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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2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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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까칠한 이웃 남자, 오베가 나타났다!무엇이든 발길질을 하며 상태를 확인하는 남자. BMW 운전자와는 말도 섞지 않는 남자. 키보드 없는 아이패드에 분노하는 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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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동안 '문제없었던' 그의 인생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매우 반겼을 만한 균열들이.
- 오베는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말한다. 지금 이 상황의 문제는 오로지 상대방의 덜떨어진 듣기 능력밖에 없다는 듯, 한 단어씩 또박또박.
-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마주보던 두 총잡이가 권총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침묵 같다.
- 이곳에는 차를 최대 24시간까지만 주차할 수 있었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모든 차량 번호를 꼼꼼히 적은 다음 그걸 전날 적어둔 번호들과 비교했다. 같은 번호가 오베의 수첩에 적혀 있을 경우, 오베는 집으로 가서 자동차 등록 사업소에 전화를 걸어 해당 차주의 신상을 검색한 뒤 그에게 연락을 취해 그가 표지판도 읽을 줄 모르는 쓸모없는 머저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그는 쓰레기통을 툭툭 차보더니 욕설을 내뱉으면서 유리 재활용 통에서 병 하나를 끄집어냈고, 금속 뚜껑을 돌려 빼는 동안 ‘무능한 인간들’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는 병을 다시 유리 재활용 통에 버리고, 금속 뚜껑은 금속 재활용 통에 집어넣었다.
- 오베가 ‘정직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끈질기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 ‘여기는 자전거 주차 구역이 아니에요! 표지판 읽는 법 좀 배우시지!’
- 그는 분노의 쪽지를 벽에서 떼었다. 그는 운영 위원회에 이 벽에 ‘전단지 부착 금지’라는 표지판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싶었다. 요즘 사람들은 지들이 화난 것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본인들 멋대로 여기저기 아무 데나 어슬렁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기는 벽이다. 빌어먹을 게시판이 아니란 말이다.
- 사실 이 이층집은 오베와 아내가 살기에는 좀 크다. 그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은 다 갚았다. 융자는 한 푼도 없다. 유행에 따라 옷이나 사 입는 사람들에게 그거 하난 확실히 말해줄 수 있었다. 이젠 사방이 다 융자였다. 다들 그게 인간이 가는 길인 줄 알았다. 오베는 모기지를 갚았다. 의무를 다했다. 직장도 다녔다. 병가라고는 한 번도 낸 적 없었다. 자기 몫의 짐을 짊어졌다. 책임도 어느 정도 졌다. 아무도 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제 있는 거라고는 컴퓨터와 컨설턴트, 그리고 나이트클럽에 가거나 아파트 임대차 계약을 은밀하게 팔아치우는 지역 유지들뿐이다. 조세 피난처와 금융 자산만 있다. 아무도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 하루 종일 점심이나 처먹었으면 하는 인간들로 나라가 꽉 찼다.
- 오베는 창밖을 노려봤다. 겉멋쟁이가 조깅을 하고 있다. 오베가 조깅 때문에 짜증이 나는 건 아니었다. 전혀. 오베는 사람들이 조깅을 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인간들이 조깅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이냐는 거다. 하나같이 만면에 거만한 미소를 띠고 다니는데, 꼭 자기들이 폐기종이라도 치료하러 밖에 나온 것처럼 굴었다. 빨리 걷는 놈이건 천천히 뛰는 놈이건, 조깅하는 인간들은 다 똑같이 그랬다. 마흔 살이나 먹은 남자가 세상에 대고 자긴 똑바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떠들어대는 꼴이었다. 조깅을 하려면 반드시 열네 살짜리 루마니아 체조 선수처럼 입고 나와야 한단 말인가? 올림픽에 출전한 터보거닝
- 팀처럼 차려입어야만 하나? 고작 45분 동안 목적도 없이 동네를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 그의 인생이 이렇게 되리라곤 예상 못했다. 완전히 다 멈췄다.
- 오베의 부인이 샀던 것은 모두 ‘사랑스러운’ 혹은 ‘가정적인’ 것들이다. 오베가 산 물건은 모두 ‘유용한’ 것들이다.
- 사람들은 더 이상 유용한 물건들을 안 갖고 살았다. 사람들이 가진 건 죄다 똥덩어리뿐이었다. 신발을 스무 켤레나 갖고 있으면서도 구둣주걱이 어디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집 안을 전자레인지와 평면 텔레비전으로 채워놓았지만, 누군가 칼로 위협하며 대답을 강요해도 콘크리트 벽에 쓰는 플러그가 뭔지 대답하지 못한다.
- 물건들은 저마다 쓰일 곳이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 “조금 느긋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들이 점잔을 빼며 천천히 말했다. 느긋하게 살라고? 그치들은 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는 있을까? 인터넷을 사용하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는 그 인간들은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기는 할까?
- “내 이 망할…….” 트레일러 바퀴가 오베의 화단으로 굴러가자 오베가 창문을 통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몇 초 뒤 오베의 집 현관문이 홱 열렸다. 마치 문이 열리지 않을 경우 오베의 몸이 문을 뚫어버릴까 두려운 나머지 저절로 열린 것 같았다.
- 작은 외국인 여성이 오베에게 한 발짝 다가왔고, 그제야 오베는 그녀가 만삭이거나 혹은 국소 비만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상태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오베는 키가 185센티미터 이상인 모든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회의감을 느꼈다. 피가 뇌까지 제대로 올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제 아내입니다.” 멀대가 웃으며 말했다. “계속 그리 될 거라고 장담하지 마.” 아내가 남자의 말을 뚝 끊었다. 임신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 멀대는 그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도 스님의 뺨을 후려치고 싶게 만들 그런 종류의 미소라고, 오베는 생각했다.
- 오베는 마치 멀대가 자신의 차 보닛에 쪼그리고 앉아 똥이라도 싸고 간 듯 그를 보았다.
- 오베의 이마 근육들이 크고 깊고 위협적인 하나의 주름살을 만들었다.
- 그는 살짝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마치 손이 천으로 만들어져서 바람에 펄럭이기라도 하듯.
- 터벅터벅 돌아가서는 자기 몸 치수보다 한참 아래인 일제 자동차에 몸을 비틀어 넣었다.
- 멀대는 오베에게 살짝 놀란 눈길을 던졌지만 말대꾸를 할 만큼 용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차에서 내려 선생님에게 혼난 아이가 교실 구석에 서 있는 것처럼 차 옆에 섰다.
- “젠장. 팔이 없는 놈이 백내장에 걸렸어도 너보다는 후진을 잘 할 거다.”
- 어떻게 트레일러도 후진 못 시키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지? 오베는 자문했다. 어떻게? 오른쪽과 왼쪽 개념을 세우고 나서 핸들을 돌리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이런 인간들이 자기 인생은 대체 어떻게 꾸려나가는 거지?
- 일제 오토 차량 외에 진짜 차를 운전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운전면허를 발급해야만 하는지, 오베는 궁금했다. 주차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투표권은 가져도 정말 괜찮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 “후방 탐지기니 주차 센서니 카메라니 그런 거 죄다 개똥 같은 거야. 트레일러를 정말 제대로 후진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딴 빌어먹을 건 애초에 사용하질 말아야 한다고.”
- “당신 같은 사람은 카세트 플레이어도 되감기하면 안 돼.”
- 그녀는 자기가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듯 삐딱한 미소를 띠며 오베에게 감사를 표했다.
- 그가 그 나잇대 남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코를 찡그리자 상반신 전체에 주름이 잡힌 것 같았다.
- 백일몽
-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오베는 돌아서서 초인종을 바라봤다. 초인종이 자기가 한 짓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상황인 듯.
- 오베는 그게 핑계였다는 걸 잘 알았다. 아내가 새 의자를 사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러면 인생 전체가 새것이 되기라도 하듯. 부엌 의자를 사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인생도 그렇게 될 것처럼.
- “당신이 없을 땐 하루 종일 집이 너무 넓어져. 자연히 그렇게 돼. 살 수가 없다니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 없었다. 어떻게 자기들이 잉여가 될 날을 고대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 있지? 하릴없이 배회하면서 사회의 짐이나 되는.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걸 소망하지? 집에 앉아 죽을 때나 기다리는 삶. 더 최악인 것은 누군가 자길 양로원에 집어넣어주길 기다리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화장실에 가는 삶. 오베는 그보다 더 나쁜 게 뭔지 상상이 안 갔다. 그의 아내는 종종 그를 놀리면서, 그는 자기가 아는 한 이동 간병 밴을 이용하느니 차라리 관 속에 드러누울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제대로 짚은 것이리라.
- 그는 동네 사람들이 눈을 뜨기도 전에 집 밖으로 나왔다. 주차 구역까지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열쇠로 차고를 열었다. 문에 사용하는 리모컨이 있었지만 대체 이게 왜 존재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손으로 문을 열 수 있다. 그는 사브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물론 열쇠로. 차량 시스템은 늘 완벽하게 잘 돌아갔다. 바꿀 이유가 없었다. 그는 사브에 탈 때마다 늘 그러듯 운전석에 앉아 양 사이드미러를 조정하고, 라디오 다이얼을 절반 정도 앞으로 돌린 다음 다시 뒤로 돌렸다. 마치 누군가 사브에 침입해서 사이드미러와 라디오 채널을 바꾸는 막돼먹은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 그는 줄줄이 늘어선, 자기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들이 처음 여기 왔을 때 이 동네에 있던 집은 겨우 여섯 채였다. 이제는 수백 채가 있다. 한때 여기에는 숲이 있었지만 이제는 집들뿐이다. 물론 다 융자를 낀 집들. 그게 오늘날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로 쇼핑을 하고 전기차를 몰고 다니며 전구 하나 바꾸려고 수리공을 고용했다. 딸각딸각 맞추는 조립식 마루를 깔고 전기 벽난로를 설치한 뒤 그럭저럭 살아간다. 급박한 상황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회. 이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 오베는 제대로 성장한 특정 연령대의 모든 남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그 제스처에 응답했다.
-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줄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베는 경적을 울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맨 앞에 여자 운전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도로 공사중이거나. 아니면 아우디가 있겠지.
- 도로에 서서 헤라클레스처럼 엉덩이에 두 주먹을 얹은 채 짜증으로 꽉 차서 앞을 응시했다. 교통 체증에 걸린 슈퍼맨의 자세가 그러했을까.
- 오베가 인색한 건 아니었다. 그저, 오베는 그의 아내가 “오베 영감의 부고 기사에 반드시 적어야 할 단 한 줄을 꼽으라면 ‘그는 최소한 석유는 아껴 썼다’를 고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 “꼭 무슨 최고의 주차 자리를 찾아내는 대회에라도 참가한 것 같아요.”
- 오베는 마치 적을 베어 넘긴 검투사처럼 승리를 만끽하며 사브에서 내렸다.
- 오베의 아내라면 ‘으르렁거리기’라고 표현했을, 반면 오베는 언제나 ‘토론’이라고 부르자며 고집하는 일이 시작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점장은 ‘망할 영감탱이’와 슬쩍 비슷하게 들리는 소리를 중얼거린 다음 쿠폰을 금전함에 쾅 때려 박았는데, 누가 들었으면 기계가 고장난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 오베의 아내는 그가 모든 것에 시비를 건다고 종종 오베와 다투었다. 하지만 오베는 시비 따위를 거는 게 아니었다. 그저 옳은 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태도란 말인가?
- “분홍색이야. 당신 좋아하는 색깔. 가게 사람들 말로는 다년생 꽃이라던데 그게 이 식물의 이름은 아니겠지. 보나마나 이런 추위에는 시들 거라고 가게 인간들이 그렇게 말하던데, 그런다고 나한테 다른 똥덩어리를 한 뭉텅이 더 팔아치울 수 있을 것 같나?”
-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 오늘날 사람들은 새로 개조한 주택 앞에 서서 마치 그 집을 자기들 손으로 직접 지은 양 떠벌였다. 드라이버 하나 집어 올리지 않았으면서. 그들은 심지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허풍이나 떨었다! 자기가 직접 마룻바닥을 깔거나 습기 찬 방을 개조하거나 겨울용 타이어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건 더 이상 아무런 미덕도 아니었다. 나가서 다 돈으로 살 수 있는데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
- 아내의 친구들은 그녀가 자발적으로 매일 아침 눈을 뜬 뒤 오베와 함께 하루를 공유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베가 그녀에게 책장을 만들어주면 그녀는 페이지마다 작가의 생각으로 가득 찬 책들을 거기에 꽂았다. 오베는 자기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다. 시멘트와 콘크리트, 유리와 강철, 공구들, 가늠할 수 있는 물건들. 그는 올바른 각도와 분명한 사용 설명서를 이해했다. 조립 모델과 도면, 종이에 그릴 수 있는 것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 그는 자기 나름의 이유로 돌아가고 있는 세상일에 대해, 그 이유에 대해 왜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이게 내 모습이고,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 오베에게 이거면 충분했다.
- 오베의 아버지는 철도 회사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손바닥에는 나이프로 새긴 것처럼 깊은 손금들이 있었고, 얼굴의 주름은 워낙 깊어서 그가 열심히 일할 때면 땀이 주름을 따라 가슴으로 흘러내릴 정도였다. 머리카락은 가늘고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팔 근육은 굉장히 울퉁불퉁해서 마치 바위를 깎아낸 것처럼 보였다.
- “우리 집안에서는 싸움 같은 거 안 한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서로와도, 다른 사람과도.”
- 그러다 엄마가 죽었다. 아빠는 더 조용해졌다. 마치 엄마가 아버지가 갖고 있던 몇 안 되는 단어들을 갖고 가버린 것 같았다.
- 오베는 규칙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해했다. 왜 그런지는 몰랐지만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늘 먹고 살 만은 했다.
- 오베는 그날 밤의 자기 아버지만큼 자부심에 찬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 일요일에 그들은 교회에 갔다. 둘 다 신을 향해 대단한 열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베의 엄마가 꾸준히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따라갔을 뿐이다. 그들은 뒷좌석에 앉아 예배가 끝날 때까지 각자 바닥의 무늬를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은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오베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말하자면 그건 그녀의 시간이었다. 비록 그녀가 더는 세상에 없어도.
- “줍는 사람이 임자지.” 그가 오베에게 내뱉듯 말했다. 그의 눈 속에 있는 무언가를 보자 오베는 마치 자기 피부 아래로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철로를 따라 몇 백 미터 정도 걷다가, 오베가 목을 가다듬고는 용기를 내어 톰이 발견한 서류 가방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떠벌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 만약 오베가 사람의 인격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심사숙고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면, 옳은 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운 게 이날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베는 그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가능한 한 아버지와 많이 닮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게 이날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 아버지가 죽은 건 오베가 막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철로에서 객차가 돌진했다. 오베에게는 사브 한 대, 마을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무너질 듯한 집, 상처 난 손목시계 말고는 딱히 남은 게 없었다. 그는 그날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게 사는 걸 멈췄다. 그는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지 않았다.
- 오베는 목사에게 조만간 있을 일요일 예배 때 자기 자리를 따로 마련해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가 목사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건 오베가 신을 믿지 않아서라기보다, 신이 좀 빌어먹을 개자식처럼 느껴져서였다.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차를 탔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처음 웃은 게 바로 그날이었다.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 그에게는 챙겨야 할 직업이 있었다. 자살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사방에서 출근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는가?
- 오베가 뚱뚱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 수 있다. 그는 그저 뚱뚱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는지 헤아릴 수 없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2인분의 인간이 된 것일까? 아마 그렇게 된 데에도 모종의 결단이 필요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 자세히 보니 열여덟 정도쯤인가 싶었다. 다시 말해 철부지 애새끼보다는 풋내기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 신중한 침묵이 흘렀다. 청년은 오베가 불필요할 정도로 답답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답례로 오베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생명체가 지구의 산소를 낭비하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오베는 그 청년 뒤에 또 다른 청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머리 꼴은 웅덩이 속에서 익사하게 생긴 걸 누군가 머리카락을 잡아올려 구해준 듯 보였다.
- 발을 하도 쾅쾅 울리며 걸어서 누가 보면 바닥을 다져 평평하게 만들려 하는 줄 알 정도였다. 이미 별의별 정신 나간 인간들이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걸로는 충분치 않은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그는 속으로 ‘주민 자치회’라고 읊조릴 때마다 막 침을 뱉으려 하는 양 입술을 움직였다. 그 단어가 무지막지하게 추잡한 말이라도 되는 듯.
- 그녀는 전자레인지만 한 파리 두 마리를 쫓기라도 하듯 그의 앞에 주먹을 휘둘렀다.
- “저 동물한테는 온갖 역겨운 질병에 광견병이나 뭐 그런 게 잔뜩 있다고요!” 오베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리고 금발 잡초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신도 그럴 거고. 하지만 우린 그거 때문에 당신한테 돌을 던지진 않잖아.” 그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그녀가 염색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코를 하도 세게 씩씩대기에 오베는 혹시나 콧물이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다.
- 그녀는 엄청난 우월감과 심각한 모욕을 동시에 느낀 사람처럼 그를 보았다.
- 여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짓을 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은 했지만 말이다.
- 오베는 헛간으로 방향을 틀었다. 화단 모퉁이 디딤돌에 오줌이 사방팔방 튀어 있는 걸 확인했다. 오후에 더 중요한 일로 바쁘지만 않았다면 그놈의 똥개를 밟아주러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 “젠장, 망할 놈의 고양이 같으니. 그 머저리 같은 계집이 너한테 돌을 던질 때 막아준 건 순전히 내가 길 건너 사는 그 똥개보다 널 조금 덜 싫어해서일 뿐이야. 무슨 대단한 업적 같은 게 아니라고. 너도 그건 확실히 알아둬.” 고양이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
- 오베의 아내는 원칙적으로 오베에게 여섯 달마다 한 번씩 집 안의 방 중 하나를 새로 칠하도록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여섯 달마다 집 안 어딘가 한 곳의 색깔이 바뀌길 바랐다. 그녀가 오베에게 지겹도록 말하고 나면, 그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 그녀는 업자를 불러 견적을 냈다. 그러고는 자기가 업자에게 이만큼은 줘야겠다고 했다. 그러면 오베는 페인트칠을 할 때 쓰는 발판을 가지러 갔다.
- 누군가를 잃게 되면 정말 별난 것들이 그리워진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미소, 잘 때 돌아눕는 방식, 심지어는 방을 새로 칠하는 것까지도.
- 오베는 드릴을 가져온 뒤 고리를 들고 발판에 서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처음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자기가 잘못 들었으려니 하고 무시했다. 초인종이 다시 울리자 누군가 실제로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무시했다. 세 번째로 초인종이 울리자 오베는 구멍을 뚫는 걸 멈추고 문을 노려보았다. 바깥에 누가 서 있든 정신력만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는 듯. 잘 안 됐다. 문제의 저 사람은 오베가 처음에 문을 열지 않았던 이유가 초인종 소리를 못 들어서였을 거라고, 그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 멀대는 머뭇거리며 얼굴을 만져대느라 바빴다. 얼굴에 난 여드름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듯.
- 그 말에 그녀가 웃자 오베가 방어 태세를 취했다. 탄산음료를 너무 빠르게 따르는 바람에 사방에 거품이 넘치기라도 하듯. 그녀의 그런 웃음은 이 집의 회색 시멘트와 정원의 회색 디딤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규칙과 규범을 따르길 거부하는 어수선하고 유해한 웃음이었다.
- 오베와 파르바네는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조직력을 선보이며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오베는 잠시 그녀가 덜 싫어졌다. 비록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무척 꺼림칙했지만.
- 그는 오베가 게릴라 전사의 자동 소총 AK–47처럼 꽉 잡고 있는 해머액션 드릴에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 오베는 이 순간, 하마터면 그녀를 측은하게 여길 뻔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녀의 부른 배 속에 멀대의 유전적 구성물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 파르바네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팔꿈치로 멀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멀대는 용기를 그러모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그는 파르바네를 한 번 보고, 오베를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곧 자신의 얼굴에 고무줄을 튕길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 ‘앨런’ 렌치
- 오베는 그들의 애처로운 논쟁이 웅웅거리는 동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서로 높은 음정으로 낑낑거리며 오작동하는 라디에이터 두 대가 떠올랐다.
- 오베는 만원 시내버스의 운전대를 잡은 장님을 바라보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넘었다. 혹은 오베가 그녀에게 눈길을 준 지 몇 년이 됐거나. 그녀는 과거의 사람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오베 몰래 모두 과거로 가버린 것 같았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오베와 멀대와 파르바네에게 차례차례 미소 지었다. 파르바네와 멀대가 그녀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오베는 상처 난 자기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 동네에는 더 이상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나?” 그가 물었다. “저는 연금으로 사는걸요.” 루네의 아내가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출산휴가중이에요.” 파르바네가 자기 배를 자랑스레 쓰다듬었다. “저는 IT 컨설턴트입니다!” 멀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베와 파르나베는 다시 한 번 동시에 고개를 흔드는 일을 해냈다.
- 오베의 집 현관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그는 현관 의자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얼음물에 가슴까지 잠긴 채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떨렸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요즘 들어 더 심해졌다. 뒤집힌 어항 속 물고기처럼 한입 가득 숨을 쉬려고 버둥거려야 했다. 그의 회사 주치의는 그게 만성이라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말이야 쉽지.
- 그들은 그걸 ‘조기 은퇴’라고 표현했지만 ‘청산 작업’이 더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오베는 한 세기의 3분의 1 동안 똑같은 일을 했다. 그게 그들이 오베를 정리한 까닭이었다.
- 현관문 바로 옆 벽에 오베와 소냐를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거의 40년 된 사진이었다. 그들이 스페인에서 버스 여행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햇볕에 타 가무잡잡했고,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오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사진을 바라보며 한 시간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간절한 건, 정말로 다시 하고 싶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게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 안쪽에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그럴 때면 세상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리웠다.
- 눈을 감았다. 올가미가 거대한 야생 동물의 이빨처럼 그의 목을 죄는 걸 느꼈다.
- 그녀는 운명을 믿었다. 어떤 인생행로를 걷든 간에 ‘애초에 예정되었던 대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
- 그녀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 원래 가족을 대체할 자기 가정을 꾸릴 시간을 가져보기도 훨씬 전에 가족을 잃는다는 것. 그건 무척 독특한 종류의 고독이었다.
- 일을 한다는 것에는 모종의 자유가 있었다. 자신의 두 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쥘 수 있었고 노력의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오베가 학교를 싫어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학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교회에서 나오는 구호품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신께서도 그 점은 똑똑히 알아두셔야 했다. 탈의실에 서 있는 동안 신이 가져간 만큼 자신의 몫도 남겨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엄마와 아빠를 꼭 데려가야만 했다면 빌어먹을 돈은 남겨놨어야지!” 그는 천장을 보며 소리쳤다.
- 그와 같은 교대 조에 속한 조원들은 그가 말이 좀 없는 편이고 그에 더하여 살짝 별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이 끝난 다음에 조원들과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하지 않았고 여자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는데,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판박이였고, 그래서 무슨 일에건 사람들에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면 그 일을 맡았고, 근무 교대를 부탁해도 별말 없이 해줬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 모두 오베에게 한두 가지는 빚을 지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오베를 받아들였다.
- 그는 이런 일과가 좋았다. 늘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점점 더 차별을 두었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 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 오베는 친구가 없었다. 반면 적도 거의 없었다.
- “저는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일러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 “남자는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남자인 겁니다. 말이 아니라요.”
- 그래서 오베는 쫓겨나는 대신 야간 청소원이 되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아침 자기 조를 떠날 일이 결코 없었을 테고, 그녀를 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빨간 구두와 금 브로치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도. 또한 남은 평생 동안 누군가 맨발로 그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볼 일이 없었으리라.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 오베는 이 중산층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몰랐지만 자기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 그리하여,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드는 기묘한 반항심이 꽉 찬 상태로 오베는 시의회에 집을 팔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정반대로 굴기로 했다.
- 열장이음
- 집이 천천히 모양을 갖췄다. 하나하나 나사가 박히고 차례차례 바닥재가 깔렸다. 물론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꼭 볼 필요는 없었다. 작업이 잘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었다. 오베의 아버지가 늘 그렇게 말했듯.
- 그는 자기가 주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것들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서 그랬으리라. 주택은 계산할 수 있었고 종이에 그릴 수 있었다. 방수 처리를 해놓으면 물이 새지 않았고, 튼튼하게 지어놓으면 무너지지 않았다. 주택은 공정했다. 공을 들인 만큼 값어치를 했다. 안타깝게도, 사람보다 나았다.
- 오베는 계속 이웃들을 피했다. 그는 그들과 아무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 대신 안타깝게도 문제가 오베를 찾아 나서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본능적으로 망치를 손에 쥐었다. 오베가 폭력적인 남자라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 오베는 불씨가 풀밭을 따라 길을 내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뒤꿈치에 무게를 실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했으리라. 그런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나니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 집은 두텁고 끈적거리는 연기로 꽉 차 있어서 근처에만 가도 삽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 오베는 전화를 끊고,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 루네와 오베는 40년 가까이 서로를 알고 지냈고, 그중 최소한 37년을 다투면서 보냈다. 솔직히 말해, 오베는 이 모든 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소한 의견의 불일치가 얼기설기 얽히다가 배반의 부비트랩이 설치된 말들을 내뱉고, 끝내는 예전 다툼에서 매설됐던 불발 지뢰들을 최소 네 개쯤 터뜨리지 않고서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낸다는 게 가당치도 않을 지경이 돼버린 논쟁이었다. 그저 앞으로 달리고, 달리고, 달려가기만 하는, 누군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달리는 논쟁.
- ‘머저리.’ 루네가 BMW를 산 그날 오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도.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 오베는 구제불능이 아니었다. 자기 생각엔. 그는 그저 보다 큰 견지에서 모종의 질서가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감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한 것인 양, 마치 헌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양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너무 자주 바꾸는 나머지 물건이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는 전문 기술이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됐다. 누구도 품질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루네도, 다른 이웃도, 오베가 일했던 직장의 관리자들도. 이제는 모든 것이 전산화되어야 했다. 꽉 끼는 셔츠를 입은 컨설턴트들이 노트북의 뚜껑 여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 아무도 집 한 채 지은 적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게 그 옛날 콜로세움과 기자의 피라미드를 세운 방법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맙소사, 사람들은 1889년에 에펠탑을 세웠는데 이제는 휴대 전화를 재충전하기 위해 휴식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1층짜리 집의 빌어먹을 도면 하나 못 그려냈다.
-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 아무도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 하나 설치 못했다. 바닥에 타일도 못 깔았다. 벽에 회반죽도 못 발랐다. 자기 세금 장부 하나 못 챙겼다.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잃어버린 형태의 지식들만 넘쳐났다.
- 그녀 뒤로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며 휠체어에 앉아 있는 루네가 보였다. 최근 몇 년간 그가 해낸 일은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 올해의 진짜 첫눈이 단잠에 빠진 이층집들 위로 차가운 담요처럼 내려앉았다.
- 백유
- 냄새와 곰팡내가 났다. 헛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듯.
- 고양이에게 목숨이 아홉 개 있다면 이 녀석은 최소한 일곱 번째나 여덟 번째 목숨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 고양이가 오베를 재는 듯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취업 면접에서 결정권자 쪽 책상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 공격성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였다. 마치 오베를 물걸레로 닦아내버릴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기기라도 하듯.
- 그녀는 회색 카디건을 두른 채 계단에 서 있었다. 자기 몸을 지탱하려 애쓰는 모습이 마치 두 손으로 젖은 비누를 꽉 쥐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녀의 미소가 더 커졌다. 마치 오베가 내는 돈으로 미소를 짓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오늘은 분명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최소한 일찍 일어나는 게 IT 컨설턴트들 사이에서는 표준일지도.
- 오베는 그게 거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뼛속까지 심기가 불편했다.
- 그 외국인 임산부를 어떻게 병원까지 데려가야 할지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오베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임산부에게 코피를 흘리게 한 다음 버스를 타도록 내버려둔 거라면 아내가 잔소리를 그치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았다.
-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빛줄기 하나면 돼요.”
-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춤이란 너무 무계획적이고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직선과 명료한 결정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늘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수학에는 정답 아니면 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 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 양. 오베는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길 원했다.
-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 결정을 내릴 때가 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기어오르게 놔두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때가.
- 오베는 문간에 서서 조용히 서류를 읽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했다. 미움이었다. 그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미웠다. 그는 누군가를 이렇게 미워한 기억이 없었지만, 지금은 미움이 그의 내면에 불타는 공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오베의 부모님이 이 집을 샀다. 오베는 여기서 자랐다. 이 집에서 걷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여기서 사브의 엔진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걸 가르쳐주었다. 그 모든 시절이 지나고 나서, 시 당국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다른 걸 지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얼굴이 둥근 남자가 보험이 아닌 보험을 팔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오베가 불을 끄는 걸 막았고, 이제 또 다른 하얀 셔츠의 사나이들이 여기 서서 ‘시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오베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해가 다 뜰 때까지 여기 서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다고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류에 서명했다. 꽉 쥔 주먹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남자가 될지를 결정하는 때가 온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짓밟게 놔두는 인간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때가.
- 마치 누군가 지금 막 오베의 마음속에서 퓨즈를 제거한 것 같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그의 눈을 덮었다.
- 그런 다음 오베가 톰을 쳤다. 딱 한 번 때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톰은 눅눅한 밀가루 마대처럼 주저앉았다. 톰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쯤, 오베는 이미 몸을 돌려 떠난 뒤였다.
- 모든 남자들에게는 자기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할 때가 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면,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 그게 오베가 톰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오베가 다른 사람이 자길 속여먹도록 놔두는 건 이것으로 끝이라고 정한 순간이기도 했다.
- 사람들은 병원에 죽으러 간다. 오베는 그걸 안다. 국가가 사람이 하는 일마다 죄다 돈을 걷으려 하는 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죽으러 갈 때도 주차 요금을 걷으려 드는 건 오베 생각엔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주차 요원에게 누누이 설명했다. 바로 그때 주차 요원이 그에게 장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또한 바로 그때 파르바네가 자기가 기꺼이 요금을 내겠다고 화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치 돈을 지불하느냐 마느냐가 이 토론의 핵심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들은 원칙이란 게 없는 것 같았다.
- 애들 엄마는 오베에게 차고에서 정말로 뭘 하고 있었냐고 물었지만, 오베는 타일 바닥 위로 욕조를 옮기려 할 때 나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물론 세 살짜리에게 자동차 창문을 모두 열어놓은 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건 인생 최고의 모험이었다. 비록 바깥 기온은 영하였지만. 반면 일곱 살짜리는 스카프에 얼굴을 파묻고 훨씬 회의적인 감정을 분출했다.
- 오베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보았다. 마치 그녀가 급히 돌아와 그냥 농담해본 거였다고 소리치길 기다리기라도 하듯.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오베는 여자애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는 마치 그애들 눈에 탁상 램프를 비추며 살인이 일어났던 시각에 어디 있었는지 심문이라도 시작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먹을 게 필요하다거나 쉬를 싸러 가야 한다거나 뭐 그런 거 없느냐는 거다.” 아이는 마치 오베가 자기에게 맥주나 담배를 권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보았다. “저는 거진 여덟 살 됐거든요! 화장실엔 혼자 갈 수 있거든요!” 오베가 퉁명스레 팔을 휘휘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물어봐서 퍽이나 미안하다.”
- “맹세하써요!” 세 살배기가 다시 나타나 소리를 지르더니 오베의 다리 아래를 왔다 갔다 뛰어다녔다. 그는 문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이 조그만 자연재해를 미심쩍은 눈으로 주의 깊게 보았다. 세 살배기가 고개를 들고 만면에 활짝 미소를 띄웠다. “읽어줘!” 세 살배기가 흥분하여 그에게 명령했다. 들고 있던 책을 너무 쑥 내민 나머지 오베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오베는 마치 그 책이 나이지리아의 왕자가 ‘정말 돈이 되는 투자처’를 갖고 있는데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오베의 계좌 번호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행운의 편지라도 되는 양 책을 바라보았다. “읽어줘!” 세 살배기는 다시 명령을 내리고는 대기실 벤치를 놀랄 만큼 민첩하게 올랐다.
- “옛날 옛날에 작은 기차가 있었습니다.” 오베가 세금 계산서를 낭독하는 사람만큼의 열성을 보이며 책을 읽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세 살배기가 페이지를 넘기려는 걸 막고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갔다. 일곱 살짜리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설명해줘야 해요. 성대모사로.” 오베가 일곱 살짜리를 보았다. “그게 무슨 빌어…….” 그가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 “아저씨 이야기 책 읽는 데 서투르신가봐요.” 일곱 살짜리가 지적했다. “니들은 사람 말 듣는 데 서투른가보다.” 오베가 받아쳤다.
- “가아아앙대다.” 세 살배기가 울부짖으며 벤치에서 콩콩 뛰고, 오베는 그 모습을 보며 이 꼬마가 약에 취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 광대가 즐거운 얼굴로 오베를 보았다. “이 아저씨가 오 크로나짜리 동전을 갖고 계시겠지요, 아마?” “아니. 이 아저씨한테는 그런 거 없지, 아마.” 오베가 대답했다. 광대가 놀란 얼굴을 했다. 광대 입장에서는 그리 성공적인 상황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저기요. 이건 마술 쇼거든요. 정말 동전 안 갖고 계신 거예요?” 광대가 훨씬 정상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꾸며놓은 차림새와는 굉장히 대조되는 목소리였고, 이 머저리 광대의 뒤에 무척이나 평범한 머저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아마도 끽해야 스물다섯 살 정도일 것이다. “저기요, 저는 병원에서 일하는 광대예요. 애들을 위한 거라고요. 돌려드릴게요.”
- 오베 옆에는 일곱 살짜리가 앉아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고, 다른 쪽 옆에는 세 살짜리가 한 달 내내 아침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 “저기요, 오베, 진짜로 제가 주차 요금을 내면 안 되는 거예요?” 파르바네가 말했다. “이게 당신 차요?” 오베가 투덜거렸다. “아뇨.” “그럼 된 거지.” 그가 대답했다.
- 오베가 그녀에게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그애들의 변변찮은 애비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창문 하나 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어린이 살해범 자격을 새로 취득한 채 저세상에 도착할 경우 오베의 아내는 엄청난 양의 잔소리를 끓여 부을 것이다.
- 자살하기에는 내일도 오늘 못잖게 괜찮은 날이다.
- 그녀가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며 승강장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는 기차에서 내렸다. 물론 그는 자기가 왜 그러는지 잘 몰랐다. 살면서 이렇게 즉흥적인 행동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자 마치 내면의 뭔가가 작동을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차장 중 한 명을 설득해서 여분의 바지와 셔츠를 빌렸다. 기차 청소부처럼 보이지 말아야 했다. 그런 다음 소냐 옆에 가서 앉았다. 그건 그가 지금까지 내린 것 중 최고의 결단이었다.
- 없었다. 그녀는 거의 킥킥 웃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말했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는 걸 듣고 샴페인 거품이 웃을 줄 안다면 저런 소리가 날 거라고 오베는 생각했다.
- 그녀는 말하는 걸 좋아했고 오베는 조용히 있는 걸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오베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좋다고 말할 때 그들이 뜻하는 게 바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 “네.” 그는 숨을 내쉰 건지 말을 한 건지 모르는 소리로 대답했다.
- 그는 꽉 끼는 양복을 입고 잘 닦은 구두를 신은 채 15분도 넘게 기차역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늦게 오는 사람들을 불신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다른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지.” 출근 카드를 든 사람들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듯 3, 4분씩 늦게 들어오면서도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양 굴 때마다 오베는 중얼거리곤 했다. 그들은 마치 열차 시간이 아침마다 자기들을 기다려줄 것처럼, 기차만 탈 수 있다면 조금 늦는 건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양 굴었다.
- 기차역에 서서 15분을 더 기다리는 동안 오베는 살짝 짜증이 났다. 짜증은 걱정으로 변했고
- 나중에 그때를 돌이켜보았을 때, 그는 자기가 왜 거기서 계속 기다렸는지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었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물론 그때는 그걸 몰랐지만, 그는 훗날 자기 인생의 수많은 15분을 그녀를 기다리며 보낼 운명이었다. 그의 선친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사팔눈을 떴겠지만. 마침내 그녀가 꽃무늬가 그려진 긴 스커트를 입고, 오베로 하여금 자기 몸의 무게 중심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움직이게 할 정도로 새빨간 카디건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오베는 시간 약속을 못 지키는 그녀의 무능함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녀가 입은 붉은 카디건 때문에 나머지 세상은 회색 톤으로 보였다.
- “당신이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 그녀는 그에게 삶에서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만약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다면 뭘 택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짓고 싶다고 대답했다. 집을 건설하고 싶다고, 도면을 그리고 싶다고, 부지에 집을 세울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계산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웃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냈다. “그럼 왜 안 하는 거죠?” 그녀는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했다. 오베는 그 질문에 딱히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 플렉시 유리 건너편에 있는 살짝 뚱뚱한 남자는 거꾸로 머리를 빗질해 올렸고 팔은 문신으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 자기 머리에 마가린 한 통을 덕지덕지 바른 걸로는 모자라다는 듯 온 몸을 낙서로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오베가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는 거기에는 제대로 된 주제가 없었다. 그저 수많은 무늬들뿐이었다. 저게 건전한 정신 상태를 가진 성인이 동의할 만한 것일까? 파자마처럼 생긴 팔을 달고 다니는 게?
- 오베는 플렉시 유리 뒤의 남자가 방금 막 오베가 발기부전일 가능성을 제기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플렉시 유리 뒤 남자가 침묵했다.
- 마침내 플렉시 유리 뒤의 남자가 ‘자기가 카드를 좀 확인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오베는 마치 어두운 골목에서 그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자기더러 몸의 중요한 부위를 ‘좀 확인’하자고 물어보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 ‘스키밍’
- 그는 오늘 아침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려 힘을 채 모으기도 한참 전에, 하물며 이웃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있을 때 집에서 나왔다.
- 여자들이란 강력 접착제를 발라 계획표에 붙여놓아도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오베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 아내는 언제나 ‘감이 오는 대로 가자’거나 ‘쉬엄쉬엄 가자’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댔다. 마치 다 큰 어른이면 어떻게든 도착하게 될 거라는 양. 그래놓고는 전화하는 걸 까먹거나 스카프 같은 걸 놓고 왔다. 아니면 방금 전에 챙긴 가방에 무슨 코트를 넣었는지도 몰랐다. 등등. 그녀는 식기건조대에서 커피 보온병을 챙기는 걸 늘 깜박했다. 그게 그녀가 챙기는 유일하게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여행 가방에 망할 코트만 네 벌이 들어있었지만 커피는 없었다. 마치 매 시간마다 주유소에 들러 거기서 파는 불에 그슬린 여우 오줌 같은 음료를 사 마시면 된다는 듯. 그러면 일정이 하염없이 밀렸다. 오베가 불만을 터뜨리면 그녀는 어딘가로 차를 타고 갈 때 시간 계획을 짜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고 늘 반박해야 했다. “어쨌거나 우리 급할 거 없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마치 그거야말로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듯.
- 선로 맞은편에 졸린 표정을 한 젊은이들이 커다란 백팩을 메고 서 있었는데, 오베는 백팩 안에 마약이 꽉 차 있을 거라 확신했다.
- 해가 막 떴다. 태양이 방금 막 횃불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그의 눈을 향해 집요하게 빛을 쏘았다.
- 오베가 마침 고개를 들자 검정색 오버코트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신경 안정제를 과다 복용한 팬더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1, 2초 정도 그렇게 몸을 움직이다가 멍하니 위를 보았다. 그의 몸 전체가 일종의 신경성 경련에 휩싸였다. 팔을 발작적으로 떨었다. 그러다 마치 스틸사진이 연달아 움직이는 순간이기라도 한 듯, 신문이 남자의 손에서 떨어지고, 그가 정신을 잃더니, 혼합 시멘트를 담은 상자마냥 탁 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선로 가장자리로 떨어졌다.
- 오베는 체육관에는 발도 한 번 안 들여놓았지만 일평생을 두 팔에 모래주머니를 메고 다닌 사람에게서나 나올 것 같은 힘으로 양복 입은 남자를 들어올렸다. 그는 아우디를 몰고 형광빛으로 빛나는 조깅 바지를 입은 남자들 따위는 하지도 못할 방식으로 그 남자의 몸을 들어 백팩을 멘 청년에게 넘겼다.
- 주 의회 로고를 단 여자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그러는 게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건설적인 반응이라 믿고 있는 듯.
- 발밑에서 선로가 심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마치 테스토스테론으로 충만한 황소가 그를 들이받으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가 숨을 내쉬었다. 전율과 울부짖음, 기차의 제동장치에서 울리는 냉랭한 비명으로 이루어진 지옥 한가운데에서, 그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 오베에게, 뒤이은 그 순간은 시간 자체가 브레이크를 밟아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이 느린 동작으로 흘러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났다.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가 그의 귀에서 낮게 쉭쉭거리는 소리로 작게 줄어들고, 기차는 어찌나 천천히 접근하는지 마치 늙어빠진 황소 두 마리가 끌고 오는 것 같았다. 전조등 불빛이 절망에 빠져 그를 비췄다. 전조등 사이에 난 틈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눈이 부시지 않고, 그래서 기관사와 눈이 또렷하게 마주쳤다. 스무 살을 넘은 것 같지가 않다. 오베의 동료들이 ‘애송이’라고 불러댈 친구 중 하나.
- 마치 이제 막 무슨 묵시록의 사막 같은 곳에서 빠져나와서 자기들이 지구에 남은 최후의 인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은 이 깨달음에 마음이 놓였다. 다른 한쪽은 실망했다.
- 오베는 아우디에 파도 모양의 새 헤드라이트가 달려 있는 걸 알아챘다. 아마 밤중에 똥멍청이가 운전하는 차가 저기 오고 있다는 걸 모두에게 간파당할 생각으로 디자인된 것인가 싶었다.
- 그녀의 입술이 찡그리듯 말려들어갔다. 입술에 환경 폐기물과 신경 독소를 주입한 여자가 지을 법한 미소와 흡사했다.
- “최고의 남자는 잘못에서 태어난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보다 훨씬 더 나아진다고요.”
- 그녀는 그가 부모님의 집을 잃게 된 정확한 상황을, 오베가 마지못해 밝히는 정황을 통해 제공받은 간단명료한 조각들을 한데 모아 파악해야 했다. 마침내 그녀는 그가 어쩌다 화상을 입었는지 알게 됐다. 그녀의 여자 친구 중 하나가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소냐는 대부분의 남자는 지옥 같은 불길에서 달아난다고, 하지만 오베 같은 남자는 그 안으로 뛰어든다고 대답했다.
- 노인은 멀리 북쪽, 숲으로 들어가기 좋은 길목에 살았다. 마치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장소가 여기라고 정하기 전에 이 나라의 모든 인구 중심지를 표시한 지도를 참고하기라도 한 듯했다.
- 소냐의 어머니는 소냐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다. “난 여자가 있어. 지금 집에 없다 뿐이지.” 가끔 누군가 감히 그 질문을 던지면 그는 그렇게 툭 내뱉었다.
- 소냐가 처음 오베를 숲 속의 나무집에 데려갔을 때, 오베와 그녀의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마주앉아, 그녀가 문명인의 대화 형식을 조장해보려 애쓰는 동안 거의 한 시간이나 자기 음식만 내려다보았다. 두 남자 모두, 그들이 신경 쓰는 유일한 여자에게 이 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거기서 하고 있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 소냐의 아버지는 애초부터 이 일에 부정적이었다. 그가 이 소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시내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소냐가 말했다는 사실밖에는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 특징만으로도 오베를 못미더운 사람으로 보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오베 입장에서는 구직 면접을 보러 온 기분이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소냐가 말하고 있지 않을 때는 자기 딸을 잃고 싶지 않은 남자와, 자기가 그의 딸을 데려갈 남자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남자 사이에서만 생길 수 있는 침묵이 방 안에 가득 찼다.
- 두 남자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냐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베도 퉁명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목적의식에 휩싸여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이제 나가서 다른 남자를 죽이자고 막 합의한 것 같은 동작으로.
- “저 친구 낚시는 하냐?” 마침내 그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투덜거렸다. “아닐걸요.” 소냐가 대답했다. “알았다. 그럼 배워야겠군.” 마침내 그는 그렇게 툴툴대고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거실로 사라졌다. 소냐는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그보다 더한 칭찬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 그토록 소냐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가 어니스트를 볼 때마다 5크로나짜리 동전이 그녀 가슴 위에서 통통 튀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았던 고양이.
- 오베가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팔의 통제력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그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받아들이느라 힘들었다. 그의 머릿속 일부는 ‘싫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반면 그의 몸 나머지는 10대의 반항 같은 걸 하느라 분주했다.
- 가슴의 통증은 가셨다. 심장이 다시 정상적으로 뛰었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더는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결국엔 늘 지나가니까. 그는 딱히 심장이 더 오래 뛰길 원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건 그리 중요하질 않으니까.
- 오베는 위층에 잠깐 다녀왔을 뿐인데 돌아와보니 자기가 무슨 민박집이라도 차린 것 같은 광경을 발견해서 소름이 오싹 끼친 채 말했다.
- 그가 명랑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등에 있던 여분의 지방이 티셔츠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 지미는 사우나 보일러 위에 올려놓은 돼지고기처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 그는 곁눈질로 그녀가 자기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카지노 테이블 맞은편에서 그가 어떤 손놀림을 할지 파악하려 하는 것처럼 자길 보고 있었다.
- 녀석이 별나게 큰 고양이인지 아니면 유달리 작은 사자인지 구별하는 건 사실 꽤나 어려웠다. 자는 동안에 자길 잡아먹을 가능성이 큰 동물과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 “정말로 큰 상실감을 느껴요, 오베. 심장이 몸 밖에서 뛰는 것처럼 상실감이 느껴져요.”
- “지금보다 두 배 더 날 사랑해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오베는 두 번째로—또한 마지막으로—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가 지금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 오베도 의심에 찬 눈빛으로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마치 고양이가 두 발로 성경책을 들고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 오베는 꽃을 들고 돌아와 차 전체가 고양이 침으로 범벅이 된 걸 발견하고는 집게손가락이 마치 언월도라도 되는 양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그의 언월도를 물었다.
- 그녀는 바나나도 엄청나게 먹어치웠는데, 어찌나 많이 먹는지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베가 동물원을 차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그는 자기가 누군가의 아버지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어린이 노릇도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 “오베 씨 맞으시죠?” 그녀가 뭔가를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듯, 과장스럽게 친한 척 외쳤다.
- 오베는 그의 대답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퍼부을 욕설을 준비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 남자가 단조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마치 오베에게 현재 통화 대기 중이라고 알려주는 자동 응답 메시지라도 되는 듯.
- 남자는 오베가 마치 인도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못 타게 하자 그걸 거부하는 뻔뻔한 어린애라도 되는 양 한숨을 쉬었다.
- 남자가 그의 이름을 툭 내던지는 방식 때문에 오베는 누군가 나무 망치를 자기 뱃속에 쑤셔 넣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 오베는 햄을 다른 나라 말로 한다고 해서 그게 돼지 엉덩잇살이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 셋째 날 그녀는 한낮에 침대로 갔다. 왜냐하면 그게 스페인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 지역의 관습’에 적응해야 하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오베는 그게 딱히 관습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변명치고는 꽤 그럴싸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이미 임신한 뒤로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잤다.
- 쇼세의 스웨덴어 실력은 오베의 스페인어 실력보다 더 형편없는 게 분명했다.
- 오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주였다. 이내 최악의 순간이 뒤따를 것이었다.
- 이 상황으로 인해 오베가 굉장히 다채로운 신성 모독적 발언을 쏟아내자 고양이는 꽤나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오베와 고양이는 현관에 쪼그려 앉아 기자가 떠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영웅이신걸요!” “정신병자가 틀림없어, 저 여자.” 오베가 고양이에게 말했다. 고양이는 반대하지 않았다.
- 그녀가 점점 더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자, 오베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마치 그 행동에 바로 뒤이어 이 집이 사실은 도서관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 세 살배기는 고양이를 껴안으려 할 준비가 다 된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는 경찰서에 주르륵 세워놓은 용의자들 중에서 세 살배기를 골라낼 준비를 다 마친 듯 보였다.
- 파르바네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오베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십자말풀이의 답을 막 알아낸 것처럼.
- 고양이는 이게 무슨 소린지 잘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 세 살배기만큼 성가신 광대가 근처에 있었다면, 고양이도 오베가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파르바네가 그 기자를 ‘치우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녀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생각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녀가 마법을 써서 펑 하고 기자를 사라지게 하거나 삽으로 때려눕혀 사막에 파묻거나 뭐 그런 식으로 할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 그 상황에서 느꼈던 철저한 무력감은 이후 남은 인생 내내 밤마다 그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 그녀는 흐느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오랜 절망이 그들에게 선명히 와 닿아 그들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슬픔과 분노가 길게 늘어진 황량한 어둠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오베는 자기가 바로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 있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 고통이 영원히 가리라는 걸 알았다.
- 어둠이 이기게 놔둔다면 소냐는 소냐가 아니었을 것이다.
-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 마치 웃음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멈출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웃어댔다. 자기 웃음이랑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음(母音)들이 벽과 바닥을 굴러다닐 때까지, 마치 그걸로 시공의 법칙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웃고, 웃고, 또 웃었다. 오베는 그 웃음을 듣자 자기 가슴이 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웃음이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공간을 줬다.
- 마을에서 최악의 명성을 떨치는 학교가 교사 임용 광고를 신문에 냈다. 두뇌의 각 부위가 제대로 고정된 선생들이라면 절대 자원하지 않을 학급의 담임 선생을 찾는 광고였다. 그곳은 ADHD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부터 ADHD를 앓고 있던 학급이었다. “이 소년 소녀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교장이 인터뷰에서 냉정하게 설명했다. “이건 교육이 아니에요. 보관입니다. 애들을 보관한 거지요.” 소냐는 그렇게 설명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마도 이해했던 모양이었다.
- 대답했다. 변명했다.
- 그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역할을 강탈해버린 그들에게 문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복수를 퍼부었다
- 어디에서나 이내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엄격하고 독선적인 얼굴로 그를 막아 세웠다. 그들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국가의 편에 서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국가여서였다. 마지막 민원은 거부당했다. 싸움은 끝났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그러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오베는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 “그만하면 됐어요, 오베. 편지는 더 쓰지 말아요. 당신이 쓴 이 편지를 다 집어넣을 공간이 인생에는 없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는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미소를 지었다. “이제 충분해요, 사랑하는 오베.” 그러자 충분해졌다.
- 그녀를 울리고, 웃기고, 목소리가 그들의 작은 집 천장까지 닿도록 노래를 하게 만드는 아이들에 대해.
-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했던 얘기였다. 그녀는 선을 위해 싸웠다.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아이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오베는 그녀를 위해 싸웠다. 왜냐하면 그녀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아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 오베가 사브를 몰아 병원을 빠져나올 때는 차에 사람이 꽉 차는 바람에 그는 연료 게이지를 계속 확인했다. 마치 자동차가 볼썽사나운 춤이라도 출까봐 걱정하듯.
- 세 살배기가 크레용을 떨어뜨리자 크레용이 조수석 아래로 굴러갔는데, 조수석에는 오베를 도우러 왔던 지미가 앉아 있었다. 지미는 그와 같은 몸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올림픽 체조 기술에 맞먹을 게 분명한 동작으로 몸을 숙여 자기 앞의 매트에서 크레용을 주웠다. 그는 잠깐 그걸 살펴보고는 씩 웃더니 패트릭이 괴어놓은 다리로 몸을 돌려 깁스 위에 미소를 짓고 있는 커다란 남자 그림을 그렸다. 꼬맹이가 그걸 보더니 기쁨에 소리를 꺅꺅 질러댔다.
- “잘 그렸죠, 그렇죠?” 지미가 놀려먹듯 말하고는 마치 오베와 하이파이브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 파르바네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니 어쩌면, 배에.
- 패트릭은 놀란 표정을 안 지으려고 애썼다. 파르바네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둘 다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 오베가 자기 주변에 모인 인간들을 보았다. 마치 자기가 유괴라도 당해서 평행 우주로 납치된 듯. 잠시 그는 방향을 홱 틀어 도로를 벗어날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최악의 경우 이 인간들 모두가 그와 함께 사후 세계까지 동행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 “잠깐 멈추면 어때요, 오베? 나사닌이 쉬가 마렵대요.” 사브 뒷좌석이 운전사에게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로 파르바네가 소리쳤다.
- 오베는 무척 혼란스러운 나머지 짜증을 내는 것도 까먹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당신 운전면허가 없다?” “네.” “농담이 아니다?” “네.” “면허를 상실한 거요?” “아뇨. 따본 적이 없어요.” 오베의 두뇌가 이 정보를 처리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에게 이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 오베가 암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이거야말로 어떤 일에도 책임을 안 지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이라는 듯.
- 의사는 끝에 가서는 소냐에게 매우 많은 진통제를 처방해줬다. 집 욕실은 여전히 콜롬비아 마피아의 마약 창고처럼 보였다. 오베는 분명 약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약이 가진 유일한 효과는 심리적인 측면일 뿐이라고, 따라서 약이란 나약한 뇌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듣는다고 확신해왔다.
- 알코올에 영향을 받은 일도 거의 없었다. 자제력을 잃어 해롱거리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을 보낸 끝에 그게 바로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오베로서는 빌어먹을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제력을 잃는 걸 스스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태라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제 그는 그의 목과 어깨 사이의 우묵한 부분에 그녀의 코끝이 닿는 걸 느끼지 못한 채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몰딩
- 루네가 그를 보았다. 아니, 시선이 그를 뚫고 지나간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 한때 사람들의 존경을 이끌어내던 단호한 이 친구는, 이제 자기 몸에 넝마처럼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오베는 그가 늙었다는 걸, 아주, 아주 늙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은 오베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힘으로 그를 강타했다.
- 한때 가까울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은 과거를 잊길 거부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 오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었다. 고양이는 그의 옆에서 자기도 주머니가 있었다면, 아니면 손이라도 달렸으면 똑같이 했을 거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골함석
- 그녀가 남편의 이름을 말할 때 목소리가 마른 신문지처럼 갈라졌다.
- 아니타는 ‘미국’이라는 단어를 마치 그녀의 이기적인 아들이 이사 간 천국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 그는 배터리와 금속 클립과 골함석을 치운 다음 모두 다 차고에 집어넣었다. 그 머저리들이 전기 충격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꼴을 당해도 쌌다. 그가 관둔 건 어쩔 수 없이 사악해지는 것과 안 그래도 되는데 사악해지는 것 사이의 차이를 누군가 진작에 일깨워줬었다는 걸 기억했기 때문이다.
- 자기가 ‘수리할’ 거라고 했던 자전거. 물론 오베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수리한다’는 이런 불량배들에게는 ‘훔쳐서 인터넷에 판다’는 뜻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 그가 침묵했다. 그들은, 그러니까 59세의 남자와 10대 젊은이는 몇 미터 거리를 둔 채 눈을 발로 차고 있었다. 마치 기억을 이리저리 발로 차듯. 어떤 남자들에게서 본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잠재력을 봤다고 주장했던 여성에 대한 기억을. 양쪽 다 자기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른 채였다.
- “뭐, 그러니까, 아직은 여자 친구가 아니긴 해요. 하지만 걔가 내 여친이 됐으면 좋겠다, 그거죠. 말하자면 그렇단 거죠.” 오베는 중년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문법을 창안해낸 애송이들을 뜯어보듯이 눈앞의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 “다른 일 뭐?” 마치 젊은이가 <재퍼디>
- 결승에서 불충분한 대답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베가 물었다.
- 두 남자를 둘러싼 공기가 찰나의 순간 동안 멈췄다. 별안간 기묘한 침묵이 그들을 둘러쌌다. 만약 이게 영화 장면이었다면 카메라는 오베가 마침내 평정을 잃기 전 그들 주위를 360도로 회전했을 것이다.
- 이해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부터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얘기를 세세히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 이제 사람들에게는 충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차는 그저 ‘이동 수단’이었고 도로는 그저 두 지점 사이에서 생겨나는 골치 아픈 문제에 불과했다. 오베는 이게 요즘 도로가 그 모양 그 꼴로 형편없는 이유라고 확신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차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운전을 그렇게 머저리처럼 하지는 않을 거라고
- 오베가 한숨을 쉬었다. 고양이는 뒷좌석에서 고양이도 안전벨트를 맬 줄 알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 오베는 핸드 브레이크까지 오기 위해 군용 장애물 코스를 뚫고 와야 했던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누가 눈에 레몬즙을 뿌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 근육이 뒤틀려 있었다.
- “차를 들이받을 뻔 했어요!” 파르바네가 헐떡이며 말했다. 오베가 앞차의 보닛 가장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별안간 그의 얼굴에 모종의 평온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미건조하게 끄덕였다. “상관없어. 볼보야.”
- 차가 처음으로 빨간 신호에 걸렸을 때, 머리를 민 젊은 남자 둘이 탄 커다란 검정색 SUV가 사브의 뒷 범퍼에 어찌나 바싹 붙었는지 오베는 집에 가서 보면 SUV의 차량 번호가 사브의 도장면에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 문신남들은 이제 공습경보라도 울리는 것처럼 경적을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 SUV는 핀란드 여객선이 자신들의 뒤에서 덮쳐 깔아뭉개기 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빵빵거렸다.
- 목에 문신한 사내는 여전히 대답할 시간을 갖지 못했고, 오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 “한 번만 더 경적을 울렸다간 그게 네가 세상에서 하는 마지막 짓이 될 거다. 알겠냐?”
- “내가 뇌수술을 하라는 것도 아니잖소. 차를 운전하라고 하는 거라고. 차에는 액셀러레이터, 브레이크, 클러치가 달려 있어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멍청이들도 이걸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았다고. 그러니 당신도 할 거요.”
- 하지만 갈등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다 보면 수습을 하는 게 불가능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갈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구도 기억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오베는 그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몰랐다. 어떻게 끝났는지만 알았다.
- 루네와 아니타의 아들은 이즈음 막 10대에 들어섰는데, 마치 하느님이 이 꼬마에게 매력 없고 무례하게 굴 권리를 부여하기라도 한 듯, 짜증을 내며 소품마냥 식탁 맨 끝에 앉아 있었다.
- 루네와 아니타의 아들은 1990년대 초, 스무 살 때 집을 떠났다. 미국으로 간 게 분명하다고 오베는 소냐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 뒤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가끔 아니타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전화 통화를 했지만, 아니타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기 일 때문에’ 정말로 바빴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활기차게 보이고자 애를 썼지만, 소냐는 그녀가 눈물을 꾹 참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소년들은 모든 걸 뒤에 남겨놓고 떠난 뒤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그뿐이었다. 루네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매년 몇 센티미터씩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깊은 한숨과 함께 찌부러져 다시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처럼.
- 한 달 뒤 루네는 처음으로 병원에 갔다. 그는 다시는 잔디깎이 기계를 사지 않았다. 오베는 그들의 반목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몰랐지만, 그때 끝났다는 건 잘 알았다. 그 뒤의 기억들은 오로지 오베만 갖고 있는 것이었고, 루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 아마도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슬픔이 두 남자를 더 가깝게 이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란 그런 점에서는 믿을 만한 감정이 아니다. 사람들이 슬픔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슬픔은 대신 서로를 더 멀리 밀어낼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 남자 모두 자신들이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성들에게, 그녀들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 아멜은 몸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단단한 자음을 길고 연속적으로 내뱉었는데, 오베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이 다종다양한 네 글자 욕설
- 과 신체 부위를 조합한 말들이 아닌가 의심했다.
- “고양이는 나가! 카페에 동물은 안 돼!” 아멜이 자음들을 휙휙 베어버리는 바람에 자음들이 문장 안에 갇힌 말썽쟁이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 그가 정신줄을 다시 잡았을 때, 그는 나중에도 아마 잘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사다리에 올라선 사람이 아니라 사다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어디 갔다 온 거요?” 오베가 물었다. “저 사람한테 잔돈을 줬어요.” 파르바네가 건물 벽 옆에 있는 더러운 턱수염 남자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돈을 슈냅스나 마시는 데 쓸 거라는 걸 알 텐데.” 오베가 말했다. 파르바네가 눈을 크게 떴다. 오베는 그녀가 그러는 게 아무래도 일종의 빈정거림 같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요? 그럴까나? 나는 저 사람이 저 돈을 자기가 입자물리학을 전공한 대학에다 학자금 대출을 갚는 데 쓰길 무우척 바라고 있었는데!”
- 오베가 묘석의 눈을 털었다. 얼어붙은 땅을 힘껏 파헤친 다음 새 꽃을 다시 심었다. 그는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무력하게 그녀의 이름을 보고,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꼈다. 언제나 그녀에게 늦는다고 구박받던 남자. 이제 그는 여기 홀로 서 있었다.
- 하루와 한 주가 한데 뭉친 채 완전한 침묵 속에서 흘러갔고, 그는 자기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거의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일요일이면 그들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오베는 신문을 읽었고 소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월요일이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월요일, 그녀는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 마치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낼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 그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둥 하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젊은이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삼십 대 직원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얼마나 원하는지 같은 이야기만 해댔다. 마치 그게 일을 하는 유일한 목표인 양.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되는 지점까지 이르는 게 목표인 양. 소냐는 오베가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 없는 남자’라며 웃곤 했다. 오베는 그걸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세상사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야 했고 그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그게 어떻게 못된 성질머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다른 집 아내들은 자기가 머리를 새로 한 걸 남편들이 못 알아본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잖아요. 제가 머리를 하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달라졌다고 며칠 동안 짜증을 내더라고요.”
- 그게 오베가 무엇보다 그리워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늘 같은 것. 오베는 사람들은 제 역할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언제나 제 역할을 했고, 누구도 그에게서 그걸 빼앗아갈 수 없다.
- 그는 계속 그 차를 몰고 다닐 것이었다. 자기와 차 중 하나가 망가지지 않는 한. 어느 쪽이건 제대로 된 차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그는 생각을 굳혔다. 이제 차 안에는 수많은 전자기기와 쓸데없는 것들만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컴퓨터를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보증 기간이 지났다’고 징징거리는 제조업체들 없이는 그것들을 떼어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게 나았다. 소냐가 한번은 오베가 땅에 묻히는 날 슬픔 때문에 차도 망가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건 사실일 터였다.
- 의사가 4년 전 그녀에게 진단 결과를 알려주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오베보다 더 쉽게 신과 우주와 만물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베가 대신 화를 냈다. 어쩌면 그는 사악한 만물이 자기가 만났던 단 한 사람, 그에게는 과분했던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누군가 그녀 편에서 화를 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 이 경우에는 이런 보험 증서가, 저 경우에는 저런 보험 증서가 필요했다. 소냐가 아프기 때문에 연락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가 휠체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연락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세 번째 담당자에게 연락한 결과 그녀가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오베는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건 일터에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설득하고자 빌어먹을 관계 기관의 네 번째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요, 사랑하는 오베. 하지만 수천의 다른 아이들을 주셨지요.” 4년째 되던 해 그녀는 죽었다. 이제 그는 묘지에 서서 그녀의 묘석을 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마치 그녀를 문질러 되살려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 다음 날 아침, 그는 고양이를 내보내고 나서 다락에서 소냐 아버지의 오래된 라이플을 꺼냈다. 그는 무기에 대한 자신의 반감이, 이 작고 조용한 집에 그녀가 남겨놓고 간 빈 공간에 대한 혐오보다는 결코 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때가 됐다.
- 그들은 하나같이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그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평범한 사람들을 마모시키다가 결국에는 그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반짝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듯.
- 오베가 TV에 볼 게 없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하얀 셔츠의 관자놀이가 실룩이는 걸 보았다. 어쩌면 순간 터져 나온 욕구 불만일 수도 있다. 놀라움에 찬 분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순수한 경멸일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만.
- 하지만 그때 당연하게도, 파르바네가 찾아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마치 오베의 집 대문이 문명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작동하는 화장실인 것처럼. 그 여자에게는 오줌을 쌀 수 있는 집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 그 질문이 오베를 당혹스럽게 했다. 또다시. 그가 멈췄다. 손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고, 한껏 퍼부을 욕설이 한 바가지는 됐다. 하지만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는 그 욕설들 중 어떤 것도 꺼내들 수 없었다.
- 남자가 리모컨으로 삑 하는 소리를 내며 차 문을 잠갔다. 그런 다음 오베와 거기 서서 대화한 적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 “당신네 그 쓸모없는 남편 집에 있나?” 오베는 그렇게 으르렁대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파르바네는 오베가 성큼성큼 네 걸음 만에 현관문에 닿기 전에 겨우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 “네? 아…… 그 트레일러요. 직장 친구한테 빌렸는데요…….” “전화해. 다시 빌려야겠다고.” 이게 오베가 오늘 죽지 않은 이유였다. 그의 관심을 끌 정도로 충분히 화를 돋운 일에 붙들리는 바람에.
- 하얀 셔츠의 사내가 오만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자기들 뜻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익숙한 하얀 셔츠의 사람들이 누군가 자기들과 의견이 다를 때 짓는 딱 그 미소였다.
- 하얀 셔츠의 관자놀이가 살짝 씰룩인 게 바로 그때였다. 마치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이 슬쩍, 아주 조금 미끄러진 것처럼.
- 하얀 셔츠의 남자들이 언제나 이긴다. 오베 같은 남자는 언제나 소냐 같은 사람을 잃는다. 아무도 그에게 그녀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결국 부엌 조리대에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곤 하지도 않는 하루하루가 길게 이어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오베는 더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다 멈추기만을 바랐다.
- 그녀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의자에 주저앉아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정말로 세게 뛰는 바람에 귀가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숨통을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압박이 20분 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베는 울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모두 품위 있는 삶을 원해요. 품위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뜻하는 거고요.”
-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에게 품위란, 다 큰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따라서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그녀는 더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세상에 그를 혼자 남겨두고 떠났다.
- 고양이는 오베가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침실 바닥에 앉아 마술쇼의 속임수를 이해하려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현관 거울에 비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자기 모습을 본 게 아마 35년 만이지 싶었다. 여전히 근육질이고 튼튼했다. 확실히 동년배 남자들보다 훨씬 나은 체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피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마치 녹아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참 보기 흉하다고.
- 몇 번의 당황스러운 듯한 외침과 상당한 소란이 있고 나서야 미르사드는 자기 정체가 보통의 불량배일뿐, 강도 불량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소명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오베도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처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그는 그들에게 라이플을 휘둘러댔고, 그 때문에 아드리안은 마치 공습경보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 자기도 모르는 새 현관 안으로 반 발짝 물러서다가 벽에 걸려 있는 소냐의 사진을 흘끔 보았다. 빨간 원피스. 임신했을 때 스페인에서 했던 버스 여행. 그는 저 빌어먹을 사진을 내리자고 그녀에게 수차례 부탁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기억’이었다면서. 고집불통 할망구.
- 이날은 오베가 마침내 죽는 날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은 다음 날 아침에 오베가 자기 집에서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성애자와 같이 잠에서 깨게 되기 전날 저녁이었을 뿐이다. 소냐는 이걸 좋아했을 것이다. 필시 그랬겠지. 그녀는 호텔을 좋아했다.
- 때로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물론 그들 자신이 언젠가 그 일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아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정반대의 이유이기도 했다. 즉 자기들이 진작 그 일을 했어야 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아마 오베도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내내 알고 있었겠지만,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시간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할 시간이 넘쳐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만약’과 같은 말들을 곱씹는다.
- 그는 조심스레 몇 걸음을 더 걸어 계단에서 내려온 뒤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발을 디디고는 부엌 문간에 섰다. 마치 현행범을 막 체포한 것 같은 남자의 몸짓이었다.
- 오베는 마치 해적 차림을 한 미르사드가 보행자 전용 아케이드에서 그를 멈춰 세운 다음 여기 찻잔 세 개 중에서 은화를 감춘 게 뭔지 맞춰보라고 말하기라도 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 “안녕들 하세요!” 그들이 인도로 다가가는데 지미가 외쳤다. 그는 엄청나게 진한 녹색 운동복을 입고 오베의 뒤에서 정력적으로 숨을 헉헉 내뿜으며 나타났는데, 운동복이 어찌나 그의 몸에 꽉 끼는지 오베는 처음에는 그게 옷인지 바디 페인팅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 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턱 밑 지방이 쇄골 위에서 폭풍 속의 돛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 뒤따르는 침묵은 너무 두터워서 도끼로 쪼개야 할 정도였다. 지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지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그의 움직임 위에 마치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헤아릴 수 없는 분노가 오베의 내면에 쌓여 가슴 안쪽에서 마치 토네이도처럼 속도를 올렸다.
- “아니타가 정확히 뭐라 그랬지? 우리가 ‘우리 일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서’ 소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나?” 지미가 마음을 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베는 고개를 숙여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킷 아래에서 가슴이 울렁였다. 그는 소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느꼈을지 생각했다. 만약 소냐의 가장 친한 친구가, 소냐 자신의 일로도 ‘충분히 곤란하다’는 이유로 소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가슴이 찢어졌을 테다.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란 때로 어렵다. 오베는 아마도 자기가 뭘 했어야 했는지 내내 알았을 것이다. 죽기 전에 누굴 도와야 했는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올 때까지는 늘 낙관적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그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리지만, 오베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치명적인 불의에 맞서 복수를 하려는 남자 같은 동작으로 주택들 사이를 급히 움직였다.
- 훗날 아니타는 그날을 회고하며 이웃들에게 오베가 그렇게 화가 난 건 1977년, 사브와 볼보의 합병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 때 이후로 처음 봤다고 말하게 될 것이었다.
- 그 뒤 두 달간 그들은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다가 당연하게도, 난방 시스템 문제로 다시 틀어졌다. 하지만 아니타가 말했듯, 싸움이라도 계속될 때가 좋았다.
- 루네와 오베는 마을의 은행을 찾아갔고, 그날 저녁 소냐와 아니타는 그 젊은 여성에게 이걸 선물로 생각해도 좋고 대출로 생각해도 좋다고, 어느 쪽이건 편한대로 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안 받겠다는 건 선택 사항에 없다고 했다.
-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어, 어느 정도는. 그러니까…… 모든 걸 다 할 시간이.”
-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와 논쟁할 때 그녀가 늘 선호하던 방법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고,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 분노로 인해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셔츠보다 더 하얘졌을 것이다.
- 파르바네가 눈에 당혹감을 담고 오베의 집 현관으로 곧장 뛰어들더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생략한 채 화장실로 직진했다. 오베는 사람이 어떻게 집에서 집까지 20초밖에 안 걸리는 공간을 걷는 중에 그렇게 강렬한 요의를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예전에 소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임산부보다 더 화가 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준 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 “다 했나?” 오베가 궁금해했다. 마치 이게 일종의 전후반 사이의 휴식 시간이라도 되는 양.
-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그 사람을 넘긴다면 그게 대체 무슨 종류의 사랑이에요?” 그녀가 울며 말했다. 목소리가 슬픔으로 떨렸다. “힘들다고 그 사람을 저버리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사랑인지 말해봐요!” “루네 선생은 이젠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거의 모릅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지만 난 알아요!” 아니타가 말을 끊고는 세 명의 간호사를 보았다.
- 그녀는 마치 경품으로 당첨된 차의 열쇠를 건네주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 “기자로서 관료제를 면밀히 조사할 때 정말 신기한 게 뭐냐면요, 관료들이 정한 법을 제일 먼저 어기는 사람들이 관료들 본인이라는 사실이에요.”
- 아니타와 파르바네와 여기자와 패트릭과 오베와 지미와 앤더스와 하얀 셔츠와 세 명의 간호사는, 포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자기 전 재산을 건 다음 탁자 위에 카드를 펼쳐놓았을 때만 생겨나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
- 그는 모퉁이를 돌아, 해가 하늘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림자가 사라지듯 사라졌다. 혹은 이야기의 끝에서 악당이 퇴장할 때처럼 사라졌다.
-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 그녀가 눈을 굴리는 모양새를 보자, 오베는 그녀가 이 주제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래줄 거라고 합리적으로 예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 싶었다.
- 오베는 엄밀히 말해 단어가 아니라 소리에 불과한, 그러니까 자기 기도를 깨끗이 청소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 다시 현관을 거쳐 돌아가던 중 그는 일곱 살짜리의 방을 지나쳤다. 소녀는 당연하게도,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열심히 두드려대고 있었다. 요즘엔 애들이 다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오베는 생각했다. 패트릭은 자기가 ‘새 게임을 주려고 해봤지만 딸아이는 딱 한 가지 게임만 하고 싶어 한다’고 설명했고, 오베는 그 말을 듣자 일곱 살짜리와 그녀가 하는 게임 모두에 호의적인 감정이 들었다. 오베는 패트릭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좋았다.
- 소녀의 방 벽에는 여기저기 그림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연필로 그린 흑백 그림이었다. 그는 이 그림들이 연역적 추론 능력이 없는, 운동 기능이 무척이나 미숙한 일곱 살짜리가 창조한 작품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사람을 그린 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집들이었다. 오베는 이 점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 그녀가 속삭였다. 마치 그게 소녀와 오베 사이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오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두 꼬맹이는 완전히 글러먹은 애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 머리 위에서 온풍기가 시가 연기라도 삼킨 것처럼 콜록거렸다.
- 그의 딴딴한 몸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숨을 몽땅 내뱉은 것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세대의 남자들, 세상에서 자기 몫을 꾸려온 남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슬픔과 위로할 길 없는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 (소냐가 그 건달놈한테 셰익스피어 읽는 법은 어찌어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쓰레기 광고지 금지’라는 딱 세 단어가 적혀 있는 표지판은 읽지 못했다)
- 오베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마치 위조지폐를 감별하듯 편지를 부엌 전등에 비춰보았다.
- 저는 당신이 제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용기와 이타심에 앞으로도 늘 감사하며 살게 될 사람들만큼은 소개드리고 싶었습니다.
- 레나가 격한 말투로 그렇게 외쳐대자, 오베는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여자를 차고에 계속 가둬놓지 못한 걸 조금 후회했다.
- 정말로 활기차게 손을 흔드는 바람에 끼고 있던 커다란 벙어리장갑이 손에서 미끄러져 빠졌다.
- 이제 파르바네의 배는 정말로 커져서, 몸을 숙여 웅크린 듯한 자세로 한 손을 묘석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패트릭의 팔에 걸쳐놓자 거대한 거북처럼 보였다.
- 생각했다. 이미 그 중 몇 가지를 시도해 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였다.
- 오베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지만 그냥 모르는 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 딴딴한 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오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아마 아침 내내 기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황량한 벌판 어딘가에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붙박혀 있는 파수꾼처럼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자기는 두터운 나무둥치에서 잘려 나왔고, 그래서 영하의 기온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 그날 저녁, 오베의 집 부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실망과 희망과 남자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두 개의 언어로 나누는 동안
- 종이 한 장을 쥐어줬다. 종이에는 ‘생일 파티 초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베는 마치 그게 임차권 합의를 위해 권리 이전 사항을 기술한 법률 서류라도 되는 것처럼 초대장을 읽었다.
- 오베는 음모에 동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공범에게 자기들이 쓰는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범죄자처럼. 그와 소녀는 현관 주변을 둘러보며 꼬치꼬치 참견하기 좋아하는 귀를 가진 소녀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그런 다음 오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소녀는 두 손을 깔때기 모양으로 만들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오베가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 전두엽절제술
- 점원이 고집스러운 분노와 본능적인 분노 사이 어딘가에서 요동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 “다른 메모리 용량을 가진 여러 제품들이 있다는 소리예요.” 지미가 이민국에서 나온 통역사처럼 오베에게 점원의 말을 해석해줬다. “나한테는 저놈들이 지랄같이 많은 추가 요금을 원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오베가 콧김을 내뿜었다.
- 파르바네의 목소리가 그를 깊은 꿈에서 끄집어내듯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공 모양의 배에 손을 얹은 채 거실 입구에 서서 자기 앞에 놓인 배가 거대한 빨래바구니라도 되는 양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 오베와 고양이가 주택들 사이에 난 작은 길로 나섰을 때는 겨울의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였다. 생일 파티의 웃음과 음악이 벽 사이에서 커다랗고 따뜻한 카펫처럼 흘러나왔다. 소냐라면 좋아했을 거라고 오베는 생각했다. 그녀라면 이 정신 나간 임산부와 그녀의 말도 안 되게 제멋대로인 가족이 오고 나서 벌어졌던 일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엄청나게 웃어댔을 것이다. 맙소사, 오베는 그 웃음이 얼마나 그리운지 몰랐다.
- 오베는 공기를 찾아 헐떡였지만 공기가 없는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던 중 쓰러졌다. 몸 전체가 눈 위로 풀썩 넘어졌다. 얼음 조각이 뺨을 긁는 무딘 통증이 감지되었고, 커다랗고 무자비한 주먹이 가슴 안의 뭔가를 쥐어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알루미늄 캔을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것 같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형광등이 줄줄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폐에 산소가 없었다. 귓속에서 피가 꿀렁이듯 뛰는 혈관 때문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와중에 멀리서 파르바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을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 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시간은 묘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며칠, 몇 주, 몇 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아마도 바라볼 시간보단 돌아볼 시간이 더 많다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더 이상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없을 때는 다른 것을 위해 살게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건 추억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화창한 오후. 이제 막 꽃들이 만개한 정원의 향기. 카페에서 보내는 일요일. 어쩌면 손자들. 사람은 다른 이의 미래를 위해 사는 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소냐가 곁을 떠났을 때 오베 또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는 그저 살아가는 걸 멈췄을 뿐이었다. 슬픔이란 이상한 것이다.
- 다른 의사가 의학적 중립을 지키는 얼굴로 문에서 나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시라’는 말을 툭툭 내뱉었을 때, 그녀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부서진 도자기 꽃병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 사랑은 이상한 것이다. 그건 사람을 놀라게 한다.
- 머리는 산발이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얼굴에는 눈물을 따라 흘러내린 마스카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복도 끝의 작은 병실로 걸어들어갔을 때, 그녀는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약해 보여서, 간호사는 그녀가 문지방을 건너다 바스라지지 않도록 앞으로 달려나가 부축해야만 했다. 파르바네는 문틀에 의지해 심호흡을 하고는 간호사에게 정말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그녀는 병실로 들어가 잠시 서 있었다. 처음으로 그날 밤 벌어진 일의 심각함을 마음에 새기기라도 하듯.
- 그는 입이란 잠시나마라도 다무는 게 좋은 것이라는 인생의 지혜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계속 서 있다가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녀의 눈에 동요, 공감, 순수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이때 그가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코에 튜브가 꽂혀 있고 담요 아래서 가슴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숨을 쉴 때마다 길고 고통스런 충격을 받는 듯.
- “오베 씨 심장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온건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더니, 뒤이어 최소 10년 동안 의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거나 의학 드라마에 병적으로 중독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좀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용어들을 쭉 늘어놓았다.
- 파르바네가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줄줄이 달린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안경을 쓰고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오리궁둥이를 한 젊은 의사들이 병원에 오기 전에는 의대를 졸업해야 한다는 기막히게 상식적인 지식도 못 갖춘 사람들의 항의에 직면했을 때 늘 그렇게 하듯 한숨을 쉬었다.
- 마치 의사가 팔을 뻗어 손가락을 요란법석 흔들기 시작하면서 “그냥 농담이었어요!”라고 외치길 기다리기라도 하듯 다시 그를 보았다.
- 의사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세미나에는 가본 적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하자면 자기 권위를 상기시킬 요량으로 발을 몇 번 바닥에 재빨리 쿵쿵댔다. 물론 그렇게 잘 먹히지는 않았지만, 의사가 여러 번 그러고 나자, 파르바네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베 심장이 너무 크다니. 나 죽을 것 같아요.”
- 나흘 뒤 오베는 절뚝절뚝 눈을 헤치며 집으로 갔다. 한쪽에서는 파르바네가, 다른 한쪽에서는 패트릭이 부축했다. 한 인간은 목발을 짚었고 한 인간은 애를 뱄는데,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거지, 오베가 생각했다.
- 파르바네는 웃지 않으려 애썼다. 딱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 그들은 소냐의 물건을 신문지로 하나씩 포장하고 옷들을 조심스럽게 개어 상자에 넣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추억이 떠올랐다.
- 인생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 파자마 파티
- 협탁
- 편지는 길지 않았다. 마치 편지를 채 다 읽기도 전에 파르바네가 눈물로 편지를 흠뻑 적시리라는 걸 오베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 그녀의 눈은 눈물로 퉁퉁 부어 있고 목은 꽉 막혀서, 파르바네는 자기가 지금 꼭 며칠 동안 공기를 찾아 헐떡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 저녁에 그녀는 젊은 신혼부부에게 오베와 소냐의 집을 보여줬다. 여자는 임신한 상태였다. 방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자기 아이가 미래에 갖게 될 추억이 바닥에 펼쳐지는 걸 상상하는 사람의 눈이 반짝이듯. 그녀의 남편은 집이 덜 만족스러운 게 분명했다. 목수용 바지를 입고 있고, 돌아다니는 동안 몰딩들을 미심쩍다는 듯 발로 차면서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파르바네는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아내의 눈을 보며 이미 결정이 내려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젊은 남자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광고에 나온 ‘그 차고’에 대해 묻자, 파르바네는 그를 유심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차를 모는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처음으로 몸을 곧게 펴더니,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오로지 딱 한 단어만이 안겨줄 수 있는 불요불굴의 자존심을 담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브요.”
- 제 아버지 롤프 바크만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가 당신과 안 닮은 점들이, 정말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만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