만, 이제 올 신세계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명사여야 하는 법은 없다. 부사인지도 모르고 접속사인지도 모른다. 팔품사 이외의 어떤 품사인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전지전능인 하나님의 주머니 속에는 여덟 개의 품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미골은 꼬리가 있었던 기념이 아니라 이제부터 거기서 꼬리가 생겨날 징
  • 징조인지도 모른다. 파리가 이렇게 번식하는 공기 속에서 그렇게 딴딴하게 달려 있었던 꼬리가 없어졌을 리 없다. 그렇게 미학적인 인간이 그렇게 미학적인 꼬리를 없애버렸을 리 없다. 그렇게 고적보존회 회원이 되기를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고적’이 인멸되어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리 만무다./ 이제 거기에 꼬리가 나봐라. 인생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고, 세계가 얼마나 밝아질 것이겠는가. 사람들은 우선 자기가 땅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깨치게 될 것이고, 하늘이 높다는
  •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서 있는 것이 어쩐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설레어질 것이고, 마침내 두 손으로 땅을 짚을 것이다. 마음에는 지동설의 현기증이 비쳐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손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만들어내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물건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물건이 없어질 것이다. 이름이 없어진다. 이름이 죽는다……./ “아 꼬리야, 얼른 나아라…….”/
  • 한편으로 망각과 부인을 통한 어떤 사상捨象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 윤리라면, 또 한편으론, 바로 그러한 윤리의 불가능성 위에서 비로소 가동되기 시작하는 것, 그 불가능성의 사건성 이후에 비로소 출현하는 어떤 것이야말로 또한 하나의 윤리가 아닐까? 윤리인가 불가능성인가 하는 선택적인 물음, 그 물음의 ‘선택성’은 어쩌면 ‘또는’과 ‘그리고’ 모두를 요청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결여 없이는 그 어떠한 현실도 없으며, 따라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결여’ 자체를 ‘박탈’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현실의 어떤 전복과 붕괴를 입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 데리다
  • 물음에 정확히 대답하는 것은 사실 어쩌면 반대로 전혀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그림’의 방식은 표상Vorstellung이나 재현Repräsentation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의 상연Darstellung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알튀세르가 연극 안에서 본 것은 희곡이라는 문자적 텍스트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무대 위에 올려놓은 조르조 스트렐레르Giorgio
  • Strehler의 연출과 구성, 곧 ‘상연’ 그 자체였다.
  • 이 연극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멜로드라마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적인 환영을 ‘상연’하는, 곧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그 연출의 방식 때문인 것이다.
  • 알튀세르는 이 연극에서 평론가들이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는 이유로 그를 지극히 주관적일 뿐인 ‘자기중심적 평론가’로 비난하기
  • 비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다른 평론가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비판이 가능해지는데,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자 효과가 아니던가).
  • 광대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갖고 있던 청춘의 꿈들도 죽어버린다.
  • 우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 기존하는 가시적 관계가 아니라 바로 저 관계들의 부재를 그림으로써,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듦으로써, 그 보이지 않는 틈, 그 비가시적 분열 자체를 ‘그림’으로써.
  • “베르톨라치의 작품에 심오함을 부여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대립이다. 한편에는 아무것도 일어
  • 일어나지 않으며 행동이나 전개를 유발하는 그 어떤 내부적 필연성도 없는 한 비변증법적 시간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내부적 모순에 의해 그 생성과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한 변증법적 시간(갈등의 시간)이.”
  • 일견 ‘변증법적’으로 보이는 연극의 내적 갈등들은 ‘잘못된’ 변증법의 연극적 사례들이며, 이를 타파
  • 타파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현실적 변증법으로 가는 길이 되고 있는 것. 알튀세르가 말하는 안과 밖은 먼저 이러한 대립으로서 규정된다.
  • 멜로드라마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한에서, 그러나 또한 그것이 이데올로기로서 드러나지 않는 한에서, 곧 이 (두) 조건이 (모두) 기능하고 충족되는 한에서, 사람들은 멜로드라마에 열광하는 동시에 그것을 또한 경멸할 수 있는 것이다.
  • ‘déplacement(전위/이동/거리두기/자리바꿈)’
  • 멜로드라마는 ‘민
  • ‘민중’의 미학,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이 아니라 바로 부르주아 미학의 창안물이라는 점, 곧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해 창안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실에서 쉽게 희석되고 망각된다. 그것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하나의 여흥이자 오락으로서, 생산을 위한 재충전의 여가로서,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경제적 부가물의 문화적 위치와 분과적인 예술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체제 안에서 연극의 자리place란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자리를 잘못 잡
  • 잡은déplacé’ 것, 따라서 ‘부적절한’ 것이며, 이러한 위계들의 혼동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의 미학적인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훌륭한 배치/장치dispositif로서 작동하고 있는 기제인 것이다.
  • “브레히트가 고전극의 문제 틀/문제 설정problématique을 전복했던 것은 바로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였는데, 그는 한 연극의 의미와 함의들을 자기의
  • 자기의식conscience de soi이라는 형식하에 주제화하기를 그만두었던 것이다. 이는 곧 브레히트의 〔연극적〕세계가 관객 안에서 어떤 새로운 의식, 진정하고 능동적인 의식을 생산하기 위해 자기의식이라는 형식하에 스스로를 철저히 재정립하고 형상화하려는 모든 요구들을 필연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멜로드라마적
  • 멜로드라마적인 의식이란 곧 부르주아의 자기의식이 노정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 것. 따라서 이 멜로드라마적인 의식, 연극의 미학적 이데올로기 안에는 하나의 분열이 있으며, 이러한 분열이란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 곧 미학과 정치, 철학과 실천을 단순히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중핵으로서의 절단이다. 브레히트 혹은 알튀세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변증법, 이러한 절단을 기초로 하는 다른 종류의 단절인 것. 부르주아적 자기의식의 변증법은 바로 이러한 단절을 ‘보이지
  •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거기에 ‘모순’의 자리란 없는 것이다.
  • 의식에는 하나의 단절이, 그리고 이 무無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
  • 헤겔G. W. F.
  • Hegel의 ‘자기의식적인’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변증법
  • 단순히 그것이 예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조건과 예술 그 자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당위에 대한 사유
  • 두 시간성 사이의 공존은 연극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지극히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우연성과 우발성이 연극적 사건(여기서 ‘사건’이란 연극 내적인 행동의 총체나 서사 구조
  • 연극 내적인 행동의 총체나 서사 구조 내의 전개적인 요소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데)의 어떤 필연성(들)을, 곧 연극적 효과의 필연성과 연극적 실천의 필연성을 모두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가능태’
  • 구조는 하나의 ‘관계rapport’이며, 또한 무엇보다 비시각적이고 비가시적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관계적인 관계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바로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잠재적’이다. 연극은 배우들에게는
  • ‘보이지 않지만’ 관객들에게는 ‘보이는’ 어떤 구조, 어떤 관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하나의 시차, 곧 배우와 관객 사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상이한 시간성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시차는 하나의 균열이자 분열이며, 이 ‘틈’으로서의 단절은 거울 관계로서의 동일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에게 근본적이었던 한 원리를 쉽게 다시 발견하게 되는데, 그 원리란 어떠한 형식의 이데올로기적 의식도 그만의 내부적 변증법을 통해 그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그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곧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변증법은 없다는 것qu'il n'y a pas, au sens
  • strict, de dialectique de la conscience, 다시 말해 그 자신의 모순들에 의거해 현실 자체에 도달하는 의식의 변증법은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모든 ‘현상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의식은 그 자신의 내부적인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과는 다른 것에 대한 근본적 발견la découverte radicale de l'autre que soi을 통해서 현실적인 것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 “그〔브레히트〕가 특히 생산하고자 하는 것은 자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인데,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의식(과 그 고전적 부산물인 통일성의 규칙들)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 미학의 이러한 형식적 조건들을 연극으로부터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연극들은 바로 탈중심적décentré인데, 왜냐하면 그 연극들은 중심을 가질 수
  • 왜냐하면 그 연극들은 중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환영들로 가득 찬 순진한 의식에서 출발하면서도 브레히트가 그러한 의식이 지향하는 세계의 중심을 만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기서 중심은,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언제나 어긋나à côté 있으며, 또한 그 중심은, 자기의식의 탈신비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환영을 넘어 현실적인 것으로 가는 운동 안에서 언제나 지연된différé 채로, 언제나 저 너머에 있다. 이러한 근본적 이유 때문에 진정한 생산인 비판적 관계는 그 자
  • 자체로서 주제화될 수 없으며, 또한 이 때문에 어떤 인물도 그 자체로 ‘역사의 교훈la morale de l'histoire’일 수는 없는 것이다.”
  • ‘탈중심화’되는 지연과 유보의 몸짓, 그리고 그를 통해 비로소 생산되〔지 않〕는 미학
  • 연극이 완성되는 곳은 무대라는 공간이 아니며 연극이 끝나는 시간 역시 무대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도 않고 완성되지도 않았지만 실제적 삶이 그 완성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 곧 무대에서 보이지
  • 않는 것을 보고 또 보이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몫이라는 것
  • 관객은 그 연극을 스스로 ‘상연’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연의 의미는 어떤 프로파간다에 도취되어 예술의 ‘교훈’들을 삶에 적용하는 도덕주의적 미
  • 미학이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 연극은 연극 안에서 완성되지 않지만,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연극의 바깥을 통해서 완성되어야 할 것이겠지만,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완성되는 것은 연극의 내부적 구조를 통해서인 것. 그리고 이러한 거리두기를 생산하는 연극의 내부적 구조야말로, 드디어 브레히트의 배우가 아닌 한
  • 명의 새로운 관객으로서 우리 앞에 선 알튀세르의 본령이며 동시에 그의 예술론이 지닌 아포리아이다.
  • 거리두기의 미학은 미학을 미학으로서 (재)생산하지 않으며 미학 그 자체와 거리를 두는 어떤 미학인 것.
  • 철학과 연극은 어떤 ‘수치스러움’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수치스러운 연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철학 또한 존재한다.
  • 철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기를 그치고 세계의 변혁을 위해야 한다
  • “철학이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신비화이기를 그치고 세계의 변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내부에서 어떤 새로운 실천을 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연극이 신비화이자 미식가적인 여흥이기를 그치고 세계의 변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연극 안
  • 안에서 어떤 새로운 실천을 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에 새롭게 도입한 것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에 대한 어떤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실천이다.”
  •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연극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곧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을 제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연극 자체의 새로운 실천을 감행하는 것
  • 것이 문제이다.
  • 이러한 실천의 ‘정위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제자리를 벗어나 제자리를 찾는’ 하나의 역설적 과정, 곧 ‘자리바꿈’과 ‘거리두기’의 과정을 통해서.
  • 전위/이동/자리바꿈/거리두기란 단지 연극의 부분적인 작은 요소들 안에서가 아니라 연극의 조건 전체에 대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말하는 새로운 실천의 본질이 되고 있다.
  • 예술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과학과는 다른 것을 가져다주는데, 그 둘 사이에는 대립opposition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différence가 있는 것입니다.
  • “철학은 과학과도 다른 것이고 정치와도 다른 것이다. 연극도 과학과 정치와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을, 철학과 정치를, 연극과 과학을, 연극과 정치를 동일화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연극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 안에서도 정치를 상연하는 자리la place qui représente la
  • politique를 점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를 점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그 자리를 발견해야 한다.”
  • “그렇지만 〔철학과 연극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차이가 남아 있다. 이 모든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 연극의 재료는 철학의 재료가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연극은 예술이며 철학은 이론이다.”
  • “연극 작품은 실로 새로운 관객의 생산인데, 이 새로운 관객이란 극이 끝날 때 시작하는 배우, 그 극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오직 시작하는, 그것도 삶 속에서 그렇게 시작하는 배우이다.”
  • 연극이 끝날 때야 비로소 그 연극을 시작하는, 무대 위 연극의 완성 이후에야 비로소 무대 밖 삶의 미완성을 시작하
  • 는 배우
  • ‘구상화가’
  • 주체라는 중심으로부터 ‘세계’가 조직되는데, 왜냐하면 인간 주체는 지각하는 주체로서,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따라서 그의 대상들과 그런 대상들의 의미에 책임이 있는 주체로서, 그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 ‘기형’을 비정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변형’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전도
  • “기형의〔추醜의〕 미학은 그 원리상 이러한 인간주의적 이데올로기 범주들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그러한 범주들에 대한 폐지도 아니며, 〔단지〕 그것의 단순한 변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크레모니니 작품에 나오는 인간의 얼굴들은 표현주의적인 것이 아닌데, 왜
  • 왜냐하면 그것들은 기형difformes이 아니라 변형/탈형태déformés이기 때문이다. 그 변형/탈형태는 형태의 결정적 부재이자 그 익명성의 ‘형상화’일 뿐이며, 인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범주들에 대한 실제적인 폐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익명성인 것이다.”
  • ‘정상적’ 상태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단순한 기형성의 개념은 저 익명성의 얼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익명성이란 ‘기형’이 아니라 ‘탈형태’로 규정되어야 하는 유물론적 예술론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 “모든 ‘인간’은 크레모니니의 작품 안에서 현존한다. 하지만 바로 그가 거기에 없다는 이유에서, (부정적인, 긍정적인) 그 이중의 부재가 그 인간의 실존 자체라는 이유에서, 그렇게 현존한다. 이런 이유로 크레모니니의 그림은 지극히 반인간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이다.”
  • 같은 ‘실패’를 어떻게 다르게 ‘반복’할 것인가
  • ‘미학 아닌 미학’,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
  •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볼 수 없는 것’(또한 그것이
  • ‘보이는 것’으로 전화되는 과정)
  •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 것인가? 이것은 여전히 하나의 문제이며, 우리는 이 물음에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으로, 일견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하나의 미학’으로, 그렇게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아직은, 하나의 답이 아니다.
  • 이러한 ‘부재’(혹은 심지어 어떤 ‘실패’)와 ‘불가능성’
  • 이것은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출발점일 것이며,
  • 완결된 대답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미완의 질문일 것이다.
  •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 것이니까.
  • 문제는 이러한 분류법이 정정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분류되고 있다는 하나의 ‘현상’인 것.
  • ‘에피스테메’
  • 누군가는 이에 대해 순진한 의심을 품기도 했겠고, 또 누군가는 이에 대해 두 번 이상으로 중첩된 긍정과 부정의 회로를 거쳐 정
  • 정당함과 부당함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 어디쯤에 이미 당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불행히도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 임화林和
  • 우리의 중점은 분류 체계 일반의 구성 요소와 그 법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분류법을 두르고 있는
  • 테두리가 만들어내는 여백, 어쩌면 이미 그 자체가 특정한 하나의 분류법을 미리 지시하고 구획하고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해야 할 바로 그 여백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여백’ 또는 ‘바깥’은 문학이 품고 있을 저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의 비가시성非可視性과 비인과성非因果性,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만드는, 그 원인 없는 시간에 원인을 부여하는, 가시성과 인과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 왜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인가? 어째서 8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화자의 시공간은 한 개의 야구장으로, 한 개의
  • 시공간은 한 개의 야구장으로, 한 개의 야구공으로, 그렇게 ‘축소’되어만 가는가
  •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 어느(혹은 ‘여느’)
  • 〔뒤도 말고, 앞만 보고〕 달려
  • 달려라 메로스, 혹은, 소년이여, 〔‘프로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야망을 가져라 등등의 뒤틀린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년에게 기이한 생존의 욕망과 기형적인 삶의 의지가 마치 일종의 약물처럼 투여되는 것이다.
  •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이 야구의 확대판이자 실측 지도였던 것.
  •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 세계는 주체가 구성하는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세계’일 수 있다
  • ‘노에마noema’와 ‘노에시스noesis’
  • “나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고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따름”
  • 가장 먼저 깨달았어야 했고 또 가장 먼저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인식론의 도식은 왜 이 소년에게 이리도 뒤늦게, 지각遲刻/知覺하여 도착했던가?
  • 우리가 한번쯤은 상상해봤을지 모를, 하지만 또한 상상하자마자 머리를 흔들어 머리 밖으로 몰아냈을지도 모를
  • ‘프로’라고 하는 인간 이상(또는 이하)의 것을 강요
  • 야구가 사라진 시대에 출간되었더라면 아예 서점의 야구 코너를 통째로 창시했을 법한, 야구에 관한 도서 목록 작성의 초고가 되었을 법한 다카하시의 소설
  • 나는
  • 나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 삶의 축소판과 확대판을 아우르는 울타리와 여백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
  •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 근대문학이란, 곧 근대적 상황 속에서 잉태되었고 소비되고 있는 근대 소설이란, 본래부터 겉으로는 ‘무타무주’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무사득점無死得點’의 만루 홈런 기회나 대량 학살과도 같은 ‘삼중병살三重倂殺’의 기회만을 노리는 기민하고 약삭빠른 심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그래서—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이—문학의 전장戰場 또한 결국은 피 튀는 연장전에 돌입
  • 돌입한 헤게모니 투쟁의 속편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반추하게 되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말했던바 ‘사회적 실천’의 책무를 떠맡은 중심적 예술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인다(하기야 근대의 종언뿐만 아니라 문학의 종언을 발음하고 발언했던 이가 어디 이 ‘일본인’ 비평가 하나뿐이었겠느냐마는).
  • 흘레붙을
  • ‘복음
  • ‘복음의 창궐’을 ‘복음’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창궐’로만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전제 조건의 한 형태
  • 아마도 이 새로운 물음과 인식의 소재들은, 마치 민족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국경선들처럼 엄연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확고한 분류법 그 자체에 대한 이의 제기일 것이고, 또한 하나의 물음이 또 다른 물음들을 촉발시키는 위반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래서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
  • 물음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류법 하나쯤은 잉태시킬지 모르는 하나의 작은 반례反例일지도 모른다.
  • 치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치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는 것
  • 영화 〈아는 여자〉의 주인공은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자 쪽으로 신중하게 투구해도 모자랄 공을 엉뚱하게도 뒤로 돌아 경기장 바깥으로 길게 내던져버린다. 그 공은 야구장을 가득 메운 모든 이들의 황당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멀리 멀리 날아간다, 달아난다, 뒤집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위반한다. 이제까지 ‘당연한 듯’ 존재했던 경기의 규칙들은 바
  • 로 그 한순간에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기이한 분류법의 일단이 반짝하며 출몰한다. 이 분류법은 투수가 마운드에 서서 상대편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면서도 몸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목격했을 때 새롭게 열리게 되는 하나의 분류법이다. “기록의 경기”(『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50쪽)인 야구에서 아예 기존의 기록 체계를 통째로 무시하는 또 다른 체계 하나가 찰나적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다.
  •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 “말이 있어 생각이 표현되니, 비로소 노래가 있고 사상이 있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와 역사, 종교와 사유의 기원을 말에서 찾는 것도, 말 속에 인간의 본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문학’은 그 말의 바다요, 생각의 하늘과 땅이요, 역사의 형상이요, 미래의 비전이다. (……) ‘세계문학’은 말의 편린이 아닌 총합이며, 집대성인 까닭에 인간의 전 영역
  • 영역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사랑과 평화와 구원의 기원이 담긴 또 하나의 바이블이다.”
  • ‘세계문학전집’ 한 질帙은 곧 그러한 근대적 담론과 생활의 풍
  • 풍경을 잉태하고 재현하며 애도하기 위한 하나의 질膣이기도 했으니.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 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놓은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우리
  •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인다. 어엿한 우리 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이는 ‘세계문학’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이 되고 있는데).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변방에서 누리던 고요한 평화는 곧 아득한 과거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할수록 세계문
  • 세계문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방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타자로서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세계문학전집은 한국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힐 것입니다.”
  • ‘세계문학’의 이데올로기란 어쩌면 언제부터인가 계속 동일하게 유지되어온 하나의 유서 깊은 ‘편견’일지 모른다.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우리 문학’이 민첩하게 포착하고 근원적으로 귀속되어야 할 어떤 “본향本鄕”으로 상정된 영역, 특수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러한 특수성을 넘어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정된 지점에 다름 아니다.
  • ‘고전’들은 국가의 역사와 민족의 문학이 어떤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세계적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근대적이고 변증법적인 길에 대해 실로 주옥같은 ‘명대사’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동시대의 역사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서 동참하고 있다는 거대한 역사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저 명대사들에,
  • 우리는 아마도 거의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문학’을 읽고 있다는, 그래서 우리는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는, 또한 그래서 우리는 저 ‘세계’와 ‘문학’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
  • 우리
  •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계’와 만날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세계’라는 개념을 어떻게 ‘문학’을 통해 변혁하고 쇄신하며 따라서 새롭게 창안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세계문학’이라는 개념과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근대성의 물음들을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만, ‘보편적’ 문제의 형식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고 ‘우리 문학’은 ‘세계문학’을, 어떤 정치 아래에서 어떤 미학으로 정의하고 재현하며 추구하고 있는가? 곧 이러한 ‘문학적’ 물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정치적’ 물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이란, 말 그대로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대외용/국제용이 아니라, 우리 문학의 ‘보편적 알리바이’를 위한 편협한 대내용/국내용
  • 의 ‘세계문학’일 뿐이다(‘세계문학전집’이 지닌 이러한 ‘국내성’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고전’들이 ‘학
  • ‘학생들의 논술 시험에도 좋다’는 식으로 선전되는 ‘교육적’ 광고 문구에서 가장 천박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러한 ‘세계문학전집’이 과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 우리의 ‘세계문학’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격렬히 반대했던 시애틀 시위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이티의 비극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과 코펜하겐 기후협약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우리의 ‘세계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답할 수 없다면, 아니 이러한 문제들을 물을 수조차 없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아니 그저 ‘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보편적 의미를 띨 수 있는가?
  • 이러한 문제들이 세계문학이라는 거대 서사가 지닌 어떤 ‘보편성’을 건드리는 것이라면, 동시에 우리는 그 세계문학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어쩌면 일종의 비교문학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 그리고 만약 세계문학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불편한 차이들과 불일치들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나의 처음에 나의 끝이 있다In my beginning is my end. / T. 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
  • ‘안온한’ 조성들의 해체와 재구축으로서의 ‘불온한’ 무조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그 반대로 ‘편안한’ 무조 사이를 갑자기 침입해 들어오는 ‘불편한’ 조성이 문제라는 것, 곧 익숙하던 어떤 것이 갑자기 낯을 바꿔 낯선/날 선 모습으로 등장하고 다가오게 되는 ‘두려운/낯선 것das Unheimliche’의 경험이 문제라는 것.
  • 신비하지 않은가, 때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 또한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 하나의 ‘분단 상황’, 세계에서 오직 유일하게 ‘근대민족국가’로서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하나의 ‘이중 국가’,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내 나라 내 겨레?)’가 처한 특수한 역사적/정치
  • 겨레?)’가 처한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술어겠지만, 나는 ‘우리’의 이 특수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민족/국민국가nation-state라고 하는 저 ‘역사적 보편성’의 가장 극명한 징후를 드러내는 독/약pharmakon으로서의 어떤 ‘특수한 보편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 ‘초월’의 자리란 어쩌면 바로 이러한 ‘포월匍越’의 자리에서 출발하고 완성되고 다시금 시도되는 것일 터.
  • ‘Marx’의 이름을 어느 쪽에서 어떻게 (한국어로) 전유하고 소유할 것인가 하는 ‘선택’과 ‘독점’의 문제는, 단순한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명명법의 투쟁이 되고 있는 것(덧붙여, 하나의 계급을 ‘근로자’로 부를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로 부를 것인가 하는 명명법의 문제 역시 이러한 ‘마르크스/맑
  • ‘마르크스/맑스’의 표기법이라는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첨언해두자
  •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단어 사이의 선택이야말로 정치적이며 미학적인 분류법의 투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일견 ‘부지런히 일하는 이’의 가치를 지극히 공평하고 중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한 ‘근로자勤勞者’라는 단어는, 노동운동 ‘따위’에 한눈팔지 않고 오직 가족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만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의 형상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는, 실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따라서 ‘May Day’ 또한 그저 ‘근로자의 날’이 되어야만 했던 것).
  • ‘내면’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더니즘’ 소설이 그 주제로 삼고 있는 개인의 공간, 그리고 그러한 개인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문학적 방법론인 심리 묘사에 대한 근대〔문학〕의 등록상표trademark가 바로 내면이다. 김영하가 예로 드는 “잡담, 괴담, 객담, 민담, 루머” 등의 다양한 이야기 형태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주지하다시피, 이 명확한 기준은 바로 그 명확성 때문에 흔들리고 요동친다.
  • ‘모더니티’는 바로 이러한 동요하는
  • 유동성 안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가장 명확한 개념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 가장 ‘모더니즘적’인 개념으로 자기증식을 행하는 것이다.
  • 근대의 가장 핵심적인
  • 문학 장르인 소설, 동시에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불시착’한 가장 ‘불확정적’인 문학 장르이기도 한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자 ‘마력’이 아니겠는가.
  • 작품은 상품이 되었고 다시 상품은 신격 또는 신격에 준하는 인격을 얻었다. 물신物神, Fetisch에 대한 마르크스의 놀라운 통찰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소설 역시나 이미 오래전에 물신이 된 것이었다. ‘무엇’임을
  • 묻지 않고 ‘누구’임을 묻는 것, 나는 바로 이 의문사의 ‘사소한’ 차이 안에서 모더니티 문학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최종적인 ‘거대한’ 징후를 목격한다.
  • 번역이란 단순한 일대일 대응의 옮기기가 아닌 것, 번역이란 오히려 무엇을 잃거나 덧붙인 상태에서의 어떤 변환 내지 전화轉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어떤 상실이거나 덧칠이다.
  • 필요
  • ‘이상’으로, 또는 기대 ‘이상’으로—곧, 필요 ‘이하’나 기대 ‘이하’가 아니라
  • 여기서의 ‘선택’이란 다양한 선택지들 사이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혀 아니다. 언어와 네이션은 기본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이러한 선택은 바로 그러한 극도의 ‘부자유성’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선택이 되기도 한다(따라서 이러한 선택의 ‘자유’에 대한 성찰은 그 자체로 가장 ‘근대적인’ 사유에
  • 속하는 것).
  •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또한 선택할 수 없는 것의 ‘선택적인 성격’ 그 자체를 노출시키는 이러한 선택의 불가능성이 바로 우리의 ‘근
  • ‘근대’와 그 ‘근대적’ 언어가 제출하는 가장 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문제이다.
  • ‘빛 속’의 공간이란, 빛 그 자체에 결부된 오래된 은유처럼, 일종의 개안開眼을 위한 광명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어둠
  • 어둠을 보기 위한 눈의 서툰 깜빡거림, 일종의 폐안廢眼을 위한 조건, 빛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조건이기도 하지 않은가.
  • 중요한 것
  • 것은, 인민은 어떠한 상황하에서 아편을 필요로 한다는 것, 곧 ‘실재’의 이름으로 환상의 ‘이름’을 걷어내기 전까지는, 인민은 아편이라는 ‘환상’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닐까.
  • 천착할
  •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국민학교’에서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울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안중근 의사가 지극히 ‘당연하고도 올바르게’ 살해한 ‘악당’의 보스였을 뿐이니까
  • 이응노, 송두율
  • 본업과 취미의 대차대조표와도 같은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이 빈약하기 그지
  • 그지없는 ‘이력서’ 한 장. 그 이력서 안에서 저 모든 이름들의 자리는 지워지고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가장 거대한 이름, 그러나 동시에 가장 왜소한 이름만이 처량하게 남는다. 이 근대는 무엇인가. 우리의 근대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일종의 ‘이중-번역된 근대double-translated modernity’가 아닐 수 없다
  • ‘번안’
  • ‘객관적’이고 ‘초극 가능한’ 근대의 역사를 쓰고 닫고 봉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대라는
  • 전염병의 병리학과 역학 조사라는 메타-이데올로기의 궤적을 쓰고 열고 해방하기 위해.  
  •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에서 다음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Übersetzung은, 역설적이게도, 원문을 적어도 보다 더 결정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 심는verpflanzt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은 더 이상 이 이외의 그 어떤 중
  • 중계Übertragung를 통해서도 옮겨질 수 없으며, 항상 오직 이러한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새롭고 다른 부분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무엇보다도 원문의 성립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번역의 언어가 원문처럼 읽힌다는 것은 번역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 될 수 없다.
  • 오히려 문자 그대로의 번역에 의해 보장받게 되는 충실한 번역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작업에서 언어의 보충Sprachergänzung에 대한 거대한 갈망Sehnsucht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 순수 언어의 ‘순수성’이란 언제나 언어 사이의 교통과 번역이 지닌 어떤 ‘불순성’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순수 언어die reine Sprache’는, 바로 그 순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므로 ‘순수 언어’란, 하나의 확고한 동일성으로
  • 언어’란, 하나의 확고한 동일성으로서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행과 이식의 행간에서, 언뜻, 순간으로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일 터.
  • 세계시민(코즈모폴리턴)
  • ‘문화적 상대론’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보편적 정의justice로 정의definition되는 다문화주의의 윤리
  • 무력한 그만큼 동시에 ‘폭력적’이기도 한 하나의 당위
  • ‘알타이 연합’
  •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 모든 번역이 ‘숙명적’으로 일종의 ‘의역’이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할 때, 사실 벤야민의 출발점도 이러한 ‘숙명적 의역’의 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는 또한 ‘제대로 된’ 직역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의역일 것이라는 ‘보편적’ 명제의 실제적/실정적 정체를 문제 삼는다.
  • ‘직역’의 영역과 ‘의역’의 영역이 상
  • 상충되지 않고 양립 가능하게 만나게 되는 어떤 ‘신비한’ 지점, 바로 그러한 간극과 이행으로서 번역이 갖게 되는 성격이 바로 저 ‘순수 언어’의 자리는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저 ‘순수 언어’의 ‘순수성’이란 오직 이러한 ‘불순한’ 교통 안에서만 사유되고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메타-언어’
  • ‘순수 언어’란, 그 말 자체가 주는 손쉬운 인상과는 다르게, 결코 ‘순진무구’하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주변적’이고 ‘매개적’인 역설적 ‘순수성’을 띠게 되는 것은 아니겠는가. 곧, ‘순수 언어’란 ‘타자의 언어’와 ‘타자의 이름’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 일종의
  • 이름’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 일종의 ‘보편적 고유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정치적 주체화란 곧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장벽’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딱 그만큼, 뛰어넘기가 극히 어렵다.
  •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 베르크
  • 메시앙
  • 비르투오소
  • 글렌 굴드Glenn Gould
  • ‘일반적으로’, 곧 여기서는 어쩌면 ‘뭉뚱그려’ 이야기했을 때 그렇다는 것, 또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혹은 ‘뭉뚱그려’ 말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를 쓸 수 없었다는 것, 아마도 저 “일반적으로”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모호한 ‘비언어非言語’의 지점일 것이다.
  • “결국 굴드에게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은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것이다. 이것을 피아노로 실현하려면 연주자는 스스로를 소비하는 대중이 아니라 작곡가와 일치시켜야 한다.”
  • 같은 것의 반복, 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것의 반복, 아니 반복됨으로써 오히려 동일하지 않게 되는 것들의 반복이 있다. 테제들은 동일한 것들을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반복하고 그 반복 안에서 어떤 전복을 이끌어낸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테제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 위에서 하나의 보편성을(칸트), 유물론적이지 않은 것 위에서 하나의 유물론을
  • 유물론을(마르크스), 역사적이지 못한 것 위에서 하나의 역사성을(벤야민), 그리고 정치와 가장 멀어 보이는 것 위에서 하나의 정치를(랑시에르) 수립하고 정식화한다.
  • 에릭 사티Erik Satie
  • ‘ambience’
  • 사티는 〈괴롭히기Vexations〉에서 단 한 개의 테제를, 곧 단 세 줄로만 이루어진 한 장의 악보를 제시한다. 이 악보의 지시문은 이 짧은 악구가 840회나 반복되어야만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1963년에 존 케이지John Cage가 몇 명의 피아니스트를 기용하여 19시간가량을 ‘소모’하면서 이 곡을 발굴/초연했지만, 결국 이 단 세 줄의 악보를 결코 ‘완주’하지는 못했다
  • 840번의 반복이 종국
  • 종국에 맞이하게 될 하나의 끝을, 우리는 과연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 아감벤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장치’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제도, 기구, 법, 치안, 철학적 입장 등 담론적이거
  • 기구, 법, 치안, 철학적 입장 등 담론적이거나 담론적이지 않은 거의 모든 것─의 집합이며, 이것이 ‘장치’의 첫 번째 정의를 이룬다. 그리고 ‘장치’란 언제나 구체적이고 전략적인 기능을 지니며 권력관계 안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또한 ‘장치’는 그러한 권력의 관계와 지식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어떤 교차점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이폴리트Jean Hyppolite
  • 장치 개념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범주 그 자체를 대체하고 치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 장치와 살아 있는 존재 사이의 구분, 바로 그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주체이다.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생체’와 ‘장치’ 사이의 관계가 빚어낸 결과로서 주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아감벤이 8절을 통해 진입하고 있는 곳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바타유의 계보를 따르는 이론 지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여기서 첨예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성스러움le sacré의 개념과 대립하는 신성모독/세속화profanation의 문제이다. 곧, 장치의 개념은 일종의 희생 제의sacrifice로 이해되며, 따라서 신성모독/세속화는 그러한 희생 제
  • 제의가 분리하고 구분해놓은 것을 다시금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역逆-장치contre-dispositif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 ‘옐름슬레우’
  • 내용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내용’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형식forme’의 측면과 ‘실질substance’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 소쉬르
  • “이러한 〔사고와 음성의〕 결합은 실질이 아니라 형식을 생산한다cette combinaison produit une forme, non une substance”
  • 레비나스
  • ‘G-W-G'
  •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장치
  • 장치라고 부르는 것이 에피스테메épistémè가 지닌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말해서, 에피스테메란, 담론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인 장치와는 다르게, 특별히 담론적인 의미에서의 장치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 둘째, “거짓으로부터 참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는 일,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장치입니다.”
  • 두 가지 ‘정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장치’의 개념은 푸코의 저 ‘에피스테메’ 개념
  • 개념을 대체하고 또한 확장하고 있다는 것. 둘째, 그러나 또한, 들뢰즈가 이미 예리하게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장치’의 개념에 의해 가능하게 된, 주체화 과정에 대한 ‘후기’ 푸코의 연구는 어떤 ‘단절’이나 ‘방향 전환’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연속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확인이, 푸코 개인의 이론적 발전사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사상사의 맥락에서 ‘장치’ 개념을 사유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하리라는 생각이다.
  • 자서전이란, 이데올로기가 가장 개인적이고 심층적으로 작동하는 내밀성의 공간, 그 ‘존재’의 장소를 이탈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부재’의 장소를 구성해주는 글쓰기의 형식
  •  일인칭은 언제나 삼인칭의 고유명사로 소급되고 환원되며 또한 대체될 수 있다고 하는 르죈
  • 자서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허구fiction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mensonge의 질서”
  • 허구의 질서 안에서 진실과 속임수의 구분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의 질서, 더 정확하게는 참과 거짓의 질서가 함께 작동하는 장 안에서만 그 구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자서전의 문제는 현실성réalité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성의
  • 문제가 되고 있는 것.
  • 자서전이라는 ‘자기규정’은, 결코 ‘독자적으로는’ 생각될 수 없는, 곧 텍스트에 대한 ‘내재적’ 분석의 방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일종의 ‘제도
  • ‘제도적’이며 ‘관계적’인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서전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소설이나 여타 장르와의 비교하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게 만들기’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 원형을 제시하고 있는 본원적인 상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고백록Les confessions』
  • “나는 이미
  • 정의의 기사redresseur des torts가 된 것이다. 정식으로 유랑 기사Paladin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단지 귀부인Dame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귀부인이 둘이나 있었다.”
  • 인용문의 앞에 서술된
  • 부분은 자신의 사촌을 “바보 당나귀 베르나르Barnâ bredanna”라고 부르며 놀리는 아이들에 대항해 루소가 싸움을 거는 내용이며, 그 뒷부분은 뷜송Vulson 부인 그리고 고통Goton 양과 가졌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 사촌 베르나르와 맺었던 이러한 ‘우정’이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일종의 ‘근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베르나르와의 우정은 인간관계의 어떤
  • 원형은 그것을 원형이게끔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 “나의 아버지가 이러한 상실〔아내, 즉 루소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 견뎌냈는지 나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결코 그 상실의 슬픔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그로부터 그녀를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 채, 내 안에서 그녀를 다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마다, 나는 그 한숨과 그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포옹을 통해서 그의 애무에 쓰디쓴 회한이 섞여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애무는 더욱 부드러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장 자크, 우리 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 아버지, 그럼 우린 울게 될걸요’라고 말했었다. 이 한마디 말에 아버지는 벌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신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그녀를 내게 돌려줘, 그녀 때문에 슬퍼하는 나를 달래줘, 그녀가 내 영혼 속에 남긴 빈자리를 채워주렴. 네가 단지 내 아들일 뿐이라면 내가 널 이렇게까지 사랑했을까?’ 아내를 잃은 지 40년 후에 그는 후처의 팔에 안겨 죽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전처의 이름을 되뇌고, 가슴속 깊은 곳에는 그녀의 영상을 간직한 채로.” (C, 7쪽)
  • 그녀의 영상을 간직한 채로.”
  • 우리는 이 일화를 전형적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일화는 기본적으로 ‘거세Kastration’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것. 여기서 루소의 탄생이라는 기표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기의를 항상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어린 루소에게서 그가 앗아간
  • 어머니의 존재, 곧 회귀 불가능한 존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루소가 ‘퇴행’하는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게 됨과 동시에, 또한 루소 안에서 어머니의 현전을 갈구하는 아버지에게서 루소는 아들이기에 앞서 여성이자 아내이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곧, 어린 장 자크는 아버지에 의해 거세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
  •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경련을 일으키는 포옹”과 “눈물”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다분히 ‘여성적’인 기질이 아닌가. 따라서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여성성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위의 인용문에서 “아버지”를 모두 ‘어머니’로 바꿔 읽어보면 이러한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 이 지점에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어린 루소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으레 빚어질 것이라 추측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출구’가
  •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에게서 남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어린 한스Hans의 사례, 저 유명한 프로이트의 한 증례이다.
  • “왜 〔성적인〕 속성들이 오직 위협을 통해서만, 게다가 오직 박탈의 측면에서만 수용되어야 하는가.”
  •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는
  • 거세의 메커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처음부터 부재했고, 그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모델’ 없이 ‘남근’ 역할을 학습해야 했던 것. 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와 형의 싸움에 끼어들어 형을 두둔하는 루소의 행동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형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말리는 루소는 일종의 ‘승리자’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루소의 행위는, 여성성의 이미지로 화한 아버지의 애정이 남성성(〓‘아버지’)으로 화한 형에게
  • 형에게가 아니라 바로 루소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실제로 어린 장 자크에게 부재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 그리고 그가 남긴 ‘소설책들’을 통해서, 다가갈 수 없는 현존으로 규정되고 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존재보다도 더 큰 영향력과 규
  • 규정성을 갖는다는, 이제는 일종의 원칙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설.
  • “왜 두 성性 모두에게 있어 어머니는 보다 근원적으로 남근phallus의 소유자, 즉 남근적인 어머니로 간주되는가.”
  • “왜냐하면 남근은 기표이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남근에의 욕망, 곧 ‘타자의’ 욕망이 어린 루소에게 어떻게 전이되고 그 자신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의 욕망은 “어머니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중요한 것으로 기능한다
  • 그러나 루소에게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있는지
  •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저 꼬마 한스의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오히려 바로 그의 탄생 ‘때문에’ 부재했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거세’되고 그 때문에 자기 처벌을 행하는 아버지에 의해서 루소에게 간접적으로 학습될 수밖에 없었다. 루소에게 있어서는 기표로서의 남근, 즉 상상계를 뛰어넘어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한 전범이 ‘원천적으로’ 부재했던 것. 루소에게 부재하는 것은 표면적
  •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남근의 전범으로서 작용하는 하나의 ‘남성성’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아버지는 여성성으로 현전하고, 부재하는 어머니는 루소에게 근원적으로 결여되었던—그래서 루소가 경험할 수 없었던—남성성으로 현현한다.
  • 바로 이 지점에서 루소가 ‘부재하는 남성성’을 체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 스스로 ‘선택’한 대상이 베르나르라는 사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 여기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베르나르가 보호받아야 할 여성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루소 스스로 구성해낸 최초
  • 최초의 남성성이 수호 기사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었던 사정, 곧 베르나르를 감싸고 보호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귀부인을 수호하는 유랑 기사의 이미지로 전환되게 되었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 에크리튀르écriture
  • 루소의 유년 시절 독서 체험이 그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첫 기억’으로 부상한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소설들, 그 안에서 어린 장 자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 “자기의 목소리를 통해서 어떤 목소리에 다시 생을 부여하는 것redonner vie à une voix à travers la
  • sienne.”
  • “모든 글쓰기는 말 속에 있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toute l'écriture est là pour combler un trou qu'il y a dans la parole.”
  • 음성언어는 현전을 약속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성언어의 성격은 다시금 루소의 탄생 이야기를
  • 성격은 다시금 루소의 탄생 이야기를 환기시킨다. 어머니는 루소의 현존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그 자신은 곧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이미지는 ‘도처到處에 편재遍在하는 부재不在’라고 하는 근원적인 존재 방식, 곧 목소리라고 하는 ‘청각적’ 절대성을 지닌 이미지를 머금게 되었으나, 동시에 또한 지속적이고 물질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자서전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기하는 ‘자기정당화’의 문제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서전의 ‘첫 번째 기억’이란 이미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재구성된 것이며, 그것은 항상 ‘현재의’ 저자에 의해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 그러므로 일견 직선적이고 비가역적으로 보이는 역사의 순서를 ‘그런 형태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첫 기억’을 살려내며 ‘있음직한 근원’의 모습을 그리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태초와 근원에 대한 현재의 대체보충이었던 것.
  • 따라서 기억과 관련하여 ‘근원보다
  • 더 근원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대체보충 안에 자리 잡게 된다.
  •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유명한—또한 동시에 ‘악명 높은’—하나의 가설
  • “동일성은 유사성이 아니”
  • 행간과 여백, 이것은 텍스트
  • 자체로부터뿐만 아니라 흔히 ‘텍스트의 외부’로 불리는 저 역사적 검증의 장으로서의 ‘유사성’의 공간으로부터조차도 하나의 ‘바깥’으로 규정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일 것이므로.
  • 저자와 화자, 화자와 주인공 사이의 ‘동일성(들)’을 가르는 어떤 틈새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이 틈새 혹은 구멍은 동일성의 즉물적인 외부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동일성의 한가운데에서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므로. 그 공간, 그 장소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보이는 부분들 속으로 침투를 거듭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에 대한 ‘(불)가능한’ 정의들 중
  •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알튀세르는 착란 상태에서 아내 엘렌 리트만Hélène Rytman을
  • 교살하고 금치산자 판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았던 것. 이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자서전들이 생의 말미에 저술된다는 새삼스럽지만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말미’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물리적 표현인 것만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는 금치산자로서 법적 책임을 면책당한 바로 그 시점이 어쩌면 이러한 자서전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말미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 완성되지 않은 완결의 시점, 통일적이지 못한 통일의 시점이 일종의 ‘전회’ 혹은 ‘일단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서전은 삶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회고’해가는 일종의 수행적performative 죽음의 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
  • 삶에서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찾아올 수 있으며,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어떤 하나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써내려갔던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사후事後에 작성되는 자서전은 또한 사후死後에 이루어지는 자서전이기도 한 것. 그러므로 자서전이란 하나의 ‘유언장’이자 ‘묘비명’이며, 그 자서
  • 자서전의 저자는 그러한 유언의 내용을 집행하고 증명하는 법적 주체의 모습을 띤다.
  • 니체는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초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신용으로auf meinen eignen Credit hin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편견Vorurtheil일까?”
  • 자신의 존재는 그 존재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숙명 혹은 오
  • 오래된 편견과도 같은 환상. 자서전은 이러한 ‘치명적’ 조건을 고스란히, 그리고 가장 ‘정직하게’ 안고 가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 실명實名을 잃음으로써 사회적 실명失明에 이른 저자
  •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그 자서전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진실성이란 저자가 자신의 삶을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한에서만 ‘진실’하다. 이러한 의미
  • 의미에서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이중적인 특성을 갖는다. 사실 자서전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동일성도 완전한 타자성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저자라는 주체의 성격은 그 자체로 병리적이며 징후적이지 않은가. 자서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법적 대리인’이며 또한 자기 자신인 것과 자기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걷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 
  • 말하자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 알튀세르는, 아직 한 번도 무덤으로 들어간 적이 없는, 하지만 동시에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온 저자인 것이다.
  •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내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든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이 던져준
  • 충격이다.”
  •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만들어진 존재, 따라서 기본적으로 허구 혹은 가상의 존재이다.
  •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서전 저자의 법적 자격이 박탈된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글쓰기의 권리, 그것은 ‘허구’에의 권리가 아니라 ‘거짓’에의 권리, 뒤집어 말해 곧 ‘가상’에의 권리가 아니라 ‘진실’에의 권리인 것(아마도 여기서 가장 큰 역설은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 ‘거짓’에의 권리가 곧 그 자체로 ‘진실’에의 권리가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 자서전이 반드시 ‘표면
  • ‘표면적인’ 진실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이 텍스트는 ‘순수한’ 자서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자서전은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는 오히려 온전한 ‘자서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표면적인 진실성을 부정하는 허구의 권리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가 필요했었다면, 그에게는 같은 강도로 반대 방
  • 방향에서 자신의 이 ‘자서전’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반의 언어’ 또한 필요했던 것. 따라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스스로가 자서전임을 부정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역설적 영역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신의 진술로써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 책,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불가능성’의 자서전이 된다.
  • 어떤 동문서답이 아니라 ‘나는 무엇
  •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정상성의 자서전이 갖는 질문에 대해 구문론적인 차원에서 ‘무시’와 ‘거부’로써 응수하는 것, “그들”이 갖고 있는 소외와 배제의 원리를 상대화시키고 원근법화시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 규범은 자신과 대조하여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경시하며 자신으로부터 용어의 역전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규범은 다양성을 통합하고 차이를 흡수하며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가능한 양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시되는 것se proposer은 부과되는 것s'imposer이 아니다. 규범은 자연의 법칙과는 달리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규범이 결코 유일하고 단순한 의미를 지니지 않음을 말
  • 말한다. 규범이 제공하는 준거와 해결의 가능성은 가능성만이 문제가 되므로, 역전이 가능한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포함한다.
  •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정상성의 자서전이 내포하고 있는 규범적 언어를 전복시키고 그 규범 안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극성의 가능성을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서전에 대한 일종의 역전과 위반을 수행하려는 시도에
  • 다름 아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자’로서의 광인은 바로 그 ‘이해받지 못함’이라는 성질로 인해 다른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타인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혹은 선지자를 특징짓는 성격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나의 인류애Humanität는 인간의 상태를 동정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가 인간을 동정한다는 사실을 참아내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나
  • 나의 인류애는 지속적인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이다.”
  • 다수에 의한 고립과 배제를 또 한 번의 고립과 배제를 통해 그 관계를 역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이러한 시도는, 그러므로 정상성을 ‘약올리는’ 행위이다. 정상성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안전’하
  • 정상성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안전’하며 ‘웃음’이 아닌 ‘하품’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 안전성이란, 존재에 대한 일종의 ‘배반’일 것. 비정상의 자서전에 있어서 그러한 안전성은 참을 수 없는 권태이며 타성에 젖은 억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전도된 결벽성과 위반의 차별성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게 된 이후로 이 사람은 눈이 없고 저 사람은 귀가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은 다리가 없고 혀나 코 혹은 머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 코 혹은 머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가장 사소한 일이다./ 나는 그보다 더 심한 것도 보고 있고 또 봐왔는데, 그 대부분은 그 각각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몇몇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것들이다. 즉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많이 갖고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없는 인간들,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아가리 또는 하나의 커다란 배 등 어떤 커다란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인간들〔이 바로
  • 그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들을 전도된 불구자umgekehrte Krüppel라고 부른다.”
  • 저 ‘건강성’에 대한 논의는 이렇듯 ‘불구자’에 대한 규정을 전도시킴으로써 극에 달한다. 광기에 휩싸인 자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소위 ‘정상적인’ 자는 “커다란 눈”밖에는 갖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쪽을 불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정상성은 불구를 불구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드러내면서 고꾸라진
  • 고꾸라진다. 반대로 ‘근본적인’ 건강함 속에서 질병은 오히려 그러한 건강함의 일부로 파악되는 것이다.
  • 외상은 또한 하나의 ‘외상外傷’이 되는가
  • ‘양심’이 일종의 외상값인 것처럼. 따라서 ‘어떤 특정한 경로를 따라’ 양심은 피해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또한 그 ‘외상〔값〕’이란 어쩌면 하나의 ‘외상Trauma’이기도 하다.
  •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희들을 찾으라고. 그리고 너희가 나를 모두 부정했을 때에야wenn ihr mich Alle verleugnet habt 비로소 나는 너희들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 자서전 안에서 어떤 극적인 반전과 깨달음이 성장의 전개 과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서전을 시작할 때부터 그 전도된 문법 안에서 회심의 전개 구조는 거부되고 부정되고 전복되는 것이다.
  • 그의 건강한 “눈병”은 ‘진리’에 눈먼 것이 아니라 ‘죄의식’에 대해 눈먼 것이다(이는 또한 이러한 ‘눈병’이 역설적으로 어떤 ‘건강성’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실명失明’의 경험은 단순한 무지無知, ignorance의 경험이 아니라 비지非知, non-savoir의 경험인 것. 그리하여 나
  • 나는 모든 ‘진정한’ 예언자는 ‘맹인’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 실명의 경험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다른 것’을 보려는 의지로 전환된다. 모퉁이를 돌아서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구석을 본다는 것, 그것은 시각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본다는 것, 즉 역설적으로 ‘맹점盲點을 본다는 것’이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 것에 다름 아니다.
  • “지성知性 속에는 하나의 맹점tache aveugle이 존재한다. 그것은 눈œil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눈 안에서처럼 지성 안에서도 우리는 그 맹점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의 맹점이 보잘것없는 것임에 반해 지성은 본성상 자신의 맹점이 그 안에 지성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를 원한다.”
  • 이 맹점이 바로 비지非知이다. 지성은 맹
  • 맹점 너머에 있을 어떤 ‘의미’를 갈구하지만 비지로서의 맹점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이다. 지성의 맹점은 지知가 아니므로 거기에는 의미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 지로써는 맹점을, 그 ‘실명’의 경험과 체험을 파악해낼 수가 없다.
  • 균열은 본질적인 것이며, 들뢰즈가 말하듯, “모든 것은 심연abîme에 의해서 시작된다.”
  • “균열fêlure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감내하는subie 균열, 즉 타락으로부터 영광으로(곧 사랑하는aimée 균열로) 나아간다.”
  • 진정한 것은 비약과 돌출이며 결국 균열이다. 그러한 균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규정짓는 것, 모순과 차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해소되어야 할 일종의 ‘중간 항’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자체를 사랑하고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자서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출하면서 취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균
  • “균열fêlure은 내면적이지도 외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경계선상에 있으며 감각할 수 없고 형태가 없으며 관념적인 것이다.”
  • 내면은 혼란스러움에 반대되는 ‘평온한’ 안정이 아니며 ‘가벼움’이라는 대립항을 상정하는 저 무거운 ‘무게’도, 끝을 모르는 ‘깊이’도 아니다. 바타유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내면이란 혼란과 공포 그 자체인 것.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가 말하듯, 그리고 바타유가 다시 그 말을 이어받아 변용시켜 말하듯,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것은 이성의 잠이고—그것은 괴물
  • 괴물을 낳는다.”
  • 이 괴물은 우리가 어렵사리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진정한’ 내면의 모습이다. 이성이 잠들면, 하나의 ‘꿈’이 깨어난다.
  • 맹인의 언어는 그 자신에게도,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도, 결국 ‘눈이 부신’ 것,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
  • 앞에서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곧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가 이미 언급했던바, 죽음과 태양에 대한 공통적인 체험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과 태양이라는 존재를 쉽게 마주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바타유의 ‘송과선 눈œil pinéal’이라는 은유가 탄생한다. 이 눈은 바로 실명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하는 것. 기존의 두 눈이 아니라 뇌 속의 송과선이 자라나 머리 위를 뚫고 솟아나는 또 다른 눈, 그
  • 눈은 태양을 직시하는, 따라서 또한 죽음과 대면하는 제3의 눈인 것.
  •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인 이상, 원칙적으로 죽음은 매 순간마다 돌출할 수 있다.”
  • “자서전적 사색spéculation autobiographique”이란 곧 죽음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니다. 비정상성의 자서전은 단순한 삶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속되는 죽음의 이야기, 곧 죽음으로써 비로소 삶을 살게 되는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 따라서 결
  •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 따라서 결국 그러한 글쓰기 안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곧 자기에 대한 ‘동일성identité’의 문제이며, 이는 자서전이 ‘자기에 대한 글쓰기’라는 일반적인 정의만 떠올려봐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 곧 죽음과 태양을 바라보는 일에 준하는 문제이다.
  • 그렇다면 이것은 ‘낭만주의’로의 회귀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로의 복귀인가.
  • 자서전의 공간은 고독의 공간임과 동시에 소통communication의 공간이며
  • 니체가 말했듯이 “어쩌면 내가 산다고 하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의
  •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뜨거운 혹한酷寒의 공간이다.
  • 들뢰즈는 먼저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계열들을 추출해내고 있다
  • 1. 해석interprétation─의미sens─잠언aphorisme─의사/생리학자médecin/physiologiste. 2. 평가évaluation─가치valeur─시poème─예술가artiste.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기존 형이상학의 표면적 과제였던 ‘인식’ 또는 ‘진리의 발견’을 ‘해석’과 ‘평가’로 대체한다. 두 계열의 첫 번째 항들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내고 있다. 해석은 의미를 결정하는 작용이고, 다시 그 의미들의 위계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평가라는 작용이다(두 계열의 두 번째 항들).
  • 평가라는 작용이다(두 계열의 두 번째 항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회가 취하는 서술 전략이 바로 잠언과 시가 되는 것이다(두 계열의 세 번째 항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을 기존 철학들과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이러한 형식적 차이가 이미 “철학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구상une nouvelle conception de la philosophie”이며 동시에 “사유하는 자와 사유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une nouvelle image du penseur et de la pensée”를 함유하고 있다고 본다
  • 잠언은 해석의 기술임과 동시에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의 기술임과 동시에 평가의 대상이기도
  • 하다. 해석자로서의 철학자는 현상을 하나의 징후 또는 증상symptôme으로 파악하여 그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의사’이자 ‘생리학자’이며, 그 의사의 언어가 바로 잠언이다. 또한 평가자로서의 철학자는 ‘관점들perspectives’을 창조하고 기존의 가치들을 비판하는 ‘예술가’이며, 그 예술가의 언어가 바로 시인 것이다(두 계열의 네 번째 항들). 따라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니체가 요구했던 ‘미래의 철학자상’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예술가이자 의사이다─한마디로, 입법자législateur인 것이다.”
  • 들뢰즈는 “입법자로서의 철학자가 지닌 두 개의 덕목들vertus”에 대해 말하고
  • 있다
  • 니체에 따르면, 그 하나는 “기존에 있던 모든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비판된 가치들 이후에 다시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 니체는 철학이 이미 소크라테스 때부터 어떤 “타락/퇴화dégénérescence”의 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과 외관, 참과 거짓, 지성과 감성 등의 이항 대립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야말로 바로 그 “형이상학을 발명한invente la métaphysique”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로부터 삶에 우선하는, 삶에 대해 우월
  • 우월한 지위를 갖는 가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진, 선, 미, 신성神性 등등. 따라서 인간의 삶은 그러한 가치에 종속된 수동적인 것이 되며 “스스로 가치 폄하하게se déprécier” 되었다는 것. 칸트 역시 인식의 오류나 도덕적 오류들을 규탄했지만 인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이상 그 자체, 도덕성moralité 그 자체, 그 가치들의 기원과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한 니체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철학은, 미래의 철학
  • 철학은, 영원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철학은 시의적절하지 못한intempestive 것이 되어야 하며 항상 그래야 한다.”
  •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란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부여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의지가 원
  • 원하는 것이 힘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ce qui veut dans la volonté”이 바로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 “하나의 힘이 명령을 하는 것도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의 힘이 복종하는 것 또한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가 갖는 두 가지 성질, 곧 긍정affirmation과 부정négation 사이의 전도를 말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능동적인 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때 긍정은 으뜸가는 첫 번째 가치가 된다. 여기서 부정은 단지 긍정의 향유jouissance에 부속되는 여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반대로 수동적인 힘들에게
  • 있어서는 부정이 첫 번째 가치가 된다. 긍정과 부정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이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긍정이란 그 자체가 다수적이고multiple 복수적인pluraliste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은 그렇게 복수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에 발맞춰 부정은 하나 되기를 부정하는 것, 곧 일원적이며 단수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 니체가 “허무주의Nihilismus/nihilisme”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의 힘에 반대되는 수동적인 힘과 부정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는 현상이다
  • 약자 또는 노예가 승리하는 것은 힘의 구성을 통해서가 아
  • 승리하는 것은 힘의 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전염contagion의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힘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전염의 결과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타락/퇴화”인 것이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를 단순히 역사적인 계급 대립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문이다. 이것은 “질적 유형학typologie qualitative”의 문제
  • 곧 고귀함과 천함이라는 성질의 구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승리가 뜻하는 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가 창조하기créer를 멈추고 단지 의미하기signifier만
  • 을 행한다는 것(여기서 들뢰즈는, 니체를, 저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저자로서의 마르크스와, 또한 접속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곧 지배하기를 욕망하고 돈, 명예, 권력 등의 기존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역설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약자들에 대해서 강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 들뢰즈는 이른바 “니체적 심리학psychologie nietzschéenne”이 이뤄낸 몇 가지 ‘위대한’ 발견들을 다음과 같이 다섯
  • 가지로 정식화하고 있다: 1. 원한le ressentiment─이것은 “네 탓이야c'est ta faute”라고 말하는 심리 상태. 심리학적으로 투사projection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곧, 약자가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행동action에 있다고 보고 행동 그 자체를 수치로 여기고 능동적인 모든 것에 반기를 들며 따라서 삶 자체를 죄악시하게까지 되는 수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2. 양심의 가책la mauvaise conscience─이제 “내 탓이오c'est ma faute”라고 말하는 단계. 심리학적으로는 내사introjection의 기제라고 하겠다. 수동적인 힘이 자기 자신을 응시하
  • 응시하며 어떤 잘못을 자신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단계이다. ‘원죄’ 또한 이러한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의 ‘전염’이 수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금욕주의적 이상l'idéal ascétique─이제 심리학적으로 승화sublimation의 단계가 오게 된다. 수동적이고 나약한 삶을 원하는 것이 이제는 궁극적으로 삶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곧 무無에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삶에 우선하고 반대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세우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비판의 모티브를 또한 기독교에 대한 바타유의 비판 속에서도 만날
  • 기독교에 대한 바타유의 비판 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계는 “무로서의 신Dieu-Néant”과 “수동적 인간Homme-Réactif”의 결합으로 표현되고 있다
  • 따라서 인간은 ‘우월한’ 가치들이 부과하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짐꾼이자 노예 같은 존재가 된다. 삶 그 자체가 짊어지기 힘든 부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이전 단계들에서 탄생하게 되는 이러한 사유의 범주들이 바로 자아, 세계, 신, 인과성, 목적성 따위라는 것이다. 4. 신의 죽음la mort de Dieu─이제 회복récupération의 순간이 온다. 말하자면, 인간이 신을 죽이고 새로운 짐을 떠안는 단계.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며 그
  • 단계.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며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신을 대체하고자 한다. 니체의 생각은 이렇다. 곧, 신의 죽음 그 자체는 분명 거대하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계속되며 실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우월한 가치들이라는 미명하에 삶의 자기비하와 부정이 계속되는 것이다. 단지, 우월한 가치들이 이제는 인간적인─저 유명한, ‘너무나 인간적인’─가치들의 모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도덕이 종교를 대체하고 유용성, 진보, 역사 등의 개념이 이전의 신적인 개념들을 대체하는 식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
  •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노예가 “신적인 가치들의 그늘 아래에서à l'ombre des valeurs divines” 승리를 구가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통해서par les valeurs humaines” 승리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 인간은 신을 대체함으로써 현실la Réalité로 복귀하고 긍정의 의미를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긍정이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 단지 “당나귀의 긍정Oui de l'Âne”일 뿐이라는 것이다
  • 5. 마지막으로, 마지막 인간le dernier homme, 그리고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l'homme qui veut périr의 단계─마지막
  • 단계─마지막으로 종말fin의 순간이 온다. 허무주의의 절정에 선 마지막 인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인간이다: “무를 의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낫다Plutôt un néant de volonté qu'une volonté de néant!”
  • 이 마지막 인간을 넘어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허무주의는 완성되며 또한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정Minuit”의 시간이다
  • “허무주의는 극복되었지만, 그것은 그 자체를 통해 극복된 것le nihilisme vaincu, mais vaincu par lui-même.”
  •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영원회귀가 똑같은 것의 반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체의 비밀, 그것은 영원회귀가 선택적sélectif이라는 것이며, 그것도 이중적으로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 이는 사유와 존재의 양태 측면에서 모두 선택적이라는 말이다. 이 중 특히 존재의 측면에서 영원회귀가 갖는 선택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바퀴roue의 비유를 들고 있다. “바퀴의 운동
  • 은 원심력을 띠며 모든 부정적인 것을 〔밖으로〕 쫓아낸다. 존재는 생성을 긍정하기에 그러한 긍정에 대립하는 모든 것, 허무주의와 수동성의 모든 형식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거한다.”
  • 첫째,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지배하려는 욕망이나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하지 말 것. 둘째, 니체가 사용한 약자와 강자라는 용어를 사회 체제의 권력에 대입
  • 대입하지 말 것. 셋째, 영원회귀를 고대 그리스나 인도 또는 바빌론에서 발견되는 시간에 관한 순환적 사유로 이해하지 말 것, 또는 영원회귀를 똑같은 것의 회귀, 똑같은 것으로의 회귀로 이해하지 말 것. 넷째, 니체의 말년 작품들을 광기의 결과로 파악하지 말 것.
  • ‘生은 가학적이다.’
  • 실제로 머리 안에 가지
  • 가지런하고 바지런한 줄들이 그어진 공책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 올곧은 한 줄의 글로 똑바르고 정직하게 써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왠지 이 문장이 떠올랐을 때는, 그 생각이 그렇게 문장이 되고 언어가 되었을 때는, 마치 그것이 절대로 한 줄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될 언어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 세상은 오역誤譯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도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상상적으로.
  • 하나의 문장을 번역한다, 이미 잘 번역되어 있는 하나의 문장들을, 다시금 오역한다. “누가 아니랍니까? 얘기 좀 해봅시다.
  • 아주 가끔씩, 비가가 아니라 경쾌하고 진취적인 음악을 자신의 배경음악BGM으로 삼는 걸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는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시선의
  • 구걸이다. 청각이 시각을 이끌어가는 이 들리지 않는 비가는, 그러므로 전혀 슬프지 않다. 어딘가 무척이나 뒤틀려 있는 희극, 가장 좋게 봐줘도 조야한 희비극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 이것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지하철이라고 하는 이동 수단을 하나의 연장된extended 연희의 장소로, 일종의 공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의 한 반증이다.
  • 신이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비해, 없는데도 마치 ‘있는 듯이’ 제사를 올리는 저 공자의 유물론은,
  • 그래서 얼마나 우월한가
  • 그래서 저들은 저들의 신에게 아무것도 따질 수 없는 반면, 나는 어제 제사 내내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변변찮은 영력靈力을 지닌 조상님을 상대로 이것저것 따지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이다
  • 모든 일이 그렇듯, 모든 일의 문제점은,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 우리의 시대는 어쩌면 또 다른 고딕의 시기였다. 고층 빌딩의 날카로운 첨탑들이 하늘을 찔렀고, 하늘은 그렇게 찍소리도 못 내고 다
  • 다시 땅으로 내리꽂혔다.
  •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 머리가 아파왔고, 그 통증은 두통도 현기증도 아닌, 복부腹部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머리에서 느껴야 할 통증을 배에서 느끼다니, 이런 우라질 역설이. 그런데 그 복부는 내 몸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안이 아니라 내 바깥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 죽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허파를 벌떡거리며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지극히 미신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 ‘보편성’을 바라보고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이란, 오히려 저 특수성의 ‘특수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의 특수성을 표가 나게 돌출시킴으로써, 그 특수성이 일반성 ‘일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밝히는 과정에서 오롯이 드러나게 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조어造語, 혹은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슬로건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뿌리 찾기’가 유효할 것인가 성공적일 것
  • 것인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쩌면 “왜 인간은 자신의 뿌리 찾기 같은 것에 빠져 있는가 하는 의문”
  • 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 물론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그러므로 거짓말에도 신호등처럼 색깔이 있다).
  • 보편성과 일반성은, 마치 굶어 죽은 귀신처럼, 이렇게 누군가의 발목을 계속해서 감싸 쥐고는, 이렇게 누군가의 차 천장에 낮은 포
  • 포복 자세로 바짝 붙어서는, 찰싹 달라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주 소박한, 반면 아주 사치스러운, 그래서 결국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상상 하나를 해본다.
  • 필요한 만큼의 삶은 언젠가는,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딱 그만큼, 부족한 만큼의 삶이 될 것이다.
  • 이상하게도 필요란 언제나 적당함이라든지 중간쯤이라든지 하는 것을 전혀 모른다. 언제나 필요는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필요는 그래서 무엇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항상 비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만들어낸다
  • 필요는 나로 하여금 욕망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결핍을 알게 해준다, 뼈아프게(정신은 뼈다).
  • 매료라는 단어가 마치 조미료처럼 떠오르는 새벽이다.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홀려 있고, 나의 몸은 젖은 빨래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 있다. 풀려나가야 할 일도 없는 듯 느껴져 나의 몸은 약에 물을 섞고 물에 독을 탄다. 흐느적거리거나 휘청거리거나 허우적대고 있다. 어푸어푸, 비틀비틀.
  • 엉망진
  •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다. 통합이 아닌, 단순한, 아니 단순하다기보다는 순수한, 어떤 혼재混在.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장님은 머리가 아니라, 손이 아니라, 어둠으로 그림을 그린다. 목소리가 아니라, 초점 없는 눈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 반대, 반대가 아니라면 등이 붙어버린, 그래서 다른 곳을, 두 방향을 바라보는, 서로 마주볼 수 없는, 물고기의 눈알들. 내 안와眼窩 안에 움푹 들어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눈알들이다. 나는 알 수 있었고 또한 볼 수 있었다. 아주 투명해
  • 투명해서 가장 둔탁한 고체까지도 통과시킬 것 같은 눈이 있는가 하면, 아주 깊고 깊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여간해선 틈을 찾지 못할 것만 같은 눈도 있었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구석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 있었다.
  •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뜻일까? 하지만 또한, 이만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충고’가 또 있을까?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보고
  •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일까? 나에게 눈은 그렇게 하나의 흔적기관처럼 달려 있었거나 또는 점점 그 퇴화의 속도를 가속하고 있었다. 모기들은, 세상이 잊어버린 한구석, 낡은 물웅덩이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이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엉성하고도 영세하게, 이런저런 동물들의 피를, 특히나 저 물고기들의 피를, 절실하고도 게걸스럽게 빨아댈 것이었다. 
  • 머리를 감싸 쥐어도, 귀를 틀어막아도, 그 재잘거리는 소리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낮게 들려온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갓 건져낸 듯, 시커먼 구덩이 속에 갓 튀겨 건져낸 듯. 지글거리면서 가까워졌다가 이글거리면서 멀
  •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몸이 아프다, 따라서 마음도 아프다. 왜 몸과 마음이라는 말은 이렇듯 두 갈래로 분절articulation되었을까?
  • 단어들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골라내거나 덜어내는 나쁜 습관은, 편식偏食이기 이전에 일종의 도벽盜癖이다.
  • 이 도벽이 목을 죄어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피해의식과 죄의식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단순과 복잡의 이분법을 들이댄다고 한다면, 나의 문제는 내가 너무 복잡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단순해서 생기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라고 생각해버리기로 작정한다.
  • 훈련소 때의 몇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조사가 행해지는데, 자살을 생각해보거나 시도해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예’라고 표시한 나를, 다들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죽음을 연습했던 저 언어적 실험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아니, 그럼, 당신들은 정말 한 번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그런 얼굴이 그들에게는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 여기서 나가고 싶다, 떠나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떠나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패착의 한 사례이다, 그리 주관적이지도 않고 그리 객관적이지도 않은.
  • I.N.R.I.
  • 거짓된말들의기소중지섣부른시도가부른재앙과위궤양그것에게다가가기그래서는아무말도못하고돌아서기재를뿌리고돌아서기그렇게돌아서다가흙에서왔으니다시흙으로돌아가라이르고사망선고가내려져도계속길을걷고있는너는그래안개가꽃처럼피어있던저녁이었지우리는일찍밥을먹고일어나산책을떠났어산책이라고부르기에는조금멀고힘든길이었던가그길가에버려져있던시체한구가전혀신경쓰이지않을만큼그건사실불에타서떨어져죽은시신이었는데도그만큼우리는너와나에집중했었는데우리는집중하고있다고생각했는데사실은거꾸로그시체가우리를그냥모른척통과시켜주었는지도모를일이야
  • 거짓된말들의기소중지섣부른시도가부른재앙과위궤양그것에게다가가기그래서는아무말도못하고돌아서기재를뿌리고돌아서기그렇게돌아서다가흙에서왔으니다시흙으로돌아가라이르고사망선고가내려져도계속길을걷고있는너는그래안개가꽃처럼피어있던저녁이었지우리는일찍밥을먹고일어나산책을떠났어산책이라고부르기에는조금멀고힘든길이었던가그길가에버려져있던시체한구가전혀신경쓰이지않을만큼그건사실불에타서떨어져죽은시신이었는데도그만큼우리는너와나에집중했었는데우리는집중하고있다고생각했는데사실은거꾸로그시체가우리를그냥모른척통과시켜주었는지도모를일이야달밤과태양의낮내리쬐는추위와살을에는열기속에서발을동동구르면서이고난이언제끝날까헛된헤아림만을계속하고있었어아직설익었잖아너도나도알다시피해지는저녁을등뒤로낮게날아가는까마귀를눈치챈건단지그울음소리때문이었지별다른건없었어검은색깔의새는까마귀말고도많으니까신호등은빨간색이되기도하고파란색이되기도하니까시간이조금만더빨리갔으면하고바랄정도로우리는죽음에주려있었던거야허기져있었다고전혀허기질게없는것에대해그렇게울상을짓고있다고되는일은아무것도없잖아라고가장보편적인충고나던지고해도되고안해도그만인그런말이나툭하고던지고넌못죽어서안달이지하지만내가널대신죽여줄거라고는기대도하지마나는자선사업가가아니니까라고나는거만한거부나재수없는재벌처럼말했지딸랑딸랑무엇을경고하는지도모르는종소리가요란스럽게귓가를스치고지나간다땡땡땡학교를파하는학교종이울리고아이들은미친듯이거리로쏟아진다이만큼해방적인장면이또있을까어지러워태양이저흙먼지들을좀봐저먼지들은마치공기를대체하려고잔뜩벼르고있는것같잖아이야기속에서길을잃었다가다시돌아간페이지는이미누군가에의해서찢겨져있었어마치책대여점한구석에나만이알수있도록소중하게숨겨놓은성인만화의가장중요한장면처럼말이야누런종이였어빛이바래바삭거리기까지하는종이가아니라단지빛깔이그랬단말이야역시나책에도색깔이란건있는법이니까난똑똑히기억하고있어빛이바랜것들은전부똑똑히기억할수밖에없거든이쪽서가부터저아래쪽서가까지죄다읽고기억하고있으니까서쪽으로해가진다최후를맞이하는거지누군가는그렇게져버린태양이다시동쪽에서떠오를거라고선전하고삐라를뿌리며다니고있어그러는척하는거라고어차피내일다시보란듯이나와서약을올리겠지남의땀을도둑질하다니언젠가저태양
  • R.S.V.P.
  • 세상 사람들이 조언하는 것처럼, 적에게서 배워라, 친구에게서가 아니라
  • 파토스
  • 로고스
  • 에토스
  • ‘우리 시대의 섹스는 콘돔이라는 감옥 안에 비닐 포장된 채로 감금당했다!’ 성해방주의자인지 산아제한정책반대자인지 모르는 누군가가 이렇게 외친다.
  •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되어왔던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 여전히 마치 새로운 발견처럼 선전된
  • 선전된다. 그러니까 이제 빨갱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숫제 하나의 ‘질병’이 된 셈이다, 감기나 암 같은. 인플루엔자는 마치 로고스를 지닌 듯 진화와 변태를 거듭해 차악이 아니라 차선이 되었고, 암은 ‘암적인 존재’라는 말에서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듯이 이 사회의 필수적인 에토스, 곧 필요악이 되었다.
  • 포이어바흐
  • 학자들은 언제나 세상을 강간해왔을 뿐이야, 그들은 오르
  • 오르가슴이라는 것에 대해 뒤틀릴 정도로 오만한 환상을 품고 있는 변태들이지, 사실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내버려두느냐, 그것일 텐데 말이야. 자연주의자인지 생태주의자인지 모를 어느 누군가가 그렇게 다시 덧붙인다.
  • Feuer-bach
  •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저 성인만화의 가장 중요한 한 페이지처럼,
  • 왜 타인은
  • 나의 무의식인가, 왜 타인은 나의 무의식의 가장 깊은 요체인가, 아니, 왜 타인은 나의 무의식 그 자체인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내 손 안에 있지 않음을 느끼는 것,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 나를 움직이는 동력임을 내 스스로가 모르〔는 척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히스테리에 대한 가장 완벽한—가장 완벽에 가깝게 완벽에 수렴하는—정의일 것이다.
  • 가슴속에 많은 것들을, 알게 모르게, 알고도 모르게, 쌓아두는 일. 내 안에는 무의식의 말들이, 곧 타인의 말들이, 차곡차곡
  • 길가에 내버려진 시체 더미처럼, 쌓여 있다. 따라서 내게 쌓아두는 행위는—이를 기어코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부르려고 한다면—일종의 지병일 것이다, 속병일 것이다, 알음알이, 앓음앓이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쌓여 있는 것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 묵은 말들이다, 말들의 무덤이다. 그 무덤가에서는 꽃이 핀다, 아니, 부족하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 무덤은 숫제 꽃들로 넘쳐난다고, 범람했다고,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고, 그러고는 어디서
  • 떠내려온지도 모르는 쓰레기 더미들과 시체 더미들을, 다시금 가져다 채워주었다고.
  •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을 한 것이다.
  • 꽃들은, 말들은, 아름다운 가시를 지니고 있다. 그
  • 가시들은 꼭 무언가를 찌르고, 말들은 반드시 계절의 변화를 겪는다, 곧, 지거나 핀다. 가시가 무언가를 찌르게 만들어졌다는 말은 일종의 목적론일 것이며, 그 가시 역시 시간의 풍랑을 겪는다는 말은 일종의 숙명론일 것이다.
  • 누군가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도 했고, 또 누군가는 가
  •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비는 언제나 이미 한참을 굳어 단단해진 땅 위로 흘러내렸고, 가랑비는 언제나 옷이 흠뻑 젖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부슬부슬 오는 듯 마는 듯 흩뿌리기 시작했다. 강우降雨는 항상 사후적事後的이〔었〕다. 비가 내리면 창문을 닫는다. 물이 들어차지 않게, 말들의 물이 더 이상은 들어차거나 쌓이지 않게. 그러니까 비를 막으려고 닫는 창문의 다른 이름은, 언제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었〕다.
  • 드문 것은 드물기 때문에 고귀하고, 고귀한 것은 고귀하기 때문에 드물다
  • 죽었다 깨어나도 진짜 ‘모더니스트’조차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달아
  • 깨달아버린 나는, 너무 늦게 도착해버린 패배주의적 혁명가이거나 너무 오래 살아버리고 너무 짧게 앓아버린 빛바랜 피식민지인 둘 중의 하나겠지.
  • 좌절은 이미 애초에 태초에 주어져 있었고, 그 태초라는 기원조차도 태초나 기원이라는 말이 있기도 훨씬 이전에 이미 허구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
  • 널따란 레스토랑에서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다. 이건, 한낮에 나를 엄습하였던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먼지와 오물을 털어내려는 몸짓 치고는, 너무 소박하거나 또는 너무 사치스러운 행위일까?
  • 니시타니 오사무西谷修
  • 마그레브
  • ‘이중 번역된 근대’
  • 우리는 이를 통해서도 ‘민족’과 ‘국민’의 개념을 이른바 ‘현상학적’으로 정위치(혹은 탈-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 ‘민족’에 기초한 ‘국민’의 성립이란 ‘정적 현상학’의 논리성에 해당할 테지만, 그에 비해 ‘발생적 현상학’이라고 할 것이 주목하고 규명하고자 하는 지점은, ‘국민’의 성립이 지닌 ‘법적/논리적’ 성격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민족’, 그 허구적 구성물의 ‘발생적’ 구조이다. ‘민족’과 ‘국민’의 해체라는 작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후자의 현상학뿐만 아니라 저 양자의 현상학적 과정을 모두 동시에 수행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작업일지 모른다.
  • 스며들어 취하기를.
  •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데, 이곳 지하는 어딘가에서 근대近代를 바로 뜯어온 것 같
  • 같기만 하다. 피가 뚝뚝 듣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뜯어온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데, 난 여기서 무슨 서투른 개화기적 욕망을 맛보려는 것일까? 나는 십대라는 나이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청소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중의 몇 푼 되지 않는 돈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동네 유지나 사장님도 아닌데, 이 다방이란 또 무슨 잡종의 잡스러운 풍경이란 말인가,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신의 어중간함을 꽤나 어중간하게 인지
  • 인지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게 말했어요/ 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주의하면서 걸어갑니다/ 내가 갈 길을 살펴보면서/ 모든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마치 그 빗방울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듯이.”
  • 머리카락을 하얗게 밀면서 나는 항상 무언가와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무언가와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그렇게 나는 머리를 하얗게 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예의를 갖춘 노크 소리라기보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무자비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다지 크다거나 소란스럽지는 않았는데 그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 안에 그렇게 거대한 살기殺氣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미시微視안의 거시巨視 어떤 것들은 순간접착제처럼 정말 순간이야 순
  • 순간으로 달라붙어서는 꼼짝도 안 하지 걸어오고 있었다
  • 심지어 태양 안에서도 어둠을 볼 수 있잖아 너무 밝으면 눈이 멀어 더듬더듬 더듬어갈 뿐이야
  •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 ‘고백 아닌 고백’, ‘증언 아닌 증언’
  • “하지만 그것은 지금 그런 연극으로밖에 국민국가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정통성을 설명하는 논리를 스스로 부수고 또 부수지 않으면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벌써 국민국가는 파탄 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완고한 연극이 세계 여기저기에서 지지되어 각 나라에서 ‘강한 국가’를 바라는 이들의 모범으로 추켜세워졌죠.”
  • 영어의 ‘세계화’에 대비되는 다른 축에는, 바로 그 동일한 영어의 ‘세계성’이 가져다주게 되는 어떤 ‘국지성’이 있다.
  • 아마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은 일면 맞는 말이겠지만, 또한 어쩌면 중은 스스로 제 머리를 깎을 수도 있겠다는 것. 파마머리 자체가 전혀 ‘영구적이지permanent’ 않은 것처럼, 스킨헤드 그 자체에는 어떤 고정되거나 확정된 정치성이 없다.
  • 얼마를 내주고 얼마를 빼앗기면서 나는 이 世上에 태어날 수 있었던가.
  • 아무런 利文도 남지 않을 가장 無益한 行動 속에서, 나는 어떤 聖스러움을 찾고 싶었다, 말하자면, 젖고 싶었다, 흠뻑, 씻어내고 싶었다, 더럽게, 비에 젖은 街販臺의 新聞 위로,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잉크가, 死文처럼 번져 내린다.  
  • ‘nation’, ‘national’을 한자어로 옮긴 메이지 초기의 단어인 ‘국민’의 문자 그대로 의미는 ‘나라의 백성’, 즉 ‘나라가 다스리는 백성’인데, 이와 같은 함의를 역어로서의 ‘국민’이 계속 지녀온 셈입니다. 패망 이전까지의 일제에서도, 최근까지의 남
  • 남한에서도 ‘국민’이 형식적으로 일체의 국적 소유자를 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 엘리트의 동원, 계몽의 대상인 피치자被治者라는 뉘앙스를 강력하게 풍겼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모든 피치자에게 하달下達되는 ‘계몽 국가의 진리’였으며, ‘국민의례’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국가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권리와 자율을 강조하는 서구의 ‘시민’의 상像이 아닌, 병역과 납세, 그리고 각급의 학교를 통한 이념 주입의 대상임이 주요 특징이었던
  • 메이지 시대의 ‘국민’의 상을 그대로 닮아버린 셈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구한말에 한반도 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하는 국민이 되자’고 외쳤던 사람들 중에서는, 다들 알아볼 만한 독립 운동가들도 꽤 많았습니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과 같은 경우에는 잡지 『서우西友』의 한 논설에서 ‘국민’을 ‘필부匹夫’라고 하면서, 필부임에도 국가적 의무를 담당하고 국가를 위해 일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습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상식대로, 한
  • 한국의 독립 운동가가 ‘국민의 권리’로서 ‘국가를 위해 복무할 권리’를 가장 우선시한 셈입니다. 정치적으로 독립을 지향했다 해도, 신문명을 메이지 일본이 중역하면서 변질시킨 서구의 기본 틀 안에서 이해한 것이야말로 한국의 애국적 계몽운동의 비극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들이 일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 ‘국민’이라는 일본화된 서구 개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 무엇을 번역했나, 아니 그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나? 번역은 그것이 일종의 매개임으로 인해 또한 동시에 언제나 하나의 왜곡일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번역은 그것이 ‘번역’이기에 자신이 항상 일종의 매개이고 왜곡이라는 사실을 쉽게 감추어버린다. 언어와 언어가 매개되는 방식인 번역은 따라서 역사적 패러다임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 어떤 번역어들은 단어가 갖는 발음과 강도强度 그리고 가치라는 측면에서도 또한 서로 투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더욱 교묘하고 은밀한 번역의 방식이다.
  • 번째, ‘Marx’의 번역어/음차어는 ‘맑스’인가 ‘마르크스’인가? 두 번째, ‘labourer’의 번역어는 ‘근로자’인가 ‘노동자’인가?
  •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야마토 정신〔大和魂〕
  •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
  • 문화인류학의 개화가 갖는 이면은 서
  • 구 문화의 자기분열이다.
  • 만남은 또한 언제나 충돌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만남이라는 행위 자체가 항상 어떤 종류의 두려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그러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 이들은 언어도 기억도 역사도 문화도 서로 공유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날것으로 만난다. 그리고 이 날것은 또한 언젠가는 익혀져야
  • 하는 것. 타자와의 첫 만남이 갖게 되는 형식이 대부분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문화가 마치 당연한 역사처럼 여겨질 때, 그리고 그러한 역사가 다시금 어떤 의문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연으로 위장될 때, 그때 우리는 우리 시대 이데올로기의 핵심부에 서 있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가 잘못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역설하고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실상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잘못 되어’ 있지 않다).
  • 이데올로기란 폭력적이고 입체적인 저 인류학의 자기분열을 조화롭고 평면적인 자기통합으로
  • 바꾸어주는 삶의 위약placebo일 것이므로.
  • 바로 그러한 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치료의 순간이다. 가장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가장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러나 그 앞에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벙어리 같은 치료의 시작점. 그 치료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그 치료란 무엇보다 일종의 위장이며 은폐였을 텐데
  • 개인個人, individual (그러니까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번역했던 이 ‘일본어’ 또는 ‘한국어’)
  • 눈앞에 펼쳐진 타자는 개인이 아니라 한 무리의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다. 그들은 아직 ‘명명의 마법’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딱 그만큼 ‘마법적인’ 존재이다. 그 집단은 그가 알고 있는 인간의 집합—곧 ‘개인’으로서의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합—이 아니며, 단지 뭉뚱그려 요약할 수 있는 한 무
  • 무리의 종족일 뿐이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이론들은 단지 문자 위에서 홀연히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을 흥건하게 적셨던 피 위에서 비로소 설 수 있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자
  • 의식의 시선 앞에 날것으로 드러난 육체, 그 앞에서 언어와 사고는 마
  • 마비되어버린다. 따라서 구조적인 폭력이란 언어와 사고가 자신들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을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발동시키는 폭력이다(그 이전에는 폭력은 언제나 안전하게 숨겨져 있다, 웅크린 채 발톱을 감추고 있는 언어 속에).
  • 사진은 언제나 신비한 하나의 정지, 따라서 죽음과 재생의 순간을 가리킨다
  • 무엇이 잘못 되었던가? 회의하고 후회하지만,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단순한 숨은 그림 찾기나 틀린 그림 찾기의 여흥이 되지 않기를.
  • 역사는 돌이킬 수 없고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므로. 만나서 대화하고, 그 웅얼거리는 대화를 다시, 불가능한 언어로, 계속 번역하게 될 것이므로.
  • 아날Annales 학파
  • 낙엽만 뒹굴어도 폭소를 터뜨리고 찬바람만 불어도 눈물을 떨어뜨리던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마루야마 마사오
  •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
  • 첫째, 마루야마가 ‘근대’라는 개념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말은 다시 바꿔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근대성 일반’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
  • 아니다. 다양한 제각각의 근대성이 존재하는 것이지, 근대성 일반이란 없다는 것이다.
  • 번째 요지는 좀 더 세부적인 것, 곧 ‘근대’라는 용어의 사용법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말하자면 마루야마는 ‘초극
  • ‘초극(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던 근대, 그것을 곧바로 옹호하거나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초극이 주장된 근대 그 자체를 따져 묻지 않고서, 마루야마 같은 학자들이 품었던 강한 파시즘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이른바 저항의 언설이 옹호하는 근대 개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어떤 근대 이념이 옹호되고, 그리고 그 근대가 미확립된 국가 사회의 구조적 병리를 드러내서, 비판하는 근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 사상사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다시 이 가장 기본적인 정의definition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언제나 다시 반복하게 되는, 하지만 매번 다르게 반복하고 발음하게 되는, 이 질문은 내게는 그런 종류의
  • ‘강박적’ 질문이다.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 ‘지나학’
  • 말이 말을 말로 넘어가려 하듯, 몸은
  • 몸으로 몸을 넘어가려 한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말은 오직 말로써 넘어가야 하고, 그와 똑같이, 혹은 평행하게, 오직 몸은 몸으로써만, 몸을 씀으로써만, 넘어갈 수 있다. 초월超越은 그렇게 넘어가는 것, 곧 언제나 하나의 이행이자 이동하는 몸짓이지만, 무엇보다 그 초월의 몸짓은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 재귀적이며 회귀적으로, 매번 같은 곳을 향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다.
  • 말 앞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어눌한 말 더듬거림이 될 수밖에 없고, 이 몸 앞에서 몸짓은 언제나 고꾸라지는 불구의 움직임이 되어버린다.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고 싶은데, 그만 그 더듬거리는 말끝에 들러붙거나 말 안 듣는 몸 끝에 억지로 목발을 덧댄다. 말을 말로써 몸을 몸으로써 온전히 살아내기도 전에 말과 몸의 저 천근 같은 무게에 먼저 짓눌리는 것이다.
  • 판켄드리야〔五官動物〕
  • 슬프고
  • 도 경이롭지 않은가.
  • 거짓말 같은 진실, 진실 같은 거짓말이다.
  • 나는, ‘몸’의 단계를 졸업하고 ‘말’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말, 말로 말 되어질 수도 없는 ‘마음’인데 하물며 그것에 ‘몸담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 몸, 그러한 말과 몸을 ‘가진’—가지고 있다고 ‘상정된’—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
  • 포월匍越
  • 태초에 말씀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득한 태초였을 뿐이다. 이 사회는 태초의 ‘말씀’이라는 종교적 체험이 하나의 제도, 하나의 법이 되어버린 체계이다. 이 체계는 하나의 ‘질서’를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이 질서 안에서 말은 존재를 가진 하나의 신神이 되며 그 신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이 질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분으로 대표되는
  • ‘일반적인’ 형법에 기초해 있다. 사회 안에서 이러한 질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한 체계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가장 ‘자연스러운’ 법률을 구성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그러므로 모든 ‘이야기’, 모든 ‘서사’의 시작에는, 하나의 균열, 하나의 흠집이 있다).
  • 당굴
  • 마을 사람들에게 당굴은 사회의 도덕적 중심으로서 하나의 구조를 가
  • 가능케 하는 지위를 의미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그 구조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 새 당굴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서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반면 노당굴이 새 당굴의 눈빛 속에서 본 어떤 혼돈, 그리고 그러한 혼돈을 바라보는 노당굴의 시각은, 이러한 사회 체계의 존속과 안녕이라는 문제로부터 이미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 중요한
  •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투. 이러한 불안과 혼란은, 깨지기 위해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살해meurtre’의 씨앗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마을 사람들의 것과 노당굴의 것—은 사실 새 당굴의 ‘패륜적’ 행위, 곧 ‘악惡, le mal’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질서를 파괴하며 기존의 사회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악행’을
  • 지극히 위험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한 사회의 도덕적인 체계 안에서 습득되고 유포되는 것이다. 반면 노당굴은 무질서와 방황 또는 악과 혼돈 속에 어떤 ‘깨달음’의 씨앗이 있다는 기본적인 시각에서 그러한 ‘악행’을 기존의 도덕적인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단초 혹은 전조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을 넘어서 있는 것, 그러한 구분을 가능케 한 도덕 체계 전반에 대한 회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 그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황할 뿐이다.
  •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
  •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 lange er strebt”
  • “실재le réel, 또는 실재로서 지각되는 것이란, 곧 상징화symbolisation에 대해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 섬돌
  • 죄와 벌의 관념 자체가 한 사회 체계의 질서, 곧 도덕으로부터 연유한다
  • 죽음에 직면한 섬광 같은 순간, 죽음을 생물적으로 거부하는 몸부림의 시간이
  • 지난 후에 찾아온 어떤 차분하고 고요한 순간에, 한 어머니를 만난다.
  • ‘어머니’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먼저 그 어머니는 남성과 여성
  • 등의 성性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 “남자도 여자도”
  • 아닌, 무성無性이면서 동시에 양성兩性인 존재인 것이다.
  • 여기서 어머니로 ‘상징’되는 시원은, 언어와 언어 아닌 것, 여성과 남성 등이 분화/분절화articulation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를
  •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직접적으로는 새 당굴과 섬돌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 곧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볼 수 있다. 또한 노당굴의 어떤 회의에서 시작된 저 구도의 계보상에서, 그리고 가장 표면적으로는 마을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제도적인 당굴의 계보상에서, 노당굴과 새 당굴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아들 관계이다(이 부자 관계는 두 인물이 공히 서로 느끼고 인정하고 있는 가장 표층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 섬돌이와 천치녀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태어난 자, 한 시대와 한 체계의 문을 닫고 다음 세상을 여는 자라는 신화적인 의미를 획득하면서 두 사람의 ‘아들’이라는 ‘기호학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새 당굴은 하나의 육신으로서는 죽었지만, 그 죽음은 동시에 2부와 3부로 이어질 어떤 길들의 작고 소박한 씨앗, 하지만 동시에 폭풍 같은 파괴력을 지닌 씨앗
  • 씨앗을 품고 죽은 죽음이며, 이후 그 ‘죽음’의 씨앗으로부터 다시 ‘삶’의 씨앗이 싹터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 ‘구도求道’의 계보, 말 그대로 ‘길을 구하는’ 계보 안에 어떤 ‘대속代贖’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차적인’ 섬돌이의 죽음이 아니라, ‘이차적인’ 새 당굴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놈은 죽어야 된다는”
  • 선과 악의 도덕적 논리, 그 제도적 법률의 〔악〕순환을 끊고 새 당굴은, 시간적으로는 한 시대를, 제 스스로는 한 육체를 닫는다. 섬돌이
  • 섬돌이와 천치녀, 그리고 젊은 당굴은 이렇게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무언가를 닫고 다시 열 준비를 하는 ‘시원’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
  • 말과 법과 제도로 유지되어오던 사회는 이 카오스의 덩어리 속에서 완전한 영점零點으로 접근한다. 새 당굴이 이렇듯 자신의 죽음으로써 닫는 한 시대의 말미는 역병의 창궐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그 역병은 단순히 신체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교적인 신열身熱/神熱, 볼 수 없는 것을 봐버린 이들이 앓게 되는 어떤 불치의 열병에 가깝다. 섬돌이와 당굴의 죽음이 이들에게 ‘병’이 되고 ‘독’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
  • 받아들일 수도 없는 종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영점으로부터 인물들은 제각기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 역병 이후에, 이 말의 죽음 이후에 두 종류의 생물이 탄생하고 두 방향으로의 ‘진화進化’—이는 어쩌면 ‘역진
  • ‘역진화逆進化’일 것인가?—가 이루어진다.
  • ‘하원갑下元甲’
  • 태양을 가려주었던 말의 차양과 신의 구름이 걷힌 것이다.
  • 마치 ‘당연한’ 듯 규정되고 있는 시대 설정은 사실 지극히 임의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며, 문제는 사실 그 ‘당연함’에 있다는 것
  • 한편 ‘서양’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현대 사회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거대 서사’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
  • 만하다.
  • 나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적’ 동양은 사실 저 상징적 ‘서양’의 질서 안에 이미 편입되어 있는 것
  • ‘역사적인’ 문제 제기에 대한 하나의 ‘비역사적’ 해답
  • 성聖과 속俗의 개념 쌍에 입각해서 독해될 수 있다. 속의 세계는 생산, 노동, 삶, 교환, 일상, 도덕의 세계임에 반해, 성의 세계는 소비, 유희, 죽음, 증여, 〔도덕을 넘어선〕 윤리의 세계이다.
  • 배의 선장을 용왕께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나 여자는 항해에 액운을 준다는 생각 등은, 먹여야 할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와 정당성에 입혀진 ‘비합리적인’ 구실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그 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실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자체가 중요하다.
  • 말이 죽은 이후의 세계, 곧 성스러움의 질서가 없어진 속만의 세계에서는 이 가장 현세적인 욕망, 곧 생존의 욕망만이 꽃을 피운다.
  • 이른바 ‘축생도畜生道’의 세계가 바로 그것. 그들에게 죽음이란 단지 생명 활동의 끝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며, 이는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질서가 부재한
  • 상황에서 이어지는 생물학적, 혹은 ‘의사擬似, pseudo-유물론적’ 귀결이다.
  • ‘바보들의 배Narrenschiff’
  • 우리는 인간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이후부터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카트린드리야〔四官動物〕에게 하나의 감관이 더해져 판켄드리야〔五官動物〕가 되었을 때, 그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났던 하나의 감관은, 다름 아닌 ‘죽음’을 응시할 수 있게 된 감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 벌의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감관이었을 것.
  • 성스러움에 대한 인식과 추구란 곧 연속성에 대한 갈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연속성에 대한 추구란 유한한 삶을 넘어 무한에 가닿고자 하는 종교적인 갈구이다. 곧 ‘삶 속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그러한 갈구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른, 실로 다양한 형태의 술어들로 표명되어왔다. 범박하게 말하
  • 말하자면, 기독교적으로는 ‘신과의 합일’, ‘천국의 약속’ 등의 예를, 불교적으로는 ‘아상我相과 윤회의 고리를 끊고 이를 수 있는 해탈’ 등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바타유가 말하듯, “존재를 불연속성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은 언제나 가장 폭력적”
  • 여기서 ‘성스러운 폭력’이란, 한 존재가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한계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비록 순간으로나마—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오히려 ‘순간으로서만’—무한과 죽음의 질서인 연속
  • 연속성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인신공희人身供犧
  • 노당굴은 최초의 균열을 의미하며 그 균열과 회의를 물려받아 한 시대를 닫는 이가 바로 새 당굴임은 이미 앞서 지적했던바, 그가 그렇게 닫은 한 시대로부터 다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인물들
  •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반면 점쇠는 ‘〔이미 알았던 것을〕 다시 찾으려’ 섬에 남는다.
  • 바람쇠의 행동선이 개척과 개발, 집단과 외재적 혁명을 통해 나아가는 직선의 선이라고 한다면, 점쇠의 행동선은 갱생과 순환, 개체와 내재적 회귀로 나아가는 나선형의 곡선이다.
  •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천치’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 말, 말씀이 신화와 역사 속에서 거의 언제나 ‘남성’의 전유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질서에서 볼 때 언어를 ‘결여’하고 있는 여성은 단지 ‘천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 ‘매트릭스matrix’
  • 섬순이는 속의 질서
  • 속에서 교환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무엇보다 대를 잇고 종족을 보존할 여성성의 이미지 그 이상으로 기능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생물학적 여성에 충실한 인물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대지’는 수동적인 여성 또는 풍요로운 어머니로서만 드러난다. 풍랑이 불어닥치는 험난한 바다 위에서도 어쨌든 그 여성은 새로운 씨앗을 품고 보듬어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할 모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섬순이는 마지막까지 배〔船/腹〕 위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반면, 3부의 누이는 성
  • 성의 질서 속에서 일방적인 방향으로 증여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다시 한 번 바타유적으로 말하자면, 증여의 의미는 생산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순수한 소비와 낭비, 소진 또는 과잉, 넘침이다. 곧 누이는 ‘희생’되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이 된다. 그 여성은 풍요롭고 넉넉한 대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유혹적이고 잔혹한 ‘자연’으로서의 어머니이다.
  • ‘피험被驗’
  • 의도와 목적은 이미 하나의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오히려 점쇠가 마지막에 도달한 어떤 ‘상태’는 그런 의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의도와 목적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다.
  • 점쇠가 누이의 살해를 거쳐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깨달음이 어떤 ‘필연적인’ 과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은 원래 점쇠가 지녔던 목적이나 의도와는 얄미울
  • 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곧 그 깨달음의 과정 자체는 ‘필연적인’ 것이나 ‘목적론적인’ 것은 아니다.
  • 점쇠가 처음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했던 행위들이 지극히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데에 반해, 나중에 그가 얻는 일종의 ‘깨달음’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놓아버린 듯 보이는 상황에서, 마치 우연이나 축복 혹은 기적처럼, 그러나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하나의 필연이자 거대한 저주처럼, 그렇게 그에게 다가온다. 그가
  • 찾은 것은 신이지만 그것은 신이 아니었고, 그가 찾은 것은 또한 말이지만 그것은 말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돌아가 되찾은 것은 무엇인가, 그가 깨달았다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신성神性이 없는 성스러움le sacré sans divinité’은 아니겠는가?
  • 의지는 이제 그 자신의 갱신과 재생의 결과로 꽃피우고 발효되는 것.
  • 불순한 몸이 제
  • 제거되고 이른바 정신의 순수함만이 남는 상황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몸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깨달았다고 해서 그 몸이 갑자기 어디로 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몸은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다. 단순한 광기와 복합적인 성스러움은 서로 섬세하게 구분돼야 할 필요가 있다.
  •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몸 입은 ‘정상적인’ 삶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그래서 오히려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 이러한 성聖의 체험은 속俗의 삶 속에서 순간으로 나타나고
  • 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지속되며, 무엇보다 그러한 체험 자체가 이렇게 지속되는 삶 속에서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점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자정子正’이라는 시간이 지닌 의미는 바로 이러한 체험이 갖는 순간과 경계라는 특성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도출되고 있다. 자정은 곧 회귀의 순간, 초월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시간과 대비되면서 또한 낮과 밤을 이어주는
  • 어떤 ‘칠흑 같은 섬광’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 유한한 순간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지닌 무한성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 마음은 몸과 말을 떠나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랬을 때만이 비로소 유한한 삶 속에서 체험하는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띨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체험된 무한과 죽음만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 유효하고 유의미한 무한이고 유일무이한 죽음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 갈구란 이러한 무한성의 죽음을 유한성의 삶 속에 담아보고 체험해보려는 일종의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가 아니었던가. 몸을 몸으로써 넘어도 몸은 그대로 남고, 말을 말로써 넘어도 말은 그대로 남는다.
  • 바르도Bardo
  • 유형有形은 또한 유형流刑이기도 한 것.
  • 오히려 몸을 그렇게 남긴 채 몸 안에서 몸을 넘음으로써만이 몸을 온전히 넘어 살아냈다고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 사실 안에 초월의 드물고 고귀한 역설이 숨어 있다, 아니, 숨어 있지 않고 드러나 있다. 이러한 초월의 공간은, 몸짓을 통해 말씀이 발화되고 그 말씀을 넘어 마음으로 넘어가려는 열반에의 시도가 다시금 몸짓으로 돌아와 그 몸 안에서 체현體現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에, 또한 가장 ‘인간적인’ 공간일 수
  • 수밖에 없다.
  • 여러 개의 이야기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단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도 있다.
  • 성聖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에 대한 고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분법’이란 뛰어넘거나 무화시킬 어떤 이론적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곧, 칼로 자르듯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시킬 수 없는 이분법, 아니 어쩌면 너무도
  •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려낼 수 있을 법한 이분법, 그래서 오히려 그 이분법 자체에 종말을 고할 수조차 없는 이분법, 경계선 위에서 스멀거리는, 극단적으로는 서로의 위치까지도 뒤바꿔버리는 역설paradoxe의 두 반쪽들이 그려내는 이분법. 그러므로 성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역설의 철학’을 찾아가는 길일 것이다.
  • 성聖과 속俗은 각각 그 자체로서는 외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이 각기 상대편의 침범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곧 역설적으로, 성과 속이 상대편의 존재에 대한 상정과 그러한 상대편과의 대립 구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임을 말해준다. 반대편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즉 서로 간의 차이와 상대적 규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성과 속이, 또한 각각 반대편과의 접촉에 의해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종교의 모순적인 진리’ 혹은 ‘성과 속의 역설적 존
  • 방식’을 가리킨다. 카유아Roger Caillois가 말하는 것처럼, 성聖이란 “죽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것ce dont on n'approche pas sans mourir”이다.
  • 일견 표면적으로 성스러움과 더러움의 관계는 대립적인 이분법의 관계이다. 그러나 어떤 ‘고정적인’ 상황을 떠났을 때 그 이분법은 모호한 형태로 유동한다. 성스러움을 파괴하는 불경한, 따라서 어떤 ‘더러운’ 행위가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으로 화化하는 경우가 바로 그
  • 그러한 ‘유동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종족을 살해한 자, 같은 종족의 여자를 취한 자, 같은 종족의 토템을 먹은 자는, 바로 그 ‘위반transgression’을 통해서, 더럽힘과 훼손을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같은 종족 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직접 벌하려 하지 않는다. 감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곧, 그가 저지른 불경함과 그로 인해 그가 지니게 된 ‘더러움의 신성함’이 자신들에게 ‘전염’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종의 경외감이 오히려 ‘반대편’에 위치한 권위를, 곧 역설적인
  •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을 형성한다.
  • 이는 물론 가장 ‘비역사적인’ 역사적 추측이다
  • 말하자면, 누군가는, 위반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어떤 ‘기원’이나 ‘태초’의 이미지로 윤색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어느 때나 그 어느 곳에서나, 누군가는, 위반을 ‘해야만 했던’ 것이 된다(따라서 이는 종교학적/인류학적 철학 혹은 인간학이 지닌 일종의 ‘프로토콜’이 된다). 전대미문의 전복, 오직 ‘전대미문’이라는 의미에서만 ‘기원적인’, 과연 ‘전대미문’이나
  • ‘전무후무’라는 것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품는 한에서만 ‘원형적인’, 그런 ‘최초의’ 전복. 그러므로 모든 왕조의 시조, 곧 첫 번째 왕은 언제나 찬탈자이자 전복자였으며 위반하는 자이자 폭군이었던 것.
  • “속le profane은 안락과 안전의 세계이다. 두 개의 소용돌이가 그 세계를 한계 짓는다. 안락과 안전이 더 이상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규칙에 대한 확고하고도 조심스러운 복종이 인간을 짓누를 때, 이 두 현기증deux vertiges이 인간을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그는, 규칙이라는 것이 하나의 장벽barrière으로 거기 있다는 사실을, 성스러운 것이란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에 오직 그것을 넘어서거나 깨뜨린 사람
  • 사람만이 이해하고 소유하게 될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상호성과 균형을 그 특징으로 하는 질서와 금기의 체계는 위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곧 축제가 갖는 기능에 다름 아닌데, 금기interdit가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한 사회의 한계limite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과 속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기와 위반은 단순한 대립 관계나 상극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기의 질서
  • 질서가 주기적으로 위반의 작용과 행위를 ‘요청’한다는 사실이 ‘조화’의 이데올로기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반이 금기를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바타유적 주제를 떠올려볼 때, 금기와 위반의 주제를 단순히 넓은 의미에서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 파괴의 기쁨을 선사하는 축제는 구질서와 신질서 사이의 ‘간빙기’, 시간이 정지해버리는 시간을 구성한다. 카유아가 말하듯, 축제에서는 “규칙들에 반反해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반대로 실행되어야 한다Tout doit être effectué à l'envers”
  • “이러한 신성모독들은 바로 그것들이 위반하고 있는 금지사항들 자체만큼이나
  • 역시 의식적rituels이고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 “그것들은 금지사항들과 마찬가지로 성sacré에 속한다”
  • “성sacré은 삶을 부여하는 것임과 동시에 삶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흘러나오는 원천source이며 동시에 삶이 사라지는 하구estuaire이다.”
  • 이 책의 ‘해독’—이는 실로 암호를 푸는 작업으로서의 ‘解讀’일 뿐만 아니라 독을 제거하는 ‘解毒’ 또한 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 이러한 번역 비평의 글쓰기가 그 작성의 노고에 비할 때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고 ‘발전적’이지도 않은 작업에 속한다는 자조 섞인 감상은 피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자조’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자조가 번역 비평의 ‘무용론無用論’을 조장하는 일부 번역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환원되거나 소급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 말 그대로 정말 ‘사실’에 기초한 주장인데, 이 말이 ‘사실’ 혹은 ‘진실’이 되는 역설
  • 인구어印歐語
  • 경우에—거의 ‘직무 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한 나라와 문화의 ‘국어’가 지닌 의미와 위치와 뉘앙스 전달에 그 ‘일차적’인 책무가 있는 문학 작품의 번역이 아닌 이상, 의미의
  • 문학 작품의 번역이 아닌 이상, 의미의 명확한 전달과 번역어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라도 타 언어로 된 번역에 대한 참조는 거의 필수적이라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다
  •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는 번역이 원문과는 다르게 지극히 ‘비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이다.
  • ‘너무나 충실한’ 직역이 거꾸로 ‘너무나 화려한’ 의역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경우
  • ‘그랑제콜’
  •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지배라는 천박한 형태를 통해 합법적인 모든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욕설이었던 것이다.
  •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단순하다는 것, 그것뿐이다. 왜냐하면 본래 ‘민
  • 것, 그것뿐이다. 왜냐하면 본래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일종의 욕설이었기 때문이다.
  • “권력은 그것을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그것을 차지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었다.”
  • 나 같은 ‘비전문 번역가’도 간단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을 ‘전문 번역가’가 오역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실로 하나의 얄궂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 토크빌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 저 유명한 말, 곧 “민주주의는 때때로 시도되어왔던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들을 제외하고 가장 나쁜 형태의 정부이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
  •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의 혼돈을 억제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보다 슬프고 쓸쓸하고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비교 독해의 과정이었다
  •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께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메모이 책은ㅡㅡ
  • 레논John Lennon의 노래 <Imagine> 가사의 한 구절처럼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But I'm not the only one”.
  • 거의 모든 번역서의 역자 후기에서 역자들이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또는 “번역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역
  •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밝히는 것은 단순한 상투어cliché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오류는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겠지만, 그러나 읽어도 또 읽어도 개인적으로 언제나 강렬한 ‘간절함’을 느끼게 되는 이 상투어가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 오류를 고쳐나가는 일은 결국 역자와 독자가 함께할 수 있고 또 함께해야 하는 몫이라는 사실이다.
  • 명예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망각한 이에게, 자칫 그 ‘명예’란 쉽게 ‘멍에’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 지능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며 그 자체로 위계를 갖지 않는다.
  • “보편적 가르침은 무엇보다 비슷함에 대한 보편적 입증이다. 이는 모든 해방된 자들, 즉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이들과 비슷한 인간으로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라고 말하는 원칙은 일견 지당한 말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 자신의 일을 제외한 다른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제한적이고 분할적인 명령이며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지적 해방과 정치적 주체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서 오
  • 오히려 지배적 질서의 억압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 ‘플라톤의 거짓말’, 곧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수행하며 각자의 분수와 조건에 맞게 살아가라는 억압적 명령
  •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천착했던 문제 중 하나는 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란 어떤 것인가, 곧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랑시
  • 랑시에르의 결론은,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자체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자적’ 정체성은 없다는 것, 오히려 노동자의 정체성 자체가 부르주아적 정체성과의 모방적/대항적 관계를 통해 구성되어왔다는 것이다
  • 스승과 학생 사이에 쉽게 전제되는 지능의 우열이 아니라 오직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만나는 곳에서, 곧 평등의 원리가 실천되고 입증되는 곳에서, ‘보편적 가르침’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렇듯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에게 어떤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해방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무지한 자는 더 적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
  • 이러한 지능의 평등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오히려 학습과 대화 자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해방은 이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 ‘특수한’ 사례는 유일무이한 돌연변이와도 같은 어떤 ‘예외’가 아니다.
  • 예언을 오늘날 한국 교육의 몇몇 사례에 ‘성공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
  • “평등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
  • 한 편의 희곡처럼 알찬 기승전결의 구조나 계산된 혼돈의 질서를 마음
  • 마음속에 품고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상황은 내게 불가능하며 불합리하기까지 하다(그러나 우리는 흔히 좌담에서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고 또 그러한 것들을 설정하기까지 한다).
  • 섞임과 엮임의 모습은 내게 ‘흔적’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눈 말들의 풍경을 그러한 ‘흔적’으로서/써 써나갈 것이다. 나는 쓴다, 우리가 나눈 말들에 대해. 아니, 우리가 나눈 말들에 의해, 나는 쓰인다〔作/用〕.
  • 하나의 우정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나 그것의 증거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러한 흔적의 존재와 부재라는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
  • ‘권두시卷頭詩’로 콘스탄틴 카바
  • 카바피Constantine Cavafy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중 일부를 선택한다. “국경에서 막 돌아온 자들은 말한다./ 더 이상 야만인들은 없다고.// 야만인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 타자를 만들어내고 발명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는 어떤 배타적 동일자의 세계, 바로 이 세계의 ‘공포 중독’에 대해 말하며 그는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감응의 발명으로 중독된 사
  • 사회적 신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카바피 시의 화자인 로마 시민들처럼,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또 다른 야만인, 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 과연 ‘국경’은 어디인가? 야만인들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국민’이란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정체성인가?
  • 우리의 불편한 우정은 무엇보다 우선 불편한 침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느꼈던 것들이 제게는 질문이 되어 돌아오더라고요.
  • 선언이 선언만으로 그치는, 그런 걸로 가서는 안 되지 않을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선언이 그 나름의 육체성이랄까 그런 것을 띨 수 있는 방
  • 방식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 작가 자신이 느끼게 된 문학과 현실의 괴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간극일까? 아니면 언어와 그 대상 사이의 대립일까? 문학이 하나의 ‘선언’이 되
  • 되었을 때, 바로 그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말대로 선언이 그 나름의 ‘육체성’ 혹은 ‘물질성’을 띨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 1920년대부터,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부터 용산 나루터를 통해 쌀을 운반하고, 그렇게 번
  • 번화가로 발전했던 곳이었죠.
  • 남일당
  • 이것은 이미 너무 ‘정치적’인가, 아니면 아직도 너무나 ‘덜’ 정치적인가,
  • 혹은 ‘문학의 정치’인가, 아니면 ‘정치의 문학’인가
  • 그들의 생각은 서로 얼마나 같고 또 얼마
  • 얼마나 다른가?
  • 문학은 언어를 다루는 입장에 서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참여라고 하는 ‘발언’이 개입될 가능성이나 개연성이 미술이나 음악에 비해 월등히 클 것이므로. 미술로 어떤 발언을 한다는 것, 음악으로 어떤 발언을 한다는 것은 문학으로 발언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문학의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
  • 그리고 그러한 ‘문학의 정치’가 단순히 현실에 참여하는 작가와 그 현실에서 떨어진 작품 사이의 어떤 ‘우아한’ 간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분명 ‘음악의 정치’나 ‘미술의 정치’ 또한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정치의 다양한 형태들을 오래 모색하게 될 것이다.
  • 어쩌면 우리는, 결정을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종이봉지에서 포도송이를 꺼낼 때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거나 부스럭”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 문학의 순정성에 대한 언급을 들으면서 다른 작가들이 생각하는 문학의 구분법보다 제 문학적 경계가 훨씬 더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게 문학이라는 건 예술의 다른 이름 중 하나였지 이른바 ‘글 쓰는 작가’라는 이미지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
  • 아니었거든요.
  • 작가에게는 문학적 고민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 두 지점이 서로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만날까, 그 고민이 사실 누구나 했던 고민일 것 같아요. 말하자면, 시민적 고뇌와 작가적 고뇌가 어떻게 만날까,
  • 그리고 그 결과는 뭘까 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겁니다.
  • 논리적으로 모순이고 이론적으로 실패하고 무언가를 오독하고, 그러면 좀 어때요? 소위 우리의 문학적 고민들을 함께 이야기할 때, 그게 무엇인지 바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 고민을 계속 끌고 가는 것,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이론적으로만 이야기가 되다 보니, 이론적인 완결성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 거죠.
  • 이론은 확실히 어떤 실패를 두려워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현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떤 ‘촌스러움’에 대한 이론의 ‘태생적인’ 불안.
  • 문학을 단순히 사회의 한 반영으로 보는 사회학적 반영론의 테제는 그 자체로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돌아봐야 할 것
  • 것이겠지만, 확실한 것은 단순하게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미학적 혁명’을 이야기하기에는 현실의 간극이 이론의 범위를 밑돌거나 초과한다는 사실이다. 한편에는 현실을 ‘섣불리’ 재단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이론에 포섭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현실이 있다.
  • 어쩌면 “칸트의 물物 자체”보다는 오히려 “물 자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떤 환멸에
  • 대해 좀 더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이론이 사건과의 충돌이 없이 혼자서 이론이 될 수는 없다
  • 이론에는 동어 반복적인, 완결된 틀 안에서의 지적 유희 같은 게 분명 존재하는 거죠. 논문을 쓸 때 뭔가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관통하는 게
  • 생기면 정말 기분이 좋죠(모두 웃는다). 와, 내가 정말 깔끔하게 정리했구나, 그런 쾌감이 있는 거죠. 하지만 바로 그 쾌감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거예요. 그야말로 자기 혼자서 인공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다시 거기에 몇 개의 이론과 개념적 장치들을 또 넣고.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매끈한 구조가 현실과의 접속에 의해 깨지고 재구축되고 다시 깨지는 무한한 과정이죠.
  • 현 정권이 가져온 정치적 환경이 어떤지 문제 삼지 않으면서 랑시에르만을 이야기하다 보니, 이게 미학사에서 새로운 주장이냐 아니냐의 문제만을 쟁점으로 삼거나, 또는 랑시에르의 이런저런 주장은 사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누구에게서 발견되는 주장이었다는 식의 논의만 남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식의 논의는 랑시에르를 인용하면서 오히려 그가
  • 제기했던 문제의식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감각적인 것의 관습적 분배 방식들, 가령 치안적인 분배 활동 속에서 문학이 처해 있는 사태를 문제 삼지 않고 우리가 흔히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학제적 틀 내에서만 랑시에르의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그 이론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론과 현실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 이전에 그 이론 자체에 대해서도 충실하지 못한 거죠.
  • 작가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하나의 ‘세대 의식’이 존재하는가, 혹은 그러한 ‘세대 의식’이 심지어 요구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형식을 갖게 되는가
  • 내가 정치적인 사람이 되고 안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저한테는 이 자체가 처음부터 바로 문학이었던 것 같아요.
  • 선언은 그 자체로 왜 그 선언과 ‘맞먹는’, 어쩌면 그 선언을 ‘초과하는’ 또 다른 언어들을 계속 파생시키고 증식시키는가?
  • “죽은
  • 사람들이 어찌하여 산 사람들의 입 속에 검은 밤처럼 모이는지, 용산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역설의 낙원에서 우리가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별의 근육입니다.”
  • “시작은 끝이 되었다 (……) 나로 분열되고 있는 너, 침묵으로/ 부어오른 근육들 꿈틀대는/ 단식투쟁하는 죽은 이들의 발가락
  • (……) 너의 끝에 나의 시작을 맞댄다, 우리는/ 한 시절 열렬히 몸 부비다 가는/ 낡고 둥그런 흔적이다”
  • 시를 쓰게 하는 육체의 물질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 “근육들”과 “발가락”으로부터, 혹은 저 “침묵”으로부터 오는 어떤 힘일 것이다.
  • 이러한 근육과 발가락과 침묵은,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 있는 손가락과도 같이, 시작詩作을, 그리고 시작始作을 추동할 것이다.
  •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작가이
  • 작가이기 이전에 시민이지 않느냐고.
  • 작가이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당연히 상식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건 분노해야 할 일이라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인데, 하다 보니까 나는 작가구나 하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 이 사안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공감한다고, 또 얼마나 이분들의 아픔에 다가선다고,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하는 물음.
  • 예전에 소설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긴장은 다른 작품을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긴장이었죠. 다른 작가들, 다른 선배들의 작품을 보면서 ‘아, 이 사람
  • 사람은 이렇게 쓰는구나, 이런 면에서 다르구나’ 하는 긴장이랄까요. 그런 긴장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이렇게 엉망인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소설을 써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긴장감도 획득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죠.
  • 어떤 ‘진실’에 대한 폭로가 더 이상 어떤 적극적인 실천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짐짓
  • 모르는 척’ 행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지닌 의미는 단순히 작가들의 ‘참여’만으로는 소급되지도 않고 또 소급될 수도 없을 것이다.
  • 저는 어떤 효과나 결과에 대한 강박, 이걸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그런 강박이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해요. A라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라 B라는 효과가 있을 거라는 이 인과적인 상상력, 우리가 이렇게 하면 세상이 저렇게 바뀔 것이라는, 혹은 바뀌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포획되지 않는 것, 포획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 우리는 계속 서로 대화를 했고, 그를 통해 일종의 담론 혹은 ‘우리’라는 의식 같은 게 생겨났다고 봐요. 만약에 작가선언이 실패했다고 말한다면, 그 실패는 정치적 효과 같은 면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무언가에서 찾아봐야겠죠. 우리의 관계,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리를 북돋거나 혹은
  • 실망시키는 우리 안의 관계에서 실패한 거지, 그 외의 실패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정치적 효과나 사안에 대한 무관심 같은 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죠. 그때 일어났던 사건에 핵심이 있을 것 같아요. 그 핵심이란, 우리는 과연 계속해서 충실한가, 또는 우리가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는 긴장이죠. 그 불편함을 우리가 계속 가져가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실패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승완 씨가 들었다는 말, ‘거기에 참
  • 그 불편한 우정이란 “우리들이 ‘우리들’이라는 말의 관용성을 버리고 난 후 등장한 최초의 낯설음에 끝내 충실하려고 하는” 우정, 따라서 “그 불편함을 감내하면서도 (……) 기어이 그 불편함 안에 머무르려고 하는” 역설적 우정일지 모른다.
  • “용산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라는 정체성을 용산 바깥에 ‘주차’”시키며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마치 가장 손쉽게 거머쥘
  • 수 있는 중립적인 타이틀처럼 취급”
  •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사라지는 게 없네 (……) 과연 혁명은 일어나지 않지만,/ 광장은 광장이 아닌 것이/ 아니네, 아직은/ 어두운 광장에 불 켜지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있네”
  • 어떤 다른 것에 대해 시를 쓰려고 할 때조차도 뭔가 내가 달라졌고, 달라지
  • 고 있다
  • ‘광장’과 ‘혁명’이라는 주체적이고 명사적인 개념과 결부된 어떤 부정성이라기보다는,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주변적이며 조사적인 연결의 형태와 결부된 어떤 예감일 것이다. 그 예감이란, 그것이
  • 주변적이고 연결적인 만큼, 딱 그만큼, 불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또한 이러한 불확실성 안에 오히려 ‘광장의 광장임’, 아니, 더 적확하게 말해서, ‘광장이 아직 광장이 아닌 것은 아님’의 양태가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시민으로서 참여한다, 이런 생각들이 있을 텐데, 사실 그러한 정체성들이 막상 쉽게 분리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시민으로서 참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사실 끊임없이 옆에서 나를 찌르는 송곳들이 거기 있는 거죠, 그 경험 속에.
  • “작가선언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고 또 그걸 꺼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반면에 문
  • 문제들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는, 어떤 담론으로 그것을 드러내야 할지 고민하는 상태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비평가들에게도 말이죠.”
  •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또는 관계를 하
  • 하나의 손쉬운 주제어로 삼지 않으면서도 그걸 언어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이런 문제를 제가 특별히 어떤 화두로 삼은 건 아니에요. 그런데 쓰고 나면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나한테 반응하는 것, 또는 나는 굉장히 무능하고 무위하는데, 그럼에도 계속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 그런 경험들. 관계성이라는 것을 제가 무의식적으로 붙잡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제 안에서 시적인 무언가로 표현될 때는 일반적
  • 일반적인 언어의 교환이 아니라 손이라든지 입이라든지 하는 물질성을 입고 나올 수밖에 없겠죠. 관계가 주제는 아니지만 사물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시가 하는 일일 겁니다.”
  • 소재적인 차용의 수준을 넘어서서 소설가가 직접 그 문제와 맞닿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 우리는 작가이기 때문에 언
  • 언제나 현실에 글로써 참여해야 한다, 뭐 그런 방식만은 아닌 것 같아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글로써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런 활동 속에서 나의 문제의식이 다른 방식으로 나중에 내 글에 반영될 수 있다는 거죠.
  • 진은영은 「나의 친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을 믿자, 강철 부스러기들이/ 우리를 황급히 쫓아오며 시간의
  • 거대한 허공 속에서/ 흩어진다,/ 죽음과 삶의 자장磁場 사이에서.//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나의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발명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다.”
  •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
  • ‘Cogito ergo sum’
  • 이러한 친구란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안온한 우정의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친구는 나의 존재를 “죽음과 삶의 자장 사이에서” 동요케 하는 하나의 긴장, 한 명의 적, 한 조각의 불일치이기도 하기에. 이 “너의 존재”는 분명 “나의 곁에” 서 있는 것이긴 하지만, 또한 아마도 저 “숱한 의심의 순간” 그 자체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환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겠기에.
  • 「나의 친구」에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경험을 파열시키는 ‘친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생각하기 시작한다’라는 경험이었어요.
  • ‘이 사람이 나한테 윤리적인 독재를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대화는 끝나는 거죠.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강제의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일방적인 느낌을 최대한 줄이면서 서로의 감각과 사유를 어떻게 촉발시킬 수 있을까, 그 점이 저의 가장 큰 고민이에요.
  • 하자는 게 아니라 뭘 하지 말자는 방식으로 대중운동을 조직화하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와 모호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요. 낙선운동과 같은 운동 방식에서 볼 수 있는 한계와 비슷한 거죠.
  • 아카데미 프랑세즈
  • 언제나 뒤에서만 이야기되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 문단 바깥에서의 정치는 우리가 다 아는 바로 그 정치, 정치인들의 정치, 혹은 사회과학의 정치가 되는 거고요. 그런데 문단 안에서의 정치가 바로 그렇게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
  •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드는 거죠. 그래서 문학상이든, 문단이든 그것들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도 그것은 기껏해야 뒷담화나 가십거리가 되지 그것이 문단에서 소위 ‘문학적인 것’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기제로서의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겁니다.
  • 계속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 ‘우리’라는 기존의 감각 위에 또 다른 ‘우리’의 감각을 빗금쳐보자는 겁니다.
  • “나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는” 하나의 시선과 “나를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하는” 또 하나의 시선 사이에서, 시인은 그 스스로 어떤 ‘분리’를 문제 삼고 있다.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는 엘리베이터의 문은, 그 문의 진동과 동요는, 어쩌면 그의 몸 안에서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
  • 무언가”
  •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층의 정체성과 2층의 정체성이란, 그 층들 사이의 경계란 무엇인가?
  •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당장 내일 『조선일보』에서 전화가 와서 뭘 하자고 한다면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작가는 별로 없거든요.
  • 참여 작가는 있지만 참여 음악인은 없지 않나 이렇게 이야기하셨는데, 반대로 저는 생뚱맞은 말일지 몰라도 인디밴드나 독립영화는 있는데 오히려 독립작가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요. 현실적으로 문단을 떠나서 작품 활동을 할 수는
  • 없지만 보다 독립적으로 작가 활동을 하는 작가들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요.
  • 내가 문단이라는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죠. 인디가 없는, 대안이 없는 시스템 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사실 이 좌담 자체가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니까, 그 시스템이 이런 ‘판’을 만들어준 거니까. 지금 이 좌담이 그런 상황
  • 상황을 어쩌면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는 거죠.
  • 결국 이것도 삶과 문학 사이의 관계일 텐데요, 이런 시스템 안에서의 삶이 우리의 문학과 어떤 관계를 맺을
  • 까 하는 문제예요. 문단 안의 문학적인 것은 무엇일까, 문단 안에서의 정치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 안에서 내 삶이라는 것이 문학적인 것과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까 하는 문제들이죠.
  • 단순히 시스템이 나쁘다 아니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문학적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더 정확하게는, 그 안에서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미래의 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들이
  • 물음들이죠. 전 이 물음 자체도 문단에서 자유로운 방식의 물음들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걸 하면서도 계속해서 문단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고 생각하며 알게 모르게 문단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죠.
  • 향후에 우리가 하나의 조직이나 집단으로 지속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고민들이 어쩌면 우리의 성취라면 성취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패, 그것도 성취라면 성취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과정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사유나 감각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게 이후 어떤 계기로 촉발되거나 어떤 사건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고, 새로운 기획들이 시작될 수도 있을 거예요.
  • 새로운 관계에 의한 새로운 기획들.
  • “처음에는 내부에서도 이런 문제가 관심거리였잖아요. 언제까지 갈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가. 걱정도 많이 하고, 이러다 끝날 거야, 이렇게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저 자신도, 사람들이 언제까지 할까, 이러다 썰물처럼 빠져나
  • 빠져나가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날도 있었어요. 카페에 아무도 안 들어오는 것 같으면 이제 끝난 거야? 그러면서.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더라고요.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런 게 중요하지 않게 되는 시점이 생기면서, 뭐랄까, 그걸 확실하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누군가는 ‘신뢰’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보다는, 우리가 지금 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에 사람들
  •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 관계 없는 관계성 안에서, 선언의 선언 불가능성 안에서,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쩌면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혹은 이러한 관계 자체가 어떻게 계속해서 성립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아마도 우리가 집단성이라는 단어로 익숙하게 표상해왔던 어떤 지속적 관계의 개념으로는 포획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이 포획할 수 없는 집단성, 관계의 지속이 문제가 되지 않는 어떤 관계성
  •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건의 용법은 신문과 방송의 ‘사건 사고’ 꼭지일 것이며,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사건의 용법은 그 상징성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일깨우는 하나의 충격이며 원점일 것이다.
  • 시와 소설은 분명 철학은 아니겠지만, 동시에 분명 그렇게 도래하는 철학과, 마
  • 치 ‘친구’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것이다. 
  • “우리들 눈은 보고 싶은 것만 가려서 본다고. 어쩌면 우리도 상대방의 보고 싶은 모습만 보아왔던 게 아닐까.”
  • 가장 소박한 인식론적 명제에 대한 반성, 아니 소박한 그만큼 가장 폭력적이기도 할 이 자아철학의 제1원리에 대한 반성은, 어떠한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리고 어떠한 성장과 퇴화를 통해, 비로소 ‘다른 것’으로 변환될 수 있을까?
  • 방법적 회의
  • ‘문학의 정치’란 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문학의 표피적/외면적 정치성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정치적 미학의 자리가 아니라, 시와 소설이 다시금 새롭게 짜나가는 감각적인 것의 지형도, 그 미학적 정치의 자리에서일 것이다.
  • 정치의 자리에서일 것이다.
  • 좌담의 흔적들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그렇다면 산문散文은, 그 말 그대로, 흩어진, 흩어지는 글이 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운문韻文도 또한, 단순히 어떤 시구詩句들의 집합이 아닌, 어쩌면 구름 같이 흩어지는 글〔雲文〕은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어쩌면, 마치 그렇게 흩어지는 구름처럼, 흩어짐으로써 모여 있는 어떤 구름처럼, 운문과 산문은 어디에선가, 아마도 대기 중의 허공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을 치는, 아예 그 “바닥이
  • 떠오르고”
  • 있는 어떤 땅 위에서, 그렇게 다시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 나는 이 전도된 제1철학에, 새롭게 전복된 문학의 제1원리에, 일견 승산이 없어 보이는 이 기이한 내기에, 무모하게도 무언가를 걸어보는 것이다, 그 불편함에, 그 불가능성에.
  • 푸코가 남긴 문학 관련 글들의 양은 다른 철학자에 비해
  • 상당히 많은
  • 편에 속하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은 오직 이 한 권,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에 관한 책뿐이다(초판은 1963년).
  • 바타유
  • 아르토
  • 루셀
  •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 마슈레에게 있어서 푸코의 루셀론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문학의 철학화’ 또는 ‘하나의 사유
  • 형식으로서의 문학’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누보로망’
  • 문학적 ‘존재론’의 문제는 푸코에게 있어서 바로 문학적 ‘윤리학’의 문제를 수반한다
  • 루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른바 ‘정통적’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는 대조적인, 무의미와 자유연상에 대한 ‘관리’ 혹은 ‘통제술’이었던 것. 또한 푸코 혹은 마슈레가 루셀에게서 발견하는 중요한 특징은 재현représentation의 논리에 대한 반대, 해방libération의 논리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곧 세계의 무의미에 대한 존재론 혹은 인식론이 그러한 무의미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자기-존재’의 윤리학 혹은 행동학으로 이행하는 전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푸코의 루셀론이 비단 광기에 대한 저작과 에피스테메에 대한 저작 ‘사이’에만 위치하는 것이 아니
  • 대한 저작 ‘사이’에만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확장된 형태로 되돌아올 하나의 윤리학에 대한 ‘씨앗’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함으로써, 푸코의 사상적 여정에 관한 전체 지도를 그리는 데에 있어 하나의 ‘생산적인’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안 읽고 뛰어넘을 재주가 있었을까—를 추천하고 싶다.
  • 횔덜린論
  • 철학에 대해 ‘문학적〔시적/소설적〕’이라는 평가가, 혹은 문학에 대해 ‘철학적〔사변적〕’이라는 평가가, 하나의 욕설로 사용되던 시기도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자면, “시를 써라, 시를 써!” 혹은 “소설 쓰고
  • 앉았네!”라는 문장이 “철학하고 자빠졌네!”라는 문장(독일어 동사 ‘philosophieren’의 가장 ‘창조적인’ 번안 사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웃하고 있는 풍경, 이제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낯설거나 혹은 오래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었다.
  • ‘양가성’은 지양되어버릴 운명의 제3항을 전제하지 않으며, 모순contradiciton의 해소가 아닌 지속적인 대립opposition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 이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dualiste
  • 일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moniste
  • 바타유의 ‘유물론’이란 결국엔 마슈레에게 있어서 ‘유물론’의 철저화된 형태, 혹은 ‘변증법’의 전복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 이러한 전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철저화 또는 첨예화라는 생각이다.
  •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이 통합의 과제가 ‘본래’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통합’이란 단순히 거대한 사상적 인물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고─예를 들어 물리학에서의 통일장 이론과 같은─거대 담론과 이론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다. 그들이 근대성-자본주의-국가주의를 바라보았던 시선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 공통 지점은 일반적인 정치경제학, 철학(혹은 문헌학), 정신분석의 경계와 통합을 넘어서 있는 어떤 무엇이다. 그 무엇은 무엇
  • 무엇인가? 결국 이러한 통합의 과제는 근대의 ‘봉합’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그 ‘균열’과 ‘상처’ 자체에 대한 확인 앞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통합統合은 결국 ‘통합痛合’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물음들의 부상浮上은, 나의 행위가 곧 부상負傷당한 신체의 생채기에 계속 침을 바르며 달래는 행위는 아닌가 하는, 그래서는,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그
  • 생채기를 오히려 덧나게 하고 고름 흐르게 하는 그런 ‘자해’와 같은 짓은 아닌가 하는, ‘부활과 갱생과 발효’에 관한 또 다른 물음들을 부상하게 하고, 또 부상당하게 한다.
  • 나의 감상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작은 기쁨임과 동시에 깊은 슬픔이다.
  • “인류를 커다
  • 커다란 공룡에 비유해본다면, 그 머리는 20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면서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이런 그림이 떠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이 꼬리부분의 한 토막이다─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불행하게도 이 꼬리는 머리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힘─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상한 공룡의 이상한 꼬리다. 진짜 공룡하고는 그 점에선 다른 그런 공룡이다. 그러나 의식으로만 자기 위치를 넘어설 수 있을
  • 뿐이지 실지로는 자기 위치─그 꼬리 부분에서 떠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진짜 공룡과 다를 바 없다. 꼬리의 한 토막 부분을 민족이라는 집단으로 비유한다면 개인은 비늘이라고 할까. 비늘들은 이 거대한 몸의 운동에 따라 시간 속으로 부스러져 떨어진다. 그때까지를 개인의 생애라고 불러볼까. 옛날에는 이 비늘들에게는 환상이 주어져 있었다. 비록 부스러져 떨어지면서도 그들은 이러저러한 신비한 약속에 의해서 본체 속에 살아남는 것이며 본체를 떠나지만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오늘의 비늘들에게서는 그런 환상이 거
  • 거두어졌다. 그리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늘들의 신음이 들린다. 결코 어떤 물리적 계기에도 나타나지 않는. 듣지 않으려는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이런 그림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린다. 20세기 말의 꼬리의 비늘들에게는 한 조각 비늘에 지나지 않으면서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알 수 있는 의식의 기능이 진화되어버린 것이다. 이 침묵의 우주공간 속을 기어가는 ‘인류’라는 이름의 이 공룡의, ‘역사’라는 이름의 이 운동방식이 나를 전율시킨다.”
  •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족蛇足이자 용미龍尾가 아니었던가.
  • 분량을 재는 틀이란 결국 말의 무게를 다는 저울이며 글의 흔적을 붙잡고자 하는 그물이다
  • “빨개진다는 것 벌게진다는 것 이것의 차이를/ 저울에 달아 본다는 것 눈금을 타고 논다는 사실”
  • 시는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비로소 시가 되는가, 혹은, 시란 얼마만큼의 단어와 얼마만큼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을
  • 때, 또한 얼마만큼의 중량을 지니고 얼마만큼의 흔적을 남겨놓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시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시가 묻고 있는 시에 관한 자기동일적 혹은 자기회귀적 질문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는 시 그 자신의 외부에 있음으로써 다시금 시의 내부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 시는, 소설이라는 자신의 바깥으로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안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보고자 한다. 시는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소설을 쓰자고
  • 권유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하나의 시를 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바로 이 시가 지닌 ‘소설적 알리바이’일 것이다. 이 시 안에서 소설이란, ‘소설’의 이름이란, 무엇보다 시의 외부에 있는 것,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러한 ‘외부성’으로서 오히려 시를 가장 확실히 증언하고 가장 명확히 증명하는 형식이 된다. 시는 자신 안에 소설을 하나의 외부로서 도입한다. 이 ‘시’가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또한 이 ‘시’가 시의 조건들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설’이라는
  • 외부 때문이다.
  • ‘소설을 쓰자’라는 권유의 문장은 이 시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결정짓는다, 곧 형식을 결정짓고 더 나아가 오히려 ‘형식’이라는 말을 시로부터 소설에게로 건넨다.
  • ‘쓰고자 하는’ 기획과 미완의 과정, 단지 ‘쓰자’고 말하는 권유만이 가능한, 오직 이러한 권유의 시도만이 형식이 되는 그런 문학적 과정, 그런데 시란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과정 자체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 시는 초심으로 돌아가서는, 그리고 결국 길을 잃고 나서는, 그때서야 비로
  • 비로소 시가 된다(그렇다면 시는 언제나 길을 잃는 방식으로써만 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누군가의 사건은 몹시도 힘이 세다. 이 문장은 불필요하다./ 이 문장은 생략해도 무방하다. 그 말이 사건을
  • 생략해도 무방하다. 그 말이 사건을 제압한다./ 그 입김이 문장을 지워 간다.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없다./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대부분이 침묵하는 이유.”
  • 세계 안에서는 시가 화폐임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재는 척도가 되며, 따라서 그러한 시는 때로는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 복권 당첨금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시가 삶의 목적이자 수단이 되고 있는 일견 ‘이상적’인 세계, 혹은 이상적으로 ‘문학적’인 세계는, 기실 그 어떠한 이상성이나 낭만성도 담보하지 못한다(이 소설이 ‘이상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 시가 화폐가 되는 세상은 결코 ‘낭만적’인 세계가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소설의 화자에게, 그리고 소설의 독자들에게—그저 ‘기이한’ 세계로 등장할 따름이다.
  • 이런 건 꿈이나 고단위로 농축된 조롱이 아닐까?
  • 소설적 상상은 어쩌면 그 불쾌함 자체를 실험하고자 한다, 시가 화폐가 되어버린 세상의 신비로운 불쾌함을.
  •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소주병들이 가득했다. 은행나무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
  • 기형도의 유명한 시 「대학 시절」
  • 그곳에는 은행잎조차 술안주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결심한 듯 ‘원샷’을 하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레이보이를 읽었다, 그때마다 오바이트 소리가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군대와 병원으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동성연애자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학점을 안 줬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유급이었다, 대학에 남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의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라는 문장은 소설 안에서, 시 안에서, “대학에 남기가 두려웠다”라는 문장으로 전환된다, 치환된다, 변태한다.
  • 소설은 소설을 떠나기가 두렵다기보다는 소설로서 남기가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소설은 시의 어떤 힘을 비웃지만, 반면 바로 그 시의 어떤 힘을 통해 다른 곳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 소설은 시의 세계로 들어갔다가/나갔다가, 마치 소설처럼, 다시 소설 안/밖으로 빠져나온다. 말하자면,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지닌 ‘시적 알리바이’일 것이다. 시가 되지 못하는 소설, 그러나 시가 되고 싶어 하는 소설, 혹은, 시가 지배하는 세상을 그릴 수는 있는 소설, 그러나 그 자체는 결코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는 소설. 소설은 시가 ‘판치는’ 세상이라는
  • 허구를 빌려 소설 자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질 낮은 농담처럼, 악의와 자조 섞인 패러디로써, 그러나 또한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어떤 불쾌함으로. 시의 세계라는 환상의 액자를 통과한 소설은 다시 하나의 불가능성과 마주친다.
  • 이 불가능성은 이중적이다. 시라는 화폐를 갖지 못한 소설적 화자의 비애, 곧 단순히 지폐와 동전이라는 화폐의 대체물일 뿐인 시를 갖지 못한 자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불가능성이 그 하나, 그리고 말 그대로 시를 갖지 못한
  • 자의 비애, 곧 소설을 쓰는 자의 어떤 ‘본원적’ 불가능성이 또 다른 하나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화자가 시의 어떤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떤 가난한 슬픔 속, 곧 시를 갖지 못한 어떤 ‘마음의 가난함’을 깨닫게 되는 장면 안에서라는 사실이다.
  • “문득 나는 이 세계에서 얼마나 가난한가, 라는 쓸쓸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 화자가 시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가난함’이란, 일차적으로는 시라는 화폐 앞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빈자의 곤란함과 곤혹스러움이겠지만, 더 나아가 시라는 언어의 어떤 정점 앞에서 마주하게 된 소설의 그리움과 아련함이기도 하다.
  • “나는 복권을 한 자 한 자 긁어나가면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벗겨지며 떨어져나가는 미묘한 형태를 느꼈다. 그것들은 묘하게 눈물샘을 자
  • 자극하는 매운 기운처럼 작열했다.”
  • 소설의 화자에게 시는 오히려 화폐의 가치를 상실한다, 혹은 초월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시가 화폐가 되는 세상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갈 때, 그러나 동시에 시가 화폐가 되는 그 시스템 자체로부터 그가 이탈되어 있을 때, 오히려 시가 갖게 되는
  • 역설적 파급력과 파괴력을 말한다.
  • 시는 소설을 이탈하게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설을, 시를 통해, 소설로 돌아오게 한다.
  • 소설은 한 번 이탈했었고, 이제는 다시금 이탈하여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자리는 자신이 원래 떠나왔던 자리와는 어딘지 조금 달라져 있다. 소설은 시를 통해 자신이 소설임을 확인한다. 소설이 시를 통과하여 도달하게 된 지점은, 소설이 시라는 화폐를 지불하고 구매하게 된 장소는, 다시금 소설 자신의, 조금은 다른 자리이다.
  • 시가, 소설이, 자신의 바깥을, 자신의 울타리를 인지하고 거기에 계속 물음을 던짐으로써만 자신의 장르를 ‘확인’하고 ‘사살’하며 또한 동시에 ‘확인사살’ 할 수 있다는 것.
  • “종결된 사건은 더 이상 책을 만들지 못한다. 자신의 몸이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책을 덮고 한 권의 소설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밤하늘의 천체처럼 빛나는 궤도를 가지지 않는다.
  • 스스로 암흑이 되어 갈 뿐이다. 소문처럼 텅 빈 공간을 이 소설이 말해 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거기서 넓게 발견될 것이다.”
  • 이 시인에게 ‘소설’이란 ‘사건’의 다른 이름, 사건의 ‘사건성’에 다름 아니다. “텅 빈 공간”이란 어쩌면 텅 빈 우정, 밝힐 수 없는 공동체, 사건을 향해 열려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것, 밤하늘을 배경으로 총총히 박혀 있는 고정되고 종결된 화려함이 아니라 그 스스로 하나의 “암흑”이고자 하는 것. 따라서 이 암흑이란 가장 활동적인 어둠, 또는 비非-중심의 중심,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고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는 어떤 ‘블랙홀’의 은유적 이름일 것이다.
  • ‘소설을 쓰자’는 시는 곧 ‘소문을 퍼트리는’ 위험을 스스로 무릅쓰는, 사건의 사건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시가 되고자 한다.
  •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그러므로 사실 이것은, 바꾼다기보다는, 부연하고 첨언하는 진담일지도 모른다
  • 이 ‘정의’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 단어에 섣부른 정의定義를 내리지는 말자.
  • 희소가치를 띠게 된 정의는 분명 매혹적인 것이다. 반면 정의의 매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의 정의는, 이러한 경제적 욕망의 법칙(희소성)과 정치적
  • 혁명의 법칙(사건성) 사이에서, 그 수동성과 자발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동요한다.
  • “그래서 내 방식의 정의와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는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깐 일었다. 내가 힘으로 밀어붙인 게 과연 잘한 건지 모르겠고, 힘없는 인간들이 뭘 하겠냐라는 생각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자각도 설핏 깃들었다.”
  • 시는 소설이라는 외부를 통해 오히려 시의 내부로 파고들어가고, 소설은 시라는 이상理想/異常을 통해 오히려 소설적 세계를 재구성한다.
  • 여기서 이러한 농담의 기본적 원칙과 본령은, 외부라는 거울을 통한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 그리고 바로 그 조롱의 문법을 통한 자기 자신의 재구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비평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여, 소설을 쓰자, 그리고 소설이여, 시를 논하자, 라고. 그러나 서로를 ‘이타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몸짓을 취하는 ‘문학의 왕국’에서가 아니라, 시는 시가 되지 못하고 소설은 소설이 되지 못하는 어떤 불모와 불화의 땅 위에서, 그리고 항상 그러한 시대에 대한 어떤
  • ‘반시대적 고찰’의 입장에서, 그렇게 쓰고 그렇게 논하자, 라고. 따라서 이러한 시와 소설에 대한 ‘비평적 농담’이 다다르는 곳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부정형의 문장일지 모른다. 비평이여, 비평을 쓰지 말자. 역설적일 정도로 비밀스럽게 말하자면, 이러한 ‘비평을 쓰지 않는 비평’ 안에 아마도 비평의 가장 은밀한 매력이 있을 것이기에(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저 “정의의 매혹”에 화답하는 ‘비평의 매혹’일지 모른다).
  • 순간 순간, 적나라한 존재의 기적The miracle, moment by moment, of naked existence.
  •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문장이, 여전히 선택 가능한 여러 번역들 중의 단지 한 번역으로,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양한 잠재
  • 잠재성을 머금고 있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임시 번역으로, 그렇게밖에는 머물 수 없다
  • 모든 주석은 단지 필요악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악이 없다면 많은 것들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악은 ‘악’이기 이전에 ‘필요’이다. 어쩌면 그 ‘필요’ 자체가 그것의 ‘악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로고스
  • 파우스트는, 이 ‘말씀’으로부터 다시, 말씀의 ‘내부’로, 말하자면 현상의 ‘본질’ 속으로, 그렇게 파고들어 가고자 한다(여기서 다시 괄호를 열자면 그것은, ‘말씀’이 내포하는 궁극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간다는 것, 그리하여 ‘말씀’이 최종적으로 전달하고 고지하고자 하는 본질을 발굴한다는 것, 따라서 결국 로고스중심주의자로서의 형이상학적 번역에 대한 충동은 체계의 건축술建築術임과 동시에 또한 근원의 굴착술掘鑿術인 것을 말하기 위함일 터, 고로 열었던 괄호를
  • 말하기 위함일 터, 고로 열었던 괄호를 다시 닫기 위함일 터). 우리 모두 알다시피, 파우스트의 번역은 다시 바뀐다. 태초에 “의미Sinn”가 있었다.
  •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파우스트의 진짜 고민이 시작된다
  • 의미는 스스로 능동적인가, 의미가 그 자체로 움직이고
  • 굴러갈 수 있을까, 의미가 이 세계의 주재자가 되어, 그래서, 그 ‘말씀’의 의미란 것이 결국에는, 태초에, 그 무엇보다도 앞서, 그 ‘태초’라는 말의 의미에 맞게, 가장 먼저 존재했던 것으로서의, 존재론적 우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의미가 모든 것을 “일으키고 창조하는wirkt und schafft” 것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의미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까, 라는 질문, 그러니까 그런 질문이라는 번뇌가 된다.
  • 히브리어
  • 희랍어
  •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본질의 빈자리—그렇다면 ‘본질’이라는 것은 차라리 바로 그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자리 아닌 자리에 대한 다른 이름은 아닐지—
  • 태초에 “힘Kraft”이 있었다.
  • 도착한다—태초에 “행위Tat”가 있었다.
  • 파우스트의 번역어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말씀과 그것의 의미, 힘과 그것의 실행(행위). 그리고 나는 후자들이 전자들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한다
  • 테크노는
  • 기존의 규칙을 다른 규칙으로, 기왕의 문법을 다른 통사 구조로 바꿔버림으로써 새로운 어법을 창출한다(변형 규칙 1).
  • 즉 테크노는 기존에 그 나름의 정체성identité을 지니고 있던 곡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섞어버림으로써 그 곡들 각각의 동일성identité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의 규칙을 생성시키고 있는 것.
  • 테크노가 그 이전 시대의 음악을 대체한다는 어떤 완결된 곡들의 직선적인 유행사流行史가 아니라, 그 자신만의 확고한 동일성이라고 하는 닫혀 있는 곡의 개념과 문법이 믹스의 문법 안으로 용해되고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 탈脫역사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엇이 무엇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가라는 순서에 대한 물음, 어떤 곡이 순수한 창작곡이고 어떤 곡이 더러운 표절곡인가라는 순결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해진다. 테크
  • 테크노에 있어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작 또는 새로운 음악의 작곡이라는 작업이 더 이상 어떤 특별한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돼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마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에게서 굴러다니던 오브제가 하나의 온전한 예술 작품으로 변신하듯, 테크노는, 재단하고, 이어붙이고, 섞어버림으로써, ‘창조’한다. 따라서 테크노 음악에 있어서는 곧 “평가하는 것Schätzen이 창조하는 것이다.”
  • 따져보고 찢어발겨서 선택하여 뒤섞어버리는 것, 이것이 테크노
  • 음악 안에서는 창조를 의미하고 창작을 대체한다.
  • 테크노가 단순히 어떤 곡에 대한 모방과 복제라는 이유만으로 모종의 탁월함을 보장받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차라리 원본과 모방을 서로 저울질하는 우월함과 열등함의 비교 기준 그 자체를 무화시킴으로써 태초의 혼돈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이다(변형 규칙 2).
  • 이것은 ‘화해’가 아니라 하나의 ‘이탈’, 하나의 ‘낯설게 하기’이다
  • 테크노에 있어서 순수하게 자기 자신으로 완결되고 닫혀 있는 음악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단지 무한히 반복되고 혼합되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
  • 만남으로써 일종의 무의미와 몽환의 ‘축제’랄 것을 이끌어내는 작업에 사용되는 단순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반복되면서 열려 있는 무의미는, 완결되어 닫혀 있는 의미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변용되고 있다.
  • “무의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르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Le non-sens est la chose du monde la mieux partagée.”
  •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르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Le bon sens est la chose du monde la mieux partagée.”
  • 양식은 곧 말씀이고 의미이며, 그것은 또한 어떤 하나의 완결된 음악을 가리킨다.
  • 테크노의 욕망은 또한 또 다른 ‘리셋’의 욕망, 또 다른 ‘절멸’의 욕망인지도 모른다
  • ‘퓨처 사운드 오브 런던Future Sound of London’
  • 무의미가 의미에 선행한다거나 무의미가 의미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래서 고정된 의
  • 의미가 덧씌워지기 전의 유동하는 힘과 행위가 말씀과 의미에 대해 우월해진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닫혀 있던 의미가 열린 무의미로 초기화하고 가상화하며 잠재화하는 역행의 과정이 바로 테크노가 위치하고 있는 음악적 의미의 맥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 파라노이아
  • 테크노 음악에 있어서는, 단지 이름 붙여질 수 없는 무정형의 열려 있는 반복과 무한한 복제로서의 순수한(따라서 동시에 불순한) 음악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테크노 음악은 ‘주체가 없는’ 음악이다. 또한 테크노에는 역사가 없다. 다만, 초기화하고 잠
  • 잠재화하고 가상화하는 영원한 지속으로서의 무한한 원점,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되는 순간성의 영점零點만이 있을 뿐이다(그래서 테크노 음악은 저 태초의 미분화未分化/微分化된 상태 그 자체로 돌아가는 ‘탈정치적 놀이’를 감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특성은 동시에 테크노 음악이 포스트모던적인 탈정치의 알리바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음을 의미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테크노 키드는 음악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음악사를 축적하지도 않는다. 즐기고는, 던져버린다.
  • 여기에는 어떤 무감각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저 모든 것들을 동일화하는, 동일화하고야 마는 괴물. 그 괴물이 무서운 것은 그 커다란 덩치보다는 오히려 그 무시무시한 무감각함 때문이다.
  • 댄스 음악은 춤추는 것이라는 확고한 동일성이 이미 이 질문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 이러한 동일성은 춤에의 강요, 몸에 가해지는 강제라는 의미에서 또한 로고스중심주의의 심신이원론을 연장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일종의 파시즘인 것. 그러나 테크노에 있어서 몸에 대한 이러한 강제 규정은 해소되어버린다. 테크노 음악은 반드시 춤춰야 할 필요는 없는 음악인 것이다.
  • 테크노 키드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곡이 어떤 곡인가라는 동일성(의미)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반복과 복제가 자신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라는 사태 자체(힘)에 대한 물음, 하나의 약제학藥劑學, pharmacology이다.
  • ‘키드’라는 단어에는 본래 어떤 ‘좌절’의 이미지가 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키드’는 ‘어덜트’로의 성장, 따라서 어느 정도의 타협과 어느 정도의 좌절, 그를 통한 어떤 ‘훌쩍 커버림’의 슬픔을 전제하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키드’가 원래 아버지 신神에게 코 껴버린 어린 양kid을 의미했음을 기억하라).
  • 철학이고 신학이고 모든 것을 죄다 알아버린 어른이 아니라 순간을 위해 외출하는, 그래서 쉴 새 없이 방황하고 횡단하는 어린아이로서의 파우스트, 그러므로 그는 우리 시대의 테크노 키드로 부활하고 회춘한다. 차
  • 테크노 키드로 부활하고 회춘한다.
  • 벤야민이 예술은 복제됨으로써 그 아우라를 상실한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은 이제 차라리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 음악은 음반으로 복제된다. 따라서 벤야민에 따르면 그 음반은 원래의 음악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었던 아우라를 상실한다(그러므로 우리네 음악 판에서 일어나는 ‘라이브’에 대한 강조와 립싱크에 대한 비난은 이러한 아우라
  • 이론과 밀접한 연관 속에 놓여 있는 것). 그렇다면 테크노 음악은 어떠한가? 그것은 말하자면 복제의 복제, 복제에 대한 또 한 번의 복제이다. 그렇다면 테크노에 있어서는 아우라가 두 번 상실되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에게 테크노는 단지 현대 예술이 겪는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하는 단말마적 비극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문화 현상일 뿐인가?
  •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고 거기에는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 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 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 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예술 작품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역사에 종속되기 마련인데, 예술 작품의 이러한 역사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 위에 말한 예술 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이다.”
  • 테크노는 무한히 그리고 다양하게 ‘반복’하고 ‘복제’하는 음악이다. 그러나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벤야
  • 그러나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벤야민의 아우라와 결별한다. 테크노의 그 무한한 반복은, 어떤 음악의 복제물로서의 음반과 같이는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언제라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을 수 있지만, 어제 새벽에 홍대 앞 테크노클럽 M.I—나는 이곳의 엉클Unkle이라는 DJ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데—에서 믹스되었던 그 무한한 반복의 음악은 이후 다시 똑같이 반복해서 들을 수
  • 는 없는 것, 그것은 그날 새벽 그 순간으로 생성되었다가 그 순간으로 소멸한다). 이러한 ‘반복의 반복 불가능성’이 테크노 음악에서의 순간성과 현장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그래서 또한 테크노는 일종의 즉흥 연주improvisation를 의미한다 할 것인데). 역사성이라는 수식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이러한 순간성과 현장성은,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성이라는 것이 규정하는 벤야민의 아우라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아우라를 산출해낸
  • 산출해낸다. 이 아우라는, 일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존성이 아닌, ‘순간적이고 현장적인 현존성’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우라 없는 아우라’, 곧 벤야민의 아우라가 해체된 이후에야 비로소 내리깔리게 되는 아우라이다. 반복의 반복될 수 없음, 복제의 복제될 수 없음이 만들어내는 아우라, 테크노 음악이 반복되고 생성되고 무한히 계속되는 장소 바로 그 안에서만, 테크노 음악이 흘러가고 유동하는 복제의 무한한 반복을 행하는 그 순간순간에서만, 비로소 포착 가능한 아우라, 이것은 순간성
  • 포착 가능한 아우라, 이것은 순간성과 현장성이 빚어내는 아우라이다.
  • 테크노 음악은 기본적으로 녹음되거나 음반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음반으로 만들어진 테크노 음악은 단지 하나의 현실태일 뿐, 테크노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아우라는 역사성으로 규정된 미적 사물의 고정된 현존성을 넘어서고 초월한다.
  • 결국 테크노 음악의 아우라는, 사물에 부착되고 구속된 것으로서의 역사적이고 고정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더 이상 숙주로서의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하고 순간적인 시공간이 창출하는, 언어화될 수도 형상화될 수도 없는 말 그대로의 ‘분위기Aura’ 같은 것으로서의 제의적 환경과 현장 그 자체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 엑스터시
  • 우리는 이러한 복제의 문제를 ‘표절’이라는 새로운 문제 층위에서도 또한 읽어낼 수 있다. 플라톤은, 말하자면, 표절반대론자인 것이다. 예술과 그것이 취하고 있는 모방이라는
  • 방법론에 대한 그의 가치 폄하가 자신의 형이상학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 원형과 모사, 원본과 복제의 이분법적인 존재론의 위계질서에 대한 그 자신의 확고한 믿음이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예술은 그것이 이데아에 대한 일종의 ‘표절’이기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남는 것이다, 마치 찌꺼기처럼. 이러한 관점에서 록 키드로 대변되는, 음악에서의 표절반대론자들과 결벽증 환자들은 결국 근본적으로 모두 플라톤주의자
  • 플라톤주의자들일 뿐이었다. 그들 역시 이데아와 가상, 원형과 모방의 이분법과 그것들이 갖게 되는 존재론적 위상의 차이와 위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단지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플라톤의 이데아가 보편적인 것임에 반해 여기서는 그 하나하나가 각기 원형으로 파악되는 다양한 곡들의 개별적인 이데아가 문제되고 있다는 점인데, 그러나 이러한 섬세한 뉘앙스의 차이가 사장되고 무시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는 비로소 플라톤주의일 수 있는
  • 것, 아마도 플라톤 자신은 플라톤주의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원곡인가, 라는 질문, 무엇이 원형이고 무엇이 모방인가, 라는 질문, 그 번뇌 자체의 유효성이 상실되고 해소되어버리는 것, 그러므로 테크노는 ‘right’와 ‘left’의 대립 구도, 그 이분법 자체를 폐기시킨다. 표절과 믹스, 도용과 샘플링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 이라는 번뇌가 해소되고 해체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테크노가 ‘말씀’으로서의 카
  • 카피라이트에 대한 근본적이고 과격한 도전과 거부의 ‘몸짓’을 의미하고 있음을 또한 읽어낼 수 있다.
  • 프로디지Prodigy
  • 찢어서 이어붙이고 무한반복하며 원형과 복제의 이분법을 진정 골계적으로 까부수는 통렬한 일갈
  • 달파란
  • 볼빨간
  • 법열
  • 테크네
  • “마야의 베일”
  •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고 해서 테크노 음악이 일순간에 사멸하는 것도 아니고, 유행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축복의 예언—흔히 이러한 덕담은 자본주의 상품이라는 극도로 단순화되고 천
  • 천박해진 형태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것인데—이 테크노 음악의 대중적 순항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 에켄드리야
  • 사람들은 마치 그것만이 테크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노래한다, 흔들어댄다, 마치 양손을 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춤만이 테크노 ‘댄스’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너도나도 그 ‘뻬-’ 싸지르는 곡에 단숨에 편승한다, 무임승차한다, 그러고는 곧 싫증낸다, 동결시킨다, 화석화한다. ‘여기 테크노라는 새
  • 화석화한다.
  • 그러므로, 성급하다, 테크노를 문화자본의 역병을 치유할 하나의 항체로 규정 짓기에는, 또는, 너무 경박하다, 테크노를 퇴폐적이고 맹목적인 젊음의 이유 없는 반항으로만 쉽게 치부해버리기에는(그러나 이러한 나의 심려는, 혀끝
  • 을 끌끌 쯧쯧 차대며 눈알을 아래위로 부라리는 저 ‘어덜트’들의, 세상에 대한 눈물 나는 충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과연 우리는 테크노클럽에서 춤추고 있는 모든 키드들에게서 문화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전사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을까
  • 우선은, 테크노 키드, 그 아이를 놀게 내버려둬라. 젊음의 저항과 분출이라는 주먹구구식 문화 이데올로기에 테크노를 가두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테크노 음악의 무한한 반복과 번식 능력 그리고 복제라는 엄청난 잠재력을 생각할 때, 아직은, 너무
  • 이르다. 오히려 지금, 말씀과 의미의 이데올로기로 포착될 수 없는 생생한 날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테크노 키드라는 춤꾼dancer은 우리에게 하나의 신선하고 매력적인 위험danger일 수 있다. 따라서 태초의 벌거벗은 존재로서, 말씀과 의미의 유니폼uni-form이 아직 입혀지기 전의 벌거벗은 몸과 힘과 행위로서 현현하는 순간성의 테크노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래서, 하나의 “기적miracle”이다. 우리는 그가 메스칼
  • 메스칼린이라는 약물을 통해 도달할 수 있었던 몽환과 망아의 법열 상태를 테크노라는 음악을 통해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우선은, 이것들을, 마음껏, 향유하자, 놀아보자.
  •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 lange er strebt.”
  • 역으로, 어떤 인간이 방황하고 있다면, 그는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 테크노 키드로 회춘한 파우스트는, 바로 지금, 테크노클럽이라는 공간으로, 저 태초의 현장으로, 외출하고, 귀환한다, 방황한
  • 방황한다.
  • 책은 생각의 집합이기 이전에 하나의 물질이다. 책이라는 물질의 냄새를 맡고 책이라는 물질의 흔적을 따라가라, 동물적 감각을 활용하라!
  • 그러므로 하나의 책을 고르고 읽게 되는 기준은 정확히 어떤 감각의 논리를 따른다. 이 감각의 논리란, 그것이 무엇보다 하나의 ‘감각’이기에 지극히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하나의 ‘논리’인 한에서, 동시에 어떤 내재적
  • 규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곧 그러한 기준이 어떤 ‘감각의 논리’인 한에서, 정신분석적으로 말해, 책을 고르고 읽게 되는 기준은 어떤 ‘도착’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책을 능동적으로 고르고 또 주체적으로 읽는다고 스스로 가정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책은 나에게 ‘도착到着’하는 것이며, 또한 책과 나의 관계는 지극히 ‘도착적倒錯的’인 것이다. 이 도착증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그리고 이 개인적인 것이 저 사회적인 것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 도착증을 충분히 즐겨라, 그리고 오히려 증폭시켜라!
  • 입이 없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그에 따라 책들을 스스로 발견하라!
  • 도착의 논리는 또한 어떤 대화의 논리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개인적인 도착의 논리는 사회적인 대화의 논리와 만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다.
  • 서평이란 단순히 한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나 자신의 호불호라는 개인적 기호를 표출하는 일이 아니라 그 책과 나눈 대화의 흔적들이다.
  • 답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질문이 무엇인지를 물어라, 그리고 그 질문을 확장시켜라!
  • 인문학 서적을 읽는 최종적인 목적이 객관적인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을 얻고 그 질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
  • 찾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 답은 책 안에는 없다. 그리고 인문학 서적은 그런 답을 제시하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인문학 서평이란, 하나의 책이 지니고 있는 코드를 다시 풀어내는, 그리고 다시 독자 자신의 피드백 과정으로 그 책을 ‘완성’시키는 작업이다. 하나의 질문을 얻기 위해 인문학 독서는 존재하며, 그리고 다시 그 책 안으로, 그 책 밖으로, 독자 자신 안으로, 그리고 사회 바깥으로 그 하나의 질문을 확장하기 위해 서평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평을 쓸 때 그 책에 대해 섣불리 동의를 표하지 말라, 의문시하고 질문하고 끝끝내 답을 얻어내라!
  • 우리는 책에 대한 여러 정보들로 둘러싸여 있다. 언론 매체와 전공자 혹은 전문가들의 가치 평가가 담긴(추천이든 비판이든) 많은 정보들이 우리의 독서를 종용하고 규정하며 한계 짓는다. 그러나 먼저 묻자, 그들은 그 책을 다 읽었는가? 다 읽지 않고 쓰는 서평은 서평이 아니다. 물론 어떤 책을 ‘안다’는 것은 반드시 그 책에 대한 전체적인 통독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일반적으로 서평은 그 책을 다 읽지 않고도 작성될 수 있는 무엇이다).
  • 언론이나 전문가를 믿지 말라, 오히려 그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그들에 반대하고 그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서평을 써라!
  • 인문학 서적에 대한 독서는 단순한 해독解讀이 아니라 일종의 ‘해독解毒’이 되어야 하며, 끝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이 되어야
  • 하는 것, 인문학의 독서와 서평은 하나의 질문을 내재화하고 또한 외면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당신의 감각을 활용하라! 그리고 그 감각을 정치화하라!
  • 에드워드 사이드
  • 테오도르 아도르노
  •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v. Beethoven
  •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
  • 주관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 ‘〔후기 베토벤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깨지기 쉬운 풍경은 객관적이며, 그러한 풍경이 그 안에서 홀로 타오르는 빛은 주관적이다. 그〔후기 베토벤〕는 이들 사이의 조화로운 종합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분열의 힘으로 작용하여 이것들을 시간 속에서 서로 떼어놓는데, 이는 아마도 그것들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후기 작품들은 곧 파국이다.’
  • 파우스트의 번역어들이 보여주는 변용의 과정은, 또한, 우주의 생성 과정이 누락시킨 퇴적 지층의 순서를 거꾸로 훑는다. 아마도 생성의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존재했던 것은, 말씀의 고요하고 정적인 가부좌가 아니라, 차라리, 행위의 부산스런 방할捧喝이었다 할 것이다
  • 미메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은, 그것이 미메시스의 산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실재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파악된다.
  • 테크노는 기존의 어법에 따르지 않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수립한다(규칙 1). 그리고/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다른 곡들에 대한 모방이자 복제였다(규칙 2).
  •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에서, 사이드가 인용하고 있는 주네의 몇 마디 말들이 나를 한껏 미소 짓게 했음을 고백한다(같이 읽으며 함께 미소를 머금었으면 하는 마음 한 자락, 그 미소가 비록 ‘썩소’라 할지라도!):
  • 정체성은 더 강력한 문화, 더 발전한 사회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결된 사람들을 짓밟고 그 위에 자신을 부과하는 과정이다. 제국주의는 정체성의 수출품이다.
  • ‘배반
  • ‘배반자’ 또는 ‘위반자’로서의 정체성이란 어쩌면 ‘여행자’와 ‘관광객’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가.
  • ‘교조 없는 교조주의’—어쩌면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
  • 메시아주의’
  • 발을 걷어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내리고 있는 것인가. 바꿔 말해, 그는 입고 있는가 벗고 있는가, 혹은 그는 감추고 있는가 드러내고 있는가
  • 라캉의 ‘말년성’이라는 지평(‘후기 라캉’)에 섰을 때에만, 그때야
  • 비로소 지젝의 ‘청년성’(‘청년 지젝’)이 보이게 된다.
  • 사막의 모래에 휩쓸려가기 전에, 혹은 이미 휩쓸린 채로 말이다.
  • 데블린  〔……〕 다시 시작하자. 레베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시작했어…… 오래 전에. 우리는 시작했지. 다시 시작할 수 없어. 우린 다시 끝낼 수는 있지.
  • 데블린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끝낸 적이 없잖아. 레베카  ‌아니, 끝낸 적 있어. 끝내고 또 끝내고 또. 그리고 우리는 또 끝낼 수 있어.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데블린  ‌‘끝내다’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야? 끝은 끝낸다는 것을 뜻해. ‘또’ 끝낼 수는 없어. 당신은 한 번 끝낼 수 있을 뿐이야.  레베카  ‌그렇지 않아. 당신은 한 번 끝낼 수 있어. 그러고 나서
  • 또 끝낼 수 있지.
  • ‘한 번 끝낼 수 있고,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끝낼 수 있는 것’,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
  • 임화林和
  • 말들이 말들의 꼬리를 집어 삼키고 다시금 내뱉기를 반복하는, 몇 마리인지도 모르는 뱀들이 뒤엉켜 이루고 있는—혹은 부수고 있는—‘하나의’ 정체성
  •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어쩔 수 없이 기쁘게도 혹은 슬프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
  •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죽
  • 죽음으로부터, 나는 다시 시작한다.
  • 무엇보다도—멀리는 낭만주의, 가깝게는 모더니즘
  • 출발은 그렇게 던져졌다, 참을 수 없이, 견딜 수 없는 세기로, 내동댕이쳐졌다.
  • 여행은 어쨌든 잘못 들어선 길에서부터 시작한다.
  • 천상천하유오독존天上天下唯吾獨尊.
  • 손화중
  •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 미륵은 언제나 현재 안으로 불러들인 미래의 유령, 그래서 언제나 미륵은 또한
  • ‘미래기未來己’로만 발음되고 읽힐 수밖에 없을 텐데.
  • 상처가 보인다, 상처가 후비고 지나간 구멍이 보인다,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기에, 그 밖이 보인다, 그렇게 구멍이 보인다
  • 저것은 희생도 아니고 살해도 아니구나
  • 바람에는 독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독은 중독되기보다는 오히려 정화시키는 듯했다, 다시 읽는다, 중독을 다시 읽는다, 허기가 느껴지고, 불빛이 열리며, 다시 속세, 그 세속적인 세상이 조그만 빛으로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다시 어둠이었다, 빛의 몸을 입은 어둠, 그렇게 다시 그 어둠 속에서 하나의 꽃이 피어날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권유하고자 하는 여행이란, 몰락이란, 바로 저 꽃에 대한 중독, 중독의 원예학園藝學이다.
  • 질서의 무질서 혹은 무질서의 질서
  • 쳄발로
  • 잇단음표
  • 세리稅吏
  • 오일러 상수
  • 비유—그의 소설은 정말 비유일까, 하나의 비유일 뿐일까
  •  부고訃告란 죽음의 고지이며, 따라서 그것은 죽음의 현재화된 과거형이다. 그래서 부고란 또한 그것이 고지되는 현재에서는 전혀
  • 느끼지 못하는, 아직 현재에는 도래하지 못한, 오래된 미래 같은 과거이기도 하다.
  • 행장行狀
  • 살았던 이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와는 반대로, 죽은 이의 삶을 적어 내려가는 행장이란, 과거가 된 죽음의 현재형이며, 미래에도 결코 도래하지 못할, 그러나 항상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는 애도의 형식, 그 하나의 시제를 향한 여행을 꾸리는 어떤 행장行裝이기도 할 것이다.
  • 수심水深만큼 깊은 수심愁心
  • 사람은 제 성격대로 죽는다, 문상객 한 분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갈 때도 그렇게 깔끔하게 간 게야, 싸늘한 냉장고에서 염을 하기 위해 시신이 꺼내졌다,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손이 올려졌다, 손을 흔드는 것일까, 인간의 몸은 왜 저리도 나를 눈물짓게 하는 걸까,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리 오지 말고 저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일까, 일흔아홉 해의 삶이
  • 순간에 모이고 한 순간으로 끝나고 다시 한 순간으로 어디선가 시작된다, 그 무게는 견딜 수 없다
  • 일흔아홉 해의 삶이, 그 무
  • 무게가, 그 밀도가, 한 순간으로, 일획으로, 일점으로, 증발하고, 기화했다, 그러므로 행장行狀이란 써도 써도 모자라는 글의 형식일 것이다, 그것은 요약할 수 없기에 요약도 아니며 애도할 수도 없기에 애도도 아니다, 이제 어디서 볼까, 이제 어디서 다시 만날까, 이 하나의 물음을 던지기 위해, 끝나지도 않는 글을 끝까지 써나가보는 것, 끝나버린 삶을 끝나지 않게 하는 것, 끝날 수도 없고 끝나지도 않았기에, 가장 가벼운 무거움은 가장 무거운 가벼움으로 승화했기에, 그러니까, 한번 더 반복하자면, 행장行狀이란, 다시 길 떠나기 위해 꾸리는 행장行裝이기에, 어디서 다시 볼까, 눈물을 흩뿌리며, 우리 어디서 다시 볼까, 무거운 육신을 훌훌 벗어던지며, 두터운 세월을 훨훨 날려 보내며, 우리
  • 어디서 다시 만나 서로의 몸을 안아볼까.
  •  유서遺書, 남겨진 글. 존대尊待를 위한 하대下待의 언어들, 소멸消滅을 위한 잔존殘存의 낱말들.
  • 예전부터 그랬다, 어딘가에 있어도 도무지 어디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고, 언제를 살아도 도통 그 언제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만 같은 예감이었고, 그 불길했던 예감은 이제까지 용케 잘
  • 잘도 들어맞았다, 어쨌든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공허空虛를 선물 받았던 것이고, 그 선물은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저주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주문呪文/注文이어서, 마치 오물에 오염된 흙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무지 발에서 털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 단지 마음속으로,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겨우 그저 그렇고 그런, 철학적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바짝 타들어간 입술에 헛되이 마른 침을 묻히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기억만이, 그 기억만이, 지금도 여전히 내 기도氣道/祈禱를 틀어막고 앉아 있다
  • 목이 막혀 소리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공포인가(그러므로 무성영화 시대의 공
  • 공포 영화들은 또 얼마나 더 무서운가)
  • 여기는 캄캄하다, 여기는, 말도 못하게, 캄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눈을 감아, 닫힌 눈동자 안으로, 다시 한 번 어둠을 지어내고 있었나, 왜 이 모든 것은 멈추지 않는 걸까, 어째서, 이 모든 것은, 멈추는 법을 모르는 걸까,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그 어느 사이에 서 있다는 건, 과연 정말로 어딘가에 발
  • 을 딛고 서 있기나 한 걸까, 왜 나는 어디에도 없고, 왜 나는 나를 어디에고 붙잡아달라는 구조 요청조차 할 수 없게 된 걸까, 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음에도, 엄청난 자제력을 갖고 있는 양, 그렇게 참을 수 있는 것일까
  • 나의 일기란, 매일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내려가는 유서들의 묶음인데, 그렇다면 그걸 과연 일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매일 죽는 죽음은, 죽음일까, 삶일까, 아니면 꿈일까, 눈을 감아야 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쓰린 악몽으로 산화되었으면, 강하고 독한 휘발성으로 그냥 날아가버렸으면, 그랬으면 하는데, 그랬으면 했는데, 눈을 뜨
  • 뜨면, 나는 여전히, 여기가 어딜까, 여기가 어딜까. 의미도 없는 선언을 하고 있었다 가장 비어 있는 형식 속에서 그런데 그 형식은 무척 아름답다 무턱대고 아름답다 나날이 늘어가는 몸의 무게를 의자 위에 도로 위에 천장 위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늘어놓았다 늘어놓았지만 어떻게 해도 불편하였다 그 불편한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안부 인사들이 오고 갔고 그는 죽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여느 때처럼 그렇게 여느 때처럼 가장 쓸데없고 지루하게 그렇게 말이다 말하자면 욕망은 자본의 융성을 도왔으나 정작 자본의 태평성대가 도래하고 나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욕망은 풀이 죽어 함량 미달이나 발기부전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예 고자에 석녀가 되어버렸
  • 되어버렸다 아예 몸을 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는 깊이 파내려갔다 파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자신을 감금하려고 하는가 피식 울컥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축축한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지만 그는 그 자신의 이 가장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분비물들의 자연스러운 신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있었긴 했으나 그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않을 수 있었다 무거운 느낌이 불끈 솟아올랐다 솟아올라서는 뿜을 수 있는 대로 뿜어대고는 축 처진 잠에 빠져든다 빠져들어서는 여기가 말로만 듣던 하수구 안이구나 안일하기만 한 생각을 하다가 옆으로 뒤척이며 몸을 뒤집었다 뒤집히는 속을 부여잡고 중력을 느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쓰디썼지만 여느 때처럼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 역
  • 역겨움을 넘길 수 있었다 있었던 그것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는데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하면 속이 편해질 텐데 아예 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확신할 수 없음이 언제나 그에겐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괴로웠던 오늘 그는 서너 번이나 커피를 바지에 쏟았다 담았다 쓸어담았다 쓸어담는다고 담았지만 엎지른 커피는 흉한 얼룩만을 남겼다 남기고 쌌다 쌌지만 그 대가는 귀찮도록 값비쌌던 간질병처럼 맑은 어느 날의 실패 그 실패를 속으로 돌돌 감아가고 말아가며 하루하루가 유서 같은 일기를 썼다.
  •  결어結語, 맺는 말. 그러므로 나는, 여기 이 자기지시적인 각주의 공간 안에서, 길게는 이 긴 하나의 악보를 닫으려 하고, 또한 짧게
  • 짧게는 이 짧은 몇 개의 각주와 부고와 유서들을 다시 열려 한다.
  • 코다coda
  • ‘리토르넬로ritornello’
  • 바야흐로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의 시대, 혹은 트위터Twitter의 시대, 곧 지저귀는 시대이다(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어떤 ‘시대’라고 말해버릴 때, 그것이 한 시대를 ‘대변’하는 어떤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해버릴 때, 우리는 동시에 저 월드와이드웹과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현재 너무나
  • ‘보편적’인 것으로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는 저 ‘특수’하고 ‘특정’한 물질적 조건들을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
  • 트위터가 묻는 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대답이 지녀야 하고 지닐 수밖에 없
  • 없는 어떤 대답의 ‘형식’을, 이미 그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답〔의 형식〕이란 곧 ‘무엇/무슨 일what’이다. 따라서 저 질문의 ‘공식적인’ 한국어 번역 중의 하나인 ‘지금 뭐하고 계세요?’라는 질문은, 원래의 질문이 지니고 있던 저 유물론적 익명성과 비인격적 물질성을 동시에 희석시키는, 실로 지독한 ‘의인화’를 거친 하나의 ‘번안’일지 모른다. 번역이라는 언어들 사이의 이행이 지닌 하나의 함정. 
  • 트위터
  • 속 140자 안에 담긴 문자들의 나열을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event’을 촉발시킬 단초로 만들어줄 어떤 ‘질문’일지도 모른다
  • 소통할 것인가 소통당할 것인가.
  •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지저귄다. 그러나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는 이 말만큼 공허한 말, 이 지저귐만큼 공허한 지저귐은 없다. 이제 이념 논쟁을 끝내라는 말은 이제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며, 인간을 움직이는 것
  • 것은 근본적으로 이념이라는 (과거의) 사실은 현재에도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
  • 어떤 이들은 이념을 포기하라는 이 또 다른 이념을 강요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공식적인 상속자로, 어떤 ‘시대의식’의 총아이자 대표자로, 스스로를 그렇게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렇듯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하는 어떤 또 다른 ‘시대의식’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지극히 이념적인 것이 아닌가? 문제는 저들이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최종적 물음에 대해 극도의 무지와 무감각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에 무지하고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음 자체’에 무지하고 무감각하다는 사실이 바로 이 무지
  • 와 무감각만의 무시무시한 실체인 것. 저 ‘실용의 시대’라는 괴물은 그 자신이 하나의 편협한 ‘이념’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엇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구성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은 바로 이 ‘출생의 비밀’을 보지 못하거나 감추는 한에서 비로소 ‘그들’일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더 강렬하게 이론적 투쟁의 지점들을 소환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 우리의 시대에는—다시 저 ‘시대’라는 표현을, 이 ‘표현주의적’ 표현을, 지극히 ‘반시대적’으로, 그리고 또한 ‘시대착오적’으로 사용하자면
  • 아포리아
  • 이러한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시도와 기도들이 전복을 위한 전복, 평면을 뒤집는 또 다른 평면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위반이 단지 위반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듯, 위반이 어떤 직선적인 넘어감이 아니라 그것이 위반했던 금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한계의 위치를 증명하는 나선형의 되돌아옴이듯.
  • ‘처음’이 마치 ‘끝’이 아닌 듯
  • 파르마콘pharmakon
  • 하나의 속임수, 하나의 함정은 사실 이렇듯 ‘소극적 겸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폐된 적극
  • 적극성’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그러므로 문제는, ‘완성’의 말년과 ‘미완’의 말년 사이를 가르는 골, 혹은 ‘조화’의 후기와 ‘파국’의 후기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을 수밖에 없는—따라서 ‘unique’라는 형용사가 품은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말년성’이라는 징후적인 현상의 ‘유일한’ 특성들 바로 그것이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12음 음악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 주네와 사이드 자신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경계〔인〕적’ 특징이란, 곧 그들의 지적 궤적이—물리적인 의미에서든 정신적인 의미에서든—일종의 ‘여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의 여정은—
  • 여정은—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물리적 의미에서든 정신적 의미에서든—자신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거의 떠나지 않았던 저 칸트의 ‘지적’ 여정과는 전혀 다른 경로와 밀도를 보여준다
  • 노정露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