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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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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네번째 책. 문화비평가로 상징성 있는 논의를 지속해온 이택광 저자가 2004년도부터 2010년도까지 한국 사회의 숨겨진 이면 속에서 문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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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ti-intellectualism’으로 표기하는 영어를 한국어로 ‘반지식인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라고 옮기는 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합적인 의미 때문이다. 반
  •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의 책 『미국인의 삶에 나타나는 반지성주의Anti 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는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기독교 복음주의에서 발원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 메시아주의적 성격이 강한 ‘민
  • ‘민족’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한국에 유입한 장본인이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였고, 1970년대 이후 이른바 파시즘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다분히 기독교적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런 유사성의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다.
  • 주이상스
  • 금지된 쾌락, 쾌락 원칙을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향락의 체험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게 바
  • 바로 한국의 공동체 의식이고,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건 분명 착시지만, 동시에 엄연한 ‘현실’이다.
  • ‘오브제 아object
  • a’
  •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라는 기표는 부재의 자
  •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일시적 대상일 뿐이고, 반지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숭고 대상을 소유할 수 없는 ‘구조’에서, 이 불가능성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합리적 설명’일 뿐이다.
  • 이런 어법의 반복은 사안과 맥락에
  •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 ‘먹고사니즘’
  • ‘오직 경제가 제일’이라는 이런 믿
  • 믿음은 지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습득한 경험의 산물이다.
  •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이 불평등한 구조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내부 경쟁의 구조야말로 고통스러운 향락의 반복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향락의 지속을 방해하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다.
  • 한국 사회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반지성주의라는 건 특정 세력이 드러내는 불특정 지식인에 대한
  • 반감과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꿈마저 상실한 한국 사회의 생존 논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 이무기가 용이 되는 한국 전설을 소재로 미국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싸움을 그린 2007년 심형래 감독의 판타지 액션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수출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며 특수효과로 주목받아 16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동원했으나, 얼마 못 가 작품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평에 비해 예매율이
  • 높게 나오자 한국 영화계의 관행인 ‘애국주의 마케팅’ 문제가 부각되었으며, 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진중권의 발언이 파장을 몰고 오기도 했다.
  •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라는 유
  •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의 말을 빌려온다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부정성에 거주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절대적 부정성이라는 유토피아적 충동을 기입하는 것이다.
  • 김일성의 북한이 주창한 ‘주체사상’이나 박정희의 남한이 추진한 ‘토착적 민주주의’는 이런 아이러니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맥락 없는 이념의 이식은 필연적으로 기원적 맥락에 근거한 비판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남북의 체제는 이와 같은 구조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 곧 근대화이고 선진화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추기경이 남긴 말은 근대적 공동체라면 너무도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상식적인 발언에 대한 뜨거운 호응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 이런 상식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아프게 증언한다.
  • 추기경이 보수로 바뀌었다기보다 한국 사회가 김수환 추기경 식으로 ‘보수화’한 것이라는 뜻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우선적인 것은 민주화 자체라기보다 양심과 도덕이었다. 그 양심과 도덕의 기준이 가톨릭주의였다.
  • 바티칸 공의회
  • 공공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내재적인 것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원래 서양에서도 공적인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관
  • 이해관계를 공동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합의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
  • 중요한 것은 ‘나의 잔치’를 ‘정치(인)’에게 빼앗긴다는 생각 자체다. 한국의 구성원들에게 정치
  • 정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이것이다.
  • 한국에 존경받는 정치인이 없다고 개탄할 것이 아니라 진짜 정치부터 하는 게 중요하다.
  • “정치인 없는 시민의 일상”
  • 한국에서 이런 ‘시민의 일상’이란 정치 혐오에 동반되는 ‘먹고사니즘’이었다.
  •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오직 경제만을 외치며 집권할 수 있었던 토대를 노무현 정부가 마련해주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 18세기 자본주의 상승 단계를 밀고 갔던 것이 천재 신화였다면, 21세기 자본주의를 밀고 가는 것은 부자 신화라고 할 만하다.
  • 모든 이데올로기가 ‘주입’의 과정을 거쳐 주체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할 때,
  • 우리가 지금 대면하는 자유주의의 강제성은 불가항력적인 폭력이기도 하다. 한때 구조의 문제로 치부되어 제도 개선과 사회 변혁으로 급회전이 걸렸던 문제들이 이제는 한낱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 문제로 범주 전환되어 감행되고 있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거리에 즐비한 홈리스들은 선량한 시민을 잘살지 못하게 만든 사회구조의 탓이라기보다 그 당사자들의 무능력과 게으름으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이런 범주 전환의 결과다.
  • 리얼리티가 은폐된 그 자리에서 상징이 탄생하는 것이니만큼 지금 우리 앞에 낙인처럼 선명하게 찍힌 ‘부자’는 텅 빈 이미지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형식을 내용의 논리로 봤던 루카치의 전례를 따라, 부자 신드롬이라는 중심이 비어 있는 형식을 통해 거기에 새겨진 리얼리티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 앞에 출현하고 있는 부자 이미지는 새로운 차원에서 리얼리티를 상징화하고 있다.
  • 부자 신드롬의 원인을 단순하게 말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판단으로 쉽사리 직행하는 것
  • 것은 현실의 총체성을 달성하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궁여지책이기도 하다. 현실을 판단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바로 윤리적으로 어떤 대상을 나쁘다 좋다 이렇게 규정짓는 것이다.
  •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치로 위장한 거대한 형이상학에 불과한 것인데, 이런 맥락에서 부자 신드롬 역시 계급적 대립의 리얼리티를 은폐하는 판타지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판타지는 현실의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려는 유토피아 충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 부자 신드롬을 통해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 모두 부자가 되는 사회보다는 가난하지만 모두 행복한 사회가 분명 더 실현 가능한 일임에도 부자의 판타지는 오늘도 리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소거시키기 위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학생과 시민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비폭력 평화 시위로, 첫 집회 때 구성원의 60퍼센트 이상이 여고생들이었으나,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면서 교육 문제, 대운하·공기업 민영화 반대 및 정권 퇴진 등으로 점차 쟁점이 확대되었다. 5월 2일 첫 집회 후 2개월간 연일 수백~수십만 명이 참가, 6월 10일 6·10 민주화 항쟁 100만 촛불 대행진을 정점으로 주말마다 계속되었다. 시민들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자녀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참가도 많았으며, ‘문화제’적인 모습을 띠기도 했다. 2008년의 촛불 시위는 ‘정
  • ‘정치권과 시민 간의 의사소통’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민주주의 학습의 장’의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지만, 비인터넷 계층의 거리감, 무분별한 허위 사실 유포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 2005년 10월 27일 프랑스에서 대도시 외곽에 사는 이주민들이 오랫동안 만연된 차별 대우와 경제적 빈곤 등을 이유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사건. 아랍계 청년 2명의 사망을 계기로 전국 274개의 ‘방리유’에 사는 이주민들이 그간의 정책에 분노하며 화염병과 돌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전국 차량 1만여 대와 건물 300여 채가 불탔으며, 3,000여 명이 체포됐다. 이후 한 달여 간 프랑스 전역이 방화와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프랑스
  • 프랑스의 통합적 이민정책의 실패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 거리는 다시 일상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 촛불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런 말은 ‘약속’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까운 것이다. 약속하는 자가 없는 기대감은 사실
  • 대상 없는 욕망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있으나 마나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설령 이런 기대의 예언을 충족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정치적인 기획’이라고 보기 어렵다.
  • 중요한 것은 촛불의 출현 과정이다. 운동으로서 촛불은 실패했지만, 상징으로서 촛불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타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탈정치화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 할 수 있는데, 촛불은 이 시대의 정체에 대한 명확한 예시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중요한 각성을 촛불은 제공했던 것이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환경에 대한 낯선 풍경을 보여줬다는 점, 그리고 그 풍경이 실상은 우리 내면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드러냈다는 점에서 촛불은 지금까지 발생했던 정치적 사건들과 다른 무엇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것은 쇠고기 파동으
  • 파동으로 돌출했다기보다, 훨씬 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형이 촛불의 파도를 밀고 왔다고 하겠다.
  • 프랑스 폭동은 자신들에게 불평등을 강요하는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이나 반대였다기보다 그 체제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줄 것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이런 행위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라는 전체에 기여하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기도 한 것이다.
  • 정부가 미리미리 알아서 촛불
  • 촛불을 든 시민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려서 공동체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정부는 더욱 많은 ‘권력’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래서 시민들의 제 몫을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런 인식에 깔려 있다. 이게 바로 촛불의 시민들이 그토록 원했던 ‘소통’이지 않을까?
  • “지금 자율학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정부가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어린 우리들이 나섰다”라고 발언하는 10대들이나, “원래 정치 같은 것에 관심 없었는데 정부가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집회에 참석했다”라는 20대 직장인 여성들이나, 사실은 강력한 정부 아래에서 다양한 각자의 몫을 지키는 이상적 공동체를 갈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아예 몫이 없는 자라기보다 어느 정도 그 몫을 가진 자일 수밖
  •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탈정치라고 부르는 현상은 일정하게 자기 몫을 가진 자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한 이데올로기다.
  • 결국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서 출발시키는 논리는 이명박으로부터 해결책을 내올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또는 더 효율적인) 이명박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 강력한 이명박의 의미는 공동
  •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자기 몫의 긍지를 되돌려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메시아적 존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실성 없는 기획에서 탈정치성과 무기력한 이데올로기가 발생한다. 이 상황은 정치적 목적의식을 품어줄 수 있는 세계의 소멸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세계의 부재는 대중적 저항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 ‘먹고사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를 곰팡이처럼 뒤덮었다. 이 곰팡이는 아예 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념을 먹고 자랐다. 이데올로기적 존재 기반 자체를 허물어
  • 허물어버리는 자기 해체적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모든 것을 이명박 탓으로 돌리며 타오른 촛불은 ‘이명박인 것과 이명박 아닌 것’이라는 분법을 생산했지만,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구체적인 정치적 대상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든 것을 이명박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정치적인 전략이었다고 볼 수 없다. 그렇게 촛불은 자신의 환상에 도취한 나르시스의 메아리였던 건지도 모른다.  
  • 촛불은 ‘부분 집합’을 셈하고 관리하고 정리하면서 재현하는 국가에게 개별자들 모두를 셈해줄 것을 요청했다. 확실히 이것은 소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는 언제나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알랭 바디우의 주장을 차용한다면, 국가는 “상황상태l’état de la situation”의 사회역사적 양상이다.
  •  상황이 얼어붙은 것이 상황상태다. 상황에서 발생한 공백(공집합)을 고정시키는 것, 여기에서 상황상태가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민
  • 시민사회(운동)가 상황이라면, 국가는 상황상태다. 국가는 원소,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무한성의 체현자인 개인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위나 자질로 규정된 개인을 상대한다. 이렇게 국가는 항상 부분의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 집합’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국민’이라는 일자l’Un로 환원된 무한성으로 국가에서 재현된다. 이 재현에서 개인은 국민으로 빨려 들어가서 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에 개인은 없는 것이다. 있다면 오직 특정 집단, 다시 말해서 부
  • 부분 집합으로 국가와 마주하는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특정한 존재뿐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부분 집합은 항상 공집합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 국가는 이렇게 부분 집합으로 개인들을 재현하면서, 사회라는 기원적 상황에 속해 있는 다수들의 ‘안정’을 보장하고 ‘일자’의 수립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흡사 집합을 구성하는 {1, 2, 3, 4……}라는 특정한 부분 집합만을 우리가 인지하고 그 집합이 포함하
  • 포함하고 있는 공집합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공백은 항상 그 집합 속에 존재한다. 이 공백은 곧 상황상태를 발생시킨 기원적 상황의 흔적이다. 국가라는 상황상태가 흔들릴 때, ‘국민’은 ‘시민’으로 돌아간다.
  • 관리를 통해 중간계급은 부르주아의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이 일체성이 흔들릴 때, 다시 말해서 공백이 다시 방황하기 시작할 때, 국가
  • 국가는 강제를 통해 상황과 상황상태를 분리하려고 한다. 국가는 흔들리는 일자를 최초의 상황에서 분리해서 고정시키려고 하는데 이것이 강제다.
  • 역사적 공산주의의 오류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구조화의 필연성을 체현하고 있는 재현의 재구조화일 뿐이다. 따라서 국가는 누군가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단순하게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장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집단적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장치다. 국가의 목적은 서로 다른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국가는 새로운 질서, 또는 주체의 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기능과 새로운 질서를 강제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주장은 인민 권력을 표현하는 말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주어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국가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 아닌 국가 대한민국에게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를 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이었다.
  • 분명히 촛불은 기존의 운동권에게 낯선 풍경이었다. 지도부가 시위대를 주도하거나 조직할 수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더 나아가서 메가폰을 잡고 ‘운동권스러운’ 분위기만 연출해도 시위대에서 추방당하는 상황은 황당하다는 말밖에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 촛불은 이념적인 구호보다 ‘쾌락’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즐거운 광장’이었다.
  •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들을 촛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쾌락의 평등주의’다. 이 평등주의는 칸트적이라기보다 사드Marquis de
  • Sade적인 ‘억압의 극장화’를 전제한다. 근대적 도덕의 주체를 위해 칸트가 제거해버린 그 주이상스(향유이면서 동시에 향락인 금지된 즐거움)를 끊임없이 요청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쾌락의 평등주의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논리가 만들어낸 평등의 이데올로기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말하듯이, 부자든 가난뱅이든 코카콜라를 마시려면 1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평등을 승인하는 것이 바로 쾌락의 평등주의다.
  • 촛불은 “내 자식에게 병든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라는 중간계급의 이기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국가에게 중간계
  • 중간계급이라는 부분 집합의 공백을 셈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 촛불이라는 중간계급의 판타지에 내재한 역설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을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통해,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에 더욱 충실한 논리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를 ‘무능한 정권’이라고 부르는 그 동기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정부가 주장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의 신자유주의라면, 중간계급은 정치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세계관으로서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으로 인해 현실적 신자유주의의 효과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정치
  • 탈정치화의 실체고, 그 결과가 ‘좌파’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양적 축적이 질적 전환을 이룬다”라는 1980년대식 변증법적 유물론
  • 명박산성을 국가권력으로 보았을 때, 국가를 거부하지 못한 촛불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 촛불은 처음부터 명박산성을 넘어설 수 없는 조건 위에서 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촛불은 명박산성을 넘어갈 수 없는 탈정치성의 상황 자체가
  •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 촛불이 처음부터 탈법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이었다면, 명박산성 앞에서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양적 축적을 통한 질적 전환” 같은 ‘법칙’은 없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이미 구조의 차원에서 단절의 주체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단절의 주체야말로 삶이 곧 죽음인 ‘헐벗은 자’다. 이 부정성의 저항에서 새로운 주체가 나오는 것이다. 촛불은 이런 맥락에서 단절과 부정이라기보다 연속과 긍정의 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 이들은 ‘폭력’을 통해 촛불을 진압한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해 촛불을 소환하고자 했다. 촛불이 명박산성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법의 지배를 인준한 상태에서 촛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나 이명박 정부나 모두 ‘80년 광주’와 같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의 현시를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 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의 점거 농성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
  • 진압작전이 이루어지던 중 화재로 6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참사가 발생한 사건. 사고 당시의 폭력 문제, 용역 직원, 안전 대책, 과잉 진압 여부 등에 대한 논란과 함께 검찰의 수사가 이어졌고, 검찰은 농성자와 용역업체 직원 등 27명을 기소, 경찰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청와대 행정관이 ‘용산 참사 홍보지침 이메일’을 보낸 사실과 발화 지점에 대한 철거민의 진술이 왜곡되었음이 밝혀지면서 검찰 수사에 대한 공정성 의혹이 제기되었다. 같은 해 8월 조합 측이 사망자 1인당 위로금 3억 원씩을 지급하고, 남은 세입자 23가구에게 영업보상금을 150퍼센트로 지급하는 등 합의를 제시했으나, 철거민 측은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장례를 미뤄왔다. 결국 이에 대해
  • 조합과 유가족 간이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합의, 사망자 장례식을 2010년 1월 9일에 치르면서 일단락되었다.
  • 촛불의 어둠이 곧 용산 참사인 것이다.
  • 촛불은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이면서도 협력적인 관계에 대한 전면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
  • 한다면, 탈정치성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시장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중간계급의 역동성’이었다. 시민사회가 중간계급의 상황이라면, 이 상황을 사회역사적으로 고정시켜줄 중간계급의 국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 그래서 중간계급은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지만, 결
  • 결과는 더 참담했다. 촛불은 이런 참담한 결과에 대한 항의였다고 볼 수 있다.
  •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중성국가a neutral state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자율적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도덕체계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중간
  • 중간계급에게 이 중성국가야말로 ‘정상국가’지만, 실제로 중성국가는 국가의 역할을 통해 국가의 존재를 소멸시켜야 하는 자체 모순을 내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소멸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구좌파의 생각과 닮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중간계급에서 이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386세대가 현실의 삶을 구성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지난 과거에 획득했던 1980년대의 경험 사이에서 아무런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 중 하나를 여기에서
  •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 ‘중성국가=정상국가’라는 공식에 따라, 시장 논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고 반시장 논리는 시대착오적이고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 범주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장 논리는 탈권위주의에 대한 지지를 낳았고,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중요한 인식체계를 만들어냈다.
  •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근거한 탈권위주의는, 일상의 권위주의를 용인하면서 상징적 권위주의
  •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기이한 현상을 등장시켰다. 일상의 권위주의는 인맥과 학연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고, 따라서 시장에서 부분 집합의 이해관계를 국가에 관철시키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의 권위주의는 시장 논리의 비판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 중간계급이 추구하는 쾌락의 평등주의는 겉으로 보기에 평등하지만, 구조적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 평등주의는 실재와 조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판타지일 뿐이다. 달리 말한다면,
  • 이 평등주의는 시민사회라는 상황에서 발생한 공집합(공백)을 국가라는 상황상태에 고정시켜서 보이지 않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 공집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셈하기는 공백을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촛불이 발현시킨 중간계급의 쾌락들은 평등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불평등의 구조를 인준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 노동자나 비정규직에 대해, 그리고 용산 참사에 대해 촛불의 평등주의가 침묵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 국가에 대한 한국 중간계급의 사유는 상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래서 중간계급은 국가를 ‘지배계급의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가를 지배계급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가 이미 사회역사적으로 현시된 사물을 다시 현시(재현)한
  • 현시(재현)한다는 것을 강조해서 국가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확보할 수 있다.
  • 정부 여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이런 짓을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긴 것일까? 확실한 것은 하나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가 결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의 이해관계는 자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
  •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은 미디어법을 민생 관련 법안이 아니라고 인정했으면서도 직권 상정이라는 강경수를 두어서 법안을 처리했다.
  • 김 의장은 미디어법을 민생과 관련한 법안이 아니라고 규정하면서 미디어법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다른 민생 법안이 희생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는데, 이런 발화는 그 자체로 자승자박이다.
  • 세 신문사 중에서 중앙일보가 미디어법에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인 까닭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법이 전면
  • 전면에 내세운 ‘시장주의’는 결국 방송 시장에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최적자생존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시장에서 과연 조선일보는 삼성 같은 대기업의 자본력을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이 상황에서 SBS처럼 보도 능력이 떨어지는 지상파 방송이 중앙일보의 보도 방송을 능가할 수 있을까? 바야흐로 공룡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고, 여기에서 공룡들은 서로 싸우다 공멸할 가능성이 더 크다.
  • 부르주아의 이해관계가 관리를 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국가권력을 통해 집행된다면, 그건 ‘거리의 저항’이라는 직접적 힘의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당 정치라는 완충지대를 스스로 사라지게 만든 정치인들은 별것도 아닌 미디어법을 과감하게 통과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치’를 매장해버린 것이다.
  • 편의상 미디어에 관련된 여러 법(방송법, 신
  • 신문법, IPTV법, 정보통신망법, 언론중재법, 디지털전환법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명박 정부가 취임 후 ‘미디어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한동안 끊임없는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 대기업과 일간 신문이 방송사 지분을 소유하는 개정을 주장했으나, 언론의 독과점을 우려한 야당과 진보 세력의 큰 반발을 야기했다. 2009년 7월 3일 세 야당은 헌법재판소에 방송법의 효력정지가처분 및 권한쟁의심판청구를 신청하였으나 기각되었고, 크고 작은 진통 끝에 7월 22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개정안에서 허용된 방송사 지분 한도는 지상파 방송 10퍼센트, 종합편성 채널 30퍼센트, 보도 채널 30퍼센트며 외국인도 종합편성과 보도 채널을 60퍼센트까지 소
  • 소유할 수 있다. 또한 지상파, 종합편성 및 보도 채널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대 지분도 66퍼센트로 상향 조정되었다.
  • 거리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국회의사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끌어들여 해소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기능
  • 4대 개혁 입법
  • 노무현 정부의 재벌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재편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을 위한 재벌 규제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명박 정부의 목적은 이런 기조를 뒤집는 것이었다. 따라서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다른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을 견지하면서도 재벌 정책은 보호주의 방침을 취하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 사회는 원래 소통보다 불통에 근거한다. 이 불통의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제’를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명박 정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앞뒤가 조금 맞지 않는다.
  • 반발이 거세지자 이명박 정부가 이
  • 이른바 ‘서민 행보’를 취하고 민생 해결에 주력하겠다고 정책 기조를 ‘수정’하는 인상을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 또는 독재 정권으로 쉽게 규정하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띌 만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구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순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판단의 문제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이른바 자칭 ‘민주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것인데, 환경운동연합 간부 횡령의혹 사건이나 한국종합예술
  • 한국종합예술학교 문제에서 보여준 ‘언론 플레이’는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결국 동일한 방식의 맞불 대응만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뜻이다.
  •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으로 포장하기에 급급해하기보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누구의 민주주의고, 어떤 민주주의인지를 문제 제기하는 방
  •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약 76일간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사측의 구조조정 단행에 반발해 쌍용자동차의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 이 사건으로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의 지부장을 비롯한 64명의 노조원들이 구속되는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가 비난을 받았고, 이 사태를 촉발한 상하이 자동차 공업 그룹의 ‘먹튀’ 논란이 불거졌으며, 경영 악화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 모든 책임을 근로자들에게만 떠넘겼다는 지적과 함께 노조원들이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노사는 파업 대상자를 중심으로 ‘1년 무급휴직, 영업 전직’ : ‘희망퇴직, 분사’를 4.8 : 5.2로 합의, 향후 생산계획에 따라 현 파업 농성자를 최우선적으로 재고용하기로 하는 협상안을 극적으로 타결했으나, 추후 해결 과제는 남아 있다.
  • 2006년 5월 4일, 경기도 평택 대추리·도두리에 군과 경찰 병력 1만 5,000명이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강제 철거 집행에 투입되면서 반대하는 주민들과 맞섰던 사건. 당시 군사 시설 보호 구역을 설정하기 위해 투입된 군은 윤형 철조망을 설치하고 민간인 출입을 막는 과정에서 반대 시위 집회를 마치고 돌
  • 돌아가는 시민들을 무차별 수색하고 연행했다. 계속되는 공권력의 감시와 수색으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주민들이 속출했다.
  • 이런 논리들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기조는 바로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진보 세력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가리켜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고 시장의 힘을 극대화하는 ‘탈규제’의 경제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패니치Leo Panitch와 코닝스Martijn Konings가 지적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퇴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기능을 통해 새로운 규제를 시장에 강제한다.
  • 이런 규제의 방식은 딱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철이라기보다, 오히려 실용주의적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진보 세력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왜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실용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강렬한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만을 부각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세력의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정부 이래로 한국의 ‘민주 정부’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했다기보다 실용주의적 개혁을 통해
  • 표방했다기보다 실용주의적 개혁을 통해 규제를 재조정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두고 복지정책에 많은 예산을 썼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쌍용자동차의 문제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재현하는 신자유주의와 실제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진리는 이 진실의 배면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것 같다.
  • 폴라니주의
  • 진보 세력의 위기를 낳고 있는 것은 전망의 부재 때문이지 대안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 일부에서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권 또는 파시스트 집단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들이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김 전 대통령이 일궈놓은 ‘절차적 민주주의’ 덕분이었다. ‘평화적 정권 교체’야말로 한국 사회의 정치 상황을 진일보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계기였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 출현은 냉전 시대의 종언을 의미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의 우물에 빠져 있던 한국이라는 ‘섬 사회’를 세계 무대에 데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김대중 정부가 분명히 합리적 보수주의에 근거한 우파 정권이었음에도, 냉전 세력은 이 모든 것을 김대중 개인의 ‘빨갱이 사상’으로 인한 ‘좌경화’로 치부했다.
  •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가속화하면 할수록 진화의 논리는 늙고 병든 것들을 경쟁에서 도태시켜버릴 것이다.
  • 시장 원리를 벗어난, 진화라는 철의 법칙을 뛰어넘는 ‘특권’이 없다면,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 그 대상이 공동체의 윤리에 들어맞지 않거나, 개전의 여지가 없는 악으로 규정되었을 때, 복수는 진정 나의 것으로 승인받는다.
  • 2010년 2월 24일경 김길태라는 30대 남성
  • 이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서 집안에 있던 예비 중학생을 납치·성폭행·살해하고 유기한 사건. 부산에서 실종된 한 여중생이 집 부근의 가정집 물탱크 안에서 나체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세상을 경악시켰으며, 시신에서 성폭행 흔적과 함께 DNA가 검출되면서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그로부터 20일 만인 3월 10일에 검거되었고, 흉악범의 인권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례적으로 얼굴과 신상이 모두 공개되었다. 2010년 6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항소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 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을 때에도 이미 ‘용의자’ 김길태는 더 이상 ‘용의자’가 아닌 의심할 까닭 없는 ‘범인’이었다. 오직 필요한 것은 김길태라는 악의 화신을 처단하는 스펙터클이었다. 중국과 북한의 공개 처형을 비난하던 국가에서 똑같이 벌어졌던 이 외설적 장면은 ‘공공의 적’은 법보다 주먹을 통해 직접 제거해야 한다는 세속의 믿음을 아무런 의심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 당시 초동 수사에서 보여준 실수를
  • 만회하기 위해 경찰이 택한 방법은 여론 재판이었다.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경찰은 그동안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합의를 깨고 김길태의 얼굴을 공개했다. 몰려든 군중을 막지도 않았다. 한 시민이 김길태의 머리를 때리는 촌극은 그래서 벌어졌다. 언론은 흉악범에 대한 공분을 여과 없이 전했고, 상황은 경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결국 이런 상황 반전은 경찰의 판단도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경찰의 중립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
  •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은 유리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판단하면 경찰도 여론에 좌지우지 당하는 집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줄 수밖에 없다.
  •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언론도 한몫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자 발찌 제도를 철저하게 실행하지 않은 것이나, 흉악범을 사형시키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불만이 향하는 지점은 ‘인권’이었다. 한마디로 거추장스러운 인권 문제가 발목을 잡아서 흉
  • 흉악 범죄가 다시 일어났다는 투다.
  • 교회 앞에 버려져서 지금 부모에게 입양되었다는 김길태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불행한 가족사가 흉악범을 낳는다’는 고전적인 이데올로기를 재확인시킬 뿐이다.
  • 어느덧 상황은 경찰의 손을 떠났다. 사회 구성원 모두 김길태가 범인이라
  • 는 것을 ‘이미’ 확정해버린 마당에 경찰은 자신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이를 증명할 근거를 찾아내기에 바빴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결과를 초래한 당사자는 누구도 아닌 경찰 자신이다. 결론을 미리 내리고 증명할 방법을 찾는 이상한 전도 현상이 이 사건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 경찰과 언론이 부추기고 있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위생학적인 공포심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친북인사명단을 발표한 국가정상위원회라는 단체의 논리도 이
  • 이렇다.
  • 이런 발상은 궁극적으로 몸에 침투한 병원균을 제거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김길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분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정서도 이와 같은 믿음에서 발생한 것이다.
  • 경찰에게 끌려 나와 군중들에 둘러싸인 김길태의 모습을 보면서 공개 처형을 통해 공동체의 분열을 무마하고
  • 무마하고자 했던 중세의 풍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직도 우리는 전근대적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진 교훈은 무엇일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성폭행 전과자에게 전자 발찌를 채워야 한다는 걸까, 아니면 흉악범들을 완전히 세상에서 제거해버릴 사형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걸까? 과연 이렇게 제도를 개선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한다면 이런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 지금은 관심이 김길태라는 ‘파렴치한 악인’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결국 이 사건의 피해자는 덕포동에 살고 있던 한 여중생이었다. 일부 언론은 여중생의 죽음에 호들갑을 떨 뿐, 정작 중요한 생전의 여중생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여중생이 어떻게 살다가 변을 당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마치 미국 범죄드라마처럼, 이 사건의 주인
  • 주인공은 김길태라는 잔인한 ‘사이코패스’와 이를 멋지게 요리하는 CSI와 프로파일러일 뿐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던 것들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관객들은 어떤 가상의 드라마보다도 이번 사건에서 강렬한 박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 메모ㅡㅡ 진짜 이건 개 오바ㅡㅡ
  • 우생학 담론이 경쟁을 조장한다, 이런 뜻이 아니고, 일종의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아서 경쟁을 강화하는 것을 보증해준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경쟁주의=과학적으로 증명된 가설’이라는 대중적 믿음을 유포하기 위해 우생학적 논리가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부터 이런 생각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으니 연원
  • 연원은 꽤 오래되었다. 한국이 약소국이라서 강대국에게 주권을 빼앗겼다는 논리는 우생학적 논리가 민족주의와 결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 페어플레이라는 건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즐기자는 것이지만, 사람
  • 사람들은 대개 페어플레이보다 막장 투혼에서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얻기 마련이다.
  • 기본적으로 경쟁은 비슷한 능력을 전제할 경우에 가능하다. 아예 능력 차가 너무 많이 나면 경쟁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경쟁은 일정하게 평등
  • 평등주의적 요소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 사회가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옛이야기고, 나는 앞으로 실질적으로 경쟁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경쟁이라는 것이 ‘비슷한 처지’를 보장받아야 가능한 것이라면, 동등한 능력이나 처지가 보장되지 않을 때 경쟁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아예 경쟁 없는 ‘신분사회’로 가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쾌락의 평등주의’ 때문에 이런 사회로 가지 않고 무엇인가 다른 방책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경쟁에 미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만큼 중간계급(의식)이 광범위했고, 너도나도 ‘쾌락의 평등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분배와 관련한 이슈도 경쟁에서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할 때 힘을 받을 수 있겠다. 분배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과 반대항에 놓인 것이다. 분배는 적자생존의 경쟁이라기보다 자기애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고, 이건 되는 놈만 살게 하자는 강자의 논리라기보다 각자 특이성(개성)에 기반을 둔 선의의 경쟁을 전제하는 것이다.
  • 최근 표면화하고 있는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는 더 이상 적자생존식 경쟁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자기애적 주체(나르시시스트적 주체)’를 보여준다.
  • 더 이상 ‘경쟁’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경쟁이 고통스러울 때, 이런 주체는 그것을 강요하는 체제를 이탈해버릴 수 있다. 경쟁은 선악의 판단을 넘어서 있는
  • 현상이다. 그러니까 경쟁이 나쁘다고 말하거나 좋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진술이다. 좌파가 경쟁이 나쁘다고 말한다면 백전백패일 것이고, 우파도 마찬가지로 경쟁이 좋다고 말해봤자 자기들에게 이로울 게 없다.
  • 결국 경쟁에 대한 좌파, 우파의 입장은 ‘시차적 관점’일 뿐이다.
  • 마르크스의 말이 옳다면, 유령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처럼 말이다.
  • 누구나 동의하는 사항이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신세경이다. 이런 까
  • 까닭에 신세경이라는 매개자의 ‘실종’은 드라마에 애착을 보이던 시청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결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 이 예외적 상황에서 신세경은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신세경은 자발적으로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인해 도시 공간으로 들어온다. 물론 그가
  • 도시를 떠나서 강원도에 머문 것도 타의에 의한 것이다. 그가 타의를 벗어나서 자신의 선택을 했을 때, 그의 세상은 끝난다. 그 세상은 신세경에게 타의만 강요한 장소지만 또한 그로 인해 신세경을 존재하게 만든 조건이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신세경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 장소와 조건에 문제를 제기한다. 강원도 산골소녀 신세경은 서울에 들어오면서 ‘욕망’을 얻는다. 서울이라는 상징계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성취할 수 없다. 아버지가 귀환
  • 귀환했을 때, 신세경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지훈은 신세경에게 단순한 사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훈은 욕망의 기표다. 신세경의 아버지에게는 없는 것을 지훈은 가졌다. 이 모든 것을 가진 세계에서 신세경의 몫은 없다. 완벽한 부르주아의 세계.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곳은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빵꾸똥꾸’에 지나지 않는 세계다. 이 공공연하게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신세경은 홀연 이 진리를 드러내는 주체다. 비정상적 세계를 정상적인 것처럼 유지하
  • 유지하는 존재가 바로 신세경이라는 ‘가정부’다.
  • 신세경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신세경이 현실을 떠나면서 종결한다. 이를 통해 신세경이 외부에서 인입한 시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외부는 그 무엇도 아닌 우리의 과거다. 억압했던 과거의 귀환, 이것이 신세경인 것이다.
  • 내부에 있지만 사실은 외부에 해당하는 신세경의 시선이야말로 <지붕 뚫고 하이킥>에 현실감을 부여한 비현실적 요소였던 셈이다.
  •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되비추는 것은 언제나 신세경 같은 외부의 시선이다. 외부는 언제나 허구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다. 그러나 여기에서 운위하는 외부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통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언가 잊어버린 곳, 거기에 외부가 있다.
  •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목격한다.
  • 다큐멘터리가 질문하는 이 지점에서 관객은 새로운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 경계인의 의미를 알면서도 이를 완강하게 부정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현실은 합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기자는 ‘논리’를 빙자해서 제멋대로 발화의 의미를 왜곡하고, 우파는 자신의 입맛에 맞춰 송두율이라는 개인에게 마음대로 ‘모자’를 씌웠다. 여기에 좌파라고 불리는 진보개혁 세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 이들은 더욱 합리적인 외피를 쓰고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압박한다.
  •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들에게 ‘경계’라는 말은 모호한 핑계로 들릴 뿐이다.
  • 우파가 남이냐 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면, 좌파는 독일 국적이냐 한국 국적이냐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모든 행위는
  • 인간 송두율을 위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경계인 송두율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 같았다. 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은 경계인이었다.
  • 경계인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외부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외부’는 결국 우리의 과거였지만, 이미 그 과거는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까닭에 ’경계인’이라는 말은 이쪽도 저쪽도 속하지 않는 중립자의 모습으로 비쳤을 뿐이다.
  •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경계인의 속성은 두 체제
  • 모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민족주의는 있되, 민족이 없는 한반도의 현실
  • 체제 모두 민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하나의 민족주의’가 없는 것이다.
  •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경계인 따
  •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을 불리는 데 이용할 ‘우군’이었을 뿐이다.
  • 한국 사회는 경계인이라는 외부의 시선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다기보다 그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진실에 불편해 했다고 할 수 있다.
  • 몫은 계급의 문제라기보다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발언권이 없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정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작동한다.
  • 좌파든 우파든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권 없는 이들을 계속 침묵 속에 있게 하는 ‘통치’다.
  •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건을 둘러싼 해결책은 대체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귀책자로 설정하고 원인의 책임을 모두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사실 유무와 상관없이 ‘누가’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고, 유혹적인 스펙터클을 조장하는 것이다.
  • 사건의 귀책자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 기존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낯선’ 상황을 만나면 과거의 습속만을 고집할 뿐, 새롭게 제기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는 한국 사회
  • 의 경직성
  • 파토스
  •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격침, 침몰되어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 6명이 실종된 사건. 이에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했고, 5월 20일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이 문제는 곧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어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내용의 의장 성명이 채택되었으나,
  • 북한의 철저한 부인과 중국,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혀 직접적인 비난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같은 해 6월 14일 참여연대가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점을 담은 서한을 안전보장이사회와 이사국들에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권에 논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침몰 원인 규명 과정에서 다수의 가설, 의혹들이 제기되었으며, 남북 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 괴담이나 음모론에 대한 지나친 경계의식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적개심을 자연스럽게 인준하게 만드는 상황
  • 원래 괴담이나 음모론이라는 것은 공공 영역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 정체성은 전체에 대한 인식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정체성이 없다면 개별적인 것은 물론 전체적인 것도 알아볼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 디지털 매체의 파괴력은 ‘복사의 용이성’에서 기인한다. 원본을 복사하는 순간, 그 내용은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나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원본의 내용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옮겨질 때 필연적으로 ‘왜곡’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게 디지털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 진정한 과학은 서둘러 결론 내리고 반대 의견이나 의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대화의 자세에 있다
  • 참여연대가 유엔의 ‘협력 비정부 기구associated NGO’이고,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의 ‘특별 협의 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가진 전세계 2,167개 비정부 기구 중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구차하다. 문제는 국무총리가 나서서 우리 조사 결과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국민’을 정의하는 근대국가의 상식에 어긋난다.
  • ‘국민’의 자격, 또는 민주적 주권은 국무총리의 권한을 통해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중요한 것은 일관성 없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멀쩡한 상식을 위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다.
  • 냉전 이데올로기가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룩하기 위한 중요한 기제로 작동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냉전 이데올로기는 상시적인 ‘전쟁 상황’을 조장해 ‘적과 아’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을 만들어냈던 기제다.
  • 한국 사회에서 중간계급의 특징은 국가를 특정한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이상적인 건 바로 경제에서 정치를 분리해버린 ‘중성국가neutral
  • state’다.
  • 우파는 동일한 경쟁 조건을 전제하는 시장주의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시장주의를 외치고 시장이야말로 구세주라고 노래하지만, 실상은 시장의 우위에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깥에 있는 ‘특권’을 달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 냉전 시대라는 준전시 상황을 다시 소
  • 소급함으로써 노리는 건 시장의 현기증을 정치적인 것의 복권을 통해 해소하려는 전략이다.
  • 세계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정작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반세계화 방식으로 풀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허가받은 ‘일탈의 시간’이 월드컵 특수의 시기인 것이다.
  • 광고들이 보여주는 것을 단순하게 기업의 홍보마케팅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상대방이 만들어놓은 상품을 살 의향이 없으면 가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일상의 즐거움과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이라 함은 그 누구도 아닌 ‘소비자’다. 아니, 요즘 말로 바꾸면 ‘프로슈머’ 정도에 해당하겠다. 사실 프로슈머
  • 프로슈머라는 말은 그렇게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언제나 생산자였기 때문이다. 이 생산자는 물건을 만들고, 다시 그 물건을 시장에서 구매해 화폐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존재다. 그래서 여가의 개념은 고도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월드컵 특수가 있다는 것은 월드컵에 대한 ‘소비 심리’가 있다는 말인데, 여기에서 소비의 개념은 언제나 잉여적인 차원을 속 깊이 감춰놓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소비는 잉여고 과잉이다.
  • 과잉은 일상의 안정을 벗어나는 혼란의 상황이다. 월드컵이 과잉의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은 곧 ‘주체화’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모든 주체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공식을 통해 탄생한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주체로 거듭 태어난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사회의 개인들을 ‘주체’로 만들어준 계기였다고 할
  • 수 있다.
  • 386주체들과 사뭇 다른 이 주체들은 이념보다도 쾌락을 중심으로 정치성을 구성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다.
  • 이들의 민주주의는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내면의 ‘법’을 체현하고 있다. 쾌
  • 쾌락의 평등주의는 “내가 즐기는 만큼 너도 즐길 수 있다”라는 것, 바꾸어 말하면,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국가는 상상에서나 완전한 것이지 현실로 내려오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 아니 다시 말하면, 현실의 부족함을 언제나 환기시키는 완전한 상상의 공동체가 바로 월드컵이 현시시킨 국가의 이미지다.
  • 집단은 개인에게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정치는 일정하게 포퓰리즘이라는,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 월드컵 주체는 전체주의적이라기보다 자기 계발적이다. 신자유주의가 채택한 혁신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다는 양가성을 드러낸다. 과거의 습속에 대해 저항적이면서도 미래의 변화에 대해 수동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 즐거움은 평상시 우리의 일상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과잉의 공간을 만나는 순간, 이 즐거움은 폭발적으로 집단화할 것이다. 월드컵은 바로 이 즐거움을 ‘안전하게’ 집단화하게 만들어주는 기제다.
  •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상상의 국가를 우리는 월드컵에서 재확인한다. 국가는 과잉의 응결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로 응결되는 순간, 그 과잉은 다시 억제되어야 한다.
  • 2002년 월드컵이 한국 사회에 안겨준 희열은 바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꿈’과 ‘이루어진다’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응답을 한 것이다.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2002년 월드컵은 이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 각인시켰다. 물론 이 꿈은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영원할 수 없지만, 그 상상적인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과잉’을 낳게 만드는
  •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과잉’을 낳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이 상황은 4년마다 되풀이해서 한국 사회에 귀환한다.
  •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단순하게 ‘축구’ 자체를 즐기려고 모여드는 게 아니다. 오히려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그 이상의 무엇을 추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월드컵에서 목격할 수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집단
  • 집단적 응원 문화 자체를 ‘전체주의의 전조’로 비판하던 견해는 점점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월드컵은 질서와 안정이라는 테두리를 허물지 않고 과잉을 즐기려고 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생각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한다면, 쾌락 원칙을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위험’을 즐기려는 것이다. 쾌락 원칙이라는 것은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서 과잉의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술을 계속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 수 있다. 몸을 튼튼하게 하는 목적이 술을 마실 수 있기 위한 것이라는 발화는 모순적이지만 욕망의 변증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이처럼 욕망의 변증법은 보통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에 깃들어 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고민 없이 많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있는 명제지만, 실제로 서구에서 축제는 질서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처럼 대규모 응원전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 많은 군중이 모여서 지켜볼 수 있는
  • ‘빅 스크린’이 한국의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의 조건이기도 했던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공간’이 월드컵에서 이미 선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거리 응원 문화는 한국인의 ‘국민성’이 집단주의에 친화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물질적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사회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시장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었던 교육이나 가정, 심지어 여가까지도 시장의 원칙에 따라 재단하는 상황으로 변화했다. 유
  • 유럽식 자유주의에 따르면, 사회는 시장과 대립적인 것으로 시장이 주는 압박과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사회라는 영역을 시장의 논리에 맞춰 재편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유럽식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 월드컵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이념에 따라 재편되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았던 잔여물들이 나타난 것
  •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월드컵 주체’는 겉으로 드러나는 얌전한 모습과 달리 그 속에 근본적인 과잉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 과잉이 쾌락 원칙에 묶여 있지만, 이 쾌락 원칙이 위협받거나 임계점에 도달할 때, 언제든지 과잉의 순간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월드컵에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는 이런 측면에서 파시즘적인 것이라기보다 시민사회의 출현과 맥락을 같이한다.
  • 대체로 국가주의에 근거한 우파는 국가를 자신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기념비로 생각하고 이를 사회 구성원에게 주지시키려고 한다. 틈만 나면 군복을 입고 ‘좌파 척결’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이는 ‘어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이 기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기원적 신화다. 민족주의는 대체로 특정인들의 ‘죽음’에 근거해서 국가
  • 국가의 존립 근거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분단이라는 상황으로 인해서 온전한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알리바이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한반도는 두 개의 민족주의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나의 알리바이가 둘로 쪼개짐으로써, 우리에게 근대국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은 도래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있는데, 그 국가의 명분이 없는 셈이다.
  •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발언은 노무현 정부가 중간계급으로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 시민사회의 요구를 국가에 고정시킬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한국의 중간계급은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데, 2007년 대선 당시에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이력은 이 꿈을 이루
  • 이루어줄 수 있는 국가대표로 그를 인준하도록 만들었다.
  • ‘국풍 81’
  • 국가권력이 축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시민사회는 시위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 1990년대까지도 서로 분리되어 있던 타율적인 축제와 자발적인 시위가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이 바로 2002년 월드컵이었다고 할 수 있다.
  •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구분
  • 구분하고 있는 위계적 차별성을 순식간에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드컵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위계와 차이를 벗어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국민-시민’으로 자기 자신을 인준했다. 이 상태는 특정한 개인의 한계를 벗어나서 ‘아무나’의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 월드컵은 국가를 특정 세력의 것으로 고착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위계화하려는 시도들을 무력화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월드컵 현상은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하긴 하지만, 초보적이나마 축제적인 성격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축제의 핵심은 평소에 사회적 위계가 규정하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혼란에
  • 빠뜨리는 것에 있다. 모두가 ‘하나 되는’ 월드컵 현상이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화두와 일정하게 연동할 수 있는 조건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희한한 것은 ‘응원남’이라는 말은 없고, ‘응원녀’라는 말만 있다는 사실이다.
  • 촛불 ‘소년’은 없고 촛불 ‘소녀’만 보인 2008년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 된장녀의 대척점에 된장남이 있는 것과 달리, 응원녀의 반대편에 응원남은 없다. 이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첫째, 응원녀가 ‘여성’이라
  • ‘여성’이라는 고유한 범주 없이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 없이 응원녀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외모가 응원녀의 가치를 생산한다. 흥미롭게도 이 외모를 규정하는 코드는 ‘섹시함’이다. 이 섹시한 응원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성이 특정 사회에서 존재
  • 가치를 인준받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재생산 능력 때문이다. ‘아무개의 엄마’가 되고 ‘아무개의 아내’가 됨으로써 여성은 비로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응원녀의 섹시함은 이런 ‘윤리’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섹시함은 아무나의 것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누군가가 차지할 수 없다. 이것이 섹시한 응원녀의 정체성이다. 누구에게도 공평한 즐거움을 주지만,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응원녀의 아이러니가 드
  • 드러난다. 이런 생각은 응원녀를 상업주의나 남성 중심주의의 산물로 파악하려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겠지만, 응원녀를 이렇게 자본주의의 단순 효과로 바라보는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문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응원녀를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또는 허위의식으로 단정해버리는 건 편리하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응원녀를 어떤 ‘실체’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원녀는 ‘늘 있는 것’이라기보다 ‘잠깐 보이는 것’이다.
  • 응원녀 현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인터넷이다. 응원녀들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아무나의 판정을 받는다. 이런 판정은 일탈적이라기보다
  • 대체로 규범적이다.
  • 이 대상이 언제나 ‘여성’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야말로 ‘아직도 여전히’ 주변부에 속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응원녀는 즐겁지만 언제나 부족한 현실을 드러내는 쓸쓸한 대상이기도 하다.
  • 한국 사회에서 월드컵은 현실 정치와 다른 차원의 정치성을 드러내는데, 이를 미학적 정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치성은 사회적 질서를 강제하는 위계화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무력화하는 차원을 열어놓음으로써 습속에 따른 판단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 민족은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대상이다.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 정대세 선수의 눈물을 통해 환기된 것이다.
  • 세계화가 만들어낸 상황은 ‘민족에 대해 말하지 않기’지만, 흥미롭게도 월드컵 경기가 잘 보여주듯이, 현실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이 퇴거하면 퇴거할수록 상징적 차원에서 민족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현시한다.
  • 시장주의는 우리 모두를 히스테리로 만듦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한다. 우리는 남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 비로소 시장경제에 적합한 소비자로 거듭날 수 있다. 필요 없는 상품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적 히스테리 주체들이 탄생하는 경로다. 이런 주체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민족이나 자유 같은 숭고한 대의명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 헌신하는 것이다.
  • 2010년 7월 23일 참여연대가 실시한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캠페인’에 참여한 한나라당 정치인이 쓴 후기가 세간에 논란이 되었던 사건. 차명진은 “나는 왜 단돈 6,300원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물가에 대한 좋은 정보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써 논란을 빚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이 1년 내내 최저생계비로 생활해 보라며 비난하자
  • 차명진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
  • 좌우파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이론을 발굴하기보다 외국의 이론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경향일 것이다.
  • 신보수주의자들이 복지국가 모델을 비판하기 위해 유포시켰던 ‘미신’ 중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게을러져서 종국에
  •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자의 기부 같은 일시적 미봉책보다도 가난을 근본적으로 폐지하는 사회구조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 Flahertie Wills Wilde 같은 근대 작가들이 주장했던 핵심적 내용이다.
  • 한국은 대처리즘이나 신보수주의자들이 공격했던 그 복지국가조차 가져본 경험이 없지 않은가.
  • 공적인 일이라는 건 “국가나 사회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공공公共’을 지시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해보자. 신정환과 MC몽은 어떤 의미에서 ‘공인’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공인이라고 할 수 있다.
  • 신정환과 MC몽이 공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고 한다면, 이런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들의 행동을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공인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도덕은 결국 즐거움의 문제고, 한국 사회에서 이 즐거움은 ‘쾌적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 징치
  • 연예인도 공인이고 정치인도 공인이다. 그러나 평소에 이들은 전혀 ‘공인’으로 인준받지도, 인
  • 인지되지도 않는다. 다만 ‘비리’라는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는 ‘행위’가 발각되었을 때 이들은 돌연 ‘공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출몰한다. 이 상황 자체야말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성, 또는 정치 자체를 억압하는 쾌락 원칙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공동체가 합의하는 그 도덕성의 기준은 결국 사회적 공간의 분할과 신분적 위계를 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예인과 정치인은 공인이라는 ‘비정치적인 지점’에 할당되는 것인데, 이들이
  • 이런 자기의 몫을 어기고 ‘몫이 없는 자’인 것처럼 행동할 때, 도덕성은 기요틴guillotine의 스펙터클이 되어 귀환한다. 기쁨과 아픔 같은 감각의 나눔에 충실해야 할 존재들이 갑자기 ‘선과 악’의 판단을 요구하는 ‘주체’로 나타났을 때, 한국 사회는 불쾌로 인한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웃음과 소음에 불과한 울부짖음만을 들려줘야 할 존재가 갑자기 ‘자기만의 쾌락’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한국 사회는 그 낯선 주체의 의미를 견디지 못
  • 못한다.
  • 이런 까닭에 연예인이나 정치인은 평소에 ‘사적인 존재’였다가 ‘공공’의 문제를 건드리는 순간, 공인으로 규정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인의 문제는 존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인식론적인 것이다. 공인은 ‘발견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다중 접속의 환경은 파놉티콘Panopticon에서 시작한 만인의 ‘감시 카메라화’라는 근대적 공리주의의 구상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감시받으면서 동시에 감시
  • 감시한다.
  •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테네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실제로 ‘최선의 사람’이 인민의 동의를 얻어서 귀족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말
  • 을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지적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 정당한 정치적 주체인 인민이라는 개념이 봉건적 위계를 연상시키는 서민이라는 용어로 탈바꿈해서 ‘호명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원래 서민이라는 말은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을 뜻했지만, 근대적 의미로 변용되면서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서민이라는 말의 쓰임에서 신분적 특권이 경제적 계급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데모스demos의 정치체제polity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민의 동의를 얻은 ‘최선의 사람’이 관리하는 국가체제다. 형식적으로 주권은 데모스에게 있다고 하지만,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이는 존재는 인민이라는 국가와 계약을 맺은 자들일 뿐이다. 이들은 언제나 국가에게 ‘평등’을 요구한다. 플라톤도 밝히고 있듯이, 평등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원을 가지고 태어난 동포同胞의 논리가 여기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간과하기 어렵다.
  • 플라톤은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들의 정치를 갈구했지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핏줄을 나눈 형제들만의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역으로 새로운 형제들을 만들어낸다. 민주주의를 통해 너도나도 형제가 되는 것이지, 형제들끼리만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민주주의의 이념은 기본적으로 왕후장상의 씨를 다르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는 원리적으로 패러독스를 내재할 수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정치체제’로 비쳤던 것이다.
  • 근대적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대의제라는 구조에서 발생한다. 데모스의 요구를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정치체제는 실제로 데모스의 정치를 억압하고 배제함으로써 작동한다. 데모스의 체제, ‘데모크라시’는 데모스를 정
  • 정치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기도 하다. 플라톤의 말처럼, 민주정은 실제로 최선의 사람이 통치하는 귀족정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민주주의의 주체기도 한 데모스는 ‘불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데모스는 자신의 불만을 근거로 정치체제가 정당하게 작동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 경제적 범주로 서민을 고정해놓음으로써 노릴 수 있는 효과는 바로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경제를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없는 영역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세계는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낙원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경제는 교환가치의 세계고, 이 세계는 데
  • 데모스의 과잉을 배제한 완벽한 합리적 거래의 처소기 때문이다.
  • 이른바 서민이라는 용어는 궁극적으로 구조로 포섭되지 않는 인민의 무의식을 경제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서 국가라는 합리적 재현의 영역에 붙잡아두는 금지의 기표인 것이다.
  • 공정성이라는 것은 형평성의 다른 말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고대 그리스의 용법에 충실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그리스에서 공정함justice이라는 것은 “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 공리주의를 정확하게 추구하는 것만큼 기득권층에게 무서운 일은 없다. 실제로 19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정치사상이 목표로 삼았던 것도 공정과 형평을 통한 조화로운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모스의 과잉이었
  • 과잉이었다. 서구 부르주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인민의 공백인 데모스가 출현해서 공동체의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대혼란의 상황을 막기 위해 서구 부르주아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것이다.
  • ‘국민’은 인민으로 자신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서민이라는 경제적인 외피를 뒤집어쓰고 정치적 주체라기보다도 ‘인간 동물’로서 쾌락 원칙에 충실한 삶을 선택했다고 하겠다.
  • 공정한 사회라는 기치만큼 서민이라는 ‘경제적 기표’에 인민을 포섭해둘 수 있는 좋은
  • 핑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안의 확립은 궁극적으로 인민의 정치를 찾아내어 경제의 논리에 포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의 논리를 통해 인민의 과잉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권력의 역할이고 국가의 기능이다.
  • 서민은 이렇게 공동체를 통해 합의된 욕망과 다르게 정향되는 주이상스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주이상스라는 해괴한 욕망은 교환가치의 법칙을 넘어가서 우리에게 ‘피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 보수우파는 손쉽게 ‘밥만 먹여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인민은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 보수우파의 주장처럼 인민이 밥에 만족하는 인간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면 북한 체제 같은 정치적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밥을 넘어선 것이 부자라고 했을 때, 자본주의의 경제구조는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줄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부의 총량은 늘어나더라도 부자의
  •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서민이라는 전근대적인 용어는 이런 자본주의 현실을 소거시키기 위한 합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한국의 부르주아는 아직도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귀족계급이나 구체제
  • 구체제와 투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서민 정서’라는 특이한 요소다. 이 서민 정서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의 노른자라고 불리는 압구정동에 여전히 연탄불 돼지껍데기집이 있는 것이고, 최첨단 아파트에 김치냉장고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도 서민적일수록 좋다는 이런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한국적인 미덕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상태나 우월한 능력도 이런 미덕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또는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암시하는 기표가 바로 서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민이라는 기표가 작동하는 지점이야말로 데모스가 은폐되고 포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국민’의 것이기에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작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아무나 허락되어 있는 이 기회를 마치 전혀 그렇지 않는 것처럼 무화시킨다. 그래서 자신이 선출한 권력자가 서민으로 자신을 재규정해주기를 바라
  • 바라는 퍼포먼스를 정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 서민은 결코 인민으로 충족되지 않는 어떤 과잉을 회피하기 위해 발명된 베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모든 경제적 요구는 정치적 과잉을 통해 결국 다시 정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타진요가 타블로의 학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힙합이나 하면서 놀던 학생이 어떻게 그 어려운 스탠포드 대학을 입학해서 졸업할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모자라는 위인이거나, 아니면 항상 웃으면서 손이나 흔드는 인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 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한 석사가 시시덕거리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고 다른 힙합 가
  • 가수들처럼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만 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얻고 싶었고, 그래서 있는 사실을 부풀려서 말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역풍을 맞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진요의 논리도 강고한 학벌주의의 산물이라면, 타블로 역시 여기에 편승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 이런 상식에 근거한 주장이야말로 전형적인 한국 시민사회의 논리기도 하다는 점이다. 미국 또는 유럽의 상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대상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사고의 구조가 한국식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이들이 타블로의 학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 중 하나가, 미국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타블로의 지적 능력이 그렇게 높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심이다. 출간한 책의 내용도 그렇고, 평소에 방송에 나와서 쏟아내는 발언들이 전혀 ‘배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타블로의 어수룩한 모습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런 주장
  •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런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미국의 명문대학 학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육 체계는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졸업하고 타블로처럼 행동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 개똥녀 사태는 개인에 대한 이지메였고, <디 워> 논란은 반지성주의, 그리고 황우석 사태는 민족주의에 근거했지만, 타블로는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한편, 세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심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진실이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 정의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타진요의 발언들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떠난 ‘공정성’을 띠고 있는
  • 이해관계를 떠난 ‘공정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마녀사냥의 조건은 시민사회와 법의 관계가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상황,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한 가치 판단의 혼란, 대상에 대한 혐오를 뒷받침할 합리적인 근거, 사회 정의에 대한 집단적 공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 공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선동하는 집요한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열렬한 군중의 존재다. 마녀사냥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지식들을 판타지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해서 현실을 설명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행위다.
  • 마녀사냥은 법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의 관계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징후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은 계몽주의로부터 공급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법의 금지를 내면화하고 국가는 이를 포섭하며 재현한다. 말하자면 마녀사냥은 시민사회를 요동치게 만드는 과잉의 욕망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과정
  •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마녀사냥에 대한 계몽주의적 비판과 규제는 곧 과잉의 욕망에 휘둘리는 주체의 망동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절차기도 하다. 법의 금지를 내면화한
  • ‘깨어난 개인’이 그렇지 못한 ‘몽매한 개인’을 질타하는 이중 구조가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근대사회의 가치체계를 구성한다. 이렇게 법은 계몽주의의 논리를 체득하게 되고, 개인은 근대적 시민으로 국가에 자신의 공백을 고정시키는 절차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 동그라미를 네모 속에 집어넣으려는 불가능한 시메모???? 가능한 것 아닌가???
  •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이 한국의 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의 폭탄을 포격한 사건. 이에 대해 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80여 발의 대응 사격을 실시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의 군인 7명,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남북 간 교전 중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한국 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로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중국을 제외한 각국 정부가 북한의 도발을 규탄했으나, 북한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 주장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이 사태로 남북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연평도 주민들 대부분이 섬을 떠났다.
  • 2011년 1월 21일 아라비아 해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우리 화물선 삼호해운 소속 화학물질 운반선인 삼호주얼리호가 대한민국 해군 최영함에 의해 구출된 사건. 청해 부대는 이번 작전을 ‘아덴만 여명 작전’이라 명명하고 고속 단정을 이용해 특수요원UDT을 피랍된 삼호주얼리호에 투입시켜 총격전 끝에 해적을 제압하고 선박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해적 8명은 사살, 5명은 생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 인 선장이 총상을 입고 부상을 당했으나, 다른 선원들은 별 탈 없이 무사히 구출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 진압 작전 성공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 대다수 ‘한국인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세계 평화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분 때문에 한반도의 전쟁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소말리아 해적을 진압한 한국 특수부대의 작전
  • 을 찬양하는 분위기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전쟁 반대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겉으로 보기에 한국 사회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력을 사용할 때에는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않는 것이다.
  • 한국인의 내면에서 국가라는 것은 ‘제대로 사랑을 받아볼 수 없었던 부모’ 같은 부재의 존재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또는 부재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국가다. 일상에서 나타나지 않다가 국가는 ‘국민’의 결여가 부각될 때, 홀연 유령처럼 호명 당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정서에서 국가라는 범주는 “신성 폭력divine violence”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신성 폭력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국가의 부재성과 무관하지 않다. 종교적 의미에서 신성 폭력은 죄를 범한 인간을 벌하는 신의 심판을 의미하지만, 근대성의 세속화는 이런 심판 자체를 부정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역사는 폐허만을 남긴 채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의 저항 따위는 아랑곳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부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신의 자리는 이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대타자에게 위임된다. 이 대타자는 사회 구성원의 판타지기도 하다. 제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자신의
  • 정치의 극단에 바로 전쟁이 있다.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말이 옳다면, 정치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적과 아를 선명하게 갈라 치는 순간이다.
  • 적과 아로 갈라진 갈등의 공간에 최후의 심판처럼 전쟁은 강림한다. 전쟁의 국면에 남는 것은 오직 폐허뿐이다. 이 과정에서 중간자는 있을 수 없다. 회색분자도 반드시 적 아니면 아로 ‘분류’되어서 어느 한쪽으로 낙인찍힌다.
  • 국가권력을 억압의 기제로만 파악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곧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규정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국가는 언제나 적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군대는 냉혹한 폭력의 이미지를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조롱하고 권력의 감시를 빠져나가는 것이 영웅적 행동으로 비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 이와 같은 상황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국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의 공통성을 실현해낼 수 있는 매개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 국가는 이제 특정한 ‘권력자’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국가를 부모처럼 느끼는 현상은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어버이처럼 인민을 보살피는 국가라는 이미지는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형상으로 공화국을 묘사했던 프랑스 혁명 이
  • 후의 상징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겉으로 보기에 이중적이긴 하지만, 내적 논리는 수미일관하다. 전쟁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고 중립지대를 사라지게 만드는 극단적인 전략이라면, 인질 구출 작전 같은 것은 국가가 자식을 구하는 ‘영웅담’이기 때문이다.
  • 우파는 열심히 북한을 ‘주적’으로 존속시키려고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북한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이상 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안정을 깨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 한국 사회는 군사적인 행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한반도 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근본적인 삶의 조건을 폐허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정치적 국면이다.
  • 전쟁이라는 정치성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농후한 한국 사회에서 중성적 국가권력의 역할에 대한 요구는 점점 강렬해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쟁을 사유하는 방식은 한편으로 전쟁 반대를 통해 정치적 부재를 인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는 공동체적 정의라는 문제와 함께,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날 공산이 크다.
  • 현상이야말로 상징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징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류를 놓고 허상이니 실상이니 논박을 주고받는 것은 크게 생산적이지 않다. 중요한 건 한류라고 대내외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현상이 모종의 변화를 노출시키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시간적 우연성의 결과라기보다 그 우연성에 숨어 있는 일관된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류는 개발 독재 시대의 근대화를 거친 한국인들이 드디어 물적 토대에 걸맞은 상징적 법의 논리를 확립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발견은 당위적 주체에 감추어져 있던 쾌락적 주체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악마’는 이런 과정이 폭발적으로 수면으로 부상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일반적 오해와 달리, 우리를 구성하는 초자아의 명령은 금지를 통해 쾌락을 단속하는 게 아
  • 아니다. 초자아는 우리에게 “즐겨라”라고 명령한다. 오히려 이런 초자아의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는 법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초자아의 목소리를 “법을 지켜라. 그러면 즐거움을 주겠다”로 바꾼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악마는 정확하게 이런 변주를 보여준다. “질서를 지켜라. 그러면 축제를 주겠다!”
  • 따라서 붉은 악마 현상은 숨어 있던 ‘민족’의 신명이 되살아난 것도, 억압되었던 ‘민중’의 에너지가 터져 나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건 길들여지지 않았던 한국인의 자아가 드디어 얌전
  • 얌전하게 법에 복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 마침내 한국인은 상징적 거세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논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논리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지속적으로 쾌락을 얻기 위한 약속이다.
  • 한류는 쾌락의 평등주의에 대한 아시아적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망은 “내가 너를 즐길 테니, 너도 나를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교환의 약속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 손거울 대신 휴대폰을 보며 옷매무시나 화장을 다듬는 젊은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철학자 김영민의 말처럼, 휴대폰은 ‘거울 사회’를 보여주는 징후적 표상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또한 이렇게 휴대폰은 일상생활에서 엄연히 ‘거울’ 노릇을 하고 있는 듯하다. 손거울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휴대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 휴대폰을 거울 대용으로 쓰는 행위가 반드시 휴대폰이 거울과 동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도록 만든다.
  • 휴대폰에 비친 영상은 거울보다 선명하지 않다. 여기에 하나의 암시가 숨어 있다. 휴대폰은 거울보다 사진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해야 옳다. 거울을 볼 때 우리는 거울이 우리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울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우리를 보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거울은 ‘시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만 우리에게 그 시선을 상상하도록 만들 뿐이다. 그러나 휴대폰은 이런 거울과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 휴대폰에 비친 영상은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게 아니다. 이때 우리를 보는 건 휴대폰이다.
  • 고쳐 말하자면,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 카메라와 매개된 시선을 보는 것이다. 사진사는 그 시선을 작동시키는 행위자에 불과하다. 사진사는 자신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다. 사진사는 ‘잘 나온 사진’을 위해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사진이 영화의 출현을 예견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날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 이들에게 중요한 건 이미지의 선명도가 아니다. 얼마나 대상의 사실성을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들에게 별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상징적 외피를 걷어낸 사실성에 버거워한다. 결국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의 반성이 아니라, 나를 상징적으로 정립시켜줄 휴대폰의 시선이다.
  • 사람들에 따라 이런 현상을 일러 인간의 본질로부터 너무 벗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이런 과정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스타들은 대중에게 완벽한 육체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 198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출현한 이른바 ‘피트니스 열풍’이 보여주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미용을 위해서 현란한 운동기구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제 남성도 람보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이나 자랑할 게 아니라 여성처럼 날씬하고 나긋나긋한 몸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한 몸을 가졌기에 운동도 더 잘할 수 있다는 편견은 무의미해졌다. 남성도 여성화되어야만 뒤바뀐 지형에 적응할 수가 있다. 결국 이 여성성의 강화 또는 권장은 쾌락 원칙의 충족이라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 특히 커리어 우먼으로 불리는 중간계급 여성이야말로 소비주의라는 뱀파이어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자 동시에 부모의 결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을 둘러싼 갈등은 이런 이중적 구조에서 발생한다. 이 갈등을 잘 푸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의 결정을 거스르지 않는 착한 아들딸들이야말로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는 존재로 승인받는다.
  • 한 중매알선업체 대표의 말과 달리, 독신주의는 실패한 결혼의 산물이 아니라 성공한 결혼의 증상이다. 독신주의자에게 가장 두려운 건 자신의 욕망이 결혼을 통해 완전하게 충족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은 분명 이기적이지만, 그렇다고 비인격적이라고 비난받을 까닭은 없다. 결혼이라는 상징적 거세를 통해 잃어버려야 할 것이 더 많은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라는 당위적 명제
  • 는 “돈이 많아야 처자식이 행복하다”라는 쾌락의 교환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결국 돈 없는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다. 독신주의가 성공한 결혼의 증상인 건 이 때문이다. 독신주의의 다른 얼굴은 경제적 독립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 목욕탕이 근대적이라면 찜질방은 탈근대적이다. 공중목욕탕의 출현은 목욕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그 일상으로부터 분리해낸 결과였다. 여름이면 개울과 강에서 하던 ‘멱 감기’나, 겨울이면 부엌에서 물을 데워서 하던 ‘목간’이 집단적 공중탕으로 바뀐 것이다. 한국의 목욕탕은 1970년대 경제개발이 그러했듯,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굴뚝을 겸비한 형상으로 일과 여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산업화 과정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조형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근대적 목욕탕의 패러다임은 병원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위생학적이었다. 이른바 학생들에게 집단적으로 실시되었던 위생 검사는 결국 일주일에 한 번 제대로 목욕탕에 가는지를 국가체제가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 그러나 찜질방은 이런 근대적 목욕탕과 다르다. 찜질방을 찾는 건 위생 관리에 힘쓰기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웰빙’을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가 선용이나 건강관리를 위해 사람들은 찜질방에 간다. 흥미롭게도 이런 한국의 찜질방은 1980년대 이후 선풍적 인기몰이를 해온 미국의 ‘피트니스 클럽’을 많이 닮아 있다. 피트니스 클럽은 1950~1960년대에 유행했던 남성 중심의 ‘헬스클럽’이 문화적으로 전이된 것이다. 단단하고 우람한 근육질 남성의 몸을 위해 무거운 쇳덩이로 채워져 있었던 헬스클럽은 이제 산뜻한 첨단 설비가 즐비한 피트
  • 니스 클럽으로 변모했다.
  • 분명 찜질방은 근대적 목욕탕과 다른 풍경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남녀의 성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짓고 남탕과 여탕의 구분을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했던 근대적 목욕탕과 달리, 찜질방은 그 남녀를 구분하는 중간 지대에 공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혼성의 공간은 미국의 피트니스 클럽에 해당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경우처럼 자신의 육체적 완전함을 과시하는 곳은 아니다. 찜질방에서 우리는 미국의 피트니스 클럽에서 사라져버린 공동체적 유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찜질방은 여전히 땀 흘리며 일상사를 대화로써 나누는 여성 공동체의 문화를 보전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찜질방은 완전한 육체에 대한 개인적 열망과 공동체적 유대감의 회복에 대한 집단적 유토피아 충동이 함께 뒤섞여 있는 곳이다.
  • “예술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 김삼순 신드롬이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우리가 ‘바람직한 현실’을 ‘현실 그대로’와 슬쩍 바꿔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언제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김삼순 신드롬에서 시청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김삼순이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젊지도 않은 엽기발랄 뚱녀’라는 전
  • 제다. 여기에서 ‘엽기발랄’은 금지된 욕망, 다시 말해서 여자는 ‘예쁘고 날씬하고 젊어야 매력적’이라는 현실 논리를 거스르는 욕망을 암시한다. 이 드라마는 이런 금지된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냈기에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 그 누구도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예쁜 얼굴을 위해 성형 수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명령할 뿐이다.
  •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보여준 뉴올리언스의 광경은 스펙터클 재난 영화보다 오히려 좀비 영화를 연상시켰다.
  • 미국 정부의 늑장 대응은 이 허리케인의 최대 피해자가 흑인 빈민들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흑인 피해자들은 대개 대피할 차량이나 갈 곳이 없어서 자신의 집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 2005년 8월 말, 최고 시속 280킬로미터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 주, 미시시피 주, 앨라배마 주 등 미국 남부 지역, 특히 뉴올리언스 지역에 착륙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사건. 당시 이 사건으로 뉴올리언스 지역 80퍼센트가 침수 당했으며, 무려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0억 달러 안팎의 재산 피해를 냈다. 사건 발생 1년 사이 인구수가 45만 명에서 그 절반 이하인 20만 명으로 줄 정도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자연 피해를 남긴 이 사태를 미 언론들은 ‘미국판 쓰나미’라 부르고 있다.
  • 개별 컴퓨터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네트워크를 구성했을 때, 게임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개인 컴퓨터에서 게임을 하는 경우는 컴퓨터를 끄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진행과 종결이 결정된다. 그러나 네트워크 게임은 전혀 다르다. 개인이 게임을 그만둬도 게임은 항상 그곳에 있다. 네트워크로 이뤄진 게임의 세계는 내가 없더라도 존재하는 무엇이 되어버린다.
  • 게임은 현실 역사를 총체화할 수 없는 무력감을 판타지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측면이 있다. 역사를 총체화할 수 없다는 건 현실에서 얻는 경험을 토대로 단일한 역사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제 온라인 게임은 단순한 판타지의 차원을 넘어서서 리얼리티 자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 온라인 게임이 이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은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논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부분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본은 항상 상징적 차원에서 의미
  • 를 만들 수 있어야지만 합리성을 갖출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상징성이고, 역으로 가장 추상화된 자본이라고 할 상징 자본의 축적 방식이다.
  • 중요한 것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아니라 이 게임 방식을 기반으로 구축된 프로페셔널 ‘스타리그’다.
  • “제도와
  • 주체 사이의 투명성을 갈망하는 유토피아 충동의 산물”
  • 겉으로 보기에 대본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진행되는 리얼리티 TV는 ‘극장성theatricality’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정은 정반대다. 이 장르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식은 극장성 자체를 돌올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루카치 식으로 말하자면 극
  • 극장성의 물화reification라고 할 수 있겠다. 리얼리티 TV에서 극장성은 다른 무엇을 위한 보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질이다. 관객들이 리얼리티 TV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건 일상성 자체다. 일상성의 극장화. 이건 요즘 대중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타자의 일상성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관음증의 뿌리다. 리얼리티 TV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공감sympathy을 확보하지 않는다. 리얼리티 TV라는 장르의 규칙
  • 규칙은 이런 고전적 극장성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리얼리티 TV는 공감을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장르는 공감의 구조를 보여줄 뿐이다. 유일하게 관객이 동일화할 수 있는 대상은 리얼리티 TV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이 인물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다. 관객은 이제 무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전방위적으로 위치하게 된다. 관객은 특정 인물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한다.
  • <어메이징 레이스>는 ‘어드벤처’라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경기이면서 동시에 모험이다. 게임의 규칙은 서바이벌과 보물찾기 게임을 섞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참가자들 전원이 각자의 사연을 시청자들에게
  • 들려준다는 점이다. 연인이나 부부도 있고 친구나 가족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빅 브라더>가 사이코드라마 같다면, <어메이징 레이스>는 토크쇼 같다. 전자가 무의식의 세계라면, 후자는 상상적 이미지의 세계다.
  • <어메이징 레이스>가 보여주는 건 상상적 이미지가 깨진 상태가 아니다. 이 유사 리얼리티 TV의 목적은 ‘경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쥐들의 경
  • 경주rat race’ 말이다. 상대방보다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탈락한다는 절박감, 여기에 관객들은 공감한다. 여기에서 이 프로그램은 고전적 극장성을 리얼리티 TV 장르 속으로 재도입한다. 어떻게 보면 장르의 타락이다. 이를 통해 봉쇄되는 건 리얼리티 TV에 내재해 있는 ‘유토피아 충동’이다. <어메이징 레이스>는 유토피아 충동의 문제를 살고 죽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대체한다.
  • 2001년 미국 CBS에서 제작한 리얼리티 TV쇼로 현재 시즌 13까지 지속적으로 방송되고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다양한 짝을 이룬 팀이 전 세계를 무대로 레이스를 펼치는데, 매회 주어지는 미션을 훌륭하고 빠르게 수행해야만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늦게 임무를 수행한 팀이 탈락하고, 마지막 최종 목적지에 가장 먼저 도착한 팀이 우승자가 되어 상금을 지급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1999년 네덜란드의 유선 TV 채널인 베로니카에서 제작한 대표적인 리얼리티 TV쇼로 선풍적인 여세를 몰아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 선발된 남녀 출연자
  • 10명이 외딴집에 함께 살면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는데, 이들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보름에 한 번씩 부적격자를 투표해 탈락시키고, 최종적으로 남은 한 사람이 우승자가 되어 상금을 지급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관음증 논란, 사생활 침해 논란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 보기에 어설프고 덤벙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슬랩스틱은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 이런 슬랩스틱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르
  • 장르가 홍콩의 배우이자 감독인 성룡의 영화들이다. 코미디 장르는 아니지만 프로레슬링도 엄밀히 말하면 슬랩스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각본 없이 진행되는 ‘마빡이’를 슬랩스틱으로 보는 건 여러모로 무리다.
  • 출연자들은 “개그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마빡이’는 희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개그가 없는 개그라는 말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한마
  • 한마디로 하나 마나 한 소리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빡이’는 ‘분석’도 피해 달아난다. 이들은 “이 개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한다는 건데 이것은 진지함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진지함을 조롱하는 것도 엄연히 말해서 일종의 ‘의미’다. 열심히 손으로 이마를 치는 ‘마빡이’는 웃는 관객들을 향해 “이게 재미있어 보이냐”고 호통을 친다. 출연자에게 힘든 일이 관객에게는 웃음거리가 된다. 이건 웃음을 만들어내는 기본 구
  • 구도다. 일부에서 이걸 두고 자학적이라고 말하지만, 웃음은 어느 정도 자기 파괴에서 출발한다. 강고한 자아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그 지점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웃음이 진리를 드러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 누구는 이것을 ‘진정성’이라고 하지만 나는 ‘진리’라고 부르고 싶다. 이게 무슨 진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마빡이’가 드러내는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기도 하다. 후기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세속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신화를 먹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 신화가 설파하는 것은 무한 경쟁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경쟁에 대한 용인이다. ‘마빡이’는 불평등한 경쟁의 구조를 드러낸다. 마지막 훈계를 하는 출연자와 처음 이마치기를 시작한 출연자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 19세기 파리에서 ‘술 마시는 여성’은 ‘타락한 여성’과 동격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소주 광고에
  • 나오는 여성은 이런 의미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 남자의 술이라고 받아들여졌던 소주 광고에 왜 젊은 처녀들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다.
  • 주색잡기라는 말도 있듯이, 항상 술은 여자와 함께 취급되는 것이고, 둘 다 남성의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술 광고에 여자가 나오는 것이라는 답. 이렇게 해석하면 소주 광고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마초이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형적인 남성 욕망의 산물이다.
  • 우리 사회에서
  • 일어난 변화를 숨기고 있는 화석
  • 일단 소주의 도수가 떨어지기 시작
  • 대개 그 기사들의 내용은 주류업계가 여성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소주의 도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주업계는 무엇 때문에 여성들의 입맛에 소주를 맞추려고 하는 걸까.
  • 소주는 원래 수메르 지역에서 처음
  • 발명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술과 달리 발효된 주정을 증류해서 만들어내는 독한 술이라서 옛날부터 고급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만들기 힘든 술이자 또한 귀한 술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렇게 귀한 소주가 한국에서 ‘대표적 대중주’로 자리 잡은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여하튼 소주는 우리에게 ‘싼 술’이다. 소주가 우리에게 싸게 인식된 까닭은 이것이 ‘노동자의 술’이었기 때문이다.
  • 압생트
  •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대량 생산했던 진로가 내보냈던 최초의 애니메이션 CF을 보면 우락부락한 선원들이 나온다. 이 CF에서 사용된 배경 음악도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에서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로 가면서 부르는 휘파람 곡조에 새로운 노랫말을 더빙한 것이다. 이런 것을 봐도 소주는 처음부터 ‘노동하는 남성’을 주요 구매층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 1999년 이후 진로는 이런 남성 중심
  • 중심의 소주 이미지를 과감하게 변화시켜서 ‘소주 마시는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CF 때문에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내재된 욕망이 있었기에 이런 이미지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욕망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을 자본이 따라잡았을 뿐이다.
  •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주가 드러내는 하나의 진리를 조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화된 노동의 패러다임이다. 근육에서 감수성으로,
  • 산업사회의 노동은 주로 남성 근육의 이미지로 표상되기 마련이다. 부국강병의 이미지는 우락부락한 남성들을 대표 선수로 내세우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 축적의 방식이 고도화될수록 고전적 가족 모델에 의
  • 의존했던 중간계급의 지위도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 몰락의 과정은 노동의 유연화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정리 해고의 일상화’와 ‘불평등의 평등화’라는 새로운 노동의 패러다임이 출몰함에 따라 더욱 가속화된다. 자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부담스러운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남성보다 이런 부담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여성을 기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다.
  • 이들은 남성보다 적은 임금에도 만족할 수 있고, 이른바 ‘창조적 산업’에서 야들야들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은 이 지점에서 여성의 장점에 대한 찬양으로 탈바꿈한다. 서구 사회에서 이것을 ‘여성화feminization’라고 지칭하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소주 광고는 이처럼 남성에서 여성으로 노동의 중심이 옮겨온 현실을 품고 있는 징후이자 동시에 새로운 ‘정당화justification’의 논리를 보여주는 증거다.
  • 최근 소주 광고의 여성은 남성 취객
  • 취객의 대상이라기보다 유연한 노동의 패러다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자아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소주는 달성되지 못할 어떤 욕망에 대한 대리물이다. 그 욕망은 바로 여성이면서 남성의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 무릇 모든 현상은 이렇게 본질이기도 하다.
  • 영어로 대필은 ghostwriting이고 대필 작가
  • 작가는 ghostwriter다. 한마디로 대필은 유령 같은 작업이다. 누군가의 육신에 영혼을 빌려주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 미국의 경우, 출판사가 대필 작가들을 고용해서 소설을 쓰게 하고, 이를 시장성 있는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일이 이제 상식처럼 되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톰 클랜시Thomas Leo Clancy Jr 같은 작가가 이런 경우다.
  • 한젬마
  • 매연과 중금속으로 오염된 바깥 공기를 개선할 생각은 않고 방 안에 어떤 공기청정기를 들여놔야 더 몸에 좋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교통 체증을 유발했다고 비난하면서 경기가 엉망이라 장사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천정부지로 오르는 강남 아파트값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값을 올리기 위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합하는 사람
  • 위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합하는 사람들. 일찍이 홍세화 는 이것을 일러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불렀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건 분열증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이런 분열증으로 인해 대필 사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마시멜로 이야기』나 『그림 읽어주는 여자』 같은 ‘가벼운’ 책들만이 잘 팔리는 한국의 독서 풍토에 대한 반성은 찾아보기 어려운 건지도 모른다.
  • 실화와 허구가 뒤섞이고, 슬픔을 기쁨으로 가볍게 TV 채널처럼 바꿔버릴 수 있는 자본주의 문화는 우리에게 약이면서 독이다. 모든 전통과 인습을 가볍게 우스개로 만들고 위계를 허물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문화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상품화라는 날카로운 뱀파이어의 이빨을 드러내고 인간의 피를 남김
  • 남김없이 빨아먹으려 든다. 대필 작가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문화의 징후다. 자본주의는 영혼을 가진 인간을 모두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본을 위해 노동도, 예술도, 종교도 모두 유령이 되어버린다.
  • 대필 작가의 존재는 작가주의의 죽음을 뜻한다. 문학의 영역으로 국한해서 본다면 대필 작가야말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물인 셈이다.
  • 이런 징후는 영화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벤야민은 영화의 출현이 어떻게 창작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선구적으로
  • 짚어내고 있다. 벤야민은 예술 창작의 작가주의를 허물어버리는 영화의 요소로 ‘편집’을 들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영화는 편집해버리면 그만이다. 작가의 의도야 어떠하든, 편집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대필 작가는 이런 영화의 편집 행위가 그대로 글쓰기로 옮겨온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필 작가가 용납되지 않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아직 독서 시장이 자본주의의 합리화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여전히 대중은 모름지기 글이라면 작가의 영혼이 스며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는 결국 글은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날로 속도를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욕망조차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먹기 좋게 포장해서 시장에 내놓는다. 『마시멜로
  • 이야기』나 『그림 읽어주는 여자』 같은 책들은 이런 목적을 위해 일정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특별한 상품이다. 그런데 이런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이 대필을 문제 삼는 건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어쩌면 대필 논란은 상품화의 그물망을 벗어나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보전하려는 대중의 필사적 노력일지도 모른다.
  • 뒤르켐Emile Durkheim의 말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모든 자살은 사회의 책임이다. 스스로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살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 우울증은 하나의 증상일 뿐, 자살의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심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우울증은 에고의 분열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다. 말하자면, 무엇인가 원인은 따로 있는 셈이다.
  • 삶을 즐길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살을 생각한다. “힘들어서 죽겠다”라는 말은 실제로 삶을 즐기고 싶다는 말의 반대다. ‘아버지’가 명령한 “인생을 즐겨라”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
  • 우리는 불쾌해지는 것이다.
  • ‘~착하다’는 것은 이제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예쁜 몸매나 얼굴로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미학과 윤리의 절묘한 결합. 이런 결합은 지금 한국
  • 사회를 작동시키는 욕망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 20킬로그램을 감량한 옥주현의 다이어트 성공에 찬사를 보내면서, 한 연예 잡지 기자는 “외모지상주의가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연예계 현실에서 놀라운 일을 해냈다”라고 말했다. 무시무시한 현실의 바깥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이런 발언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십자 포화를 성공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몸매 관리를 초인적으로 해낸 옥주현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 것이기도 하다.
  • 미녀는 괴로울 게 없다. 그런데 왜 괴로운 걸까? 바로 미녀가 되는 과정이 괴로운 것이다.
  • 착한 미녀는 한국의 남성 판타지가 내리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이
  • 남성 판타지를 구성하는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다. 문제는 여자 연예인들이 이런 경쟁 구조 바깥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현실을 실감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이들은 인형이고, 그래서 더 이상 재미가 없으면 폐기되어야 한다. 섹시한 여가수를 원하지만, 제일 섹시한 여가수를 제외한 다른 여가수들은 싸게 놀려 먹을 수 있는 대상이다.
  • 문화산업의 높은 투자 위험률은 연예인들, 특히 여자 연예인들의 ‘물화’를 촉진시켰다. 심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물화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채플린Charlie Chaplin의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  가 잘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이런 삶의 조건은 컨베이어 벨트 이상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는 바로 속도다. 속도가 빠른 이가 모든 것을 먹는다. 이런 속도의 논리가 남성의 것이라면, 이런 남성의 욕망 구조에
  • 복무하는 것이 여자 연예인들의 이미지다. 이 욕망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여자 연예인들은 착한 몸매와 얼굴로 남성의 시선을 즐겁게 해줘야만 연예인다운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들을 소비해줄 시장은 연예계에 없다. 빈자리를 채워줄 예비 상품들은 널리고 널렸다. 영혼이 필요 없는 복제 인간들처럼, 이들은 하나의 대체물로서 자신에게 주어질 짧은 시간을 기다린다. 너도나도 한류의 영광을 부르짖고 있을 때, 정작 그 한류의 주역들은 소모품으
  • 소모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실재는 이제 바깥에서 출몰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부에서 서서히 이 괴물들이 깨어나고 있다.
  • “미술은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술은 달러”라고 말했다.
  • 어떤 수컷도 애교 떠는 암컷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수 없다는 동물행동학의 논리를 적용해서 설명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어떤 기자 말대로, “애교는 에너지”니까.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게 한국의 문화부 기자 수준이다.)
  • 정말 낸시랭에 무언가 있는 걸까? 나는 그렇지
  •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낸시랭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 낸시랭에게 ‘예술’은 상품 교환 체계 속에서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낸시랭에게 중요한 건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잘 팔려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그에게 예술은 자본의 축적 수단이다. 상품이 되어버린 예술, 이것을 낸시랭은 ‘진짜 예술’이라고 부른다. 낸시랭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그 죽음의 집행자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낸시랭은 예술의 죽음을 증
  • 증언하고 이에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자본주의에 ‘솔직하게’ 투항해버린다. 이런 솔직한 태도가 낸시랭에 대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 건담과 명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가 하는 질문에 낸시랭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세상살이가 로봇의 차가운 갑옷처
  • 갑옷처럼 강한 척하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조합시키는 기생은 조선 시대의 잔 다르크 같은 존재였다는 걸 부각시키고 싶어서예요. 아이의 얼굴을 붙인 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고 싶어서죠.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평론가들의 말이에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은 거예요. 특히 명품요. I love 명품! 구찌를 특히 사랑하죠.
  •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해방에 대한 요구를 내재하고 있고, 권위주의와 에고이즘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 자본주의만큼 예술과 삶의 일치를 주장했던 아방가르드는 없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광고는 아방가르드적 감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예술의 산업화와 동시에 이루
  • 이루어지는 것은 산업의 예술화다. 산업은 부르주아의 예술이고, 기계는 부르주아의 작품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상태, 다시 말해서 ‘예술 없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낸시랭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낸시랭에게 비극일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이 광고고 상품이라면, 낸시랭과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술적’이겠는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이다. 낸시랭을 가능하게 만든 그 조건은 낸시랭의 무가치함을 증
  • 증명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 스포츠로부터 댄스뮤직에 이르기까지 사실 모든 대중문화는 대리만족이다. 내가 탤런트 K양이나 J양처럼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숭배하는 팬이라도 되는 것이다. 안티 팬도 마찬가지
  • 마찬가지다. 안티 팬은 팬보다 더 열렬한 팬이 되고자 하는 것뿐이다. 팬은 팬인데, 더 광적인 팬이 안티 팬이다.
  • 불륜 드라마라는 시청률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코파이라는 상표 때문에 모든 초코파이가 잘 팔리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 하지만 대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 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뭐라고 꼭
  • 집어 말할 수 없는 욕망의 빈 공간을 뭔가로 실컷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 사랑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각자 갈 길을 간다는 게 멋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 길을 간다는 게 아니라 ‘사랑이 허망하다’는 것이다.
  • 누구도 대중문화가 시대의 관습을 앞서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건
  • 예술의 몫이지 시청률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임무가 아니다.
  • 오히려 대중문화는 판타지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특정 시대에 새겨진 집단의 열망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다.
  • 작가 김수현은 한 일간지와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남편에게 젊은 여자가 생기는 것’을 일러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구태의연한 것을 참신한 구성과 언어
  • 언어로 다시 포장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것은 반복이되 그 속에 언제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 김수현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보통 불륜이라고 일컬어지는 일에 대해 그는 아무런 선악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불륜은 그냥 ‘사고’일 뿐이다.
  • 사랑보다 밥이 우선이라는 설정은 낭만주의조차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냉혹한 한국의 ‘먹고사니즘’을 드러낸
  • 냉혹한 한국의 ‘먹고사니즘’을 드러낸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내팽개치고 욕정에 눈이 머는 의사와 교수라는 인물상은 전문가에 대한 냉소와 지성에 대한 저항을 무의식적으로 암시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암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여과 없이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경멸과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가 교묘하게 침윤되어 있는 이런 메시지
  • <내 남자의 여자>가 괜찮은 드라마로 평가받는 것은, 이 드라마가 불륜이야기를 참신하게
  • 엮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차갑게 불륜 드라마의 실체를 해명했기 때문이다.
  • 대중은 불륜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불륜이라는 금지의 명령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이 쾌락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다.
  • 금지가 있고 나서 법이 있듯
  • 김훈이 판타지의 강화를 통해 중간계급의 정체성을 봉합시키려고 한다면, 김
  • 중간계급의 정체성을 봉합시키려고 한다면, 김수현은 그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판타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가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의 자리야말로 중간계급의 판타지가 끝나는 지점인 셈이다.
  • 김수현 드라마의 핵심은 갈등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갈등은 형식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갈등 자체를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 김수현 드라마의 재능은 이런 갈등 구조를 ‘극장화’한다는 것에 있다. 이른바 사드가 만들어낸 도착의 극장과 유사하다. 사드는 쾌락을 위해 억압을 극장화하는데, 김수현의 드라마도 이런 방식으로 시청자(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 김수현 드라마는 도시 중간계급 여성을 위한 로망스다. 김수현 드라마에
  •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갈등은 이런 중간계급의 불안과 분노를 드러내는 형식적 구조다. 박정희 시대부터 오늘날까지도 김수현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현 드라마가 조응하는 것은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이고, 이들의 정체성을 위해 그의 이야기가 복무하는 것이다.
  • 김수현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보수주의는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을 표현하는 세계관이다.
  • 발자크Honore de Balzac
  • 서양에서 한때 책은 장원 하나 값에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 이렇게 책을 귀하게 여긴 태도는 기독교 신앙에서 연유한 것이다. 세상을 신이 선물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중세인의 마음이 책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 중세까지 책 읽기라는 건 ‘낭송’이었다
  • 책에 대한 경외심은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중세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책은 신의 진리를 담고 있는 비밀스러운 물건이라기보다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 바뀌었다. 보들레르가 개탄한 ‘시’의 타락은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활자에 사로잡힌 시의 운명은 곧 상품이라는 틀에 갇힌 예술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 한때 『마시멜로 이야기』나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대필 논란에 휩싸였던 걸 감안한다면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를 가능
  • 가능하게 만드는 작은 차이는 대필 작가의 이름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방식에 있다. 옳고 그른 문제를 떠나서 본다면, 한국에서 대필 논란이라는 게 결국은 책의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오히려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속임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 이런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고 책의 죽음을 선언할 성미 급한 이들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만한 현실적 대안이 없는 한 이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솔직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야만과 싸워 이룬 문명의 기념비라는 벤야민의 말을 되새겨보는 것도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책을 신성
  •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은 분명 의미심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책이 신앙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미국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만든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전용기기가 암시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소장의 의미를 상실한 책. 오직 정보를 담은 매체로만 기능하는 책. 애서가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현실은 이렇다.
  • 이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특이한 소재일 수 있겠지만, 그 윗세대에게는 익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이 하나의 풍경이라면, 윗세대들에게는 과거에 겪었던 실제 삶의 기억이다.
  • <워낭소리>의 인기 비결 중 하나가 이처럼 다양한 세대 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 공감의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일 텐데, 그 요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다.
  • 김지하의 「서울길」이 “몸 팔러 간다”라는 말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결연한 이주의 경험은 ‘고향=농촌’이라는 등식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런 등식은 농업을 끊임없이 산업화를 위해 해체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도시 생활의 결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분열적 삶의 진실을 은폐시켰다.
  • 농촌과 도시의 관계를 무시하고 전자를 끊임없이 배제하는 분열증을 김종철은 개탄하지만, 사실은 『녹색평론』을 공감하고 지탱하는 힘은 농촌에서 나온다기보다 농촌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중간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워낭소리>의 세계는 도시 중간계급에게 그냥 풍경인 것이고, ‘우리’라기보다 ‘그들’에 속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소는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도시 중간계급의 미학은 이들을 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던 것이 ‘고유한 속성’을 드러냈을 때, 이들은 마치 새로운 것이나 ‘발견’한 것처럼 놀라워하는 것이다.
  • <워낭소리>는 자본주의라는 법에 복종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과잉에서 ‘문화’라는 것이 서식하는 것이겠지만, 또한 이 사실에서 <워낭소리>가 ‘농촌의 이야기’라기보다 ‘농촌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와 소를 보고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 그 눈물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며” 질주해온 한국 자본주의의 자기 증식 논리에 대한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 신해철을 일컬어 한물갔다거나 별 볼 일 없는 가수라는 평가의 근거는 최근 유행하는 가수들의 인기에 빗댄 것이다. 원래 가수는 유행의 산물이다. 따라서 가수라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한물’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의 법칙이다.
  • 이건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연예계에서 상품 가치의 저하는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연예인들이 목숨을 끊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이와 같은 ‘존재 소멸의 공포’ 때문이다.
  • 가수 신해철이 사회 문제에
  • 대해 ‘진보적’ 발언을 했기 때문에 이슈가 되었던 것이지 그 반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이 가수 신해철의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분석이다.
  • 한국에서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진보’의 가치를 시장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시장의 논리에 따라서 이를 판정하는 버릇에 빠져 있
  • 있는 것 같다.
  •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말처럼, ‘솔직한 폭로’야말로 자본주의의 상품화를 작동시키는 결정적 동인
  • 심의규정이 모호한 까닭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의의 문제는 항상 문화적 헤게모니 싸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금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 대한 우리의 금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앞서 말한 문화적 헤게모니 투쟁이 일어나는 ‘장’에 불과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를 폐지한다고 검열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검열과 심의의 폐지는 단순
  • 단순한 제도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또는 ‘공동체’가 지속하는 한, 어떤 방식을 취하든 검열과 심의는 항상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검열과 심의의 완전 철폐라는 건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검열과 심의라는 게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금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은 즐기라고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항상 법의 이름으로 금지를 발명해서 ‘즐길 수 없는 이유’를 들이
  • 들이댄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슬퍼하실 거야”라거나 “그런 짓을 마구 하면 ‘나쁜 아이’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선입견과 달리, 우리의 내면은 억압당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에 속박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 그 ‘금지’를 만들어내는 당사자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
  • 대중의 응시를 자신의 욕망으로 체현한 연예인
  • 연예인은 마치 『피터 팬』에 나오는 요정 팅커벨과 같다. 팅커벨이 독약을 마시고 죽어갈 때, 피터 팬은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팅커벨은 어린이들의 박수 소리만 있으면 괜찮다고 한다. 피터 팬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박수를 호소하자 그 소리가 팅커벨에게 들리고 기적적으로 요정은 살아난다. 연예인에게도 이처럼 대중의 박수 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 네그리
  • ‘타고난 능력’을 보여주기 전까지 이들은 몫 없는 자들로 취급당하면서 사회로부터 추방당해 있는 상태다. 잘라 말하면, 연예인이야말로 비물질적 노동현장의 철거민이나 다를 게 없는 존재인 셈이다.
  • 모델 출신 탤런트 겸 영화배우 장자연이 2009년 3월 7일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됨과 동시에 기획사로부터 술 접대와 강요 등 폭행에 시달려왔음이 드러나면서 연예인 성 상납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건.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얼굴이 알려질 무렵 자살했고, 전 매니저 유씨에 의해 기획사의 횡포에 대한 자필 문서가 공개되면서 연예인 스폰서 문제와 비리 사건임이 드러났다. 이후 일명 ‘장자연 리스트’라 하여 국회의원, 언론사 간부 등을 비롯한 유명 인
  • 인사들 명단이 떠돌면서 의혹을 증폭시켰고 경찰이 나서서 일본에 머물던 전 소속사 대표 김씨를 압송하는 등 수사에도 돌입했으나, 이와 관련해 입건됐던 관계자 12명의 수사 대상자들은 2010년 8월 최종 무혐의 처분을 받는 등 결과는 미비하게 끝났다.
  •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이나 그곳에서 광물을 채취하는 작업인 “막장일”을 의미했다.
  • 막장 드라마는 단순하게 특정한 제작자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제작자의 의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막장 드라마를 보고 즐기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 대중문화는 대중의 욕망을 먹고 자란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곧장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다. 따라서 대중문화가 막장이라는 것은 바로 대중의 욕망이 막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막장’을 고통스러운 쾌락이라는 의미에서 향락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마치 혀가 얼얼한 비빔밥에 고추장을 더 넣어 비벼먹는 심정이랄까.
  • 대체로 막장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여성이고, 그중에서도 중노년 여성들이라는 건 여러 가지 통계를 통해 확인
  • 확인할 수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즐기는 것을 금지당해 왔다는 사실은 막장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극단적 선정성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여기에서 욕망의 금지는 국가나 제도로부터 억압당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제어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억압은 판타지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감성은 느끼는 것이라기보다 식별의 문제다. 근대성이 출몰하기 전까지 인간은 ‘도시의 삶’에 대한 감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근대화의 진행 과정에서 도시적인 것에 대한 식별 체계가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대체로 도시로 이주해서 ‘중간 정도의 삶’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노동계급’을 위한 위무였다. 그래서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 부르주아와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보여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의 과정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을 수동적으로 ‘반영’했다기보다,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한류는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를 뜻하지 않는다.
  • 식별은 습관의 문제기도 하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을 알아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생경한 느낌을 주고, 즐거움이라기보다 불쾌감에 가까운 정서를 만들
  • 만들어낸다. 이런 까닭에 아전인수식의 분석을 떠나서 생각한다면, 한류는 역설적으로 한국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 실제로 막장 드라마의 표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내의 유혹>
  •  의 경우는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의 『에덴으로 돌아오다Return to Eden』라는 소설과 유사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셀던의 소설은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1980년대 한국의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아내의 유혹>은 한국적이지 않은 그 서사 구조로 인해 ‘막장’으로 비쳤을 수도 있는 것이다.
  • 막장 드라마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대중문화에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제기할 수 있는 ‘형식의 완성미’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인지는 좀 더 깊은 미학 논의를 필요로 한다.
  • 한국의 현실에 밀착한 세부들은 사라지고, 아시아 어디에 갖다 놓아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막장 드라마나 막장 방송은 이제 문화산업과 시장의 논리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한국 방송계의 현실을 드러내는 징후인 셈이다.
  •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 말하자면 미학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건 미학 없이 불가능하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미학을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지각하는 ‘앎’의 문제로 전환시
  •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의 주장은 독창적이다.
  • 이런 생각에 따르면, 새로운 미학의 출현은 언제나 상식의 선을 깨뜨릴 때 가능하다.
  •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일화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 리얼리스트 쿠르베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근대적 경험의 눈을 가진 존재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읽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했다고 하겠다.
  • 미학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적인 것이고, 예술가는 이 상식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 창조자다. 그리고 이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체계화해 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숙지다.
  • 한 시대의 합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엄밀히 말해 민중 미술의 정치성은 내용보다 형식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미술 작품을 거리에서 전시한다든가, 보편적인 이념을 표현하던 추상 미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서구 아방가르드 미학에 집착하던 한국 미술을 일순간
  • 일순간에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비료 포대 위에 농부를 그리고, 광목천에 군중을 그려냈던 그 형식의 파격에서 민중 미술은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예술은 단순하게 특정한 대상을 적절하게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론이다.
  • 영화, 연극, 무용 등 예술 분야에 대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993년에 개교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2009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정밀 감사를 받고 나서 존폐 및 구조조정 논란에 휩싸였던 사건. 감사 결과 이론과를 없애고 실기 교육 중심으로 교육 과정을 개편할 것과 실적이 없는 협동 과정은 축소・폐지할 것을 권고 받았고, 이 과정을 이끌었던 교수들은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이에 반발
  • 반발한 학생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1인 시위 및 각종 퍼포먼스를 벌여 구조조정의 부당함을 알렸으며, 이 사안은 예술계 전반의 예술교육 논쟁을 넘어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코드인사를 하는 것이 예술의 발전에 옳은가라는 정치적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 ‘바꾼다’라는 말은 ‘개선한다’라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10대가 기성세대로 전화할 때, 한국도 그만큼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변화의 정체를 예측하는 것이겠지만, 예측이 예언으로 변질하는 순간, 비평은 한낱 ‘약속
  • ‘약속의 수사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문화사적으로 보더라도 10대의 출현은 최근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10대는 어른도 아
  • 아니고 유아도 아닌 어정쩡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10대에 대한 주목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대전 이후에 밀어닥친 소비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에 기반을 둔 새로운 대중문화는 10대들을 ‘무언의 존재’에서 소비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어려운 10대들은 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마법사들이었다. 10대들은 또래 집단에서 요구하는 아이템들을 구하기 위해 해리 포터처럼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소비사회는 10대들을 훌륭한 어른들로 키워내기 위해 필수적이라며 현명한 부모의 소비를 장려했다.
  • 한국의 경우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과도한 입시 경쟁이 자율적인 10대 소비문화의 발전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
  • 때문이다.
  • 말하자면 한국에서 운위할 수 있는 ‘10대 문화’는 어른의 논리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른의 논리는 시장 또는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 어른은
  • 10대들에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겉으로 보기에 10대들은 이런 요구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때로 어른이 쳐놓은 노란 경계선을 넘어가기도 한다.
  • 팬덤은 시장친화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시장의 논리로부터 자신의 우상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 팬덤은 국가에 충성하기보다 그 국가를 상대화하면서 자신의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도록 만든다.
  • 비판하는 논리는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이 논리는 설득보다도 감정에 호소하는 정서적 교감의 힘을 통해 재규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논리적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 그의 발언에서 발생한 분노와 배신감을 옹호하기 위해 개발된 논리라는 뜻이다.
  • 애국주의는 그렇게 복잡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국주의를 밀고 가는 힘은 민족주의에 있고, 이 민족주의는 정서적 동질감에 근거한다. 애국주의는 정서적 동질감보다 ‘국가’라는 구체적 기표에 대한 헌신성을 근거로 삼는 것이다.
  • 박재범 논란을 초래한 ‘원초적 분노’는 민족주의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박재범의 발언으로 균열이 일어난 것은 한국인이라는 동질적 집단성이었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 공간성이 아니다.
  • 시장은 ‘우리’라는 범주를 따지지 않는다. 우리를 넘어 공간의 확대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시장의 이윤 논리기 때문이다.
  • 분노는 감정적인 것이고, 이런 감정의 전이는 정서적 공감을 통해 발생한다. 따라서 ‘소비자로서의 반응’은 박재범 축출을 유발시킨 시원적 광경이었다기보다 분노라는 최초의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사후적 논리였다.
  • 대다수 한국인에게 박재범의 발언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재하는 민족이라는 외설적 현실이었다.
  •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호출되는 것이 바로 애국주의라는 추상적 논리 체계인 것이다.
  • “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해서 쫓아냈다”
  • ‘우리’를 규정해주는 것은 ‘애국’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바로 ‘민족’이라는 범주다.
  •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라는 것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욕망의 평등주의라면 이 ‘빠순이들’의 윤리는 “나도 즐겼으니 너도 즐겨라”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논리에서 “우리 함께 즐기자”라는 아이돌 스타 문화 특유의 연대감들이 만들어진다.
  • 부모들은 교육을 위해서 아낌없이 지갑을 열지만, 소비의 취향을 결정하는 일은 사사건건 간섭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을 10대들은 아이돌 스타에 대한 충성에서 발견한다. 이런 팬덤을 밀고 가는 것은 사춘기의 불안일 수도 있고, 유년과 성년의 중간에 끼여 정체성을
  • 확립하기 애매한 10대다운 욕망일 수도 있다. 이 욕망들은 서로 충돌하지만, 내 것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무엇보다 강렬하다. 심지어 그 대상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한 ‘어른’일지라도 이들은 ‘오빠’를 지키고 자신의 ‘우상’을 찬양한다.
  • 학교라는 근대적 교육의 패러다임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사회의 규율이 서로 부딪히는 어디쯤에서 10대들은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 이 말을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에 대해 여성부는 ‘특별한 조처’를 취할 수 없
  •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이 단어의 ‘유통’에 대한 ‘국가 페미니즘’의 대응은 불가능한 것이다.
  • 정작 꿀벅지라는 기표의 지시 대상이라고 할 여성들이 이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이 말을 통해 발생하는 효과가 ‘여성의 상품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에서 ‘국가 페미니즘’은 무기력증을 드러낸다.
  • 꿀벅지는 쾌락을 주는 증상이고, 또한 이 쾌락은 비판의 거리마저 무화시키는 강렬한 ‘중독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명백하게 꿀벅지라는 말은 특정한 여성의 신체를 분리해서 이상화하고 특화시킨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상품 구조를 통해 발생하는 ‘물화’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렇게 문제와 답이 자명하다고 해서 꿀벅지라는 용법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지적이 곧바로 대중의 합
  •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상품화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의 공유가 앞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꿀벅지라는 용어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대중의 합의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꿀벅지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은 성욕에 대한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금지는 자본주의를 불쾌한 것으로 만드는 외설적 욕망에 대한 금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꿀벅지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유포시키는 논리나, 그것을 금지해줄 것을 요구하는 논리는 동일한 욕망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미학
  • 미학적 감각은 정치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꿀벅지라는 합의의 기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코드와 이를 재생산하는 감각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꿀벅지라는 용어의 출현은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같은 틴에이저 아이돌 그룹에 대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선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한 젊은 여성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남성성을 내포하고 있다.
  • 꿀벅지는 쾌락의 기표이면서 동시에 금지의 표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꿀벅지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넘어 진화한 욕망에 대한 금지의 방식을 보여준다.
  • 말하자면 꿀벅지는 허벅지 중에서도 뛰어난 허벅지를 뜻한다. 구별 짓기를 통해 탄생한 ‘다른’ 허벅지가 바로 꿀벅지다. 이렇게 꿀벅지를 다른 허벅지와 구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건강미’라는 새로운 기준이다.
  • 여성의 미모를 가다듬는 것이 ‘인간 승리’라는 보편적 범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남성 중심의 상징계에서 여성의 몫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언제나 그렇듯, 여성의 몫은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어머니’다. 꿀벅지는 가
  • 가냘픈 소녀시대의 허벅지에 재생산의 몫을 담당할 건강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첨가해서 탄생한 기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꿀벅지는 여성도 남성도 원하는 공통의 욕망을 표현한다.
  • 먹고사니즘이라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것을 ‘쓸모없
  •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태도와 꿀벅지 논란은 서로 겹쳐져 있다. 꿀벅지에 대한 성희롱 논란은 외모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긴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먹고사니즘과 결합한 꿀벅지 담론은 섹시한 젊은 여성의 건강미를 능력과 자질의 문제로 쉽게 치환할 수 있다. 외모가 자산이라는 합의가 꿀벅지라는 기표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태생적 자산은 시장에 속하면서 시장의 질서를 초
  • 초월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자유를 부여해주는 매개다. 태생적이지 않다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런 자산을 획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논리다.
  • 그러므로 꿀벅지는 단순한 성희롱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의 주체를 고정시키는 정체성의 담론으로 강림하고 있는 것이다.
  • 2009년에 등장한 ‘꿀’과 ‘허벅지’를 합성한 말로 일반적으로 ‘마르고 얇은 허벅지가 아닌 탄탄하고 건강미 있는 허벅지’를 지칭하는 신조어. 2009년 하반기 비욘세, 유이 등 건강미 넘치는 허벅지를 가진 여자 연예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미의 기준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9월 20일 충청남도 천안시의 한 여고생이 “꿀벅지라는 단어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며 “언론에서 사용하지 말게 해달라”는 제안을 여성부 홈
  • 홈페이지에 올려 이슈를 모았다. 이에 대해 여성부는 “성희롱은 피해자가 성적 표현이나 행위를 접했을 때 느끼는 모멸감이 기준이 되므로 개인적인 문제”라며 “성희롱 민원은 인권위원회에, 언론에서 사용하는 단어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에 제기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 문화의 의미가 형식에 담겨 있다는 말은 특정한 광고에서 드러나는 표면적 의미보다 그 심층에 가라앉아 있는 의미에 더 무게를 둔다.
  •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하면, 다른 제품보다 수십 배를 호가하는 명품 가방이나 옷을 소비하는 까닭은 효용성 때문이라기보다 그 명품의 상징성을 구매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문화의 의미가 내용보다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짝퉁 명품은 이를 증명한다. 짝퉁은 명품의 내용이라기보다 그 형식의 모조품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새로운 광고가 나오긴 나오지만 어
  • 어디까지나 소재가 달라지는 것이지 형식 자체가 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내용은 바뀌지만 전달하는 형식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 형식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관념하고 무관한 게 아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형식을 간섭하고 형식은 이에 맞춰서 논리를 유
  • 유지할 수 있다.
  • 광고의 형식을 이루는 논리라고 할 그 내용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어떤 이들은 소재와 내용을 헷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내용이라고 지칭하는 건 “상품을 팔아야 한다”라는 광고의 본질이다.
  • 광고를 제작하는 이유가 곧 광고의 내용인 것이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단순한 수사학의 차원을 넘어선 말이다. 광고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
  • 모른다. 자본주의의 상품 구조 자체가 광고와 함께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광고는 상품의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광고는 소비자의 욕망을 충실히 북돋우는 촉매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소비자들은 오히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광고를 배척하는 경향마저 띤다.
  • 상품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 스스로 생산하는 시대가 왔다. 이런 까닭에 광고의 기능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 제품을 사면 편리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떤 상품을 구매했을 때 얼마나 더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광고는 말한다.
  • 이 광고가 대상으로 삼는 구매 고객은 수입차를 살 수 없는 계층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생각한다면, 광고의 형식에 새겨져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랜저를 성공의 지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승 욕구를 가진 계층, 다시 말하면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에 이 광고는 충실한 것이
  • 것이다. 그랜저 신차를 살 수 있을 정도면 수입차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성공도 곧 가능할 수 있다는 암시가 여기에 깔려 있다.
  • ‘모든 사람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쾌락을 표현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원칙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벤담Jeremy Bentham은 양
  • 양적인 측면에서 공리주의를 정의하는데, 그의 인간관은 ‘쾌락 원칙’에 충실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을 인간의 ‘자연성’으로 보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에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행복한 개인이 많으면, 그 사회도 최대로 행복하다는 논리다. 이런 공리주의적 멘털리티가 ‘쾌락의 평등주의’를 만들어낸다. 벤담은 존 스튜어트 밀과 달리, 쾌락을 오직 계량적인 것으로
  •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은 정확하게 벤담식 공리주의를 내포하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한국 우파의 ‘근대화’ 담론인 셈이다.
  •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수정해서 인간
  • 인간이 단순하게 동물적인 쾌락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고상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런 맥락에서 벤담이 법을 통한 제재를 강조한 것과 달리, 밀은 개인의 양심에 더 방점을 찍는 것이다. 선한 행위의 기준을 쾌락에 둔다는 측면에서 벤담과 밀은 동일하지만, 그 쾌락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방법으로 그 쾌락의 운용을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입장이 갈린다.
  • 일반적인 ‘남성’을 극도로 불쾌하게 만든 루저 발언은 어떤 ‘골 빈 여성’이 키 작은 남성들을 루저라고 불렀기 때문이라기보다, 루저라는 의미화의 권력을
  • 때문이라기보다, 루저라는 의미화의 권력을 여성이 소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한국처럼 쾌락의 평등주의에 대한 갈망이 강한 사회에서 남성들은 ‘상징적 서열’에 복종하는 자신의 모습을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물론 이 여성의 범주에서 어머니는 제외된다). 쉽게 말하면, 남성들은 남성들끼리 약속한 서열의 위계에 대해 여성들이 아는 체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여성들은 그 서열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암묵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루저 발언은 바로 이런 금기를 깬 사건이었
  •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자기들끼리 키 작다고 놀리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지만, 그 발언의 대상이 보편적인 범주로 확대되는 순간, 남성적인 것을 주체화하는 현실 질서의 외설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루저의 난은 ‘루저’라는 데피니션을 부과할 수 있는 그 권력의 자리를 ‘철없는 여대생’이
  • 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인을 루저라고 판결할 수 있는 권리는 남성들끼리 나눠 갖는 것이지, 감히 ‘골 빈 여대생’이 공개적으로 방송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독서를 대체한 ‘인터넷 서핑’이 정확한 지식을 ‘사용자’에게 학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이 과정은 필요한 지식을 잠깐 단편적으로 조합해서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의 맥락이나 함의는 중요하지 않다.
  • 인터넷이 만들어낸 ‘지옥’은 누구나 만물박사처럼 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해대는 인터넷 폐인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블로그와 트위터에서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 인터넷 검색이라는 무소불위의 수단이다. 이런 검색을 통해 획득하는 정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지식으로 둔갑해 고정불변한 상식으로 자리매김한다.
  • 문제는 검색에 잡히는 정보라는 것이 대개 일차적이고 단편적이라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는 지극
  •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개연성을 구성하게 되는데, 대개 이런 주관적 판단은 평균적인 상식에 근거한 다른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진실성’을 인준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들의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깔려 있는 지식은 말 그대로 얇고 얕은 정보의 조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그러나 이런 사정과 달리,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긁어온 정보의 조각들을 박식함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어떤 주장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근거도 자신의 독서에 근거하기보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풍문을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공통의 인식 기반이 전제되지 않는 인터넷의 속성으로 인해 파편적인 정보에 기초한 지식 생산은 끼리끼리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겉으로 다양하고 민주적으로 보이는 인터넷 공간이라는 곳이 사실상 자신의 견
  •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담합하는 장소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 여성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누구의 엄마’로 거듭나는 것이다.
  • 한국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을 억누르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바로 가족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 단순하게 캐릭터에 대한 동일화를 통해 쾌락을 얻는 차원이 아니라 미국 드라마를 통해 ‘배움’을 획득하는 자기
  • 계발의 과정을 이들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 드라마들을 통해 시청자들은 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이것이 바로 자기 계발적 담론의 핵심을 이룬다.
  •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에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리고 그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 정치적으로 옳더라도 욕망은 그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 ‘오브제 아’
  • 미장센
  • 『해리포터』 시리즈가 다른 판타지 장르와 다른 점은 성장 소설의 원리를 판타지에 가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리포터』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
  • 계발의 논리에 부합할 수 있었다
  • 『마녀의 해머Malleus Maleficarum』
  • 물론 이 책 말고도 마녀를 규정하고 구체적인 마녀사냥의 방법론을 기술한 책은 이미 있었다.
  • 『마녀의 해머』는 인쇄술이라는 ‘최신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보기 드물게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인쇄기로 성서를 찍어냈을 때가 대략 1439년 무렵이었다. 이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마녀의 해머』가 세상에 나온다. 『마녀의 해머』가 출간된 시기는 인쇄술이 독일과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때였다. 인쇄술의 발달과 책의 수요 증가는 개인 인쇄업을 기업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책을 찍는 곳과 파는 곳이 분리되었고, 책을 팔기 위한 마케팅 전략들도 생겨났다. 이른바 ‘독
  • ‘독서’가 보편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녀의 해머』도 이런 분위기에서 20쇄를 찍을 수 있었다.
  • 서점을 통해 책이 판매되고 『마녀의 해머』라는 책을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면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만든 이데올로기가 공통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이 담당하는 역할을 당시에 책이 담당한 것이다. 인터넷이 현대판 마녀사냥의 온상이라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책이 발달하던 초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 마녀사냥이 창궐한 시기는 중세의 유토피아주의가 몰락하고 도시와 화폐 경제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 공간과 체계가 등장할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녀사냥은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녀들을 제거하면 공동체는 다시 과거처럼 평온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 교회는 마녀를 인간과 다른 별개의 종류로 생각했지만, 『마녀의 해머』가 출간된 뒤에는 구체적으로 ‘여성들’을 지목하는 일이 벌
  • 벌어진다. 여기에 ‘여성은 선천적으로 유혹에 약하고 머리가 나쁘다’라는 생각이 개입한다.
  •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과학적 지식을 통해 이런 생각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녀사냥에 근거를 마련해준 것은 초기 과학 혁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 처음에 인간과 다른 종류로 마녀를 규정하다가 구체적인 여성의 열등성을 중심으로 마녀사냥의 담론이 이동한 까닭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시적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
  •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녀사냥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 상징 행위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주도로 마녀사냥이 그렇게 대대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어떻게 힘이 약화된 가톨릭교회가 마녀사냥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교회가 강력했을 때 오히려 마녀들에 대해 관대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자발적인 대중의 호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 놀랍게도 마녀사
  • 마녀사냥이 한창 벌어졌을 때,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행동한다는 진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 의미화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명명은 곧 권력의 문제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선정성’이라는 재현 체계로 들어오는 순간 ‘의미’를 획득한다. 청
  • 들어오는 순간 ‘의미’를 획득한다. 청소년이라는 기표에 안주하지 않은 10대들의 행위가 포착될 때 사회는 부랴부랴 이를 ‘포섭’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이 포섭의 과정은 기성의 가치 체계로 이들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 ‘원조교제’나 ‘소녀시대’처럼, 그 양상은 다르지만, 결국 이들은 ‘상품화’라는 자본주의의 보편언어를 획득했을 때 비로소 가치화하는 것이다.
  • 외설성은 항상 이렇게 출몰한다. 알몸 뒤풀이라는 말은 알몸에 대한 금지를 통해 출몰했다. 이 금지는 10대들에게 ‘어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한국 사회의 시선을 통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어른이 알몸으로 활보한다면 해프닝이지만 10대가 그러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다.
  • 10대들이 교복을 벗어던지는 행위는 일종의 ‘자기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들이 하나의 ‘제식’으로 고정되는 순간, 이런 저항적 의미는 사라지고, 개인의 자기표현은 다시 억압당한다.
  • 반복 강박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반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충동의 산물
  • 세경이라는 타자의 시선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말은 시트콤을 ‘보는 자’에서 그 시트콤의 현실을 ‘사는 자’로 시청자들을 내려앉게 강제한다.
  • 세경의 눈에 비친 부르주아의 세계는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정작 그토록 갈구하는 사랑이 없는 곳이다. 순재와 자옥은 서로를 사랑하기보다 ‘소유’하기를 원할 뿐이고, 지훈과 정음도 자기 자신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다른 것을 상대방에서 발견하고자 할 뿐이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세계의 구성원들이다. 오직 세경만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시트콤의 효과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그 지점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 존 트라볼타John Joseph Travolta
  •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즐겁다. 남들이 착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착하다는 것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한때 유행한 “몸매가 착하다”라는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섹시한 몸매’를 ‘착한 몸매’로 등치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문제임을 증명한다.
  • <추노>에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았다기보다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 현실은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다. <추노>의 근육이 1980년대의 잔영이지만 다소 다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 문화 형식은 현실을 지도처럼 비율에 맞춰 ‘반영’하는 것이지, 현실과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문화는, 특히 대중문화는 고정적이지 않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고, 이로 인해 동일한 형식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판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 아름다움은 합의의 산물이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둘러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몸의 아름다움은 쾌락적인 판단이다. 이것은 감정과 정서에 근거한다. 감각적인 판단을 거쳐서 쾌인지 불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쾌와 불쾌를 나누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욕망에 근거한 윤리적 판단을 통해 대상을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아름다움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사회적 합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 것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내면에 선험적으로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인상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금 누구도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이상하다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파리에서 관객들은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름다움은 학습의 산물’이라는 진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예술 교육에 대한 철학들이 나온다. 예술을 통해 사
  • 사회를 계몽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정한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나 러스킨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러스킨은 문자보다도 시각 이미지를 더 투명한 것으로 파악해서 미술 교육을 강조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라는 진술은 예술 교육을 계몽의 문제와 결합시켰던 러스킨 특유의 관점을 드러낸다.
  • 이렇게 예술을 학습의 산물로 본다면, 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무관심한 판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감각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을 넘어선, 아니 이런 이해적 관계와 다른 무관심한 판단은 인식의 감각을 바꾼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감각’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는 계기다. 무관심한 판단이야말로 미학적인 판단인데, 여기에서 윤리적 위계에 따라 판단하던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너진다.
  •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판단은 하나의 차원으로서, 정치적인 것을 생성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정치-치안’과는 다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정치에 내재하는 과잉의 순간이다. 랑시에르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에게 정치적인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미학적 차원은 존재의 구성이다. 물론 이 구성은 일시적이고 가상적이지만, 실재의 작동이기도 하다. 랑시에르와 들뢰즈가 만나는 지점이 여기에 숨어 있다.
  • 자본주의의 상품화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아니 역으로, 욕망의 판단-쾌락 원칙에 들어맞는 ‘아름다움’만을 자본주의는 상품화한다. 기본적으로 상품은 합의된 아름다움을 반복한다.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의 휴대전화들은 내용물을 전혀 바꿀 필요가 없다. 오직 ‘디자인’만이 바뀐다. 그러나 이런 반복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새로운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저항이다. 새로운 것은 합의된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 발
  • 발생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합의를 깨뜨리는 새로운 미학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의 다른 차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애도라는 것은 상실의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심리 상태다. 이런 분리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상실의 슬픔에 자신을 내맡겨버리지 않기 위한 자기 보전의 욕망이 애도를 밀고 가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애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다. 누가 시켜서 애도를 하는 게 아니라 상실의 아픔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애도하는 것이다.
  • 언론과 방송을 뒤덮고 있는 애도의 깃발들이 말 그대로 애도와 상관없는 ‘깃발’처럼 보인 것은 왜일까? 애도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다기보다 애도가 과하게 넘쳐나서 그런 것 같다.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애도의 기능이라면, 이 상황은 오히려 없는 슬픔까지 몽땅 끌고 와서 ‘국민’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려는 행태처럼 보였다.
  •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개인을 책임지는 것은 사회였다. 사회는 시장에 협력하면서 동시에 시장의
  • 경쟁이 초래하는 스트레스를 중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여겨졌다.
  •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적 자본’이다. 이 자본을 재생산하는 역할이 가족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런 가족의 역할로 인해 ‘엄마-아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대치동 엄마’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것이다. ‘기러기 아빠’라는 기현상 또한 이런 변화가 초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 강숙은 충격으로 기절한 척 연기를 한 뒤에 은조에게 절대 집을 나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강숙에게 은조는 포기할 수 없는 ‘자본’인 것이다. 이 자본은 경제적 이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
  •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성공한 엄마’라는 심리적 만족까지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 명품은 실제로 시청자 대부분에게 실현 불가능하지만, 실현하고 싶어 하는 상상적 이미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 인터넷의 속성은 케이블 방송이라는 ‘하위문화’의 자유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규제하는 이중적 효과를 발휘한다.
  • 케이블 방송은 지상파 방송보다 더 현실에 근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국민의 알 권리’에 부합하는 것이 좋은 방송이라는 ‘계몽적 논리’를 내재하
  • 내재하고 있다
  • 케이블 방송이 항상 선정성 시비에 휘말리는 까닭은 사회적 금지의 경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케이블 방송이 욕망의 금지에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금지를 교묘하게 타고 넘으면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케이블 방송은 일상에서 우리가 원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공식화해주는 구실을 해왔다. 회사 ‘뒷담화’ 문화라든가, 남녀 관계라든가, 더 나아가서 개인의 성취를 다룬 감동적인 사연까지……. 케이블 방송은 지상파 방송이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욕망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요술 거울’이었던 셈이다.
  • ‘살롱좌파’
  • 부박한
  • 정치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욕망의 지형도’를 작성하는 도구로서 문화비평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고민했다.
  • 무람한
  • 지금 한국에서 절실한 존재들은 변화무쌍한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의 시대에 가장 격렬하게 욕망의 변증법을 작동시키고 있는 대중문화를 읽어내고, 그 읽기에서 ‘정치적 사유’의 계기들을 찾아낼 수 있는 문화비평가들일 것이다. 모든 대중문화는 정치적인 함의들을 감춰두고 있다. 이런 전제는 단순한 ‘반영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경제적 현실을 대중문화가 반영하고 있
  • 있다는 뜻이 아니라, 대중문화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대중문화야말로 정치적인 것을 관리하고 배제하기 위해 발명된 공동체적 도덕성의 구현물이기 때문이다. 소녀시대라는 대중문화의 형식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도덕적으로 향유할 것인지에 대한 공동체적 ‘대책’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대책은 자본의 운동이나 대중의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대중문화는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배제하려 하지만, 언제나
  • 이렇게 지워진 것들은 그 형식의 논리에 아로새겨져 있게 마련이다. 이런 원리, 즉 지극히 문화적인 것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이 출몰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상이다.
  •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자체가 ‘새로운 것’이라는 정치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아니다. 다만 이
  • 이런 매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과잉의 쾌락을 투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 구현되어 있는 무한한 복제능력은 특정한 내용을 탈맥락화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손쉽게 만들어버린다.
  •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혁명을 조장할 수는 없지만, 작은 혁명을 큰 혁명으로 격발하는 촉매제 노릇은 할 수 있다.
  • 영어판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나오는 정의를 참조한다면, “문화비평가는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비평하는 비평가”다.
  • 여기에서 언급하는 급진radical이라는 말은 ‘뿌리에서’ 문제를 본다는 의미다. 그냥 과격한 언사나 독설을 늘어놓는다고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을 뿌리에서, 발본적으로 사유하는 자가 문화비평가인 것이다.
  • 문화비평가는 존재한다기보다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존재하게 만들
  •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 그냥 기존의 장르 비평을 모아놓는다고 문화비평이 되는 건 아니다. 문화비평의 핵심은 장르 비평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문화비평은 장르 비평과 다른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비평은 장르 비평에서 다룰 수 없는 주제의식을 다루고, 궁극적으로 문화의 비평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문화비평은 언제나 전체의 관점에서 개별 문화 현상들을 바라보는 방법론을 고수한다. 그래서 문화비평의 단골 메뉴는 헤겔주의지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처럼 헤겔주의와 다른 관점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한 이론가도 있다.
  •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
  • 토머스 카일라일Thomas
  • Carlyle
  • 러스킨John Ruskin
  •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 어빙 배빗Irving Babbitt
  •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
  •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 문화비평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 좌파든 우파든 문화비평은 모두 정치적인 문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식의 문제와 문화비평이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은 어떤
  •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이다. 인식을 지배하면 지식 생산을 주도할 수가 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담론의 주도권을 인식의 지배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곧 비평가나 예술가의 윤리를 의미했다. 이런 까닭에 루카치는 리얼리즘을 “리얼리티에 대한 태도an attitude towards reality”라고 불렀던 것이다.
  • ‘실재에 대한 열
  • 열정passion towards the real’
  • 문화비평의 미덕은 형식을 통해 내용의 논리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언어나 코드라는 형식을 떠나서 리얼리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리얼리티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이 형식은 내용에 따라서 논리화하기 마련이다. 문화비평은 이런 형식에 각인되어 있는 내용의 논리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 문화비평은 어떤 정치 이론이나 철학 이론을 ‘적용’해서 대상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 드러나는 이론적인 측면들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것이다.
  • 문화비평의 목표 중 하나는 대문자 Culture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 대문자 Culture야말로 ‘고급문화’라고 불리는 형식들이다. 문화비평의 대상은 고급문화라기보다 그 고급문화 현상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비평이 관심을 갖는 건 “왜 특정한 종류의 문화생산물이 다른 것들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라는 문제다. 이를 통해 문화비평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 우듬지
  • 정치적인 것은 머나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 문화비평은 계몽을 재계몽하는 전략이다.
  • 어떻게 말하면, 문화비평은 계몽 이전에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비평은 계몽 이후 그 계몽의 물화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포착했고,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실천했으며, 후기 루카치가 미흡하게나마 맹아적으로 고
  • 루카치가 미흡하게나마 맹아적으로 고찰했던 여러 문제의식들이 파묻혀 있는 곳이다.
  • 모르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이런 언설은
  • 난센스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비평은 이미 문자로 계몽되어 있는 자들을 재계몽하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 쉽게 말하면, 나의 문화비평은 나의 장르다. 장르를 이해하려면 그 장르를 지배하는, 또는 구성하는 내적 논리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 문화정치학은 바로 현실에 난무하는 정치적 담론에 대한 대항테제가 아니라 보완테제다.
  • 짜임관계Konstellation
  • 실증적 논박에만 익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공론장에서 울퉁불퉁하게 불경한 상상력을 삽입하는 사유들은 저널리즘적 사유로 계몽되어 있는 독자들을 재계몽하는 일이기도 하다.
  • 벤야민에게 앎 Erkenntnis이라는 것은
  • ‘섬광 blitzhaft’처럼 오는 ‘사건’이다.
  • 페다고지pedagogy
  •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있었다. 그곳은 고디바 또는 고다이바라고 불리는 한 영주의 부인에 관한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고디바는 작인들의 인상된 세비를 깎아줄 것을 남편에게 호소했는데 남편은 고디바에게 옷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를 한 바퀴 돌면 청원을 들
  •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고디바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벌거벗은 몸으로 말 위에 올라 시장을 돌게 되고 민중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모두 커튼을 내리고 집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 문화사가들에 따르면 고디바 사건은 당시 봉
  • 봉건 영주들이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벌였던 정치적 쇼의 하나였다.
  • 코벤트리의 고디바 전설은 다른 지역의 유사 전설들이 가지지 못했던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  그 요소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인물이다. 양복 재단사였던 톰은 코벤트리 백성들이 모두 커튼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지 않을 때 호기심을 못 이겨
  • 고디바를 엿본다. 여기서 영어로 ‘피핑 톰’이라는 말은 벌거벗은 상대방을 몰래 훔쳐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피핑 톰의 존재는 더 이상 고디바의 희생의식이 공동체적 질서를 도모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암묵적인 공동체의 금기를 깨고 고디바의 벌거벗음을 훔쳐본 톰. 그 톰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지당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고디바 전설에서 희생양은 고디바가 아니라 피핑 톰이다. 피핑 톰을 희생시킴으로써 고디바
  • 고디바는 자기희생의 의미를 존속시킨다. 톰을 통해 사라져가던 자기희생의 고귀함을 더욱 강조할 수 있었던 고디바. 이 모종의 연루는 톰의 엿보기가 기존 질서에 대한 위반의 행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톰의 위반이 있었기에 고디바의 벌거벗음이 초월성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언제나 위반의 욕망은 초월성에 대한 종교적 경건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위반의 욕망과 종교적 초월성을 서로 이반시키지 말라. 모든 종교의 뿌리가 에로티시즘에 있다고 했던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통찰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 기존의 질서에 못 박혀 있는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 이것이 인문학의 원동력이며 예술의 희망이다. 그 초월의 의지가 바로 위반의 욕망인 것이다.
  • “베일veil”
  • 벤야민은 초기 연구에서 낭만주의 비평을 도그마적 이성주의를 넘어가려는 시도로 보았다. 칸트Immanuel Kant의 힘을 빌려서 낭만주의자들이 이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내세운 두 가지 범주가 바로 절대
  • 미와 예술작품.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칸트 철학의 룰을 순순히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칸트의 후학들은 형식을 예술미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들과 달리 형식을 본질을 구성하는 “반성의 표현the expression of reflection”으로 보았다.
  •  이런 맥락에서 낭만주의자들에게 예술작품은 자기 구성적인 것으로, 객관적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 형식은 예술작품의 중심이며 존재 기반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낭
  • 낭만주의자들은 칸트의 ‘비판’을 예술작품의 형식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당연히 자기 구성적인 예술작품에서 이런 ‘비판’은 예술작품 내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런 맥락에서 낭만주의자들은 비판이야말로 이 예술작품의 자기 구성을 추동하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은 예술작품의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의 숨은 의도를 재구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 벤야민에게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은 신비를 담보로 이념을 얻는 것이었다. 결국 낭만주의자들의 비판은 예술작품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리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고 벤야민은 생각했다. 말하자면, 낭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험적으로 현상을 규정하는 이데아일 뿐이고, 예술작품은 이 이데아를 발견하거나 구성해내기 위해 해체해야 할 희생물이었던 셈이다. 벤야민은 이런 낭만주의적 예술철학의 문제점을 지
  • 지적하기 위해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를 끌고 들어온다.
  • “예술작품은 비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이런 관점에 서면, 낭만주의 철학이 말하는 예술작품의 존재 가능성인 형식은 그들의 주장과 달리, 그냥 역사적 상황이 빚어낸 우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루카치 식으로 말하자면, 형식은 방법의 물화일 뿐이다.
  • 괴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은 폐허고 토르소torso다. 예술작품이 폐
  • 폐허라는 말은 언제나 역사의 개입으로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완전한 형식이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 이렇게 벤야민이 내용에 방점을 찍는 태도는 1930년대를 풍미했던 속류 유물론적 미학과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벤야민은 “진리내용Wahrheitsgehalt”과 “물질내용Sachgehalt”이라는 내용의 이중적 측면을 제기한다.
  • 우리가 구성 중에 있는 예술작품을 타오르는 장례식의 장작더미
  • 장작더미에 비길 수 있다면, 주석가는 화학자처럼 그 불꽃을 감상할 것이고, 비판가는 연금술사처럼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전자가 분석의 대가로 타버린 목재와 재만 남기는 꼴이라면, 후자는 불꽃 자체를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존하는 꼴이다. 바로 그것만이 살아 생동하는 무엇이라고 주장한다는 뜻이다.
  • 여기에서 벤야민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대상은 칸트적 비판의 개념에서 예술철학을 정초한 낭만주의자들이다. 벤야민은 당시에 신성한 절대적 방법으로 간주되었던 낭만주의적 ‘비판’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비판이 필요로 하는 구도는 세속과 불멸의 이분법이고, 이런 구도를 획득하기 위해 낭만주의자들이 시도한 것은 절대적 형식미의 범주를 이데아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벤야민이 공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절대적 형식미라는 것이 허상일 뿐이라는
  • 점이다.
  • 이런 측면에서 벤야민의 철학은 처음부터 ‘저기’보다 ‘여기’에 주목하는 성향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당대의 형이상학적 어휘로 논하고 있음에도, 벤야민은 이렇게 역사와 예술작품의 긴장 관계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벤야민은 “진리내용은 물질내용에서 출현한다”라고 하면서, “최소한 오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 진리내용과 물질내용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비판가들이 생동하는 것으로 보는 ‘불꽃’이고, 후자는 주석가들이 분석의 결과물로 내놓는 ‘재’다. 구체적 작품으로 예를 들자면, 사건의 내러티브나 줄거리, 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들이 물질내용이라면, 진리내용은 이런 표면적 상황들이 숨기고 있는 “심미적 진실”을 의미한다. 벤야민의 탁월성은 이런 단순 이분법을 넘어가고자 하는 그 시도에서 빛을 발한다. 벤야민이
  • 구체적으로 타격을 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진리내용과 물질내용을 전혀 다른 내용의 측면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태도다. 벤야민은 경험을 선행하는 물질성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리내용을 찾아내고자 하는 지향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말하자면, 벤야민에게 물질내용은 진리내용의 조건에 다름 아니다. 벤야민은 이런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진리내용이나 물질내용 중 어느 한쪽에 존재하는 것이 아
  • 아니라, 진리내용과 물질내용 그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비평은 주석이나 비판이라기보다, 이 긴장 자체를 에누리 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데아가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이데아를 발굴해내기 위해 형식을 해체해버리는 순간 아름다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근대 예술의 딜레마지만, 동시에 근대 예술미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 의미에서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진리는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음으로써 “신비성”을 간직한다고 본다. 이 비밀을 걷어내는 순간, 말하자면 비판이나 주석만을 가하는 순간,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우리는 기억 속에서나 아련한 ‘불꽃’에 낭만주의자들처럼 애절해하거나, 아니면 합리주의자들처럼 눈앞에 풀풀 날리는 ‘재’만을 놓고 예술작품에 감 놔라 떡 놔라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진리를 시간의 딸Veritas, filia temporis”
  • 벤야민이 아름다움이 “유사resemblance”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 쿨하려고 하기보다 서늘하도록 하자. 사실 주석가의 고리타분함에 일찍 지쳐버린 성질 급한 재사才士들은 곧잘 비판의 ‘쿨’함에 취해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냉소주의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이런 재사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지금 여기’에 있기보다 ‘과거 저기’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21세기 한국 문화에서 쿨하지도 않으면서 쿨한 척하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하는 것은 내 마음에 깃든 편견 탓일까?
  • 벤야민의 암시처럼, 모더니티의 판타지는 그것을 쿨하게 단번에 초월하겠다는 꿈이 아니라, 그 비루함과 산만함을 견디며 그것과 ‘함께’ 넘어가려는 서늘한 꿈을 통해 진정 그 바깥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쿨하기보다 서늘하기를 통해 우리가 잃을 것은
  • 노스탤지어겠지만, 얻을 것은 비루한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특별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 아도르노와 루카치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을 아버지로 두었다면, 벤야민과 루카치는 낭만주의를 삼촌으로 두었다. 물론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머니는 바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다.
  • 원래 유태인 혈통의 아버지를 가진 테오도르 루드비히 비젠그룬트가 자신의 성을 독일계 어머니의 성인 아도르노로 바꾸어야 했던 그 ‘나약함’과 이 징후는 연관되어 있다. 같은 유태인이었으면서도 당시 반파시즘 전선에서 강렬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루카치, 그리고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아편을 먹고 자살해버린 벤야민에 비해 그의 정치적 이력은 한마디로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참으로 허약한 것이었다.
  • 다른 유태인계 급진적 지식인들이 부랴부랴 소련이나 미국으로 나치즘을 피해 도주하던 그때, 아도르노만이 영국에 남아서 독일 대학의 교수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던 사실도 이런 그의 나약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아도르노가 미국에 건너가서 후기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파시즘의 책임을 몽땅 계몽 이성에게로 돌리고 있을 때,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서 파시스트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1960년대 말, 사르트르가 점거된 대학 건물에 홀로 들어가서 학생들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다고 화답을 해주고 환호를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아도르노는 대학 건물을 점거한
  • 학생들에게 내내 비판적이었고(심지어 그가 경찰의 대학 진입을 요청했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 연구에서 이에 대한 반론이 제출되기도 했다), 그 결과 강의실에서 여학생 해방대원의 젖가슴으로 성희롱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몇 달 뒤 스위스 요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성격적 나약성이 인간적 결함일 수는 없는 법
  • 학문 분야에 따라서 이 방법에 대한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본다면 추상적 세계관을 구체화시키는 체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대개 근대를 지배하는 방법을 우리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고, 이런 과학적 방법의 상징적 창시자로
  • 이런 과학적 방법의 상징적 창시자로 갈릴레오Galileo Galilei를 염두에 둔다.
  • 과학적 방법은 철학의 형제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근대는 과장 없이 말해서 과학적 방법론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러니까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
  • 하고, 결과를 도출해서 가설의 정오正誤를 증명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 낭만주의자들의 방법론은 과학적 방법론에 내재한 경험주의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비판을 하기 위해
  • 필수적인 것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원근법적 구도다. 일종의 심미적 인식방법론이었던 원근법이야말로 비판이라는 근대적 방법론의 구조였다. 비판은 하나의 소실점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이 소실점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시성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낭만주의자들의 방법론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일 수밖에 없다.
  • 낭만주의자들의 비판은 “유토피아”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거리를 확보할
  • 수 있었다. 이런 낭만주의적 방법론의 정수는 신칸트주의Neo-Kantianism로 전승되어 제도화된다. 흥미롭게도 이런 신칸트주의적 방법론은 지멜이나 베버Max Weber를 통해 세계대전 전야의 독일을 풍미했다.
  • 낭만주의자들은 높은 산을 먼저 올라간 선지자들로서 일부는 그 산정에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고, 일부는 하산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산으로 이끌어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신칸트주의는 하산한 사
  • 사람들 중에서 “산정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라는 자각에 도달한 사람들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여전히 산정의 유토피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헤겔주의를 선택했지만 말이다.
  • 때문에 신칸트주의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유토피아주의를 한곳에 뒤섞어놓았던 낭만주의와 결별하고, 신의 범주를 삭제한 상태에서 인간사회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이들이 새롭게 설정한 범주가 바로 ‘문화’다. 칸트는 문명과 문화를 구분하면서,
  • 전자를 문화의 물질적 제반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문화란 가변적인 것이고 현상적인 것이다.
  • 신칸트주의자들은 칸트의 정식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신칸트주의는 칸트주의와는 아주 상이하고, 오히려 본질적으로 본다면 반反칸트주의에 가깝다.
  • 신칸트주의적 방법론에서 핵심적인 범주는 “타당성Geltung”이다. 오늘
  • 오늘날 이 타당성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사람이 하버마스Jurgen Habermas지만, 어쨌든 타당성이라는 범주는 칸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주장에 대한 근본적 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칸트주의를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다.
  • 칸트에게 “개념”은 경험적 세계에 “선험적”으로 적용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
  • 획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칸트에게 개념은 선험적 비판의 근거들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개념의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고 그것의 합법적 사용을 궁구했다. 한편, 신칸트주의자들은 명제의 타당성이라는 것은 이런 경험적 세계와 무관하게 “논리”를 통해서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가치체계나 타당성의 영역은 플라톤의 “아이디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에게 이런 “아이디어”는 일종의 형식forma이었는데, 이
  • 이는 절대적 인식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어떻게 보면, 근대의 합리주의는 이런 플라톤의 정식을 뒤집어놓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근대의 인식체계에서 형식은 절대적 인식의 대상이라기보다 절대적 인식으로 과장되어 있는 판타지의 응결 정도로 비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식은 플라톤의 정의와 반대로, 리얼리티라는 절대적 인식의 대상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셈이다. 물론 신칸트주
  • 신칸트주의는 이런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기에 가치체계와 타당성의 영역을 경험으로부터 분리시켜버린다.
  •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 전자는 가치를 타당성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문화과학을 자연과학과 분리시킬 것을 주장했던 반면, 후자는 자연과학 자체도 일종의 상징
  • 상징체계로 봄으로써 양자의 분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 전자는 가치 형식들이 절대적 ‘당위’로서 진리, 미, 신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후자는 이런 당위적 연관성 자체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 인식의 문제를 당위에 위치시켰던 신칸트주의의 바덴 학파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심대한 타격을 입고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란 기존의 가치체계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거대한 욕망 기계이기 때문이다.
  • 당시 바덴 학파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베버와 같은 지식인들은 다분히 낭만적 입장에서 전쟁을 영웅적 행동으로 보고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죽음과 공포로 점철된 비참한 현실이었다. 이런 리얼리티의 ‘귀환’으로 인해 바덴 학파는 신칸트주의의 주도권
  • 주도권을 마르부르크 학파에게 넘겨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 세계 인식에서 유토피아적이었던 바덴 학파의 퇴조 이후에 신칸트주의에 지배적인 경향은 인식론과 미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카시러의 철학이었다. 카시러는 칸트의 순수 인식의 문제를 헤겔주의적 일반화로 재구성해냄으로써 전혀 새로운 이론의 영역을 개척했다. 다시 말해서, 카시러는 칸트의 경험 형식을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헤겔적 개념에서 역사적 형성물로 간주했다.
  • 생철학
  • 카시러가 갱신한 신칸트주의
  • 우리가
  • 문화의 핵심으로서 예술을 간주하는 태도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리얼리즘의 명제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예술은 삶의 정수를 담아내야 한다’라는 주장 또한 다분히 신칸트주의적인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브레히트를 제외하고, 루카치와 벤야민, 또는 아도르노와 같은 많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자들이 내세운 명제들은 많은 부분 신칸트주의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 신칸트주의적 범주에 따르면, 모든 문화 형식은 특정 시대
  • 시대의 특정 세계관을 구체화하고 있는 상징 형식symbolischen Formen들이다. 당연히 이 상징 형식들은 상호 호환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철학과 예술, 심지어 대중문화 사이의 근원적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모든 새
  • 새로움은 항상 낡은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괴테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첨단의 어휘로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담론들과 구분될 만한 그 어떤 ‘새로운’ 전제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 이들은 인식과 미학을 구분 짓고, 윤리와 존재론을 염연히 다른 영역으로 간주함으로써, 개념Begriff을 모순의 해결로 보았던 신칸트주의와 달리, 개념을 모순의 변증법적 대치 상황으로 볼 것을 주문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신칸트주의적 미학의 전제와 달리, “균질 공간”과 같은 텍스트의 단일성은 존재
  • 존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무엇 때문에 극구 자신을 마르크스의 적자라고 주장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데리다에게 텍스트는 세계관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의 구체화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그 자체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전제는 분명 신칸트주의적이라기보다 마르크스주의적이다.
  • 물론 마르크스에 더 가깝다고 해서 더 정당하고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친근성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리얼리티와 얼마나 적절하게 싸우고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기 때문이다. 리얼리티와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실패의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리얼리티와 정당하게 싸우는 사상가는 그 실패를 통해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면서 이기는 인문학의 역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굳건하게 터를 잡는 것이다.
  • 신칸트주의적 경향은 기본적으로 개별적 문화 현상들을 보편적 체계의 산물로 본다. 이에 비해 헤겔주의적 경향은 체계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되, 거기에 개입하는 매개의 범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 벤야민에게 변증법
  • 변증법은 ‘충격’을 의미했다. 이 충격을 통해 역사적 상황은 순간적으로 동결된다. 동결의 변증법. 벤야민에게 변증법은 매개를 전제하지 않는 일종의 계시illumination와 같은 것이다.
  • 변증법을 변화라는 현실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주장을 통해 벤야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의 의지라기보다 그것과 무관하게 주체에 틈입해오는 객관의 물질성이었다.
  • 정태성
  • 매개는 헤겔적 범주로서, 객관에 개입하는 주관의 행동을 의미한다. 크게 보아 일반적으
  •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실천이라는 말을 매개로 보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벤야민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 벤야민은 이때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직관적으로 성찰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 등장하는 터키 옷을 입
  • 입은 체스 두는 기계 이야기가 이를 암시한다.
  • 체스 기계는 단순한 은유라기보다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체스 기계는 1770년 헝가리인 발명가 바론 볼프강 폰 켐펠렌Baron Wolfgang von Kempelen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19세기 초반까지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각종 유명인들과 체스를 둬서 연전연승을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처음에 사람들은 이 기계가 완전한 자동장치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체스 기계는 거짓이고, 난쟁이가 기계 상자 안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판명이 난다. 오늘날로 치면 이른바 희대의 사기 사건이었던 셈인데, 문제는 이런 폭로를 통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부터 이 체스 기계는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
  • 때문이다. 말하자면, 역설적으로 학자들은 이 체스 기계야말로 기계공학과 인간을 적절하게 결합한 모범적 사례로 평가했던 것이다. 벤야민이 이 체스 기계를 자신의 테제 첫머리에 올려놓고,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로써 벤야민은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보다 앞서 이데올로기의 이중적 기능에 대해 선구적으로 언급한 철학자임이 분명해진다.
  • 허위를 통해서 진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개념을 통한 새로운 사유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다윈주의의 의의는 ‘신’이라는 절대적 기원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신학적 과학관을 완전히 종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생명 진화의 원리를 자연환경에 적응한 개체 생존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다윈의 자연선택론인데, 이 말
  • 말은 역으로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은 개체야말로 진화에 성공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윈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접한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의 인구론 때문이었다.
  • 이론적으로 맬서스와 다윈은 ‘최적자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상부상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맬서스의 영향을 받은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맬서스 자신의 인구론 또한 과학적 근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의 기본 개념은 사회적 진보와 자연적 진화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개체들이 살아남는 사회선택의 진화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관점에서 스펜서는 자유방임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면서 생존경쟁을 통해 사회 부적자의 제거와 계급화의 심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회에서 모든 개인이 고유한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가장 완벽한 평등주의를 구현
  • 구현한 것이라고 스펜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 “살아남을 자만 살아남아야 한다”
  •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윈의 진화론을 만나서 만들어낸 놀라운 발상인 셈이다.
  •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여전히 19세기적 과학주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 미국 듀크 대학 교수이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함께 『제국Empire』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오늘날 국제적인 지성사를 구성하는 세 축으로 미국 경제학, 프랑스 철학, 이탈리아 정치학을 꼽았는데, 이런 풍경은 영국 경제
  • 경제학, 독일 철학, 프랑스 정치학이 주도하던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 “독일 철학은 프랑스 잡담을 가져가서 심각하게 만든 말에 불과하다”
  • 결핍의 보상심리가 철학의 기원이다.
  • 3H—헤겔, 후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 흑림에 은거하던 하이데거를 찾아간 프랑스 병사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배낭에서 꺼내 저자의 사인을 청했다는 이야기는 전쟁의 폭력이라는 심각성을 넘어선 철학적 유머를 선사하는 에피소드다.
  • 에콜 노르말
  • 루이 알튀세르
  • ‘세계화’로 통칭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출현은 국가나 공동체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개인에 대한 의미 규정을 ‘능력 있는 존재’라는 범주로 바꾸고 있다.
  •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할 비판적 사유
  • 한국에서 지식인의 종언은 인터넷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 글쓰기의 출현은 ‘글 쓰는 존재’로서 권위를 부여받았던 지식인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 측
  • 측면이 강하다. 조금 복잡하게 말하자면, 지금 ‘생각하는 주체들’은 인터넷이라는 사유 기계를 통해 사유하는 인터넷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책을 찾아보는 세대지 책을 통해 인터넷에 들어오는 세대가 아닌 것이다. 책을 통해 공부하고 관념 세계를 만든 다음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세대와 다른 세계관
  • 을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학습하고 자기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완전히 다른 세대들이 나타난 셈이다.
  • 인터넷 세대와 이전 세대가 글을 독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대체로 사전 지식체계에 글의 내용이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사전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다중매체는 과거에 불가능했던 이런 쌍방향 소통에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터넷 때문에
  • 읽고 쓰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적절한 현상 진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는 독해 방식의 차이라기보다 글에 대한 냉소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기 때문이다.
  • 이전까지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본적인 정치 의제는 바로 정권을 평화롭게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화로운 정권 교체 이후 어떤 내용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지향이 무엇인가, 이념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문
  •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들은 고스란히 과거의 습속을 되풀이하거나,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과 다른 괴리들을 노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중들, 특히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새로운 세대의 대중들은 정치인과 지식인 전반에 대한 냉소주의를 체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대중들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상한 공간이다. 공간만이 남아 있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마땅한 이 모순의 조건에서 지식인의 글쓰기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 차라리 속내를 감춰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이 노교수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철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런 철학의 보편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철학의 기원은 밀레토스라는 그리스의 소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그 열매는 서구에서 거둬들였다.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그 철학의 사유는 그리스의 철학을 서구가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서구로 이동한 철학의 ‘여행’에서 우리는
  • 지정학의 경계를 초월한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동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이 ‘앎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사랑은 굳이 서양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나 유럽 백인이라는 인종에 국한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다. 이런 근거에서 보편적 사유를 수행할 수 있는 흑인 철학자나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
  • 동일성보다는 차이에서 우리는 흑인 철학자와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실제 서구의 철학사는 흑인과 동양인이라는 타자의 영역을 배제하면서 지정학적 특수성을 위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 철학이 없다고 했던 하이데거의 언술은 동양인에 대한 폄하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서구 철학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럽 백인의 사유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정
  •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 안톤 빌헬름 아모Anton Wilhelm Amo
  • 해석학의 출현이 근대적 공간의 확장으로 인한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러나 서구 철학이 인정해온 이런 막연한 타자의 범주는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외부의 타자
  • 타자를 설정해놓고 내부는 순수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새로운 사유를 요청할 때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인문좌파라는 ‘새로운’ 개념 역시 그렇다. 인문좌파라는 개념의 필요는 ‘좌파’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우파나 좌파라는 규정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특정 사회의 정치적 경향성을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 좌파와 우파는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규정 자체는 언제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
  • 우파는 언제나 ‘주체의 범주’를 포함하는 것이고, 주체화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하자면, 완전한 우파나 좌파는 없다. 이 둘은 언제나 대자적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우파만 존재하거나 좌파만 존재하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 우파는 좌파라는 거울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주체화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
  • 때문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사라진다면 우파도 무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좌파라는 거울이 사라지면 우파는 자신을 우파로서 확인시켜줄 타자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메모푸코 포스트모더니즘
  •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좌
  • 좌파나 우파는 자유주의에서 이론적 근거를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유주의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것이 한국의 이념 지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좌파는 대체로 유럽식 자유주의를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고, 자유주의 우파는 미국식 자유주의,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에 논리적 젖줄을 대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 ‘수구’라고 불리는 ‘오래된 우파’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 파시스트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반공주의와 자유주의를 결합시킨 한국형 자유주의자들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낡은 자유주의는 반공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위해 개인의 자유
  •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 스미스주의자
  • 마르크스주의는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었다기보다 경력을 장식하기 위한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당해온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 촛불의 주체는 ‘운동’에서 출몰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좌우파가 말해왔던 이념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에서 ‘인간’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그 전일적 완전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서 ‘인간’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발견하고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와 라캉Jaques Lacan을 거쳐 정식화한 ‘주체의 범주’를 뜻한다. 인문
  • 인문좌파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범주’다. 실제로 주체는 있는 것이지만, 또한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재의 대상이 바뀔 때마다 주체의 위치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는 좌파의 전유물이었던 ‘혁신’을 가져가서 우파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시장의 혁신성은 복지국가라는 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평하고 역동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 오늘날 누구도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을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상품 분석이나 축적 체계의 법칙에 대한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잉’이다. 마르크스가 상품 분석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도 이 문제다. 마르크스의 논점은 아무리 많은 상품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잉여가치라는 것이 가
  • 가능하려면 거기에 언제나 이미 과잉이 투여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필요를 뛰어넘는 욕망의 차원에서 상품의 교환이 작동한다는 뜻이다.
  • 여기에서 주체화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자본주의적 주체는 자본주의의 상품 구조가 만들어낸 부차적 생산물이지만, 이 생산물은 언제나 그 속에 과잉을 기입하고 있다. 이 과잉은 자본주의적 상품 구조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주체화의 과정에 체현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의 범주를
  • 벗어난 주체는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주체화는 상품화를 전제한다.
  • 상품화는 하나의 재현 체계로서 합의된 즐거움 이외의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규정해버린다. 인문좌파는 이렇게 가치 없는 것으로 제거되어버린 것에서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찾아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마르크스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사유의 절대 지평
  • 모든 자본주의가 축적을 중요한 내적 동인으로 포함한다
  •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마르크스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대박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 돈을 잃으면 한쪽이 돈을 버는 아이러니는 여기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 이것은 단지 새로운 칼이 잘 들지 않으니 오래된 칼을 끄집어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유영철이라는 이름의 30대 남성이 서울 지역에서 부유층 노인 및 윤락 여성 등 총 21명을 연쇄로 살해한 사건.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에 이어 같은 해 8월 13일 구속 기소, 2005년 6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를 세상에 알린 이 사건은 이후 2008년 <추격자>로 영화화되었다.
  • 연쇄살인범은 나타남으로써 존재한다.
  •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면, 그는 한 명의 범죄자라기보다 하나의 구경거리인 듯하다. 스펙터클 말이다.
  • 구조 결정성에 앞서 도덕적 판단의 몫은 인간의 자유의지기도 하기
  • 유영철을 놓고 논하는 이런 말들 속에 정
  • 정작 유영철 본인은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유영철이라는 개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우리는 오직 경찰 진술과 그걸 잽싸게 옮겨놓은 언론 보도만을 믿고 있을 뿐이다.
  •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잔인하면서도 교활하기까지 한 살인마의 행각에 치를 떤다. 아니, 치를 떨면서도 재미있어한다. 참으로 묘하다.
  • 유영철 주변을 맴돌고 있는 숱한 말들은 실재의 유영철, 우리의 관심을 끌기 전에 존재했
  • 존재했던 ‘평범한’ 그 사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굳이 이런 말들은 ‘유영철’이라는 특정 개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희대의 살인마라는 말은 항상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다가 유영철이라는 대상을 발견했을 뿐이다.
  • 우리는 이미 희대의 살인마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유영철은 이 이야기를 위한 새로운 주인공으로 ‘발견’된 것이다. 유영철의 추가 범행 사실이 점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실재의 유영철은 오리무중으로 빠져
  • 빠져들지만, 살인마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말하자면, 추가 범행 사실은 유영철의 범행 동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부유층을 살해했다는 동기는 그늘의 존재들이라고 할 성매매 여성들도 같이 살해함으로써 전혀 동기 구실을 못한다. 이혼으로 빚어진 상처 때문에 여성들에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는 추측도 그가 버젓하게 남성 노점상도 살해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 그의 범행은 우발적 동기에 따라 지속되었다. 다만 우리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우리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그의 우발적 범행은 계속되고 있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영철은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범인이 아니다. 다만 그는 그를 통해 ‘살인의 추억’을 반추하고자 하는 우리를 위해 주도면밀하게 발견되었을 뿐이다.
  • 수십만이 모인 그 집회에 어떻게 국민이 없을 수 있을까.
  • 이 집회를 시작이 아니라 끝으로 봐야
  • 국민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이들은 뭔가 국가에 대해 합의하는 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막연하나마 무슨 국가 정도는 합의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당연히 이런 국가상이 만들어지려면, ‘민족’이라는 하나의 범주가 존재해야 한다. 이제는 유명한 말이 되어버린 ‘상상 공동체’처럼, ‘떼거리’에 지나지 않는 근대적 주체가 민족이라는 집단적 주체로 거듭나려면, 합의된 상상
  • 상상력을 확보해야 한다.
  • 백일몽을 꾸었던 걸까. 아니면, 함께 잠자리에 누워 제각각 다른 꿈들을 꾸었던 걸까. 여기에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10월 4일 구국집회는 균열을 드러낸다.
  • 그 형형색색을 맛보기로 치면 오곡밥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은 겉모습일 뿐이다. 이런 겉모습의 다양성은 이렇게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국가의 위난을 맞아 국가보안법 철폐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할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발현시키는 다른 본질적 다양성이 겉모습 아래 숨어 있다. 그 본질적 다양성은 다양성이라기보다 이질성이다.
  •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 사이에 가로놓인 현실적 간격을 매끄럽게 이어놓는 그 무엇이 구국집회에 있었던 것이다.
  • 그 무엇을 ‘구국’이라고 말한 것 같다.
  • 스펙터클의 주인공을 마땅히 우리는 ‘계급’이라고 불러야 한다. 말하자면, 10월 4일 구국집회는 한국 부르주아의 ‘해방 선언’이었던 것이다.
  • 이들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야 함에도 너무 능력이 없다. 이들을 계도할 철학도 이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 철 지난 영화관에서 2본 동시 상영에 목숨 걸고 있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이들의 아우성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 우익이 교회를 이용하는 게 아니다. 실상은 교회가 우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음란한 대상을 은폐하는 판타지는 ‘국가보안법-사립학교 개정법-자유민주주의’라는 이질적 요소들을 매끄럽게 연결시킨다. 서로 이질적인 세 축은 존재하지 않는 ‘국민’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환상의 트라이앵글이다.
  • 한국 교회는 일어나서 대한민국을 구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자기 자신을 구할 뿐이다.
  • 공산주의 국가가 천연기념물로 변해가고 있는 마당에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공산화될 것이라는 생각은 좌파들조차도 하지 않기
  • 이들이 때늦은 시각에 이토록 절실하게 공산주의를 호명하는 까닭은 북한이라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북한은 이들의 적군이 아니라 우군이다. 북한이 없다면, 이들의 판타지는 논리적 일관성을 획득할 ‘실재의 응답’을 확보하지 못한다.
  • 제각기 놀고 있는 이해관계의 균열을 메워주기 위해서 북한은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 역설적으로 구국집회를 종교가 나서 주도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 우익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우익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담론조차 종교에서 빌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은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충남 연기·공주시로 이전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계획이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라는 공약
  • 공약에서 출발, 취임 후 대통령 산하 신행정수도건설 추진기획단을 발족, 2003년 신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면서 진행되었으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한 헌법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고,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으로 재구성되었다.
  • 헌법재판소가 『경국대전』을 들먹
  • 들먹이며 행정수도 이전을 위헌으로 판정
  • 이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사태를 봤고, 또 진지한 결정을
  • 내렸을 것이다. 광인은 자신을 광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다.
  • 이것은 상처의 문제가 아니라 나태다. 베네
  •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Richard O'Gorman Anderson의 말처럼, 근대 집단은 대개 과거 사회에 빗대어 자기네 집단의 정체성을 상상한다.
  •  이런 맥락에서 민족은 상상 공동체인 것인데, 이 말은 잦은 오해와 달리 민족 자체가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이 지칭하는 건 민족의 형성이 이런 허구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상징 행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런 까닭에 민족은 없고 민족주의는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없는 민족이 아니라 있는 민족주의다. 민족
  • 민족주의는 ‘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탈할 바깥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다.
  • 겉으로 보기에 민족주의는 단일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민족주의는 민족과 조우할 수 없다. 민족은 매끄럽게 환상을 직조해내는 민족주의와 달리 지리멸렬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범주 내에 얼마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이런 이질적 흐름들을 단일하게 수렴시키는, 또는 하나의 상징으로 모든 차이를 빨아들여버리는 게 민족주의라
  • 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외설적 대상을 감추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이 끔찍한 대상은 다름 아닌 ‘계급’이다. 한국 사회에서 무자비하게 통용되는 ‘동포同胞’라는 말은 계급의 분열을 회피하기 위한 진통제다. 미국에 별장을 서너 개씩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과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서 헤매고 다니는 한국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세포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차이를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이야
  • 것이야말로 이른바 ‘관습’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신념체계다. 이 장엄한 거짓 신념체계, 여기에 우리의 중세는 완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조각나
  • 조각나서 흩어진 민족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의 중세는 계속 조선 시대라는 유령을 현실 속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것이다.
  • 드라마만 놓고 봐도 한국에서 ‘불륜’은 한국 사회를 읽어낼 주요한
  • 코드 중 하나일 것 같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불륜 드라마를 이해하는 건 일정한 한계를 미리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한국 영화에 난무하는 ‘욕설’이나 ‘폭력’으로 현실의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으로 특정한 문화 현상이나 형식을 분석하는 건 필요 이상의 재미를 주지만, 정작 이런 문화 현상을 출현하도록 만든 근
  • 근본 원인에 대한 사유를 차단한다.
  • 이런 징조가 머무는 망망한 ‘낯선 곶’은 등대도 무적도 갖고 있지 않다. 불륜이라는 징조는 접안할 적절한 부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수면 위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 키취kitsch
  •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불륜 드라마의 편수를 들먹이며 한국 사회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것은 다소 우스꽝
  • 우스꽝스럽다. 또한 반대로 불륜 드라마를 만드는 방송국의 드라마 작가나 피디의 말처럼 불륜 드라마를 “현실의 반영”으로 옹호하는 것도 별반 의미가 없다. 이런 이해 방식은 모두 ‘드라마=현실’이라는 원시적 예술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하다. 예술작품의 현실성을 강조하기에 여념 없었던 마르크스주의 미학자들조차도 이렇게 용감한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 “불륜 드라마가 현실의 불륜을 조장한다”라는 믿음은 “강남 유부녀치고 애인 없는 경우가 없다”라는 풍문과 뒤섞여 스캔들의 회전력을 만든다. 이 재빠른 회전에 말려드는 순간 우리는 불륜이라는 현상에 숨어 있는 징조의 순간을 놓쳐버린다.
  • 오늘날 불륜 드라마는 현실의 가부장제를 넘어가려는 중간계급의 (여성) 판타지다.
  • 중요한 건 이런 드
  • 드라마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무엇을 감추기 위해 발명된 스크린이라는 것이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려는 상황이 불륜의 징조를 유발한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란 ‘사랑의 부재’를 증언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다.
  • 불륜의 징조는 소박한 차원에서 지금 현재 개인이 처한 현실을 넘어가려는 바람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차원에서 다른 사회적 체제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불륜 드라마는 이 열망의 물화가 빚어낸 하나의 징후다. 이런 바람과 열망은 현실의 일부일처제나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재투여되기도 하지만, 이 재투여의 과정을 빠져나가는 무엇이 항
  • 항상 이들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실재와 과감하게 부딪혀 생을 소진해버리려는 내재적 충동이다. 이건 에로스가 아니라 타나토스에 더 가깝다.
  • 2004년 11월 17일 치러진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다수의 수험생들이 휴대폰을 이용하거나 대리시험을 통해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계획, 시험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건. 이들은 ‘바bar’형 휴대폰 수십
  • 저지른 사건. 이들은 ‘바bar’형 휴대폰 수십 대를 우편으로 구입, 수능시험일 몇 달 전부터 분담과 협업을 통해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계획했고, 시험 하루 전 고시원에서 합숙하면서 이른바 공부를 잘하는 선수 집단, 공부가 조금 뒤떨어지는 일반 수험생 집단, 후배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도우미 집단 등으로 분담해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시험 당일, 선수들은 송신용과 수신용 휴대폰 2개를 어깨나 허벅지 등에 부착하고 정답 번호 숫자만큼 부착 부위를 두드려 고시원에 대기 중인 도우미들에게 신호음을 전달, 도우미들이 각각 선수들로부터 전달받은 답안 가운데 다수의 답을 정답으로 보고 정리해 선수들과 일반 수험생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 전송했다. 이들의 성적은 모두 무효처리 되었고 부정을 주도한 일부는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 나머지는 가정법원 송치가 선고되었다.
  • 어른 뺨치는 십대들의 조직범죄라는 표현을 넘어서서 사건은 지역감정이라는 해묵은 뱀파이어를 호출하기도 했다. 심층에 잠복한 본질을 불러내는 이런 현상들. 그래서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겉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를 드러
  • 드러내는 내시경이다.
  • 이동통신은 시공간의 거리를 소멸시켜버림으로써 개별적 시공간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의 조직력이다.
  • 수능 부정 사건은 철부지 10대들의 불장난이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건은 어른들 뺨치게 세상물정을 잘 알고 있는 ‘아이어른들’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이들을 ‘철부지’로 만드는 건 어른들의 판타지다. 이미 우리들이 함부로 순진한 학생들이라
  • 학생들이라고 부를 그 존재들은 사라지고 없다.
  • 사건의 핵심은 부정행위 가담자들에게 아무런 윤리적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자기들만의 윤리의식을
  • 가지고 있다. 금전적 대가보다 ‘친구의 부탁’으로 이번 일에 가담했다는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친구들 간의 윤리를 위해 세상의 윤리를 위반한 것이다. 이것은 흔하디흔한 어른들의 부정행위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들만의 윤리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내면세계다. 이들을 ‘범죄자’나 ‘희생양’으로 간편하게 대상화시키는 건 이들 자신의 미래로 보나 우리 사회 전체로 보나 적절하지 않다.
  • 이순신은 불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순신은 분열이다. 다시 고쳐 말한다면 이순신은 불멸의 분열이다. 우리에게 하나의 이순신은 없다.
  • 박정희 정권은 ‘이순신 이야기’를 완벽한 영웅 서사시로 만들어냈다. 흥미롭게도 이 서사시에서 악은 조선을 침공한 왜적이 아니라 원균이다.
  • 강인한 이순신과 비굴한 원균의 대립 구도는 그대로 파시즘 담론의 윤리 코드를 이룬다.
  • 역사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 것은 <허준>
  •  이후다.
  •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요구에 따라 마음대로 재창안해내는 일은 이제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의 특징처럼 보인다.
  •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이순신은 과거의 이순신과 다르다. 박정희 정권을 통해 만들어진 성웅 이순신도, 그에 대항해서
  • 만들어진 탈신화화된 인간 이순신도 아니다. 이 이순신은 개혁의 화신이다. 중세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 이순신은 졸지에 현대의 글로벌 경쟁 시대를 헤쳐 나갈 모범적 인물로 등장한다.
  • 말하자면 <허준>의 경우처럼 <불멸의 이순신>은 현실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명된 계몽주의 드라마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기에 드라마의 논리상 절대적 악인은 등장할 수 없다. 다만 주인공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나중에 주인공의 의지와 통합되는 인물이 등장할 뿐이다.
  • 이런 드라마에서 적은 그 무엇도 아닌 원리원칙을 지키는 주인공을 좌절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다. 말하자면, <불멸의 이순신>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건 장대한 스펙터클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의 극적 효과도 아니다. 정작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주인공의 원리원칙주의가 빚어내는 갈등이다.
  • 오히려 <불멸의 이순신>은 모방의 차원이 아니라 상징의 차원에서 실재를 내포하고 있는 징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 2004년 승용차를 훔친 후 부녀자를 납치해 현금과 신용카드를 빼앗는 등 3차례의 강도와 12차례의 절도 행각을 벌인 혐의로 전국에 수배된 특수강도 용의자가 얼굴이 이쁘다는 이유로 강도 얼짱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던 사건. 한 네티즌이 수배 전단에 나온 20대 여자 용의자 사진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후 네티즌들 사이에서 ‘강도 얼짱’ 신드롬이 일었다. 회원 수가 6만 명에 이르는 팬 카페가 생기는가 하면 “미녀가 오죽하면 강도 행각을 했겠냐?”는
  • 동정론이 일기도 했으나, 그로부터 1년 뒤에 공범인 남자친구와 함께 체포되었다.
  • 비판이 편한 건 언제나 그 비판의 도마 위에 비판자 자신은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자가 그 비판의 대상에서 빠진, 반성 없는 비판이야말로 또 다른 병리 현상이다.
  • 문제는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표준으로 외모를 마구 재단해버리는 풍조다. 외모는 하나의 이미지고, 이미지 없이 남을 알아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지는 관계의 전제다.
  • 따라서 외모지상주의는 없다. 다만 “이것만이 예쁜 외모다”라고 믿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을 뿐.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얼짱이나 몸짱을 두고 열광하는 그 ‘병리 현상’이 아니라 이 현상의 또 다른 면, 현상과 하나를 이루는 현실이다.
  • 강도 얼짱 사건과 유사한 사례가 1920년대에도 있었다고 한 재판 기록은 말한다. 미녀 살인 혐의자에게 쏟아졌던 세간의 관심과 그에 대한 감형 청원 해프닝은 얼짱-몸짱 신드
  • 신드롬이 급조된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놀랍게도 얼짱-몸짱 신드롬이 드러내는 것은 서구 고전주의다. 서구의 고전주의는 완벽한 육체에 대한 찬미에 지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
  •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 행위라고 18세기 독일의 미학자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주장했지만, 우리는 예쁘고 잘생긴 외모라면 무얼 해도 용서받는 21세기 한국의 현실에서 18세기의 미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얼짱-몸짱 신드롬은 이런 불안과 공포를 잊기 위한 무의식적 반응이다. 불안과 공포는 알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힐 때 나타난다. 그냥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외모는 이런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얼어붙는다. 이제 시장은 ‘외모’를 상품으로 포획한다. 외모가 바야흐로 돈이 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 이건 가혹한 경쟁 사회를 견디고자 발명된 환상이다. 이런 환상은 현실의 혼란으로부터 도피해서 질서와 안정을 얻고자 하는 염원이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짱-몸짱 신드롬은 이 염원의 출구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신드롬을 벗어나기보다 즐기기를 갈망한다. 얼짱-몸짱 신드롬이 고전주의는 고전주의되, 공허하게 요란한 빈껍데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 1980년대를 통과해온 운동권들이 이른바 ‘사회주의자 선언’으로 구별 짓기를 시도할 때, 그는 난데없이 ‘자유주의자 선언’을 들고 나왔다.
  • 북한을 척결해야 할 주적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남한 자본의 이윤을 창출하기에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봐야 할 필요성은 그때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 강준만이 ‘성역과 금기’를 무시하며 비판의 예봉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시대적 변화를 절묘하게 읽어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때는 무르익었던 것이다.
  • 어떻게 보면 강준만으로 인해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담론들도 제 빛깔을 선명하게 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2002년 지자체 서울시장 선거 때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이문옥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을 맡았던 진중권이 민주당과 김민석 후보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서슴지 않으며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강준만을 끌어들여 논쟁을 벌였던 사건. 그러나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은 2퍼센트 지지율밖에 얻지 못했고, 이에 진중권 이름 하나 알리고 끝난 2퍼센트 정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당시 이문옥이냐 김민석이냐를 놓고 벌어진 이른바 ‘옥석 논쟁’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진보 성향의 민주당과 당선 가능성이 낮지만 선명
  • 선명한 좌파 성향의 민주노동당이 한 선거에서 맞붙었을 때,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에 대한 논점을 상기시켰다.
  • 중요한 건 이 논쟁에서 이기고 지고, 또는 누가 옳고 그르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90년대 내내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모종의 연대의식을 이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단박에 무너뜨려 버렸다.
  • 강준만의 한계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서 기인한다.
  • 그는 전략적 사고를 하기보다 그냥 진정성이라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그에게 전략은 그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식 정도였을 뿐이다.
  • 강준만을 평가한다는 건 강준만 개인에 대해 말하는 게
  • 아니다. 강준만 개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그 현상, 또는 그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효과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준만은 이런 논의를 모두 인간 강준만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 하기야 제기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강준만 스스로 진지하게 받아들였을지는 미지수다.
  • 이렇듯 강준만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사람 모두에게 강준만은 항상
  • 불완전한 대상일 뿐이다. 강준만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고 그 제도의 불합리한 사용에 대한 분노다. 강준만의 설득력은 이런 원리원칙을 들소처럼 밀고 나가는 진정성에 있었다. 그의 무기는 진정성이었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가 의지적으로 행하지 않는 그 지점이다. 강준만은 그 지점에 항상 ‘강준만다움’을 감추어놓는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말한 진정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 강준만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진정성을 담고 있을 그릇 ‘인물’이다. 인물은 행위자가 아니라 그릇이기에 텍스트다. 강준만은 아무리 지금 옛 그릇의 이가 빠져 볼품없더라도 그 그릇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봐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 어떻게 보면 이런 이념의 세속화는 시장 자본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시장 자유주의자 강준만을 살렸던 바로 그 논리가 이제 강준만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하나의 현실성 위에 견고하게 서 있다. 이 현실성은 바로 정 의원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환상이다. 환상을 현실로 믿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정 의원을 지켜온 요새였다. 그런데 호텔 사건은 이런 정 의원의 요새를 무너뜨려 버렸다.
  • 잔해 더미에서 정 의원이 할 수 있는 건 엄연한 사실에 대한 부정negation이 아니라 이에 대한 부인disavowal이다. 부정은 계속해서 억압된 욕망을 방어하면서 자기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행위인 반면, 부인은 정신적 고통을 주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다.
  • 정 의원은 고문 사실에 대해 줄곧 “고문은 말이 안 된다”라거나 “고문은 전혀 없었다”라고 말해왔다. 한마디로 정 의원에게 고문은 ‘있을 수도 없었던 일’이다. 정 의원은 고문 진상을 둘러싼 진실게임에서 ‘진실’을 말
  • 진상을 둘러싼 진실게임에서 ‘진실’을 말하기보다 ‘음모’를 말해왔다. 그는 고문 사건에 대한 조사를 환영한다고 말해놓고 곧 바로 “조사하는 사람들의 과거 행적이나 이념 성향을 봤을 때 그렇게 (조사를 철저히) 할지 의문”이라고 토를 달았다. 이 말은 결국 “고문은 없었다”라는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과는 음모이기에 모두 거짓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정 의원의 진실게임은 오직 정 의원의 말만이 참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억압하고자 하는 강박의
  • 표현이다.
  • 이 강박은 바로 고문 사실에 대한 부정으로 드러난다. 정 의원에게 고문은 억압시켜야 할 무엇인데, 이런 억압을 해소시켜 사실을 드러내려는 폭로 행위에 대해 그는 그 ‘억압된 사실’을 방어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실과 자기 자신이 무관하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반해 호텔 사건에 대한 그의 침묵은 이런 논리의 붕괴를 초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인의 행위다. “고문은 없었다”라는 자기 방어를 정당화
  • 정당화해주었던 ‘니가 봤나’라는 논리는 너도 나도 모두 봐버린 호텔 사건으로 인해 무력화되어버렸다. 결국 이것은 정 의원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덫이다. 사실의 문제를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국한시키고자 했던 그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요구로 인해 희생당하는 그 자신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박정희 향수는 없다. 박정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온다.
  • 원한은 없다. 오직 있다면, 간절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유령은 햄릿을 부르지 않았다. 반
  • 반대로 햄릿이 유령을 불렀다. 유령은 위기의 자아를 통합하기 위해 햄릿이 불러낸 하나의 기표다. 그래서 유령은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반복의 자리에 항상 실재가 숨어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유령을 사라지게 한다고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유령이 없다면 실재도 없다.
  • 옳은 말을 한다고 항상 옳은 효과를 낳는 건 아니다.
  • 박정희가 경제 발전을 이룩해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건 과학적 주장이 아니
  •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다. 종교적 신념을 과학으로 퇴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계몽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 대중이 원하는 건 증상이 예전처럼 다시 쾌락을 주는 것이다. 박정희는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으로부터 다시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대중의 요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간다. 박정희를 불러내면서 대중은 자본주의
  • 가 다시 예전처럼 자기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당연히 이런 믿음을 현실성으로 만들어줄 무엇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서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박정희 때문에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말과 “박정희가 없어서 못 먹고 못산다”는 말은 같은 동전의 앞과 뒤이지만, 여기에서 박정희는 항
  • 항상 비어 있는 무엇이다. 박정희라는 기표가 점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 어떤 기표로 대체되어도 좋은 텅 빈 결여의 자리다. 결여로 인해 분열의 위기에 놓인 주체성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건 ‘먹고사는 문제’다. 이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윤리를 결정짓는 최종심급이다. 그런데 이 최종심급이 윤리를 혼란시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 정체성의 규정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의 문제다. 이런 맥락에서 박정희의 유령은 위기를 맞이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
  • 위기를 맞이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통합시키고자 불려나온 사물이다.
  • 민족주의는 강박이라서 미안한 게 아니다. 민족주의에게 강박은 존재적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로망스다. 그래서 이토록 강고해 보이는 서사는 이행기의 공포와 염원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문제적이다. 민족주의는 타자를 규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담론이기에 겉보기와 달리 그 내부는 취약하다. 문제
  • 문제는 이 강박을 불러오는 원인에 있지 민족주의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증상을 꾸짖는다고 임상학적 치유가 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그 증상의 근본 원인부터 밝혀야 한다.
  • 독도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민족주의가 지배 담론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독도를 둘러싸고 분출하는 ‘민족적 의분’은 그러므로 한국이 충분히 민족주의적이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
  • 아니다. 오히려 독도는 한국이 충분히 민족주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통해 억압되어온 쾌락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에게 민족주의는 금지된 욕망이다.
  • 이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북한도 친북좌파도 아니다. 오직 이들은 쾌락의 분출을 통해 기성의 상징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할
  • 뿐이다.
  • 독도 문제를 둘러싼 민족주의의 분출이 과잉의 결과가 아니라 결여의 효과
  • 가족은 모든 사회생활에서 우위에 놓이는
  • 것이며, 이 가치 기준에 도전하는 쾌락 원칙은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
  • 게다가 가족은 상징적 차원에서 고삐 풀린 쾌락에 금지를 명령할 수 있는 핑곗거리로 작동한다. 쾌락의 해방이 초래할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을 제어하기 위해 가족은 하나의 상징으로 호명 당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족은 사회적 규율이나 공공적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허용하는 도피처로도 기능한다. 말하자면, 가족은 상징적 법을 초월하는 핑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법을 어기는 것을 금지하
  • 금지하는 근거다.
  • “자기 자식이라면 그렇게 했겠느냐”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자식은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말의 다른 면이다. 결국 이 말은 가족이라는 범주가 매끄럽게 보편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가족 범주의 신성화는 가족 사이에 발생하는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범주는 신성한 만큼 근본적 모순을 그 원-기록에 내장하고 있다.
  • 해외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 병역의무를 마치거나 면제가 된 후가 아니면 한국 국적을 이탈할 수 없도록 하는 개정 국적법이 2005년 5월 4일 국회를 통과, 24일부터 발효되었다. 당시 이와 같은 발표로 인해 국적 이탈을 신청한 자가 무려 1,820명에 달했으며, 이중 병역 면제가 불가능하게 된 원정출산자와 외교관, 기업의 해외주재원 자녀 등이 전체의 80퍼센트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 가족의
  • 가족의 자리는 마땅히 공동체의 자리로 대체되어야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기에 문제가 증폭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자식이라서 부조리한 의무 복무 제도가 없는 나라를 조국으로 선택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는 생각은, 내 자식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다른 가족의 이해관계와 부딪혀 소용돌이친다.
  • 이런 행위가 실정법상 위법은 아닐지라도 민족주의라는 상징적 법을 위반하는 건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국적 포기라는 행위는 민족주의가 내재한 ‘쾌락의 평등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런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 불구하고 도덕적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런 아이러니는 민족주의의 판타지가 계급적 적대를 봉합하기 위한 발명품이고, 이런 발명품 중 하나가 가족의 신성화라는 사실에 이르러 제 모습을 드러낸다. 민족주의가 기본적으로 남성 판타지라는 걸 감안한다면, 여기에서 가족의 신성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은 남성의 위계적 권력이 접지하는 지점으로서, 이로 인
  • 인해 가부장적 상징 권력으로부터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승인받는다. 따라서 가족의 이름으로 ‘국가의 부름’을 위반하는 행위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런 행위는 새로운 국적법의 제정이라는 ‘유사 계급투쟁’에 현실적 질감을 부여하는 것이자 동시에 가족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설정했던 그 체계의 불안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긴장을 무마하기 위한 유토피아적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기능 못지않게 가족이라는 유토피아적 이미지는 사회적 차원에서 계급적 갈등이 일어나는 지점을 가시적으로 지시한다.
  • 이미지는 때로 사실을 압도한다.
  • 전두환을 악인으로 보는 것이나 정반대로 그를 영웅으로 보는 것이나 모든 판단은 이 기록을 통해 좌우된다.
  • 기록이라고 해서 그냥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슨 사건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록을 좌우하는 건 개인의 기억이나 사실에 대
  • 대한 증언이 아니라, 이런 기억이나 증언을 읽는 태도다. 말하자면, 드라마 <제5공화국>은 전두환과 그로 인해 빚어졌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읽기일 뿐이다.
  • 가만히 뜯어보면, 결국 우리는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 기록된 역사를 알고 있을 뿐이고, 기록 이전의 역사에 대해 알 길이 없다.
  •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부에 따라 ‘사실’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 대개 사람들은 ‘정의로
  • ‘정의로운 판단’에 따라 사실과 왜곡을 가려낸다. 말하자면 언제나 역사적 사실은 ‘정의’에 따라 심판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 대중문화는 분명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덕화라는 걸출한 배우를 통해 전두환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덕화라는 이미지의 소비를 통해 시청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극중 인물에 비추어 위안을 받고자 한다는 사실에 있다.
  •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 30분경 경기도 연천군 중면 최전방 530GP에서 28사단 81연대 수색중대 1소대 소총수 김동민 일병이 후방 초소에서 근무하던 중 수류탄 1발과 K-1소총 실탄 44발로 GP장인 중위 1명을 포함해 총 8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는 중상을 입힌 사건. 당시 군 당국은 사건 수사 후 내성적 성격의 김 일병이 일부 선임병의 욕설 및 질책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으나, 사건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유족들은 몇 가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 언급하며 군에서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 진상규명촉구협의회를 구성해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 우리가 “총기 난사 사건”이라고 내뱉는 순간 이 사건은 ‘광기’가 덧칠해진다.
  • 모든 사건은 가치 판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가치 판단은 겉으로 드러나는 합리성과 달리 무의식의 영역에 의미를 등록하기 일쑤다.
  • 처음부터 이 사건의 진실은 매끄럽게 재현될 수 없었다. 누구도 김 일병이 무엇 때문에 총을 쏘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 일병 자신조차도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하
  • 하나, 최전방 경계초소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이다. 우리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렇게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주석들일 뿐이다.
  • 사건에 주석달기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렇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김 일병의 말은 필요 없다.”
  • “사랑한 것도 죄인가?”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랑한 것도 죄다.
  •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절대 악이다. 아니, 절대 악이라는 서사적 판타지에 응답하는 실재다. ‘세상은 살만하다’는 고정관념을 확신하기 위해 휴먼다큐멘터리가 필요한 것처럼 절대 악이라는 믿음을 추인하기 위해
  • 절대 악을 닮은 실제적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절대 악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절대 악에 분노하고 치를 떨면서, 그 절대 악과 다른 차선의 악에 물들어 있는 자신을 용서한다.
  • 그러나 이런 실용주의는 말만 실용주의지 사실은 정략적 담합에 지나지 않는다.
  • 지하철에 애완견의 배설물을 방치한 대가로 ‘개똥녀’라는 별명을 부여받은 한 젊은 여성이 전후 맥락을 거두절미당한 채 졸지에 ‘공공의 적’으로 매도당한 것처럼, 김 일병 역시 아무런 성찰의 여지도 허락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 상태가 똑바로 박히지 못한 군대 부적응자’로 낙인 찍혔다. 김 일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니, 김 일병이 그 사건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 소대는
  • 지극히 정상적인 집단이었다. 정말 이런 상황이 웃기지 않은가.
  • “소대 분위기가 좋았다”라는 생존자들의 진술은 그 분위기 좋았던 소대를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김 일병의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김 일병의 행위를 부정하기 위해 발화된 이런 진술은 분명 ‘정상성’의 범주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아이러니다. 생존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분위기 좋았던 소대를 강조하면 할수록 김 일병의 행위는 오리무중에 빠지기 때문이다.
  • 사건의 진실은 바로 이런 정상성을 강화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의 징후로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 2005년 7월 MBC 이상호 기자가 안기부 도청 파일을 입수, ‘옛 안기부 직원들이 지난 1997년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정치권 동향과 대권 후보들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등을 논의한 대화를 도청해 만든 테이프’를 언론에 보도하면서 불거진 사건. 이 사건으로 이 기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당시 『월간조선』에 ‘X파일’ 녹취록 전문을 공개했던 김연광 전 월간조선 편집장(현 청와대 정무비서관) 역시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2009년에 MBC와 월간조선의 보도가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요건’에서 벗어났다며 유죄 판결을 내렸다.
  • 14대 대선을 3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부산 남구 대연동 초원 복국집에서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주선으로 모인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를 위해 지역감정 조장 방안 등을 모의했다고 알려진 사건. 선거 당일 국민당 김동길 선거대책위원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대화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국민당 측은 이를 계기로 김영삼 후보의 추락을 기대했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 불법 선거 문제보다 도청 행위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이 쟁점으로 떠올랐고, 도리어 지역감정을 자극하면서 결국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
  • 당선시켰다. 이를 계기로 “권력은 복국집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유행했고, 예상을 벗어나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현상을 가리켜 ‘초원 복국집 효과’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 1997년 대선 무렵 국내 유수의 언론사 사장이 세계 초일류 기업을 표방하는 재벌 회사로부터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아서 여당 대선후보에게 몸소 전달했다는 불법 행위가 국내 거물급 인
  • 전달했다는 불법 행위가 국내 거물급 인사들의 언행을 도청하기 위해 안기부에서 비밀 도청팀을 운영했다는 또 다른 불법 행위를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 이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나쁜 엿듣기’의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2년 ‘나쁜 엿듣기’와 ‘나쁜 정치인’의 대립에서 전자를 비난하고
  • 후자를 지지했던 여론은 그로부터 13년 뒤에 ‘나쁜 엿듣기’와 ‘나쁜 언론인(기업인)’의 대립에서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 도청은 관음증의 다른 형태다. 금지된 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부끄럽기 때문에 쉽사리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욕망이 부끄럽지 않게 정당화되려면 다른 차원의 논리가 필요하다. “불법 도청을 통해 기록된 내용이지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공개해야 한다”라는 게 이런 논리다. 이
  •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즐기는 쾌락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상징적 의미를 깔고 있다. 혼자 보면서 즐기는 건 나쁜 일이지만, 여럿이 함께 보며 즐기는 건 나쁜 일이 아닌 것이다.
  • 1992년 초원 복국집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국민의 알 권리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때는 군사 정권의 잔재가 여전히 금욕주의를 ‘국민’의 무의식에서 호출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엿듣기의 즐거움은 금지되었다.
  • ‘국민의 알 권리’는 이렇게 왕을 벌거벗게 만드는 법이다. 금욕주의를 벗어던진 ‘알 권리’는 평등주의를 거스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 2006년 5월 20일 지충호라는 이름의 남성이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에게 커터 칼로 상해를 입힌 사건. 제4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가 한창이던 당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오세훈 후보 연설회장에서 이를 지원하기 위해 온 박 대표에게 흉기를 휘둘러
  •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혔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장기간 형무소 생활 등의 억울함을 풀려는 의도로 벌인 사건일 뿐, 박 전 대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밝혔다. 이후 원심에서 징역 11년,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 인터넷은 박근혜 피습 장면을 무한 반복시키는 3본 동시 상영관이었다. 박근혜의 얼굴에 문구용 칼이 가 닿는 그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영상들. 9・11 테러 때 세계무역센터를 다채로운 각도에서 재구성해서 보여주던 그 영상들. 그리고 다소 생뚱맞지만, 2002년 월드컵의 하이라이트를 입체적으로 끊임없이
  • 무한 반복해서 보여주는 그 영상들. 정말 생뚱맞지만, 지루한 성교 장면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포르노의 영상들. 이 모든 영상들이 순간적으로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시 현상 때문일까.
  • 한국의 통일 전망대를 일컬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현실의 스펙터클을 감상하기 위한 극장”이라고 했다.
  •  남향의 벽에만 페인트칠을 한 건물들은 무대 세트고 남쪽을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은 관객의 응시를 내재화한 배우들이다. 이 ‘위
  • ‘위험한’ 현실의 스펙터클을 보기 위해 외국인들은 DMZ 관광 상품을 구매한다. 한반도의 극장화. 우스운 모순 어법이지만, 이건 이제 현실이다. 현실이 극장이고 극장이 현실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잠시라도 잊어보기 위해 사람들은 월드컵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 잊어버리기보다 더 실감나게 느껴보기 위해 월드컵을 기다리는 걸까.
  • 사람들은 더 스펙터클하고 더 박진감 넘치는 실감의 순간을 열망한다.
  •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다
  • 놀랍게도 월드컵은 정치를 압도했다. 실제로 2006년 총선을 지배한 것은 지충호의 습격이 아니라 월드컵의 귀환이었다. ‘○○동의 아드보카트’, ‘꿈★은 이루어진다’ 따위를 선거용 표어로 쓰는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놀랍게도 어떤 후보는 월드컵을 앞둔 국가대표의 평가전을 홍보용 차량으로 방영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모 우파 신문은 “월드컵에 완패한 총선”을 운운했다.
  • “그냥 스포츠니까 즐겨주세요”라는 말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
  • 월드컵은 그냥 극장이다. 지난 10년간 난폭한 한국 자본주의의 심연을 통과해온 대중들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안다. 비극은 여기에
  • 여기에서 시작된다. 월드컵이 극장이라는 사실을 대중들이 잘 안다는 것, 그래서 이 극장에서만 눈물짓고 환호하고 감격한다는 것. 여기에서 현실을 넘어선 진실이 우리에게 뭔가를 일러주고 있다.
  • 문화는 그냥 징후일 뿐이다. 문화가 정치를 주도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강렬한 정치적 시도가 좌절되었을 때 문화가 출몰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월드컵은 정치에서 해결하지 못한 무엇을 대신하기 위한 상징 행위다. 주체는 쾌감을 끝까지 밀어붙여 실재로 나아가려고 한다. 쾌감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끊임없이 ‘다시 한 번’을 외치도록 한다. 이 반복의 열망이야말로 유토피아 충동이다. 문화 형식을 일러 유토피아 충동의 봉
  • 봉쇄라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월드컵은 이런 유토피아 충동을 봉쇄해서 하나의 논리로 만들어내는 문화 형식이다.
  • 한국에서 월드컵이라는 문화 형식에 내재한 논리는 ‘기적’이다. 다시 한 번 그 기적이 임하도록 사람들은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기적이 가능한 곳은 극장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바야흐로 정치를 극장으로 보기 시작한 대중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정치판의 기적
  • 기적은 월드컵의 쾌락 원칙을 위반함으로써 관객들을 배반했다. 노무현 정부는 21세기 정치의 극장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간판만 참여정부로 달았을 뿐, 정작 사유하는 대중의 영악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식인만이 사유한다는 것은 너무도 고전적인 믿음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하는 주체는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이다. 지식인조차도 대중의 사유를 내면화할 때만 생존할 수 있다. 기적을 바라는 대중, 아니 기적을 창조하려는 대중이 향하는 곳은 어디
  • 어디일까. 정치의 실감을 잃어버린 이들이 지금 신화를 찾아 떠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국 표준시로 2006년 10월 9일 10시 35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고 주장하면서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15일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 1718이 채택되었으며, 북한의 핵실험을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규정, 무력 제재 하겠
  • 하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 할 일 없던 한국의 냉전 세력과 일본의 극우파들이 북핵 때문에 아쉬웠던 취미생활을 다시 회복했으니 이들도 수혜자라면 수혜자다.
  • 이 모든 것보다도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북핵에 대한 한국 대중의 반응이었다. 세계 언론들이 북핵 문제를 너도나도 앞다투어 보도
  • 보도할 때 한국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포털사이트 최고 인기 검색어가 ‘문근영 미니스커트’였다. 이를 두고 이른바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포털사이트의 탈정치성을 개탄하거나 한국 사회의 안보 불감증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든 자유다.
  •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런 일들이 터지니까 이제 웬만한 자극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었다고 볼
  •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크게 신빙성은 없다. 여전히 자극에 반응할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반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신경세포를 자꾸 자극하면 그 세포의 반응이 약해진다는 지극히 일차원적 논리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에 비겨 쾌락을 하수로 취급할 때 써먹던 논리다.
  • 한국의 대중문화는 철저하게 북핵 문제를 은폐한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 어디에도 북핵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를 대중 조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대중이 이 ‘엄중한 시국’에 이따위 것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욕망은 모순적이고 분열적이라서 종잡을 수 없다.
  • 아무리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행
  • 행위(부자나 연예인에 대한 신비화), 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법에 대한 반발(인터넷 댓글에서 드러나는 우상 파괴), 그리고 절대 악이나 권력에 대해 관대하면서도(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강력한 권위에 대한 갈망) 이런 악과 권력에 자신이 귀속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미국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이런 모순이 바로 도착증의 구조다.
  • 대북 포용 정책이냐 국지전을 불사한 대북 제재냐 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관심 사항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중은 여기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대중에게 정치는 극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극장에 북핵이라는 새로운 출연자가 나왔다고 해서 별로 놀라지 않는다. 대중은 지루한 연극을 보며 관객석에서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가 ‘자본’이라는 실재를 호출하는 순간 돌연 잠에서 깨어난
  • 깨어난다. 포용 정책을 재고하도록 주문하면서도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경계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실재가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는 사실을 대중은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친 한국의 대중에게 전쟁보다 더 가까운 공포(더 무서운 게 아니다)는 파산의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한국 전쟁 세대와 구제금융 세대를 서로 갈라놓는다. 이들을 일시적으로 합일시켰던 사건이 월드컵이었고, 한국 사회의
  • 10대와 20대는 이런 월드컵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주체성을 탄생시켰다.
  • 지금 상황은 이 상징체계가 깨어졌을 때 맞닥뜨릴 분열의 공포가 북핵의 공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 테러는 현실성에 개입할 수 없는 이들이 자행하는 ‘상징적 행위’다. 말하자면 테러 자체가 항상 어떤 메시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 진정한 공포는 어떤 행위에서 어떤 메시지도 읽어낼 수 없을 때 출몰한다. 아직은 그 공포가 오지 않았다고 한국의 대
  • 대중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셈이다.
  • 집값이 올라 난리법석이란다. 그런데 이 말에 비밀이 있다. 거리낌 없이 모두 집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집이라는 것은 아파트다. 곧 집이 아파트인 것이다. 누가 앞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아파트=집’이라는 등식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 것 같다.
  • “도시에 대해 쓰는 것은 추억에 대해 쓰는 것”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의 말이 옳다면 우리 후손들은 모두 아파트의 모양처럼 동일한 기억들을 갖게 될 것이다.
  • 겉으로는 ‘웰빙’을 생활신조처럼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환경 호르몬으로 꽉꽉 채워진 성냥갑 같은 답
  • 답답한 감옥 속에 들어가 살려고 하는 걸까? 인간도 동물인 이상 밀집 환경에 사는 것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먹고 잘사는 것과 별반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엄연한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아파트가 편리하기 때문에 주거 양식으로 선택한다고 말한다.
  • 아파트는 단순한 가상이라기보다 욕
  • 욕망의 변증법을 체현하고 있는 증상이다.
  • “아파트가 주거 공간으로 썩 좋은 건 아니지만 편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파트에 살 수밖에 없다”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낸다.
  • 우리는 왜 이런 논리를 만들어서 증상을 유지하려는 걸까? 왜냐면 증상은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증상을 치유하기보다 이것으로부터 계속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빚을 내 아파트를 사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자본주의 최고의 즐거움이다.
  • 자본이라는 대타자Other는 우리에게 항상 ‘즐겨라’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을 거스르는 순간 우리는 불쾌해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 명령
  • 명령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언젠가 증상은 즐거움의 원천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으로 변화
  • 변화한다.
  • 아파트는 대타자의 욕망을 드러내는 기표다.
  • 우리는 이 기표를 소비함으로써 쾌락을 얻는다.
  • 광고에 나오는 동일 브랜드의 아파트를 사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만 기실은 누구도 이런 걸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건 우리가 산 아파트의 가격이 올라서 계속 즐거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과 다른 입주민들을 위해 아파트값이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오직 바라는
  • 건 내 자신의 만족감이다. 이게 욕망의 법칙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아파트지 ‘우리’의 아파트가 아니다. 아파트라는 기표는 이런 외설적 사실을 감추고자 하는 역설적 스크린이다. ‘나’의 공간에 ‘우리’는 끼어들 틈이 없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20년 한을 풀어보자”라고 가끔 담합할 뿐이다.
  •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기존의 주거지를 헐어내고 일사분란하게 솟아오르는 아파트는 과거와 싸워 이긴 현재의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기억
  • 기억의 소멸을 기념하는 아이러니한 조형물이다.
  •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살기 위해 아파트를 사려는 게 아니다. 사고팔기 위해 아파트를 사려고 한다. ‘마빡이’처럼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이 오직 사고파는 행위를 위해 이마를 칠뿐이다. 완벽한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개그를 위해 개그맨이 필요 없듯이 아파트 거래를 위해 입주자는 필요 없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에게 아파트라는 증상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 자본주의가 계속 쾌락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불행한 시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보통 한국에서 ‘연기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건, 잘나가는 배우의 ‘망가지는 모습’과 관련이 있다. 이런 연기자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자신과 동일한 모
  • 모습을 찾아내고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 <무한도전>은 이런 ‘연기력’을 개그로 만들어서 인기를 끈 것인데, 여하튼 모두 탈권위주의하고 무관하지 않다.
  • 한국 사회 전체가 탈권위주의를 쾌락의 기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특히 대중문화에서 이런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노숙자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 박신양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는 이도 있겠지만, 박신양을 통해 노숙자의 모습을 ‘실감’하기 위해 이 드라마를 보는 이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쩐의 전쟁>이나 「욥기」가 모두 무언가를 가졌던 이가 한 순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몰락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는
  • 결말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이런 것을 감안해서 생각해보면 <쩐의 전쟁>이나 「욥기」는 ‘무언가를 가졌던 이’를 위한 이야기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이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는 잃을 것도 없다. 이게 이야기가 되려면, 노숙자가 길에서 주운 로또 복권에 우연히 당첨되어서 갑자기 인생이 바뀌는 걸로 가야 한다.
  •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쩐의 전쟁>은 자신의 소유물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쩐의 전쟁>이 부르주아의 서사시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중간계급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부르주아라고 해서 몰락의 공포가 없을 수는 없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 년 간다”라는 말처럼 중간계급만큼 극적이지 않다.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은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모든 걸 자연스럽게 만든다. 우리가 바라는 게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성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
  •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자, 한국의 언론들은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불과 몇 주 전에 <스파이더맨 3>의 개봉에 맞춰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부르짖던 목소리는 전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 ‘주이상스Jouissance’
  • 이 느낌은 진짜가 아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실감이다.
  •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쩐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한국 중간계급의 판타지
  • 판타지를 보여준다. 그 이데올로기의 틈을 메우는 게 투명한 시장 자유주의의 ‘자본’이 아니라 초법적 사채업자의 ‘쩐’이라는 사실에서, 한국 중간계급이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 전직 큐레이터 출신으로 2005년 동국대 조교수로 특채 임용되었던 신정아가 2007년 재임 당시 박사 학위를 위조했다는 논란이
  • 불거지면서 파장을 몰고 온 사건.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 공동 감독으로 선정되었다가 중도 하차 후 잠적했으나, 동국대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이를 고발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후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비호 사실이 보도되면서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기업 후원금 횡령 사실까지 드러나며 유죄 판결을 받아 2009년 4월까지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한국 사회의 학력 위조 풍토에 이슈를 불러왔고, 사건 보도 과정에서 지나친 선정주의로 개인의 인권보호에 대한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2007년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23명(여자 16명, 남자 7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게 납치되었던 사건. 경기도 성남시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를 비롯한 교회 청년회 신도들이 단기 선교와 봉사 활동을 목적으로 출국하였다가 탈레반에게 피랍되면서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이 중 목사와 신도 한 명이 살해되었으나, 정부가 협상을 통해 다른 인질 21명을 구해냈고, 피랍 사태는 8월 31일, 발생 42일 만에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피랍자들과 해외 위험 지역에 선교를 나간 기독교도들이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언론의 모범 답안은 이 사건을 간단하게 “학벌 중심 사회의 폐해”로 몰고 가지만, 내가 보기에 별반 설득력이 없다. 일단 이런 진술이 논리적으로 맞으려면, “학벌 없는 신정아가 실력은 있었다”라는 명제가 참으로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을까.
  • 신정아를 출세가도에 올려놓은 상징적 요인은 금호미술관에서 쌓은 경력과 동국대에 임용된 이력이었다.
  • 물론 그 아래에서 작동한 요인도 있다. 원로들에게 잘 보였다든가, 서울대와 예일대 학력을 사칭했다든가, 논리 정연한 달변이었다든가, 여타 다양한 요소들이 이를 뒷받침했다고
  •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이 가능했던 결정적 요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바로 언론의 역할이 그것이다.
  • 정론지
  • 화나서 소리만 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나는 그 구조를 한번 더듬어보고 싶은 것뿐이다.
  • 나는 “가짜 신정아가 진짜 큐레이터보다 더 실력이 있었다”라는 진술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 ‘실력’이
  • 뭔가. 바로 ‘대중성’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시장성’이다. 이 때문에 어려운 미술을 쉽고 친근하게 대중에게 다가가게 만들었다는 지극히 구태의연한 수사가 신정아 뒤에 따라다녔다. 이런 치장이 가능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신정아 사건을 발생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묘한 일이지만, 이 같은 치장은 신정아라는 개인이 홀로 출중하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뭔가 있어야 한다. 이 뭔가가 바로 시장주의라는 주박이다.
  • 한젬마
  • 정부는 전문성이 없다는 믿음이다. 위험 국가에 대한 정부의 규정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전문성을 키워야 할 정부가 귀찮으니까 규제와 통제라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다는 주장이다.
  • 정부보다 국민들이 훨씬 많은 정보를
  • 갖고 있다는 이런 믿음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견고한 시장주의적 포퓰리즘의 양분이 되고 있다.
  •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선교를 시장의 영역에 속하는 경쟁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이 발상이 증언하는 게 바로 종교의 죽음이다. 해외 선교가 기실은 종교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성장주의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 칼럼은 외교부에서 규제와 통제를 풀고 해외 선교를 당사자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 하는 근거로 ‘경쟁력 강화’를 들고 있는데, 정부가 해외 선교를 통제하면, 이슬람 국가에 “서구 백인 국가들보다 빨리 진출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고, “중장기적으로 대외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 최한우 한반도국제대학원대 총장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국가를 위험 국가로 규정해서 해외 선교를 규제한 행위를 “행정편의주의”라고 비판했다.
  • 근대사회로 진입했을 때, 인류는 예술과 종교로 사회의 병폐를 다스리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