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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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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인터넷 인기 서평가 로쟈와 함께 하는 지젝의 텍스트 읽기!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하이브리드 총서」제 7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 책은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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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연하지만 포괄적이어서 실상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적어야 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주제’였지만.
  • 여피
  • 새로운 이론이나 유행 사상을 마치 고급 장신구처럼 소비하는 것인데, “지젝 지젝 그러는데, 내가 읽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걔, 뭐 새로운 게 없잖아? 그냥 엔터테이너지” 이런 식으로 ‘눌러주는’ 게 자신의 지적 교양에 대한 과시라고 믿는 부류다.
  •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내지는 너무 빠지지 말 것. 혹은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말 것.
  • 그런 앎이 없더라도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사물’ 혹은 ‘괴물’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좌표, 현실의 좌표를 뒤흔든다는 걸 안다.
  • 그런 앎이 부족할 경우엔 또 ‘무지에의 의지’라는 것이 작동해서, ‘돈도 되지 않는데 복잡한 것’으로 자동분류하고 폐기처분한다.
  • 유구한
  • 그런 분들을 위한 일침이고, ‘빨간 약’이다. 행복을 얻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의 생각과 존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가사가 있지만, 세상이 당신을 위해 존
  • 존재하진 않는다는 점은 ‘당신’만 빼고 다 안다(그래서 그런 노래는 생일 때만 불러준다). ‘어린애’가 아니라면 무얼 해주길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무얼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이 모양’이라면 ‘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한다.
  • 『처음에는 비
  •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그가 대안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체제는 ‘공산주의’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다.
  • 언젠가 나는 우리가 초기에 범한 최대 실수 중의 하나이자 혁명 내내 수없이 저질렀던 실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누군가 알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루
  • 이루어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분명하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사회주의를 보존할 수 있고, 미래에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쿠바는 스스로 붕괴될 수 있습니다. 이 혁명은 스스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수를 고칠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수많은 도둑질과 횡령, 그리고 새로운 부자들이 금전을 공급하는 원천 같은 수많은 악습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면,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하며, 우리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 향해 나갑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이로써 불평등과 사회부정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꿔야 합니다.
  • 레닌도 비슷한 말을 했다.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신경제정책NEP’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일부 허용하는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야 했을 때 레닌은 「고산 등반에 관하여」란 짧은 글을 썼다. 소비에트 국가의 성취
  • 성취와 실패를 열거한 후에 그가 맺은 결론은 이렇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to begin from the beginning’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
  • 베케트
  •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
  •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 “첫 10년의 교훈”
  • “200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8퍼센트가 창조론을 믿는 반면 진
  • 진화론 신봉자는 그 절반 수준인 28퍼센트에 불과했다. 악마evil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은 68퍼센트나 됐다. 종교는 미국의 탄생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 첫 번째는 유럽 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
  •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 에른스트 윙거(1895~1998)
  •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
  •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 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
  •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 모두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 좀 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 2010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
  •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차려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
  • 걸어갔다. 
  •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
  •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져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magic encounter’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 필요하다.
  •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 <매트릭스>에서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보는 물질적 현실은 가상의 것이며, 우리 모두가 연결된 거대한 메가컴퓨터가 이 가상현실을 생성하고 조정한다. 주인공(키아누 리브스)은 ‘진짜 현실’에 눈을 뜨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불에 타 잔해만이 남은 황량한 풍경, 다름 아닌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시카고의 모습이
  • 모습이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모르페우스)는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 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삼항조’라고도 부른다.
  •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통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 ‘시네필’
  •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
  •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
  •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
  •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
  •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그것은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며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
  •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 멕시코에선 티브이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
  •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 EDPS
  •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
  •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 독일과 잉글랜드의 16강전에서 벌어진 일인데, 잉글랜드가 1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드필더 램퍼드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독일 골문 안쪽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올랐다. 독일 골키퍼 노이어가 재빨리 공을 잡아챈 뒤 그라운드로 날렸고 주심
  •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화면상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주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이런 경우 축구 규칙은 주심의 판단을 따른다(흔히 동원되는 말로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그래서 결국 잉글랜드의 골은 골로 인정되지 않았다. 즉,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 오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FIFA는 향후 골 판정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사례에서 골 판정은 주심의 판단에 따른다는 축구 규칙의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 아무것도 아니지만, 규칙(상징계)은 그렇게 현실 세계를 관장하며 지배한다.
  • 앞에서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라는 표현을 일부러 썼는데, ‘실재’와 ‘현실’이란 말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실재’는 ‘더 리얼the real’의 번역이고, 상징계의 효과로서 그와 등치될 만한 개념인 ‘현실’은 ‘리얼리티reality’의 번역이다.
  • 결과적으로 금융투기로부터 실제 인간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재화를 생산하는 ‘실물경제’로 회귀할 필요를 역설하는 자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자기추진적이며 자기확대적인 금융순환은 자본주의에 있어 생산의 현실reality과 대조되는 유일한 실재the real의 차원인 것이다.
  • 여기서 지젝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으로서 금융순환이라는 실재를 생산의 현실, 혹은 ‘생산이라는 현실reality of production’과 대비한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실물경제’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의 순환’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달리 ‘자본주의’가 아니잖은가!). 이런 차이를 표시할
  • 때 ‘현실-실재’는 ‘현상-본질’과도 유사한 개념쌍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질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의미도 갖는다.
  •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
  •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
  •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
  •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
  •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 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
  •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
  •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
  •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
  •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
  •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 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
  •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 프로이트 또한 처음에는 외상을 “외부로부터 우리의 심리적 삶에 침입하여 균형을 깨뜨리고,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는 상징적 좌표를 교란시키는 어떤 것”으로 파악했다. ‘외재적 사물’로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아인슈타인의 전환과 마찬가지로 외상적 사건, 기원적 사건이 뜻하는 바는 ‘상징적 곤
  • 곤경’(혹은 ‘상징화의 곤경’, ‘상징계의 곤경’)이며, 외상적 사건은 바로 이 의미 세계 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다시 불려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적대social antagonism라는 실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적 적대란 계급 적대, 계급투쟁을 말한다. 그것이 사회의 ‘실재’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이렇듯 사회에 내재한 적대를 특정한 집단에 덮어씌운다. ‘구체화’하고 ‘사물화’한다. 곧 반유대주의에서는 “유대인성을 외부에서 사회적 몸체에 침입하여 균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취급한
  • 취급한다.” 유대인을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낯선 침입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인과관계가 전도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외재적 사물’ 때문에 사회적 적대가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내재적·구조적 적대라는 곤경이 반유대주의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 지젝은 라캉의 세 범주 가운데 ‘실재계’를 핵심적인 탐구 주제로 삼았다. 지젝이 말하는 라캉은, 이글턴의 정리를 빌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는 실재계란 그저 외상적이거나 불가해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고 외설적이며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어마어마한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다고 일깨워주는 인물”이다.
  •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미리 이렇게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우리 암호를 정하자. 내가 쓴 편지가 보통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그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
  •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는다. “이곳은 모든 게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이 가득하고, 음식은 풍부하고, 아파트는 널찍한 데다 난방도 잘돼. 영화관에서는 서양 영화를 보여주고, 언제든지 연애할 수 있는 예쁜 아가씨들도 많아.” 그러고는 끝에 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딱 하나 구할 수 없는 건, 빨간 잉크야.”
  •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부자유를 표현할 언어 그 자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빨간 잉크가 결여되어 있다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현재의 갈등을 지칭하는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의 주요
  • 용어가 거짓이며, 우리가 그 갈등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대신 우리의 상황 인식을 미혹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우리의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하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실재의 사막』, 12쪽) 
  • 우리에게 ‘자유’란 말이 오히려 현실 인식을 오도하고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한다
  • 그는 『정통신앙Or­thodoxy』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단Heretics』이란 책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정통신앙』이라고 옮겼다. 우리말 번역본은 『오소독시』
  •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야말로 자유를 막아내는 최고의 안전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노예의 정신의 해방이 노예의 해방을 막는 최고의 방책이다. 노예에게 그가 자유로워지고
  • 싶은지 아닌지 고민하라고 가르쳐보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하지 않을 것이다.
  • 여기서의 역설은 물론 ‘자유사상’이 실제적인 ‘자유’의 장애물이라는 주장에 놓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면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돼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역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체스터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동시대인이었다. 체
  • 체스터턴과 비교하자면 쇼는 ‘독설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한 덩치 하는 뚱보여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쇼가 응수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Don't think, obey!.”
  • 이럴 때 사회적 예속 상태를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방책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 물론 그런 예속에서의 탈피, 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의심하기 어려운 ‘도그마’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체스터턴의 또 다른 역설적 주장이다. 정리하면, 체스터턴의 역설은 상호 연계적이며 양면적이다. (1) 자유사상은 진정한 자유의 장애물이다. (2) 진정한 자유는 도그마를 필요로 한다.   
  •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의 고전적인 장면들을 예로 들어보자.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묻는다. “나랑 결혼하고
  • 싶어?” “아니!” “둘러대지 마! 솔직히 말해봐!” 여기서 유일하게 수용될 수 있는 ‘솔직한 대답straight answer.’은 “응!”이다. 그밖의 모든 대답은 이 “응!”으로부터의 회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자는 이미 상황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곤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다 알아.” “너에겐 나 말고 다른 여자는 상상할 수도 없어.” “어서 용기를 내. 뭘 망설이는 거야!” 남자의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자유주의적이라면 여자의 단호한 태도는 도그마적이며 근본주의적이다. 남자는
  • 이렇게 말한다. “글쎄, 사랑은 하지만, 어떨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냐 근본주의냐’라는 선택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주주의 대신에 근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하지만 문제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자명한 듯 보이는
  •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야말로 재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겉멋만 부리는 영웅Radical Chic’
  •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 유명인사들이 반항의 몸짓을 보이고 반항아들이 유명인사가 된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
  • 그러니까 지젝과 같은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한갓 유행에 불과하며, 알고 보면 그 또한 자본주의 상품화에서 포섭된다는 비판은 절반만 옳다. 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너도 자본주의의 수혜자가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개 그런 비판은 근엄한
  • 온건 좌파에게서 나온다.
  • 시스템은 막강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하진 않다. 거꾸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시스템이라면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고 있는 말벌(나나니벌)의 사례를 떠올려본다.
  • 말벌 암컷은 먹이를 쏘아서 마취시킨 후 집으로 끌고 온다. 그런 다음 그것을 밖에 놓아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먹이를 끌고 들어가려고 다시 나타난다. 땅에 구멍을 파서 만든 집 속에 말벌이 들어가 있는 동안 실험자는 먹이를 말벌이 놓아둔 곳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떼어놓는다. 말벌이 다시 나타나면 먹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재빨리 다시 찾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끌고 와서 자기 집 입구에 다시 갖다 놓는다. 말벌이 집 안을 조사한 지 몇 초밖에는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벌의 행동 프로그램은 초기 단계로 다시 넘어간다. 말벌은 먹이를 굴 입구에 다시 놔두고 집 안을 한 번 더 조사한다. 실험자는 싫증이 나서 그만둘 때까지 이 짓을 40번이나
  • 되풀이했다. 말벌은 이미 40번이나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로 다시 돌아가 자동세탁기처럼 행동했다.
  • 적어도 우리는 이 말벌보다는 더 ‘똑똑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말벌이 자기가 이미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의 인지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엄청난 ‘투자’를 해야 했을 것이고, 그만큼 다른 쪽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이 말벌의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성싶지 않다. 자기가 갖다 놓은 먹이가 40번이나 위치가 옮겨지는 ‘미스터리한’ 일이 자연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터인데, 그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미리 마련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고 낭비적이지 않겠는가. 하여 이러한 불비함, 혹은 불완전성이 오히려 본성과 시스템의 작동 조건이다. 그 불완전성의 효과가 주체이고 주체의 결정권(자유)이다. 그것은 오작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체계의 일부이자 과잉이다.
  •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깃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
  • 19세기가 유토피아적인 혹은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 미래를 위한 계획들을
  • 꿈꾸었다면, 20세기는 사물the thing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 갈망하던 새로운 질서를 직접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세기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은 실재를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이 실재는 일상적인 사회적 현실과 대립되는 것이며, 기만적인 현실의 층위를 벗겨내는 대가인 극단적 폭력 안에 있다.
  •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상의 사회적 현실ev­eryday social reality’과 대립하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 ‘실재’는 그렇게 기만적인 ‘현실’의 더께를 벗겨내는 폭력으로 경험된다.
  • 그런 경험의 맥락에서 보자면 ‘현실 대 실재’의 대립은 ‘가짜 대 진짜’의 대립이라고 할 만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건 다
  • 연기일 뿐이고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비칠 때가 있다. 대신 계급장 떼고 맞장 뜨는 것이 ‘진짜’처럼 여겨진다.
  • ‘진짜’라고, 어떤 진정한 무엇의 경험이라고 간주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의 열망’이고 ‘실재의 경험’이다.
  • 지젝은 실재에 대한 이러한 열정의 또 다른 예를 쿠바 혁명에서 찾는다. “사회적 현실의 ‘물자 공급’과 대비되는 ‘실재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버전은 쿠바 혁명에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 제품을 폐기하고 제때 새로운 걸 구매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튼튼한 물건을 만들었다가 망했다는 기업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논리’를 간과했던 게 된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그렇게 쓰레기로 폐기처분됐을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캐나다산 노란색 스쿨버스가 돌아다닌다. 그래서 쿠바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역동성dynamics이 아니라 혁명적 정체standstill다.
  • 이러한 포기와 단념이 쿠바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진정성’으로, 곧 ‘진짜’로 경험되며, 정신분석 용어를 갖다 쓰자면 이런 게 ‘거세의 논리’다. 즉 쿠바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거세에 대한 충실성fidelity to castration’에 놓인다. ‘피델리티 투 카스트레이션’이란 말에서 음성적으로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절묘하다(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은연중 ‘거세’를 상기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충실성’의 이면에는 낡아가는 건물들과 함께 사회적 삶이 점점 더 타성과 무력증에 빠져든다는 문제가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것이 혁명을 배반한 결과가 아니라 그 혁명적 사건에 오히려 충실
  • 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런 더럽혀진 타성이 혁명적인 숭고함의 ‘진실’이다.”
  • “소위 근본주의적 테러라 불리는 것도 실재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닌가?”
  • 적군파Red Army Faction
  •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 대중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 통상적인 정치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 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
  •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의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이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
  • 실재에 대한 열정이 스펙터클한 ‘실재의 효과’라는 순수한 가상으로 귀결된다면, 이와 정확히 반대로 가상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열정은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의 폭력적인 회귀로 귀결된다.
  • 지젝이 드는 예는 ‘자해자들cutters’이다.
  •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 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뜻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
  •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관련된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체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적으로 건전한 전체론적 접근 방식으로 현실을 대하는 이상화된 타자. 반면 아내 구타와 같은 관습은 관심 밖이다.
  •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체론적 현실관 같은 타
  •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은 그저, 실체를 제거한 상품을 공급한다는 이러한 절차를 일반화할 뿐이다. 즉 가상현실은 그 실체, 즉 실재의 단단한 저항적 핵심을 제거한 현실을 제공한다.”     
  • 우리의 현실이 점차 이러한 가상현실로 대체되면서 벌어지는 일은 ‘진짜 현실real reality’ 혹은 ‘실재적인 현실’이 일종의 가상virtual entity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사건은 이 화면상
  • 화면상의 공상적 출현이 우리의 현실로 들어왔다는 데 있다. 결코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이다.
  • 이것이 가상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가상이 되는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이다.
  • ‘실재’란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 현실이란 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 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허구적인 방식으로 지각되는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실재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
  •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 만일 실재의 진정한 대립항이 현실이라면, 자해자들이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진정 벗어나려는 것은 비현실의 느낌, 우리 생활 세계의 인공적인 가상성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 아닌가? 이 실재는 우리가
  •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할 수 없는 환각의 모습으로 분출해 나온다.(
  • 요컨대 신체 자해자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라는 것이다.
  • 헤겔이 말하는 ‘세계의 밤’
  •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 20세기의 ‘실재에 대한 열정’의 문제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거짓 열정이었다는 점, 이 거짓 열정은 가상 뒤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무자비하게 추구했지만 이는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
  •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 지평 바깥에 있는 것,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이란 전망인데, 이 정치적 행위란 체계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체계의 악순환이란 이미 예시된 대로 체계가 그 자체의 과잉으로서 커츠와 같은 ‘초자아적 과잉’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자!”가 아니라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Somebody has to do the dirty work, so let's do it!”
  • 우리가 우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가 또한 그러한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국가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라는 논리가 그러한 찬양에는 깔려 있다.
  • 이란 콘트라 사건
  •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반군 콘트
  •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작전의 ‘악역’을 맡았던 올리버 노스 중령이 당당하게 국가를 위한 자신의 애국심과 신념을 밝혀서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였다. 레이건에게 노스가 있었다면, 히틀러에겐 힘러가 있었다.
  • 지젝은 실재에 대한 ‘반동적인’ 열정과 ‘진보적인’ 열정을 이론적으로는 대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동적’ 열정이 법의 외설적 이면에 대한 보증·배서라면, ‘진보적’ 열정은 (‘정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 부인된) 적대라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실재(계)는 적대를 도입하는 과잉적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접촉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지젝은 실재를 우리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
  • 괴물terrifying thing’로 보는 표준적인 비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는 상상적인 베일이나 상징적인 베일에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다. 기만적인 외관 밑에 우리가 직접 쳐다보기엔 너무나 두려운 ‘궁극적 실재라는 괴물ultimate real thing’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궁극적인 외관ultimate ap­pearance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서, 혹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그 구성적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은 회피하게 해주
  • 해주는 환영적 유령(허깨비)일 뿐이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예로 들자면, “실재로서의 유대인은 사회적 적대를 감추려고 불러낸 유령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이라는 형상은 우리가 사회적 전체를 유기적 통일체로 인식하게 해준다.”
  • 사회적 적대를 유대인 형상에 투사함으로써, 즉 덮어씌움으로써 유대인을 배제한 사회적 전체의 통일성이 보증된다는 얘기다.
  • 대차는 없는 것이지만 초점은 달라진다.
  •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 가족사)에서 정미주를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미주를 바라보는 채인호의 시선은 건달 세계에서 채인호가 휘두르는 주먹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 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 “섹슈얼리티는 본래부터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으로서, 냉정하고 균형 잡힌 논리를 특수한 파토스로 오염시킨다. 성적 자극은 부르주아의 부패와 연결된 귀찮은 방해꾼이다”라고 소비에트는 인민들을 교육했다.
  •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가장 적대적인, 그래서 가장 금욕적이며 무성적인 사회였다.
  • 미국의 대테러 군사작전의 암호명은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였다. 오직 신만이 무한한 정의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비난으로 나중에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지젝은 이 작전명이 더없이 아이러니컬하다고 말한다.
  • ‘무한한 정의’란 말은 중의적이다. 즉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 그런데 이것은 헤겔적 의미의 ‘악 무한bad infinity’이다. 완수될 수 없고 종결될 수 없는 작전이기에 그렇다.
  •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의의 행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무한한 과정이다.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 ‘테러와의 전쟁’은 하나의 행동으로서 기능하며, 이 행동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를 속여 정말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짓 확신을 심어주려는 데 있다.   즉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 혹은 충격 이후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주입하기 위한 ‘행동화’가 테러와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 우리가 뭔가 인위적으로 단절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은 어떤 불길한 행위자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편집증적 전망에서 테러와 테러리스트들은 ‘추상화’된다. 즉 구체적인 사회적·이데올로기적 네트워크에서 분리된다. 그리고 사회 환경을 환기시키는 모든 설명은 은밀하게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기각된다. 그러는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관용의 태도다.
  • 저는 데리다적인 해체의 영역과 라캉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이 총체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점점 더 커다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총체적으로 양립
  • 불가능하다’는 것은 둘 중 누구 하나가 더 옳다는 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직접적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
  • 지젝이 보기에 데리다와 라캉의 대화 혹은 만남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은 위상학적 불가능이다.
  • ‘라캉주의 좌파’
  •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학의 잠재적 전복성을 헤겔-마르크스적 사유를 통해 선구적으로 전유한 것은 지젝과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였다.
  • 지젝이 목표한 것은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였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캉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캉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주장
  • 루마니아의
  •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린 반란자들의 깃발 사진이다.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이 잘려나가고 국기 중앙에 단지 구멍만 뚫려 있을 뿐인 국기다. 이 국기의 이미지는 이전의 주인 기표가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나 아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중간적 국면의 ‘열린’ 특성에 대한 현저한 표지다. 지젝은 이 이미지를 실재라는 구멍을 둘러싸려는, 정치적 재현의 공간 안에서 정치적인 것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시도의 가장 놀라우면서도 숭고한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오늘날 비판적인 지식인의 책무는 새로운 질서가 안
  • 비판적인 지식인의 책무는 새로운 질서가 안정화되고 이 새로운 질서가 대타자 안의 결핍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때 이 구멍의 자리를 점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정치적인 실천이 관련되는 한, 우리의 윤리적인 책무는 단지 정치 현실 안에서 이러한 결핍의 제도화를 시도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책무는 진실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책무다”
  • 그 책무의 핵심은 모든 정치제도와 정치세력의 한계를 가시화
  • 가시화하고, 모든 유토피아적 상징화와 그러한 상징화가 차지하려는 실재(구멍)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요체다. 간단히 말하면 이 ‘구멍’을 끝까지 권력의 공백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 지젝은 한마디로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다시 따져 묻는다.
  • “우리가 양보할 수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 지젝은 『국가의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지 않고 국가 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 토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핵심은 민주주의라는 텅 빈 형식적·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 파이프스는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다.
  • 지젝은 바로잡는다. 그것은 ‘충실한’ 계승이 아니라 ‘현실 타협적인’ 계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 너무 부드럽기 때문에 진보적이진 못했던 체제였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사회주의’란 말은 달리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 1953년 동독의 노동자 봉기
  • 지젝이 보기에 실제로 “인민을 해산하고 새로운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즉 낡은 기회주의적 인민, 곧 ‘타성적 군중’을 역사적 사명을 자각한 ‘혁명적 몸체’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유일한 의
  • 는 것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유일한 의무이다.
  • 스탈린주의의 과오는 무엇이었나? 그러한 사명으로부터의 후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 인민을 혁명적 몸체로 변화시키는 일 대신에 스탈린 체제는 일정한 비율의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수용소에 감금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고자 했다. 공포
  • 공포정치를 통한 거대한 수용소 국가 체제의 건설이란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불능’을 은폐하기 위한 ‘완력’의 행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과 예술 또한 이러한 완력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것이 20세기 ‘정치적 예술’의 대표적 몰락의 사례로 지목되는 것이다.
  • 대중적 퍼포먼스, 혹은 집체 공연을 예로 들자면 거기에 어떤 ‘원형적 파시즘’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파시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명명 자체이며, 특수한 접합 효과일 따름이다. “자발성과 과도한 자유 속에서 탐닉하는 ‘방임적’ 태도는 그것을 제공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단지 그들의 기율만을 가지고 있
  • 있다.”
  • 피어싱부터 복장 도착,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야말로 정치
  • 정치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이 결합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 2006년 5월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한 네티즌이 이에 항의하는 표시로 수도 민스크의 광장에 나와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플래시 몹 제안을 인터넷에 올렸다. 벨라루스 경찰은 이에 과민반응하여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 몇 사람을 잡아갔다. 하지만 단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잡혀가
  • 잡혀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면서 일은 더욱 커졌다. 더욱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 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 호피족
  •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역사적 필연에 의해 예정된 행위자로 발견한다거나 고양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의존해야 할 대타자는 없다
  •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고 믿는 것은 기만이다.
  • 서양의 소비주의적 생활방식과 무슬림 급진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관해 두 가지 직접적인 철학적 참조점이 있다. 바로 헤겔과 니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의 대립이다.
  • 그리고 헤겔식으로 말하면 주인과 하인 사이의 투쟁이다. 보통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 서구에 사는 우리가 착취하는 주인처럼 인식될지 몰라도, 사실 하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하인은 삶과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가 없지만(콜린 파월이 내건 사상자 없는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라), 가난한 무슬림 급진주의자들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태세인 주인들이다
  • 주인과 노예의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인데, 아군의 사상자가 전혀 없는 하이테크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옹호에서 ‘생사를 건다’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때문에 ‘노예’이고 ‘하인’이라는 것이다.
  • 한편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건 각 ‘문명 내의 충돌’이지 문명 사이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 끔찍한 학살도 동일한 ‘문명’ 내에서 벌어진 일일뿐더러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 맥월드
  •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5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헤다야트 모사데그 수상을 CIA가 조종한 쿠데타를 통해서 축출한 전력이 있다. ‘근본주의’도 ‘소련의 위협’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국가가 석유 자원을 통제하고 서방 석유 회사들의 독점을 끝내야 한다는 민주적 각성만이 일어난 상태였는데, 미국은 그런 상황을 용인하지 않았다.
  •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의 ‘도착적’ 위치는 미국의 관심사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에 두어져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 ‘문명의 충돌’ 전도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의 위협은 오히려 내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200만 명 이상의 우익 포퓰리스트와 근본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각종 테러를 자행한다.
  • ‘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은 ‘무슬림 대타자’가 아닌 ‘아메리카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 진정한 충돌은 문명들 간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충돌’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 “9.11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똑같을 수 없다.Nothing will ever be the same after September 11”라는 문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지만, 정작 획기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패권을 재단언하는 쪽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즉 반세계화와 여타의 비판들에 맞서 그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거듭 단언했을 뿐이다.
  •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미국
  • 의 선택은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자의식으로 무장하고 어떠한 변화도 부인하기 위한 대테러 전쟁에 나섰다. 미국이 앞세운 ‘무한한 정의’는 한갓 냉소적인 난센스가 되고 말았다.
  •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때 스탈린의 사망(1953) 이후 당의 제1서기였던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비공개 연설)을 통해서 절대권력자였던 스탈린의 과오(!)를 비판한
  • 제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39명 중 98명, 즉 70퍼센트가 (주로 1937~1938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으며, 표결권과 심의권을 지닌 제7차 전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 절반이 훨씬 넘는 1108명이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략 스탈린 시대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는 2000만~2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체포된 사람은 4000만 명에 이른다.
  • ‘노멘클라투라’
  • “스탈린 시대에서 포스트 스탈린 시대로의 이행”은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의 이행”에 대응한다. “라캉의 관심은 현대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담론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이행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 서구의 경우 그러한 이행이 표시되는 지점이 1968년 혁명이었다면, 소련의 경우에는 이보다 앞선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2월 14일~25일)에서 흐루쇼프가 행한 반스탈린 비밀 연설이었다. 요컨대 서구의 68혁명에 짝이 되는 것은 소련의 1956년 비밀 연설이다. 참고로 스탈린의 개인숭배로 인한 과오들을 적시한 가운데, 흐루쇼프의 연설 말미에서 제시되고 있는 결론은 세 가지다.
  • 첫째, 개인숭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과 무관하며, 당의 지도 원칙과 당의 생활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서 볼셰비키답게 비난하고 근절해야 하며, 그것을 부활시키려는 어
  • 떠한 시도에도 맞서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   둘째, 위에서 아래까지 당의 모든 조직에서 레닌의 당 지도 원칙, 무엇보다도 최고 원칙인 집단 지도 원칙의 매우 엄격한 준수, 당헌에 규정된 당 생활 규범의 준수, 비판과 자기비판의 강화 등과 관련하여 당 중앙위원회는 최근 몇 년간 시행해온 사업을 일관성 있고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한다.   셋째, 소련 헌법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관한 레닌의 원칙을 전부 다시 내세우며,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의 전횡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개인숭배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어온 혁명적 사회주의 준법성의 침해 행위를 반드시 끝까지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명시돼 있지만, 흐루쇼프가 다시금 강조한 것은 레닌주의로의 회귀다.
  •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는, 그것의 형식과 관련해서 민주적인 것과 동시에 비민주적인 것일 수 있다. ……다른 한편 대중적 의지의 본래적 행위는 폭력적 혁명이나 진보적 군부 독재 등의 형식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비난하는 흐루쇼프의 1956년의 연설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였다.
  • 9월 11일은 이미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전유되고 있다. 온갖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반세계화는 이제 끝났다는 주장에서부터, 세계무역센터 공격의 충격으로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에는 실질이 없다는 특성, 즉 ‘현실 생활’과의 접촉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성이 드러났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여기서 두 번째 생각은 틀린 이유에서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옳은 반면, 첫 번째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 문화 연구의 지향이 ‘억압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고작 제1세계 자본주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불과하다면, 9.11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정작 문제가 되는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적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그런 사실을 인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주제들에 집착할 수 있을까?
  • “미국인들은 그들의 ‘권역’을 더욱 강화하기로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그 권역 밖으로 걸어 나올 것인가?”
  • “미국인들은 그들의 ‘권역’을 더욱 강화하기로 결정할 것인가”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런 일들이 ‘여기’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거야!”라는 부도덕한 태도를 반복하거나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는 물론 ‘미국’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미국에서만큼은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미국 예외주의’가 이러한 태도를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곧 외부의 위협에 대한 공격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 반면에 ‘그런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시켜준 ‘환상적인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실재의 세계the real world’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한 걸음은 이런 구호의 변화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여기서는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here!”에서 “이런 일이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anywhere!”로.
  •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오히려 9.11을 초래한 미국식 패권주의를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간 것이다.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이 미국이 가진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그 ‘결여’ 때문에 빚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 9.11 공격에 대하여 ‘미국은 억울하다!’와 ‘미국은 당해도 싸다!’라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여기서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이런 대립을 거부하고
  • 서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 ‘전체성totality’이라는 변증법적 범주에 기댐으로써다. 이 두 입장 각각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면적이고 틀렸기 때문이다.
  • 무고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은 위치다. 곧 허위적 추상화에 불과하다.
  • 우리는 테러리즘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테러리즘이란 용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미국과 서구의 패권적 행위 또한 테러리즘에 포함시켜야 한다.
  • 우리는 부시와 빈 라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둘 다 ‘우리’와 맞서는 ‘그들’이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가 전체성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자신과 그 타자가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통일체임을 의미하고 있다.
  • 즉 부시와 빈 라덴이 표면상 대립적으로 보일지라도 세계자본주의의 전체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변증법적 통일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메모푸코
  • 무엇이 가장 적합한 자세인가. 그것은 모든 희생자들과의 무조건적인 연대이다.
  • 당신이 “그렇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 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식으로 이러한 연대를 내키지 않아 한다면, 그것은 제3세계에 대한 동정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 희생자들에 대한 은근한 인종차별적 태도를 드러내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 모든 것을 테러에 대한 찬반으로만 몰고 간 것이다. 하지만 테러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며, 그러한 선택에 대한 유혹은 기각되어야 한다.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지젝이 던지는 두 가지 질문 혹은 요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늘날 중요한 선택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혹은 그 파생물) 사이의 선택일까? 둘째,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저항해야만 하는 유혹이다. 이처럼 선택의 자명함이 명백한 순간이야말로 속임수가 완전한 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힘을 내어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상황의 배경에 대해 성찰해봐야 한다.
  • 어떤 선택이 자명해질 때, 거기엔 항상 속임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 오늘날 세계화 상황의 복잡성과 이상한 뒤틀림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 대 그 타자(현 시점에서는 반세계화 운동 같은 주변적 흐름으로 대표되는) 사이의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전쟁이 ‘냉전’이었던 데 반해서 거대한 ‘열전hot war’은 파시즘과의 전쟁 곧, 자본주의 내부의 전쟁이었다.
  • 실상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공산주의(소련)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의 지원하에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그 적
  • 으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테러리즘의 기세가 아무 등등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내부의 전쟁이다.
  •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시작부터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 아프가니스탄은 순전히 근대 열강 사이의 역학관계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그렇게 자신이 조작해낸 이미지와의 전쟁이기도 했다.
  • 미국의 ‘역사로부터의 휴가’는 거짓이었다. 미국의 평화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대재난을 대가로 사들인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외부에서 공격을 가하는 형언할 수 없는 악과 대면하는 결백한 시선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힘을 내어, 도처에서 악을 지각하는 결백한 시선 그 자체에도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 헤겔의 유명한 격언을 이런 시선에 적용시켜야 한다.
  • 물라 오마르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보자. “여러분은 정부가 하는 말을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두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 일단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충족되어선 안 된다. 과도한 소비는 불행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바닥나는 물건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을 때 만족감이 높아진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일이 잘못됐을 때 비난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당黨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모든 건 ‘그들’ 잘못이었다. 끝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진 않은 조건으로 ‘다른
  • 장소other place’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동유럽인들에겐 소비 천국으로서 서구가 그 다른 장소였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그곳을 그들은 꿈꾸었고 때로 방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은 결국 욕망에 의해 끝장나고 만다. 욕망은 그들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도록 부추겼고 결국은 만족이 줄어들어서 절대지수가 예전보다 덜 행복한 체제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화된 동유럽의 실상이다.  
  • 그것은 그냥 단순한 존재의 범주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불확정적이며 불일치적이다. 그것은 이교도적 개념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건 이교도들이다. 종교적 경험과 정치활동이 행복의 최고 형태로 간주된다.
  • 간단히 말하면, ‘행복’은 쾌락 원칙에 속하며, 행복을 잠식하는 것
  • 쾌락 원칙에 속하며, 행복을 잠식하는 것은 쾌락 원칙 너머에 대한 요구이다. 
  • 라캉적 의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이 자신의 욕망이 가져올 결과와 완전하게 마주하지 못하는, 혹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주체의 상태에 의존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
  • 즉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체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것은 최악의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
  • 최악의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행복이다.
  • 오늘날 좌파는 자본주의 체제가 달성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한 요구들을 퍼붓고 있는데(완전고용! 복지국가를 유지하라! 이민자들에게 완전한 권리를!), 이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인 도발의 게임이다. 즉 주인에게 그가 들어줄 수 없는, 그리하여 그의 무력함을 폭로하게 될 요구를 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 이런 전략의 문제점은 단지 체제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요구를 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그것이 실현되길 바라지는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 68혁명의 모토,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 우리는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이라는 어떤 극한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 아니었던가? 우리는 타자를 우리의 적으로, 거짓 지식의 소유자 등으로 환원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그녀의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심연이 들어 있다.
  • 바디우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주 유해하며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특히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
  • 행동’일 때 그렇다.
  • 이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은 바디우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그의 논리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타자를 단순히 그런 범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 “그/그녀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심연이 들어 있다.” 즉 각자는 어떤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걸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본적 타자성을 존중하지 않고 바디우처럼 ‘주관적으로 정당한 행동’을 옹호할 경우에 도달하게 되는 결과는 20세기 전체주의의 과오를 다시 답습하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에 대해 흔히 인용되는 유대인의 속담(“누군가 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하면, 그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보충되어야 한다. “누군가 인류의 진정한 단 하나의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류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 진정한 윤리적 시험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듯 희생자들을 구하려는 태도뿐만 아니라 그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려는 일에도 걸려 있다.
  • “우리는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불사조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 즉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임무를 전적으로 떠맡지 않으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행한다.”
  • ‘소격효과extraneation’
  • 가령, 슈렉과 피오나가 키스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
  • 벌어지는가? “못생긴 괴물이 멋진 왕자로 변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공주가 뚱뚱하고 평범한 소녀로 변한다.”
  • 남녀 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선 그걸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 “만일 당신이 패권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그런 척한다면) 당신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정직한 인간일 수 없다. 당신은 멍청하거나 타락한 냉소주의자거나 둘 중 하나이다.”
  • 좋았던 시절에도 동독에서는 한 사람이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신념과 지성, 그리고 정직성이 그 세 가지다. 신념과 지성을 가진 인간은 정직하지 않았고, 지적이고 정직한 인간이라면 신념이 부족했
  • 부족했으며, 신념을 갖고 있는 정직한 인간에겐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라고 지젝은 묻는다.  
  • ‘호모 서케르Homo sucker’
  • 호모 서케르는 어떤 인간인가? 요컨대 타인을 착취하고 빨아먹으려고 하지만, 결국엔 그 자신이 먹잇감이 되고 마는 인간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에 대한 그 지배를 강
  •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 이데올로기를 강화해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도에서 지젝은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다. 첫 번째, “우리는 타자를 ‘믿을 것이라 가정된 주체’로 변형시키면서 우리가 지탱할 수 없는 순진한 믿음을 타자에게 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두 번째 교훈, “적에게 미리 어떤 영역을 부여해주는 대신, 우리는 ‘본래’ 적에게 속한 것처럼 보이는 관념들과도 투쟁해야 한다.”
  •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믿음을 대타자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서 자살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살이란 행위 자체를 수단으로 그 믿음을 입증하려는 것일까?
  •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로 지젝은 소련의 작가동맹 의장이었던 작가 알렉산드르 파데예프를 든다. 『궤멸Razgrom』을 쓴 원조 스탈린주의자arch-Stalinist인데, 그는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을 듣고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흐루
  • 흐루쇼프가 폭로한 스탈린 체제의 부정과 부패가 과연 그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정황상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내용이 그에겐 하등 새로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믿고 있었던 것은 ‘대타자’다. 그 대타자, 곧 사회주의의 공적인 외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버린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영 그 자체의 ‘수행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절망은 그 환영의 붕괴에 대한 절망이자 그에 대한 충실성의 제스
  • 제스처다. 지젝이 제시한 다른 사례에 견주자면, 그는 “자신의 정직한 무지의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자살했다.”
  • 두 번째 교훈
  • 첫 번째 교훈
  • 그들은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나 제3세계의 군중들이 어쩌다 혁명이라는 사명을 비겁하게 배반하고 민족주의나 자본주의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오만한 판결을 내린다.
  • 198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대중들이 민족주의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며 비난하는, 넉넉한 보수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아가는 영국이나 프랑스 ‘급진 좌파’라는 혐오스런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 실제로 시험에 처한 것은 이들 ‘급진 좌파들’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내전에 대해 오판을 저질러 이 시험에서 비참하게 실패한 것 역시 이들이었다.
  • 항상 자신의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결여돼 있다고 지젝
  • 지젝은 비판한다.
  • 나치즘이 역겨운 것은 최종 해결책이라는 수사법 자체가 아니라, 나치가 그것에 부여한 구체적인 왜곡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분석에서 유명한 다른 주제 하나는 수천 명의 사람이 훈련된 제식 동작을 보이는 집단 안무(퍼레이드, 경기장에서의 집단 퍼포먼스 등)에 ‘원조 파시스트적’ 특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집단 안무를 사회주의에서도 보게 되면, 우리는 즉시 두 ‘집단주
  • 보게 되면, 우리는 즉시 두 ‘집단주의’ 간에는 ‘뿌리 깊은 결속’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 훈련된
  • 제식 동작과 열병 퍼포먼스만을 증거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싸잡아서 ‘전체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오류이다.
  • 그런 집단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게 아닐뿐더러, 좌파나 우파가 전유할 수 있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본래 노동자 운동에서 태어난 집단 퍼포먼스를 훔쳐서 전유한 것이 나치즘이었을 뿐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적인 역사주의 계보학이 아니라 니체식 계보학이다. 역사주의 계보학은 사안의 근원과 영향 관계 등을 따져 묻는다. 파시즘이 탄생하면, 그러한 현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원조 파시즘’을 찾아서 그 책임을 묻는 식이다. 니체식 계보학은 ‘원조’의 오용과 왜곡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단절’을 강조한다. ‘원조’라는 건 그런 오용·왜곡이 그 부정적 결과를 소급하여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  
  • ‘파시즘이라는 말 이전의 파시즘’은 없다. 수많은 요소들로부터 진정한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말 그 자체(명명)이기 때문이다.
  • 지젝은 그러한 맥락에서 ‘훈련discipline’이 ‘원조 파시즘’적 특징을 포함한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수천 명의 신체가 조직적인 동작을 펼치는 공연이(혹은 등산처럼 대단한 노력과 극기를 요구하는 스포츠에 대한 찬탄이) ‘원조 파시즘적’이라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은 단지 우
  •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은 단지 우리의 무지를 감추는 모호한 연상관계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 자기 단련은 가진 것이 오직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즉 그것은 순수한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반면에 “지나친 자유에 탐닉하는 자발성과 ‘될 대로 되라’는 태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사람들의
  • 것이고, 그런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한테는 오직 그들의 단련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에 ‘나쁜’ 신체 단련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적인 트레이닝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적인 가능성의 실현이라는 주관적인 경제의 일부인 조깅과 보디빌딩이다.”
  • 제인 폰다
  • 요슈카 피셔
  • 과거 급진적 좌파의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성숙한 실용적 정치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옮
  • 옮겨갈 때, 그 사이 ‘잠복기’에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심이라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 브레즈네프
  •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런 것이야말로 오늘날 악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신(진리, 정의, 민주주의, 혹은 다른 절대적 가치)과 연결돼 있다고 믿으면서
  • 상대방은 지옥(악의 제국 혹은 악의 축)과 직접 연결돼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러한 절대화에 반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모두 상대적이며 역사적인 우연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따라서 결정적인 해법이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이면서 실용적인 해법만이 있을 뿐이라고.
  • 지젝은 이런 입장이 보여주는 것은 허위적인 자세일 뿐이라고 질타한다.
  • 누군가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그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경우엔 ‘수
  • ‘수행적 모순’이다. 자기 말을 자기가 되삼키는 식이니까. 즉,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그것이 옳다는 믿음을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의견도 아니다.
  • 지젝은 이러한 비판이 해체주의적 수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발언 위치를 상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정반대로 그런 발언 위치를 특권화하기에 ‘불경스럽다’.
  • “자유민주주의자는 안전한 주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전면적 개입을, 모든 ‘독단적인’ 편들기를 완전히 묵살하는 것이다.”
  • 근본주의자는 한쪽 발만 적당히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다 담그는 것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입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자는 그러한 개입을 어느 한쪽 주장에 대한 ‘독단적인 편들기’ 정도로 폄
  • 폄하한다. 
  • 지젝은 어떤 요소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란 그 요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엮어지고 전용되는 연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은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결합체다. 그럴 경우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는 ‘민주주의’와 같지 않다.
  •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주된 정치적 물신이며, 기본적인 사회적 적대에 대한 부인이다. 선거 상황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일시 중지되며, 사회체는 숫자로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으로 환원되고, 여기서 적대 역시 중지된다
  •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는 노숙자도 재벌 2세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평소에 뻣뻣하던 정치인들이 유권자에게 연신 허리를 구부리고 큰절을 하는 것이 우리가 선거 시즌마다 보게 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엄연한 ‘사회적 위계질서’가 이때만큼은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으로 우리가 ‘주인’이며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모두가 ‘평등’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 그것이 사회의 기본적 적대에 대한 부인이며, 그러한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 ‘물신fetish’ 곧 ‘물신적 태도’다.  ‘사회체social body’란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그것이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pure multitude’으로 환원된다는 것, 계급적 의미를 갖지 않는 다수라는 의미의 ‘다중’이라면 거기엔 더 이상 적대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머릿수’만 있을 뿐이다.
  • 사취
  • 이탈리아에서 부패한 구舊정치세력을 몰아낸 ‘클린 핸드clean hands’ 캠페인이 베를루스코니를 권좌에 앉히는 결과를 낳았고, 오스트리아에선 극우파 하이더가 ‘반부패’란 명분으로 자신의 권력 쟁취를 정당화했다
  • ‘정직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환상이다. 외설적 초자아의 보충이 없는 법질서가 환상이듯이 말이다. 민주주의적 기획의 우연한 왜곡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개념 그 자체에 기입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는 민주진창democrassouille이다. 민주주의 정치질서는 그 본성상 부패에 빠지기 쉽다.
  • ‘정직한 민주주의’라는 것도 환상이다. 민주주의에는 항상 부패가 뒤따른다.
  • 간단히 말하면, 민주주의에서의 부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정식화할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물론 그 ‘대안’이란 것을 어디서 찾느냐는 점이다.
  • 식자층
  • 레닌이 자주 인용한 나폴레옹의 말로는 “우리는 공격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on attaque, et puis on verra”
  • “이 표현의 흥미로운 특징은 위험을 무릅쓰는 적극적인 태도인 의지주의voluntarism에 보다 근본적인 숙명론을 결합시킨다는 점이다. 일단 행동하고, 뛰어들고, 그다음에 일이 잘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 서양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의 숙명론 사이에서 분열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의지주의와 숙명론의 그러한 결
  • 결합이라는 얘기다.
  • 요컨대 ‘인간의 얼굴을 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유전사’가 지향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 ‘호모 사케르’메모성스러운 인간. 벌거벗은 인간. 죄. 희생
  • 비판자들은 우선 종교가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억압의 세력이라는 비난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종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유 그 자체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것을 희생하게 된다. 종교에 대한 무신론자의 이론적·실천적 거부로 인한 궁극적 희생자는 종교가 아니라(종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제 삶을 이어갈 뿐이다), 정작 종교에 의해 위협받는다던 자유가 된다. 종교적인 참조점을 잃어버린 급진적 무신론자의 세계는 평등주의적 공포와 폭정이 지배하는 음울한 세계다.
  • 이것이 체스터턴이 말하는 무신론의 역설이다. 테러와의 전쟁 역시 자유를 수호
  • 한다는 명분으로 개시됐지만, 알다시피 그 과정에서 희생물이 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시민적 자유였다.
  • 가령, 테러 용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된 공항 검색과 알몸 스캔 검색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자유를 위한 전쟁의 희생물이 자유라는 역설이다.
  • “‘테러리스트’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면, 테러와 싸우는 우리의 전사들은 무슬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신들의 민주주의 세계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우리가 도구적인/대상화된 ‘소외된’ 공적 교환의 습격에 맞서기 위해 진정으로 친밀한 사생활의 영역을 보호하려 노력한다면, 정작 완전히 대상화되고 ‘상품화되는’ 영역이 되고 마는 건 사생활 그 자체라는 점이다. 사생활로 철수한다는 것은 최근의 문화산업이 선전하는 사적인 진정성의 공식들을 채택하는 일을 의미한다.
  • 무엇이든 교환의 대상이 되는 무자비한 공적 교환 체계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생활로 철수’할 때, 정작 희생되는 것은 사생활 자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적인 진정성은 자기 계발을 위한 강좌들의 수강에서부터 조깅과 보디빌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상품화’돼 있기 때문이다.
  •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사생활의 비밀이 보호되는 사회라는 말은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구호에 불과한 것인가.
  • 우리가 오늘날 강조해야 하는 것은, ‘소외된’ 상품화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집단성을 창조하는 것이란 점이다.
  • 강렬하고 충만한 개인적(성적) 관계를 갖는 방법—유일한 방법—은 연인이 주변 세상을 잊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함께 바깥을, 제3의 지점(두 사람이 함께 투쟁하며, 두 사람이 함께 몸담은 대의)을 바라보는 것이다.
  • 밀실의 사랑은 대의the cause를 상실한 무력감의 탈출구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제3의 지점’이다.
  • ‘전 세계적인 주체화global subjectivization’의 역설에서부터
  • 시작해보자. 다른 게 아니다. 그러한 주체화의 결과로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그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적 현실’은 제 갈 길을 간다.
  • 여기서는 빅 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는 윈스턴 스미스에게 심문자가 했던 유명한 대답(“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을 살짝 바꿔 답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의심에 해줘야 할 적절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건 주체 그 자체야’이다…….
  • 선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 속으로 가는 ‘내면의 여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선 명상의 목표는 자아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며, 발견할 ‘자아’와 ‘내면의 진실’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 ‘진정한 자아 찾기’는 선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정한 선사禪師들은 자유란 자기를 잊고 원초적 공空과 결합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 ‘내적 여행’ 혹은 자기 내면으로의 여정이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체성의 텅 비어 있음the void of subjectivity’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이르러 봉착하는 일은 그러한 완전한 탈주체화desubjectivization를 떠맡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불교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아 속으로의 여행’의 궁극적 희생자는 자아 자체라는 것이다.”
  • “실증주의의 최종적 희생물은 혼란스런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아니라 사실들 그 자체이다. 세속화의 철저한 추구, 우리의 세속적 삶으로의 전환은 삶 그 자체를 ‘추상적인’ 핏기 없는 삶의 과정으로 변화시킨다.”
  • ‘대한민국 0.1%’의 삶을 지향하지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자신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증류’해내는 과정에서 점차 삶의 직접성과 실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가.
  • 모든 ‘더 높은’ 목표들을 테러리스트적인 것이라며 거부하고 자신들의 삶을 생존에만 바치는, 점점 더 정교해지며 인공적으로 일으킨/유발된 것이 되어가는 소소한 쾌락으로 가득 찬 삶에만 바치는 포스트모던적 개인들 말이다.
  •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의가 종언을 고한 시대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기도 하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놀이공원’에 가고, 뭔가를 경험하기 위해선 ‘체험전’에 가야 하는 시대다. 이토록 즐거운 삶에서는 사도 바울의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누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가?”  만약 우리가 ‘단순한 삶mere life’을 넘어서는 과도한 강렬함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 살아 있는 거라면? 단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출 때, 비록 그것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having a good time’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거라면 조금 더 자세히 따져보기로 한다.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단순한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단순한 삶’은 ‘간소한 삶simple life’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삶’이다. 자신의 삶에 아
  • 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 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
  •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 스스로를(그리고 다른 이들을) 폭파하려는 순간에 놓인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공격자가, 컴퓨터 화면 앞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적과 전쟁을 벌이는 미국 군인이나 체형 유지를 위해 허드슨 강변에서 조깅을 하는 뉴욕 여피보다 강력한 의미로 ‘더욱 살아 있다’면 어떤가?
  • 가령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과도한 질문을 해대는 히스테리 환자는 ‘죽음 속에서의 삶life in death’, 어떠한 과잉도 경계하며 ‘죽어지내는 삶’의 모델 자체인 강박증 환자의 삶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삶이다.
  •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박증 환자의 삶은 죽은 삶이며 죽어지내는 삶이다.
  •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건 그렇게 ‘죽음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어떤 과잉을 수용하면서부터다.
  •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전시 공산주의’(좌익 노선)와 ‘신경제 정책’(우익 노선)을 왔다 갔다 한 것은 무슨 ‘심원한 역사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전략적인 좌충우돌의 산물이자 실수였다
  • 하지만 그런 불균형한 지그재그 노선이 궁극적으론 (혁명적인 정치적) 삶 자체이다. “레닌주의자에게 있어서 반혁명적 우익의 궁극적인 이름이 바로 ‘중도파’로서, 사회 체제에 근본적인 불균형을 개입시키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즉 과감한 결단을 미루는 중도 노선이야말로 ‘반혁명’ 노선이라는 얘기다.
  • “따라서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여 삶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 분명한 주장의 가장 큰 패배자가 실제의 삶actual life 그 자체라는 것은 완전히 니체적인 역설이다.” 즉 ‘잃어버려도 좋은’ 대의cause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 대의와 함께 ‘실제의 삶’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니체적 역설이다.
  •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삶의 과잉이며, 기꺼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각이다..(이 과잉은 ‘자유’, ‘명예’, ‘존엄성’, ‘자율성’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 ‘죽기를 각오하기’가 ‘삶의 과잉’이다. 삶을 내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니 ‘과잉’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과잉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살아 있는 게 아닐뿐더러 삶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적에게 포위당한 병사가 탈출하고자 한다면,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죽음에 대한 이상한 무심함을 결합시켜야 한다. 단지 삶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겁쟁이가 되고 탈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죽음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러면 자살자가 되고 탈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대한 격렬한 무심함의 정
  • 정신으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삶을 물처럼 욕망해야 하지만 죽음을 포도주처럼 마셔야 한다.
  •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서 눈을 껌벅인다. 그 순간 대지는 작아지고, 대지 위에는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뛰어다닐 것이다. 그 종족은 벼룩처럼 뿌리 뽑기 어려워서, 최후의 인
  •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냈다.”—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껌벅인다.
  • ‘최후의 인간’이 바로 ‘형이상학 이후post-metaphysical’의 인간이다. ‘형이상학’이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너머’에 대한 관심이고 동경이다. 그 형이상학적 관심은 주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질문 형식으로 표현돼왔다.
  • 요점은 이런 물음을 최후의 인간도 던진다는 게 아니라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그가 ‘눈을 껌벅인다’는 데 있다. 그건 그 물음들 자체가 왜 존재하며 또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껌벅임이다.  그런 껌벅임과 함께 “대지는 작아진다”고 니체는 적었다. 세상에 궁금한 게 없으니 대지도 작아질 수밖에.
  • 이 ‘눈을 껌벅이는 인간’의 장기는 생존이다. 그들은 ‘생존주의’를
  • 섬긴다
  • 그래서 결국은 벼룩만큼이나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삶은 ‘벼룩 같은 삶’이며 ‘산 것 같지 않은 삶’, 곧 ‘죽음 속의 삶’이다. 하지만 ‘눈을 껌벅이는 인간’은 그게 또 ‘행복’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행복은 ‘저만 살려고 하는 자’의 행복이다. 
  • 지젝은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쪽인데, 그것은 국가가 그런 처벌권을 가질 수 있다고 동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체정치’적 관점에 반대해서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믿음은 ‘그러므로 생명은 관리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생명 관리 권력bio-power’이다.
  • ‘생명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그것에 기생하는 초월적 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수호하려는 이들은 결국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귀결하게 된다. 그 공식적 목표인 ‘오래 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모든 실제 쾌락이 금지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는(흡연, 마약, 음식 등) 세상으로 말이다.
  • 이른바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우리말로 ‘참살이’라고도 옮기는데, 절반 정도만 동의할 수 있다.
  • 호모 사케르란 인간으로서는 살아 있으나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자를 말한다.
  •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가니스탄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탈레반이나 알카에다는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 형상과 일치한다
  • 비록 인간으로 살아 있다곤 하더라도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열외 인간’이 호모 사케르다.
  • 2001년 미국의 탈레반 소탕
  • 작전 시 체포된 ‘미국인 탈레반’ 존 워커의 신병은 어떻게 처리돼야 하나? ‘미국인’이니까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나, 아니면 ‘탈레반’이니까 탈레반 수용소에 수용되어야 하나? 그는 ‘합법적 범죄자lawful criminal’인가, 아니면 ‘비합법적 전투원unlawful combatant’인가?   
  •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는 인도주의적 생체정치의 특별취급을 받는 대상, 즉 매우 선심 쓰는 듯한 방식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어 자신의 온전한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강제수용소와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푸는 난민수용소가 동일한 사회-논리적인 형식적 틀의 두 얼굴, ‘인간적인’ 얼굴과 ‘비인간적인’ 얼굴에 해당한다는 역설을 인지해야 한다.
  • 중요한 것은 이 둘이 같은 얼굴의 서로 다른 표정일 뿐이라는 점이다
  • 아마 ‘지역 주민’에 대한 호모 사케르적 취급의 궁극적 이미지는 아프가니스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떨어뜨릴지, 폭탄일지 구호식량 꾸러미일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 거기서 폭탄과 구호식량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동일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대립물의 일치’ 혹은 ‘대립물의 통일성’이다.
  • 상황을 고약하게 만드는 것은 대테러 전쟁의 ‘부수적 손상’이 아프가니스탄 난민이라는 점이다. 재난적인 식량난과 극도로 취약해진 보건이 이들 난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 탈레반 소탕을 위한 군사행동이 ‘인도주의적 원조’의 안전한 배달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전쟁(군사행동)과 인도주의적 원조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 난민은 같은 인류로서 인권은 갖지만 시민권은 박탈당한 존재다
  • 진정한 문제는 배제된 이들의 취약한 신분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우리 모두가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라면 어떤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영점zero’의 위치는 생체정치의 대상이라는 위치이며, 참정권와 시민권은 생체정치의 전략적 고려에 따라 부차적인 제스처로 부여되는 것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이것이 ‘탈정치’ 개념의 궁극적인 결과라면 어떤가?
  •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
  • 우리의 참정권과 시민권이라는 것이 생체정치의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라면, 그래서 ‘부차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라면? 말하자면 일종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선거철에만 잠시 ‘주권자’ 대우를 받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정치적 행위나 정치 과정을 번거로운 것으
  • 것으로 간주하고 ‘행정’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탈정치 시대’의 특징이다
  •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라 복리·후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 그것이 탈정치의 결과다. 
  • ‘아도르노’는 물론 ‘계몽의 변증법’을 주장하
  • 주장하는, 즉 근대적 합리성이 결국 아우슈비츠로 귀결된 게 아닌가라고 근심하는 아도르노이고, ‘하버마스’는 아우슈비츠란 병리적 일탈일 뿐이고 아직 근대성의 기획이 미완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게 문제
  • 아도르노: “(정치적) 자유라는 근대성의 기획은 거짓 외관일 뿐이며, 그 ‘진실’은 후기자본주의의 ‘관리되는
  • 세계’에 침윤되어 자신의 자율성을 모두 상실한 주체들이 구현하고 있는 것인가?”
  • 아도르노가 보기에 정치적 자유의 확장이라는 근대의 기획은 허울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얻게 된 것은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관리되는 세계’의 대상으로 전락한 주체들, 혹은 국민들subjects들이다.  
  • 하버마스: “.‘전체주의’ 현상은 단지 근대성의 정치적 기획이 아직 미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에 불과한 것인가?”
  • 그것은 병리적 일탈에 불과하고, 오히려 근대성의 기획이 아직 미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 아니냐는 것이 하버마스의 관점이다. 
  • 공식적 이데올로기상으로 우리는 자율적이며 자유롭다. 하지만 ‘관리되는 세계’에서 우리의 주관적 자유 경험은 오직 우리가 규율 체계에 예속될 때 얻
  • 얻어진다. 즉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여기서 전체주의 사회와 ‘관리되는 사회’는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마치 양수 속에 잠겨 있는 태아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의 ‘나’이다. 가상현실에서는 자유롭지만(비록 환상일지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수인囚人’ 같은 형국이다.
  • 현실과 환상이 뒤집혀 있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으론 ‘도착적 환상’이다. 
  • 환상 너머의 실재는 무엇인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차원에서 우리는 타자(매트릭스)의 향락의 도구에 불과하며, 배터리처럼 생명 물질을 흡수당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 수백만 명의 생명에너지를 추출해내기 위한 복잡한 장치의 가상현실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다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닐까?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향락human jouissance’을 먹고 산다는 것이다.
  • 라캉의 기본 명제라는 것은 대타자가 끊임없이 향락의 유입을 필요로 한다는 점. 지젝은 이를 근거로 〈매트릭스〉의 상황을 뒤집어서 이해해야 한다
  •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진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정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근본 환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클로로포름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난도질을 당하는 환자의 경우를 예로 드는데, 프랑스의 생리학자 피에르 플루랑스에 따르면 마취제는 우리의 기억 신경망에만 작용한다. 따라서 수술 중에 우리는 무시무시한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지만 나중에 깨어날 때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는 아픔을 느끼지만 주체는 그것
  •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 “그녀가 버티고 서 있고자 하는 경계적 위치는 서 있을 수 있도록 배당되지 않은 자리이며, 어떠한 재현으로도 번역될 수 없는 위치다. 이는…… 수치스런 미래로서 의식의 영역, 공적인 영역에 유령처럼 들러붙는 대체적 합법성이다.”
  • 테바이의 통치자 크레온이 전사한
  • 오빠의 장례를 금지하자 안티고네는 이에 맞선다. 오빠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게 해달라는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위치는 법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경계)에 놓여 있다. 앞에서 나온 표현을 쓰자면 안티고네가 고집하는, 혹은 고수하고자 하는 위치/입장은 사회적 상징계에 포함되지 않는 자리이며, 따라서 배당될 수도 재현될 수 없는 자리다. 재현될 수도 없기에 그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크레온이 대표하는 ‘합법성’에 대한 대체/대안이라는 의미다.
  • 다만 그 ‘대체적 합법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가능성(흔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럼, 그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의식의 영역, 공적 영역’에 들러붙는다.   이러한 안티고네의 형상은 호모 사케르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 헤겔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충돌을 사회적-상징적 질서 ‘내부’에 속한 것으로, 윤리적 실체ethical substance의 분열을 드러내는 비극으로 보았다. 즉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각각 국가와 가족, 낮과 밤, 인간의 법질서와 신적인 숨은 질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라캉은 안티고네가 친족관계를 대표하는 것과 무관하며 차라리 상징적 질서를 설립하는 제스처의 경계적 위치limit position를 떠맡는다고 보았
  • 보았다. 여기서 ‘경계’는 ‘한계’이자 ‘극한’이다. 상징적 질서화의 가장자리면서,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상징화의 경계 지점, 상징화가 불가능한 제로 차원zero-level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죽음 충동’을 대표한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상징적 질서라는 면에서는 이미 죽어 있고, 사회적-상징적 좌표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 지젝이 보기에 버틀러는 헤겔과 라캉의 이 두 극단적 입장을 거부하면서
  •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변증법적 종합, 혹은 변증법적 지양이란 부정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약화시킨다. 단지 그 철저한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인 재분절을 목표로 하는 유토피아적인 관점에서도 말이다.”
  • 요점은 안티고네가 단지 상징계의 ‘외부’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하며, 이것은 상징계의 재분절rearticulation, 곧 재편, 재배치, 재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
  •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에 자리가 할당돼 있지 않은 장소를, 거주할 수 없는 위치를 떠맡는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죽음living dead’이다. 하지만 그녀가 떠안는 장소/위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따라 구조화된 것이다.
  •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의 핵심은 그녀가 상징적 질서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이 질서를, 확고한 친족관계의 질서를 재확인해준다. 그녀의 궁극적 선택지는 가부장적 친족관
  • 그녀의 궁극적 선택지는 가부장적 친족관계의 상징적 법과 그에 대한 자살적 차원의 황홀한 위반이다. 법과 위반 사이. 이때 위반은 법의 확고함과 엄정함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자살적·자멸적 위반이란 스스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제안하는 것은 세 번째 선택, 제3의 선택이다.
  • 라캉의 안티고네는 어떤 고정된 상징적 질서와 대결하다 필연적으로 패배한다면,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맞서는 상징적 질서는 가변적이며 재배치가 가능하다.
  •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 속에 받아들여지기를 열망하는 모든 전복적인 ‘병리적’ 주장들을 대표하여 말
  • 말한다. 그러나 버틀러식 독해 속에서 안티고네가 의미하는 바를 호모 사케르와 동일시하면 아감벤 분석의 기본적인 취지를 놓치게 된다. 아감벤의 분석에는, 점차적으로 목소리가 들리게 함으로써 온전한 시민과 호모 사케르를 가르는 경계를 ‘재협상’한다는 ‘민주적인’ 기획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감벤의 요점은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탈정치’ 시대에는 민주적인 공적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가리는 가면이라는 것이다.
  •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상징적 질서의 재편과 재배치를 요구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한다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재협상’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상적인 시민과 호모 사케르를 구분하는 경계가 민주주의적으로 점차 확장돼 모두가 시민으
  • 시민으로 인정·포함되거나 하지 않는다. 아감벤이 보기엔 오히려 지금의 ‘탈정치post-politics’ 시대에는 민주적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가면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 무얼 가리고 무얼 속이는가?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가리고 속인다.  
  • 아도르노의 ‘관리되는 세계’
  • 그는 현대 사회가 이대로 계속 발전해나간다면 그 끝에서 완전히 폐쇄적인 ‘관리되는 사회’가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생체정치’의 대상으로 격하되고 전락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부정적이고 음울한 전망이다.
  • ‘단순한 생명’ 혹은 ‘벌거벗은 생명’은 생체정치(생명정치)의 대상이다. 하지만 메시아적 차원을 도입하고 고
  • 노모스nomos(규범)
  • 고려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의 궁극적인 대상, 유일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바로 아감벤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다. 이때 지젝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저작은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 이다.
  •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여섯 차례의 강의록을 묶은 책이다
  • 아감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어 성경의 로마서 1장 1절을 구성하는 10개의 단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의 원문 “PAULOS DOULOS CHRISTOU IESOU
  • KLETOS APOSTOLOS APHORISMENOS EIS EUAGGE­LION THEOU”를 구성하는 각 단어에 아감벤은 주석을 붙인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증언적 요약이며, “글의 첫머리 한 개 한 개의 언어가 편지의 텍스트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축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감벤은 ‘CHRISTOU’가 뜻하는 ‘그리스도’가 단지 ‘기름 부어진 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 ‘마시아(=메시아)’를 그대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
  •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 또는 ‘예수라는 구세주’를 가리킬 뿐이라는 점에 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명 받음’을 뜻하는 ‘KLETOS’의 파생어 ‘클레시스klesis’는 루터에 의해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되면서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까지 획득하게 됐다고 언급하는 식이다. 요컨대 아감벤의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고려하게끔 한다.    
  • 다시 말해,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는 ‘단순한 삶’이 갖는 중심적 지위를 박탈한다. 이와는 명
  • 명확히 대조적으로 탈정치의 근본적인 특성은 정치를 ‘단순한 삶’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엄밀한 의미의 ‘생체정치’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에서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 곧 ‘단순한 삶’은 적극적 의미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삶’은 더 이상 삶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행세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의의가 절감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정치
  • 이후’의 ‘탈정치’는 ‘정치’를 ‘생체정치’로 축소(환원)시킨다. 고작 ‘단순한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된다는 뜻이다.  
  •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 그 자체가 권력구조를 불안정하게 하고 바꿀 수 있는 항구적인 과정으로 인식되며, 결코 효과적으로 권력구조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라는
  • 점. 요점은 급진적 정치 실행 자체가 궁극적으론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것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바꾸기도 하는 항구적인 과정 정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급진적 정치란 그래서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늘려나가는 정도에 머문다. 이것이 말하자면 급진적 정치의 한계다.
  • 갑작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면, 영원한 어떤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 하나의 영원한 이상은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혁신주의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왕의 명령이 즉각적으로 실행되기를 원하든, 아니면 그 왕이 즉각적으
  • 즉각적으로 처형당하기를 바라든 간에 영원불변한 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 속에 영원이 개입해야만 한다. 역사주의적 진화론은 끝없는 지연으로 이어진다. 상황은 언제나 너무 복잡하며, 설명해야 할 다른 측면들이 언제나 더 남아 있고, 찬반을 따지는 일은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 행위Act는 어떤 곤경과 교착 상태를 돌파하는,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일을 가리킨다(그런 의미에서 ‘행위’란 말은 특권적이며 ‘행위로의 이행’이나 ‘행동’, ‘활동’ 등과 구별된다).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원Eternity’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행위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개입이다. 반면에 진화론적 관점은 그러한 ‘영원’을
  • 인정하지 않는다. 
  • 일반적으로 진화
  • 진화란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진화론에서는 모든 결단과 행동이 연기되고 지체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언제나 너무 복잡하며 어떤 사안에 대한 찬반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저와 머뭇거림이 때론 심사숙고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숙고가 행위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단순화’다. 풀지 못할
  • 만큼 엉킨 매듭을 푸는 방법은 애써 풀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끼로 그 매듭을 끊는 것이다.
  • ‘고르디아스의 매듭’
  •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란 프리지아의 왕 고르디아스가 복잡하게 묶어놓아 아무도 풀지 못한 매듭을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끊어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복잡한 문제를 풀려면 때로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과감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무한한 숙고에 의해 단순한 ‘예’ 혹은 ‘아니오’로 구체화되는 불가사의한 순간이다.” 즉 무한한
  • 숙고가 ‘예/아니오’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으로 결정화되는, 응결되는 순간이다. 
  • “9.11 이후에 풍부해진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관한 현대 개념의 어떤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재고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요청에 대해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급진성이다. 인용문에서 ‘풍부해진’이 수식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아니라 ‘재고해주길 바
  • 바라는 수많은 요청’이다. 9.11 이후에 과연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논란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호모 사케르’가 유익한 분석틀이 돼준다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 먼저, 어째서 세계무역센터 공격이 고문의 정당화의 빌미가 되는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런 생각이 뭐가 새로운가? 이미 미국은 CIA를 통해서 남아메리카와 제3세계에 수십 년 동안 고문을 ‘수출’해왔는데 말이다.  
  • 그의 주장의 요점은 “우리는 여하튼 그걸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합법화하는 것이 더 좋고, 그렇게 해서 과도한 것을 막을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함축할 수 있다. 즉 (1) 우리는 여하튼 고문을 하고 있다, (2) 따라서 차라리 고문을 합법화하는 것이 더 낫다, (3) 그렇게 되면 과도한 고문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는 식이다. 
  • “그러니까 받아 마땅한 처벌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단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전쟁포로에 대한 고문도 합법화하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 편 군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정
  • 정보를 지니고 있을지 모르는데?”
  • 지젝은 고문에 대한 찬성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끌고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 간단히 말해, 그러한 논쟁이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 따위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기엔 테러리스트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징후여야 한다.
  • 여기서 문제는 근본적인 윤리적 전제의 문제다. 물론 단기적인 이득
  • 이득이라는 면에서는(수백 명의 목숨을 살린다거나)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상징세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어떨까? 우리는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까? 상습범들이나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하는 부모 등을 고문해선 왜 안 되는가?
  • 제네바 협정
  • ‘반제 컨퍼런스Wannsee Conference’는 보통 ‘반제 회의’라고 칭하는데, 히틀러의 명령으로 베를린 근교 그로센반제에서 소집된 회의로 중앙안보국의 유대인 문제 담당국장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15명의 나치 관료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소위 유럽 유대인을 절멸시키는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이 결정되었다. 본격적인 홀로코스트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스
  • ‘정상적인’ 민주주의적 자유가 오히려 ‘예외’가 돼버린 것이다. 
  • 9.11 이후의 미국 사회에서도 감지된다. 테러리스트로부터
  •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논리는 ‘긴급사태’의 논리, 예외 상태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긴급사태인가? 당시 부시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서다. 하지만 어떤 전쟁인가? 절대 다수의 국민이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전쟁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런 상황을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면, 전쟁과 평화의 구분 자체가 희미해져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평화 상태 자체가 동시에 위급한 긴급
  • 긴급사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대 말이다.  
  • 국가기관이 긴급사태를 선언할 때는, 정의상 진정한 긴급사태를 피하고 ‘사태의 정상적인 추이’로 돌아가려는 필사적인 전략의 일부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긴급사태’라는 반동적 선포에는 모두 공통적인
  • 특징 하나가 있다. 모두가 국민의 불안(‘혼란’)을 막으려는 쪽으로 향했고, 정상 상태를 회복하려는 결단으로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스, 칠레, 터키에서 군부는 전반적인 정치화라는 ‘카오스’를 억제하기 위해 긴급사태를 선포했다.
  • 긴급사태와 예외 상태의 논리가 ‘긴급’과 ‘예외’를 상시화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긴급사태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책으로 기능한다는 주장까지 봤다.
  •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이제 미국은 이런 언질을 파기했으며, 테러에 대한 전쟁의 일부로서 핵무기를 사용할
  • 수 있는 첫 번째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핵전쟁과 통상적인 전쟁 사이의 구분을 없애버린 것이다. 지젝은 칸트 철학의 용어를 빌려서 설명하는데, 과거 핵무기의 지위가 ‘초월적’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적’ 혹은 ‘병리적’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전략영향국Office of Strategic Influence’
  • “거짓말하는 남자보다 더 나쁜 게 있다면, 자기 거짓말을 고수할 만큼 강하지 못한 남자야!”
  •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일
  • 냉전 시대에는 물론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구에 ‘적’의 형상이 돼주었다. 하지만 그들 국가들이 붕괴·해체되면서 적에 대한 서구의 상상력도 혼란스러워졌는데, 9.11 이후에
  • 비로소 제대로 된 ‘적’을 발견하게 된 형국이다.
  • 다원적 관용주의가 얼핏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주의를 적대자로 규정함으로써 ‘친구냐 적이냐’라는 슈미트식 이분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얘기다. 그러한 이분법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약간 비틀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상화’의 대가로 적의 형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 레이건의 유명한 호명대로 냉전 시대에는 ‘악의 제국’이라는 명백한 적이
  • 규정돼 있었다(‘악의 제국’은 당시 소련을 지칭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적은 더 이상 어떤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실체가 아니다. 국가도 아니고 국가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것은 알카에다처럼 ‘거의 가상적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실체’는 법적 신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탄생한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법의 종말’도 함축한다는 얘기다. 
  •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에서 ‘적의 형
  • 형상’은 무엇인가? 지젝은 ‘반동적 근본주의자’와 ‘좌파 시위자’의 압축이 아닌가라고 지적한다(물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 대립적인 형상이지만, ‘적’이란 기표는 실제적인 정적들을 통합하는, 한데 묶어주는 ‘누빔점’ 역할을 한다.
  • 지젝은 서두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직접 목격한 인종 차별적 폭력을 떠올린다. 한 독일인이 베트남인의 길을 가로막으며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인데, 이 독일인은 신체적 위해는 전혀 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베트남인이 가려던 길만 막아섰다. 그리고 베를린 번화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무시하는 척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이러한 ‘부드러운’ 괴롭힘이 신나치 스킨헤드들의 잔인한 신체 공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더 나쁜 것은
  • 아닐까라고 지젝은 질문한다. 왜냐하면 이런 괴롭힘은 행인들의 반응이 보여주듯이 그냥 ‘일상적인 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스킨헤드들이 직접 폭력을 휘둘렀다면 행인들의 반응은 달라졌을 것이다).
  • 나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게 될 때에는 이와 비슷한 무감각한 반응, 일종의 윤리적 판단 중지가 동원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 ‘부드러운 괴롭힘’이라는 사례에 대해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일이 그러한 판단 중지의 사례다.
  • ‘화용론적 역설’
  •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듯이 말이 자기 말을 집어삼킨다
  • ‘낙서
  • 금지’라고 써놓은 ‘낙서’처럼.
  • 진정한 암시적 명령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런 것 아닐까? ‘우리는 당신들에게 우리에게 저항할 것을 명령한다. 그래야 우리가 당신들을 진압할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침략한 진짜 목표가 앞으로 있을지 모를 테러공격을 예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배수진을 친다’는 것, 가까운 미래에 평화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수
  • 수준으로 증오를 높이려는 것이라면 어떤가?
  •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목표는 테러 공격에 대한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 해결의 봉쇄에 있다는 점, 도발하고 저항하도록 유인함으로써 공격의 빌미를 얻어내고, 또 군사작전을 수시로 감행함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가 아직 요원하다는 인식을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가 갖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의 팔레스타인인의 처지가 호모 사케르의 처지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훈육적 처벌 대상이거나 인도주의적 원조의 대상일 뿐이다. 처벌 대상과 원조 대상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지위는, 하지만 생체정치의 대상으로서 호모 사케르가 갖는 양면성일 뿐이다.
  • “여기서 우리는 유대-기독교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불교의 고통에 대한 자비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자비는 불안을 일으키는 타자가 가진 욕망의 심연이란 의미에서의 이웃에 대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과 공유하는 고통에 대한 동정을 말한다.”
  • 그 차이란 유대-기독교적 사랑이 ‘이웃’ 사랑인 데 반해서 불교의 자비는 ‘고통’에 대한 자비(동
  • (동정)라는 점이다. ‘이웃’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가리킨다. 그런 ‘심연’에 대한 의식을 불교는 갖고 있지 않다. 환생론에 따르면 그래서 인간은 동물로도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 한국인이라면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성인을 가리킨다. 원칙적으로 선거건과 피선거권을 가지며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
  • 이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물론 호모 사케르는 그러한 자격을 박탈당한 이를 가리킨다.
  • 지젝이 윤리적 행위와 대비시키는 것은 ‘허위적 보편성’이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no one is pure”라는 양비론적 태도로 윤리적 행위의 의미를 ‘물타기’하는 것이 가장 나쁜 죄다. 그런 물타기는 실상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득인가? 우선 “결국은 다 똑같은 놈들이지ultimately all the same”라고 말함으로써
  • 은연중에 자신은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다는 점을 과시하게 된다. 양비론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민간인까지 공격하는 이스라엘 놈들이나, 그렇다고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놈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냐? 서로 좀 양보하면 되는 걸 갖고 말이야.”  이렇게 모든 책임을 양쪽에 전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득은 “스스로 완전한 책임을 떠안고 상황을 분석하며 한쪽 편을 드는 어려운 임무”
  • 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반대의 태도가 자기
  • 자신을 연루시키고 책임을 떠안는 것이다. 양비론자들처럼 “너희 둘이 잘못했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도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라며 나의 잘못과 책임을 발견, 인정하는 것이다.
  • 많은 이들이 홀로코스트가 절대적인 범죄라고 되풀이해 말하지만, 모두가 그에 대한 적절한 금전적 보상
  • 보상에 대해 생각한다…….
  • 가령 파시즘에 대해서 비난들을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추방된 희생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평하게 말하자면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추
  • 추방된 독일인들도 희생자들 아닌가? 만약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한다면 이들 독일인 희생자들에 대해선 어떤가? 이들도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 지젝은 특별히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 희생과 돈을 연계하는 것이 오늘날 화폐 물신주의money fetishism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아니 심지어 화폐 물신주의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홀로코스트가 결코 상대화될 수 없는 절대적인 범죄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사람들
  • 사람들은 동시에 적절한 ‘보상’을 이야기한다(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일종의 난센스다). 그렇다면 수정주의의 핵심은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한 것도 불필요한 일이 아니던가?”라는 식의 상대화다. “따지고 보면 연합군도 실수한 것,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 히틀러만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식.
  • “금기들이 무너지고 있다.taboos are tumbling down”
  • ‘역사가-수정론자들historians-revisionists’은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의문시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파시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에른스트 놀테 같은 경우도 ‘수정주의’의 대표 격이다. 그가 ‘수정’하고자 하는 견해는 파시즘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부정으로, 그가 보기에 파시즘
  • 파시즘이 나쁜 건 맞지만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서 불가피한 면이 있으며 또 그에 비하면 차악에 불과하다.
  •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허위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 방법은 그저 그것을 보편화해보는 것이다. 미국을 따라 다른 나라들도 각자 동일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해 말이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이 인도 국회의사당을 공격한 이후, 파키스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 인도에게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 공식적으론 서양의 자유주의적 현대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유대인/유대교)이고, 전근대적인 근본주의자로 치부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세속적 시민권이다.
  •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갈등의 좌표 자체를 변화시키는 행위를 통하는 것뿐이다
  • 이스라엘의 무력 개입은 얼핏 과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는 ‘행위로의 이행’, 곧 발작적 행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은 먼저 현 상황의 궁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곧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모든 아랍 지역을 점령할 수 없으며, 반면에 아랍인들은 이스라
  •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이란 것은 진정한 적대를 드러내는 갈등이 아니라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치된 가짜 갈등이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진정한 적대는
  • 자본주의적 적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 이스라엘의 군사작전과 정치활동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수사학이 동원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이스라엘의 조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는 구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 “그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최근의 정치적인 조치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도구화하는 것
  • 것이다”라고 할 때 ‘그들’이 가리키는 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다. 이 희생자들을 자신의 정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무자비하게 갖다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행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홀로코스트와는 전혀 무관한 사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현상이다.”
  • “홀로코스트는 근대화의 역동에 대한 우파의 저항이 빚어낸 유럽 역사의 일부이며, 이스라엘-팔레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식민주의 역사의 귀결점 중 하나다.”
  • 새뮤얼 헌팅턴의 「무슬림 전쟁의 시대The Age of Muslim Wars」이고, 다른 하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실제의 적The Real Enemy」
  • 후쿠야마는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역사는 끝났다’는 ‘역사 종언론’을 펼쳐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헌팅턴은 냉전 이후 세계는 이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충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 주장해 인구에 회자되었다.
  • ‘유사 자연화’란, 인종-종교적 갈등은 자연현상이 아님에도 마치 자연현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잘 부합하는 투쟁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치 이후의 시대, 탈정치 시대에는 본래적 정치가 점차 전문가들의 사회 관리, 곧 행정으로 대체되기 때문이고, 이 경우 갈등을 유발하는 원천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긴장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 ‘비이성적’ 폭력의 증가는 사회의 탈정치화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
  •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본래의 정치적 차원이 실종됨으로써 발생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가 여러 층위의 ‘행정적’ 처분의 대상으로, 곧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간주됨으로써 빚어지는 일이다.  
  • 결국 ‘유대인 문제’는 ‘아랍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지적된 것이지만, 아랍-유대인 긴장은 전치되고 신비화된 ‘계급투쟁’이다.
  • 지젝이 염려하는 것은 9.11 테러 이후인 2002년 봄 미국에서 사람들이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를 같이 차고 다닌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연대감을 과시한 것인데, 이것이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정말로 유대인들을 걱정한다면 미국과
  • 정말로 유대인들을 걱정한다면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자연스런’ 연결을 끊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할 것이다.  
  • “정치적 구분선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온건한’ 탈정치의 장과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지게 되었다.”
  • 다시 말해서, 정치적 구분선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그어진 것이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 대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탈정치’란 말 자체가 ‘정치 이후’, 곧 ‘정치의 종언’을 뜻한다. 반면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는 정치의 부활이자 복권이다. 정치는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정치가 귀환하는 방식이 보통 극우적 포퓰리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기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지젝의 입장인데, 오히려 탈정치적 입장이 이데올로기의 종언론처럼 순진하며 유해하다는 쪽이다.  
  • 피로스적 승리(막대한 손해를 입어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
  • ‘진지한 정치세력’은 ‘정치는 끝났
  • 끝났어’라고 생각하는 대신 정치를 중요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다. 그들은 주류를 이루는 탈정치적 입장의 무기력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인 정치화’의 자세를 견지한다. ‘급진적인 정치화radical politicization’에서 방점은 ‘급진적인’보다는 ‘정치화’에 있다. 정치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쯤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프랑스의 극우파는 이러한 자세 혹은 입장을 분명 도착적으로, 즉 뒤집혀진 형태로 구현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 정치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르펜과 그의 지지 세력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니체가 말하는 ‘말인’들과 대비된다
  • 테러리스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의 감염으로 비유될 때, 유럽 문화사에서 그러한 박테리아의 전형적 형상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건전한 사회체를 공격하는 ‘박테리아’가 바로 유대인에 대한 상투적 비유였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은 오늘날 ‘떠도는 유대인’의 마지막 화신일까?
  • 민주주의란 권력의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놓는 제도다. 곧 왕이 있던 자리를 비워놓고 몇 년에 한 번씩 권력의 임시 대리인으로 그 자리를 채워넣는다. 그런 게임을 유지하는
  • 한, 지젝은 우리가 ‘거세’에 충실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적 이념은 ‘무사안일주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방책이다. 그것이 ‘탈정치’이기도 하다. ‘정치적 해결’ 거리는 남겨놓지 않고 오직 행정 절차의 문제로 모든 문제를 축소하고
  • 환원하는 것이다. 정치란,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축소/환원에 대한 반대이고 거부다. 하지만 그러한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곤경이다. 그리고 이 곤경의 탈출구로 요청되는 것이 ‘급진적 정치행위radical political Act’다. 이것은 아무런 보증도 갖지 않는 결단을 함축하기에 일종의 ‘광기’다.
  • 지젝이 보기에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의 목표는 그러한 정치행위의 조건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의 제스처처럼 초점을 긴장(갈등)의 진정한 근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 우리가 자각해야 하는 것은 ‘테러와의 전쟁’의 진짜 목표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일차적으론 미국인)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흥미inter-est란 말의 어원적 의미대로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문턱에서가 아니라 중간쯤에서다. 거꾸로 우리가 흥미를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중간쯤에 와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