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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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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하이브리드 총서’ 두 번째 책은 한국의 시각 문화에 영향을 끼친 아파트에 대해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을 고찰한다. 디자인 연구자로서 디자인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관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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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양, 그들은 끝까지 놀아보겠다는 심사였다.
  • 나는 집이 바뀌면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파트에 대한 나의 로망도 시동을 걸었다. 변한 그들이 부럽다기보다는 그들을 변하게 만든 아파트의 어떤 힘에 반했던 것이다.
  • 나는 여태껏 묵언의 자리에 놓여 있던 행위자들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 장광설
  • 1부의 픽션은 의도치 않게 4개의 입구를 가진 미로의 구조물로 세워져버렸고, 2부의 팩트는 그 미로에서의 길 찾기를 돕기 위한 길고도 불완전한 안내서의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알아차렸겠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1부와 2부의 사이는 꽤나 크게 벌어져 있다. 깊게 패인 골짜기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고, 비
  • 패인 골짜기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고, 비탈길마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군데군데 아득한 낭떠러지도 숨어 있다. 저자로서 염치불구하고 고백하자면 바로 이 사이의 공간이 이 책이 마련한 독자의 자리이다. 울퉁불퉁한 오솔길도 하나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아서 낯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독자들이 1부와 2부를 오가며 길 찾기의 해법을 구하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관한 자신의 ‘진짜’ 경험담으로 이 빈 공간을 채워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섣부른 희망임에 분명
  • 분명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파트가 구축해놓은 매혹의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과 일상 사물을 상상하는 데 첫 출발점이라고 믿고 있다.
  • 책에 대해서만큼은 미래의 독자일 두 아들
  • 주변 풍경과의 극단적인 대비 때문에 미래에서 날아와 불시착한 미확인 비행물체 편대
  • 편대처럼 보인다. 당장이라도 동력 장치가 정상 작동한다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차원 이동을 감행할 태세다.
  • 대오를 갖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도도한 몸 맵시. 흉내를 내보거나 연습을 거듭한다고 한들 이런 포즈를 취할 수 있을까?
  • 주변의 가옥들은 숨죽인 채 낮은 포복 중이다.
  • 시간을 멈춰 세우는 사진의 힘
  • 원형의 로터리는 교차로라기보다는 반환점에 더 가까워 보이니 말이다.
  • 1963년의 과거와 21세기의 현재의 교차로.
  • 나의 배는 내 한 몸 겨우 구겨 넣을 수 있는 비좁은 무동력선이었고, 내 지도와 나침반은 우연과 필연
  • 이 겹쳐진 망망대해의 혼탁한 조류였다. 그러니 누군가 내 모험담을 표류기라고 불러도 나로서는 반박할 말이 없다.
  • 당신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지루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처지다. 그리고 나를 불러낸 당신은 내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처지다.
  • 들어야만 하는 처지다.
  • 필리포 브루넬레스
  •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
  •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
  • 나는 시선이다. 나는 하나의 시선이면서 모두의 시선이며, 수많은 나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
  • 화폭 위의 풍경은 구겨지고 뭉개지고 찢겨진다.
  • 지그프리트 크라카
  •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 세계는 존재하는 것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대면하는 인간 주체의 다양성으로 분열된다. 이 인간 주체는 이전에는 세계가 만들어 놓은 형태들의 약동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유일한 정신의 대리인으로서 이 혼돈과 대면하여, 그리고 측정 불가능한 실재성의 영역과 대면하여 고독하게 남겨져 있다. 주체는 텅 빈 공간과 텅 빈 시간의 차가운 무한성 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 코르뷔지에Le Corbusier
  •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
  •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다윈의 이론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자연 현실의 핵심 범주로 본질 대신 변종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적이
  • 있다.
  • 다윈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변종들의 세계이며, 본질이란 변종들의 평균치를 추상화한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 시간성의 차원을 접목한다면 어떨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에 무작위적 변이의 가능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혼돈스러운 변화의 시기에는 그 가능성이 좀 더 넓게 분포된 차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면, 나 역시 전자의 시기에는 단 하나의 형태로 수렴되면서 내가 점령한 공간을 늘려가
  • 늘려가지만 후자의 시기에는 셋이거나 다섯, 혹은 여럿의 ‘나’들로 분화하면서 공간의 점유를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된다.
  • “텅 빈 공간과 텅 빈 시간의 차가운 무한성에 내던져”진 그들은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경험한 현실
  • 현실을 개념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스스로 변종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 그는 외상적 신경증과 관련된 반응의 양상을 크게 불안, 공포, 경악으로 분류한다. 불안은 정체가 불분명한 위험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막연하게나마 그에 대처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위험이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황, 바로 거기에서 불안은
  • 시작된다. 한편 공포는 그 대상이 뚜렷하게 확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불안과 공포는 위험에 대한 심리적인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비유하자면 양자 모두 의식 내부에 경고등이 점멸 중인 셈이다. 하지만 경악은 다르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돌출 상황 때문에 주체의 심리적 거리감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아무런 방어 기제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
  • 없이 벌어지는 압도적인 충격의 사건들, 그 앞에서 주체는 경악한다.
  • 우리가 경험하는 불쾌감의 대부분이 자극에 반응하는 지각 차원에서 발생한다
  •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외부 자극이 감각 기관 내부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심리적인 흥분을 유발하는 상태인 것이다. 반면 쾌락은 자극과 반응 간의 균형을 획득한 결과다.
  • 이런 관점에 따르면 외상적 신경증은 단순히 외부의 충격이 수용의 임계치를 넘어서 쾌락 원칙에 심대한 손상을 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프로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페히너와 갈라선다. 그가 보기에 이런 식의 진단은 쾌락 원칙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이며, 아무런 해결책도
  • 제시하지 못한 채 기껏해야 모더니티의 폭력적 면모만을 과장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쾌락 원칙 ‘너머에’ 존재했다. 그가 이 지점에서 주목한 문제는 외상적 신경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그러한 충격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불안의 부재였다. 이를테면 실제로 외상적 신경증 환자들은 반복적인 꿈을 통해 외상이 발생했던 상황으로 자신을 이끌고 간다. 쾌락 원칙에 따르면 이런 꿈은 결국 환자들에게 또다시 과잉 자극을 유발할 것이 분
  • 분명하다. 하지만 임상 실험 결과, 그 꿈은 환자들에게 경악이 아니라 “불안을 촉발함으로써 그 자극의 근원을 소급하여 다스리”는 효과를 보여준다. 불안은 긴장의 고조를 가져온다는 측면에서 일견 쾌락 원칙과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그 원칙을 넘어서 자극에 대한 방어 기제를 재조정하여 정상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그에 따르면 불안의 치유 효과가 암시하듯이 쾌락 원칙은 자기완결
  • 자기완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감각 기관 외부에 존재하는 힘으로부터 관여를 받는다. 그 힘은 프로이트가 “두뇌에 자리 잡은 난쟁이”라고 부르던 ‘에고’였다.
  • 당나귀는 동물적 본능에 따라 변덕스럽게 갈지자를 그리며 빈둥거리며 걸어간다. 르 코르뷔지에가 보기에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의 길은 바로 당나귀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동맥은 없고 모세혈관만 있는 메트로폴리스, 그것은 속도와 팽창을 견뎌내지 못한다.
  • 도시가 이 병적 증상을 치유하고 “건강”을 회복하려면 건축가의 고난도 수술이 필수
  •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건축의 규모를 단일 건물의 설계가 아니라 도시 계획의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건축가에게 거리의 눈높이로 도시를 바라보는 산보객의 시선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이제 중력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져 건축적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창공 위로 날아올라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투시도법의 망원경을 꺼내들고 도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 룸펜
  •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리는”
  • 이상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외쳐보고 싶었지만, 그의 몸뚱이는 이미 “피로와 공복으로 무너져 들어”간 뒤였다.
  • “투쟁의
  • 시대”가 아니라, “구성의 시대”
  • 틸러 소녀단
  • 이 소녀단의 무용수들은 여성이되 여성이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의 신체가 지닌 여성성을 탈각하려는 듯 통일된 몸동작을 반복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선과 원”을 만들어낸다. 발레가 “만화경적 유행” 속에서 부드러운 몸짓으로 “에로틱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반면, 틸러 소녀단은 각각의 동작 하나하나를 기계적 설계물의 부품처럼 조립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안무에서 무용수 개개인은 구분되지 않는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 구분되지 않는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대중 장식이란 틸러 소녀단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이나 기계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표출하는 추상적인 형태의 볼거리를 의미했다. 그는 대중 장식이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오던 기존의 장식들과 급진적으로 단절한다는 점에서 마치 역사의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즉 대중 장식은 지시 대상을 지니지 않는 기호들로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 “동일성의 차원 위에 놓여 있고 단지 그것들이 점유한 자리의 크기만이 다를 뿐”
  • 구미 열강의 도시들에 비하면 수탈의 그물망에 걸려든 경성은 그저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에 불과한, 애당초 창조적 역동의 가능성이 차단된 불임의 도시였다. 따라서 이상이 욕망하던 “인공의 날개”란 식민지의 빈곤한 물적 토대에 발목 잡힌 이카루스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 확실한 것은 그에겐 “투쟁의 시대”도, “구성의 시대”도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 그러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말 주정만이 그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는 돌파구로 동경 행을 택했다. 자신이 연기할 무대를 잃어버린 식민지 지식인의 몸부림.
  • 에른스트 윙어
  • 그는 죽음을 앞둔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모더니티의 충격이 안겨준 집단적 외상이 경험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이마르의 대중이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고무하는 심리적 조건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
  • 고무하는 심리적 조건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의 추이를 되짚어보면서 ‘경험의 위기’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그 위기의 최종 종착지로 파시즘을 지목한다. 그에게 파시즘은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모더니티가 안겨준 경험의 파편화와 소외가 초래한 대중 운동의 정치적 형식에 가까웠다.
  • 벤야민에 따르면 실재의 운동을 이미지의 운동으로 번역하는 이 장치는 수용 과정에서 독특한 기계적 리듬을 제공하기 때문에, 잘 활용한다면 마치 정신분석학이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려주었
  • 정신분석학이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려주었던 것처럼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려줄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광학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새로운 형태의 경험을 활성화하는 신체적 감각의 무의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신경 감응innervation’
  • 신경 감응은 테크놀로지가 유도하는 감각 기관의 급진적 변형 가능성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었다.
  • 타이프라이터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표면적으로 좀 더 정교하고 다양한 활자체의 기술적 체계들을 요구한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글쓰기가 요구하던 유연한 손동작은 쓸모없어지고, 버튼을 누르며 명령을 내리는 손가락의 반복적인 운동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타이프라이터가 새로운 형식의 신경 감응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글쓰기의 경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영화의 분산적 수용에 관한 설명과 연속성을 지닌다. 벤야민에 따르면 충격의 학습
  • 학습을 통해 신체적 감각의 재배치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지닌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개별 신체와 기술적 장치 간의 균형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균형은 “각 개인이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환경을 지각하는 방식을 통해서 해결된다”. 즉 “새로운 주체의 구조적 구성”은 기계와의 인터랙션이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공한 새로운 경험의 접촉면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접촉면은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시각 이미지의 일방적 수용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 신체적 감각의 무의식 전반을 자극함으로써 모더니티의 충격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도록 감각 기관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 모더니티라는 메두사를 대적하기 위한 페르세우스의 모자가 르 코르뷔지에게 조감의 망원경이었던 반면, 벤야민에게는 영화 카메라라는 광학 기계
  • 장치였다. 전자가 창공 위에서 망원경의 투시도적 시선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도시 경관의 새로운 질서를 욕망했던 반면, 후자는 유리창을 영화 카메라로 대체해 새로운 신체적 감각을 획득한 주체의 출현을 꿈꿨다.
  • 외부로 향하는 것과 내부로 향하는 것, 세계의 형태를 바꾸는 것과 몸의 감각
  • 감각을 바꾸는 것. 구성의 시대와 투쟁의 시대.
  • 쇠퇴하는 시대가 불태우는 여명은, 좀 더 맹렬한 전투를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는 새벽이기도 하다.
  • 전쟁은 끝이 아니라 폭력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공동체로 단련되는 것은
  • 바로 이러한 대장간에서이다. 새로운 형태는 피로 가득 채워지길 원하며, 권력은 강력한 주먹으로 지배될 것이다. 전쟁은 거대한 학교이며, 새로운 인간은 우리의 낙인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 프로이트의 가설대로 모든 외부 세계가 쾌락과 불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각되는 것이라면, 주체가 대상과 맺는 모든 관계는 미적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특히나 기계를 통한 폭력적 경험이 외상의 상처를 할퀴며 계속 회귀하지만 사후적인 상상을 통해서나마 숭고의 미적 형태로 재전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쾌락 원칙을 압도하는 전율의 순간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 르 코르뷔지에의 시선이 도시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자극의 근원인 인공 환경을 기하학의 상징 형태로 재구축해내는 반면, 윙어의 시선은 전쟁의 한복판
  • 한복판에 놓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강력한 권능을 지닌 에고의 부축을 받으며 자폐적인 판타지의 세계에 몰입한다.
  • 벤야민의 모델은 ‘나’의 변종에 관한 이론적 예측보
  • 예측보다는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하는 신학적 믿음에 기대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끝까지 구원을 믿으려고 애썼다. 이런 이유로 그의 동료였던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광학적 무의식’의 개념을 두고 목숨을 판돈으로 내건 “역사와의 도박”이라고 불렀다.
  • 일본 교토학파에 의하면 총체전의 근본 문제는 “균형이나
  • 조화를 추구하는 합리성”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비약, 그리고 그런 비약 속에 내재한 합리성”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합리성”의 행위를 어떻게 실현하며 무엇을 성취하느냐라는 문제로 집약된다. 합리성의 논리가 온전하게 포섭하지 못하는 비약의 행위는 현재의 균형 상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초월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지닌 균형 상태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반도인에게 총체전은 협소한 민족 관념을 말소시키고 빠른 속도로, 그리고 좀 더
  • 적극적으로 일본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변신의 무대이며 ‘비합리적인 합리성’의 용광로였다.
  • 파시즘의 담론에 매혹된 식민지의 청춘들은 그 용광로로 뛰어들려고 준비했다.
  • 바로 이 부분에서 윙어의 모델은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이상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이 필요했다.
  •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무기들이 몇 해 동안 휴식을 취하다 몰려 들어와 무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했”
  • 동족상잔의 비극.
  • “나라를 찾았다면서 집을 잃어버려야”
  • 스티븐 제이 굴드
  • 설계 실무자에 따르면, Y자형의 구조를 택한
  • 것은 일차적으로 구조역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한강변의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압력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원인을 넘어섰다. 아파트를 구상하던 장동운의 시선은 이제 창공의 카메라 뷰파인더를 경유해 자신의 피조물을 바라보고, 마포아파트는 그 시선 앞에서 대중 장식의 모양새로 “텅 빈 이성의 표정”을 짓는다. 거기에는 “기하학적 정신의 순수성”이나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일말의 암시도 끼어들 틈이 없다. “1인당 국민소득 84달러”라는 초라한 경제 지표 앞에서 그런
  • 84달러”라는 초라한 경제 지표 앞에서 그런 말들의 성찬은 어차피 허튼 소리에 불과했다.
  • 오히려 장동운에게 이 아파트의 대중 장식은 ‘조국 근대화’를 향한 주체의 의지가 공간의 질서로 표현된 결과에 가까웠다. 박정희 장군의 완공 기념사대로, 그는 마포아파트가 “장차 입주자들의 낙원을 이룸으로써 혁명 한국의 상징”으로, “현대적인 집단 공동 생활양식”의 확산을 가져와 “구래의 고식적이며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 탈피”해 “국민 생활과 문화의 향상을 이
  • 이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단층 운동에 의한 지각의 융기처럼
  • 이런 패턴화된 비판의 반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꽤 그럴싸한 희생양이다. 그들은 나를 과녁 앞에 세워놓고, 비판의 활시위를 당긴다.
  • 딱 패전 처리용으로나 쓸 만한 상상력, 그 빈곤한 상상력 때문일까? 그들은 자신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으며 남들은 너무 조금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사람들은 오랜 반복 학습 덕분에 그들이 무슨 말을 꺼낼지 숙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경청하는 척하다가 결국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꺼내놓는다.
  • 말만 앞세우는 무능이 행여 탄로 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호위했던 군중 뒤로 숨어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 그나마 몇몇 아파트들이 시간의 거센 풍파를 꿋꿋이 견디며 도시의 흔적 기관처럼 생존해 있을 뿐이다.
  • 이 시기의 아파트들은 ‘아파트’라는
  • 명칭 때문에 현재의 나와 아주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그는 잠실 아파트 단지에 소득 수준에 맞춰 “저소득, 중소득층이 골고루 입주할 수 있도록 하라”며, 주택공사가 호화로운 주거 생활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히 서울시가 철거하는 무허가 불량 지구의 거주민들까지 수용할 수 있는 아파트를 건설하라고 덧붙였다. 설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집단들을 흡수하기 위해 가구 소득과 입주 면적의 상
  • 상관관계를 명료한 함수로 도식화했고, 그에 따라 평면을 계획하고 단지를 구성했다. 그들은 “월 소득이 4만 4,000원인 가구에는 7.1~7.4평형, 5만 8,000원인 가구에는 9.4~9.8평형, 그리고 7만 3,000원인 가구에는 13~15평형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7.5평형 아파트가 500가구, 10평형이 600가구, 13평형이 7,610가구, 15평형이 3,400가구, 19평형이 730가구, 총 1만 5,250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주축 평형대는 49.9퍼센트에 달하는 13평형이었다.
  • 정부의 시책에 따라 “둘만 낳아 잘 기르”는 핵가족의 모델
  • 모델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 ‘시
  • ‘시영주택’
  • 혹자는 내가 만들어낸 강남 일대의 경관을 두고 외국인들이 대규모 군사 기지로 오인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하며 도시 미관의 획일화라는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유명 건축가들이 88올림픽을 전후로 외국인 건축가의 입을 빌려, 또한 그들의 권위에 기대어 그런 말을 끄집어내곤 했다.
  • 부정적 뉘앙스로 치장하고 있긴 하지만, 내 모양새가 군사 기지와 유사하다는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내 실체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숨겨져 있다. 아마 맨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던 외국인들은 동북아시아 냉전의 최전방 도시나 다름없던 서울을 막연히 대공 방어 요새 정도로 상상했을 것이고, 마침내 밀집 대형을 갖춘 강남의 콘크리트 경관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자 했던 욕망의 대상을 보았을 뿐인데도, 마치 신
  •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 그런데 나를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온전히 그들 자신만의 것이었을까? 혹시 그들은 설계자들이 바라보던 대로, 나를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외국 건축가들의 지적은 추문 폭로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 기술記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만들어낸 도시 경관이 군사 기지처럼 보였던 것은, 실제로 내가 군사 기지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습속
  • 나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특정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독려했고, 일상성
  •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 그에 따르면 장치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이며,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 규율, 법적 조치” 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휴대폰 등도, 그리고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된 장치이다.
  • 아감벤의 말대로 장치들이 항상 주체화 과정을 함축하며 그것들의 주체를 생산한다고 정의된다면
  • 1945년생 소설가 최인호가 1971년에 쓴 단편 소설 「타인의 방」의 한 장면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주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오지만, 현관문은 견고하게 닫혀 있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후, 직접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아파트의 실내는 한없이 어둡다.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겨줘야 할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친정아버지가 위
  • 위독해 잠시 다녀오겠다는 화장대 위의 메모 한 장이다. 아내의 부재가 확실해지자, 주인공에게 나는 더 이상 “즐겁고 아늑한” 집이 되지 못한다. 그는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지만, 엄습해오는 무력감과 고독감을 막아내진 못한다. 사건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듯 실내의 사물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 귀신에 홀린 사물들. 일견 이 환각은 내가 지닌 획일적인 공간 질서가 강요하는 인간 소외의 한 단면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사라진 아내를 속내를 알 수 없는 ‘타인’으로 느끼고 절
  • 절망하는 순간에, 사물들이 갑자기 낯설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평상시 아내의 역할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녀는 내가 지닌 현대적 공간의 질서를 가부장의 권위와 연결해주던 매개자였다. 나, 아파트에서 그 권위는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사물들은 언제나 주부의 손길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그녀가 주인공을 반겨줄 때 실내의 사물들은 친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사라지자 이내 낯설어지고 더 나아가 반란을 획책한다.
  • 전통 한옥에서 거실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공간은 대청마루였다. 그것은 실내 공간과 옥외 공간의 완충 지대로, 실내로 진입하는 개방 공간의 성격을 지녔다. 또한 안방이나 건넌방과 같은 각 개별 공간들이 대청마루의 좌우에 배치된 까닭에, 대청마루는 실내 공간의 배치를 조율하는 구심점이자 각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나 홀로 기
  • 기능했다.
  •  대청마루는 온돌 난방이 안 되는 관계로 겨울에는 통로 이외에는 실질적인 기능이 없었다. 그러나 여름에는 마당과 연결된 개방 공간으로서 대가족 중심의 가족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 이러한 특성은 서양 주택을 변형시킨 개인 주택의 응접실이나 아파트의 거실에서도 어느 정도 잔존해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대부분 아파트의 거실은 각 개별 공간과 연결되는 통로의 기능도 수행했는데, 이는 전통 주택에서의 대청마루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초창기에 거실은 서구 아파트와 유사한 면적으로 설계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이용률은 낮았다. 오히려 각방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 이후 거실의 면적 비율은 감소하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거실은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흡수하면서 점차 가족 구성원의 일상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그리고 그들 간의 정서적 유대 관계가 이뤄지는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내 공간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은 한 평면 위에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 김현에 따르면, 아파트의 실내 공간에서 사물들은 자신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한다. 숨길 곳이 없으니, 모든 걸 내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선은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하는데, 그 힘이 최고조로 표출되는 공간이 바로 거실이다. 현관에 들어선 사람의 시선 앞에서 거실의 사물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무장해제당하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처럼 행세한다.
  • “교양 있는 사람은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그의 창은 젖빛 유리이다. 그것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있는 것이지, 시선을 통과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얇은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고, 창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
  • 의도로 창 아래에는 붙박이 가구가 배치되어 있다. 이런 공간 연출로 인해 창의 실질적인 기능은 실내 공간에 빛을 비추는 것에 국한된다. 로스가 이런 선택을 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창을 소실점으로 삼아 투시도의 기하학적 질서로 실내 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였다.
  • 의도대로라면 실내에 들어선 이들은 거실의 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그 순간 창이 작도해내는 투시도적 시선에 포획되고, 그 시선을 경유해 실내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 베란다 창은 루스의 창문보다 훨씬 크긴 했지만, 조망보다는 채광과 환기의 기능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물론 베란다의 난간 끝에 기대선 채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경관은 탁 트인 경관
  • 경관과는 거리가 먼, 꽉 막힌 경관이기 때문이다. 앞뒤로 빽빽하게 들어선 주변의 아파트들. 오히려 베란다 창은 이 아파트들 때문에 거주자에겐 근심의 대상이 된다. 맞은편 아파트에 자리한 익명의 시선이 은밀하게 엿보기에 안성맞춤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튼으로 충분히 가리지 않으면 거주자는 “마치 땅바닥에 나앉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기존의 단독 주택이 행인들의 시선에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높디높은 담을 쌓아올렸던 반면, 아파트는 베란다 창의 커튼에게 담
  • 담의 역할을 떠맡긴다.
  • 외부 시선의 틈입이 허용되지 않도록 밀폐된 직육면체의 내부 공간. 이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은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실내로 진입한 시선은 자동적으로 거실 베란다 창과 대면하게 된다. 이때 베란다 창은 거실을 한눈에 드러나게 만드는 ‘소실면’의 역할을 한다. 일단 이 소실면의 네 꼭짓점에서 뻗어 나온 직선은 거실 구석의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투시도적 질서로 시야를 구획해낸
  • 구획해낸다. 그러고 나면 거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 직선의 인도를 받으며 한 호흡에 소실면에 가닿는다. 즉 베란다 창이 투시도적 깊이감을 연출하면, 시선은 베란다 창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시선과 소실면의 상호작용, 바로 이 상호작용 덕분에 거실 공간은 “모든 것을 한 평면 위에 나열하는” 투시도적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거실 벽면에 바로 침실의 문을 낸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 문을 열고 닫는 순간
  • 순간에 부부의 침실은 거실의 시선에 쉽사리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거실 벽면의 문은 사라지고, 우회해서 침실로 들어가도록 문을 설치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침실 문의 이동은 결과적으로 베란다로 향하는 시선이 불필요하게 옆으로 샐 수 있는 가능성을 대폭 줄여주었고, 거실의 프레임이 지닌 시각적 완결성도 높여주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88년도에 강남 일대의 아파트의 경우 70개의 아파트는 거실에서 안방으로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처리된 반면, 175개의 아파트는 짧은 통로를 두어 이 두 공간을 우회해서 이동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전자의 경우, 20평 이하의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평수가 늘어날수록 후자의
  • 분리 방식이 증가했다. 이후 아파트들은 주로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 가장 큰
  • 걸림돌은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물들이었다.
  • 이렇게 사
  • 사물 배치의 문법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탓에 사물에게 배정된 의미의 상당 부분은 취향이나 스타일과 무관한, 그저 소유자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 사물들은 비좁은 공간을 두고 자리다툼으로 비틀거리다가도 빈자리가 생기면 그냥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래서 실내 공간은 언제나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 어머니가 이사를 하면서 혹은 살림을 정리하면서 하나하나 버린 것들, 이층장, 뒤주, 반닫이, 사기그릇 등이 어머니가 그것들을 버린 시간과 역비례하여 예술품으로 내 아내의 손을 통해 다시 내 앞에 차례로 나타났다. 서
  • 서양식으로 살림을 개조하기 위해, 다시 말해 편리하게 살기 위해 버린 것들이, 그 개조가 보편화되자 그 본래의 유용성을 잃고 장식적인 것들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 기존 주택에서 형성된 이러한 사물의 질서는 초기 아파트의 거실에서도 어느 정도 반복되었다. 거실의 경관이 투시도적 프레임으로 고정되긴 했지만, 아직 내부의 엔트로피를 억제할 여력은 없었다.
  • 푸닥거리
  • 키치
  • 기존의 단독 주택에서 주로
  • 안방에 놓여 있던 텔레비전은 아파트에선 거실로 이동해 꽤 독특한 방식으로 프레임 내부의 시각적 균형과 조화를 성취한다. 이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 데, 첫 단계에서 텔레비전은 사물 배치의 기본 구도를 정의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개별 사물의 조형 원리에 개입한다. 첫 단계는 텔레비전의 기능적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주지하다시피 텔레비전은 공중파의 흐름을 브라운관에 집결시켜 외부로의 조망을 제공한다. 이제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싶다면 베란다로 나갈 필요가 없다. “멀리-보는-눈”, 텔레비전을 켜면 되기 때문이다. 전원이 꺼져 있을 때, 텔레비전은 그저 덩치 큰 박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브라운관에 빛 입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거실의 시선들은 이 움직임을 외면하지 못한다. 외견상 텔레비전은 거실에 자리한 사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거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스크린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텔레비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
  • 이에 따라 텔레비전이 남향의 베란다 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한쪽 벽면에 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 베란다 창을 향한 시선과 텔레비전을 향한 시선, 이 두 시선은 서로 동일한 공간에 중첩되어 있지만, 각각 거주자의 이동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기 때문에 거의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의 스크린은 시선의 이동에 따라 프레임 내부의 프레임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텔레비전은 일상성의 반복적인 흐름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프로그램의 진행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여가 생활을 조율하는 일종의 시간표로 기능했다. 특히 1981년에 오전 방송이 전면 실시된 이후, 거주자의 생활 리듬을 조율하는 텔레비전의 기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특히 주거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주부들에게 텔레비전은 시간 활용의 조언자나 다름없었다.
  • 한편 거실의 공간은 텔레비전을 구경하는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 구경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 아파트가 “구경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모델하우스다. 주택공사가 한강맨션 건설 현장에 가건물의 시범 주택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모델하우스의 등장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때의 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아파트의 건설을 맡은 서울시는 여의도 개발을 통해 시민아파트와 지하철 건설의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분양 촉진을 위한 선전 수단으로 모델하우스를 활용했다. 이후 건설회사들은 아파트 분양 시 대규모 모델하우스의 설치를 관례화했다.
  • 바닥재를 환히 비추는 휘황찬란한 백색의 조명 아래, 손때와 먼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조용히 새 주인의 눈길을 기다리며 제 자리에서 묵묵히 전시되는 곳, 그곳에서 주거의 판타지는 실제 스케일로 시뮬레이션되었다.
  • 만약 텔레비전의 역할이 거실의 극장화에서 멈춰 섰다면, 거실의 경관은 실내장식의 혼돈 상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텔레비전은 개별 사물의 조형 논리에 개입하는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이후 새롭게 보급되던
  • 현대적인 플라스틱 외장의 텔레비전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이를테면 1976년에 금성전자에서 개발해서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텔레비전 디자인은 미닫이문을 갖춘 캐비닛 콘솔형이었다. 안방에 놓인 장롱 등 다른 목재 가구와 어울리기 위해 당시 텔레비전은 고전적인 가구의 어휘를 빌려 외관을 꾸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접어들자 텔레비전은 더 이상 ‘가구’의 형태를 흉내 내지 않고, 검정색 플라스틱 박스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의 진화는 1980년 초반에 들어 단기간에 급속히 진전되었는데, 이는 1980년 12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칼라 방송으로 인해 기존의 흑백텔레비전을 교체하는 가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 브라운관의 화면은 더욱 커져갔고, 화면 양편에는 스테레오 음향 시스템이 부착되었고, 화면 오른쪽에 놓여 있던 조작 버튼과 채널 등 조작 부위도 하단부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침내 텔레비전은 컴포넌트 오디오와 비디오플레이어와 함께 편대를 이루면서 거실의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소파 위에 놓인 리모트 콘트롤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으며 말이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거실의 사물들도 점차 텔레비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외관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제 사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었다.
  •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
  • 사물들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거실과 한몸이 되어야 했다.
  •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킨 거실의 사물들은 이제 최종 관문 앞에서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기호화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거실의 프레임에서 다른 교감의 통로는 대부분 차단된 반면, 시각의 협소한 통로는 대폭 개방되었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 거주자가 사물과 접촉하는 경우는 그저 앉거나 기대서거나 버튼을 누를 때뿐이었다. 벽면의 무늬목으로 쓰인 참나무의 수분 가득한 향취에 취하거나, 골동품 가구에 부착된 낡은 경첩의 삐꺽대는 소리에 정겨움을 느끼거나, 자개 문양을 직접 손끝으로 만져보며 미묘한 기분에 빠져드는 따위의 일상의 잔재미들은 희미해졌다. 반면에 사람들은 사물에 사용의 흔적이 남는 것, 즉 흠집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한껏 납작해졌던 것이다.
  • 이런 과정은 문학평론가 김우창이 1970년대 후반에 예측했던 사물의 구조적인 지위 변동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는 “사물과의 깊고 오랜 사귐”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그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의 사물들은 “일상에 깊이 이어져 있는 보이지 않은” 관계의 기운에 호소하며 “내면적인 교감” 따위로 사람에게 말을 걸곤 했다. 하지만 대량 생산된 사물들이 넘치는 곳에서는 사람과 사물의 상호주관적 삼투 관계가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물이 자신을 잊을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들었던 강력한 인상도 점
  • 차 사라졌다. 오히려 이런 유형의 사물 대신에 등장하는 것은 미끈한 거죽의 사물들이었다.
  • 주방이 점차 거실과 가까워지는 과정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변화를 통해 주방은 거실과의 공간적 연속성을 수립해 주부가 지휘하는 가족 공동의 장소로 변모했다. 종종 간이 칸막이나 유리 미닫이문을 설치함으로써 거실과 주방의 기능적 분리가 유지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두 공간은 서로 물리적으로 개방되었다. 주방은 보통 남향의 베란다 창 반대편, 즉 아파트 평면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주부는 부엌에서 어렵지 않게 거실을 조망할 수 있었다. 즉 주부는 싱크대 앞에서 일하거나 식탁에 앉아서도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시선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지점은, 음식 준비나 설거지를 하면서도 텔레비전의 일일 연속극을 보고자 하는 상황에 대한 주부 나름의 대처 방법이었다.
  •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라디오 연속극의 주인공에 가깝다. 우리들은 텔레비전에서 이미지를 쫓아가는 대신 대부분 사운드 트랙과 대사를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텔레비전 드라마 시간대에 반드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많은 주부들이 그들의 드라마를 부엌에서 들으면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무관심이거나 불성실한 감상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경험적으로 드라마를 보는 방법의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 이렇게 주방이 거실과 동일한 시청각적 평면 위에 놓이게 되자, 주방의 사물 역시 독자 노선을 포기한 채 거실의 프레임에 편입되고 기호화의 궤도에 진입했다. 주방으로까지 확장된 거실의 프레임은 시장에 선보인 거의 모든 종의 가전제품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노아의 방주로, 달리 말하자면 이제 곧 도래할 소비사회의 소화 기관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 자크 라캉Jacques Lacan
  • 아파트 거주 가족의 정체성은 거실의 프레임을 스크린으로 삼아 구현된다
  • 물론 이 프레임의 시선은 자족적인 시선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타자의 간섭에 노출된 시선이다. 실제 거주자가 자신의 거실 공간을 보는 것은 이 시선을 통해서이지만, 또한 그 공간의 정체성이 타자들에 의해 평가받고 인정받는 것도 바로 그 시선을 통해서이다.
  • 라캉의 거울상 단
  • 계에서 어린 주체가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보고 나르시시즘적 쾌락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와 신체적 경험 사이의 간극 때문에 불안에 떨며 방황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산층 가족의 정체성은 거실의 프레임에 투영된 스위트 홈의 이미지에 만족하면서 행복의 느낌으로 충만한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타자의 응시에 노출되어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상존한다.
  • 대부분의 경우 아파트에는 여분의 방이 없으므로 친지나 친척들의 체류는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일가친척의 장기간 방문은 점차 보기 힘든 일이 되어간다.
  • 이렇게 아파트에서 가족은 혈연 공동체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반면, 주거 지역 내부의 주부들 간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강화된다.
  • 바로 이 주부들의 네트워크, 수다와 소문의 사교 공동체가 거실의 프레임을 응시하는 타자이다. 그녀들은 관상학자의 눈매로 이웃집의 생활 수준과 행복 지수를 가늠해본다. 그 타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든, 주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웬만큼 거실을 꾸미지 못하면 주부들로 하여금 “친구도 친척도 창피해서 부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압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응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파트 평수에 따른 주민 사이의 위계화이다.
  • 그림 없는 그림책
  • 이미 지위의 서열은 아파트의 평수로 정량적으로 판가름났기 때문에, 거실을 꾸미는 것만으로 이 위계를 뒤집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녀들은 아파트의 크기가 암시하는 욕망의 한계치 안에서, 전력을 기울여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줄 시각 언어를 고안하고, 교환 가능성의 논리가 감히 침투하지 못하도록 거실의 프레임 내부에 ‘화목한 가정’의 미장센을 연출하려고 애쓴다.
  •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방식이다”
  • 그런데 이런 정의는 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거실의 프레임은 중산층이 자신의 성취를 인정받기 위해 가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스크린이며, 바로 그 표면 위에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이 행복의 판타지를 구동한다고 말이다.
  • 혹자는 특정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프로그램 치곤 너무 단순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품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불문율을 귀담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프로그램일수록 간단한 구조를 지닐 확률이 높고 간단할수록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것 말이다.
  • 1981년 9월 말, 개최지를 놓고 일본의 나고야와 겨룬 경쟁에서 52대 3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
  • 국풍81
  • 이제 국민됨의 봉건적 도덕을 강요하는 방법은 유통기한을 넘겼다.
  • 결국 88올림픽의 담당자들이 시행착오 끝에 선택한 것은 나, 아파트가 내장한 감각과 인지의 모델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하고 대중의 인정
  • 욕망에 민족주의의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었다.
  • 한반도 바깥의 세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국민들도 자신의 집단적 성공담을 인증해줄 국경 너머의 시선이 필요해졌다. 공식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에 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88올림픽은 이에 대한 응답이었다. 외부의 상상적 시선에 의지한 민족주의적 판타지의 연출, 그것이야말로 대중을 ‘통합된 국민’이라는 착각의 공동체로 묶어내기에 최적의 해결안이었다.
  •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의 거실이 중산층 가족의 정체성을 진열하는 전시장으로 자리 잡아가던 것과 거의 동시에, 올림픽 스타디움이 강남의 동쪽 끄트머리에 건설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에게 내재한 감각과 인지의 모델은 올림픽의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쾌감, 아니 누군가에게 보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더 이상 아파트 거주자만의 몫이 아니었다.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은 중산층으로 불리기를 원하던 가족의 성공담을 국가적 차원으로 증폭하여 ‘선진 조국 창조’의 거대 서사로 직조하는 건축적 구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에 스위트 홈의 무대로서 아파트의 거실이 있다면, 바로 맞은편에 스펙터클의 무대로서 잠실의 스타디움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텔레비전이 가정과 국가, 사적 공간과 공공 영역을 연결해줄 매개의 고리로 작동했다. 만일 텔레비전이 없다면 아파트와 스타디움의 구조적 유사성에 주목한 이 계획은 반쪽의 청사진에 불과했다. 아파트
  •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 판타지와 뒤섞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88올림픽의 개막식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아나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전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메인 스타디움의 지붕에 뚫려 있는 거대한 구멍은 그 자체로 ‘전 세계’의 눈이며,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전체가 그 외눈박이가 주시하는 대형 스크린이다.
  • 바로 여기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정의했던 두 방울의 키치적 눈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 눈물이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정적 속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스타디움의 잔디밭을 달려가는 어린 아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두 번째 눈물이 속삭인다. “개막식 중계방송을 통해 저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인류와 함께 감동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로 이 두 번째 눈물 덕분에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끝없이 팽창하고 광폭의 나르시시즘이 뜨겁게 작열한다.
  • 평론가 남진우는 1990년대에 등장한 몇몇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정리하면서 ‘댄디적 인물’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의 등장에 주목했다. 댄디적 인물이란 경제적 여유가 가져다준 잉여 인간으로서, “삶에 적응하지 못한 자의 고통스러움보다 삶과의 거리 유지를 통한 자아의 가공에 더 신경”을 쓰며, “다른 감각보다도 시지각이 더 발달한 조망적scopic 인간”으로서 “참여의 열정보다는 관조의 쾌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에겐 삶이란 초연한 자세로 감상해야 하는 일종의 구경거리다.
  •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 리스먼은 사회심리적 관점에서 미국인의 성격 구조를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으로 구분한 뒤 전후 미국 사회가 도시화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내부지향형에서 타인지향형으로 이동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내부지향형과 타인지향형이다. 상징적 권위, 종교적 규범, 전통적 가치에 의지하는 전통지향형과는 달리, 내부지향형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나름의 가치 규범을 만들어내고 자율성을 갖춘 자아의 형식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반면 타인지향형은 이 두 유형과는 매우 다르다. 일단 그들은 전통이나 내면의 가치 따위에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자신의 상상 속에 자리 잡은 “말과 이미지의 레이더 스크린”에 의지해 타인의 모습이나 행위를 탐지하고
  •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세공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에겐 생의 무한한 에너지 공급원이다. 그들의 뒤꽁무니에는 언제나 막연한 심리적 불안감이 매달려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 그것은 평생 함께해야 할 동반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 그가 내세운 시적 화자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욕망의 허기를 다스리기 위해 만화방, 동시상영관, 세운상가를 들락거리며 집어삼킨 취향의 목록들로 빼곡하다.
  • 수지 콰트로
  • 여전히 고저의 이분법이라는 취향의 잣대가 위력을 발휘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 대중문화는 아직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키치’라는 음침한 이름으로 불리며 낮은 포복 중이었고 유하의 화자는 남 몰래 “쓰레기의 이름들로 붐비는 지하 도서관”을 헤매며 관음과 외설과 음란의 몽타주 이미지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사라”진 이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에서, 그는 “간지가 안 나”오는 국외자일 뿐이다.
  • 하나대
  • 그들은 순도 높은 쾌락을 추출하기 위해 자신의 시선이 가닿는 소실점 위에 욕망의 대상을 올려놓는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 대상에 직접 가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차의 레일이 합쳐지는 지점”이자 “원근법의 논리적 종착점”인 소실점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선 씁쓸해하지만, 이내 다른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 방법이란 소실점을 나의 시선이 도달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나를 향한 시선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보는 이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보는 대상에 굳이 직접 다가설 필요가 없다. 나의 시선과
  • 타인의 응시가 교차하는 지점, 그곳에서라면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이의 시선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이때 ‘나’는 욕망의 대상이 바라보는 가설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데 익숙해야 하며, 자신이 어떻게 서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시선과 응시의 교환이 빚어내는 욕망의 경제,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 위에 구축한 나르시시즘의 성채, 그 안에서.
  • 나는 안전할 수도 있었고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경계가 좋다. (……) 나는 가끔 현실을 상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상상을 현실이라 믿고 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그 혼동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적은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듯, 나는 내가 구성한 그 상상의 세계를 제한된 시간 동안 탐험한다.
  • 결국 그들은 상상의 레이더로 타인의 시선을 포착하는 데 능숙하며, 그 시선의 소실점 위에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투하하느라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원근법과 상대방의 원근법이 매번 어긋나는 탓에 신파의 연애극이 거듭 반복되긴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그 어긋남으로부터도 한줌의 쾌락을 쥐어짜내려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창안해낼 기세다. 그들은 실패를 알지 못한다.
  • “그 사람 집이 그 사람 머릿속”
  • 베이비 붐 세대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산아 제한 정책 도입 직전인 1963년까지 9년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다. 2009년 현재 712만 명에 달하는 거대 인구 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14.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1987년의 6・29 선언으로 봉합되었던 사회적 갈등이 “집이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그리고 베이비 붐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 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액은 그들의 욕망이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용 장작이나 다름없었다.
  • “의자에 버젓이 앉아서 똥을 눈다는 것은 어둡고 편한 자궁 같은 재래식 변소에서 태아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누는 그때까지의 나의 생리적인 체위에 일대 충격을 가했”
  • 욕망의 아비규환
  • 나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들의 미소 속에 이미 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기억의 등대 역할을 떠맡은 소실점은 초콜릿의 쌉싸래한 단맛이다.
  • 유년기의 한때,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세대 대다수에게는 그런 기회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유년기를 몰수당한 채 죽음의 그림자와 한 지붕 아래 동거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 시절, 해가 기울 무렵이면 뱃속에서는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었다. 한 공기의 냉수를 들이켜 겨우 허기를 잠재우면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명징한 의식이 찾아왔다. 그렇게 맑아
  • 명징한 의식이 찾아왔다. 그렇게 맑아진 머릿속에선 누군가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윽박질러대곤 했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보잘 것 없는 생명체로서의 벌레, 그것은 판잣집 골방에 몸을 눕히는 것만으로도 편히 잠들 수 있었던 우리를 묘사하는 데 더없이 적절한 은유였다.
  • 노브tuning knobs
  • 벌레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들뜬 기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나는 초콜릿의 기억을 되새기며 조용히 벌레들의 처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단파 라디오가 기다리고 있던 텅 빈 작은 방. 외롭고 지루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 더 견뎌야 했다.
  •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 비록 나의 ‘김 상사’는 끝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가 보내온 물건들은 좁은 집 안방의 한 귀퉁이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효심을 증명해 보였다.
  • 연간 2억 달러,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의 누계 10억 2,200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 문부식은 참전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의 ‘단 맛’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윤리적 감각의 황폐화”
  • 귀결되었다고 지적한다.
  • 당시 20대였던 우리 세대 대다수에게 폭력적인 현실은 이미 주어진 선험적 세계였다. 그러니 윤리적 감각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출생과 동시에 거세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 그런 세계에서 성장한 벌레들에게
  • 베트남 전쟁은 인간이 되려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내 사촌은 지긋지긋한 궁핍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일념으로 베트남의 정글을 택했다.
  • 분명 그는 귀국 후 고향에서 맞이하게 될 행복한 일상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몽상의 대가가 “죽음으로의 동원”
  • 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평정 작전에 투입된 직후 자신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테니 말이다. 순박한 성정을 지닌 그는 자신이 살인 병기가 되어 끝까지 버틸 수 있다고 믿었을까? 아마도 전장의 참혹한 실상을 경험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호국 영령’이라는 정체불명의 원귀로 귀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떤 심정으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손에 쥐고 미군 피엑스로 향했
  • 향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미제 냉장고의 플라스틱 표면에서 보았던 것은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하얗게 변색되어버린 공포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비록 동류 살해에 나선 무뢰한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고 해도 약육강식의 정글에 뛰어들었으면 끝까지 살아남아야 인간으로 행세할 수 있다는 것
  •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리 무서운 군부독재 치하라고 해도 그때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압제에 시달렸던 것은 아니다. (……) 물론 잡혀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포였다. 그러나 강압 통치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 가만히만 있으면 자신과 가족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응과 무저항을 안전한 생활 방식으로 터득한 사람에게 고문이나 투옥은
  • 밤잠을 빼앗아갈 정도의 공포가 이미 아니었다. 60년대 새파랗게 젊었던 우리 세대는 서른 몇 살이 되어 바로 윗세대들과 똑같이 ‘실패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 태생이 벌레였던 대다수에겐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권, 민주주의 같은 가치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별나라 이야기
  • 이야기였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인간 세계로 향하는 사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다시 벌레들의 세계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굴함을 알지 못하는 비인칭의 용병이 되고자 했다.
  •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
  •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스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 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 집이나 고모 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 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
  • 오만한 낙오자가 남는다.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가격을 물었고, 주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 백, 오, 십, 만 원. 뚝, 뚝, 분절된 그 음성은 나를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우리가 정착하려던 곳이 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촌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전통 가옥들이 즐비한 가회동, 명륜동, 혜화동 일대,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총독부 고관들이 거주하던 관사를 개조한 주택들이 자리한 신문
  • 신문로, 청운동, 효자동 일대가 부촌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화려한 정원을 갖춘 고급 주택들이 성북동, 연희동, 동빙고동 등지에 들어서면서 부촌의 명맥이 사대문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동네에 머무는 한, 나와 내 아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밑바닥 목숨”에 불과하다는 것, 허공에 매달린 15평의
  • 직육면체 공간을 점유하고 있더라도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 1974년만 하더라도 정치인, 고급 공무원, 대
  • 대학 교수, 기업 및 금융계 인사, 법조인, 언론인, 의사, 군 장성, 문화예술인 등을 포함한 서울의 상류층 저명인사들(표본 2,010명)의 60퍼센트 이상이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성북구에, 그리고 사대문 바깥에선 용산구에 12퍼센트가 거주했다. 하지만 영동 개발 이후 강남과 강북 간의 역전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1989년에는 상류계층(표본 4,944명)의 42.7퍼센트가, 그리고 2001년(표본 4만 6,842명)에는 48퍼센트가 강남・서초・송파구에 거주해 강남 집중 현상이 뚜렷해진다. 특히 2001년에는 상류계층 구성비가 서울 평균보다 여덟 배 이상인 동은 압구정1동(17.45배), 반포본동(10.46배), 잠실7동(10.42배), 압구정2동(9.24배), 여의도동
  • 여의도동(8.65배), 평창동(8.44배) 등으로 나타났다.
  • 1978년에 터진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때문이었다. 현대그룹이 본래 사원용으로 지은 중대형 평형대의 아파트를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언론인 등 600여 명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특혜 분양했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 그때 10층 베란다에서 거인의 눈높이로 내려다본 도시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앙증맞고 인공적인 진열장”
  • 처럼 보였고, 나는 이 도시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 빠져들었다.
  • 김민제 아동복
  • 김태업
  • 그들의 세계는 24색 왕자표 크레파스만 손에 쥐면 쉽게 채색될 수 있는 그런 세계였고, 30대 후반의 나는 아홉 살짜리 소년이 그린 그림 속에서 다정한 아빠의 얼굴로 그렇게 서 있었다. 비로소 나는 인간의 행복이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 쳇바퀴를 돌 듯 동어반복의 삶이 계속되
  • 계속되었다.
  • 아파트 한 채를 내 손에 쥐긴 했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란 시간이 유일했다. 나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시간을 철저히 통제해 환금성을 지
  • 지닌 형태로 축적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 1985년부터 주식 시장은 경이로
  •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1985년 말에 163에 불과했던 종합주가지수는 1986년 말에는 272로 급등하더니, 사상 처음으로 일일 주식거래량이 1억 주를 돌파한 1987년 3월 20일을 기점으로, 그해 말에는 525까지 치솟았다. 특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가 마무리된 1988년 말에는 종합주가지수가 907을 기록해 불과 3년 만에 5.5배나 급등해, 매년 70~90퍼센트에 달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런 주식 시장의 투기적 과열은, 3저 호황으로 인해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함에 따라 풍부해진 시중의 유동자금이 증시에 유입된 결과였다.
  • 양극단의 과거사가 20여 년이 지난 뒤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 이듬해 봄까지 349만 명이 참여했던 금모으기 운동이 모은 금은 총 225톤으로, 금액으로 환산하면 21억 7,000만 달러 규모였다.
  • 혹시 내가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벌레들의 세계가 좀 더 진화한 형태로, 아직도 여전히 내 발밑에서 꿈
  •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안착했다고 믿었던 인간의 세계란 결국 착각의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가?
  • “진짜라는 건 또 하나의 개소리일 뿐이요.”
  • 그는 자신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만당함으로써 주어
  • 주어지는 대가를 욕망하기 때문에 기만당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 일말의 죄책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포식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 모멘텀 거래
  • 시세 그래프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벡터 미학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었다.
  • 한때 들국화와 핑크플로이드, 체 게바라, 카를 마르크스, 서태지, 무라카미 하루키와 <엑스파일>을 좋아했던 아들과 며느리 들은 이제 코스피 지수와 아파트 시세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진정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당시 유행하던 미제 로봇 청소기를 제일 먼저 장만했고, 맨 마지막에는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꽃무늬 김치냉장고를 구입했다. 그녀가 사들인 유일
  • 한 국산품이었다.
  • 단골 오디오 가게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비교 청취를 했고, 최종적으로 구입 제품의 목록을 작성했다. 카드로 결제를 마치는 순간, 나는 금성사의 고물 라디오에서 출발했던 내 기이한 오디오력이 이제 마지막 단락에 접어들었음을 씁쓸하게 확인했다.
  • 자신을 ‘세대’라는 인구통계학적 범주로 호명하려는 또래 집단들이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계기로 삼아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기성세대와는 차별
  • 차별화된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이 속한 세대를 새로운 변화의 주역인 양 포장하곤 했다. 현대사 연표를 들여다보면 1960년대 중반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다수가 10년 주기의 경제적 호황이 끝나가는 시점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경제 호황과 불황, 그리고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세대론을 점화시킬 만큼 경험 구조 전반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던 것일까? 확실히 정치 경제의 변동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10년을 주기로 동기화된 것처
  •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세대론의 주창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던 새로운 정체성의 면모에 걸맞게 독자적인 사회화의 경로를 만들어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세대 차이를 표 나게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입신과 출세의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 그들 중 상당수는 기득권을 행사하는 주류 집단에 적의의 칼끝을 표 나게 겨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그들이 그 대립의 예각을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대의 성장담을 신화적 서사의 형태로 각색하곤 했다는 점이다.
  • 현대사의 격동 앞에서 못 배우고 못 먹고 자란 세대의 울분. 아버지들은 바로 이 ‘울분’을 공감과 신뢰의 초석으로 삼아 은밀하게 박정희와 거래한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가부장의 권위를 박정희에게 의탁하고, 박정희는 그 수많은 아버지들의 대리인으로서 강력한 권력에의 의지를
  • 천명하며 아들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 황지우가 자신 세대의 정체성이 ‘역-오이디푸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다. 이 역-오이디푸스의 가족 로망스에서 박정희는 “겉으로는 전혀 내색할 수 없지만 속으로는 미칠 듯이 죽이고 싶은” 아버지 역할을 떠맡는다. 아들들은 기회를 엿보며 살부의 음모를 꾸미지만 박정희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 그는 빈틈을 보이지 않고 냉정하게 칼을 휘두르며 아들들에게 할례 의식을 진행한다.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근대화의 구호를 앞세우며 상징적 거세에 동원한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한다. 결국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함으로써 어른이” 된다.
  • 그에 따르면 근대 문학은 “입신출세가 잘되지 않을 때, 헛되다고 여겨질 때” 등장한다.
  • 한국의 현대 문학에도 고진의 주장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세대의 일부는 제 호적에 찍힌 출신지의 낙인이나 이념의 연좌제로 인해, 출세의 입구에서 좌
  • 좌절을 맞봐야 했다. 그들에게 ‘문학’은 불가촉천민의 처지를 상징적으로나마 극복할 수 있는 욕망의 해방구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수난의 연대기를 예술의 형식으로 극화함으로써 지식인 집단의 장삼이사로 행세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어떤 허황된 수사를 끌어와 그럴싸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문학이란 종국에는 패배자들이 세계와의 불화를 기록한 가상 현실에 불과했다. 아무튼 우리 세대 중 일부가 그렇게 가상 현실에 터전을 확보하자 1950년대에 출생한 후발 세대의 이탈자 일
  • 일부 역시 그 내부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징적 아버지가 남긴 좌절의 상처를 문학의 필설로 승화시키면서, 미력하나마 나름의 발언권을 확보해나갔다.
  • 1931년생 ‘전두환’이라는 기호가 박정희를 대신했던 1980년대, 그들은 자신의 선배들이 보여준 관념적 저항의 행태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 급진주의라는 이념적 무기를 갈고닦았고, 물리적 폭력과 억압의 화신이었던 새로운 군인 아버지와 싸우기 위해 구도심의 광장으로 향했다.
  • 그리하여 엉겁결에 맞이하게 된
  • 1990년대. 아버지의 권위는 빠르게 퇴색한다. 제6공화국의 새로운 헌법 아래 등장한 상징적인 아버지들은 무기력한 존재였다.
  • 아무튼 압도적인 폭력으로 군림하던 거대한 아버지의 형상이 사라지자 386세대의 성장담은 갈등의 과녁을 아버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더 이상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유지되지 않으며, 아들의 이상주의도 희미해져
  • 희미해져간다. 이때 아버지의 자리를 덥석 차지한 것은 제 살 길 궁리하며 변덕스럽게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이기적인 난쟁이들의 공동체였다. 1987년 민주화 투쟁 당시,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386세대의 기대를 배신하고 정치적 안정을 택했던 이른바 ‘민중들’ 말이다.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이 공동체를 설계한 이들은 박정희라는 숙주 안에서 ‘실무자’로 성장한 우리 세대였다.
  • 그들은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판타지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1980년대로 시계 바늘을 되돌린 채 죽은 아버지를 되살리려고 발버둥치곤 했다. 어정쩡한 상태로 마무리된 자신들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드라마
  • 드라마가 안겨준 패배의 트라우마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 이들 중 일부는 1987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나 실질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광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 집착이 가장 코믹하게 드러난 사건은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지식인으로 행세하던 이 세대의 몇몇 명망가들은 도심으로 쏟아져 나온 빨간 티셔츠의 응원단을 보고선 아둔하게도 민족주의적 수사들을 남발하며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잠재력이 문화적으로 발현된 현상이라고 진단하거나, 해방 이
  • 이후 한반도 이남을 괴롭혀온 레드콤플렉스의 쇠락을 증언한다고 떠들어대곤 했다. 그들은 ‘광장의 정치화’라는 1980년대적 전략을 뒤늦게라도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난 듯 보였다.
  •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말할 것 없이 축구 드라마였고, 그 드라마는 ‘신화’ 혹은 ‘기적’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문화 전반의 사건들을,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슬로건 아래로 집결시켜 극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 열풍 직후, 빠른 속도로 정
  • 정치의 스포츠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한때 광장의 정치화에 집중되었던 대중의 열기는 이제 최종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386세대들이 우리 세대에 속하는 비주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내세워 골리앗과 같은 적수를 무릎 꿇게 만들었던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그 정점이었다. 열혈 지지자들마저 예측하지 못했던 승리를 얻어냈기 때문이었을까? 그들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천금 같은 결승골’의 쾌감으로 지루한 안절부절의 시간이 집약되는,
  • 섹스와 오르가슴을 그대로 닮은”
  • 승리의 드라마에 길들여졌고, 부조리한 착각을 합리적인 예측으로 오인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면 된다”라는 슬로건이 실제 현실을 압도하고 모든 것을 스포츠화한 결과, 남은 것은 지나친 자극과 히스테릭한 반응, 그리고 그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주어진 한 토막의 쾌락이었다.
  • 버라이어티 쇼보
  • 쇼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그리하여 버라이어티 쇼마저도 흉내 내려는 현실 세계의 드라마들. 대중들은 이 드라마들을 현장 중계하는 텔레비전 스크린을 번갈아 응시했고 들뜬 마음으로 반응했으며 놀라우리만치 재빨리 잊어버렸다. 쾌락의 극대화를 위해 점차 수위를 높여가는 자극의 융단폭격 속에서 그들의 얼굴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망각의 비법을 터득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 인터넷은 광장의 기능을 대체하며 이 확산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한때 ‘민중’이었으나 이제는 ‘시민’이라는 좀 더 세련된 호칭을 얻게 된 이들은, 현실의 이종 격투기장과는 거리를 유지한 채 인터넷에서 안전하게 쾌락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들은 더 이상 주권자도, 집단 지성의 구성원도 아니었다. 그저 다중의 소비자이거나 익명의 구경꾼에 불과했다.
  •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그들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분풀
  • 분풀이에 열중하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
  • 으로 거듭났다. 그들은 아버지-죽이기에서 아버지-되기로 삶의 노선을 변경했던 것이다.
  • 세대에 속한 어느 문화평론가의 표현처럼 “괜찮은 대학을 나와 그래도 나름대로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삼십대 중후반 남성들”, 한때 “미래에 대한 도전 의식, 전문적 성취를 향한 열정, 더 나은 공동체 건설을 향한 희망”을 품었던 젊은 그들은 “속 타는 시세 차익의 추구
  • 젊은 그들은 “속 타는 시세 차익의 추구자”로 돌변했다. “주식이야말로 386의 마지막 기회”라고 수군거리면서 말이다.
  •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운 좋게 한 밑천을 거머쥔 이들은 곧바로 부동산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파했다. 우리 세대가 구체제의 상징 자본으로 치장한 1930년대 출생의 서울 중상류층 출신들과 대치하며 공동체의 패권을 거머쥐었듯이, 자식 세대 역시 ‘8학군’의 문화적 테크놀로지로 잘 조련된 우리의 자제들과 이제 곧 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사
  •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들과 이인삼각의 편을 짜서 다른 세대의 아버지와 아들과 드잡이를 벌이는 세대론적 게임의 투전판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 핵심적으로 제기했던 문제는 왜 대학생이 아니라 청소년이 “촛불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한
  • 제시한다. “두 집단의 세대적 경험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두 집단의 부모가 다르다. 현재 청소년 집단의 부모는 87년 민주화 이행을 주도한 386세대이지만, 대학생들의 부모는 70년대 대학생 집단과 겹친다. 386세대는 대체로 대중화 단계의 대학을 다녔고, 민주화운동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가진 세대였다. 이에 비해 70년대 대학생은 매우 특권적인 집단이었고, 소수를 제외하면 민주화운동을 비껴나갔지만 학력이나 학벌의 사회적 보상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누린 세대였다. 그렇게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않은 그 세대 사람들에게서도 학력이나 학벌에 대한 집착은 이후 세대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두 집단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헌신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며, 이
  • 이런 차이는 자녀 양육을 비롯한 가족생활에도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양식에서의 민주성의 차이가 자녀세대에서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의 차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 당시 청소년이었던 386세대의 자녀들은 경제 위기 극복 이후 청년기를 맞이한 덕분에, “그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수용할 체험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1970년대 대학을 다닌 1950년대 생의 자녀들로서, “IMF 금융위기로 인해 안전에 대한 욕구가 강화되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체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을
  • 갖춘 신세대 주체의 자리에 호명되는 것은 386세대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87년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부모의 문화적 자산을 상속받은 덕분에, ‘촛불항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정치적 주체화에는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1950년대생 세대의 자녀들, 이른바 88만원 세대가 그 배제의 대상이며, 광장의 주인공은 여전히 386세대와 그 가족들이다.
  • 한때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헛된 망상에 도취된 탓에 프로이트의 책들을 탐독했다. 그런데 이젠 그 책들을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 제일 높은 자리에 꽂아놓은 뒤, 자신을 닮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진화심리학 쪽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 ‘아버지-죽이기’와 ‘아버지-되기’의 이중 구속에 사로잡혀 있던 ‘어떤’ 386세대의 분열증.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 초중반 앞다퉈 개봉한 386세대 감독의 영화들이 이 분열증을 가장 극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50년대 출생 세
  • 세대의 성장담이 ‘문학적’ 형식을 갖췄던 반면, 1960년대 출생 세대의 성장담은 다분히 ‘영화적’ 형식을 띠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홀로 남겨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 소년의 이미지는 386세대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다. 대충 이야기의 전개는 이렇다. 소년이 속한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무도하며 비정하다. 공동체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소년의 비좁은 어깨 위에 내려놓는다. 그를 도와줄 어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착한 어른은 사라진 지
  • 오래고, 남아 있는 어른들은 모두 한통속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소년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거부하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뿐이다. 소년은 한바탕 소란을 치르지만,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제자리로 돌아온다. 공동체는 변하지 않았고, 소년은 여전히 혼자다. 19세기 조선 시대의 외딴 섬마을에서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의 최전선 고지를 거쳐 1970년대 후반 주먹질이 난무하는 말죽거리의 고등학교 옥상에 이르기까지, 좌절과 환멸의 성장담은 반복되고, 반복
  • 반복되고, 반복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 영화들이 이런 패배주의적 서사를 표 나게 되풀이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관객들과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누며 그들로부터 어떤 동의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공동체가 애당초 영웅의 서사가 불가능한 불모의 공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동의 말이다. 실제로 내 눈에 이런 영화적 전략은 투항에 가까운 자신 세대의 행보를 변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 그들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를 참조했고, 미래의 그들은 현재의 우리를 욕망했다.
  • 126만 개의 일자리를 불태워버린 IMF 외환위기.
  •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그물을 던져서 대학 졸업생들을 싹쓸이하던 대기업들이 이젠 낚시질하듯이 필요한 인재만을 엄격히 선발해 고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대로 미끼를 물지 못한 88만원 세대의 상당수는 비정규직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패배 의식을 고스란히 대물림했다.
  •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 거야? 일인당 국민소득 이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
  •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얌전해서 그래. 노땅들이 무서워하질 않잖아. 생각해봐. 386들은 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구. 겁 많은 노땅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우리를 무서워해야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그러는 건데, 이놈의 대기업들은 채용은 안 하고 대학에 건물만 지어주고 앉아 있잖아. 누가 건물 필요하대?
  •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세대,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
  • 다른 나라에서 자라났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할 수 있는 세대, 그런데 그들이 저 소설가의 지적대로 386세대의 젊은 시절을 흉내 내며 오이디푸스의 성장담을 반복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까? 솔직히 말해보자. 경제성장률이 5퍼센트 안팎을 맴돌고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2,000만 원이 넘어가는 사회에서, 오이디푸스의 무대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전복적 상상력을 자극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더 이상 효용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버지가
  • 직장에서 쫓겨나야 자신이 취업할 수 있는 제로섬 게임의 운명이며, “자산이 아닌 소득을 통해 주택을 소유하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게 무망해진”
  • 자산 불패의 현실 원리이다. 설령 ‘선진국 출신의 슈퍼맨’이라도 사회적 이동의 경로가 차단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자칫 경쟁의 대열에서 한눈이라도 팔면 곧바로 알바와 김밥의 천국으로 미끄러지기 일쑤이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는 방 한 칸 얻기 힘들다. 따라서 이들이 반항의 에너지를 충전해 오이
  • 오이디푸스의 무대에 오르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고개 숙인 아버지를 둔 경우라면, 부모의 노후를 근심하며 자신의 앞길을 모색해야 하며, 자산을 증여해줄 여력이 있는 아버지를 둔 경우라면, 자신의 행운에 고개라도 조아려야 할 형편이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를 비롯한 문화 전반의 스포츠화에 휩쓸리고 정보화 시대의 소비자로 훈육된 탓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세력화되기보다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공기처럼 호흡하는 데 익숙하다. 이런 상황
  • 상황에서 이들이 과연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저성장 사회에 걸맞은 생활방식을 고안해낼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 아비가 살았던 삶, 즉 “집 장만과 자녀 교육으로 간명하게 요약될 수 있는 삶”
  • 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조차도 쉽지 않다. 그들의 미래는 “노땅들”의 자산에 이미 저당 잡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들들은 세상에 넘쳐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아
  • 아버지가 평생을 짊어져야 했던 멍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당도하기 이전, 이미 아버지가 되어야만 했다.
  • 나는 그의 말이 위선의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기지촌
  • 세대론적 게임의 투전판이 판돈을 올려가며 거듭될수록, 이제 정치적 명분이 그저 알리바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한때 그것은 각 세대가 구축한 신화적 서사의 든든한 내골격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부실 공사 현장을 감추기 위한 치장용 장막에 불과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증폭되었고, 세대 내부의 분열도 가속화되었다. 내가 이 과정을 짚어보면서 확인한 것은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었
  • 사실이었다.
  • “어째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
  •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만 하는가?”
  •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나는 그의 질문 덕분에 이전까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사유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니 그 질문으로 인해 내가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도저한
  • 아주 먼 과거에 나 역시, 그들
  • 그들처럼 청년의 뜨거운 가슴을 지닌 적이 있다. 하지만 1997년 이후의 세계가 명료하게 가르쳐주었듯이 인간 역사의 자연사적 전개 과정은 그런 유형의 낭만주의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 자, 여기에 두 가지 종류의 해결안이 있다. 한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비현실적인 해결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온갖 윤리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해결안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민스키가 별다른 망설임 없이 후자의 해결안을 택한다는 점이다. 그의 해결안은 명쾌하다. 즉 우리는 미래의
  •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더 나아가 우리의 유전적 후손을 좀 더 지적인 존재로 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좀 더 지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 진화를 촉진시켜줄 과도기적 단계로 무한 경쟁의 세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 무간 지옥
  • 무한 경쟁은 진화에 소모되는 시간을 단축하면서 집단적 돌연변이의 출현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데 필수적인 촉매제다. 모든 인간이 제각각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날 것 그대로의 이기심을 생의 동력원으로 삼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가속화하는 아비규환의 세계. 그 세
  • 세계에서라면 우리보다 “좀 더 지적인 존재”가 하루라도 빨리 잉태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시기, 역사의 막다른 골목에 당도한 사회는 도덕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결단을, 그러니까 선과 악의 경계를 초월하는 결단을 요구받기도 한다. 1870년대 제국의 지위를 위협받던 영국이 사회적 다윈주의를 지배 이념으로 선택했듯이 말이다.
  • 서구의 휴머니즘
  • 철학자들이 정립한 근대적 주체의 모델을 변화의 근간으로 상정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율성을 갖춘 사회적 행위자로서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성찰하고 자유의 능동적 기능과 사회의 공공적 책임을 존중한다. 그리고 ‘통합된 정체성의 보유자’로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반면, 자본주의 소비사회는 근대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인간의 모델, 즉 소비자의 심리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의 확대 재생산 시스템
  • 따르면 인간은 욕망의 확대 재생산 시스템 내부에서 자극과 반응의 조건 반사로 잘 길들여진 자동인형에 가깝다. 그는 내면의 고통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아니 근본적으로 내면이라는 것의 존재 여부에 무심하기에 윤리적 질문 따위는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높아만 가는 욕망의 파도 위를 서핑하면서, 소비의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며 잉여의 정체성‘들’을 수집하려 할 따름이다.
  • 흥미로운 점은 작금의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소비자의 심리 모델이 서구의 휴머니즘이 내세운 자율적 주체의 이미지와 동일한 차원에서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가까운 미래에 다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가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 시민 사회라는 역사의 계단을 제대로 밟고 올라갈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소비 자본주의로 빠르게 진입한 사회, “IT 강국”의 구호를 경제 재도약의 계기로 삼은 덕택에 무선 랜의 전자기파가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휴머니즘 모델이 소비자 모델의 뒤로 밀려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당연
  • 당연하지 않을까?
  • 일상생활 곳곳에 편재한 다양한 미디어들은 특정한 패턴의 주체화 과정을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최적화된 소비의 행위자를 대량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 행위자들은 미디어들이 제공하는 시청각적 자극 앞에서 리모컨이나 마우스의 버튼을 누르며 자신의 시간을 판매하고 문화 콘텐츠를 제공받으며 쾌락을 향유하는 데 익
  • 익숙해질 것이다.
  • 자극 요인과 반응 도구와 강화 매개물로 구성된 일종의 스키너 박스 안에서 조건 반사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리적 재화와 서비스의 소비자로서, 더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시간의 소비자로서 말이다. 이 박스 안에서라면 그들은 자신이 생의 주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느니 존엄성을
  • 가진 존재라느니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기 바란다. 그것들은 팩트가 아니라 가치일 뿐이다. 우리가 언제 그런 가치를 사회적 공리로 추구해야 한다고 합의한 적이 있었는가? 당신들은 정말로 우리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동등한 능력의 소유자로 믿는 것인가? 사실 별 생각 없이 그저 선진국 헌법의 몇몇 구절을 베끼는 데 급급했을 뿐이지 않는가?
  • 역사 이후의 세계는 동물의 세계이거나 포스트 휴먼의 세계인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포스트 휴먼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 나는 1997년 이후의 세계가 바로 집단적 돌연변이가 본격화된 시기였음을 간파했다.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한편에는 신상품과 신용카드, 인터넷과 공인인증서만 안겨주면 자신이 실제 삶의 주인인 양
  • 별 전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좀비화된 인간으로서 동물’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풍요의 세례를 받으며 테크놀로지의 접촉면에서 신체적 감각의 재배치와 지적 역량의 확장을 꾀하는 ‘파워엘리트로서 포스트 휴먼’이 있다.
  • 아비투스
  •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호모에렉투스 같은 직계 선조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서로의 미세한 차이가 인류 진화의 중대한 분기점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 만일 역사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결국 그것이 부여한 우리 세대의 마지막 임무는, 우리 후손들이 세대론적 게임의 투전판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진화의 창조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SF 소설가가 말했듯이 창조적 파괴를 위한 세계 리셋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 말이다. 나는 수많은 희생양이 제단에 바
  • 바쳐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구축에 일조한 이 세계가 “유년기의 끝”이었음을 믿고 싶다. 어쩌면 나는 속죄 없는 사면, 참회 없는 구원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 잔바람에도 살랑거리는 꽃잎의 가벼운 정취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거기에 버티고 있는 것은 스테로이드제를 과다 복용한 듯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다. 꽃잎과 이파리로 치장한 그 몸은 당장이라도 강렬한 생명력으로 세포 분열을 거듭해 세종로의 아스팔트 바닥을 뒤덮을 기세다.
  • 국민교육헌장
  • 가희歌姬
  • “포기하면
  • 안 된다, 눈물 없이 피지 않는다, 의지다, 하면 된다” 같은 가사는 이제는 해병대 어르신들의 군복 등짝에나 표기되면 어울릴 법한 것이긴 했다. 그래도 너는 청량리역 주변의 마크사에서 ‘오바로크’ 친 그 새빨간 궁서체의 글자 모양이 너의 분홍빛 꽃잎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수다스러운 무의식의 이종 격투가 벌어지는 공
  • 공간
  • 고갱이
  • 진정성 넘치는 의미들이 과도하게 주입된 결과, 상징으로 도약하지 못한 채 도상의 차원에 질퍽하게 주저앉아 어떤 정서의 취향을 전면화하는 데 그친
  • 그친다.
  • 간단히 말해 무궁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무궁화의 순수한 표면들!
  • 이 미적 대상을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한 후 유미주의적 태도로 각색해 진열하는 것, 간단
  • 그런데 이 인공물은 작가의 손을 떠나자마자 다시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려고 몸부림친다. 전시 공간의 관객이 인공물의 표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궁화가 환유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어떤 집단적 기억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기억의 리비도적 에너지가 최정화가 정성 들여 구축한 유미주의의 방어선
  • 방어선을 뚫고선 무궁화의 표면 위에서 찐득찐득한 점액질의 형태로 걷잡을 수 없이 넘쳐흐른다. 관객은 작가의 안내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에 의지해 작품을 응시하는 것이다. 승패의 엇갈림. 스타일은 사라지고 노스탤지어만 남는다.
  • 너무 많은 진정성으로 인해 진정성 자체를 의심받아야 하는 상황.
  • 과도한 진심이
  • 웃음거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변명을 하면 할수록 아이러니가 점점 더 강렬해진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 옵아트op-art, optical art
  • 당시만 해도 플라스틱은 상당히 낯선 소재였다. 가전의
  • 총아나 다름없던 텔레비전마저도 목재 가구의 모양새로 생산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문제는 국내 업체들이 이 신재료를 능숙하게 다룰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업체와 기술 제휴를 맺고 제품의 금형을 수입해오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금형을 들여오더라도 설계 도면대로 형태를 사출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플라스틱이 굳으면서 수축되곤 해서 제품 표면이 휘거나 쪼그라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실상 재료의 특성을 살려 군더더기 없이 단순명료한 기하학적
  • 형태를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조명을 비추면 선명하게 굴곡을 드러내는 백색의 표면. 이 부엌 가전의 생산업체에 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었다면, 그냥 모른 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품의 약점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는 별 어려움 없이 해결안을 떠올렸을 것이다. 값싼 비닐 코팅 기법을 활용해 플라스틱 표면에 원색의 컬러 문양을 입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한국전쟁 후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정부가 나서서 공영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초기에는 재건 혹은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이후에는 국민주택이나 표준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태의 공영주택들이 지어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민간업자들이 공영주택의 표준화된 평면 구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평면 개발에 나섰다.
  • 한편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에 주력하면서, 공영주택 건설은 사실상 폐업 상태에 들어갔다.
  • 그녀가 유독 아꼈던 혼수 살림은 꽃무늬로 여백의 미를 살린 고급 자기 세트였다. 이전의 셋집에서 그것들은 행여
  • 행여나 깨질세라 나무로 짠 찬장의 제일 윗자리에 보이지 않게 감춰져 있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한 번씩 바깥바람을 쐬고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 오구
  • 너를 선택한 주부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생이냐 이식이냐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핵심은 그녀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사로잡은 네가 지닌 매력의 실체였다.
  • 종종 여고 동창회나 계모임, 종교 활동에 참여해 탈출구를 찾아보려
  •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외출은 자신이 섬처럼 고립된 존재임을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그녀들은 집안의 외톨이다.
  • 주부가 된 그녀들이 시내 상점에서 구입하는 사물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족속이다. 산업화의 논리에 따라 대량 생산된 제품들. 그 번들거리는 플라스틱 거죽은 잔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울깍쟁이를 닮았다. 그것은 허전함만 안겨줄 뿐 더 이상 교감의 전도체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녀들의 몸은 그 사물들이 불편하다.
  • 냉정한 기계의 몸을 지녔지만,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려고 표면에 꽃무늬를 새겨 넣은 사물들. 처지가 비슷한 이들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결국 그녀들은 자신을 닮은 사물을 구입한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모습이 담긴 가전제품이 주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완전히 도시화되지 못한 그녀들의 농경 문화적 감수성을 툭,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특히 심신의 불일치가 가져온
  • 어정쩡한 자세, 그리고 거기에 가미된 미량의 촌스러움은 그녀들이 너에게서 동류로서 더욱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던 정서의 얼개였다.
  • 규방 가사
  • 내간체
  • 시기에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자수와 꽃꽂이 강좌가 유행처럼 번졌던 것도 확실히 우연은 아니었다.
  • 1971년 국내 최초로 싱크대를 선보였던 오리표싱크
  • 여염집
  • 이 집으로 시집온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탄과 씨름한 덕분에 남편의 성미보다 연탄의 비위를 맞추는 데 더 능숙해졌다.
  • 앞뒷집의 텔레비전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노크도 없이 들락날락거리고, 새벽마다 일어나 마당의 수도로 물을 받아야 했던 집.
  • 개량 주택과 집장사집이 상징하던 ‘재래식’ 생활과 작별한다. “어머니의 생활과, 할머니의 생활과, 할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모든 옛날 생활과의 작별.”
  • 멜라민
  • 그녀에게 아파트로의 이사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경이라도 넘어가는 기분”에 빠져들게 만드는 이사이며, 현재를 거치지 않고 미래로 직행하는 시간 여행에 가깝다.
  • 시스템키친은 친절한 안내자의 표정으로 멀미를 느끼던 그녀들을 다독이며 이 여행의 최종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를 알려준다. 먼저 한샘은 ‘유럽형 스타일’의 세련된 부엌 가구들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유럽’을 직계 존속으로 삼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업체들은 죄다 일본의 부엌 가구를 참조했었다. 그것은 일본 업체들이 자국의 주거 문화에 맞춰 유럽의 부엌 가구를 번안한 모델이었다. 이렇게 일본을 거치다 보니 국내 업체의 부엌 가구에는 어쩔 수 없이 유교적 가부장제의 잔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기존 업체들의 광고에서는 젊은 주부나 식모들이 싱크대 앞을 지키고 있을 뿐, 도대체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한샘은 대담하게 부엌의 식탁 앞으로 젊은 남성을 불러들인다. 그 사진을 본 시어머니라면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라며 혀를 끌끌 차며 며느리를 원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한샘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 그 세계에서 부엌 가구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926년에 독일 여성 건축가 마르가레테 쉬테 리호츠키Margarete Schutte-Lihotzky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부엌’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며,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이 후경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시스템키친이 이렇게 뼈대 있는 집안과 근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신들이 꿈꾸는 스위트 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확신한다.
  • 시스템키친은 망설이지 않고 주부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든 면에서 자기를 실현시켜가고 있는데 비해 당신만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 생각에 소외감마저 느끼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러고 나선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시스템키친
  • 에 따르면 부엌은 일차적으로 인간공학과 디자인, 기술과 미학이 결합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더 이상 주부를 식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가정이라는 무형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고 제어하는 전문가다. 따라서 차가운 사무용 가구처럼 생긴 부엌 가구들이 주방에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단아하고 절제된 형태의 일체형 가구들은 시스템이라는 외래어의 질감과 조화를 이루면서 주부들의 업무를 체계적으로 보조할 것이고 그녀들의 전문가다움을 시각적으로 웅변해줄 것이다. 애초에 장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 스템키친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순명료했다. 부엌은 주부들이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실행하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기실현”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소외감 따위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보스턴백
  • 타파웨어
  • 시스템키친이 물품 교체를 통해 단숨에 주방의 현대화를 성취했다면, 타파웨어는 차분한 설득을 통해 감각의 현대화에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 본래 아파트에서 베란다는 화재 시 대피용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서양 주택의 발코니처럼 차를 마시며 바깥 경치를 바라보는 공간으로 꾸며질 법도 한데, 빽빽이 들어선 회색빛 아파트들이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한 탓인지 주부들은 베란다에 빨래를 널고 장독대를 두었다. 구닥다리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의 역할도 했다. 베란다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실외의 공간이었다.
  •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대형 유리창은 암묵적인 휴전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고, 거실은 비무장지대처럼 무주공산으로 남겨져 있었다.
  • 벌써 5년째 과장 자리 붙박이 신세인 남편의 월급이라고 해봐야 50만 원 안팎이지만, 헤퍼진 씀씀이로 인해 생활비가 적자가 난다고 해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당장에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돈을 빌려야 하는 형편인데도 그녀는 아등바등하는 삶과는 거리를 유지한 채 “언행에 우아한 품위”를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3,000만 원짜리 아파트가 1년 만에 2배가 오른 덕분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한 달에 200~300만 원씩 재산이 불어”나는 “새롭고도 놀라운 경험”. 아파트가 사람을 위한 ‘양계장’이라며 자조하는 이웃 주민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비유를 해야 한다면 “매일매일 금 달걀을 낳는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닭”
  • 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 너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때로는 서푼짜리 감상주의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사람과 사물 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데 그만큼 우아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물들은 ‘아름다움’에 관한 너의 이데올로기를 비웃었다. 그것들은 아름다움을 대신해 자신들만의 미적 가치를 내세우는데, 이때의 미적 가치란 너처럼 자의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았다. 기능과의 함수 관계를 통해 정교하게 계산된 실용
  • 적 형태의 사물들. 미적 가치란 바로 이런 사물들이 지닌 합리성의 물격物格이었다. 그 사물들은 변덕스러움을 알지 못하며, 일체의 주관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기능과 형태가 인과율에 따라 통합된 자기완결적인 상태, 이것이야말로 그 사물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의 궁극이었던 것이다.
  • 익숙한 것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것과 연을 맺으려는 그녀들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녀들은 감각의 진화를 택했다.
  •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19세기 유전학의 명제를 떠올렸다. 한 개체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적 변화는 그 생명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온 발생 과정을 반복한다는 진화재연설進化再演說.
  • 20세기 초, 장식을 일종의 범죄 행위로 치부했던 모더니스트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장식의 역사를 정식화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인간의 감각은 나이를 먹어가며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 변화를 거친다. 두 살 먹은 유아는 제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파푸아인처럼 세상을 보고, 네 살 먹은 어린아이는 게르만인처럼, 그리고 여섯 살 먹은 아이는 볼테르처럼 세상을 바라본다. 또한 여덟 살이 되면 비로소 18세기에 발견된 색깔인 보라색을 지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이 되면 현대적인 감성의 소유자로 거듭나, 오랜 고민 끝에 장식을 거부하게 된다. 로스에 따르면
  • 장식의 역사는 인류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문화의 진화란 일상용품에서 장식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
  • 였다. 따라서 장식이란 문화적 진화의 속도를 제대로 좇아오지 못한 지각생이나 낙오병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 ‘비동시적인 취향의 혼재’
  •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한국의 소위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진수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대략 이런 것 같애. 그들은 삼십 평, 사십 평 혹은 오십 평짜리 공
  • 간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단한 긍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그들은 그들의 그 공간에 산소가 보글보글 솟아나오는 어항 하나를 거실에다 갖다 놓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사는 것 같애. 그리고 아침마다 금붕어들에게 먹이를 넣어줌으로써 그들 가슴속에 숨어 있는 측은지심을 확인하는 것 같애.”
  •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가 점유한 취향의 시간대는 여전히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어느 언저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강남 신중산층 주부들이 경험했던 시간 여행의 첫 관문을 이제 막 통과한 입문자였다.
  •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자신의 아이가 퇴교 길마다 아파트 뒷문 앞 가게의 자동 뽑기 기기 앞을 기웃거린다고 하더라도 쉬이 야단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 아이가 그 기기에서 굴러 나온 투명한 플라스틱 통 속의 과자를 확인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릴 때조차 “그런 건 불량 식품이야”라고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자신도 숱하게 불량 식품들을 먹으며 자란 탓에 “우울한 결핍과 함께 떠오르는 허술한 불량의 맛들”이 지닌 중독성의 매력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아직 그 맛의 기억을 혀끝에서 지워내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 이 대학생에게 과외를 받던 강남 중학생 소녀라면, 나지막이 “맙소사”라고 신음을 내뱉었을 법한 촌스러운 옷차림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소득이 1,000달러와 2,000달러 사이에 머물렀던 시대의 대학생에게 무척 어울리는 복장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산을 축복으로 여기는 농경 문화의 후예로 태어나 1970년에는 254달러짜리 유년기를 보냈고, 1980년에는 1,645달러의 무게만큼 청춘의 열량을 소모했다. 그들의 몸은 대학생이 되어 ‘청운’의 꿈을 품고 도시행 급행열차에 올랐으
  • 나, 그들의 취향은 좌충우돌을 반복하며 지방의 비포장도로 어딘가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아마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들이 결혼을 하고 내 집을 마련해 아파트에 입주할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초중반 즈음이면 그들의 취향은 겨우 구불구불한 국도를 벗어나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서초 인터체인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아내도 처지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녀들은 너를 첫사랑의 동반자로 삼아서 시간 여행의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첫사랑은 당사자를 혼돈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로 내몰 뿐만 아니라 아련하고 황홀한 설렘도 선사하지 않는가? 이 연애의 통과의례에서 너는 한껏 노련해진 표정으로 그녀들의 수줍고 여린 첫사랑을 연기하면 그만인 것이다.
  •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아파트 거주자들 역시 지역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강남 아파트를 원형으로 삼는 평면 위에서 취향의 계통 발생을 되풀이했다.
  • 신도시의 풍경이 도식적이라면, 그들이 거주하는 방 세 개 딸린 아파트의 실내는 표준적이다. “부엌이나 욕실, 안방, 내 책상이 있는 방, 그 어디에도 눈에 거슬리는 특별한 것”은 없으며, “어떤 여자가 들어와 당장 살기 시작해도 이상한 점이 조금도 없”을 것 같다. 집안에서 행하는 그녀의 모든 동작에는 “익숙한 평온”이 깃들어 있다.
  • 포푸리 화환
  • 동일한 평수의 아파트 앞에서 그녀들의 취향은 서로에게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던 것이다.
  • 네가 연출했던 취향의 계통 발생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주기에 따라 반복되다가 점차 약화된다면, 이는 기존의 발생 경로를 거부하는 새로운 개체들의 출현 때문이 아닐까? 가까운 미래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로 도시가 북적거리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묵어본 시골집이라곤 민박집들밖엔 없”고 “농가에서 키우는 황소를 본 횟수보다 동물원에서 물소를 본 횟수가 더 많”은 그런 아이들의 세상.
  • 부산의 어느 산동네, 왜소한 몸집의 중학생 하봉은 수중에 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진짜랑 제일 똑같은” 나이키 스티커를 파는 또또문방구로 달려간다. 진짜 나이키를 숭배하지만 가질 수 없는 형편이다. 제 안의 욕망을 똑바로 응시할 줄 아는 하봉은 그 욕망을 성취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고안한다. 그것은 “다른 가짜들과 구분되는 무언가”를 간직한 진짜 가짜를 찾아내는 것이다. 어설프게 모조하거나 대충 흉내 낸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봉이 날카로운 눈썰미로 선택한 나이키 스티커는 진짜 나이키의 대용물에 불과하지만, 다른 스티커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슬아슬하게 치켜 올라간 스티커의 로고 꼬리에 “진짜를 향한 욕망과 열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봉은 그 욕망과 열정만큼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편, 하봉이 나이키 스티커와 애틋한 동지애를 나누던 그 시기에, 사당동의 정아는 “새빨간 나이키 로고가 날렵하게 수놓인 가죽 운동화를 살짝 꺾어 신고, 앙증맞은 마두馬頭가 새겨진 조다쉬
  • 환유
  • “바야흐로 서태지가 된, 정현철의 시대”,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
  • 다고 투정하면서, 경제 호황이 연출해낸 대중 소비문화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 국내 기업들은 1996년을 기점으로 공세적 인수 합병을 통한 ‘해외 브랜드 쇼핑’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테면 LG는 미국 텔레비전 시장의 개척을 위해 제니스를, 대우는 프랑스의 톰슨 멀티미디어를 구입하려고 나섰다. 1990년대 초반 ‘탱크주의’를 내세워 내수 시장에서 선전했던 대우는 OEM 방식이 총 수출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처지에서 벗어나보고자, 자사의 해외 이미지 제고용으로 프랑스 국영기업인 톰슨 멀티미디어를 인수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과 정치권이 “싸구려 제품을 판매하는 제3세계의 기업”에 국영기업을 헐값으로 넘길 수 없다며 반대에 나선 탓에 오히려 유럽 시장에서 자사의 이미지만 실추되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모색이 금세 한계를 보이면서, 각 기업들은 직접 나서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해외시장에 홍보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해외 홍보 예산의 수직 상승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LG전자는 1995년 6,000만 달
  • 주부들 사이에 대용량에 걸맞은 새로운 냉장의 환상도 유포되었다. “잘 꾸며진 정원”
  • 같은 대형 냉장고의 실내가 그것이다. “스테이크용으로 알맞게 썰린 육고기와 물고기, 생크림 케이크, 와인, 키위, 토마토, 멜론, 햄, 치즈, 베이컨, 버터, 래디시, 파슬리, 마요네즈, 푸딩, 타르타르 소스,
  • 양상추, 레몬, 우유” 등 낯설고도 예쁜 이름의 음식과 식자재들이 700리터 한계 용량의 내부 공간을 꾸미기 위해 동원된다. 당연히 김치 같은 발효음식의 냄새나 생선의 비린내 따위가 그 근처에 얼씬해선 안 된다. 만약 시어머니나 친정 엄마가 집에 들러 우연히 이 냉장고의 문을 열어본다면, “먹을 건 하나도 없구만”이라며 혀를 끌끌 찰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이 냉장고에게 주부의 역할이란 “정원사나 실내장식가”에 가깝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무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녀들은 새로운 냉장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 하지만 신제품이 안겨주는 이런 부류의 상상력은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제 힘을 뽐낼 뿐, 현실 세계의 장벽 앞에선 주춤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대형 냉장고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깔끔하고 세련된 서구식의 식단이 아니라, 당시 신도시의 상업 지구를 독차지하고 있던 대형 할인 매장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에 한 번, 오후 나들이 삼아서 동네 근처의 재래시장이나 단지 내의 슈퍼마켓 체인점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신도시는 이와 다른 장보기 패턴을 제시한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에 따른 유통 시장 개방에 대비해 신도시의 상업용 부지를 경쟁적으로 매입했던 재벌가의 유통업체들은 그 자리에 대형 할인 매장을 개점하면서, ‘가격 파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신도시의 주부들을 불러 모은다. 이로 인해 인근에 있던 어쭙잖은 잡화점이나 작은 슈퍼마켓들은 “진화에서 따돌림을 당한 부적격 생물” 같은 처
  •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진열대의 상품들은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면서, 주부들에게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실감해보라고 채근하고 있지 않은가?
  • 문제는 계산을 마친 후에 발생한다. 120리터 용량의 카트를 가득 채웠던 상품들을 이전의 장바구니에 담아 들고 옮길 수 있을까? 승용차가 아니면 운반은 불가능하다. 차를 몰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엔 냉장고가 속을 썩인다. 갖가지 식자재, 냉동식품, 과일, 채소, 음료수를 전부 다 집어넣기에 내부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결국 주부는 냉장고를 대용량의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우르과이라운드의 타결부터 대형 할인 매장의 개점을 거쳐 양문형 냉장고의 구입에 이르는 일련의 연쇄 작용이 완결된다.
  • 양문형 냉장고보다 한발 앞서 김치 냉장고가 등장했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전자가 ‘리디자인’의 결과였다면, 후자는 ‘돌연변이’의 결과였다. 사실 예전에도 ‘김치냉장고’라는 이름의 제품이 존재했다. 1970년대 중반 아파트 입주 주부들이 마당과 더불어 장독대도 사라졌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하던 무렵, 베란다에 김치를 일정 기간 보관할 수 있는 아이스박스가 김치냉장고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 판매된 적이 있었다. 반면에 1995년에 시장의 후발업체였던 만도기계가 선보인 “딤채”라는 김치냉장고는 기존의 냉장고 시장의 틈새를 발견한 결과였다. 누구보다 이 냉장고의 등장을 가장 반긴 고객들은 아파트에 거주하던 중장년층의 주부들이었다. 그녀들은 이제 경제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왕성한 구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신제품 구입의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장기간 김치의 신선도를 유지해준다는 제품의 기능은 구입을 위한 알리바이에 가까웠다.
  • IMF 외환위기가 전환점이었다. 경제가 추락하자 게임의 모든 법칙이 변화했다. 위기에 빠진 건설업을 구하기 위해 평당 분양가 자율화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에 따라 아파트들도 형질 전환을 꾀하면서 규모 확장의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로 50평형 이상의 아파트가 용인 등지의 수도권 일대에 속속 세워졌다. 평당 분양가의 가파른 상승 곡선에 따라 거실과 주방은 거듭 커졌고, 빌트인 가구들이 보편화되었고, 인테리어 마감재가 고급화되었다. 그리고 규모 확장의 실험은 강남 대치동과 분당 정자동으로 옮겨가면서 주상복합적 욕망의 실험으로 변모했다. 여기에서 ‘평당 분양가’는 사물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의 공간으로 통째로 옮겨놓는 아르키메데스의
  • 지렛대 역할을 했다.
  • 마사 스튜어트
  • 이제 가전제품들은 ‘백색’이란 수식어를 떼어내고 “아트 가전”이나 “패션 가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건 아무도 너에게 과거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촌스러운 취향의 잔여물로 취급하던 이들이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네가 동화 속의 미운 오리새끼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조가 되어버
  • 린 것일까?
  • 본래 비틀은 ‘모터화motorization된 제국’을 꿈꾸던 히틀러의 야심 찬 국민차 계획의 일부로 탄생했다. 소박한 외관 뒤에는 파시스트의 제복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 사실이 비틀의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전후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 도시의 거주민들에게 딱정벌레차로 불리며 값싸고 잔고장이 없는 자동차로 대접받았고, 1960년대에 북미로 건너가 베이비 붐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한 불신과 미국적 소비문화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는 반문화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페이스리프트fccelift
  • 이렇게 사반세기가 넘게 시대의 공기를 호흡했던 비틀은 1980년대를 넘어선 제3세계로 건너가 개발도상국의 국민차 모델로 생애를 마감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는 찰나, 1997년에 비틀은 현대적인 유기적 스타일로 재해석된 뉴비틀로 거듭났다.
  • 간결한 라인과 파스텔 색상으로 단장한 뉴비틀의 인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 비틀을 몰았고 이제는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한 중장년층 이상의 세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에게 뉴비틀은 과거 기억에 대한 정서적 환기력을 지닌 향수의 대상으로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한편 국내에서 뉴비틀은 약간은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었다. 비틀을 실제 추억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이들은 과거 해외 유학을 다녀온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뉴비틀의 주요 소비자층이 팬시 상품을 수집하면서 유년기를 보냈을 법한 중상류
  • 층 출신의 젊은 세대였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들에게 세파에 찌들지 않은 채 귀엽고 앙증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비틀의 ‘동안童顔’은 장난감 미니카의 환생으로, 팬시한 애완동물과 같은 존재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 물간 생선회와 식은 LA 갈비찜이 포함된 싸구려 뷔페
  • 피로에 찌든 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녀들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오래된 낡은 사물을 통해 과거를 향수하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이를테면 윤성희의 소설, 「계단」에 등장하는 자개농의 쓰임새가 그렇다. 안주인은 30대 노총각 아들과 단 둘이 변두리의 소형 연립 주택에 살면서 안방을 자개농의 몫으로 내준다. 너의 옛 동료이기도 했던 이 장롱은 중고 가구 매매업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면할 만큼 퇴물로 전락했지만, 가족사와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증언해준다. 하나는 “결혼 혼수로 자개농을 해줄 만큼” 안주인의 친정이 부유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자개농이 들어갈 만큼 신혼집이 컸다는 것”. 서너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 집 크기는 점점 작아졌지만, 소유자는 끝내 장롱을 버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영화를 잊지 않겠다는 듯.
  •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 알렉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 초자 인쇄 기법
  • 초자 인쇄란 유리에 초자 잉크로 문양을 입힌 뒤 도자기를 굽듯 섭씨 600~700도로 가열해 잉크가 유리 속으로 스며들도록 하는 기법이다.
  • 최근 들어 사물의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디자인이 늘어나는 추세다. 백화점 판매원의 미소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친절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물들.
  •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이른 땀 냄새 나는 부유함이 아니라 자생하는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오만함”
  • 로스트비프
  • 마포아파트는 1962년에 단지 개념으로 건설된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다.
  • 현대식 아파트의 건설을 통해 군사 정권의 주택 정책의 표본을 제시하려고 했다.
  • 본래 계획은 당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다분히 원대한 것이었다. 50억 환의 예산을 들여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시스템을 갖춘 10층짜리 11개 동, 1,100여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계획은 이내 반대 여론에 휘말려 “호화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엘리베이터를 갖춘 10층 건물은 6층으로 낮춰졌고, 중앙난방 시스템은 호실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 수도 시설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어서 수세식 화장실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수입한 양변기만큼은 원안대로 설치되었다.
  • 마포아파트의 건설 이전에도 1956년 서울 중구 주교동에 12가구가 들어갈 수 있는 3층짜리 중앙아파트가, 그리고 1958년 종암동의 종암아파트, 1959년 충정로의 개명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러나 전근대적 습속이 지배하던 일상생활과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 형식이라는 이유로 당시 아파트들은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 마포아파트의 경우도 초기에는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는 분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임대로 입주자를 모아야 했고, 연탄보일러가 인체에 해롭다는 소문이 퍼져 완공 뒤에는 입주 예정자의 10분의 1 정도만 이사했다. 당황한 주택공사 측은 실험용 쥐로 연탄보일러의 무해성을 입증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입주자들의 의심이 해결되지 않자 건축부장이 직접 나서서 아파트 방에서 하룻밤을 묵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 고대 옆의 종암아파트 역시 마포아파트에 버금가는 희극적 상황을 연출한 바 있었다. 이 아파트는 분양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인근의 하숙집 아주머니들이 대량으로 임대해 하숙을 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 아파트는 새로운 하숙촌으로 각광을 받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 마포아파트를 제일 먼저 주목한 이들은 대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구식 가정생활을 꾸리려던 서울 토박이의 젊은 중산층들이었다. 이들에게 아파트의 좁은 면적은 더 없이 좋은 탈출의 알리바이였다. 자유분방함을 선호하는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연극인 등 저명 예술인들의 이름이 마포아파트의 초기 입주자 목록에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 결과적으로 비좁은 부엌은 주거 생활의 중심축을 안방에서 거실로 옮겨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엌과 바로 연결된 거실은 식사 장소로 활용되면서 기존의 응접실 기능과 함께 안방의 기능 일부를 양도받았다. 이렇게 거실이 가족 공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덕분에 침실은 안방의 기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부부만의 공간으로 재정의되었다. 특히 침실에는 온돌이 설비되지 않아서 침대가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는 침실의 독립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 부엌의 절충적 형태와 온돌을 없애버린 안방의 침실화가 각각 너무 더디게 현대화되거나 지나치게 빨리 현대화된 양극단의 사례라고 한다면, 이 양극단 사이에는 좌식 생활과 입식 생활이 빚어내는 크고 작은 마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 이런 문제들 중 젊은 주부들이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옷으로 말하자면 기성복과 같은” 아파트 공간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개성미”를 연출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 마포아파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단지 내에 잔디밭과 어린이 놀이터뿐만 아니라 상가까지 갖추고 있었다. 미장원, 이발관, 정육점, 미곡상, 식료품점, 양장점, 음식점, 목공소 등 30여 개의 점포가 상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이 상가는 마포아파트와 여타의 시민아파트를 구분해주는 명확한 상징과도 같았다. 판자촌을 몰아내기 위해 산비탈 위에 올라선 시민아파트들의 경우 시장이 꽤 먼 거리에 위치해 주부들에게 큰 불편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몇몇 아파트의 경우 빈 지하층을 “싸전, 연탄가게, 이발소, 미장원, 약방, 세탁소, 정육점” 등과 같은 상점 점포로 활용하기도 했고,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경우에는 종종 노점상들이 아파트 입구 길목에 진을 치기도 했다.
  • 행에 민감하고 여가 생활을 즐기는 마포아파트 거주자들의 소비 패턴은 세간의 시선을 끌며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근검절약의 도덕적인 훈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높디높은 담으로 은폐된 고급 주택가의 상류층보다는 외부의 시선에 잘 노출되는 마포아파트의 젊은 중산층이 꽤 쓸 만한 표적의 구실을 해주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마포아파트가 선보인 도시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은 새로움으로 인해 찬반양론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 새로움이 “조국 근대화”가 성취하게 될 미래의 일상생활을 물질의 형태로 실험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마포아파트는 바로 그런 실험이 진행된 공간이었다. 비록 유럽의 아파트를 담은 사진 한 장에서 출발했지만, 완공 후 10여 년간 그 곳에서 벌어진 좌충우돌의 사건 기록들은 일상의 현대화를 준비하는 데 소중한 자산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마포아파트가 제시한 현대화가 그저 ‘잘 먹고 잘 입는 것’처럼 별다
  •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실험을 통해 아파트 보급의 타당성을 확인했고
  • 본격적인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 본래 부엌의 개량이 현대적 주부 생활을 위한 과제로 처음 제기된 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군의 건축가와 지식인들이 주택 개량 관계 논문을 발표하면서 ‘남존여비’의 전통 사상에 반기를 들며 부엌의 현대화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부엌은 전통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대부분 부엌은 1950년대 후반에 지어진 국민 주택의 구조를 모방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부엌에 설치된 연탄 아궁이는 취사뿐만 아니라 난방을 위한 열원으로도 사용되었고, 이 때문에 부엌은 안방 바로 옆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엌의 아궁이와 안방의 아랫목이 서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나란히 위치해서 상대적으로 주부들의 동선을 줄어들긴 했지만, 부엌의 바닥이 낮아서 주부들은 낮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고 음식을 밥상 위에 얹어 안방으로 날라야 했다. 또한 부엌에선 신발이나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하는 불편도 있었다.
  • 1963년 당시 서울시의 급수 보급률은 고작 56퍼센트였으며, 집안에 수도가 들어오더라도 부엌에 설치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주부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식재료를 씻거나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 1970년은 아파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해 4월에는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했고, 7월에는 한강맨션 입주가 시작됐다. “8평이라는 좁은 공간, 공동변소를 써야 하고 연탄가스가 복도에 가득 차는” 시민아파트들은 “고층 판자촌”이라는 별명을 얻고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반면, 한강맨션을 필두로 하여 “맨션”이라는 이름의 고급 아파트들이 속속 등장했다.
  • 서울시 전체 가구의 아파트 보급률은 1972년에는 4퍼센트, 1977년에는 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수치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아파트는 “현대적인 문화생활”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건히 다져갔다.
  • 1977년 중앙일보가 대학생 500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81퍼센트에 달했다. 특히 여학생의 선호도는 매우 높아 91퍼센트에 달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텔레비전 연속극에 등장하는 젊은 맞벌이 부부는 으레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설정될 정도였다.
  • “맨션”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이 아파트는 1968년에 대한주택공사로 복귀한 장동운이 마포아파트 건설 당시 비판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서랍 속
  • 에 집어넣었던 청사진을 다시 펼쳐 보이며 선보인 새로운 개념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외래어인 맨션mansion^은 본래 ‘대저택’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주택공사는 종래의 아파트들과의 질적인 차별화를 위해 이 단어를 ‘브랜드’화했다.
  • 한강맨션의 바통을 곧바로 이어받은 것은 서울시가 여의도 개발의 재원 마련을 위해 건설한 여의도 시범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최초의 고층 아파트 단지로 12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화제를
  • 낳기도 했다.
  • 브리사인 아이
  • 한강맨션은 서울의 중상류층을 입주 대상으로 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형대인 25~37평형 640가구, 51~55평형 60가구를 공급했다.
  •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최초로 완전 입식 생활의 공간을
  • 대담하게 선보였다는 점이었다.
  • 또 다른 평면 설계상의 특징은 내부 공간이 주・야간 생활 별로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설계진의 본래 의도는 “입주자의 생활을 현대화”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침실들이 한쪽으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 한편 거실은 침실과는 완전히 분리된
  • 반면 식당과 연결됨으로써 나름대로 독립된 질서를 확보했다. 바로 이 거실의 공간은 이 아파트에 입주한 중상류 계층이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방식으로 실내 공간을 꾸밀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 맨션아파트는 실내장식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일단 아파트는 실내 공간을 차지하는 가구의 유형부터 바꿔놓았다. 마포아파트와 같이 작은 평수의 아파트의 경우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재래식 가구를 밀어내야 했지만, 넓은 평형대의 맨션들은 덩치가 큰 응접 세트, 식탁과 의자를 실내로 불러들였다.
  • 모자익 후로링mosaic flooring
  • 1960년대 이후 부엌의 현대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아파트 건설로 등장한 입식 부엌은 언론과 기관의 계몽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기존의 단독 주택에까지 부엌 개량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도시 가스나 LPG를 연료로 하는 가스레인지의 등장도 여기에 한몫 거들었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장에 선보이기 시작한 가스레인지는 화력의 조절이 간편하고 사용 후에는 재나 쓰레기가 남지 않아 위생적인 열원 관리를 가능케 했다.
  • 실제로 가스레인지의 보급으로 부엌에 식탁을 놓고 취사뿐 아니라 식사도 겸하는 가정도 늘었다. 이와 더불어 단독 주택의 다락이나 광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다용도실이 부엌의 보조 공간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공간은 싱크대의 수납장에 들어가기 힘든 대형 주방용품을 보관하거나 세탁기를 설치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 최첨단의 속도로 입식 부엌의 유행을 선도한 것은 맨션아파트였다.
  • 친구나 친척의 맨션아파트에 들러 부엌의 세련된 자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일반 주부들은 입소문을 퍼트리며 ‘맨션’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 이 시기 국내 부엌 가구업체들은 일본 업체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블록 키친’ 개념을 도입했다. 블록 키친이란 입식 부엌을 위한 부엌 가구들, 즉 싱크대, 조리대, 가스대, 수납장 등을 하나의 세트로 구성한 것이
  • 었다.
  • 중산층 가정에서 부엌 개량이 더뎌진 이유 중 하나는 값싼 노동력으로 주부들의 가사 업무를 돕던 식모의 존재였다. 1972년 당시 서울시 전체 가구 중 식모를 둔 가정은 24만 6,000가구로 추산되었는데 이것은 전체에서 34.4퍼센트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이 비율은 당시 텔레비전과 전화를 소유한 가구 수와 일치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텔레비전이나 전화를 가진 집이라면 으레 식모를 두고 있었던 셈이다.
  • 넓은 평형대의 맨션아파트의 경우에는 식모를 두는 관례가 여전히 유지되었다. 한강맨션의 도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아파트의 평수가 클 경우 설계자는 부엌과 연결된 조그마한 방을 따로 만들어 식모가 기거하는 공간으로 제안했다. 이런 경향은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도 나타났다. 차이가 있다면 설계 평면도에 ‘식모 방’이라는 명칭이 ‘가정부 방’으로 바뀌고 방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정도였다. 이에 반해 35평대 이하의 아파트에 입주한 젊은 부부들의 경우, 관리 서비스와 입식 부엌 덕분에 식모를 두길 꺼리는 경향이 점차 늘어갔다. 장마철 집 수리 걱정도 없고 연탄 갈 필요도 없으며 문단속만 잘하면 장시간 외출도 가능하고 상가가 가깝고 배달도 해준다는 점, 그리고 꼭 일손이 필요할 경우에는 시간제 가정부를 부르면 된다는 점 등 아파트 생활의 이점을 잘 활용하면 주부 혼자만의 힘으로 가족끼리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 한강변의 모래밭을 매립해 아파트 단지를 세웠으니, 애당초 상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단지 내 상가나 쇼핑센터가 아파트와 함께 건설되고 분양되었다.
  • 몇몇 맨션아파트 상가는 전화 한 통화로 “콜라 1병, 라면 1봉지도 불평 없이 배달”해준다는 점 덕분에 세간에 화제를 낳았다. 다음의 기사는 “진수성찬에서 껌 한 통,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줌에 이르기까지 전화 다이얼만 돌리면” 모든 것이 배달되는 맨션아파트촌의 한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아파트촌이 “배달 만능 지대”로 변모한 것은 단지 내 상가 점포들 간의 과당 경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아파트촌마다 각종 상점, 상품을 소개하는 전용 전화부가 등장한 것도 이때 일이었고, 명절 때는 상호가 적힌 비눗갑, 수건, 수화기받이, 휴지걸이, 수첩, 회보, 상품 카탈로그 등을 돌리기도 했다. 연탄을 쓰는 아파트 단지에는 4부제 연탄 갈기에 찌든 주부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불이 붙은 연탄”을 배달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서울 곳곳에 새로운 점포 형태인 슈퍼 체인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74년 초반만 하더라도 8개 점포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는 시내 곳곳에 80여 개에 달하는 점포가 문을 열었다. 소비자가 매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필요한 상품을 골라서 계산대에서 한꺼번에 계산하는 것, 가격 표시가 된 갖가지 상품들이 분류 품목별로 진열된 것, 재래시장처럼 흥정에 신경 쓰지 않고 한 장소에서 종합 쇼핑을 즐긴다는 것 등 슈퍼 체인의 새로운 쇼핑 행태는 진기한 풍경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 원래 슈퍼 체인은 재래시장의 복잡한 유통 구조를 단순화해 비교적 싼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정부가 대자본을 끌어들여 시도한 새로운 연쇄 점포망이었다. 정
  • 부는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한남체인, 제일슈퍼체인, 럭키슈퍼체인, 화성산업, 한국시장연쇄 등 7개 업체를 슈퍼체인 적격 업체로 지정해 지원했고, 이 업체들은 연차적으로 점포망을 확대, 체인화했다. 이들 점포는 100평 이상 면적을 구비해 정부가 지정한 74개 생필품을 정찰 가격으로 판매했다.
  • 1966년에 부임한 김현옥 서울 시장은 재임 초기 2년 동안 도로 확장과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주력하다가, 1968년부터는 강변으로 눈을 돌려 한강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여의도를 아파트와 빌딩으로 이뤄진 현대적인 신도시로 개발하는 것,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양편에 견고한 제방을 쌓고 그 위에 자동차 전용 도로를 만드는 것, 그리고 제방 안쪽의 매립지에는 아파트 중심의 신시가지를 건설하는 것 등이 개발의 핵심 내용이었다. 장마철만 되면 홍수를 일으키곤 했던 한강을 도시 생활의 핵심 축으로 변모시키겠다는 것이었다.
  • 소형 평형대의 잠실 주공아파트의 경우는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아 주택공사가 직접 복덕방을 설치하고 직원을 동원해 판매 작전을 펼칠 정도였지만 여의도와 압구정에 건설된 대형 평형대의 아파트는 주거 공간으로 뿐만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77년에 “여의도 지역 복덕방들은 분양도 끝나지 않은 목화아파트 한 가구에 300만 원의 프리미엄을 얹어주겠다고 선전”했고, 소문이 퍼지면서 목화아파트에 뒤이어 분양한 개나리아파트는 70대 1, 미성아파트는 11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루 만에 1,000만 원의 프리미엄이 붙는 경우도 비일비재해 분양권 당첨이 더할 나위 없는 신분 상승과 재산 증식의 기회로 간주되었다. 1978년 정부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분양 비리는 그 정점이었다. 한때 중동 건설 참여로 특수를 누리던 대형 건설회사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고급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매년 평당 분양 가격 기록을 갱신해갔다.
  • 정부는 뒤늦게 분양가 상한제를 들고 나와 건설사의 횡포에 제동을 걸었다.
  • 집은 사
  • 람이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돈을 버는 목적으로 잘못 사용된다면 그것은 집의 불행인 동시에 머지 않아 인간의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더욱 사는 데 알맞은 주거 이상으로 집이 덮어놓고 광대해진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주거 문화의 타락인 동시에 사회문화 전체의 타락을 향하는 시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시인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스튬”의 힘만으로 새로운 정신을 일궈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몸에 기입된 일상의 전통적 습속들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가위질 하듯이 잘라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아파트를 포함한 대다수의 주거 공간에선 전근대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불균질하게 동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박길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갑을 발에 끼어 넣거나 술잔에 밥을 담아 먹어야만 하는 과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 버네큘러vernacular
  • 이 세 유형의 물품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혼돈스럽게 뒤섞이고 마찰을 빚고 모방하면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실현해 보였다.
  • “피엑스 경제”라고 불리던 1950년대보다는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군 피엑스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되었다.
  • 주한 미군의 추산에 따르면, 이들에 의해 피엑스, 에이피오(미군사우체국), 미군 주류 판매소 등 미군 관련 업소에서 유출된 물품의 규모는 약 6,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규모는 관련 업소 총 판매량의 80~9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기묘한 유통 경로를 따라 이동하던 피엑스 물품들은 주로 남대문 지하상가, 부산 국제시장, 대구 교동시장, 대전 양키 시장 등지에서 판매되었다. 이 시장들은 전쟁 직후부터 군대에서 흘러나온 미군 전투식량 박스나 온갖 종류의 군복과 군 장비를 판매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이 시장들에서 거래되는 상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군수품들이었고 그 물량 역시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 단속의 눈을 피해 국적 불명의 상품들이 거래된다고 해서 “도깨비 시장”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남대문 시장의 지하상가는 피엑스 물품들의 총 집산지나 다름없었다.
  • 한편 1977년 7월부터 시작한 주한미군방송AFKN의 컬러 방송은 아직 국내에선 판매되지 않던 컬러텔레비전에 대한 수요를 자극했다. 이 방송의 시작과 더불어 신문들을 받아들면 미군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안내부터 훑어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젊은 세대들 사이에선 “박진감 있는 폭력물 드라마”, “아찔하고 화려한 쇼 프로”, “국내에선 보기 힘든 해외 영화” 등을 방영하는 AFKN 방송을 보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에 따라 15인치와 19인치 소니 컬러텔레비전이 각각 45~55만 원과 65~75만 원이라는 비교적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급증했다.
  • 이와 함께 외제 비디오플레이어도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당시 고급 맨션아파트를 중심으로 외제 비디오플레이어를 구입해 검열에 의해 가위질 되지 않은 성인 영화나 미개봉 영화를 즐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 이렇게 외제 컬러텔레비전과 비디오플레이어가 시장을 잠식해가자 1979년에는 정부가 나서 해외 상사 주재원이나 관광객이 공항을 거쳐 휴대품으로 들고 오는 이 제품들의 반입을 금지시켰다.
  • 피엑스에서 유출된 외제품들이 특정 계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풍요의 신기루였다면, 군복을 염색해 재활용한 옷가지들,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자동차, 화물 트럭을 개조한 버스, 원조 물품을 담았던 나무 상자로 지은 집 등은 1950년대에 가난에 찌든 일반인들이 가난과 사투를 벌이며 만들어낸 문화, 즉 ‘가난의 문화’ 중 일부였다. 그 가난의 문화에서 생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 바로 그 의지는 임기응변의 방식을 통해 부족한 물자로 쓸모 있는 물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은 가난의 문화가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의 최대치였다.
  • 1965년에 금성사는 일본 히타치 사의 부속품을 들여다 1,000대를 시험 조립해 국내 최초로 120리터 냉장고를 생산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는 중소기업 국제냉동이 사와후지전기와 기술 제휴해 초소형(67리터) 엔젤냉장고를 내놓았고, 1968년에는 대한전선이 도시바의 부품을 들여와 183리터 대형 냉장고를 조립 생산했다. 이 시기 대략적인 전국의 냉장고 보급 대수는 대략 7만 6,000대로 그중 국산품이 2만 1,000대, 수입품이 8,000대, 월남 참전 장병이 가져온 휴대품이 2,500대였고 나머지는 미군 피엑스에서 유출된 제품들이었다.
  • 1978년에 냉장고 보급률은 전체 가구의 25.4퍼센트에 달했고, 그 해에 금성사는 40만 대, 삼성전자는 34만 대, 대한전선은 24만 대, 그리고 수입 제품까지 합쳐 도합 103만 4,000대의 냉장고가 각 가정에 설치되었다.
  • 천경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워즈>에 나오는 땅딸이 로보트와 닮은 전기밥솥”을 비롯해 “우주 병기를 방불케 하는 전기 기구들이 긴 줄을 달고 저마다 대기 상태”에 놓인 그 “휑덩그렁한 집안”에서,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모터 소리는 일상의 배경음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 어렵사리 주거 공간에 진입한 만큼 냉장고는 한국적 상황에 맞춰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냉장고의 일차적인 용도는 여름철에 김치를 보관하는 저장고였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주부들은 여름철에 자주 김치를 담가야만 했지만, 냉장고를 사용한 뒤로 쉰 김치에 대한 걱정도 덜고 김치 담기의 번거로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싼 전기 요금 때문에 여름을 제외한 기간에는 냉장고 전원을 차단한 채 보관장이나 장식품으로 사용했다. 특히 당시 주부들은 거의 매일 시장에 들러 장을 보았기 때문에 음식 재료를 장기간 냉장 보관할 필요가 없었다.
  • 국산 가전제품의 생산은 상당 부분 일본 기업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서 이뤄졌다. 말이 기술 제휴이지 기술 역량이나 생산 설비가 전무한 상황이어서 실제로는 수입 부품들을 조립하는 데 그치거나 아예 제품의 금형 자체를 들여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국내 기업에 의해 최초로 생산된 텔레비전은 1966년에 금성사가 히타치 사와의 기술 제휴로 제작한 19인치 텔레비전이었다.
  • 시집가는 처녀들이 혼수를 장만하는 데도 장롱 다음으로 인기를 누린 것이 텔레비전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변모하자 생산업체들은 점차 수입 부품을 조립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주거 공간의 맥락을 고려해 자체 모델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 196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가정 대부분은 중상류층 이상이라서 입식 생활에 토대를 둔 일본 모델을 그대로 생산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 계층의 경우 대부분 고급 주택의 응접실에서 소파나 의자에 앉아 시청했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다리 높이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가정으로 보급이 확대되자 텔레비전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좌식 생활에 맞춰 수정될 필요가 있었다. “안방 극장”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대다수 일반 가정에서 텔레비전의 안식처는 안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텔레비전 다리의 높이는 아랫목에 앉아 있는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 낮아져야 했다.
  • 이와 더불어 과시적 오브제로서의 특성도 강화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도 심하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고 주변 사물들과 어울릴 수 있는 형태, 이 모순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외관에 목재를 사용하여 가구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려한 현대 가구의 멋”을 지닌 고급스러운 가전제품의 이미지가 텔레비전 디자인의 요체가 되었다.
  • 가전업체들은 다리를 떼어낸 박스형 텔레비전을 주력으로 내세우면서 여기에 기존의 가구 형태 텔레비전을 연상시키는 전용 붙박이장을 끼워서 판매했다. 이는 아파트와 단독 주택이라는 이원화된 시장 상황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텔레비전의 위치를 고려해서 제작된 거실 장식장들도 등장했다.
  • 외제 세탁기가 국내 시장에 선보인 것은 196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후 1968년에 금성사가 일본 히타치 사와 기술 제휴하며 최초로 국산 세탁기를 생산했고, 1975년에는 삼성전자와 대한전선이 세탁기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가전업체들 간의 본격적인 판매전이 벌어졌다. 라디오, 선풍기, 텔레비전, 냉장고 등이 차례대로 가전 산업의 성장 동력의 역할을 해왔으나 1970년대 후반에는 그 수요가 포화 상태에 접어들어 성장이 둔화되거나 정체되었다. 이에 반해 1979년에 보급률이 11.4퍼센트에 불과했던 세탁기는 이제 막 본격적인 성장기로 접어든 제품군으로 가전업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 기존의 수동식 세탁기는 세탁조와 탈수조가 분리되어 있어서 세탁하면서 주부가 빨랫감을 직접 옮
  • 겨야 해서 불편했다. 그러나 전자동 세탁기는 수동식과는 달리 세탁조 자체가 탈수조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세탁, 헹굼, 탈수의 모든 과정이 자동 타이머에 의해 일괄적으로 처리되었다.
  • 신제품 개발에도 불구하고 세탁기가 보급되는 데는 큰 걸림돌이 있었다. 기존의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세탁기를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특히 물을 받기 쉬우면서도 습기가 적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세탁기의 관리 요령을 충족시키는 곳을 기존의 주거 공간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 주택에서는 옥외에 설치해 사용하지 않을 때는 커버를 씌워두기도 했고, 나무 받침 같은 것을 바닥에 깔고 욕실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는 배수구가 있는 베란다의 한쪽 구석에 놓기도 했다. 그러나 세탁기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아파트에 세탁기의 자리를 감안한 공간들이 생겨났다. 새로 생긴 다용도실이나 넓어진 화장실이 그것이었다.
  • 소설가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프로야구 원년의 팀 순위에 빗대어 1980년대 중산층의 출현에 대해 이야기한다.   6위 삼미 슈퍼스타즈: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 1위 OB 베어즈: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 박민규에 따르면 3위 MBC 청룡과 4위 해태 타이거즈, 이 중위권의 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용어가 바로 중산층이다. 이 단어는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 “파워풀한” 주문으로 깊이 각인되어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중산층의 세계에서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으며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는” 야구는 평범한 야구라기보다는 수치와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못해도 중간은 간다며 남들만큼 평범하게 살려면,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결코 평범해서는 안 된다. 프로야구 팀에게 5할 대의 승률이 남들만큼 평범하게 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의 징표였다면, 중산층에게는 아파트의 평수가 그와 같은 척도의 구실을 했다.
  • 1970년대 후반 이후 강남에 대규모로 건설된 중형 평형대의 아파트들은 중산층이 자신의 ‘평범치 않은 평범함’을 확인하는 주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 한강맨션이나 여의도 아파트촌이 서울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이 기존의 계층 질서를 확대해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면, 대다수의 강남 아파트 단지들은 서울로 올라와 대학 교육을 받은 지방
  • 출신의 젊은 세대들이 경제 성장으로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고 내 집 마련과 함께 신흥 중산층으로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 결과적으로 토지 구획 정리의 불도저가 강남 구릉지에 잔존하던 농경 사회의 흔적을 말끔히 쓸어낸 자리에 솟아오른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은 “영동적인 것”이라는 “평범치 않지만 평범한” 중산층 문화를 창출해냈다.
  • 중앙일보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생활 수준의 정도를 묻는 질문에 “보통이다”라고 답변한 사람이 1982년에는 36퍼센트, 1983년 39.1퍼센트, 1984년 42.6퍼센트를 거쳐, 1985년에는 57.7퍼센트에 도달했다. 실질소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득 수준이 향상되어 중산층 의식은 서울과 수도권 전역의 아파트촌을 근거지로 삼아 급격한 증가 곡선을 그리며 확대되었다.
  • 그리하여 민주화의 거센 물결 속에 거의 16년 만에 직선제로 시행된 198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통 사람들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군인 출신의 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 이런 가구들이 중소 평형의 아파트에 들어갈 경우 사람이 아니라 가구들이 비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기 마련이었지만, 평형대가 허용하는 욕망의 임계치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주부들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애써서 추하게 망치는” 악취미의 일종으로 보이기 일쑤였다.
  • 19세기 말 유럽 아파트 베란다의 철 기둥들이 식물성의 아르누보 양식으로 치장되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식물을 장식의 어휘로 채택한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식물성은 여성성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베란다와 거실에서의 화초 가꾸기는 1970년대의 꽃꽂이 유행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이렇게 갖가지 유행들이 불균질하게 실내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며 아파트 생활의 인위적 면모를 조금이라도 중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사이, 실내 공간도 점차 삶의 규모에 걸맞은 제 나름의 질서를 마련해갔다. 특히 중소형 아파트의 경우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적은 수의 가구만을 단순하게 배열해 장식 효과를 내는 방법이 많이 활용되었다. 인테리어 지침서의 진단에 따르면 “아무리 훌륭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좋은 가구일지라도 중심을 흐리게 할 정도로 너무 많이 늘어놓으면” 산만한 느낌만 가중시킬 뿐이며, 다양한 디자인이 배치되어 장식성이 너무 강조되면 실내 전체가 조잡해질 우려가 있기 때
  • 이렇게 AV 시스템이 거실을 극장의 공간으로 꾸미는 중심축으로 자리하자, 그 주변의 가구와 사물들 역시 장식 없는 단순한 형태로 변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젊은 주부들 사이에서 군더더기 없는 기능적인 형태의 원목 가구들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 원목 가구와 함께 “맑고 깨끗한 광택, 간결한 디자인”의 앞선 감각을 내세운 하이그로시 가구도 신혼부부용 패션 가구로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가구 유행의 공통점은, 주부들이 개별 가구를 강조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수납 양이 많은 가구를 선택해 실내에 둘 가구 수를 최소화하고 다른 사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데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 “유리란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 좁은 공간을 넓고 시원하게 해주어”
  • 부엌 가구업체들은 198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아파트의 시장 규모가 커지자, 기존의 ‘블록 키친’의 개념에서 벗어나 ‘제2의 거실로서의 부엌’을 강조하는 ‘시스템키친’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금속 특유의 재질과 광택 때문에 색채와 질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단점을 지닌 스테인리스 상판의 용도 폭이 좁아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을 주는 스테인리스 상판은 개수 부위에만 사용되었고, 다양한 색상과 질감이 가능하도록 특수 표면 처리된 멜라민 상판으로 대체되었다
  • 대형 아파트의 경우 시스템키친의 도입으로 부엌과 식당을 분리했던 벽을 완전히 헐어내 두 공간을 합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본래 부엌과 식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터져 있으면 실내에 음식 냄새를 풍길 수 있다는 것, 방문객이 부엌 세간을 다 들여다봐 미관상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부엌은 식모의 공간이라는 것 등이 두 공간이 분리된 이유였다. 그러나 점차 식모가 사라지고 거실 공간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시스템키친이 자리를 잡자 이 두 공간의 분리는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 소형 평형대의 경우 좁은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거실과 부엌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렇게 거실 공간과 함께 부엌이 실내의 전면에 나서게 되자 부엌 가구는 한때 안방에서 광휘를 뽐내던 자개장롱의 역할을 대신한다. 아파트 단지 내부의 주부들 간에 부엌 꾸미기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되풀이되었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자동차를 사면 아내는 부엌 가구를 새로 마련하는 식의 성별 간 소비의 균형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다.
  • 한편 1980년대 주방용 가전제품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히트 상품 중 하나는 일제 코끼리 밥솥이었다. 당시 국내 가전업체들이 내놓은 전기밥솥은 밥맛이 그리 좋지 못하고 보온 시 밥에서 냄새가 나기도 해서 주부들에게 그리 인기가 높지 못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받은 것이 바로 일제 코끼리 밥솥이었다. 당시 일본 가전제품들은 수입 규제로 인해 일반 주부들이 구하기 그리 쉽지 않았는데, 이 코끼리 밥솥만큼은 일본 여행객이나 보따리 행상, 밀수업자들의 손을 통해 국내로 반입되어 중산층 주부들에게 뛰어난 성능을 갖춘 매혹적인 사물로 큰 인기를 누렸다
  • 입식 부엌을 뒤이은 시스템키친과 주방용 가전제품의 등장으로 주부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가사 노동의 하중은 한결 가벼워진 듯 보였다. 어느 소설가가 약간 과장된 어조로 “마루보다 부엌이 한 단계 낮았던 우리의 전통적인 가옥 구조를 생각할 때” 마루와 같은 평면 위에 놓는 부엌의 입식화는 “한국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향상을 보여주는 상승 수치가 아닐까”라고 자문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 작가가 보기에 이 상승의 정점은 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이러한 추세를 고스란히 반영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 『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입식 부엌 보급률은 대도시 18.3퍼센트, 중소도시 7.5퍼센트, 군 3.7퍼센트에 머물렀고, 가스레인지는 1986년까지 300여 만 대가 보급되었지만 이는 전체 가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수치였다.
  • 기존의 주거 공간에서 안방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일상의 중심이었다. 부부의 취침과 휴식이 이뤄지는 내밀한 공간인 동시에 가족의 식사, 외부인의 응접, 텔레비전 시청 등을 수행하는 가족 공통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이와 같은 기능의 상당 부분을 거실과 식당에 양도하고, 안방을 부부 전용의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 1970년대 후반부터 40평형 이상의 중대형 아파트에서는 부부 침실이 안방과 침실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안방의 전통적 기능을 유지함과 동시에 부부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절충적인 해결안이었다.
  • 안방에 놓인 사물의 질서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했다. 중소 평형대 아파트의 경우 침실 공간을 놓고 장롱과 침대가 경합
  • 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롱은 원래 신부 가족이 준비하는 혼수용품으로, 결혼 이후의 행복한 가정 생활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가족의 계급적 지위를 드러내 보이는 전시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족 공동 공간으로서의 안방의 주요 기능이 거실로 이전되고 침실이 부부 간의 내밀한 공간으로 봉인되자, 장롱이 지녔던 상징적 의미와 전시적 가치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미 침실은 타인의 시선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그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덩치 큰 장롱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반해 침대는 서구적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부애의 로망스를 극화하는 무대로 의미화되었다.
  • 실제로 아파트로 새롭게 이주하던 가족들이 장롱을 가장 처치 곤란한 물건으로 느꼈던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었다. 한때 가구의 대명사였던 장롱은 이 다툼에서 패퇴한 이후 예전처럼 커다랗고 웅장한 모양보다는 사용하기 편리한 기능적인 스타일로 변모했다. 침대 중심의 공간에서 이불장은 작아졌고 수납 공간은 넓어졌으며 점차 붙박이장이 대세를 장악해나갔다.
  •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자 가족끼리 자가용을 몰고 야외로 나가 외식을 즐기는 일이 일상 문화의 한 단면으로 자리 잡았다.
  • 갈빗집은 “70년대의 경제성장의 부가 중산층의 어느 수준까지 분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동 문화”의 한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 600여 석의 좌석과 150여 명의 종업원, 차량 100여 대를 세워둘 수 있는 주차 공간을 완비한 이 “가든식” 갈빗집들은 초대형의 규모뿐만 아니라 황금빛 잉어가 노니는 연못, 인공 폭포와 물레방아, 무지개 모양의 구름다리와 정자 등으로 독특하게 연출된 전원의 분위기로 아파트 단지의 가족들을 유혹했다.
  • 이와 같이 연출된 인공의 자연은 전원의 삶에 대한 향수를 기묘한 방식으로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린 인테리어”와 짝을 이루고 있었고, “고급하다”라고 가정된 국적 불명의 이국 문화와 전통 문화가 기형적으로 혼융됨으로써 키치들을 양산해냈다. 그러나 이런 관점과 상관없이 가든식 갈빗집들은 “아파트에서 자란 소년들”에게 “동화 속에 나오는 궁궐에 초대받은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해서, 어린이 놀이터에선 갈빗집에 자주 가는 꼬마가 가장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 갈빗집과 함께 구도심의 빌딩가와 강남과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패스트푸드점들이 속속 문을 열기 시작했다.
  • 1979년 10월 롯데백화점 개장과 동시에 첫 매장을 열었던 롯데리아
  •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부도심의 대형 아파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쇼핑센터와 백화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압구정동의 한양쇼핑센터(1979), 반포의 뉴코아백화점(1980), 여의도의 여의도백화점(1983), 영등포의 신세계백화점(1984),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1985), 삼성동의 현대백화점(1988) 등이 이 시기에 개장한 매장들이었다.
  • 한편 각종 문화 시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강남 지역은 서울 인구의 절반가량이 몰려 있으면서도 “환락과 유흥만이 흥청거릴 뿐 문화의 불모지”로 많은 비판을 받아오던 터였다. 1980년대 초반에 압구정동 일대에 고급 화랑이 하나둘씩 개장한 것을 시작으로 2호선 개통 이후 강남역과 역삼역 근처에 본격적으로 문화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강남역에 동아극장이 개봉관으로 문을 열었다. 한편 잠실의 석촌 호수 공원에 설립된 서울 놀이마당과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등도 전통 예술 공연장과 교육장으로 큰 몫을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잠실의 롯데월드가 “서울의 또 다른 명소”, “꿈의 놀이동산”, “잠실벌의 소도시”, “잠실벌 유통의 새물결”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이는 중산층 여가 문화의 1980년대적 완결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의 두 배에 달하는 3만 8,000평 대지 면적에, 장충체육관의 60배인 17만 5,000평의 연건평의
  • 하는 롯데월드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호텔 롯데월드, 롯데백화점 잠실점, 새나라슈퍼백화점, 쇼핑몰, 민속관, 면세점, 롯데월드 플라자, 스포츠센터, 롯데월드 어드벤처 등을 순차적으로 개장하면서, 자칭 “관광, 쇼핑, 문화, 레저, 스포츠 등 현대인의 다양한 욕구를 한곳에서 만족시켜주는 21세기 최첨단 생활 공간”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 신도시 분당의 역사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 3개월 뒤,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 당시 공약으로 내걸었던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서울의 주택수가 160만 호였고 전국의 주택수가 700만 호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200만 호 건설은 상상을 초월하는 허황된 목표치였다.
  • 1989년 4월에 정부는 분당과 일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의 청사진을 발표함으로써 200만 호 건설을 본격화했다. 정부가 구호로 내건 “꿈의 신도시”의 대열에는 이미 계획이 추진 중이던 안양의 평촌, 부천의 중동, 군포의 산본도 끼어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 분당에 9만 7,500호, 일산에 6만 9,000호, 중동, 평촌, 산본에는 각각 4만 5,000호 씩 총 29만 4,000호의 아파트와 주택을 전체 면적 약 1,500만 평의 대지 위에 새로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5개의 신도시에는 지리적 여건에 맞춰 개별적으로 특성화되었다. 분당은 서울 지역의 정보 산업, 서비스업, 공공 기관을 유치함으로써 강남의 중산층 인구를 유인하는 자족형 도시로, 일산은 서울 강서북 인구를 유인하는 문화 예술 중심의 교외 전원도시로, 평촌과 산본은 각각 안양시와 군포시의 신 업무 중심 지역이자 서울-과천-수원을 잇는 교외 주거지로, 그리고 중동은 부천의 신 업무 중심 지역이자
  • 이런 상황에서 토목・건설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는 주택난 해소와 경기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손쉬운 해결책 중 하나였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 호 건설뿐만 아니라 인천 신공항 건설, 경부선 고속철
  • 사업 등 굵직굵직한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90년부터 곧바로 가시화되어, 그 해 국내 건설업체들은 사상 최고의 이익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전년대비 국내 공사액 증가율도 43.5퍼센트, 그 다음해에는 47.2퍼센트 등 매년 최고치를 갱신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1년 국내 총 공사액은 38조 원을 넘어섰다.
  • 노태우 정부가 취한 5개 신도시 건설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에 택지개발촉진법의 개정으로 제도화된 민관합동개발방식이 그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적 주체에겐 택지 개발이라는 제한된 역할만이 주어졌고, 그 택지를 구입해 개별 단지를 건설하는 것은 민간업체의 소관이었다.
  • 개발을 둘러싼 역학 구도가 변화하자 건설업체들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 공개 기간 동안 총 8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고, 청약이 끝난 뒤에도 분당의 모델하우스로 향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서울이나 인근 지역 나들이에 나선 지방의 관광버스들이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즉석에서 일정을 변경해 모델하우스에 방문하”기도 했고, 아예 여행 코스에 이곳을 넣어 단체로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아파트 값 급상승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중대형 아파트였습니다. 중대형 아파트의 공급이 사실상 1987년 5월 올림픽패밀리아파트를 끝으로 해서 서울에는 없었어요. 공급은 없는데 수요는 증대되니까 값이 오른 겁니다. 강남 지역 아파트가 한 달에 평당 50만 원에서 100만 원 이런 식으로 오르니까, 그것이 전부 강북으로 이어졌고, 지방으로 확산되고 했습
  • 니다. 그래서 분당이나 일산을 건설할 때 정부에서는 중대형 아파트의 가격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가 있느냐 이것이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큰 평수가 45퍼센트, 25.7평 이하가 55퍼센트로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아무리 중대형 아파트의 공급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 하더라도 여러 계층이 골고루 함께 사는 것이 정부가 의도해서 만드는 도시의 모습이 아니냐 해서 마지막에 확정된 아파트의 건설 호수 8만 5,000호 중에 한 3만 호가 임대 주택 포함해서 18평 이하예요. 그것이 한 30퍼센트 이상이 됩니다. 그리고 32퍼센트가 18평에서 25.7평 이하입니다.”
  • 결국 아파트 가격이 떨어진 것은 주택 200만 호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임금 상승이나 자재 파동과 같은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훗날 역사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책이란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종 선택하는 지도자가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당시에도 부동산 투기를 그냥 두느냐, 아니면 부작용을 감안해서라도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밀어붙이느냐 하는 기로에서, 밀어붙이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분당의 상업・유통 시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단지마다 슈퍼마켓 수준의 소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주부들 상당수는 하루 몇 차례씩 왕복하는 강남 지역 백화점의 셔틀버스를 이용해 장을 보러 잠실로 나가거나 농수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가락동 시장으로 향하곤 했다.
  •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곧 변했다. 7년여의 시간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가 1993년 12월에 최종 타결되자, 신도시의 소비 경관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들은 1996년으로 예정된 유통 시장의 완전 개방에 대처하기 위해 백화점의 지점 수를 늘리고 할인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국적 유통업체들이 대거 몰려오기에 앞서 부지를 선점한다는 차원에서 신속하게 신도시의 상업 용지를 매입했다.
  • 2001년 6월 30일에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 시행됨에 따라, 유통업체의 셔틀버스 운행은 중지되었다.
  • 본래 정부 주도의 분양가 규제 정책은 1977년 당시 박정희 정권이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지원하기 위한 주택 가격 억제책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이후 1995년에 수도권 이외 지역을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분양가가 자율화되었지만, 수도권 지역의 분양가 규제는 여전히 정부가 주택 시장을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정책 수단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맞이해 부침을 거듭하던 건설업계의 요구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정부는 결국 1998년 2월 1일,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 1998년 5월, 이 업체는 용인 수지 지구의 LG빌리지를 분양하면서 분양가 자율화 시대에 걸맞은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첫째, 소형 평형 의무 건축 비율이 폐지된 후 처음 선보이는 아파트 단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60평형대 이상의 초대형 평형대로만 단지를 구성했다. 61평형(370가구), 72평형(388가구), 81평형(302가구), 91평형(104가구) 등 총 1,644가구였고, 229퍼센트의 낮은 용적률과 32.8퍼센트의 높은 녹지 비율로 평당 분양가는 530만 원대였다. 둘째, “불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 부유층 수요가 서울 강남 지역에 풍부하다는
  • 시장 분석”을 바탕으로, 잠재 고객을 집중 공략하는 틈새 전략을 취했다. 실제로 “고소득층과 노후 안정층, 독립된 삶의 공간을 찾는 전문가 계층”을 유인하기 위해 서초구와 강남구의 아파트 단지에서 대대적인 분양 홍보를 진행했다. LG건설의 전략은 건설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IMF 외환위기 이후 아파트 분양 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무순위 접수 개시 1주일 만에 분양이 완료되었다. 당시 아파트 평균 분양률은 10퍼센트대까지 떨어진 상태였던 점을 감안해보면, 이 아파트의 분양 성공은 시장의 국면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 들뜬 축제의 뒷마무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 주상복합아파트 열풍의 출발점은 대림산업이 1997년 7월에 분양했던 강남구 도곡동의 대림 아크로빌이었다. 46층짜리 아파트 2개 동과 오피스텔 1개 동에 주상복합 개념을 적용해 분양가와 청약 자격에 제한이 없는 임의 분양의 형식을 취했고, 이를 통해 평당 분양가 1,100~1,400만 원 선으로 책정할 수 있었다.
  • 하지만 IMF 외환위기로 인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기
  • 위해서 2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다시 주상복합아파트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그 해 2월부터 삼성물산은 강남구 도곡동 1만 평에 지상 66층짜리 1개 동, 55층짜리 2개 동 규모로 구성된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에 대한 예약 판매제를 실시했다.
  • 본래 도곡동 부지는 102층짜리 초고층 사옥이 지어지기로 했던 곳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그룹 명예를 걸고 세계 최고 명품 아파트를 지으라”라고 지시했다.
  • 건설사들은 재건축 사업을 계기로 삼아 아파트의 본적지인 강남으로 회귀한 뒤 단지 구성, 조경 설계, 건물 형태, 평면 계획의 측면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아파트를 선보였다. 분양가 자율화 이후 대형 평형대 아파트와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진행되었던 포스트 강남의 실험 성과들이 집약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