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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헬조선의알파고
2020. 4. 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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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3권 미국의 세기>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9.11테러 이후의 21세기 초반, 세계 속의 미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대한 이해가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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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인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 발발했으나,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유럽 주요 국가의 군대가 거의 다 가담하는 대전쟁이 되어버렸다.
- 미국은 1917년 4월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 유럽의 주요 세력은 1914년까지 상호 경쟁하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맺은 삼국협상(Triple Entente)으로, 이는 전쟁 중에 연합국으로 알려졌다. 다른 하나는 나중에 동맹국(Central Powers)으로 불려진 삼국동맹(Triple Alliance)으로 여기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연합국 측에 가담한 이탈리아가 연합했다. 그런데 주된 경쟁은 두 동맹 사이가 아닌, 두 동맹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대한 세력, 즉 영국과 독일 간에 있었다.
-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민족주의 운동과 관련된 분란으로 일어났다. 1914년 6월 28일, 위기를 겪고 있던 제국의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이 사라예보를 국빈 방문하던 중 암살당했다. 사라예보는 슬라브 민족주의자가 인접한 세르비아에 합병하고자 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한 지방인 보스니아의 수도였고, 대공의 암살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 독일은 세르비아를 징벌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결정을 지지했다. 세르비아인은 자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고, 러시아는 7월 30일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8월 3일,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벨기에를 침공했다. 8월 4일, 영국이 프랑스와 맺은 동맹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8월 6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식적으로 교전을 개시했다. 수개월도 되지 않아 다른 소규모 국가도 참전했고, 1915년 초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 유럽 대륙이 (아시아의 일부도) 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 경제적 현실 때문에도 미국은 교전국을 동등한 조건으로 상대하지 못했다. 영국은 적에게 군수품이 보급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독일에 대해 해상 봉쇄를 가했다.
- 미국은 독일과 그 동맹국과의 비교적 경미한 교역은 중단할 수 있었지만, 훨씬 더 포괄적인 연합국과의 통상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미국은 독일에 대한 봉쇄를 전략적으로 승인하면서 영국과의 통상은 계속했다. 1915년까지 미국은 중립 세력에서 연합국의 군수창으로 점차 변모해갔다.
- 독일은 대양에서 영국의 우세를 넘어설 수 없자, 1915년 초 적군의 선박을 보는 대로 침몰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몇 달 후인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은 아무런 경고 없이 영국 국적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Lusitania)를 침몰시켜 승객 1,19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128명이 미국인이었다. 이 선박에는 승객뿐만 아니라 군수품도 실려 있었으나, 대부분의 미국인은 정당한 이유 없이 민간인을 공격한 것이라고 보았다. 윌슨은 독일에게 이 같은 불법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독일도 결국에는 윌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16년 초, 연합국이 잠수함을 침몰시키기 위해 상선을 무장시키고 있다고 발표하자 독일은 그 같은 선박에는 경고 없이 발포하겠다고 선언했다. 몇 주 후에 독일은 비무장 상태인 프랑스 증기선 서식스호(Sussex)를 공격했고, 미국인 승객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다시 윌슨은 독일에게 ‘불법적’ 전술을 버리라고 요구했고, 독일 정부도 이에 대하여 순순히 대응했다.
- 윌슨이 일반투표에서는 60만표 차,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단지 23표 차로 재선되었다.
- 그는 개입을 정당화할 논리를 만들어냈다. 미국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전쟁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1917년 1월, 윌슨은 의회의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미국이 영구적인 국가 간의 연맹을 통하여 ‘승리 없는 평화’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전후 질서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는 연설을 했다. 윌슨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확립과 세계 평화는, 이에 충분한 도전이 있다면 참전을 해서라도 이루어낼 가치가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 1월에 독일의 군사 지도자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내 적군의 주력선에 연속적으로 강공을 시도했다. 동시에, 영국에 긴요한 군수물자 공급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국 선박뿐 아니라 미국 선박에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했다. 그러자 2월 5일, 영국은 독일의 외상인 아르투르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정부에게 보낸 전문을 중간에 가로채 윌슨에게 주었다. 그 전문에는 독일이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미국에 대항하여 멕시코와 독일이 손을 잡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그 대가로, 전쟁이 끝나면 멕시코는 멕시코 북쪽에 있는 ‘빼앗겼던 지역’을 되 찾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선전 활동가와 미국 신문이 치머만 전문을 널리 알리자 여론이 들끓었다. 윌슨은 1917년 3월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으로 한층 더 유리한 입장을 확보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보수적인 전제 정권이 무너지고 새롭고 공화주의적인 정부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제 전제적 왕정과 동맹을 맺게 되는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4월 6일, 마침내 전쟁 선포안이 통과되었을 때도, 50명의 하원 의원과 6명의 상원 의원이 반대 투표를 했다.
- 1917년 봄에 이르러 영국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어, 대서양을 건너 긴요한 군수품을 공급받는 것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미국은 참전 후 몇 주 내에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미국의 구축함은 영국을 도와 유보트(U-boats)를 공격했다. 또 다른 미국 전함은 대서양을 건너는 상선을 호위했다. 미국은 북해(North Sea)에 대(對) 잠수함 수뢰 설치도 지원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연합국의 선박은 1917년 4월 한 달 동안 거의 90만 톤이 침몰했으나, 그 피해는 12월에 35만 톤으로, 1918년 10월에는 11만 2,000톤으로 감소했다.
- 전선은 프랑스와 서남 독일 사이의 국경부터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의 북동 경계에까지 뻗어 있다. 그 방대한 전선을 따라 양편의 군대는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3년이 넘게 살인적이며 결정적 상황 없는 전쟁을 계속했다. 1918년 봄과 여름, 미국의 참전으로 전력이 강화된 연합군은 연이어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독일 군대는 후퇴했다.
- 영국과 프랑스에는 예비 병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V. I. Lenin)의 지도로 새로 등장한 공산주의 정부는 러시아(Russia)와 동맹국 사이에 성급하면서 값비싼 평화 협상을 벌여, 서부전선에서 독일 군대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1917년에 미국은 필요한 지상군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상비군이 없었다. 국가에서 징병해야만 필요한 수의 병사를 제공할 수 있었다. 반대가 있었지만, 윌슨은 5월 중순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고, 약 300만 명이 징집되었다.
- 1918년 봄까지 미군의 상당수는 전투에 투입될 수 없었고, 8개월 후에는 전쟁이 끝나버렸다. 미군은 존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의 지휘로, 새로 시작된 독일군의 연이은 공격에 대항하여 보복전을 벌이던 연합군과 합류했다. 6월 초, 미군은 프랑스군을 도와 파리 근처의 샤토-티에리(Château-Thierry)에서 독일군의 격렬한 공격을 격퇴시켰다. 6주 후 미국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 AEF)은 더 먼 남쪽, 랭스(Rheims)에서 또 다른 공격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7월 18일경에 독일군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9월 26일, 아르곤 숲(Argonne Forest) 전투에서 100만 명이 넘는 미군이 독일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0월 말에 이르러 미군은 독일군을 독일 국경 너머로 몰아냈고, 전선으로 향하는 주요 보급선을 차단했다. 독일 군사 지도자는 자국이 침공되는 상황을 맞자 즉시 휴전하려고 했다. 퍼싱 장군은 독일 영토 내로 계속 진군하기를 원했으나, 다른 연합국 지도자는 처음에 (최소한 그들이 보기에는) 항복과는 약간 다른 협정(agreement)을 맺는다는 조건을 주장했다가, 결국에는 독일의 제안을 수락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 새로이 성능이 증진된 기관총과 더 강력해진 대포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참호전이 이 전쟁의 특징이자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참호에 몸을 숨길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제한적이고 결말 없는 공방만이 있었다.
- 탱크와 화염 방사기와 같은 이동형 무기로 참호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새로운 화학무기-군대가 항상 방독면을 휴대하게 한 독성 있는 겨자가스-의 개발이었고, 이 무기로 인해 전투를 직접 하지 않고도 참호 안의 병사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 많은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과 관계된 문제가 전략과 전술을 계획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전쟁 후반에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 들어갈 때, 장비를 기다리느라 며칠씩 진격을 중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첫 번째 전쟁이었다. 비행기 자체는 비교적 단순했으나 조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공(anti-aircraft) 기술 또한 그리 고도로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의 효과는 상당했다.
- 제1차 세계대전기에 가장 ‘현대적’이었던 군사 부문은 해군이었다. 터빈 추진력, 유압식 함포 조정 장치(hydraulic gun controls), 전광과 전력, 무선 전신, 그리고 진전된 항해 보조 기구 등과 같은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전투함이 등장했다. 미국의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중 잠시 나타났던 잠수함이, 1915년과 1916년에 독일 유보트 작전(U-boat campaign)에서 분명히 밝혀졌듯이 이제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새로운 잠수함은 추진 기관으로 디젤엔진을 사용했다. 디젤엔진은 증기 엔진보다 규모가 작고, 가솔린엔진보다 연료의 폭발성이 적은 이점이 있었다.
- 대영제국(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등)을 대표하던 100만 명에 이르는 병사가 사망했다. 프랑스는 170만, 독일은 200만,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50만, 이탈리아는 46만, 그리고 러시아는 170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영국에서 1892년과 1895년 사이에 태어난 남성의 3분의 1이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 전쟁 말기에 참전하여 최후의 성공적인 공격에만 가담했던 미국은 상대적으로 사상자가 적었다. 미국은 11만 2,000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절반이 전투가 아니라 독감 때문에 사망했다.
- 연방정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과 직접 관련된 비용으로 320억 달러를 책정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1915년 이전에는 연방정부의 총예산이 10억 달러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1910년에도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정부는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우선, ‘자유 국채(Liberty Bonds)’를 판매하여 미국 국민으로부터 차입을 활성화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채 판매는 1920년까지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여 거의 100억 달러를 거둬들였다. 이 세금의 일부는 기업체의 ‘과도한 이윤’에 부과한 것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누진세와 상속세 등의 세율을 70퍼센트 가까이 올려 조달한 것이었다.
- 1918년 4월에 설립된 전국 전시 노동 위원회(National War Labor Board)는 노동분쟁에서 최종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 하루 8시간 노동, 최소한의 생활 수준 유지, 동등한 작업의 경우 여성에게 동등한 임금 지불, 노동조합 결성권과 단체교섭권 인정 등이 그 내용이다. 위원회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자에게는 파업을 보류하라고 했고, 고용주에게는 작업장을 폐쇄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 덴버 출신의 언론인 조지 크릴(George Creel)이 이끌던 공보 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CPI)가 지휘한 방대한 선전이었다. 공보 위원회는 7,500만 장이 넘는 인쇄물 배급을 감독했고, 신문과 잡지에 실릴 정보를 대부분 통제했다. 크릴은 언론인이 전쟁 관계 뉴스를 보도할 때 ‘자기 검열’을 실시하라고 했고, 대부분의 언론인은 그 권고에 따라 정부가 원하는 대로 전쟁 보도를 했다. 1918년에 이르러 정부가 배포한 포스터와 영화는 독일인의 야만성을 그리는 무시무시하고도 과장된 초상화가 되어갔다.
- 1917년의 방첩법(Espionage Act)은 정부가 간첩, 태업, 또는 전쟁 수행 노력에 대한 방해(광범위하게 정의된 범죄)와 싸우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1918년 4월 20일에 제정된 태업법(Sabotage Act)과 그해 5월 16일에 제정된 선동 방지법(Sedition Act)은 좀 더 억압적인 성격을 띤 조처였다. 이 두 가지 법은 방첩법의 의미를 확대시켜,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 표명을 모두 위법화했다. 실제로 공무원은 이 두 가지 법에 따라, 대통령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기소할 수 있었다.
- 1918년, 모두 1만 1,500명이 넘는 이들이 정부나 전쟁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대상은 독일계 미국인 사회였다.
- 독일 음악 공연도 빈번하게 금지되었다. 독일 서적은 도서관 서가에서 치워졌고, 독일어 강의는 교과목에서 삭제되었다. 독일계는 중요한 업무에 대하여 ‘태업’을 하지 않았지만, 전쟁 관련 산업체에서 해고되곤 했다.
- 1918년 1월 8일, 윌슨은 미국의 전쟁 목표라고 주장했던 원칙을 제시하기 위하여 의회에 출석했다. 전쟁 목표는 14개조(the Fourteen Points)라고 널리 알려진 14개의 제목으로 작성되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범주에 해당되었다. 첫째, 윌슨의 제안에는 전후 국경을 재조정하고, 괴멸된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o-Hungarian) 제국과 오토만(Ottoman) 제국을 대체할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8개의 특정 권고 사항이 들어 있었다. 둘째, 미래의 국제 간 행위를 지배할 5가지의 일반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은 해양에서의 자유, 비밀 협정을 대신할 공개적 협약, 군비 축소, 자유무역, 그리고 식민지 보유 권리 주장에 대한 공정한 중개 등이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새로운 원칙과 영토 조정을 실행하고, 미래의 논쟁거리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창설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 영국과 프랑스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 자비롭고 관대한 평화를 이룰 분위기가 아니었다. 동시에, 윌슨은 국내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18년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윌슨은 어리석게도 미국 유권자에게 11월 선거에서 민주당원들을 뽑아 의회로 보내 자신의 평화 계획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며칠 후, 공화당이 상하 양원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 그가 1918년 12월 13일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군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평화회의 자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 협상 시작부터, 윌슨이 창출하려 했던 이상주의적 분위기는 자국 이기주의와 경쟁했다. 더욱이, 동부 유럽의 불안정한 상황과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이 넓게 깔려 있었다. 새로이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가 아직도 반혁명적 ‘백군(white)’과 싸우고 있던 러시아는 파리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 윌슨은 자신이 주창했던 광범위한 원칙의 많은 부분에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다른 연합국이 패전국에게 상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파리에서 윌슨은 국경 결정과 과거의 식민지 문제 해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승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눈부신 승리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정세를 감독하고 미래의 전쟁을 방지할 영구적 국제조직의 창설이었다. 1919년 1월 25일, 연합국들은 국제연맹의 ‘규약’을 투표로 승인했다.
- 윌슨은 1919년 7월 10일 상원에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제출했다. 베르사유조약이라는 명칭은 최종 협상 회의가 열렸던 파리 근교의 옛날 왕궁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상원에서 조약에 대한 반대가 상당했다.
- 윌슨을 극도로 싫어하던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
- 대중 정서가 분명히 비준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로지는 처음에는 비준 지연을 위해 시간을 버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조약에 대한 로지의 총체적인 반대는 일련의 ‘유보 조항(reservations)’-기구에 대한 미국의 의무를 더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연맹 헌장을 수정한 조항-으로 구체화되었다. 윌슨이 조약에 사용된 용어 일부를 비교적 미미하게 바꾸는 데 동의했다면 비준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같은 양보조차 거부했다. 윌슨은 미국이 규약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상원이 조금도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자 대중에게 호소하기로 했다.
- 윌슨은 조약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된 일정의 전국 순회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3주 넘도록 거의 쉬지 않고, 종종 하루에 연설을 네 차례 하며, 기차로 8,000마일 이상을 여행했다. 결국 그는 기진했고,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의 푸에블로(Pueblo)에서 연설한 후 심한 두통으로 실신했다. 윌슨은 나머지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서둘러 돌아왔으며, 며칠 후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다. 2주일 동안 그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6주일 이상 심하게 앓아 공적 업무를 거의 볼 수 없었다.
- 임기의 나머지 18개월 동안 사실상 무력하게 지냈다. 윌슨은 상태가 이렇자, 공적 문제를 도덕적으로 보려 하고 어떠한 타협 시도도 거부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외교 관계 위원회가 50개항의 수정과 유보를 권하며, 마침내 상원에 조약을 송부했을 때, 윌슨은 그중 어느 것도 고려하기를 거부했다. 비준 승인을 위한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 처음에는 전시 호황이 지속되었지만 인플레이션 또한 맹렬했다. 1919년에서 1920년까지 물가 상승률은 연 평균 15퍼센트 이상이었다. 마침내 1920년 말, 인플레이션이 소비재 시장을 말살시키며 경제의 거품이 폭발했다. 1920년과 1921년 사이 국민 총생산은 거의 10퍼센트 감소했고, 10만에 이르는 기업이 파산했으며, 거의 500만 명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었다.
- 1919년에 인플레이션이 심하게 일어나자, 전시에 노동자가 얻어냈던 경미한 임금 상승도 다 상쇄되어 버렸다. 수십만의 군인이 다시 노동력에 복귀하면서, 노동자는 직업 안정성을 우려하게 되었다.
- 고용주가 1917년과 1918년 정부의 강요에 의해 노동자에게 제공했던 혜택-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의 승인-을 취소하기 위해 전쟁의 종식을 이용하자 노동자의 분노가 더 심해졌다. 그래서 1919년은 전례 없는 파업 물결을 기록했다.
- 전쟁 중 군에 복무했던 흑인(그들 중 36만 7,000명)이 1919년 고향에 돌아왔고, 다른 귀환병과 함께 산업도시의 중심 도로를 따라 행진했다. 그런 다음, (뉴욕과 다른 도시에서) 이들은 수천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환호 속에 재즈밴드를 따라 할렘과 같은 흑인 동네에서 행진을 계속했다.
- 흑인 병사가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는 사실은 실상 백인의 태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흑인들의 태도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흑인의 분노는 격화되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려고 굳게 결단했다. 거의 50만 명에 이르는 흑인이 전시 공장에 취업하려고 남부 농촌 지역에서 산업도시로 이주했다.
- 이것이 바로 ‘대이주(Great Migration)’의 시작이었다. 수년 내에 전국의 인종 분포가 변화했다. 북부 도시에 대규모의 흑인 지역사회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중 몇 군데는 과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가 매우 적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19년에 인종 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야만적이고, 살인적이었다. 남부에서는 린치가 급증했고, 1919년 한 해 동안 참전자를 포함하여 70명이 넘는 흑인이 백인 폭도의 손에 살해당했다. 북부에서는 귀환한 백인 퇴역 군인이 흑인의 일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자, 흑인 산업 노동자는 대대적으로 해고 되었다. 백인은 더 낮은 임금을 받는 흑인 노동자 때문에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는다고 믿게 되면서, 적대감이 급격히 커져갔다.
- 두 차례의 대이주 물결로 인해 20세기 초반 50년간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구는 급격히 분산되었다. 한 차례는 제1차 세계대전기를 전후하여, 또 한 차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
- 1919년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시카고의 미시간 호에서 수영하던 흑인 소년이 백인 전용 해변으로 밀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해변에 있던 백인들이 그 소년을 혼수상태가 되도록 때리고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고 했다. 분노에 찬 흑인 군중은 보복하려고 백인 지역으로 몰려갔고, 백인은 더 많은 군중을 모아 흑인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시카고는 일주일이 넘게 거의 전쟁 상태에 빠졌다. 결국 38명-15명의 백인과 23명의 흑인-이 죽었고 53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00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시카고 폭동은 소위 ‘1919년의 적색 여름(red summer)’에 일어난 인종 간 폭력 사태 중 최악의 경우다. 그러나 폭력 사태는 그 한 번만이 아니었다. 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인종 폭동에서 모두 120명이 사망했다.
-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 192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 운동-옮긴이)
-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공산주의가 더 이상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중요한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9년, 소련 정부가 전 세계로 혁명을 수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공산당(Communist International 또는 Comintern)의 수립을 선언했을 때 공산주의의 위협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 소수의 급진주의자가 1919년 봄, 전국을 경악시킨 일련의 폭탄 사건을 일으켰다고 간주되었다. 4월에 들어와, 우체국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기업가와 정치가를 수취인으로 하는 우편물 수십 통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 우편물에는 열면 폭파되는 장치가 있었다. 두 달 후, 8개의 도시에서 8개의 폭탄이 몇 분 간격으로 폭발했고, 이는 전국적 음모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 적색공포(Red Scare)
- 1920년 새해 첫날, 법무부 장관 미첼 파머(Mitchel Palmer)와 의욕 넘치는 젊은 보좌역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는 전국에 걸쳐 급진주의의 중심지로 지목된 곳을 차례로 습격하여 6,000명 넘게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 거의 대다수는 결국 석방됐으나, 미국 시민이 아닌 500명은 즉각 추방되었다.
- 1920년 8월 26일, 여성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19조 수정안이 헌법의 일부분이 되었다. 여성참정권 운동에서 여성 투표권을 얻어낸 것은 거의 1세기에 이르는 투쟁의 정점이었다.
- 1920년의 선거에서 분명해졌다. 우드로 윌슨은 이 선거전이 국제연맹에 대한 국민투표가 되기를 원했고, 민주당 후보인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James M. Cox)와 해군 차관보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자는 다른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무명의 오하이오 주 상원 의원 워렌 가말리엘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이었다. 하딩은 어떠한 이상도 보여주지 않았고, 후일에 ‘정상(normalcy)’으로의 복귀라고 이름 붙여진 미미한 공약만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공화당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61퍼센트를 얻었고, 남부 이외 지역의 경우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공화당은 의회에서도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다.
- 1920년대에 미국이 이루어낸 놀랄 만한 경제적 성취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의 산업 생산은 6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3분의 1 정도 늘어났다. 1923년에 약간의 침체로 인해 성장 패턴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1924년 초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자 미국 경제는 그전보다 더욱 힘차게 팽창했다.
- 일관작업 라인(assembly line)과 그 외 기술이 발전한 결과, 자동차 산업은 이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자 다른 관련 산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자동차 제조업자는 철, 고무, 유리 제품과 공구 회사를 사들였다. 자동차 소유자는 정유 회사에서 가솔린을 구매했고, 도로 건설이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자동차로 인해 이동성이 증가하자 교외 주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건설업이 번성했다.
- 초기 라디오는 펄스(pulses)를 통해서만 방송할 수 있었다. 모스 부호(Morse code)를 써야만 라디오 방송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과학자 레지널 페선든(Reginal Fessenden)이 최초로 변조(modulation) 이론을 발견함으로써 음성과 음악을 전파를 통해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값싼 광석 수신기(crystal)가 (가까운 곳에서는 그리 잘 들리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도 신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많은 사람이 집에서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라디오 세트를 만들었다. 이 같은 ‘단파(short wave)’ 라디오로 개별 라디오 소유자가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에 나온 ‘햄 라디오(Ham radio)’의 시초였다. 일단 상업방송이 시작되자, 미국인은 좀 더 통상적인 라디오 세트를 사려고 몰렸는데, 이것은 근거리, 중거리 모두 고품질의 신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라디오 세트에는 초기 모델보다 성능이 훨씬 더 뛰어난 진공관이 설치되었다. 1925년까지 미국 가정에 200만 대의 라디오 세트가 보급되었고, 1920년대 말까지 거의 모든 가정이 라디오 세트 하나씩은 보유하게 되었다.
- 1920년대에 상업 비행은 서서히 발전했다. 전반적으로 비행기는 호기심의 대상이자 흥밋거리였다. 방사형 엔진(radial engine)의 발달과 기압 유지 장치 발명과 같은 기술의 진보가 발판이 되어 1930년대와 그 이후에 상업 여행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기차는 디젤전기 엔진의 개발로 더욱 빨라지고 효율적이 되었다. 전자, 가전, 플라스틱, 나일론과 같은 인조섬유, 알루미늄, 마그네슘, 석유, 전기, 그리고 다른 여러 산업이 기술의 진전에 힘입어 급속하게 성장했다.
- 1930년대 말, 미국에는 거의 6명당 1대꼴인 2,500만 대의 전화기가 있었다.
- 1930년대 초, 베너바 부시(Vannevar Bush)가 이끌던 MIT의 연구자는 다양한 복합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구, 즉 최초의 아날로그컴퓨터를 발명했다.
- 유전자 연구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수도사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이 수도원 정원에서 식물의 교배 실험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멘델의 발견은 그의 생존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20세기 초 여러 연구자가 그 연구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 미국에서 이 부문의 개척자 중 한 명이 컬럼비아 대학에 재직하다가 후에 칼텍(Cal Tech)으로 옮겨간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이었다. 그는 과실 파리(fruit flies)를 이용한 실험에서 여러 유전자가 어떻게 함께 유전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 그는 또 유전자가 염색체(chromosome)를 따라 배열된 방식을 찾아냈다. 그의 연구로 유전자가 어떻게 재결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기업가가 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을 완화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 것은 과잉생산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의 경제적 번영기에도, 기업가는 1893년, 1907년, 그리고 1920년에 너무 급속한 팽창과 과잉생산이 경기 후퇴를 가져왔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 1929년에 미국인의 3분의 2 이상이, 어떤 한 주요 연구에서 ‘최소한의 안락한 수준(minimum comfort level)’이라고 제시한 것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했다. 그들 중 반 정도는 ‘근근이 생활하는 빈곤 수준’ 또는 그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 1926년까지 거의 300만 명의 산업 노동자가 은퇴시에 최소한 약간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1929년 이후 경제가 위기를 맞게 되자, 복지 자본주의는 무너졌다.
- 대다수의 노동자는 노동비용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데만 주로 관심을 쏟는 고용주 밑에서 일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은 비율면에서 전반적 경제성장에 훨씬 못 미치는 정도로만 인상되었다. 연 수입 1,800달러는 되어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1920년 말엽, 노동자의 연 평균 소득은 1,500달러를 밑돌았다.
- 1920년에 500만이 넘었던 노조원의 수가 1929년에는 300만 명을 밑돌 정도로 줄어들었다.
- 1919년의 소요 이래, 기업계 지도자는 (어떤 노동자도 조합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개방 사업장(open shop)’을 유지하는 것이 민주적 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열렬히 주장했다.
- 많은 여성이 비서, 판매원, 전화교환원 등 서비스 업종에서 일했다. 그런 직종은 산업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노동총동맹을 비롯한 많은 노동조직은 이들을 조직화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만이 아니라 1914년 이후의 대이주기(Great Migration)에 남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50만에 이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조합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된 이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중국인 대신 일본인 이민자가 육체노동을 점점 더 많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철도 공사, 건설 현장과 농장 등 보수가 낮은 여러 직종에서 일했다.
- 캘리포니아에서는 1913년과 1920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계의 토지 구매를 더욱 어렵게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 외의 아시아인-특히 필리핀인-도 비숙련 노동직에 참여했고, 이는 미국인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캘리포니아에서 반(反)필리핀인 폭동이 일어나면서 1934년에는 필리핀인의 미국 이민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 멕시코계 이민자는 남서부와 캘리포니아 주 전역에서 비숙련 노동력의 상당 비중을 차지했다. 거의 50만 명에 달하는 멕시코인이 1920년대에 미국에 왔다. 이들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에 거주했으며, 1930년대에는 대다수가 도시에서 살았다.
- 트랙터에 예전의 불편했던 증기기관 대신 (자동차에서와 같은) 내연기관이 장착되자 1920년대 동안 미국 농촌에 보급된 트랙터 수는 4배로 증가했다. 이로 말미암아, 3,500만 에이커에 이르는 농토를 새로 경작하게 되었다.
- 옥수수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은 1921년에 이미 농민이 재배할 수는 있었으나, 10년 이상 대량으로 재배되지는 않았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도 발명되었으나 1920년대에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와서야 급속히 보급되었다.
- 그 결과 생산물이 남아돌자 식품 가격이 폭락했고, 농민 소득이 1920년대 초부터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10년도 안 돼, 300만 명 이상이 농사를 포기하고 완전히 떠났다.
- 농민이 특히 바란 것은 단일 가격 인상안(one price-raising scheme)이었다. 이는 ‘평형(parity)’ 개념에 기반을 둔 가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평형’이란 농업 생산물의 적정 가격을 정하는 복잡한 공식이었다. 그 목적은 국내 또는 세계의 농작물 시장이 크게 출렁이더라도, 농민이 최소한의 생산비는 받도록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 평형 가격을 법제화할 것을 요구하는 맥네리-호겐 법안(McNary-Haugen Bill)은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의회에 계속 제출되었다. 이 법안의 이름은 의회 내 중요한 후원자인 찰스 멕네리(Charles McNary) 상원 의원과 길버트 호겐(Gilbert Haugen) 하원 의원 두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26년과 1928년에 의회가 곡물, 면화, 담배, 쌀에 대하여 평형 가격을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쿨리지(Coolidge) 대통령은 이를 모두 거부했다.
- 1920년대의 도시적이며 소비 지향적인 문화가 퍼지자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미국인이 점차 비슷한 생활 방식에 따라 살아가고 비슷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동질적 문화로 인해 미국인은 새로운 가치관을 접하게 되었다.
- 1920년대의 미국은 소비사회였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단지 필요해서가 아니라, 편의와 쾌락을 추구하려고 상품을 구매했다.
- 무엇보다도 먼저 자동차를 샀고, 1920년대 말엽에는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1920년대에 들어와 광고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에는 전시(戰時) 선전술의 발달에 힘입은 면이 있다. 광고업자는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특정 생활양식과 동일화하려 했다. 이들은 또한 대중이 광고와 세일즈맨의 가치를 알고, 효과적인 광고와 광고인을 높이 평가하도록 부추겼다.
- 신문은 전국적 유통망을 통해 보급되었고, 잡지는 대량 유통되어 전국의 독자를 매혹시켰다. 영화는 좀 더 대중적이며 강력한 대중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 영화 관람자가 1922년에는 4,000만 명이었으나, 1930년에는 1억 명을 넘어섰다.
- 미국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은 1920년에 방송을 시작한 피츠버그(Pittsburgh)의 케이 디 케이 에이(KDKA)였고, 최초의 전국적 라디오 네트워크는 1927년에 설립된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였다.
- 1920년대에 점점 풍요해지고 소비주의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새로운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소비 시대의 특징적 병증으로서 ‘불안’과 ‘소외’가 생겼고, 이와 동시에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신이론이 등장했다.
- 프로이트가 개척하고 융이 발전시킨 정신분석은 1912년 초 미국의 동조자를 매혹시켰고, 1920년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Siegmund Freud)와 칼 융(Carl Jung)
- 정신의학은 의학 분야의 일부분으로서 가장 많이 성장했다. 초기에 정신의학자는 대개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정신병원이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곳에서 주로 만성적 질병을 가진 이들(그들 중 다수가 노인)이 무기한 거주하는 곳으로 바뀌어가자, 정신의학자는 곧 일반 병원으로 옮기거나 개인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 20세기 초에 ‘역동적(dynamic)’ 정신의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여, 1920년대에 심각한 정신적 혼란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근심도 치료해주게 되었다.
-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처음부터 그 어떤 의학 분야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야였다. 그것은 심리학과의 실습이 여성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직종-교육, 사회사업, 간호-에서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학 실습을 받은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우위인 다른 의학 분야보다 정신의학 분야에 진출하기가 더 쉬웠다.
- 1920년대에는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이 더 이상 선구자가 아니었다. 그때에는 이미 2세대, 3세대에 걸쳐 배출된 여자 대학 또는 남녀공학 대학 졸업생이 있었고, 이전에는 여성이 거의 진출할 수 없었던 전문 분야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이도 있었다. 1920년대의 ‘신 전문직 여성(new professional woman)’은 널리 선전된 이미지였다. 그러나 사실 취업 여성의 대다수는 비전문직이나 하층계급 노동 등에 종사했고, 중간계급 여성은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존 왓슨과 ‘행동주의자’라는 유력한 심리학자 그룹은 여성이 어머니로서의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전통적인 사고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 미국 산아제한의 선구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는 노동계급 여성에 대한 관심에서 페서리와 그 외의 여러 가지 피임법을 널리 전했다. 그녀는 많은 빈곤층 가정이 빈곤과 절망에 빠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에 생어는 중간계급 여성에게 산아제한의 혜택을 알리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부 피임법은 많은 주에서 불법이었다(낙태는 거의 모든 곳에서 불법이었다).
- 해방된 삶의 방식을 의상, 머리 모양, 말투와 행동을 통해 표출하는 현대 여성인 ‘플래퍼(flapper)’
- 여성 운동가들은 1921년에 셰퍼드-타우너법(Sheppard-Towner Act)을 통과시키는 작은 승리를 맛보았다. 이는 태아와 어린이의 건강 관리 프로그램을 위하여 연방정부의 자금을 각 주에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 앨리스 폴과 지지자들은 이 법안에서 모든 여성을 어머니로 분류한 것에 항의하며, 반대했다. 더욱 심각한 일은 미국 의학 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셰퍼드-타우너법이 실시되면 건강 관리 분야에 훈련받지 못한 이들이 개입하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반대한 것이다. 1929년, 의회는 이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 소설가인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1925)에서 물질적 성공에 집착하는 미국인을 비난했다.
- 신세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은 뉴욕 시에서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라고 널리 알려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를 창조했다. 할렘의 시인, 소설가, 그리고 예술가 들은 그들의 인종적 유산이 풍성함을 증명하기 위해 아프리카적 뿌리로부터 많은 영감을 끌어왔다.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는 이 운동의 정신을 다음의 한 마디로 표현했다. “나는 흑인(Negro)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 1920년 1월에 주류 판매와 제조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효되자, 중간계급과 혁신주의자로 자처하던 사람 대다수는 이를 지지했다.
- 금주법이 시행되자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음주가 상당히 줄어들긴 했으나, 그와 함께 위법 사태도 속출했다. 오래지 않아, 과거에 합법적으로 주류를 구했던 것처럼, 미국의 많은 곳에서 불법 주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합법적 기업가가 거대하고 이윤이 많은 주류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범죄 조직이 그 사업을 인수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금주 반대자(또는 ‘음주자’)는 서서히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1933년, 대공황이 일어나 금주 반대자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자, 마침내 ‘금주론자(drys)’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헌법 수정 조항 18조를 폐지할 수도 있었다.
- 1921년, 의회는 긴급 이민법을 통과시켜, 어느 나라든 연간 이민자 수를 1910년에 미국에서 거주했던 그 나라 국적인(國籍人) 총 수의 3퍼센트를 넘기지 못한다는 쿼터제를 만들었다. 이 새 법으로 연간 허용 이민자가 8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축소되었으나, 토착주의자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1924년에 국적 기원법(National Origins Act)이 실시되자 동아시아의 미국 이민은 완전히 금지되었고, 유럽인의 쿼터도 3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감축되었다.
- 쿼터를 1910년의 인구조사가 아니라, 미국에 거주하는 동부와 남부 유럽인이 훨씬 적었던 때인 1890년의 인구조사에 기반을 두게 했다. 달리 말하면, 북서부 유럽인의 이민을 매우 선호한 것이었다. 5년 후에는 또 다른 제약을 가해 연간 이민자 수를 15만 명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그 후 이민국 관리는 미국에 실제로 입국하려는 이들 중 거의 절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지방적 토착주의는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이 미국 사회의 중요한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게 했다. 재건기에 성립되었던 최초의 클랜은 1870년대에 사라졌다. 그러나 1915년에 남부 백인으로 구성된 집단이 애틀랜타 근교 스톤 마운틴(Stone Mountain)에서 집회를 갖고 현대적 형태의 클랜을 새로이 조직했다.
- 1915년, 그리피스(D. W. Griffith)가 만든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에는 초기 클랜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 영화의 시사회(애틀랜타에서도 개최됨)를 본 남부 백인은 새로운 클랜에 가담하도록 고무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흑인보다는 가톨릭교도, 유대인, 그리고 외국인에 관심이 점점 커졌다. 이때를 즈음하여 클랜의 조직원 수는 남부의 작은 마을과 농촌 지역뿐만 아니라, 북부와 중서부의 여러 산업도시에서도 급속하게, 또 엄청나게 늘어갔다. 1924년에는 많은 여성을 포함하여 회원이 400만에 달했고, 회원은 별도의 병행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다.
- 1921년에 미국의 개신교(Protestantism)는 이미 두 개의 서로 적대적인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에는 도시의 중간계급에 속하는 모더니스트(modernists)가 있었다. 그들은 종교를 현대 과학의 가르침과 현대적이며 세속적인 사회의 실제 상황에 맞추려고 했다. 또 다른 한편에는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s)가 있었는데, 그들은 지방 중심적(provincial)이며, 대개 농촌 지역에 거주하면서 전통적 가치관을 지키고, 미국인의 생활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유지하려고 투쟁했다.
-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서의 창조론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반대했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을 요구하면서 근본주의가 몇몇 주에서 정치적 세력을 더해 가자, 모더니스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25년 3월, 테네시(Tennessee) 주 의회는 모든 공립학교 교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에 반하는 어떠한 이론도 가르칠 수 없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 익숙한 삶의 양식을 수호하려는 지방 중심적(provincial) 미국인의 고뇌는 1920년대에 특히 민주당에 타격을 주었다.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더 다양한 이익집단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이 같은 이익집단의 한편에는 금주론자, 클랜 조직원과 근본주의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가톨릭 신자, 도시 노동자, 그리고 이민자가 있었다.
- 도시 지역 민주당원은 뉴욕 주의 주지사이자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인 알프레드 스미스(Alfred E. Smith)를 지지했다. 이에 반해, 농촌 지역 민주당원은 우드로 윌슨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매카두(William McAdoo)를 지원했고, 매카두는 현대 도시 생활에 의혹을 품고 있던 남부와 서부 하원 의원의 지지를 받도록 자신의 입장을 교묘하게 정했다. 전당대회는 103표를 얻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결국 스미스와 매카두 둘 다 후보 철회를 하고서야 민주당은 타협하여 대통령 후보로 기업 변호사인 존 데이비스(John E. Davis)를 지명했다.
- 1928년, 알 스미스(Al Smith)가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을 때, 민주당은 또다시 비슷한 분열을 겪게 되었다.
- 스미스의 상대자로 대통령 선거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는 새로운 시대의 현대적이며 번영하는 중간계급 사회의 전형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였다.
- 1921년 초부터 12년간 대통령직과 의회는 공화당의 수중에 있었다.
- 하딩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도와준 정당꾼을 쫓아낼 힘이 없었다. 하딩은 정당꾼 중 오하이오 주 공화당 당수인 해리 도허티(Harry Daugherty)를 법무부 장관으로, 뉴멕시코 주 상원 의원 앨버트 훨(Albert B. Fall)을 국토관리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소위 오하이오 패거리(Ohio Gang)가 행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 가장 큰 규모의 스캔들은 와이오밍 주의 티팟 돔(Teapot Dome)과 캘리포니아 주의 엘크 힐즈(Elk Hills)에 있는 풍부한 해양 유류 저장소와 연관된 것이었다. 하딩은 훨의 권고에 따라 이들 저장소 감독권을 해군부에서 국토관리부로 이관했다. 그러고 나서 훨은 이 감독권을 부유한 기업가 두 명에게 임대했고, 그 대가로 거의 50만 달러에 이르는 ‘대부’를 받아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했다. 훨은 결국 뇌물죄로 기소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해리 도허티는 또 다른 스캔들에 연루되어 훨과 거의 같은 운명을 맞이할 뻔했다.
- 1923년 여름, 상원 조사와 언론이 그 스캔들을 폭로하기 한 달 전에 지치고 우울한 하딩은 서부 순회 연설을 하러 워싱턴을 떠났다. 7월 말, 시애틀에서 하딩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주치의는 식중독으로 오진했다. 며칠 후, 그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두 번 일으켰고, 결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는 여러 면에서 선임자와 매우 달랐다. 하딩이 다정하고 수다스러우며 퇴폐적이었다면, 쿨리지는 완고하고 조용하며 청교도적이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하딩과 쿨리지는 비슷했다. 두 사람 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직을 소극적으로 수행했다.
- 쿨리지는 대통령으로서 하딩보다도 더 소극적이었다. 이는 쿨리지가 국민의 생활에 정부는 가능한 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 그는 거의 아무런 반대 없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고, 존 데이비스(John W. Davis)를 상대로 안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일반투표에서 54퍼센트의 지지를 얻었고, 531명의 선거인단 투표 중 382표를 획득했다. 쿨리지는 1928년 선거에 나섰다면 재지명을 받고 재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쿨리지는 그 대신 어느 날 기자 회견실에 들어와 기자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그의 특징인 간결한 방식으로, “나는 1928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 내각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상무부 장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였다. 후버는 상무부를 맡고 있던 8년간, 민간 부분의 자발적 협력을 안정을 이루는 최고의 방편으로 보고 이를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 일부 혁신주의자는 1928년 허버트 후버의 대통령 당선에 고무되었다. 후버는 민주당 후보였던 알 스미스를 쉽게 이겼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담하고 새로운 시도를 약속하며 대통령직에 올랐다.
- 취임 후 1년도 못 되어, 미국은 역사상 가장 심각하고 장기적인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위기로 인해 새로운 시대에 대해 품고 있던 낙관적인 희망이 대부분 깨졌고, 미국은 전례 없는 사회적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 미국 산업사에 있어 1920년대의 번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널리 확산되었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성장의 진정한 혜택을 조금도 맛볼 수 없었다. 수백만의 도시 중간계급은 새롭고 낙관적이며 세속적인 문화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미국인은 새로운 문화에 경악했으며, 대단한 열정으로 그에 맞서 싸웠다.
- 1928년 2월, 주가는 1년 반 동안 몇 번만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보였을 뿐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1928년 5월과 1929년 9월 사이, 평균 주가는 40퍼센트 이상 올랐다. 주식 거래량은 하루에 2∼300만 주에서 500만 주가 넘었고, 때로는 1,000만 주나 2,000만 주까지 이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증권회사가 주식 투자자에게 터무니없이 쉽게 신용 대부를 해주며 부추기자 투기 열풍이 점점 더 심해지고 확산되었던 것이다.
- 1929년 가을, 주식시장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불안이 점점 커져가던 일주일이 지난 후, ‘암흑의 화요일(Black Tuesday)’이라는 10월 29일, 주식시장을 살리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주식 1,600만 주가 거래되었고, 산업 지수는 거의 10퍼센트에 달하는 43포인트가 떨어져 그 전해의 상승분을 다 상쇄해버렸다. 많은 회사의 주식이 거의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주식 가치는 9월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 그 후로 몇 년간 주가는 계속 하락했다.
- 첫째 요인은 1920년대 미국 경제에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경제적 번영은 건설업과 자동차 산업과 같은 몇몇 기초산업에 특히 심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산업은 1920년대 후반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건설에 대한 지출이 1926년과 1929년 사이에 110억 달러에서 90억 달러로 감소했고, 자동차 판매는 1929년 1월부터 9월까지 3분의 1 정도 감소했다. 석유·화학·전자·플라스틱 공업 등에서 새로 등장한 산업이 불황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다른 부문의 감소를 보충할 정도의 능력은 아니었다. 둘째로 중요한 요인은 구매력이 잘 분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소비자 수요를 창출하기 어려웠다. 산업과 농업 생산이 증가하면서, 잠재적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비율이 너무 낮아, 경제가 생산하고 있던 상품에 대한 충분한 시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거의 10년 동안이나 경제가 성장했지만 1929년에 미국 가정의 절반 이상이 최저 생계 수준이나 그 이하로 살았다. 셋째로 중요한 문제는 경제의 신용 구조였다. 농민은 빚을 많이 지고 있었으나, 경작물 가격은 너무 낮아 빚을 청산할 수도 없었다. 소규모 은행은 고객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지속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고, 거대 은행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미국 은행 대다수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미국의 최대 은행 중 몇몇은 주식시장에 무모하게 투자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대부를 해주고 있었다.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대부가 불량 채권화하자, 일부 은행은 파산했고, 그 외 은행은 이미 희소해진 신용 대부를 더 긴축하거나 채무자가 갚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대부금을 회수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
- 넷째 요인은 국제 무역에 있어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였다. 1920년대 후반, 유럽에서 미국 상품의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럽의 산업과 농업 생산이 이전보다 많아졌기 때문이었으며, 또 몇몇의 유럽 국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해외에서 물자를 구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유럽 경제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국제적 채무 구조를 지게 되어 안정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중요한 요인은 국제적 채무 구조였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과 연합했던 모든 유럽 국가는 미국 은행에 거대한 규모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액수가 너무 커, 그들의 산산조각난 경제로는 지불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연합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주장했던 한 가지 이유였다. 이들은 배상금을 받으면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이 빚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채무 탕감이나 축소를 거부했다. 그 대신 미국 은행들은 유럽 정부에게 대규모의 대부를 제공하여 그들이 이전에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러므로 빚과 배상금은 더 큰 빚을 새로 져야만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이 보호관세를 실시하여 유럽 국가는 미국 시장에 상품을 판매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유럽 국가가 외국과의 거래 또는 교역 없이 채무를 갚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국제 신용 구조의 붕괴가 1931년 이후 유럽에 대공황이 파급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 1930년에서 1933년까지 9,000개가 넘는 미국 은행이 도산하거나, 도산을 피하기 위해 폐업했다. 부분적으로는 은행 폐쇄의 결과, 국가의 총통화 공급이 1930년과 1933년 사이에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 통화 공급이 감소하자 구매력이 감소하고 물가가 하락했다. 제조업자와 상인은 가격을 낮추고, 생산을 감축하며, 노동자를 해고하기 시작했다.
- 1931년 후반, 이자율을 높여 달러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쌓으려던 잘못된 시도로 인하여 통화 공급은 더 감소되었다.
-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1929년에 1,040억 달러가 넘었으나, 1932년에는 764억 달러로, 3년 사이에 25퍼센트나 감소했다. 당시의 대략적인 추산에 따르면, 1932년에 미국 노동자의 25퍼센트가 실업 상태였다(어떤 이들은 이 수치가 훨씬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 후 1930년대 말까지 실업률은 거의 평균 20퍼센트를 유지하며, 15퍼센트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고용 노동자의 3분의 1 정도는 임금과 노동시간, 또는 두 가지 모두가 상당히 감소한 ‘불완전고용(underemployed)’ 상태에 있었다.
- 1932년에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Cleveland)는 50퍼센트, 애이크런(Akron)은 60퍼센트, 톨리도(Toledo)는 80퍼센트에 이르는 실업률을 기록했다.
- 농가 소득은 1929년과 1932년 사이 60퍼센트 감소했고, 미국 전체 농민의 3분의 1이 토지를 잃었다. 게다가 대평원(Great Plains)에 있는 대규모의 농업 정착 지역은 대격변적 자연 재앙이며 미국 역사상 최악의 가뭄 중 하나인 대가뭄 때문에 고통받았다. 텍사스 주에서 북쪽으로 다코타 주까지 펼쳐진 ‘황진지대(Dust Bowl)’는 1930년부터 강우량이 점차 감소하고, 그 반면 열사량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가뭄이 10년간 지속되자, 한때 비옥했던 농업 지역이 거의 사막으로 변해 버렸다.
- 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흑인의 반 이상이 여전히 남부에서 살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면화와 다른 주요 작물의 가격이 폭락하여 소득을 거의 올리지 못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선택하거나, 또는 소작제가 더 이상은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주에게 쫓겨나 농토를 떠나갔다.
- 백인 실업자는 어떠한 일거리이든 자신들이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과거에 흑인이 담당했던 청소부, 도로 청소원, 가내 하인 등의 일거리까지 흑인들 대신 맡기 시작했다. 1932년까지 남부에서 흑인의 반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 1930년대에 남부에 있던 흑인 중 대략 40만 명이 남부를 등지고 북부 도시로 떠나갔다. 그러나 그 곳의 상황도 남부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흑인 실업률은 뉴욕의 경우 거의 50퍼센트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에서는 더 높았다. 전미 흑인 인구의 절반 정도인 200만 명의 아프리카계 흑인이 1932년까지 어떤 형태로든 구호에 의존하고 있었다.
- 스카츠보로(Scottsboro) 사건이었다. 1931년 3월, 화물 기차를 타고 있던 흑인 10대 소년 9명이 북부 앨라배마 주의 스카츠보로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부랑과 질서 파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후, 그 기차에 타고 있었던 두 명의 백인 여성이 흑인 소년들을 강간죄로 고발했다. 사실, 그 여성들이 전혀 강간당하지 않았다는 의학적인 증거와 여타 증거가 충분히 있었다. 이 여성은 자신들도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 고발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백인만으로 구성된 앨라배마의 배심원은 ‘스카츠보로 소년’ 9명 모두를 신속하게 기소했고, 그중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대법원이 1932년에 기소를 뒤집고, 재판을 새로 시작했다. 국제 노동 수호(International Labor Defense)라는 공산당과 연계된 조직이 기소된 소년들을 지원하러 왔고 이 사건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남부의 백인 배심원이 피고인 중 누구의 무죄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자유를 얻었다. 스카츠보로 피고인 중 한 소년만이 1950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도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다.
- 20세기 초부터 캘리포니아와 남서부의 다른 지역에 멕시코 이민자가 대대적으로 들어오면서 미국의 히스패닉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치카노(Chicanos, 멕시코계 미국인을 종종 이렇게 불렀다)는 다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흑인이 담당해왔던 미천한 직종에서 많이 일했다.
- 남서부의 백인 실업자는 과거에는 백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히스패닉이 차지했던 일자리를 빼앗았다. 그러므로 멕시코인의 실업은 백인보다 훨씬 높은 수준까지 급속히 늘어났다.
- 아시아계 미국인은 공황 때문에 오랫동안 차별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더욱 소외되었다.
- 흑인과 히스패닉과 마찬가지로, 아시아계도 종종 직업 찾기에 골몰하던 백인에게 일자리를 뺏겼다.
- 경제적 위기가 일어나자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 적절하다는 널리 퍼진 신념이 여러 면으로 강화되었다.
- 남편이 취업하고 있을 때는 여성이 일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했다. 실제로 1932년에서 1937년까지 한 가족당 두 명 이상이 연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 대공황이 끝날 때쯤에는, 공황이 시작될 때보다 여성의 취업이 25퍼센트나 늘어났다.
- 실직한 남성이 과거에는 여성의 분야로 간주되던 직종으로 옮겨가자 여성은 전문직을 가질 기회가 줄었다. 여성 산업 노동자는 그들과 같은 자격을 가진 남성보다 해고되거나 임금이 감소되기 쉬웠다.
- 흑인 여성은 특히 남부에서 하녀일이 상당히 감소하자, 대량 실업을 겪게 되었다. 1930년대에 흑인 여성 노동자의 거의 반 정도가 일자리를 잃었다. 그렇기는 해도 1930년대 말에 백인 여성의 취업률이 24퍼센트였던 것에 비해 흑인 여성의 38퍼센트는 취업하고 있었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백인 여성보다 흑인 여성은 개인적 선호보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일해야 했다.
- 이혼율은 감소했으나, 이것은 대개의 경우, 이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직 남성이 생활비를 벌 수 없는 치욕을 벗어나려고 가족을 버리는 경우와 같은 비공식적인 가족해체가 특히 흔했다. 결혼률과 출생률 모두 19세기 초 이래 처음으로 감소했다.
- 1930년대에 가장 폭넓은 청중을 끌었던 문화적 산물은 대공황에서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리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1930년대 대중문화의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도구였던 라디오와 영화를 통해 주로 제공되었다.
- 1930년대에는 거의 모든 미국인 가정에 라디오가 한 대씩 있었다. 도시와 마을 곳곳에서 라디오 콘솔
-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외떨어진 시골에서도 많은 가정이 라디오를 구매하였고, 라디오를 듣고 싶을 때는 자동차 배터리에 연결했다.
- 라디오 방송국이 종종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도발적인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지만, 방송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현실 도피주의였다. 그것은 〈에이머스 앤 앤디(Amos n’ Andy)〉와 같은 코미디, 〈슈퍼맨(Superman)〉이나 〈딕 트레이시(Dick Tracy)〉, 〈외로운 방랑자(The Lone Ranger)〉와 같은 모험물, 그리고 기타 오락 프로그램 등이었다.
- 미국인은 중요한 공적 사건을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었고, 라디오 뉴스와 스포츠 부문이 수요의 증가에 따라 급속히 성장했다. 1930년대의 가장 극적인 순간 몇 가지는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아카데미상 수상식(Academy Awards), 정치 집회와 같은 유명한 사건을 라디오에서 방송하였기 때문이었다. 1937년 뉴저지 주의 레이크허스트(Lakehurst)에서 독일 비행선 힌덴부르크호(Hindenburg)가 폭발했을 때, 한 방송인이 감정을 자제하며 그 잔혹한 폭발 사태를 생생하게 보도하여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 공황이 발발했던 첫해에 영화 관람자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이 되면서 대부분의 미국인은 다시 영화를 보러 가기 시작했다. 이는 컬러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좀 더 흥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스튜디오 시스템은 소수의 대형 영화사가 배우, 작가, 그리고 감독에게 철권 통제를 행사하여 할리우드 영화가 어떠한 논란도 일으키지 않도록 막았다
- 사회적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한 것은 이탈리아 태생의 명석한 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였다.
- 1930년대에 월트 디즈니(Walt Disney)는 만화와 어린이를 위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일인자로 군림했다. 1920년대 후반,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라는 새로이 창조된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극장 상영용 단편 만화영화를 제작한 이후, 1937년에는 〈백설공주(Snow White)〉로 장편영화 길이의 만화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매우 인기 있었던 또 다른 영화는 1939년에 개봉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등과 같이 인기 소설을 각색한 것이었다.
- 할리우드는 성과 인종 문제에 있어서 대중문화의 관례에 거의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부분 가정주부와 어머니, 아니면 성적으로 매력 있어 남자와 복잡한 연애에 바쁜 이로 그려졌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한 대부분의 흑인 남성과 여성은 하인이나 농장 일꾼, 또는 연예인 역할을 맡았다.
- 대공황이 낳은 사회적, 정치적 긴장은 라디오 방송이나 영화보다는 인쇄 매체를 통해 더 잘 제시되었다. 1930년대의 문학과 언론은 당시 사람들이 갖던 엄청난 환멸감과 점증하던 급진주의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다루었다.
- 1930년대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했던 소설 중 2편이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1936)와 허비 앨런(Hervey Allen)의 《불운의 앤소니(Anthony Adverse)》(1933)였으며, 이는 이전 시대를 무대로 한 낭만적 서사시였다.
- 1936년 창간된 《라이프(Life)》는 사진을 주로 싣는 잡지로 매우 인기를 끌었고, 미국의 모든 간행물 중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를 제외하고 독자가 제일 많았다.
- 좌파의 ‘반(反)파시스트’ 그룹의 광범위한 연합, 즉 인민전선(Popular Front)이 등장
- 이 중 가장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 미국 공산당(American Communist Party)이었다. 미국 공산당은 미국 자본주의와 그 자본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정부에 대해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비판자였다. 그러나 1935년 소련의 지시로 공산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에 대한 태도를 완화했고(이제 스탈린은 히틀러에 대항하는 앞으로의 전투에서 루스벨트를 잠재적인 동맹으로 간주했다), 많은 다른 ‘진보적’ 단체와 느슨한 동맹을 맺었다. 공산당은 루스벨트의 뉴딜(New Deal) 정책과 강력한 노동 지도자이자 강력한 반공산주의자였던 존 루이스(John L. Lewis)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는 20세기의 미국주의(Communism is twentieth century Americanism)’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인민전선은 그 전성기에 공산당에 대한 평판과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이는 또 비판적이며 민주적인 민감성을 앞세워, 작가와 예술가와 지식인을 동원하는 데 지원했다.
- 1930년대 중반의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미국 지식인에게 중요한 의미였으며, 이는 얼마나 좌파가 개인의 삶에 사명감과 목표 의식을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기존의 공화정부에 대항했던 전쟁이었다.
- 3,000명이 넘는 미국 청년이 ‘에이브러햄 링컨 군단(Abraham Lincoln Brigade)’을 조직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 전쟁에 참가하려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미국 공산당은 링컨 군단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들의 활동 중 많은 부분을 지도했다.
- 그러나 개방적이며 애국적인 조직으로 보이려고 노력했음에도, 미국 공산당은 항상 소련의 면밀하고도 엄격한 감시하에 있었다. 대다수의 당원은 (비록 당 노선이 없었던 것에 대해 적극적 활동을 벌였던 경우도 있고, 당원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분야도 있지만) ‘당 노선(party line)’에 복종하며 따랐다. 소련에 대한 당 지도부의 복종은 1939년 스탈린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nonaggression pact)에 서명했을 때 명백히 드러났다. 그러자 모스크바는 미국 공산당에 인민전선을 포기하고 미국 자유주의자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과거의 자세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환멸을 느낀 수천 명의 당원이 당을 떠났지만, 미국 공산당 지도자는 즉각적으로 이에 복종했다.
- 뉴딜은 1920년대의 자본주의적 상식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사업 계획청(Works Projects Administration, WPA)을 통해 예술 작업을 지원했다. 영화 제작자 패어 로렌즈(Pare Lorenz)는 뉴딜 기구의 지원을 받아, 일련의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가 만든 〈평원을 부숴버린 쟁기(The Plow that Broke the Plains)〉(1936)와 〈강(The River)〉(1937)이라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는 뉴딜 프로그램에 대한 찬미와 산업 자본주의가 산출해낸 인간과 환경의 착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통합되어 있었다.
- 1930년대의 사회 상황을 가장 성공적으로 기록한 사람은 아마도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며, 특히 1939년에 출판된 그의 유명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당시의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 대공황에 대한 후버의 첫 번째 대응은 경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1930년에 후버는 “미국의 기본 산업, 즉 상품생산과 분배는 건전하고 융성하는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 다음 후버는 기업·노동·농업 지도자 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경기회복을 위해 자발적인 협조 프로그램을 채택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기업가가 생산을 감축하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에 불만을 표했고, 노동 지도자에게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감축 등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1931년 중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어 그가 수립해놓은 자발적 협조 구조는 무너졌다.
- 대통령은 연방이 지원하는 공공사업 프로그램에 당시의 기준으로 엄청난 액수였던 4억 2,300백만 달러 증액을 의회에 제안했고, 주 정부와 지방 정부도 공공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지출로는 악화되어가는 문제를 해소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 증권시장이 붕괴하기 전에도 후버는 이미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던 농촌 경제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 4월에는 농작물 판매법(Agricultural Marketing Act), 즉 농민이 가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요 정부 기구가 지원하는 최초의 법을 제안했다. 연방이 지원하는 농장 위원회(Farm Board)는 전국 판매 협동체에 대부를 해주거나, 잉여분을 구매하여 가격 상승을 유도할 기업을 창설하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후버는 농작물에 대한 관세를 올려 국제적 경쟁으로부터 미국의 농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1930년의 홀리-스무트 관세법(Hawley-Smoot Tariff)에는 75개 농산품에 대한 보호관세의 인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농작물 판매법도, 홀리-스무트 관세법도 결국에는 미국의 농민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 1930년 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지배하게 되었고, 상원에서도 상당한 의석을 확보했다. 많은 미국인은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이 같은 위기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고, 실직자가 도시 외곽에 설립한 판자촌을 ‘후버빌(Hoovervilles)’이라고 이름 붙였다. 민주당원은 대통령이 구호와 공공 지출에 대한 더 강력한 프로그램을 지지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후버는 그렇게 하는 대신, 1931년 초에 경제 상황이 약간 향상되자, 이를 자신이 만든 정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했다.
- 1931년 봄에 일어난 국제적 금융공황은 경제적 위기가 끝나 간다는 환상을 깨버렸다.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유럽 국가는 채무를 갚기 위해 미국 은행의 대부에 의존하고 있었다. 1929년 이후에 대부를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몇몇 유럽 국가의 금융 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의 최대 은행이 파산했다. 그 후 수개월간, 공황은 인접 국가의 금융기관의 발을 묶어버렸다. 미국 경제도 급격히 새로운 저점으로 떨어졌다. 의회가 1931년 12월에 소집되었을 때, 상황은 더 절박해져서 후버는 위기에 빠진 은행이 파산하지 않도록 막고, 가옥 소유자가 저당물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법안을 지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은행과 철도, 그리고 기타 다른 기업에게 연방의 대부를 제공할 목적을 가진 정부 기구인 재건 금융 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 RFC)를 설립하는 법안이 1932년 1월에 통과된 것이었다. 이전의 몇몇 후버 프로그램과는 달리, 이는 대규모로 시행되었다. 1932년, 재건 금융 공사는 공공사업만을 위해 15억 달러의 예산을 마련했다.
- 재건 금융 공사는 담보가 충분한 금융기관에게만 자금을 빌려주어, 대부분의 자금은 큰 은행과 기업에만 돌아갔다. 재건 금융 공사는 후버의 주장에 따라 갚을 능력이 확실히 있는 공공사업 프로젝트(유료도로, 공공 숙박 등)에만 자금을 대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기구는 대공황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이 없었고, 게다가 보유하고 있던 자금을 전부 사용하지도 않았다.
- 1932년 여름, 불만을 가진 농장 소유자가 아이오와 주의 디모인(Des Moines)에 모여 새로운 조직인 농민 휴업 협회(Farmers’ Holiday Association)를 설립했고, 시장에 농업 생산물을 출하하지 않을 것, 즉 사실상 농민의 파업을 승인했다. 파업은 8월에 서부 아이오와 주에서 시작되어 곧 인접 지역 몇 곳으로 퍼져나갔고 시장 몇 개를 폐쇄시켰으나, 결국 실패하여 해산했다.
- 1924년에 의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들에게 1천 달러의 보너스 지급을 승인했고, 1945년 초부터 지급되도록 했다. 그러나 1932년, 많은 퇴역 군인은 보너스를 즉시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후버는 정부 예산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6월에 자칭 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 또는 보너스 군대(Bonus Army)의 회원인, 2만 명이 넘는 퇴역 군인이 워싱턴으로 행진해 들어와 도시 주위에 조악한 캠프를 세우고, 의회가 보너스 지불 법안을 승인할 때까지 있겠다고 공언했다. 의회에서 그들의 제안을 부결하자 이들 중 몇몇은 떠났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미국 퇴역 군인(American Veterans)
- 결국, 7월 중순에 후버는 몇몇의 버려진 연방 건물에 머물고 있는 행진자를 몰아내라고 경찰에 명령했다. 행진자 중 몇몇은 경찰에게 돌을 던졌고 어떤 이는 불을 질렀으며, 두 명의 퇴역 군인은 추락사했다. 후버는 이 사건을 통제되지 않은 폭력과 급진주의의 증거로 간주하여 미 육군에 경찰을 도와 이들을 연방 건물에서 몰아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육군 참모 총장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그 임무를 대통령의 명령 이상으로 수행했다. 그는 제3기병대와 두 개의 보병 연대, 기관총 분대와 6대의 탱크를 이끌고 보너스 군대를 쫓아 펜실배니아 주 애비뉴로 내려왔다. 퇴역 군인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맥아더는 애나코스티아 강(Anacostia River)을 건너 그들을 추적했고, 텐트를 불 질러 없애라고 군인에게 명령했다. 행진자 중 1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 위대한 엔지니어이자 1920년대 낙관적 시대의 체현이었던 후버는 미국의 경악할 만한 운세를 반전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미국의 실패를 상징하게 되었다.
- 공화당은 의무적으로 허버트 후버가 재임하도록 재지명했으나, 후버가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은 대의원은 거의 없었다. 민주당원은 환호하며 시카고에 모여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를 지명했다.
- 루스벨트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당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허드슨 계곡(Hudson Valley)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친척이며, 잘 생기고 매력적인 젊은이였던 그는 급부상했다. 뉴욕 주 의회 의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우드로 윌슨 정부의 해군부 차관이 되었고, 1920년에는 운이 따라주지 못했던 제임스 콕스(James M. Cox)의 러닝메이트가 되면서 그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어 왔다. 그 후 1년도 못 돼 그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는 비록 다시는 지팡이와 버팀대가 없이 걸을 수는 없었지만, 1928년에 정치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충분히 회복했다. 알 스미스가 그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자 루스벨트는 주지사로 그를 계승했다. 1930년, 루스벨트는 손쉽게 재선되었다. 루스벨트는 뉴욕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으나, 자신을 후버보다 더 정력적이고 상상력 있는 지도자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적극적인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는 전국적 정치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문화적 이슈를 피했고, 민주당원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경제적 고통을 강조했다. 그 결과 그는 당내에서 폭넓은 연합을 이끌어냈고, 당의 지명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을 극적으로 깨뜨리고, 전당대회에서 직접 연설하러 시카고로 날아가서 후보 지명을 받아들였다.
- 취임하기 한 달 전인 2월에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붕괴되며 새로운 위기가 전개되었다. 예금자는 놀라서 돈을 인출했으며, 은행은 연차적으로 문을 닫고 파산을 선언했다.
- 대공황이 미국 사회와 문화의 많은 부분을 흔들었지만, 실제로 전복시킨 것은 거의 없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일시적으로 손상을 입었지만 결코 진정으로 위태로운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으며, 결국 살아남았다. 물질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관도 흔들렸지만, 전복되지는 않았다.
- 대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미국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였으며, 미국 경제의 붕괴는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1931년에 이르자 미국의 공황은 세계공황이 되었고, 이는 세계사의 진행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 세계적 공황의 기원은 미국이 유럽 국가에게 수십 억의 자금을 대부해주었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한 채무 구조에 있었다. 1931년에 미국의 은행이 흔들리고 또 다수가 붕괴되자, 뉴욕의 거대 은행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대부금을 전력을 다하여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이 붕괴했고, 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중부 유럽의 많은 곳에 공황 상태가 일어났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경제가 붕괴하자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정해진 영국과 프랑스에 주어야 할 패전 배상금을 계속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또 순차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 갚아야 할 대부금을 계속해서 갚을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확산된 재정 위기는 부분적으로는 미국 역사상 최고율의 수입세를 설정하고 국제 간 교역을 상당 정도 악화시켰던 홀리-스무트 관세법(Hawley-Smoot Tariff)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전 세계적 과잉생산의 결과 농산물 가격이 하락한 것도 이 같은 경제 하강에 기여했다. 1932년까지 세계의 산업 생산은 3분의 1 이상 감소했고, 국제 간 교역은 거의 3분의 2로 축소되었다. 1933년에 이르러 산업국가에서 3,0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는 4년 전보다 5배나 되는 것이었다.
-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와 국가는 산업국가에게 원자재와 농산물을 수출하는 데 매우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산물에 대한 수요가 극히 감소하자 빈곤과 실업이 악화되었다. 소련과 중국을 포함하여 일부 국가는 세계경제와의 연계성이 비교적 적었고, 그리하여 대공황으로 인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공황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 공황으로 가장 격심한 타격을 입은 국가는 독일로, 1930년대 초 독일의 산업 생산은 50퍼센트가 감소했고, 실업률은 35퍼센트에 이르렀다. 독일은 절망적인 경제 상황으로 인해 나치당과, 1933년에 수상이 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부상했다. 일본도 성장하던 산업 경제를 지탱하고, 또 국내에서 필요한 필수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세계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독일에서와 같이 일본에서도 경제적 고통은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고 새로운 군사정권의 등장에 일조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20년대 처음으로 권좌를 차지한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부 또한 군국주의화와 영토적 팽창을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보았다.
- 공황에 대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취한 대응책 중 하나는 정부가 공공사업에 상당액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 도로, 교량, 댐, 공공 건물, 기타 여러 다른 거대 규모의 프로젝트에 상당히 투자했다. 또 다른 대응책은 정부가 자금을 댄 실업자 구호였다.
- 영국의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사상에 있어 혁명을 일으켰다. 케인스는 1936년에 출판한 《고용, 이자, 화폐에 대한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에서 공황이 생산의 감소가 아닌 불충분한 소비 수요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정부가 이자율 절하와 공공 지출, 양자의 결합을 통해 자본의 공급을 증가시키고 투자를 일으키며 경제에 자극을 가할 수 있다고 했다.
- 케인스주의(Keynesianism)는 1938년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세계의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 중심적, 혹은 하나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1930년대 말, 루스벨트 행정부가 이름 붙인 뉴딜(New Deal)은 대공황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대공황을 끝냈다.
- 그는 라디오를 정기적으로 이용한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그는 친근한 ‘노변담화(fireside chats)’를 통해 자신의 프로그램과 계획을 대중에게 설명했고, 행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감을 얻어냈다.
- 대통령이 된 지 이틀 후인 3월 6일, 의회가 은행 개혁 입법을 다루기 위해 특별 회기를 소집하기 전에 모든 미국 은행이 4일 동안 휴업할 것을 지시했다. 은행이 파산할지 모른다는 매우 심각한 우려 속에 대통령이 완곡하게 이름 붙인 ‘은행 휴업(bank holiday)’은 국민이 안도하고 희망을 갖게 하였다.
- 3일 후에, 루스벨트는 의회에 긴급 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을 제출했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이 법안은, 주로 대규모 은행이 허약한 소규모 은행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의 내용은 모든 은행의 영업 재개를 허용하기 전에 재무부가 감사를 할 것, 곤경에 처한 몇몇 은행을 연방이 지원할 것, 그리고 가장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은행은 재조직할 것 등이다. 의회는 이 법안이 상정되자 몇 시간 내에 통과시켰다. 새 법이 이루어낸 바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공황 퇴치에 도움을 주었다. 연방 지불 준비 제도(Federal Reserve System)에 속해 있는 은행의 4분의 3이 3일 내로 영업을 재개했고, 10억 달러에 이르는 감춰져 있던 돈과 금이 한 달도 안 돼 은행에 유입되었다. 일촉즉발의 은행 위기는 지나갔다. 긴급 은행법이 통과된 다음 날 아침, 루스벨트는 경제법(Economy Act)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연방정부가 안전하고 책임 있는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대중과 특히 기업 사회에 확신시켜주려는 것이었다. 이 법은 정부 고용인의 봉급을 삭감하고, 퇴역 군인 연금을 15퍼센트 정도 줄여 연방 예산의 균형을 맞출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은행 법안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거의 즉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루스벨트는 1933년 6월, 은행에 의한 무책임한 투기를 억제할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에 서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글래스-스티걸 법이 연방 예금 보험 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를 설립하여 은행 예금을 2,500달러까지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소액 예금자는 돈을 찾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그후, 1935년에 의회는 지역의 연방 지불준비 은행이 한때 행사했던 권한의 대부분을 워싱턴의 연방 지불 준비 위원회에 이전하는 주요한 은행법을 통과시켰다).
- 증권시장에서의 신용을 회복시키기 위해, 의회는 1933년 소위 증권 공시법(Truth in Securities Act)을 통과시켜, 새로이 증권을 발행하는 기업이 대중에게 충분하고도 정확한 기업 정보를 제공하라고 했다. 1934년 6월에 또 다른 법은 증권 거래 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를 만들어 주식시장을 감시했다. 루스벨트는 3.2퍼센트의 알코올을 포함하는 맥주의 제조와 판매를 합법화하는 법안도 지지하고 서명했다. 이는 금주법이 폐지될 때까지의 임시 조처로, 이것으로 21번째 헌법 수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헌법 수정안은 1933년 말에 비준되었다.
- 종합적 대책의 첫 번째는 의회가 1933년 5월에 통과시킨 농업 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이었다. 이 법의 조항에 따라 7가지의 기본 품목(밀, 면화, 옥수수, 돼지, 쌀, 담배, 유제품)의 생산량을 제한하게 되었다. 정부는 농업 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 AAA)을 통해 개별 농민에게 생산할 양을 정해주고, 유휴 경작지에 대해 보조금을 지불했다. 식품 가공(예를 들면, 밀의 제분)에 부과하는 세금을 신설하여 새로이 농민들에게 지불할 보조금의 자금원을 확보했다. 농산물 가격은 평형점을 한도로 보조해주도록 했다.
- 농업 조정청이 애쓴 결과, 1933년 이후 농산물 가격이 상승했고, 농가 총소득도 뉴딜이 시행된 후 초기 3년간 절반 정도 증가했다. 농업경제는 전반적으로 이전 몇 년간보다 1930년대에 더욱 안정적이고 번영했다. 그러나 농업 조정청의 지원 혜택은 소농보다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농민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갔다. 농지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토지 소유자에게 보조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정부는 농장주가 그들의 임차인과 소작인을 쫓아내고 일꾼을 해고하면서 경작 면적을 줄여가는 것을 거의 막지 못했다.
- 1936년 1월, 대법원은 정부가 농민에게 생산을 축소하도록 요구할 아무런 헌법적 권한도 없다며, 농업 조정법의 중요한 조항을 파기했다. 그러나 몇 주 내에, 행정부는 토양 보존과 국내 할당법(Soil Conservation and Domestic Allotment Act)이라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농민이 토양을 보존하고 토양의 부식을 방지하며, 또 다른 부차적 목적도 성취할 수 있게끔 생산을 축소하도록 정부가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 1935년에 설립된 재정착청(Resettlement Administration)과 그의 후신으로 1937년에 만들어진 농장 안정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은 토질이 거의 다 소진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좀 더 나은 토지로 이주하여 재정착하도록 대부금을 제공했다.
- 좀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1935년에 설립된 농촌 전력화청(Rural Electrification Administration)으로, 이는 공공사업체를 통해 수천의 농민이 처음으로 전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 1931년 이래로 미국 상공 회의소의 지도자와 그 외 많은 이는 정부가 반(反)디플레이션 대책을 채택하여, 동업 협회(trade associations)가 자신의 산업 부문에서 가격 안정을 위해 상호 협조하는 것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존의 반(反)트러스트법(독점금지법)은 그 같은 행위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허버트 후버는 반트러스트법의 유보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 반트러스트 조항을 완화시키는 대가로, 뉴딜주의자는 다른 부가 조항을 요구했다. 가격 인상에 따라 노동자의 소득 또한 동반 상승하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기업인이 노동조합을 통한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중요한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자리를 확충하고 소비자의 구매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중요한 공공사업 지출 프로그램도 덧붙였다. 이 같은 고려와 그 외 다른 이유의 결과로 1933년 6월에 의회에서 전국 산업 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이 통과되었다.
- 전국 산업 부흥법의 중심에는 활동적이며 정열적이었던 휴 존슨(Hugh S. Johnson)의 지휘하에 있던 새 연방 기구인 전국 부흥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이 있었다. 존슨은 전국의 모든 기업이 일시적인 ‘일괄 규약(blanket code)’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 규약은 시간당 30∼40센트인 최저임금, 35∼40시간의 주간 최대 노동시간, 아동노동 금지 등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어떠한 회사도 경쟁에서 유리하도록 가격이나 임금을 더 이상 낮출 수 없도록 선을 정하는 것과 또 고용과 생산의 유지에 회사가 동의하도록 하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 이 규약은 성급하게 마련되었고, 또 대개 허술하게 짜여 있었다. 거대 생산업자는 규약 작성 과정을 계속 지배하여 새 규약이 작은 업체에게는 불리하고 자신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했다.
- 전국 산업 부흥법의 7조 a항은 노동자의 조합 구성과 단체교섭을 허용했고, 최초로 많은 노동자들의 조합 가입을 격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7조 a항을 강제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전국 산업 부흥법의 지출 프로그램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사업청(Public Works Administration, PWA)도 공공사업 자금으로 33억 달러를 단계적으로 허용했을 뿐이었다. 전국 부흥청이 실패했다는 것을 가장 명백히 드러내주는 증거는 이 기구가 의도했던 대로 가격이 상승했음에도, 이 기구가 설립된 후 몇 달간 산업 생산이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이다. 1934년 봄, 전국 부흥청은 비판에 직면했다. 그해 가을, 루스벨트는 존슨에게 사임 압력을 가했고, 전국 부흥청을 감독할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했다. 그러자 1935년에 대법원이 간섭했다.
- 1935년, 뉴욕 시의 브루클린(Brooklyn) 지역 내에서만 사업이 허용된 가금(家禽) 도매업을 하던 스켁터 브라더스 사(the Schechter brothers)가 전국 부흥청 규약을 위반한 사건이 대법원에 상정되었다. 대법원은 스켁터 브라더스 사가 주간(州間) 통상업에 종사하지 않을 뿐더러, 더욱이 의회가 대통령에게 전국 부흥청 규약 초안을 만들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은 위헌이라고 만장일치 판결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 기구를 설립했던 입법 자체도 무효가 되었다
- 루스벨트는 스켁터 건의 판결에서 사용된 논리가 많은 다른 뉴딜 프로그램도 위협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 뉴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지역계획에서 전례가 없었던 실험인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의 성립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된 댐 건설이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고 남아 있던 앨라배마 주 테네시 강가의 머슬 쇼올(Muscle Shoals)에 있는 거대한 댐의 완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력 회사의 거센 반대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32년, 거대 전력 회사 제국인 새무엘 인설(Samuel Insull)의 전력 기업군 중 한 회사가 부패상이 폭로되고 유포되어 파산했다. 전력 기업에 대한 적대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 회사들은 더 이상 공공 전력 운동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33년 5월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의 창설을 가져온 입법안을 대통령이 지지하고, 의회가 이를 통과시켰다.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는 머슬 쇼올의 댐을 완성시키고 이 지역에 또 다른 댐을 건설하려 했을 뿐 아니라, 전력을 생산하고 대중에게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도록 했다.
-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는 이 지역을 다양한 방법으로 재활시켰다. 해상 교통을 향상시켰고, 실제적으로 이 지역을 홍수로부터 구해냈다. 이는 또, 이전에는 전력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전력을 공급했다. 전국적으로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의 값싼 전력 생산에 의해 제공된 ‘기준치’로 인하여 사기업의 전기료도 인하되었다.
-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서 처음 행한 일은 구호 기관이 파산하지 않도록 각 주에서 현금 보조금을 제공하도록 하는 연방 긴급 구호청(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 FERA)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 정부가 ‘실업수당(dole)’을 제공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정부 구호, 즉 노동 구호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거리낌이 적었다. 그러므로 긴급 구호청의 보조금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두 번째 프로그램인 토목 사업청(Civil Works Administration)을 설립했다. 1933년 11월과 1934년 4월 사이에, 토목 사업청은 400만 명 이상을 임시 프로젝트에 고용했다. 도로, 학교, 공원의 건설과 같은 일은 장기적인 가치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홉킨스에게는 자금이 절실히 필요한 경제에 돈을 쏟아 붓고, 어디에도 의존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 루스벨트가 선호했던 구호 프로젝트는 민간 자원 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이었다. 민간 자원 보존단은 전국의 공원과 숲, 농촌과 황야 같은 곳에 캠프를 만들었다.
- 저당(抵當) 구호는 수백만에 이르는 농장 소유자와 가옥 소유자에게 시급한 일이었다. 2년 안에 미국 내 모든 농장 저당의 5분의 1을 재융자해주었던 농장 신용청(Farm Credit Administration)은 저당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조처였다. 1933년의 프레이져-렘키 농장 파산법(Frazier-Lemke Farm Bankruptcy Act)은 또 다른 조처로, 농민이 저당물을 빼앗긴 후에도 자신의 땅을 회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1934년에 이르러 미국 농장 소유자 중 25퍼센트가 토지를 잃고 말았다. 가옥 소유자들도 비슷한 곤란에 처해 있었고, 1933년 6월에 행정부는 가옥 소유자 대부 회사(Home Owners’ Loan Corporation)를 설립하여, 1936년까지 100만이 넘는 가구의 담보물에 대해 재융자해주었다. 1년 후, 의회는 새 건축물과 가옥 보수에 대한 저당을 보장하는 연방 주택청(Federal Housing Administration)을 설립했다.
- 대통령이 되고서 처음 2년간, 프랭클린 루스벨트만큼 많은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35년 초, 대공황의 끝이 보이지 않자, 뉴딜은 맹렬한 대중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1935년 봄, 이같이 점차 강해지던 공격에 대한 대처의 일환으로, 루스벨트는 소위 ‘2차 뉴딜(Second New Deal)’이라는 새롭고 야심찬 입법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 1934년 8월, 듀퐁(Dupont) 가문의 일원이 이끌던 가장 맹렬하고도 가장 부유한 루스벨트의 반대자로 이루어진 한 그룹이 뉴딜의 ‘독재적’ 정책과 자유기업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는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미국 자유 연맹(American Liberty League)을 조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새로운 연맹은 조직자인 북부 산업가 외에는 지지자가 거의 없었다.
- 캘리포니아 주의 연로한 의사 프랜시스 타운센드(Dr. Francis E. Townsend)는 연방정부가 노년층에게 연금을 지불한다는 계획으로 회원이 500만 명이 넘는 운동을 이끄는 위치로 부상했다. 타운센드 계획에 따르면, 60세가 넘는 모든 미국인이 은퇴 후(그러므로 젊고 실직한 이들에게 일거리를 내주는 것이고) 매달 정부로부터 200달러의 연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이 돈을 매달 전부 다 쓰게 하여 경제에 필요한 돈을 수혈한다는 것이다). 1935년에 타운센드 계획은 많은 노년층의 지지를 얻었다.
- 행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루이지애나 주 출신인 상원 의원 휴이 롱(Huey P. Long)의 전국적 인기 상승이었다. 롱은 은행, 정유 회사, 그리고 전력 회사와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던 보수주의적 과두정치를 맹렬하게 공격하며 출신 주에서 명성을 얻었다.
- 롱도 193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취임한 지 6개월도 못 되어, 그는 대통령과의 연계를 파기했다. 그는 뉴딜의 대안으로 부의 재분배를 꾀하는 극적인 프로그램, 즉 ‘부를 공유하자(Share-Our-Wealth Plan)’라고 명명한 계획을 주창했다. 롱은 정부가 미국의 가장 부유한 이들이 지닌 잉여의 부를 몰수하고 이를 재분배하는 세금 제도를 이용하면 공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잉여의 부로 모든 가정이 최소한 5,000달러의 ‘농지(homestead)’와 2,500달러의 연금을 받도록 정부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1934년에 그는 전국적으로 ‘부의 공유를 위한 모임(Share-Our-Wealth Society)’을 조직했고, 곧 추종자가 많이 생겼다. 1935년의 민주당 전국 위원회가 시행한 여론조사는 롱이 만일 제3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면 민주, 공화 양당 간의 근접한 선거전에서 10퍼센트 이상의 표를 획득하여 공화당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있다고 보았다.
- 루스벨트는 1935년 봄, 점증하는 정치적 압력과 지속적인 경제 위기에 대처하려고 소위 2차 뉴딜을 개시했다. 이 새로운 제안은 새로운 방향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뉴딜 정책의 강조점에 변화를 나타냈다. 가장 확연한 변화는 대기업에 대한 행정부의 태도였다. 대통령은 상징적으로라도 이제 대기업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려 했다. 예를 들면, 루스벨트는 3월에 거대 전력 지주회사를 깨뜨릴 의도를 가진 법안을 의회에 제안했다. 의회는 1935년 지주회사법(Holding Company Act)을 통과시켰으나, 전력 회사의 격렬한 로비 활동으로 인해 이 법의 영향력을 상당 정도 제한시킨 수정안을 만들어내었다.
- 휴이 롱이 주창한 부의 공유 계획의 매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루스벨트는 역사상 가장 높고, 또한 가장 누진적인 평화시 세율의 제정을 요구했다.
- 전국 산업 부흥법을 무효화시켰던 1935년의 대법원 판결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고 있었던 이 법의 7조 a항도 무효로 만들었다.
- 와그너법(Wagner Act)으로 널리 알려진 새로운 법은 1933년의 법에는 빠져 있던 중요한 강제 기구인 전국 노사 관계 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NLRB)를 노동자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이 기구가 고용주에게 합법적 조합을 승인하고 교섭하도록 강제하는 힘을 갖도록 했다.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1935년에 서명했다. 노사 관계법이 제정된 것은 미국의 노동자가 1935년에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 반영된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루스벨트도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노동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은 직능별 노동조합의 이상, 즉 직능별로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여전히 집착했다. 그러나 직능별 노동조합주의 개념은 이제 산업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한 비숙련 노동자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새로운 노동조직 개념인 산업별 노동조합주의가 직능별 노동조합의 이상에 도전했다. 산별노조의 옹호자는 특정 산업에 취업하는 모든 노동자는 그들이 맡은 직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하나의 조합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자동차 산업 노동자는 하나의 자동차 산업 노동조합에 소속되어야 하고, 모든 제철 산업 노동자는 하나의 제철 산업 노동조합에 가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조직되어, 세력을 상당 정도 증가시킬 수 있다고 했다.
- 산업별 노동조합주의를 지지하는 수많은 중요한 옹호자가 있었고,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연합 광산 노조(United Mine Workers)의 지도자인 존 루이스(John L. Lewis)였다.
- 루이스는 위원회를 산업별 조합 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로 개명했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산업별 조합 회의는 노동 운동의 기반을 확대시켰다. 산업별 조합 회의는 미국노동총동맹보다 여성과 흑인에게 더 수용적이었다. 이는 산업 조직 회의가 이전에는 조직되지 않았던, 여성과 소수민족이 노동력의 다수를 형성했던 산업(섬유·세탁·담배·공장 등)을 대상으로 조직화 운동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 1936년 12월, 자동차 산업 노동자는 대기업의 반대에 도전하기 위하여,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효과적인 새로운 방법인 연좌 파업(sit-down strike)을 시행했다.
- 1937년 2월, 제너럴모터스 사는 연합 자동차 노조를 인정한 첫 번째의 주요 제조업자가 되었고, 다른 자동차 회사도 곧 그 뒤를 따랐다.
- 제철 산업에서의 조직화 투쟁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36년에 철강 노동자 조직화 위원회(Steel Workers’ Organizing Committee, SWOC, 후에 연합 철강 노조United Steelworkers of America가 됨)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가담시켰을 뿐 아니라, 때로는 격렬한 파업도 불사하는 조직화 운동을 시작했다. 1937년 3월, 산업계의 거물이었던 U. S. 스틸(United States Steel)이 값비싼 파업보다는 조합을 인정하는 쪽을 택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집합적으로 ‘리틀 스틸(Little Steel)’로 불렸던 규모가 작은 회사는 그 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 1937년 한 해에만 4,720건의 파업이 있었고,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노동조합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타결되었다. 그해 말까지, (1932년의 300만 명에 비하여) 8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고용주에 의해 공식적 협상 조직으로 인정된 조합의 회원이었다. 1941년에는 그 수가 1,0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었고, 결국에는 연합 제철 노조를 인정한 리틀 스틸의 노동자도 이에 포함되었다.
- 1935년, 루스벨트는 사회보장 법안(Social Security Act)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의회는 이를 그해에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몇 개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담고 있었다. 노년층에게는 두 종류의 지원이 가능했다. 당시 빈곤층은 연방의 지원으로 매달 15달러까지 받을 수 있었다. 미래에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내용은 당시의 많은 미국인 취업자를 하나의 연금제도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고용인과 고용주는 급료 지불세(payroll tax)를 내서 기금을 만들고, 고용인이 은퇴하면 소득이 제공되도록 했다. 1942년까지는 연금 지불이 시작되지도 않고, 지불이 개시되더라도 수혜자에게 매달 고작 10달러에서 85달러 정도가 지불되는 정도였다. 그리고 가내 하인과 농업 노동자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노동자 집단이 이 프로그램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노년층을 대상으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사회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첫 걸음이었다.
- 사회보장법은 고용주만이 자금을 대는 실업보험 제도를 만들었고, 장애자인에 대한 연방의 지원 제도와 부양 어린이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도 확립했다.
- 행정부는 1935년에 사업 추진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을 설립했다. 토목 사업청과 그 외의 초기 시도같이, 사업 추진청은 실업자에게 노동 구호제를 실시했다.
- 해리 홉킨스의 지휘로 사업 추진청은 11만에 이르는 공공건물(학교, 우체국, 정부 업무 빌딩)의 건축이나 재건, 거의 600개의 공항 건설, 50만 마일 이상의 도로 건설, 10만이 넘는 다리 건설 등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사업 추진청은 평균 210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고, 경제에 필요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 사업 추진청의 연방 작가 프로젝트는 실직한 작가에게 일을 하고 정부의 급료를 받을 기회를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화가, 건축가 등이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연방 음악 프로젝트와 연방 극장 프로젝트는 실직한 음악가, 배우, 그리고 감독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주어 음악회와 연극 등의 제작을 감독했다.
- 전국 청년청(National Youth Administration, NYA)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지원했다. 공공사업청의 긴급 주택 지국(Emergency Housing Division)은 공공 주택에 정부의 지원을 개시했다.
- 정부는 남성에게 민간 자원 보존단, 민간 사업청과 사업 추진청 등과 같은 근로 구호 프로그램에 주로 참여하게 했다. 여성에게는 근로 구호가 아닌 현금 구호에 주로 치중하여 지원했고, 이 중에서 사회보장의 피부양 아동 지원(Aid to Dependent Children) 프로그램을 통한 구호가 가장 유명했다. 이는 대개 편모를 지원할 의도로 만든 것이었다. 여성과 남성을 다루는 데 있어 차이는 남성이 임금 노동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930년대에 이미 수백만의 여성이 취업하고 있었다.
- 1936년 중반, 경제 회복세가 분명해지면서 루스벨트의 재선은 거의 확실했다. 공화당은 중도 성향을 띠는 캔자스 주지사 앨프 랜든(Alf M. Landon)을 지명했으나, 그는 미약한 선거운동을 펼쳤을 뿐이었다.
- 결과는 그때까지의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표차였다. 랜든이 36퍼센트의 득표율에 그친 데 비해 루스벨트는 61퍼센트에 육박하는 표를 획득했고, 메인과 버몬트를 제외하고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의회의 상하 양원에서 이미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민주당은 더 많은 의석을 얻었다. 선거 결과는 뉴딜로 인해 정당이 재편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이제 전통적 혁신주의자와 철저한 새로운 자유주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서부와 남부의 농민, 도시의 노동계급, 빈민과 실업자, 북부 여러 도시의 흑인 지역 사회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연합체, 즉 유권자의 상당 다수를 구성하는 연합체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6년에 재선되자 대법원의 문제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미 전국 부흥법과 농업 조정법을 파기했던 보수적 대법관의 손에서 어떠한 개혁 프로그램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1937년 2월, 루스벨트는 연방 사법 제도에 대한 전반적이며 정밀한 검토를 제안하는 갑작스런 메시지를 의회로 보냈다. 그가 제시한 많은 조항 중에는 대법원에 6명의 새로운 대법관을 더 지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대법원이 ‘과로’하고 있으며, 법원이 과중한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게끔 좀 더 많은 인력과 좀 더 젊은 인재의 수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진정한 목적은 새로운 인물, 즉 자유주의적 대법관을 임명하여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 9명의 대법관 중 4명은 확실히 뉴딜에 반대했고, 3명은 지지를 표명했다. 나머지 2명 중 대법원장 찰스 에번스 휴즈(Charles Evans Hughes)는 종종 진보주의자의 편에 섰고, 대법관 오웬 로버츠(Owen J. Roberts)는 대개 보수주의자의 편에서 표를 던졌다. 1937년 3월 29일, 로버츠, 휴즈, 그 외 세 명의 진보주의적 대법관은 웨스트 코스트 호텔 대 패리쉬 건(West Coast Hotel v. Parrish)에서 모두 주의 최저임금법을 지지하는 투표를 했다. 그렇게 하여 유사한 법을 무효화시켰던 그 전해의 5대 4 판결을 뒤집었다. 2주일 후에 대법원은 또다시 5대 4로 와그너법을 지지했고, 5월에는 사회보장법이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그렇게 판결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대법원이 그 입장을 새로이 완화시킴으로써 법원 개편안이 필요 없도록 했다. 의회는 결국 법원 개편안을 부결시켰다.
- 사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였다. 대법원은 더 이상 뉴딜 개혁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 개편안 사건은 행정부에 지속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1937년 이래, 남부 민주당원과 다른 보수주의자는 대통령의 법안에 과거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 1929년 820억 달러에서 1932년 400억 달러로 감소되었던 국민 소득은 1937년 여름에 거의 720억 달러로 상승했다.
- 루스벨트는 이 같은 경제 향상을 구실로 연방 예산에 균형을 이루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면, 1937년 1월과 8월 사이 그는 150만 명의 구호 노동자를 해고하여 사업 추진청의 규모를 반으로 줄였다. 몇 주일 후, 미약했던 경제 붐은 붕괴했다. 산업생산지수는 1937년 8월 117에서 1938년 5월에는 76으로 떨어졌다. 400만의 노동자가 더 일자리를 잃었다. 경제 상황은 곧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의 황폐했던 날과 같이 곧 나빠졌다.
- 당시의 (분명히 루스벨트를 포함하여) 많은 관망자는 경기 후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행정부가 지출을 삭감하려던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1938년 4월, 대통령은 공공사업과 구호 프로그램을 위한 50억 달러의 긴급 예산을 의회에 요구했고, 다시 한 번 정부의 자금이 경제에 곧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달 내에 또 다른 일시적 회복이 진행되는 듯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루스벨트는 ‘부당한 경제력 집중’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반트러스트법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기업집중을 조사할 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하면서, 의회에 신랄한 메시지를 보냈다. 의회는 이에 대응하여 임시 전국 경제 위원회(Temporary National Economic Committee, TNEC)를 설립하고, 상하 양원의 대표자와 내각의 관료 몇 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후 1938년에 행정부는 노동 입법 중 가장 야심찬 공정 노동 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을 지지하고 이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미국 최초로 전국적 최저임금과 주당 40시간 노동을 제정하고, 아동노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 법이다.
- 1938년 말에 이르러 뉴딜은 본질적으로 거의 종식 상태에 이르렀다. 의회의 반대로 대통령은 어떠한 중요한 새로운 프로그램도 입법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상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세계적 위기의 위협이었고, 루스벨트는 개혁의 새로운 방도를 찾기보다는 전쟁을 꺼려하는 미국인이 전쟁 준비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는 데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 1935년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약 30퍼센트가 어떠한 형태로든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중 하나는 흑인의 투표 행태에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남북전쟁 이래로 계속 그러했던 것처럼, 1932년까지도 미국의 모든 흑인은 공화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1936년에는 90퍼센트가 넘는 흑인이 민주당에 투표했다.
- 1930년대에 인디언 업무(Indian affairs)를 담당했던 걸출한 위원장 존 콜리어(John Collier)가 노력한 덕분이었다. 콜리어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 즉 모든 문화는 그 자체의 기준에서 받아들여지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개진한 20세기 인류학자의 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콜리어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동화시키려는 압력을 반전시켜 그들이 인디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선호했다. 콜리어는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1934년 인디언 재조직법(Indian Reorganization Act)으로 알려진 법률 제정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 법은 무엇보다도 인디언 부족이 자신의 토지를 집단적으로 소유할 권리와 부족의 정부를 선출할 권리를 회복시켰다. 1934년의 법이 통과된 후 13년 내에 부족의 토지는 거의 400만 에이커 정도 증가했고, 인디언의 농업 소득도 상당히 늘었다(1934년에는 200만 달러도 안 되었는데, 1947년에는 4,900만 달러가 넘었다).
-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을 내각 각료로 지명하여,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가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외 100명 이상의 여성을 연방의 하급 관료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뉴딜 정부는 여성에게 성적 동등성의 성취보다는 특별한 보호를 부여하는 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뉴딜은 어려운 시기에는 남성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여성이 일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일반적인 사고를 지지했다.
- 거대한 댐과 발전소의 건설과 같은 최대 규모의 뉴딜 공공사업 프로그램이 주로 서부에서 시행되었다. 서부는 그런 시설이 들어설 최적의 지역이고, 또 물과 동력의 새로운 원천이 가장 필요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 뉴딜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어난 경제적 호황이 결국 위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뉴딜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내 세력 분배를 많이 바꾸지도 못했고, 미국인 간의 부의 분배에는 단지 약간의 영향만을 미쳤을 뿐이다. 그럼에도 뉴딜은 미국 경제의 행태와 구조에 매우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뉴딜은 노동자, 농민 등의 새로운 그룹을 대기업의 세력에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위치로 올려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제에 있어 뉴딜은 주식시장, 금융 제도 등 이전에 어려움을 겪었던 분야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연방정부의 규제 기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행정부는 새로운 형태의 연방 재정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도록 지원하여, 전후에 정부가 경제적 성장을 증진하고 조정할 수 있게 하는 도구를 제공했다.
- 뉴딜은 또한 많은 구호 프로그램들과 사회보장제를 실시하여 미국 복지국가의 기본 원리를 창조했다. 뉴딜주의자가 구호 프로그램과 사회보장제에 불어넣은 보수주의적 장애 요소로 인해 마침내 등장한 복지제도는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고, 전통적인 성적·인종적 차별을 강화시키며, 집행하기에 매우 돈이 많이 들고 부담이 되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 모든 한계에도, 새 제도는 공공 지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지원을 거부해온 미국의 전통과 역사적 단절을 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뉴딜은 미국 정치의 성격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정치에서 수십 년 동안 소수 세력이었던 미약하고 분열된 민주당이 뉴딜로 인해 그 후 30년 이상 전국 정당 간의 경쟁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도록 변모한 것이다.
- 뉴딜은 대공황의 종식을 가져오지 못했으나, 그 정책의 몇몇은 대공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했으며, 몇몇 정책은 미래의 좀 더 효과적 경제정책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했다.
- 상원 외교 위원회의 의장이자 공화당 상원 의원인 매사추세츠 주의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는 1919년과 1920년 베르사유조약 비준 반대 투쟁을 주도했다. 그 결과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고, 독자 노선을 택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향후 20여 년 동안 다른 나라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세계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로지는 고립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다른 국가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지지 말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Washington Conference)로, 이는 미국, 영국, 일본 사이의 안정을 해치는 해군력 증강 경쟁을 방지하려는 시도였다. 휴즈는 이 세 나라 함대를 대폭적으로 축소하고 대형 군함의 건조를 10년간 유예하도록 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모두들 놀라워했지만,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휴즈의 말을 대부분 수용하기로 동의했다. 1922년 2월의 5대국 협정(Five-Power Pact)으로 협정 국가 간의 총 군함 톤수와 군사력 비율의 한도가 정해졌다. 그 내용은 미국과 영국의 군함 5톤당 일본은 3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1.7톤의 비율로 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1927년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 미국에게 독일에 반대하는 연합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 이에 반하여 미 국무부 장관 프랭크 켈로그(Frank Kellogg, 1925년 휴즈와 교체되었음)는 국가의 정책 도구로서의 전쟁을 금지하기 위한 다국적 조약을 제안했다. 마침내 1928년 8월 27일, 파리에서 14개국이 엄숙하면서도 국제적인 환호 속에 이 조약에 서명했고, 후에 48개국이 더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에 합류했다. 이 조약에는 강제적 수단을 담은 어떠한 내용도 없었다.
- 미국의 금융가 찰스 도스(Charles G. Dawes)는 1924년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미국이 협정을 맺어 미국 은행이 대규모의 대부를 해주어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배상금 삭감에 동의했다. 도스 안에 따라 미국은 독일에 대부를 해주었고, 독일은 이 대부금으로 프랑스와 영국에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이 자금으로 (이들이 미국 은행으로부터 직접 제공받은 큰 규모의 대부금도 포함하여) 미국에 빌린 전쟁 채무를 갚았다. 이러한 자본의 흐름은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가 미국 은행과 기업에 엄청난 채무를 져야만 계속될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연관성은 1931년의 세계공황으로 이러한 경제적 체계가 무너져내릴 때까지 계속 확대되었다.
- 1920년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배 이상 증가하던 시기에 니카라과, 파나마, 그리고 이 지역 여러 나라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의 은행은 유럽에 제공했던 것처럼 대규모의 대부를 라틴아메리카 정부에 제공해주었고, 유럽과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는 미국의 관세장벽이 높아 채무 상환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 1929년에 시작된 세계의 재정적 위기로 1931년경 유럽에서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고양되었다. 기존의 정치 지도자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팽창을 시도하는 강력하면서도 호전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일본의 팽창주의 정부는 아시아에서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다.
- 후버는 대통령 재직시에 대체로 인접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금했으며, 니카라과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철수시켰다. 후버는 또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즉, 미국은 이 지역의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을 문제 삼지 않고 외교적 승인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1931년 10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미국에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미국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먼로주의(Monroe doctrine)에 대한 ‘루스벨트의 추론(Roosevelt Corollary)’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 유럽에서는 후버 행정부의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후버가 제안한 채무 상환 유예가 대규모의 지원이나 재정적 안정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그는 여러 경제학자의 권고에 반하여 미국에 대한 모든 전쟁 채무 취소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여러 나라는 곧바로 채무 불이행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해군력 증가를 제한했던 1921년의 협정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은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공포를 품고 있어서 실패했다.
-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은 1920년대 초부터 이탈리아를 통치하며, 점차 민족주의적·군국주의적으로 변해갔고, 더욱 불길하게도 국가사회독일노동주의당(또는 나치당)의 세력이 커져갔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이래 독일의 정부였던 바이마르공화국은 1920년대 후반까지 문제가 많았고, 특히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에 신뢰를 거의 잃었다. 이때 나치 당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군중의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부상했고, 1933년에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아리안(독일) 민족의 유전적 우월성을 신봉했고, 이 ‘위대한 종족’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해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을 병적으로 혐오한, 광적인 군국주의자였다.
-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은 소련과 장제스(蔣介石)의 민족주의적 중국이 세력을 증강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고, 특히 만주에서 세력 확장하려는 장제스의 주장에 경악했다. 만주는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905년 이래 일본이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1931년에 일본의 군부 실력자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도쿄 정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이들은 북만주를 침략하기 시작, 그해 말 이 지역을 점령했다. 후버는 국무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에게 일본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도록 했으나,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과 협조하지는 못하게 했다. 1932년 초 일본은 중국으로 진격해 들어가 상하이를 공격하고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한 첫 번째 싸움은, 진주만 공격과 1939년의 유럽 전쟁이 있기 오래전 태평양에서 벌어진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다.
-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은 중국에서 영토와 경제적 권한을 획득했고, 특히 중국 북부의 만주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1931년 9월, 호전적인 청년 장교 집단은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철로 폭파 건을 포착했고, 이를 통해 만주 전역을 정복했다.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은 일본에게 만주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고, 이후 6년간 만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갔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베이징(北京) 외곽에 있는 마르코 폴로 다리(Marco Polo Bridge)에서 중국 군대를 공격하면서 전쟁을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일본군은 중국 남부의 상당 지역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항구도시가 공격받았으며, 많은 중국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은 난징 대학살(南京 Massacre)로, 난징 시의 시민 수만 명이 몰살당했다(희생자 수는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적게는 8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1931년에 미국과 국제연맹이 이에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중국은 일본의 공격을 받았을 때 혼란 상태였다. 중국은 그때 장제스가 이끌던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공산당 사이에 내전을 치르고 있어서 대항 능력이 약했다. 그러나 1937년 초, 두 경쟁자는 쉽지 않았지만 휴전에 동의했고,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하여 성과도 있었다. 일본군을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갔고, 본토의 일본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군부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중국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 중국과의 전쟁이 남긴 결과의 하나는 민간과 군에 필요한 철과 석유를 충당하기 위해 일본의 대미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1941년 7월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미국에서 더 이상 석유를 구입할 수 없게 했다. 일본은 당시 중국에서의 전쟁을 끝내든가, 아니면 전쟁 수행과 민간경제를 위해 연료를 공급해줄 또 다른 곳을 찾든가를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석유를 찾아 중국 너머로 전쟁을 확산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장 적합한 곳은 네덜란드 지배에 있던 동인도제도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유럽 식민지를 확보하려면, 점점 호전적이 되어가던 미국을 아시아에서 힘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환상에 빠져 있던 일본의 군 지휘자는 다른 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하기에 앞서, 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봉쇄하기 위해 과감한 군사 행동-진주만 미 해군기지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이 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첫 타격은 일본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10년 이상을 쌓아온 모든 노력의 절정이었다.
- 루스벨트와 전임자 후버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 관계에 관한 정책에서 가장 뚜렷하게 차이를 보였다. 후버는 오직 전쟁 채무 문제를 해결하고 금본위제도를 강화해야만 미국 경제가 회생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933년 6월 런던에서 열린 세계 경제 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에 참가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소집될 무렵 루스벨트는 미국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려면 달러 가치가 절하되어야 한다고 이미 확신했다. 회의가 소집되자마자 루스벨트는 회의 참가자 대다수의 정통적 견해를 무시하고, 또한 통화안정에 대한 어떠한 협정안도 거부하면서 ‘폭탄선언’을 했다. 회의는 아무런 협정도 맺지 못하고 즉각 해산되었다. 이와 동시에 루스벨트는 후버 행정부가 국제적 협정을 통해 전쟁 채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시도를 포기했다. 1934년 4월, 루스벨트는 채무를 갚지 않는 국가에게는 미국 은행의 대부를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 결과 미국의 대부에 의해서만 채무가 상환되던 과거의 순환 체계는 중단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전쟁 채무 상환이 영구적으로 중단되었다.
-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16년이 지났지만 미국 정부는 여전히 소련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무역 가능 지역으로 떠오르게 됨에 따라 정책의 변화를 재촉하는 영향력 있는 미국인이 늘어났다. 또한 소련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협조를 바라고 있었다. 1933년 11월, 마침내 미국과 소련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관계는 곧 다시 소원해졌다. 미국은 기대와 달리 소련에 무역 기지를 세우지 못했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이 억제되기를 바라던 소련은 미국 정부가 이에 대한 재확신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기대가 무너졌다. 1934년 말, 소련과 미국은 서로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상호 불신하는 상황에 놓였다.
- 루스벨트 행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이른바 ‘선린정책(Good Neighbor Policy)’으로 알려졌으며, 후버 행정부가 추구했던 변화를 확장한 정책이었다. 1933년 12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미 대륙 간 회의(Inter-American Conference)에서 국무부 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어떠한 나라도 다른 나라의 내외 문제에 간섭할 권한이 없음’을 선언하는 공식 의정서에 서명했다.
- 1920년대의 국제 체제가 회복될 가망이 없자, 미국은 세계 안정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애써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했다. 미국인은 대부분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했다.
- 1935년 여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 침략으로 새로운 유럽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미국의 입법부는 미국이 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적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그 결과 1935년에 중립법(Neutrality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교전국에 대한 강제적인 무기 수출 금지 조항을 만들어놓았고, 대통령이 미국 국민에게 교전국의 선박으로 여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고립주의자는 이 ‘중립권의 보호(protection of neutral rights)’가 미국이 또다시 전쟁에 개입하게 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1936년에 이 중립법안은 개정되었고, 1937년에는 이른바 ‘현금 주고 실어가기(cash-and-carry)’라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법규가 추가되었다. 이 정책에 따라서, 교전 중인 국가는 미국으로부터 오직 비군수품만을 구입할 수 있고, 현금을 지불하고 그들 스스로 운반해야만 구입이 가능했다.
-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편승하여 다시 강하게 나타났다. 1936년 7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 매우 흡사한 집단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장군의 팔랑헤 당원(Falangists)은 당시의 공화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여 프랑코를 지원했다. 몇몇 미국인이 개인적으로 공화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기도 했으나, 미국 정부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어느 쪽도 지원하지 않기로 협약했다.
- 1937년 여름, 일본은 6년간 계속된 만주 공격을 더욱 강화했을 뿐 아니라 중국 북부의 5개 지역을 공격했다. 1937년 10월 루스벨트는 시카고 연설로 이에 대응했다.
- 1937년 12월 12일, 일본의 비행대는 중국 양쯔 강을 지나고 있던 미국의 포함 페나이호(Panay)를 의도적으로 폭격하여 침몰시켰다. 그러나 고립주의자의 반감을 사기를 꺼려했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폭격이 단순한 사고였다는 일본의 주장을 명분으로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 공격을 문제 삼지 않았다.
- 1936년, 히틀러는 독일군을 라인란트(Rhineland)로 진격시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독일군이 주둔할 수 없었던 이 지역을 재무장시켰다. 1938년 봄, 독일은 방해받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히틀러는 자신이 태어난 오스트리아와 자신이 성장한 독일의 합병을 선언했다.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 내에서 이에 대한 반대는 별로 많지 않았다.
- 오스트리아 침공은 곧 또 다른 위기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때 독일은 서부 체코슬로바키아의 삼면과 경계를 이루는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고, 이 지역은 히틀러가 합병을 꿈꾸고 있던 지역이었다. 1938년 9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 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과 대부분의 서유럽 정부는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9월 29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자가 히틀러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가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대가로, 쥬데텐란트를 양보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당시 루스벨트도 갈채를 보냈듯이, 뮌헨협정의 가장 뚜렷한 요소는 ‘유화(appeasement)’로 알려진 정책이었고, 또한 이 정책은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과 거의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를 비난하든지, 이 정책은 실패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뻔뻔스럽게도 뮌헨협정을 위반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폴란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침략할 경우 폴란드 정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소련을 상호방위조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뮌헨회담에 초대받지도 못했던 스탈린은 이미 서방 국가에게 아무런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음으로써 독일을 양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 직후 히틀러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당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폴란드와 국경분쟁을 일으켰고, 1939년 9월 1일 마침내 폴란드를 총공격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후 약속대로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 루스벨트는 독일이 거대 군수산업 덕택에 갖는 군사적 이점을 상쇄토록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적어도 미국이 연합국에게 무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1939년 9월, 그는 중립법을 개정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무기 수출 금지 조항을 삭제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의회는 미국 선박이 전쟁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9년 법안이 개정되어, 비군수품 판매만을 허용했던 구 중립법의 ‘현금 주고 실어가기(Cash-and-Carry)’라는 동일한 조건으로 교전국이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 유럽은 겨울과 봄을 지나 계속 길고 조용한 휴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가짜 전쟁(phony war)’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1940년 봄, 독일은 서부로의 ‘전격전’이라 알려진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다. 먼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했고, 그 다음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휩쓸었으며, 마침내 프랑스의 중심부로 진격했다. 6월 10일, 히틀러가 북부로부터 프랑스를 공격하고 있을 때, 무솔리니는 남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 22일에 마침내 프랑스가 함락됐고, 나치 군대는 파리로 행군해 들어갔다. 프랑스의 새 정권이 비시(Vichy)에 들어섰고, 대부분 독일 점령군에 의해 조종되었다. 전 유럽에서 오직 던커크(Dunkirk) 해안에서 구출된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일부만이 추축국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5월 16일, 독일의 공격이 한창일 때, 루스벨트는 의회에 방위비로 10억 달러를 추가로 요구하여 신속히 받아냈다. 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전쟁 물자에 관한 첫 번째 요구 사항을 보낸 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처칠은 이 물자가 없이는 영국이 오래 지탱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당시 주영(駐英) 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Joseph P. Kennedy)를 포함해 몇몇 미국인은 영국의 상황을 볼 때 이미 희망이 없으며 어떠한 도움도 쓸모 없다고 주장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에 전쟁 물자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는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 영토에 미군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대가로 영국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남아 있던) 50척의 구축함을 제공함으로써 중립법의 ‘현금 주고 실어가기’ 규정을 교묘히 피하기까지 했다. 또한 미국 정부가 구입했던 많은 새 비행기를 공장으로 되돌려보내어 영국이 대신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 당시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1940년 7월에 이르러 국민의 66퍼센트 이상이 독일이 미국을 직접 위협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회는 기꺼이 연합국에 대한 지원 확대를 허용하려 했다. 의회는 또한 전쟁에 대비한 국내의 준비가 필요함을 더욱 우려하게 되었고, 9월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평화시 징병제를 실시하기 위한 버크-워즈워스 법안(Burke-Wadsworth Act)을 승인했다.
- 1940년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은 루스벨트가 전통을 깨고 최초로 세 번째 임기의 대통령에 출마할지였다. 대통령은 자신의 의도를 내보이지 않았지만, 경선 불참을 거부함으로써 민주당 경쟁자 그 누구도 지명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7월의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 그가 당의 ‘부름’을 따르겠다고 밝혔을 때, 문제는 사실상 해결되었다. 민주당원은 재빨리 루스벨트를 재지명했고, 루스벨트가 농무부 장관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를 부통령 후보로 정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헨리 월리스는 민주당 지도자 대다수의 구미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었다.
- 공화당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 인디애나 주의 사업가 웬들 윌키(Wendell Willkie)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웬들 윌키는 민초(풀뿌리) 운동(grass-roots movement)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었다.
- 일반투표에서는 루스벨트가 55퍼센트, 윌키가 45퍼센트를 차지했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449대 82로 루스벨트가 승리했다.
- 대영제국은 사실상 파산하여 중립법에 의한 ‘현금 주고 실어가기’ 조건을 더 이상 이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통령은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체계를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무기 대여(lend-lease)’였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방위에 중요한’ 모든 국가에 무기를 팔 수 있을 뿐 아니라 빌려줄 수 있게 된다. 즉, 미국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임대한 무기를 되돌려준다는 약속만을 전제로 하여 영국에 무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의회는 많은 표차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인해 대서양 항로가 매우 위험스러워졌다. 영국 해군은 다른 배로 대체할 겨를도 없이 급격하게 많은 배를 잃었고, 미국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물자를 운반하기가 어렵게 됐다. 루스벨트는 서대서양이 중립 지역이며, 북남미 국가의 책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1941년 6월에 이르러서는 미국 배가 멀리 아이슬랜드 동쪽까지 정찰했다. 처음에는 독일이 이러한 미국의 명백한 적대 행위에 거의 대항하지 않았으나, 1941년 9월에 이르러 상황이 바뀌었다. 그 해 6월에 나치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예상과 달리 소련이 항복하지 않자, 루스벨트는 의원들을 설득하여 무기 대여의 특혜를 소련에까지 확대해주도록 했다. 당시 미국 산업은 유럽의 양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히틀러의 상대국에게 절실한 지원을 제공했으며, 미 해군은 유럽으로 향하는 이 지원 물자의 운반을 보호해주었다. 9월에 들어서자 나치 잠수함은 미국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미국 함대에 독일 잠수함이 ‘발견되는 즉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10월에 두 대의 미국 구축함이 나치 잠수함의 포격에 맞아 이 중 루벤 패임즈호(Reuben Fames)가 침몰했고, 미국의 수병이 죽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회는 미국 상선을 무장시켜 교전 중인 항구까지 항해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미국은 사실상 독일과 해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 루스벨트는 군사적 서약은 하지 않았지만, 처칠 수상과 공동으로 하나의 문서, 즉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을 발표했다. 내용은 두 나라가 ‘좀 더 나은 세계의 미래’의 기초가 되는 ‘확고한 공동 원칙’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대서양헌장은 ‘나치 폭정의 최종적 멸망’과, 모든 국가가 자국의 운명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그것은 사실상 전쟁 목표의 선언이었다.
-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느슨한 방위 동맹, 즉 삼국동맹(Tripartite Pact)에 서명했다(실제로 유럽 추축국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과의 관계를 강하게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1941년 7월, 일본 제국의 군대는 인도차이나로 진격하여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의 수도를 장악했다. 미국은 암호를 해독하여 이들의 다음 목표는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루스벨트는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지만 도쿄는 응답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필요한 미국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제한하기 위해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든가, 아니면 태평양에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령을 장악해 그곳에서 물자를 구해야 했다. 10월에 도쿄의 호전 세력은 온건파 수상을 축출하고 군부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장군으로 교체했다.
- 미국의 정보기관은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명확히 제시하는 몇 가지 메시지를 해독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일본의 공격 목표가 어느 지역인지 몰랐다. 대다수의 관리는 일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미국 영토가 아니라, 남방의 영국 또는 네덜란드령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혼동과 판단 착오로 인해, 일본이 곧바로 미국 군대를 공격하려고 하는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55분, 일본 폭격기가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기지를 물밀듯이 공격했다. 한 시간 후 두 번째 공습이 감행됐다. 미국은 불과 두 시간 만에 8척의 전함, 3척의 순항함, 4척의 군함, 188대의 비행기, 기타 여러 중요한 해안 기지를 잃었다. 2,400명 이상의 육군과 해군 병사가 사망했고, 1,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의 손실은 경미했다. 이제 태평양에서 미국 군사력은 급격히 약화됐다(다행스럽게 우연히도 태평양 함대의 심장인 미국 항공모함은 12월 7일 진주만에 없었다). 그러나 하와이 급습은 미국인이 한마음으로 뭉쳐 전쟁을 지원하게 했다. 12월 8일, 대통령의 감동적인 연설 후에 상원은 일본에 대한 전쟁 선포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하원도 388 대 1로 이를 승인했다. 3일 후인 12월 11일에는 일본의 유럽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 의회도 그날에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전쟁을 선포했다.
-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한 일본의 공격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전쟁 수행 노력으로 미국의 여론을 통합시키며 미국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 진주만 공격이 일어난 지 10시간 후, 일본 비행기가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를 공격하여, 태평양에 남아 있던 미 공군력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3일 후 미국령의 괌(Guam)이 일본에 넘어갔다. 웨이크 섬(Wake Island)과 홍콩도 그 뒤를 따랐다.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에 있던 대영제국 기지는 1942년 2월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Dutch East Indies)는 3월에, 버마(1989년에 ‘미얀마’로 개칭)는 4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필리핀에서는 지칠 대로 지친 필리핀인과 미국 군대가 5월 6일 방어를 포기하고 말았다. 미국의 전략가는 일본인에게 타격을 입힐 거대한 공격 두 가지를 계획했다. 하나는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로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북쪽으로 뉴기니(New Guinea)를 거쳐 마지막에는 필리핀으로 진격해가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의 지휘로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중부 태평양에 있는 일본 본토의 전초기지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 양면 공격이 최종적으로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통합될 것으로 예측했다.
- 연합군은 1942년 5월 7일과 8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쪽에 있는 산호해(Coral Sea) 전투에서 첫 번째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 달 후, 하와이 북서쪽에서는 좀 더 중요한 전환점이 된 승리를 거두었다. 1942년 6월 3일에서 6일까지 4일간 미드웨이 섬(Midway Island)에 있는 미국의 작은 전초기지 가까운 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 전투가 끝났을 때 미국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미 해군은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파괴했고, 미국 측은 단 1척만을 잃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중부 태평양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몇 달 후에 미국은 뉴기니 동쪽, 남부 솔로몬 제도(Solomon Islands)에서 최초로 반격에 나섰다. 1942년 8월, 미군은 가부투(Gavutu), 툴라기(Tulagi), 과달카날(Guadalcanal), 세 섬을 공격했다. 과달카날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양쪽은 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남쪽에 효과적인 공격을 개시할 마지막 기회도 포기하게 되었다. 미군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지원을 얻어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향해 느리면서도 끈질지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 유럽 전쟁 중에 미국은 서부에서 영국과 망명 ‘자유 프랑스(Free France)’의 군사력과 협조하여 전투하면서, 동부에서는 독일의 히틀러와 싸우고 있던 새로운 동맹인 소련과 타협을 시도했다.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은 1943년 봄,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연합군의 주요 공격 계획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는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에게 이 작전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독일군의 주력과 맞서고 있던 소련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연합군이 공격하기를 바랐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로 대대적으로 진입하기 전에 먼저 북부 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에 있는 나치 제국의 외곽 지대를 둘러싸며 일련의 공격을 개시하기를 원했다. 루스벨트는 결국 영국의 계획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을 빨리 전투에 투입시키기를 열망했고, 또 해협을 건너기 위한 전력을 준비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42년 10월 말, 영국은 북부 아프리카에서 수에즈운하를 위협하고 있던 에르빈 로멜(Erwin Rommel) 장군 휘하의 나치군을 반격했다. 엘 알라맹(El Alamein)의 중요한 전투에서, 그들은 이집트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11월 8일, 영국군과 미군은 알제리의 오랑(Oran)과 알지에(Algiers) 그리고 모로코의 카사블랑카(Casablanca)-비시(Vichy)에 있던 나치가 조정하는 프랑스 정부 관할 지역-에 상륙했고, 로멜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던 미군과 대적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주력부대를 두었고, 튀니지의 캐서린 협곡(Kasserine Pass)에서 미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은 미군을 재정비하고, 효과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연합국의 공군과 해군력, 그리고 육군 원수(Field Marshall)인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 1 양 전선의 전쟁
- 1942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동절기에 적군(Red Army)이 남부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의 공격을 지체시키는 데 성공하자 소련이 붕괴될 위험은 많이 줄었다. 히틀러는 너무 많은 군사력을 이 전투에 쏟아부었고, 너무 엄청난 손실을 입었기에 동부로 계속 공격할 수 없었다. 소련의 성공은 루스벨트로 하여금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처칠과의 회합에서 영국이 제시한 연합군의 시실리(Sicily) 침공에 대한 계획에 동의하도록 했다. 처칠은 시실리 작전이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쓰러뜨릴 뿐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에 주둔할지 모르는 독일의 사단을 묶어놓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3년 7월 9일 밤, 미군과 영국군은 시실리 남동부에 상륙했다. 38일 후에 그들은 이 섬을 점령했고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진격했다. 이 같은 후퇴로 무솔리니(Mussolini) 정부는 붕괴했고, 독재자는 독일을 향해 북쪽으로 피신했다(그는 후에 이탈리아 반란군에게 잡혀 교수형당했다). 무솔리니의 후계자인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가 이탈리아를 재빨리 연합군 쪽에 가담시켰으나, 독일은 8개 사단에 이르는 군 병력을 이탈리아로 이전시켰고, 로마의 남부에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1943년 9월 3일에 시작한 이탈리아 반도 내 연합군의 공격은 곧 난항에 빠졌다. 연합군은 1944년 5월이 돼서야 북쪽으로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 1944년 6월 4일, 연합군은 로마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침공으로 인해 프랑스 진격이 거의 1년 정도 연기되자 스탈린은 매우 분노했으며, 소련은 동유럽 국가로 이동할 시간을 얻었다.
- 1942년 초, 워싱턴의 고급 관리는 히틀러의 군대가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과 기타 이들(폴란드인, 동성애자, 그리고 공산주의자)을 체포하여 동부 독일과 폴란드에 있는 집단수용소로 수송하고, 계획적으로 살해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다(600만 명의 유대인과 그 외 최소한 400만 명이 살해되었다). 잔혹한 행위에 대한 소식은 대중에게도 알려졌고, 연합군이 살해를 중지시키거나 또는 살아남은 일부 유대인이라도 구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 독일 여객선 세인트루이스호(St. Louis)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정권으로 인해 유대인이 계획적으로 절멸(絶滅)되기 전에 이미 비참한 항행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배의 항로를 보면 대학살 동안 유럽의 유대인이 맞게 된 운명에 대해 미국과 다른 나라가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세인트루이스호에는 1939년 독일에서 탈출한 900명이 넘는 일단의 유대인이 승선했다. 이들은 히틀러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에게서 냉소적으로 구입한, 법적 효력이 의심스러운 출국 비자를 갖고 있었다. 이 배는 정박할 곳이 없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았다. 승선객은 멕시코,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 쿠바에서 거듭하여 입국을 거부당했다. 대다수의 승객은 미국에서 안식처를 얻기 원했으나, 미 국무부는 미국 동부 해안으로 이 배가 항해해오자 정박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세인트루이스호 승객은 유럽으로 되돌아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 나누어 하선했다(사진은 1939년 6월 안트워프에서 하선 준비를 하며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드는 난민의 모습을 담고 있다). 1년이 안 되어, 영국을 제외하고 이 모든 국가가 나치 통제하에 들어갔다.
- 미국 정부는 일관되게 그 같은 청원을 대부분 무시했다. 비록 1944년 중반까지 연합군의 폭격기가 가장 악명 높은 죽음의 수용소였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마일 내 지역으로 의무 비행을 했으나, 전쟁부(War Department)는 비행기로 수용소의 소각장을 파괴해달라는 탄원을 군사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며 거절했다. 미국 관리는 연합군이 수용소로 이르는 철도를 파괴하자는 청원도 거부했다. 미국은 또한 유럽을 탈출하려는 수많은 유대인 피난민을 받아들이라는 탄원도 무시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대공황을 끝내면서 미국의 국내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1년 중반, 1930년대의 경제적 문제였던 실업, 디플레이션, 산업 생산의 침체 등이 전시 산업 팽창이 있기 바로 전에 거의 다 사라졌다. 새로운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인은 정부 지출로, 정부는 1939년 이후 매년, 모든 뉴딜 구호 기구가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경제에 쏟아부었다. 1939년의 연방 예산은 90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1945년에는 1,000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이 1939년 910억 달러에서 1945년 1,660억 달러로 급등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개인소득이 100퍼센트 또는 그 이상 증가했다. 정부 지출의 영향은 서부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부 해안 지역은 자연적으로 일본과의 해전을 위한 전함 대부분의 발진 지역이 되었고, 정부는 군수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와 그 주변 지역에 대규모의 제조 시설을 설치했다. 정부는 전쟁 기간 동안 다른 지역보다 서부 지역의 공장, 군수 시설, 수송 시설, 고속도로, 발전소 등의 건설에 총 400억 달러에 달하는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입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태평양 연안 지역은 미국의 항공 산업 성장의 중심지가 되었고, 조선 산업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영화 산업으로만 주목받던 중간 규모의 도시 로스앤젤레스가 이 시기에 주요한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 때문에 노동력 부족 사태가 심각했다. 노동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을 때 1,500만의 남성과 여성 민간 노동력이 군대로 차출되었다. 그럼에도 민간 노동력은 전쟁 기간 중 거의 20퍼센트 증가했다. 이전에는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간주되던 많은 사람-어린이, 노년층, 소수 인종,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수백만의 여성-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 전쟁으로 노동조합원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1941년에 1,050만 명이었던 노동조합원이 1945년에는 1,3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정부와 맺은 ‘조합원 유지(maintenance-of-membership)’ 협정의 결과였다.
- 정부는 노조 지도자에게서 두 가지의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하나는 노조가 전시에는 생산을 중단하지 않을 것을 동의하는 ‘무파업 서약(no-strike pledge)’이었고, 다른 하나는 15퍼센트의 임금 인상 상한선을 정한, 이른바 ‘철강 산업의 임금 기준’이었다. 무파업 서약을 했음에도, 전시 기간 중 거의 1만 5,000건의 조업 중단이 일어났고, 이들 대부분이 조합 지도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파업이었다. 1943년 5월에 연합 광산 노조(United Mine Workers)가 파업을 일으키며 정부에 도전하자, 루스벨트가 거부권을 행사했는데도 의회는 스미스-코넬리법(Smith-Connally Act) 또는 전시 노사분규법(War Labor Disputes Act)을 통과시키며 이에 대응했다. 이 법안에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기 전 30일간의 냉각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어 있었고, 대통령이 파업 중인 군수물자 생산 공장을 접수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분간 노동조합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이 급격히 증가했고, 많은 주에서는 노동조합 세력을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 1930년대의 가장 중심 관심사였던 디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는 특히 진주만 공격이 있기 2년 전 물가가 25퍼센트 급등한 이후에는 전시 기간 중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 인플레이션을 막는 것이 물가 관리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의 임무
-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인플레이션은 제1차 세계대전기보다 훨씬 덜 심각했다. 그러나 물가 관리청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물가 관리청의 정책 능력을 훨씬 벗어날 정도로 암시장이 많아졌고, 과도한 가격 정책 건수도 증가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연방정부는 총 3,210억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 금액은 정부 수립 때부터 당시까지 150년간 지출한 비용의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비용의 10배나 되었다. 미국의 국가 채무는 1941년의 490억 달러에서 1945년에는 2,590억 달러로 증가했다. 정부는 필요한 수입의 거의 절반을 1,000억 달러에 이르는 채권을 판매하여 차용했다. 나머지 상당량은 1942년의 소득세법(Revenue Act)을 통해 소득세율을 급격히 올려 마련했다. 의회는 세금 징수를 단순화하기 위해, 1943년에 급료 지불세를 직접 공제하는 원천과세제를 입법했다.
- 1944년 초, 미국의 공장은 사실상 정부에서 필요로 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했다. 그 생산량은 추축국의 총 생산량보다 2배나 많았다.
- 정부는 1940년 전국 국방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를 창설했고, 초기 컴퓨터 개발의 개척자였던 MIT의 과학자 버네바 부시(Vannevar Bush)를 이 위원회의 책임자로 삼았다. 이 위원회는 후에 과학 연구 개발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이 되었다. 전국 국방 연구 위원회는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연구를 위해 1억 달러 이상을 사용했고, 이 액수는 정부가 이전 40년 동안 국방 관련 연구 개발에 지출했던 액수의 4배가 넘었다.
- 파시스트 군대를 지원했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동안, 탱크와 그 밖의 기계화 장갑차 분야에서 크게 진보했다. 독일은 이 무기를 1940년 유럽 침공에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1942년 북아프리카 공격에 재차 사용했다. 독일의 잠수함 기술은 1940년 당시에는 영국과 미국보다 매우 앞서 있었다. 일본은 해상 전투기 출격을 위한 특수 기술을 개발했고, 원거리에 있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일본의 매우 정교한 전투기는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급습했다.
- 미국의 대량생산 기술, 특히 대규모 자동화된 일관작업 라인(assembly lines)은 1941년과 1942년에 군수물자를 생산하도록 효율적으로 전환되어, 독일과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은 비행기, 배, 탱크나 기타 다른 무기를 곧바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연합국 과학자와 기술자는 영국과 미국의 공군과 해군 기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히 잠수함과 탱크의 성능 향상을 위해 곧 연구에 착수했다. 1942년 후반에 이르자 연합국 무기는 적어도 적국의 무기만큼 진보했고, 수적으로도 더 많아졌다.
- 1943년에 연합국 해군은 레이더와 수중 음파탐지기 기술로 독일의 유보트를 상당수 격침시켜 해전에서 독일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1940년에 개발된 ‘센티미터 레이더(centimetric radar)’였다.
- 독일은 전쟁 초기에 로켓 기술 분야에서 큰 성과를 얻었고, 이를 영국해협을 지나 목표 지점인 런던을 향해 프로펠러가 달린 로켓 폭탄(V1과 V2)을 발사하는 데에 사용했다. 로켓포가 영국 국민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은 상당했다. 그러나 독일은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깰 만큼 충분한 양의 로켓을 만들 수 있는 생산기술을 개발하지는 못했다.
- 영국의 랑카스터 B1(Lancaster B1)과 미국의 보잉 B17F(Boeing B17F)는 6,000파운드의 폭탄을 싣고 1,300마일을 비행할 수 있었고, 37,500피트 상공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독일 폭격기보다 더 높게, 더 멀리 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격추 위험이 훨씬 적은 상태에서 독일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는 일본에 대해) 광범위한 폭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 기(Gee) 항공 운항 시스템
- 이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야간 공습 폭격의 정확도는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 시스템을 장착하니 정확도가 두 배로 올랐다. 또한 1942년 12월에는 오보에(Oboe) 시스템이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목표 지점 20야드 안에 이르렀을 때 비행기에 음향 메시지를 보내주는 무선통신 장치로 효과가 뛰어났다.
- 연합국이 가장 우월했던 분야는 정보 수집 분야였는데, 이것은 영국의 일급비밀이었던 울트라 프로젝트를 통해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연합국은 독일과 일본의 정보 체계를 손에 넣거나 몰래 알아 냄으로써 몇 가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적국의 시스템을 해독한 암호 해독가의 노력과 일본과 독일이 보내는 암호 메시지 해독에 도움이 된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었다. 독일의 암호 통신은 에니그마(Enigma)라는 기계를 이용했는데, 이것은 암호 체계를 계속 바꿀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전쟁 초기 몇 개월 동안 폴란드 정보국은 ‘봄베(Bombe)’라는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에니그마 메시지의 일부를 해독할 수 있었다. 폴란드가 함락된 이후, 컴퓨터 분야의 뛰어난 개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의 지휘로 영국 과학자들은 독일의 빈번한 암호 체계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던 ‘봄베’의 기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1940년 4월 15일, 새롭게 개선된 ‘봄베’는 매우 빨랐으며, 몇 시간 내에(이전처럼 며칠이 아님) 일련의 독일 암호 메시지를 해독해냈다. 몇 주 후 이 컴퓨터는 독일 메시지를 하루에 1,000개 정도 해독했으며, 영국에게(후에 미국에게도) 전쟁 종료 때까지 적군의 작전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독일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전쟁 후반기에 정보 분야에서 일하던 과학자는 최초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디지털컴퓨터 ‘컬로서스 II(Colossus II)’를 제작했고, 노르망디 상륙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쯤에 이 컴퓨터를 작동하기 시작하여 엄청난 양의 독일 정보를 포착해내고, 거의 즉각적으로 해독할 수 있었다. 1941년, 미국도 (영국의 울트라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마술 작전(American Magic Operation)으로 독일의 에니그마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일본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는 데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이를 포함하여 정보 분야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
- 미국은 포착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고, 적절하게 해석했더라면 1941년 12월에 일어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 당국자는 그러한 침공은 사전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보를 받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제때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 군수공장에 노동력 수요가 늘자, 흑인이 남부 농촌 지역에서 산업도시로 많이 이주했다. 이 때문에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제적 상황은 향상되었으나, 도시 내에는 긴장이 감돌 뿐만 아니라 때로는 폭력 사태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갈등은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발발했다. 도시의 인종적 불화로 인종 폭동이 일어나 34명이 죽는데, 이 중 25명이 흑인이었다.
- 전쟁이 끝날 무렵, 흑인 병사의 수는 7배로 증가하여 70만 명으로 늘었다. 어떤 훈련소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통합되었고, 흑인을 백인 해군 병사와 함께 복무하도록 허용했으며, 더 많은 흑인 군단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대략 2만 5,000명의 인디언이 군대에 복무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다수가 전투에 참가했고, 일부(거의가 나바호 인디언)는 무전기와 전화를 통해 (적군이 이해할 수 없을) 인디언 언어로 말하며 군사통신원으로 일하는 ‘암호병(code-talkers)’이 되었다.
- 어떤 이는 보호구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비 인디언(non-Indian) 세계에 남아 동화의 길을 택했다.
- 젊은이가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군수물자 생산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보호구역을 떠나는 바람에 몇몇 부족에서는 인력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전시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자, 1934년의 인디언 재조직법(Indian Reorganization Act)으로 인해 시작된 부족 자율권의 부활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다. 보호구역 제도를 없애고 백인 사회로 동화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압력이 너무 심해져서 인디언 업무국(Bureau of Indian Affairs)의 국장으로 열정적 활동을 했으며 보호구역을 부활시키려고 많은 일을 해온 존 콜리어(John Collier)가 1945년 사임했다.
- 태평양 해안 지역과 남서부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전시 기간 중 많은 수의 멕시코 노동자가 미국에 들어왔다. 미국과 멕시코 정부는 1942년에 특정한 직종에서 일정 기간 동안 일할 수 있도록 미국 입국을 허용하는 브라세로(braceros, 계약 노동자)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일부는 떠돌이 농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많은 멕시코인이 처음으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멕시코인은 1940년대 이래 미국 도시로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다음으로) 둘째로 거대한 그룹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서부에 모여 거주했으나,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그 외 중서부와 동부의 다른 산업도시에도 멕시코계 지역사회가 형성되었다.
- 길거리 갱단[파추코스pachucos]
- ‘주트수트(zoot-suit)’
- ‘주트수트 폭동(zoot-suit riots)’ 이후 로스앤젤레스는 주트수트 착용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주트수터스(zoot-suiters)’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4일간 폭동이 일어나, 롱비치에 주둔한 수병이 멕시코계 미국인 지역사회를 습격해 주트수터스(이들이 백인 수병을 공격했다고 추정됨)를 공격했다.
- 3 전시 미국의 인종과 성
- 주트수터스(Zoot-Suiters) 통 넓은 바지, 길고 헐렁한 재킷, 큰 칼라, 과장되게 늘어진 시계줄, 매끈하게 매만진 뒷머리 등은 모두 주트수트(Zoot-Suit)라고 알려진 외양의 특징으로, 로스앤젤레스와 타 지역 멕시코계 미국인 청년에게 인기 있었다.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의 ‘주트수트 폭동’은 백인(이 경우는 근처에 주둔한 병사)이 남서부 전역에서 급속히 성장하던 치카노 지역사회의 문화를 수상쩍게 바라본 결과 일어났다.
-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인에 대해 대중적 편견이 생기지 않았으나,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 심각해졌다.
- 미국에는 약 12만 7천 명쯤 되는 그리 많지 않은 일본계 미국인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캘리포니아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 약 3분의 1은 귀화하지 않은 1세대 이민(Issei)이었고, 3분의 2는 귀화했거나 미국 태생의 시민(Nisei)이었다.
- 결국 1942년 2월, 대통령은 서부 해안의 군부 관리와 정치 지도자의 압력과 전쟁부(War Department)의 권고에 부응하여, 군대가 일본계 미국인을 ‘수용(intern)’하도록 승인했다. 10만 명이 넘는 이들(1세대와 2세대 모두)이 체포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재산을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고(종종 재산 포기를 의미했음) 정부가 ‘재정착 수용소(relocation centers)’라고 이름 붙인 내륙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 무섭고 고통스러운 고립 상태에서 취업도 못하고, 단지 최소한의 의료 진료만 제공받으며, 자녀에게 좋은 교육도 시키지 못하면서 3년간이나 지내야 했다. 대법원은 1944년의 판결에서 강제 이주 조치를 지지하고 승인했다. 비록 대다수의 일본계 미국인이 그해 말에 풀려났지만, 1980년대 말 의회가 마침내 국가의 잘못을 배상하려고 하기 전에는 피해를 거의 보상받지 못했다.
-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국과 동맹 관계였던 미국은 중국계 미국인의 법적·사회적 위상을 상당히 높여놓았다. 1943년, 중국 정부와의 관계를 다소 개선하기 위해 국회는 1892년 이래 거의 모든 중국인 이민자를 가로막았던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s)을 철폐했다. 중국인에게 새로이 할당된 이민자 수는 적었지만(1년에 105명), 많은 중국 여성이 미군의 전쟁 신부(war brides)나 약혼자를 위한 규정과 그 외의 규정에 따라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전쟁 발발 후 처음 3년 동안 중국 여성 4,000명 이상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중국계 미국 영주권자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적대감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는 줄어들었다. 이는 정부의 홍보 활동과 대중문화에서 중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일본인과는 대조적으로), 또 다른 이유는 중국계 미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이전의 소수 집단처럼) 노동력 부족으로 고심하던 군수공장과 호황세를 보이던 지역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었던 차이나타운에서 이주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국적 집단보다도 중국계 미국인의 징집 비율이 더 높았고(전체 성인 남성의 22퍼센트가 징집됨), 대부분의 도시 내 중국인 지역사회는 전쟁 수행 노력을 위해 눈에 띄게 열심히 일했다.
- 군대에 복무하는 남성 노동자를 대신하여 여성이 산업계에 많이 취업하면서 전쟁 동안 취업 여성의 수는 거의 60퍼센트 증가했다. 취업 여성은 기혼인 경우가 더 많았고, 전반적으로 이전 시기의 대다수의 취업 여성보다 나이가 많았다. 많은 공장주는 직종을 여전히 성별로 분류하여, 가장 임금이 높은 지위를 남성에게 배당했다(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일자리도 인종별로 분류했다. 흑인 여성은 대체로 백인 여성보다 더 저급한 업무에 배당되었고, 저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의 일’이라고 간주되었던 중공업 계통의 일도 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전시 여성상인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는 여성 산업 노동자가 새로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을 상징했다. 상당수의 여성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자녀가 있는 여성의 취업에 대한 편견을 포함하여, 편견을 다소 약화시키는 데 최소한의 도움을 주었다.
- 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는 공장이 아니라 서비스 부문에 종사했다. 무엇보다도 정부에 군사·산업 부문과 함께 사무 인력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성은 정부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육군(WAACs)과 해군(WAVEs)에서도 여성이 많이 일하게 되었으나, 군대에서 여성의 일은 대부분 사무직이었다.
- 보육 시설이나 다른 지역 내 탁아 시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떤 여성은 일하는 동안 아이를 집이나 때로는 공장 주차장의 차 안에 혼자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아이들을 ‘열쇠 가진 아이(latch-key children)’ 또는 ‘8시간 고아(eight-hour orphans)’라고도 했다. 전쟁 기간 중 청소년 범죄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전쟁으로 가족이 떨어져 있게 된 때문이기도 했다.
- 13세에서 18세 사이의 10대 중 3분의 1 이상이 전쟁 말기에 고용되었고, 이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률이 떨어졌다.
- 전쟁 동안 출판·연극·영화 산업은 기록적인 사업을 했다. 전 인구의 절반가량이 매주 영화관에 갔다. 잡지, 특히 《라이프(Life)》와 같은 사진 잡지는 전쟁 기록사진과 글을 제공하여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같은 이유로 라디오를 가진 사람과 청취자도 늘어났다. 연료 배급과 고무 부족으로 자동차 여행이 제한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비교적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여행했다. 휴양지의 호텔, 카지노, 경마장 등은 고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미국인은 지역사회 내에서 오락거리를 더욱 자주 찾았다. 무도장은 매혹적인 밴드 음악에 이끌린 젊은이로 꽉 찼다.
- 무도장과 라디오 방송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스윙(swing)은 비교적 새로운 재즈풍의 음악이었는데, 이것은 많은 다른 종류의 대중음악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세계에서 나왔다.
- 군관계자는 전쟁 기간 중 국내에 남아 있던 군인, 특히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있는 육군과 해군 병사가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친절하고 ‘건전한(wholesome)’ 여성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미군 복지단(United Servicemen’s Organization, USO)의 지부는 클럽에서 여종업원으로 일할 젊은 여성 수천 명을 모집했다. 이들은 잘 차려입고 춤을 잘 추며 외로운 남성과 즐겁게 대화할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또 다른 여성은 ‘무희 여단(dance brigades)’에 가입하거나 사병과 저녁에 교제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군 기지를 다녔다. 이들 역시 예쁘고 매력적인 차림을 하였으며, 이전에 만난 적이 없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남성과 편안하게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USO 여성’과 무희 여단 소속의 여인은 클럽 파티에서나 춤출 때 외에는 남성과 어떠한 접촉도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 규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군 당국은 병사 집단에서 남녀 동성애자를 뿌리 뽑기 위해 정밀 조사를 실시한 반면(동성애의 증거를 주의 깊게 조사하여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동성애자를 즉각 퇴출시킴), 이성과 가진 불법적인 성관계에 대해서는 조용히 넘어갔다. 이는 많은 남성에게 자연스럽고도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대가 미국의 많은 대학을 거의 다 점거했다.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남학생과 교수가 (그리고 많은 여성도) 떠나서 대학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연방정부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아 대학을 장교 훈련소로 바꾸었다.
- 이제는 개혁보다 승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에 또한 전쟁 초기 2년 동안 나타난 정치적 현실을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의회 내의 보수주의자는 뉴딜 개혁을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들은 전쟁을 구실로 삼아, 뉴딜이 이루어낸 것을 해체하려고 했다.
- 선거에서 중심이 된 것은 국내 경제문제였으며, 간접적으로는 대통령의 건강도 중요한 선거 이슈가 되었다. 대통령은 동맥경화증에 시달려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전으로 그는 일시적으로 다시 살아난 듯했다. 루스벨트는 10월 말에 강건한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대중의 의혹을 떨쳐내고 당선을 확신하게 했다. 그는 일반투표에서 53.5퍼센트를 얻었고, 듀이는 46퍼센트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듀이의 99표에 비해 432표에 이르는 선거인단의 표를 얻었다. 민주당은 상원에서 1석을 잃고 하원에서는 20석을 얻어, 상하 양원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 1944년 초,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는 독일의 산업 시설과 다른 목표물을 시계 도는 방향으로 공격하여 생산을 급격히 감소시켰고,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특히 참혹했던 것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그리고 베를린과 같은 독일의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이었다. 1945년 2월, 드레스덴에서는 소이탄 공습을 받아 대폭발이 일어나, 이전까지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이 도시의 4분의 3이 파괴되었고, 민간인 13만 5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 통과하고-1944년 6월 노르망디 침공
- 엄청난 군사력이 1944년 봄 이전 2년간 영국에 집중배치되어 있었다. 병력은 거의 300만 명이었고, 해군 함선과 군 장비가 한곳에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1944년 6월 6일 아침, 거대한 침공군이 행동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독일인이 예상하고 준비했던 영국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이 아니라, 노르망디 해안의 코탕탱 반도(Cotentin Peninsula)의 60마일을 따라 상륙했다. 비행기와 해안가의 전함이 나치 방어선을 폭격하는 동안, 4,000척의 함선이 해안에 군사와 군수품을 상륙시켰다(3개 사단의 낙하산부대가 전날 밤 독일 방어선 너머에 투하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연합군이 우월한 인력과 장비 덕분에 점차 우세해졌다. 일주일도 안 되어 독일군은 노르망디 전 해안에서 거의 철수하고 말았다.
- 대규모 연합군은 라인 강(Rhine River)에서 나치의 강경한 방어선에 부딪혀 진격을 멈추었다. 12월 중순, 독일군은 아르덴느 숲(Ardennes Forest)에서 50마일의 전선을 따라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독일군이 전면으로 압박해 옴에 따라, 미군 전선에 커다란 돌출부[bulge] 형태가 나타나 붙여진 이름)에서 독일군은 안트워프(Antwerp)를 향해 55마일을 진격했고, 마침내 바스또뉴(Bastogne)에서 멈추었다. 이것은 서부 전선에서 있었던 마지막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 연합군이 프랑스를 지나며 진격하고 있을 때, 소련군은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로 서진(西進)했다. 1945년 1월 말, 소련군은 독일 내 오데르 강(Oder River)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이른 봄, 소련군은 베를린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Montgomery)는 수백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부터 독일로 밀고 들어갔고, 브래들리의 군대는 중부 독일을 휩쓸며 루르(Ruhr)에 주둔한 30만의 독일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 미군은 독일의 예상보다 빨리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어서, 베를린과 프라하에서 소련군을 앞지를 수도 있었다. 미군과 영국군 고위 사령부는 그렇게 하는 대신 중부 독일의 엘베 강(Elbe River)을 따라 진격하던 것을 멈추고 소련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소련군은 동부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4월 30일, 소련 군대가 베를린 외곽에 주둔하고 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수도에 있는 그의 벙커에서 자살했다. 1945년 5월 8일, 남아 있던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했다.
- 1944년 2월, 체스터 니미츠 제독(Admiral Chester Nimitz)이 지휘하는 미국 해군은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 제국의 외곽을 분쇄했다. 한 달 내에 미국 해군은 일본의 또 다른 중요한 기지를 파괴했다. 그동안 미국 잠수함이 일본 수송단을 거의 다 파괴했기 때문에 일본 국내 경제는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1944년 6월 중반, 대규모의 미국 함대가 견고하게 요새화된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를 점령했고, 몇 차례에 걸친 혈투 끝에, 도쿄에서 1,350마일 떨어져 있는 티니안, 괌, 사이판을 함락했다. 9월에, 미군은 캐롤라인(Carolines) 섬 서부에 상륙했다. 그리고 10월 20일, 맥아더 장군의 군대가 필리핀의 레이테 섬(Leyte Island)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이제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 함대를 세 곳의 중요한 전투에 배치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해전이었으며 미군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겨 준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였다.
- 1945년 2월, 미국 해병대는 해병대 역사상 가장 값비싼 희생을 치른 전투를 벌인 끝에, 도쿄에서 750마일 떨어진 이오지마(硫黃島)의 작은 화산섬을 함락했다. 일본의 남쪽으로 37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오키나와(沖繩) 전투에서 일본은 최후의 순간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일본은 매 주일 미국과 영국의 함선을 향해 가미가제(神風) 특공 비행대(자살 비행대)를 보내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도 비행대 중 3,500대를 잃었다. 해안의 일본 군대도 목숨을 걸고 미국의 함대에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미국과 연합국은 1945년 6월 말, 오키나와를 함락할 때까지 거의 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사망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만일 미국인이 일본에 상륙했다면, 이 정도로 맹렬한 전투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필요없으리라는 징조가 1945년 초에 나타났다. 일본은 싸울 배도 비행기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3월에 미국 폭격기가 도쿄를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여 도시가 불바다가 되고 8만 명 이상이 숨지자, 일본인의 저항 의지는 더 약해졌다.
- 1945년 8월, 미국이 전쟁 중 개발해온 가공할 신무기를 사용하자 그들의 노력은 소용없어졌다.
- 1939년, 미국은 나치 과학자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인 원자탄 개발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국과 영국은 곧 독일보다 먼저 이 무기를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신무기 연구는 20세기 초 원자물리학자가 발전시킨 이론을 기반으로 했으며 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개발한 현대 과학의 근거가 되는 몇 가지 개념에서 발전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상대성원리(theory of relativity)는 질량과 에너지 관계를 규명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는 이론적으로 볼 때 물질은 엄청난 힘 에너지로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으니 미국도 개발을 시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우라늄 사용에 중점을 두었는데, 우라늄의 원자 구조는 핵의 연쇄적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핵의 연쇄적 반응은 방사능 물질에 들어 있는 원자핵이 중성자에 의해 쪼개질 때(핵분열로 알려진 과정) 일어난다. 각각의 분열은 계속 급속도로 증가된 원자의 분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중성자를 만든다.
- 1940년대에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우라늄의 방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39년, 덴마크의 위대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Neils Bohr)는 미국에 독일의 방사능 실험에 관한 소식을 알렸다. 미국은 그때 여러 곳에서 실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1940년에 컬럼비아 대학의 과학자는 우라늄으로 연쇄 반응 실험을 시작했고, 무기의 연료로써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다. 이 실험은 1941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중단되어 버클리 대학과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1938년 미국으로 이민온) 엔리코 페르미가 1942년 12월에 조절된 연쇄 분열 반응을 처음으로 이루어냈다. 그때까지는 육군이 연구를 관리해왔고, 프로젝트를 재조직하기 위해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장군을 지명했다. 이 프로젝트는 육군 공병단(Army Corps of Engineers)의 맨해튼 기술국(Manhattan Engineer District Office)에서 계획했기 때문에 곧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그 후 3년이 넘도록 맨해튼 계획에 20억 달러를 비밀리에 쏟아부었고
- 반복 가능한 핵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던 중 플루토늄(버클리 대학의 과학자가 처음 발견한 우라늄의 한 파생물)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플루토늄은 폭탄에 실질적인 연료를 공급할 수 있다고 입증되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밑에서 일하던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가 실제 원자폭탄의 제조를 담당했다. 1944년까지 정부는 맨해튼 계획에 매년 10억 달러 이상을 비밀리에 지원했고, 과학자는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많았음에도 어느 누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실험을 진척시켰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첫 번째 폭탄을 실험해보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렸다. 1945년 7월 16일 새벽, 과학자는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 실험을 보기 위하여 뉴멕시코 주의 알라모고도(Alamogordo) 근처 사막에 모여들었다. 과학자가 트리니티(Trinity)라고 명명한,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폭탄의 폭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원자탄이 폭발하자 지구상의 무엇보다도 밝은 섬광이 빛났고, 이어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으며, 불모의 사막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루스벨트 사망 이후 4월에 대통령 직을 승계함)은 독일 포츠담(Potsdam)에서 연합국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던 중 원자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 8월 3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심각한 참화를 맞을 것이라고 (영국과 공동으로 서명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일본이 최종 기한을 지키지 못하자, 트루먼은 일본에 새로 개발된 원자무기를 투하하라고 공군에 지시했다.
- 어떤 이들은 원자탄 공격이 불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천황제 유지에 동의했다면(결국은 그리했지만), 또는 단지 몇 주만 더 기다렸다면 일본이 항복했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미국이) 큰 희생이 따르는 침략을 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게 한 것은 원자탄뿐이었다고 주장했다.
-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맨해튼 계획을 전혀 몰랐던 트루먼은 분명히 단순한 군사적 결정을 내렸다.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무기가 있었고, 그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을 어떤 이유도 없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의 B29 폭격기인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일본의 산업 중심지였던 히로시마에 원자무기를 떨어뜨렸다. 단 하나의 폭탄으로, 예전에는 피해를 입지 않았던 중심가 4평방 마일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후일에 이루어진 미국의 추정에 따르면 민간인이 8만 명 이상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이 방사성 낙진(죽음의 재)으로 큰 해를 입어 고통당하거나 이 영향으로 자녀가 선천적 결함을 갖게 되었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이틀 후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른 미군 비행기가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탄을 떨어뜨려 10만에 이르는 인명이 희생되고, 아울러 도시도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결국 천황이 내각의 교착상태에 관여했고,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항복하겠다고 발표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Missouri) 선상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 1,400만의 참전 군인이 전사했고, 더 많은 민간인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갔다. 미국은 몇몇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특히 러시아와 독일에 비해 사상자 수가 훨씬 적었지만, 그 희생은 엄청났다. 32만 2,000명이 죽었고 80만 명이 부상당했다. 세계는 핵전쟁과, 앞으로 수십 년간 평화에 어두움을 드리울 양대 최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적대로 인해 위협받으며, 지속적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맞게 되었다.
- 트루먼은 원폭 사용의 유일한 대안은 일본 본토 진격인데, 이렇게 하면 100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희생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 영국의 물리학자 블라켓(P. M. S. Blackett)은 일찍이 1948년에 쓴 《공포, 전쟁, 그리고 폭탄(Fear, War, and Bomb)》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군사행동이라기보다는 소련과의 냉전 시대 외교전의 첫 번째 주요 작전이었다”라고 기술했다.
- 가르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
- 그는 원폭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곧 항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그는 미국은 원폭을 일본에 대한 공격 목적보다는 오히려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즉 “유럽에서 소련을 좀 더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보았다.
- 전쟁이 일단 끝나자, 긴장은 급작스레 커져 ‘냉전(Cold War)’ 상태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연합국이었던 두 나라 간의 팽팽한 긴장과 위태로운 경쟁은 향후 수십 년간 국제 정세와 미국의 국내 상황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 1941년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에 처음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국가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군사적 동맹과 세력권(spheres of influence)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국가 관계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조정하며, 모든 국가의 자결권 보호자 및 분쟁의 조정자로 봉사할 국제기구가 있는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롯하여 많은 미국인은 이 비전에 마음이 끌렸다. 또 하나의 비전은 소련이 꿈꾸던 것인데, 영국도 이번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 스탈린과 처칠은 대서양헌장에 서명하긴 했다. 그러나 영국은 거대한 제국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국가의 자결권을 보호한다는 이상의 궁극적 의미를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소련도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서방의 공격을 막기 위한 중부 및 동부 유럽에 안전 지역을 만들어 보호막을 삼기로 했다. 그래서 처칠과 스탈린은 전후의 세계 구조를 강대국이 전략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지역을 통제하고 유럽에 전통적인 세력균형이 재등장하는 것과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구상했다. 이렇게 두 가지 비전이 달랐기 때문에 화해(peacemaking) 과정은 점차 변모하여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 소련과의 연합에 심각한 긴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1943년 1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만나 연합국의 전략을 논의할 때부터였다. 이 두 지도자는 스탈린의 가장 중요한 요구-서유럽에 제2전선을 즉각적으로 구축하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추축국(Axis powers)으로부터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미국과 영국이 히틀러와 별도로 평화 협상을 하거나 소련이 홀로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1943년 11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란의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이때는 루스벨트의 가장 효과적인 교섭 도구-스탈린이 독일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미국의 협력-가 별로 필요 없어졌다. 독일은 러시아로의 진격을 멈추었다. 소련군은 이제 서방으로의 공세에 착수했다. 그럼에도 테헤란회담(Teheran Conference)은 거의 모든 면에서 성공적으로 보였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우호 관계를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유럽의 전쟁이 끝난 직후 태평양전쟁에 소련이 참여해달라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했다. 그 대가로 루스벨트도 영국과 미국이 제2전선을 6개월 이내에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 루스벨트와 처칠은 역사적으로 폴란드의 영토였던 일부 지역을 스탈린이 병합할 수 있도록, 소련의 국경을 서부로 이동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독립 상태로 남게 되는 지역에 세워질 전후 정부의 성격에 관해서는 의견이 아주 달랐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런던에서 1940년 이래로 활동하고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루블린(Lublin)에서 전쟁 기간을 지냈던 또 다른 정부, 즉 친공(親共)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세 지도자는 테헤란회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 1945년 2월, 평화회담을 위하여 루스벨트는 소련의 얄타에서 처칠과 스탈린을 만났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재약속해준 대가로, 소련이 1904년 러일전쟁 때 잃은 태평양 상의 일부 영토를 되찾는 데 동의했다.
- 루스벨트는 그 회담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충분했으나, 사실은 심각하게 아픈 상태였다. 두 달 후, 루스벨트는 전후 평화 전망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낙관적이라고 판명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고, 그 후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 새로운 국제연합(UN)은 모든 회원을 대표하는 총회, 거부권을 갖는 5개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의 영구 대표와 그 외 여러 국가의 임시 대표로 이루어진 안전보장이사회(Security Council)를 구성하기로 했다. 합의 사항은 1945년 4월 25일에 시작한 샌프란시스코의 50개국 회담에서 초안된 국제연합헌장의 토대가 되었다. 미국의 상원은 그해 7월, 80 대 2의 표차로 그 헌장을 비준했다.
- 당시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이미 ‘루블린’의 친공산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정부를 세웠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런던’의 친서구적인(pro-Western) 폴란드인이 바르샤바 정부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자유롭고 민주적 선거에 기초한 정부를 구상했고,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모두 민주적 선거에서 친서구적인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인원수는 특별히 정하지 않고 친서구적인 폴란드인이 입각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애매한 타협안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폴란드에서 ‘자유롭고 구속 없는(unfettered) 선거’를 치르는 것에 동의했으나,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 루스벨트는 독일이 재건되고 재통일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스탈린은 독일이 과중한 보상을 떠안고 영구 분단되기를 원했다. 마지막 합의는, 폴란드 협정처럼 애매하고 불안정했다. 배상 결정은 미래에 조직될 위원회가 맡게 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은 독일에서 각각의 ‘점령 지역(zone of occupation)’을 지배하기로 했다. 이것은 전쟁 종결시 군대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결정되었다. 베를린은 이미 소련의 점령 지역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적 중요성 때문에 4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각국이 점령했다. 독일 재통일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얄타회담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모든 민주적 요소를 광범위하게 대표하는’, 그리고 ‘국민의 의사에 책임지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애매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달리 말해, 얄타협정(accords)은 전후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기보다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비껴간 엉성한 원칙이었다.
-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차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으면서, 이른 봄 워싱턴을 떠나 조지아 주의 웜 스프링즈(Warm Springs)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서 그는 1945년 4월 12일, 갑작스럽고도 심각한 뇌졸중을 일으켜 사망했다.
- 트루먼은 대통령직에 오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소련에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새 대통령은 스탈린이 얄타에서 미국과 정식 협정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협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은 4월 23일 소련의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Molotov)를 만나 얄타협정을 위반했다고 심하게 비난했다.
- 러시아군은 이미 폴란드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연합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미국은 아직도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2차 분쟁을 일으킬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었다. 트루먼은 미국이 원하는 것의 ‘85퍼센트’는 얻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엔 훨씬 더 적은 몫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우선 폴란드를 양보했다. 스탈린이 친서방적인 망명정부 요인에게 몇몇 중요치 않은 것을 양보하자, 트루먼은 비공산 세력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기대하면서 바르샤바 정부를 승인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그러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트루먼은 러시아 점령 독일에 위치한 포츠담에서 7월에 처칠(협상 도중에 치러진 영국의 선거 후 클레먼 애틀리Clement Attlee로 교체되었다)과 스탈린을 만났다. 트루먼은 마지못해 스탈린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폴란드-독일’ 국경의 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소련이 미국·프랑스·영국 점령 지역의 독일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자 거부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보아 독일이 분단 상태로 남게 되리라는 것은 사실상 확실해졌다. 미국에 우호적인 서방의 점령 지역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합쳐졌고, 러시아의 점령 지역은 친소련적이며 공산주의 정권을 지닌 국가로 남게 되었다.
- 장제스는 미국에 대체적으로 우호적이었으나, 그의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한 데다 대중적 지지 또한 허약했다. 1927년 이후 내내 장제스가 이끌어온 국민당 정부(nationalist government)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주의 군대와 격렬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에는 중국 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 트루먼은 마지못해 장제스를 지원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정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심지어 대의명분을 잃고 있을 때에도, 미국은 계속해서 장제스에게 돈과 무기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국민당 정권을 살리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미국 정부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대신할 강력하고 친서방적인 세력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일본의 부활이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난 처음 몇 년 동안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다스리고 있을 때) 실시한 엄격한 점령 정책을 포기하면서, 일본에서 산업 발전을 막는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도록 장려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개방되고 단합된 세계를 바라는 비전은 강력하고도 친미적인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을 지닌 분단된 세계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 1945년 말,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것은 ‘봉쇄(containment)’였다. 미국과 그 우방은 단합된 ‘개방’ 세계를 만들기보다는 소련의 팽창 위협이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봉쇄’하고자 애썼다.
- 터키에서는 스탈린이 지중해에 이르는 중요한 바다 항로에 대한 통제력을 얻고자 애썼다.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친서방 정부를 위협했으며, 영국은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트루먼은 단호한 새로운 정책을 공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향력 있는 미국의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의 개념을 끌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때에 케넌은 미국이 ‘미국과 더불어 어떠한 일시적 타협(modus vivendi)도 할 수 없다는 광적인 신념을 가진 정치 세력’과 맞서 있으며, 유일한 해답은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끈기 있는, 그러나 단호하고도 빈틈 없는 봉쇄’라고 경고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의회에 출석하여 트루먼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된 케넌의 경고를 사용했다. 그는 “나는 미국의 정책이 무장한 소수 세력이나 외부의 압력이 시도하는 예속에 저항하는 자유민(free people)을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그리스와 터키를 돕기 위해 4억 달러를 요구했고, 의회는 신속하게 승인했다.
- 미국의 공약은 궁극적으로는 터키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리스 정부가 공산주의 반란을 분쇄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더 중요하게도 그 공약은 이후 30년 이상 지속될 미국 외교정책의 기초를 확립했다.
- 유럽인에 대한 인도적 관심, 유럽이 빨리 재건하여 스스로를 먹여 살리지 못하면 미국이 경제적으로 계속 지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미국 상품을 팔기 위한 유럽 시장에 대한 강력한 욕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정책 결정자는 서유럽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친미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정권이 자국 내에서 급속하게 자라고 있는 공산당의 통제로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1947년 6월,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은 회복 프로그램을 기안하는 데 참여하는 (소련을 포함한) 유럽의 모든 국가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비록 소련과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는 예상대로 재빨리 거부했지만, 서유럽 16개 국가는 기꺼이 참여했다.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소련 지배의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미국 내의 반대도 대부분 잠잠해졌다. 그해 4월, 의회는 마셜플랜을 운영하게 될 경제 협력국(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창설을 승인했다. 그 후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셜플랜이 실시되어 120억 달러 이상의 미국 원조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는 실제적인 경제 부흥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0년이 끝나갈 무렵 유럽의 산업 생산은 64퍼센트 증가했고, 회원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은 감소했으며, 미국이 교역할 수 있는 기회가 되살아났다.
- 1946년에 설립된 원자력 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는 민간과 군부 쌍방의 모든 핵연구를 감독하는 권한을 지닌 기구가 되었다. 1950년에 트루먼 행정부가 새롭게 개발을 승인한 수소폭탄은 미국이 1945년에 사용했던 폭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핵무기였다. 1947년에는 국가 안전 보장법(National Security Act)이 제정되어 미국의 주요 군사 및 외교 기관을 재편했다. 새로 만들어진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는 이전에 전쟁부와 해군부가 나누어서 수행했던 기능을 결합하여 군사력의 모든 부문을 감독하게 되었다. 백악관에서 운영하는 국가 안전 보장 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는 외교 및 군사정책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시 중에 만들어진 전략 서비스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을 대체하는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은 공개적이거나 은밀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책임을 졌으며, 냉전이 계속되는 한 미국의 목표를 위하여 비밀리에 정치적·군사적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달리 말해, 국가 안전 보장법은 대통령에게 미국의 국제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권력을 확대해주었다.
- 독일의 재건은 서방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트루먼은 서방이 점령하고 있는 세 지역을 하나의 새로운 서독(비록 소련 지역에 위치했지만 베를린 시의 미국·영국·프랑스 지역을 포함한 곳)으로 합치기로 영국, 프랑스와 합의했다. 스탈린은 재빨리 응전하여, 1948년 6월 24일, 베를린의 서방 지역을 촘촘히 차단했다. 그는 독일이 만약 공식적으로 분단되어야 한다면, 서독 정부는 소련이 관할하는 동부 지역의 핵심에 있는 전초기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트루먼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트루먼은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여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베를린 시민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식량, 연료, 생필품을 대규모로 공중 보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중 보급은 열 달 이상 지속되었는데, 거의 250만 톤의 물자가 공급되어 200만의 시민이 생존했다. 1949년 봄, 스탈린은 더 이상 효력 없는 봉쇄를 풀었다. 그해 10월, 독일의 분단-서방의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서독)과 동방의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동독)-은 공식화되었다.
- 1949년 4월 4일, 12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창설하는 데 서명했으며, 한 회원국에 대한 군사 공격은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했다. 나토 국가는, 많은 사람이 믿는 바에 따라 소련 침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에 상비군도 두기로 했다. 나토의 결성에 마침내 자극받은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부와 동맹을 구성했다. 그 동맹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 2 평화의 붕괴
- 1949년 9월, 소련이 예상보다 몇 년 앞서 최초의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키자, 많은 미국인이 경악하고 공포에 빠졌다. 미국인은 1949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중국에서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놀라운 속도로 붕괴한 사건에도 많이 놀랐다. 장제스는 정치적 동맹자와 군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중국 본토 앞바다에 있는 포모사(Formosa, 타이완)라는 섬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중국 본토 전체는 많은 미국인이 소련의 확장이라 믿었던 공산주의 정권의 통제에 들어갔다. 미국은 새 공산주의 정권의 승인을 거부했다.
- 미국은 사실상 공산주의 팽창이 일어나는 곳이면, 문제 지역이 전략적 혹은 경제적 가치가 있건 없건, 어디든지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단절된 직접적인 이유는, 대다수가 동의하기를, 얄타와 포츠담에서 구상된 전시 합의를 스탈린이 위반했고 소련이 팽창주의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을 강요한 것은 전 세계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더 큰 이데올로기적 구상의 일부였다. 미국의 정책, 즉 소련의 팽창에 반대하고 미국의 군대를 지속적인 준비 상태로 유지한다는 확고한 공약은 논리적이고 필연적 응전이었다.
- 1945년 이후에도 경제적 성장은 계속되었다. 전시 동안 실질적인 저축액을 쌓아온 노동자의 억눌렸던 소비 수요가 호경기를 자극했다. 60억 달러의 세금 감면도 호경기를 가져왔다. 전역 군인 권리 장전(GI Bill of Right)으로 더 잘 알려진 1944년의 군인 재정착법(Servicemen’s Readjustment Act)이 시행되어 퇴역 군인에게 주택, 교육, 직업 훈련 보조금이 제공됐으며, 지출이 더욱더 늘어났다. 이러한 소비자 수요의 쇄도로 인해 2년 이상 심각한 인플레가 일어났고, 이 시기 동안 물가는 매년 14∼15%의 비율로 증가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은 노동계 소요의 급증이었다. 1945년이 끝날 무렵까지 자동차·전기·철강 산업에서 주요 전면 파업이 있었다.
- 전시에서 평시로 재전환되자, 전시 동안 일터에 투입되었던 수백만의 여성과 소수 인종(minorities)이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퇴역 군인이 집으로 돌아와 산업 경제에서 일자리를 찾으면서, 고용주는 여성, 흑인, 히스패닉과 여타 소수 인종을 공장에서 내쫓고 백인 남성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 여성 노동자의 80%와 거의 모든 흑인과 히스패닉 남성은 계속 일하고자 했다. 전후 인플레, 고도 소비 사회의 상승하는 기대에 맞춰야 하는 압력, (많은 여성이 스스로의 경제적 복지를 책임지게 된) 이혼율의 증가, 이 모두가 결합하여 유급 고용을 바라는 여성의 수요가 늘어갔다. 여성은 산업 일자리에서 배제된 것을 알게 되면서, 다른 경제 영역(무엇보다도 서비스업)으로 점차 이동해갔다.
- 일본이 항복한 며칠 후, 트루먼은 그가 훗날 ‘페어딜(Fair Deal)’이라고 부르게 될 국내 프로그램 21개 조항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사회보장 급부금 확대, 시간당 40센트에서 65센트로 법정 최저임금 인상, 연방 지출과 투자를 공격적으로 사용하여 이룬 완전고용 보장, 영구적인 공정 고용 실시법(Fair Employment Practices Act), 공공 주택과 빈민가 철거, 장기적인 환경 및 공공사업 계획, 정부의 과학 연구 진흥 등이었다. 몇 주 후, 그는 여타 프로그램, 즉 교육에 대한 연방 보조, 정부 의료보험, 선불 의료 혜택(medical care), 세인트 로렌스 내륙 수로(St. Lawrence Seaway)를 위한 자금 조달, 원자에너지의 국유화를 추가했다. 그러나 페어딜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뉴딜의 마지막 몇 년간을 무력하게 만든 대중과 의회의 보수주의에 희생되었다. 진실로 1946년 11월 의회 선거가 시사하듯이 그러한 보수주의는 강화되는 것 같았다. 공화당은 “충분했는가?”라는 간단하지만 압도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했다. 새로운 공화당 주도의 의회는 재빨리 정부 지출을 줄여버리고 뉴딜 개혁안을 잘라버렸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행동은 1935년의 와그너법(Wagner Act)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 결과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 Act)으로 더 잘 알려진 1947년의 노사 관계법(Labor-Management Relations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으로 폐쇄 사업장(closed shop, 우선적으로 노조의 일원이 아니면 누구도 고용될 수 없는 일터)이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비록 유니언 숍(union shop, 노동자는 고용된 후 반드시 노조에 가입해야 하는 사업장)을 만드는 것은 허용됐지만, 여러 주(states)에서는 이조차도 금지할 수 있는 ‘노동권(right-to-work)’ 법령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했다.
- 1948년 대통령 선거운동 전략을 짤 때, 민주당에 대한 지속적인 충성심 호소에 희망을 걸었다. 트루먼은 1948년 내내, (2월 2일, 20세기 최초의 주요 민권 법안을 포함한) 개혁 법안을 하나씩 하나씩 연이어 제안했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의회는 이를 모두 무시하거나 부결시켰으나, 대통령은 가을에 있을 선거전 쟁점을 만들고 있었다.
- 트루먼의 개인적 비(非)인기-많은 선거인단 사이에서 그가 재능이 모자라고 그의 행정부도 허약하고 무능하다고 보는 가정-와 민주당 내의 깊은 분열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해 여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두 개의 파벌은 모두 민주당을 포기했다. 남부 보수주의자는 트루먼이 제안한 민권 법안과 전당대회에서 (미네아폴리스의 개혁 시장인 휴버트 험프리가 기안한) 민권 조항이 정강에 포함된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들은 전당대회에서 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인 스트롬 서먼드(Strom Thurmond)를 후보로 한 주권당[States’ Rights Party, 또는 ‘Dixiecrat’ Party(민주당 탈당파가 결성한 당이라고도 함)]을 만들었다. 동시에 민주당 좌파의 일부는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를 후보로 하는 새로운 혁신당(Progressive Party)에 합류했다. 월리스 지지자는 트루먼 행정부의 국내 정책이 더디고도 비효과적이라고 반대했으며, 소련에 대한 대통령의 대립적 태도에는 더욱 분개했다. 트루먼과 불화 관계였던 민주당의 많은 자유주의자는 당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반공 자유주의자 조직인 ‘미국 민주주의 행동 연합(The 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 ADA)’은 지명전에 경쟁시키기 위해 대중적 전쟁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를 영입하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는 아이젠하워가 거절한 후에야 트루먼의 후보 지명을 받아들였다. 한편, 공화당원은 대통령 후보로 뉴욕 주지사 토머스 듀이(Thomas E. Dewey)를 다시 한 번 지명했다. 금욕적이고 위엄 있으며 능력 있는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 대항해 패할 수 없는 경쟁자로 보였다.
- 의회는 법정 최저임금을 시간당 40센트에서 75센트로 올렸다. 의회는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승인했는데, 그것은 보조금을 75%나 늘려서 1,000만 명에게 추가로 혜택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회는 1949년에 전국 주택법(National Housing Act)을 통과시켰다. 그 법의 내용은 저소득층에게 장기 임대 보조금이 제공되는 주택 81만 채를 건설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다른 논제-전국 의료보험과 교육 보조 등-은 거의 진척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1949년에 제안한 민권법을 의회가 통과시켜 주도록 설득하지도 못했다. 민권법의 내용은 린치를 연방 범죄화하고, 흑인의 투표권을 연방 차원에서 보호하며, 인두세(poll tax)를 폐지하고, 고용에 있어서 차별을 금하기 위해 새로운 공정 고용 실행 위원회(Fair Employment Practices Commission)를 만드는 것이었다.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은 그 법안을 사장시키기 위해 의사 진행을 방해했다.
- 그는 정부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차별을 금하라고 명령했고, 군대 내에서 흑백 분리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무부가 인종차별적 법안에 대항하는 법정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했다. 한편, 대법원은 셀리 대 크레이머 사건(Shelley v. Kraemer)(1948년)을 통하여 인종 문제에 대해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이 사건은 흑인이 이웃 주민이 되는 것을 금하는 ‘사적인 계약서(private covenants)’를 집행하는 데 법정이 이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1945년 7월 앨러머고도(Alamogordo,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이 이루어진 곳으로, 뉴멕시코주 남부에 있음-옮긴이)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과 소련은 일본과 싸우던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양자 모두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추정상 잠정적으로 38선을 따라 한국을 분단했다. 러시아인은 소련 장비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지닌 공산주의 정권을 북쪽에 남겨놓고, 마침내 1949년에 철수했다. 미국인도 몇 달 후, 반공주의자이나 명목상으로만 민주적인 이승만의 친서방 정권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고 떠났다.
- 남한의 상대적 허약성은 재통일을 원하는 북한 정권 내의 민족주의자에게 강력한 유혹이 되었다. 그러한 유혹은 미국 정부가 남한을 미국의 ‘방위 경계선(defense perimeter)’ 내에 두지 않겠다고 암시하자 더욱 커져갔다. 소련이 북한 정권의 남한 침공에 미리 동의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소련은 공격을 지원했다.
-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남한에 미국이 제한적으로 군사를 지원하라고 명령했으며, 같은 날 국제연합(UN)에 개입해달라고 요청했다. 소련은 당시 (이사회가 중국의 새로운 공산 정권의 승인을 거절한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고 있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국 대표는 이승만 정권에게 국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에 대한 국제연합의 동의를 얻어낼수 있었다. 6월 30일, 미국은 육군을 한국으로 보내라고 명령했으며,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했다(여러 국가가 군대와 원조를 제공했지만, 유엔군은 사실 미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9월에 미국이 갑작스럽게 인천에 상륙한 이후, 북한군은 남쪽에서 38선 이북으로 다시 후퇴했다.
- 10월 19일,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유엔군에게 함락되었다.
- 11월 4일, 중국의 팔로군이 전쟁에 개입했다. 유엔군의 공격은 멈추었으며, 그런 다음 와해되었다. 1950년 12월 내내 중과부적인 미군은 팔로군에 대항해 힘들고도 이길 가망이 없는 전투를 했다. 몇 주 내로 공산주의 세력은 미군을 다시 한 번 38선 아래로 내몰았으며,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다시 탈취했다. 1951년 1월 중순, 패주는 끝났다. 그리고 3월까지 유엔군은 최근에 빼앗겼던 영토의 많은 부분을 되찾고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공산주의자를 다시 한 번 38선 이북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제 전쟁은 시간만 질질 끄는 교착상태로 악화되었다.
- 트루먼은 새로운 세계 전쟁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 중국과의 직접적인 마찰은 피하려고 했다. 일단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그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맥아더는 미국이 실제로 중국과 싸우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직접적인 침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중국 국경 북쪽에 밀집해 있던 공산군에게 폭격을 가하여 중국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 1951년 3월, 맥아더는 하원의 공화당 지도자인 조지프 마틴(Joseph W. Martin)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불만을 표현했으며, “어떠한 것도 승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입장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대통령은 마틴 편지의 공개를 용납할 수 없는 불복종으로 받아들였다. 1951년 4월 11일, 그는 맥아더를 사령관에서 해임했다. 갤럽 여론조사 결과 미국 국민의 69퍼센트가 맥아더를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 1951년 7월, 판문점에서 적대적인 세력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과 전쟁은 1953년까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 한국전쟁은 많은 사람이 경기 후퇴가 시작되었다고 본 시점에 새로운 정부 자금을 경제에 쏟아붓게 함으로써 경제적 성장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전쟁은 덜 환영받은 또 다른 효과도 가져왔다. 한국전쟁은 세계에서 미국의 지위가 더욱 불안정해지는 시점에 일어났고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도 강화시켰다. 오랜 교착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14만 명의 미국인이 죽거나 부상당하면서 좌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최근에 역사상 가장 큰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사소해 보이는 약소국의 국경분쟁을 끝낼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은 틀림없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무엇인가 몹시 잘못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포가 미국 내에서 20세기 들어 두 번째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 공산주의는 가상의 적(imagined enemy)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스탈린(Joseph Stalin)과 소련에서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러한 염려에 덧붙여 한국에서의 교착상태, 중국의 ‘상실’,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이 있었다. 많은 사람은 비난받을 누군가를 찾던 중에, 미국 내의 공산주의 음모라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의 국내 정치 사건에 뿌리내린 다른 요소들도 존재했다.
- 1947년에 시작된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는 민주당 정권에서 정부가 공산주의자의 전복을 (실제적으로 격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용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개 조사 위원회를 열었다. 위원회는 먼저 영화 산업으로 방향을 돌려서, 공산주의자가 할리우드(Hollywood)에 침투해 있으며 미국 영화가 공산주의 운동에 오염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일부 극작가와 영화 제작자가 증언을 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그들 중 일부(‘할리우드 텐the Hollywood Ten’)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동료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여 의회모독죄로 투옥되었다. 할리우드가 대중적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의심스러운 충성심’을 지닌 사람들을 기록한 ‘블랙리스트’를 채택하자 다른 사람도 영화 산업에 취업할 수 없게 되었다.
- 국무부의 전직(前職) 고위 간부 엘저 히스(Alger Hiss)를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가 불충성 죄목을 들어 수사 대상으로 삼은 일이었다. 1948년, 과거에 공산주의 요원이었으며 당시 《타임》의 보수적 편집자였던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는 히스가 자기에게 1937년과 1938년에 비밀로 분류된 국무성의 문서들을 넘겨주었다고 동(同) 위원회에서 증언했다. 히스가 그를 중상죄로 고소하자 체임버스는 (자기 집 채소밭 호박에 숨겨놓았기 때문에 ‘호박 문서’로 불린) 문서에 관한 마이크로필름을 제출했다. 히스는 (대부분의 범죄에 있어서 7년이 지난 후에는 개인을 기소할 수 없게 만든 법안인) 공소 시효법(statute of limitations) 때문에 간첩죄로 기소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출신의 공화당 초선 하원 의원이자 반미 활동 위원회의 일원인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의 무자비한 시도 때문에, 히스는 위증죄로 기소되고 여러 해 동안 수감되었다. 히스 사건은 전도양양한 젊은 외교관의 평판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민주당 세대에 의심의 눈을 돌리게 했다. 이 사건은 또한 닉슨을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고, 1950년 그가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트루먼 행정부는 공화당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대통령이 외교정책에서 주도권을 갖도록 지원하기 위해, 1947년 연방정부 직원의 ‘충성심’을 점검하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51년경 2,000명이 넘는 정부 직원이 압력으로 사임했으며, 212명은 해고되었다. 직원 충성 프로그램은 행정부 전반에 걸쳐 국가 전복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진행되리라는 전조였다. 법무부 장관은 추정된 전복 조직들이라고 널리 인용된 명단을 만들었다. FBI 국장인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는 급진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을 심문하고 괴롭혔다. 1950년에 의회는 ‘전복’ 행위에 대한 여러 법률 가운데, 모든 공산주의 조직은 정부에 등록하고 그들의 기록을 공표하라고 규정한 매커랜 국내 보안법(McCarran Internal Security Act)을 통과시켰다. 트루먼은 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는 그의 거부권을 쉽게 뒤집었다. 소련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이른 1949년에 원자폭탄 폭발을 성공하자 일부 사람은 미국의 핵 비밀을 러시아인에게 넘긴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50년, 영국의 젊은 물리학자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가 러시아인에게 폭탄 제조의 세부 사항을 넘겼다고 증언했을 때, 이러한 두려움이 확인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건은 최종적으로, 뉴욕에 살던 무명의 공산당원 부부인 줄리어스와 이설 로젠버그(Julius and Ethel Rosenberg)에게 옮겨갔다. 정부는 로젠버그 부부가 뉴멕시코 주에서 맨해튼 계획을 위해 일했던 기계 기술자인 이설의 남동생으로부터 비밀 정보를 받아, (푹스를 포함한) 다른 요원을 통해 소련으로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기소되었으며, 1951년 4월 5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2년 동안 항소와 대중적 저항이 있은 후, 1953년 6월 19일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죽음을 맞았다.
-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초선 상원 의원으로 무명이었던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갑자기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Wheeling)에서 연설하던 도중에 여러 장의 문서를 들어올리고는, 현재 미 국무부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205명의 명단이 “내 손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도 그만큼 대담하게 연방정부를 비난한 인물은 없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매카시는 비난을 반복하고 확대했으며, 마침내 국내의 전복 세력에 대항하는 운동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 1952년 이후 상원을 지배했던 공화당 의원과 함께, 매카시는 특별 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 여러 분야에서의 전복 활동에 관해 높은 대중적 관심을 끈 조사를 지휘했다. 그렇지만 매카시는 연방정부 내의 어떠한 직원도 공산주의자와 연관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증가 일로에 있던 지지자는 많은 사람이 오만하고 비생산적이며 반역적이라고 생각했던 정부 체제에 대해서 ‘겁 없이’ 공격을 해댔던 그를 존경했다. 특히 공화당원은, 민주당이 ‘반역의 20년’에 책임을 져야 하며 정당이 바뀌어야만 나라가 뒤집어지는 사태를 면할 수 있다고 한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간단히 말해서, 매카시는 그의 추종자에게 광범위한 분노-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동부 지배 세력(Eastern establishment)’에 대한 적개심, 좌절된 파당적 야망 등-을 연결할 수 있었던 이슈를 제공했다. 얼마 동안 매카시는 그를 반대했던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을 위협했다. 심지어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매우 인기 있던 아이젠하워조차도 매카시의 책략을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매카시가 마셜 장군을 공격한 것에 분개했지만, 그를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는 못했다.
- 아이젠하워는 1차 투표에서 후보 지명을 따냈다. 그는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엘저 히스에 대항한 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젊은 상원 의원 닉슨을 선택했다.
- ‘체커스 연설(Checkers speech, 닉슨이 후원자에게 받은 1만 8,000달러가 나쁜 돈이 아니며 사적으로 유용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연설-옮긴이)’
- 전후, 전시 경제에서 평시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문제가 계속되었음에도 1949년에 잠시 주춤했을 뿐, 거의 20년 동안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국내총생산(GNP)은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로 250퍼센트나 증가했다. 대공황기 동안 평균 15퍼센트에서 25퍼센트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 내내 5퍼센트 혹은 그 이하로 유지되었다. 한편, 인플레율은 매년 3퍼센트 또는 그 이하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 1940년대에 대공황을 종결시킨 정부 지출은 학교, 주택, 제대 군인을 위한 보조금, 복지, 주간(interstate) 고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군비 지출 같은 공공 기금을 투입하여 경제성장을 계속적으로 자극했다. 한국전쟁 때문에 군비 지출이 최고였던 1950년대 전반에 경제성장은 정점에 이르렀다.
- 베이비붐의 절정기였던 1950년대에 미국 인구는 20퍼센트나 증가했다.
- 한국전쟁기에 시작하여 1957년에 절정에 이른, 이른바 베이비붐(baby boom)과 더불어 전국적 출생률은 오랫동안 계속되던 인구 감소를 역전시켰다. 미국 인구는 1950년 1억 5,000만 명에서 1960년 1억 7,900만 명으로, 10년 동안 거의 20퍼센트나 증가했다. 베이비 붐은 소비자 수요의 증가와 경제적 성장의 팽창을 의미했다. 1950년대에 교외 지역(suburbs)의 인구가 47퍼센트나 증가하면서 급속히 팽창하자 여러 중요한 경제 분야가 자극받아 성장했다. 개인 소유 차량 대수는 10년 안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새집에 대한 수요도 늘어 주택 건설 산업이 활기찼다. 도로 건설도 경제를 자극했다.
- 미국 경제는 이러한 요인과 다른 요인에 힘입어, 전후 30년 동안 인구가 늘어난 것만큼 빠르게 거의 10배 이상 성장했다.
- 1960년에 미국인의 평균 구매력은 1945년에 비해서 2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번영했던 1920년대보다도 2배 이상 높았다. 미국인은 세계 역사상 최고의 생활수준에 이르렀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연방 지출과 투자의 결과로 서부가 많이 성장했다. 즉 댐, 발전소, 고속도로, 여타 기간 시설 프로젝트로 경제 발전이 가능해졌다.
- 1945년에서 1950년 사이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의 10퍼센트 이상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고,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이곳 인구는 5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 1950년대 중반쯤, 모든 산업의 공장 임금이 상당히 증가하여 주당 평균 80달러가 되었다. 1955년 12월,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과 산업별 조합 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는 20년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조지 미니(George Meany)의 지도로 AFL-CIO로 합쳐졌다.
- 1961년,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미국의 과학자’를 선정했다. 이 선택은 원자무기 시대를 살고 있는 미국인이 대체로 과학과 기술을 매혹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였다.
- 1930년대에 독일, 프랑스, 영국의 과학자는 술파닐아미드(sulfanilamide)로 알려진 항균제에서 추출한 이른바 술파제(sulfa drugs)의 위력을 증명했는데, 그것은 연쇄구균(streptococcal) 혈액 감염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술파제는 놀라운 속도로 개발되고 자주 개선되어, 한때 사망의 주원인이었던 질환을 치유하는 데 극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 1928년에 영국의 의학 연구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조직체의 항균성 성분을 우연히 발견하고 페니실린이라고 이름 붙였다.
- 1941년 신약의 첫 번째 인간 실험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페니실린의 대량 이용 가능성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중단되었다. 페니실린의 대량생산과 상업적 분배의 개발 방식을 미국의 연구소가 결정적인 다음 단계를 성공했기 때문에 1948년에는 전 세계의 의사와 병원에서 페니실린을 널리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연구자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이루어 낸 천연두 백신의 개발이었다. 장티푸스에 대한 효과적인 백신은 영국의 박테리아 학자인 올모스 라이트(Almorth Wright)가 1897년에 개발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쯤에는 널리 이용되었다. 의학자는 1920년대에 또 다른 주요 살인마인 결핵 백신인 BCG를 개발했으나, BCG는 안정성에 관한 논란이 특히 미국에서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승인이 보류되었다. BCG는 결핵이 거의 사라진 제2차 세계대전이 되어서야 널리 사용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결핵이 제한적이지만 재발하기 시작했다.
- 바이러스는 박테리아 감염보다도 예방하고 치료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으며, 천연두를 제외한 바이러스 감염을 막는 백신 개발은 상대적으로 느렸다. 조직배양(tissue cultures)에 있어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바이러스의 증식 방법을 발견한 1930년대가 되어서야, 연구원은 효과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점차, 그들은 백신을 맞은 사람에게 질병을 예방하는 항체(antibodies)를 만들 수 있는 바이러스 형태를 발견했다. 황열병(yellow fever)에 효력 있는 백신은 1930년대 후반에 개발되었고, 20세기 전반에 거대한 살인마의 하나인 인플루엔자에 대한 백신은 1945년에 출현했다.
- 1954년, 미국의 과학자인 조너스 소크(Jonas Salk)는 수천 명의 아이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포함한) 어른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든 질병에 효과적인 백신을 소개했다. 연방정부는 그 백신을 1955년부터 대중에게 무료로 공급했다. 1960년 이후, 앨버트 세이빈(Albert Sabin)이 개발한 경구용 백신이 더욱 쉽게 널리 이용되었는데, 그것은 보통 각설탕 속에 넣어 복용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전반 무렵, 여러 백신으로 인해 미국인과 전 세계 많은 지역 사람의 삶에서 소아마비가 사실상 사라졌다. 백신의 개발과 기타 많은 의학상의 진전 덕분에 유아사망률과 아동 사망률은 전후 25년 동안 (비록 서유럽보다는 못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감소했다. 평균 예상 수명은 전후 25년 동안 5년 증가하여 71세로 늘었다.
- 가장 유명한 새로운 살충제는 일반적으로 DDT로 알려진 ‘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로서, 1939년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뮐러(Paul Muller)가 발견한 혼합 물질이다. 그는 DDT가 인간과 다른 포유류에게는 해가 없어 보이지만, 곤충에게는 극도로 독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미국의 과학자는 뮐러의 발견을 1942년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미군 당국은 군인을 위협하고 있는 곤충에서 발생한 열대 질병(특히 말라리아와 티푸스)과 씨름하고 있었다. DDT는 1943∼44년 이탈리아에서 티푸스가 발병하는 동안 처음 대규모로 사용되어, 티푸스를 곧 퇴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태평양 여러 섬의 모기 감염 지역에 DDT를 뿌리자 말라리아 발생이 급격히 감소했다. DDT는 곤충을 통제하는 기적의 도구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수천 명의 인명을 구했다. 후일에 와서야 DDT가 동물과 인간에게 장기적인 독성 효력이 있다고 밝혀졌다.
- 1940년대의 연구자는 상업용 텔레비전을 최초로 생산했으며, 광대 지역에 걸쳐 방송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했다. 1950년대 후반, 뉴저지 주에 위치한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 연구소 과학자는 컬러 텔레비전 기술을 개발하여 196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널리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AT&T의 연구 조직인 벨 연구소(Bell Labs)는 1948년에 전기신호를 증폭할 수 있는 반도체 장치(solid-state device)인 트랜지스터를 생산했는데, 그것은 과거에 대부분의 전자 장비에 동력을 공급하던 성가셨던 진공관보다 훨씬 작고 더 효율적이었다. 트랜지스터로 여러 가지(라디오, 텔레비전, 음향 장치, 보조 청각 기구 등)가 소형화될 수 있었으며, 항공, 군사 무기, 인공위성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트랜지스터는 또한 1950년대 후반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ry)의 개발이라는 전자공학의 주요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집적회로를 이용하면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던 여러 전자 요소(트랜지스터, 저항기, 이극관 등)를 결합하여 극미하게 작은 하나의 장치에 끼워 넣었다. 집적회로는 다른 수단을 통해서는 생산할 수 없는 복잡한 회로가 필요한 복합적인 전자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집적회로의 개발로 컴퓨터 개발이 앞당겨졌다.
- 1950년대 이전, 컴퓨터는 군사 암호해독과 같은 주로 복잡한 수학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컴퓨터는 1950년대에 최초로 상업적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1950년대 최초로 중요한 컴퓨터는 연방정부 인구조사국(Bureau of the Census)을 위해 레밍턴 랜드 사(Remington Rand Company)가 개발한 유니벡(Universal Automatic Computer, UNIVAC)이었다. 유니벡은 알파벳 정보와 숫자 정보를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최초의 컴퓨터였다. 유니벡은 테이프 보관함을 이용하여, 계산과 기타 기능을 전신(前身)인 에니악(ENIAC)보다도 훨씬 더 빨리 수행할 수 있었다. 레밍턴 랜드 사는 매우 비싼 새 도구가 통계 조사보다 더 크게 쓰일 수 있는 시장을 찾기 위하여, 유니벡을 CBS 텔레비전 뉴스에 방영될 1952년 대통령 선거 결과 예측에 사용하기도 했다. 레밍턴 랜드 사는 이렇게 사용하면 컴퓨터 홍보 효과가 클 것이라고 믿었다. 유니벡은 초기 투표 결과를 분석하여, 아이젠하워가 스티븐슨을 제치고 엄청나게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그날 이전에는 컴퓨터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유니벡의 첫 무대는 컴퓨터 공학에 대한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레밍턴 랜드사는 유니벡을 판매하는 데에는 제한된 성공을 거뒀지만, 1950년대 중반에 아이비엠(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IBM)은 자사 최초의 주요한 데이터 처리 컴퓨터를 소개해 미국과 해외의 여러 사업에서 광범한 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비엠은 초기 성공을 거두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연구와 개발에 투자하여 향후 수십 년간 컴퓨터 분야에서 세계적 리더가 되었다.
- 1952년, 미국은 최초의 수소폭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켰다(소련도 1년 후에 처음으로 수소 폭탄을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개발된 플루토늄과 우라늄 폭탄과는 달리, 수소폭탄은 그 위력이 (원자가 쪼개지는) 분열이 아니라 (가벼운 원자 요소가 무거운 원자 요소와 합쳐지는) 융합에서 나왔다. 수소폭탄은 초기 원자폭탄보다 엄청나게 거대한 위력을 지닌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수소폭탄이 개발되자 미국과 소련에서 정체 상태에 있던 과학 프로젝트는 상당한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프로젝트는 비행기로 운반하기에는 부적절한 새로운 무기를 목표 지점까지 실어나를 수 있는 무인 로켓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시도였다. 양국은 엄청난 자원을 여기에 퍼붓기 시작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로켓 개발을 도왔던 일부 독일 과학자를 이민자로 받아들여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서 초기 미사일 연구는 공군이 거의 전적으로 진행해, 수백 마일을 비행할 수 있는 로켓 개발이라는 중대한 초기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는 대양과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즉 우주 공간을 통해 먼 거리의 목표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s, ICBM)을 개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미국의 과학자는 1950년대에 처음에는 아틀라스(Atlas)로, 그 다음엔 타이탄(Titan)으로 실험했다. 초기에 약간 성공했으나 많은 좌절도 있었는데, 특히 대기권 너머로 미사일을 쏘아 올릴 때 필요한 엄청난 힘을 공급하기 위해 충분하고도 안정된 연료를 혼합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958년, 초기 미사일에 사용된 폭발하기 쉬운 액체 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고체 연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미사일이 합리적으로 정확한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도록 보장하는 축소 안내(guidance)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 미국의 과학자는 잠수함으로 운반하고 발사할 수 있는 핵미사일 ‘폴라리스(Polaris)’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공기를 압축함으로써 바다 수면 아래에서 발사되었으며, 수면 위에서만 엔진을 가동했다. 폴라리스는 1960년 최초로 해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 소련이 1957년에 스푸트니크(Sputnik)라는 지구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우주 공간으로 쏘아 올렸다고 선언했던 극적인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여전히 유사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으며, 미국 정부와 사회의 많은 영역은 소련의 선언에 놀라워했다. 연방 정책을 통해 학교에서의 과학교육 증진, 더 많은 연구소 창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외계 탐사를 가속시키기 위해 열정적 노력과 자금이 투입되었다. 1958년 1월, 미국은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Explorer I)’를 외계로 쏘아 올렸다. 그러나 1958년, 새로운 기관인 국립 항공 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과 더불어 수립된 유인 우주 프로그램이 곧 우주 탐사의 백미가 되었다. 최초의 미국 우주 파일럿 혹은 ‘우주 비행사(astronauts)’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 되었다. 1961년 5월 5일, 앨런 셰파드(Alan Shepard)는 외계로 쏘아 올려진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구궤도 이하의 짧은 비행은 소련의 ‘우주 비행사(cosmonaut)’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실제로 지구궤도를 비행한 후 몇 달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962년 2월 2일, (후일 상원 의원이 된) 존 글렌(John Glenn)은 지구를 선회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머큐리(Mercury)와 제미니(Gemini) 계획 후속으로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려는 아폴로 계획이 뒤따랐다. 그 계획에는 몇 번의 파국적 후퇴가 있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67년 1월 훈련 도중 3명의 우주 비행사가 사망한 화재였다. 그러나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에드윈 앨드린(Edwin Aldrin),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는 달의 궤도까지 성공적으로 우주선을 비행했다.
- 그런 다음 암스트롱과 앨드린은 캡슐에서 더 작은 비행선을 분리시켜 달 표면에 착륙했으며, 지구 아닌 곳에서 걸은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1972년을 마지막으로, 달 탐사는 6회 더 이루어졌다. 마침내 우주 프로그램은 더 쉽고 더 실제적인 방식으로 비행하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우주 왕복선(space shuttle)’을 개발해냈다. ‘우주왕복선’은 미사일에 의해 발사되는 비행기 같은 장치로서, 우주를 비행할 수도 있고 전형적인 비행기처럼 지상에 착륙할 수도 있었다. 최초의 우주 왕복선은 1982년에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1986년 1월, 우주 왕복선 ‘챌린저(Challenger)’가 이륙한 직후 폭발하여 7명의 우주 비행사가 죽자, 프로그램은 2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다시 시작되었다. 우주왕복선은 통신위성을 발사하고 수리하거나, 1990년에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을 궤도에 진입시키거나(후일 그 망원경의 결함이 있던 렌즈를 고치거나), 궤도를 돌고 있는 우주 연구소(Spacelab)를 돕는 데 사용되었다.
- 소비자 신용은 신용카드의 발달, 외상 계정 돌리기, 할부금(easy-payment) 계획을 통하여 1945년과 1957년 사이에 800퍼센트나 증가했다. 번영으로 인해 자동차 같은 소비자의 오랜 열망은 커져갔으며, 디트로이트(자동차 산업)는 끊임없이 번쩍거리는 스타일과 장식으로 호경기에 부응했다.
- 1960년에는 미국 인구의 3분의 1이 교외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교외의 성장은 풍요로움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수백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단일 가구(single-family) 주택을 구입하게 한 주택 건설에 중요한 혁신이 있었기에 얻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교외 개발업자인 윌리엄 레빗(William Levitt)은 뉴욕 시 부근의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 최초로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면서 대량생산 방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교외(Suburban)의 성장을 상징하게 되었다. 교외 주택은 1만 달러 이하로 팔렸다.
- 미국의 백인이 교외로 옮기게 된 또 다른 요인은 인종이었다. 대다수 교외 지역은 백인만 주거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흑인만이 교외에서 살 수 있었고, 공식적·비공식적 장벽에 막혀 부유한 흑인조차도 거의 모든 교외 지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흑인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에, 많은 백인 가족은 도시의 이웃과 학교에서 흑백 통합을 피하기 위하여 교외로 탈출했다.
- 물질적 안락함에 대한 기대가 높아가면서, 많은 중간계급의 가족은 바라는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제2의 소득이 필요했다. 그 결과, 밖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의 숫자가 실제로는 전후 시기에 증가했다. 1960년에는 얼추 기혼 여성의 3분의 1이 유급 노동력의 일부를 구성했다.
- 상업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시작되어,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1946년에 미국에는 단지 1만 7,000대의 수상기가 있었으나, 1957년에는 거의 전체 가구 수와 맞먹는 4,000만 대로 늘어났다. 어떤 기사에 의하면, 냉장고보다 텔레비전을 소유한 가정이 더 많았다.
- 텔레비전 산업은 직접적으로는 라디오 산업으로부터 출현했으며, 3개의 모든 주요 네트워크, 즉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는 라디오 회사에서 출발했다. 라디오처럼 텔레비전 사업은 광고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 스폰서가 거의 항상 여성을 겨냥한 가정용품을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솝 오페라(soap opera)’라 불린 대낮에 방송된 연속극의 일부는 사실상 프록터 앤 갬블 사(Procter & Gamble) 및 기타 회사가 극본을 쓰고 제작을 맡았다.
- 1950년대 후반에는 텔레비전 뉴스가 신문, 잡지, 그리고 라디오를 대체하여 가장 중요한 정보 수단이 되었다. 텔레비전 광고는 새로운 패션과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방대한 시장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텔레비전에서 운동경기를 중계방송하면서 미국에서 대학 스포츠와 프로스포츠는 점차 가장 중요한 오락거리의 하나(그리고 가장 큰 사업 중의 하나)가 되었다.
-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많은 프로그램은 미국인 생활의 공통된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이미지는 주로 백인, 중간계급, 교외 생활자로 그려졌으며, 가족을 소재로 한 대중적 시트콤(situation comedies)에서 잘 드러났다.
- 시대의 풍요함을 함께 누릴 수 없었던 사람도 텔레비전을 통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은 백인 중간계급을 찬미하는 동시에, 또한 텔레비전이 묘사하는 세계에서 배제된 집단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는 전례 없는 권력을 갖고 1950년대 후반부터 점차 시작된 사회적 격변을 전달했다.
- 중산층 미국인 사이에서 휴가 여행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다. 주간(interstate)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여행이 급격히 늘어났다. 노동자의 풍요로움도 그에 따라 증가했다. 1950년대에 일부 가족이 여행에 사용한 트레일러와 소형 밴 같은 휴가 여행용 차량 시장이 상당히 형성되었을 정도였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그 시장은 점차 크게 성장했다.
- 사람들은 1950년대부터 오랫동안 국립공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 에코 파크(Echo Park)
- 에코 파크는 와이오밍 주 남쪽 부근인 유타 주와 콜로라도 주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국립 공룡 기념물(Dinosaur National Monument)의 경관이 뛰어난 계곡이다. 1950년대 초반, 연방정부의 개발국(Bureau of Reclamation)-20세기 초 관개를 촉진하고 전력을 개발하며 용수 공급을 증가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은 수력 자원과 레크리에이션 용도로 호수를 만들기 위해 에코 벨리를 지나가는 그린 강(Green River)을 가로지르는 댐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의 환경 운동은 20세기 초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헤치 헤취 계곡(Hetch Hetchy valley)에 유사한 댐 건설을 중단시키려던 노력이 실패한 후 침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에코 파크 계획으로 환경 운동은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1950년대 미국 젊은이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발전 중의 하나는 로큰롤(Rock ‘n’ Roll)이었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초기 록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인기는 엄청났다.
- 세퀸(sequin, 옷에 장식으로 부착하는 작은 원형의 금속편)
- 프레슬리의 음악은 초기의 많은 백인 록 음악가의 음악처럼, 흑인 리듬과 블루스 전통을 상당히 받아들였다. 샘 필립스는 비비 킹(B. B. King)을 비롯하여 그의 시대의 일부 흑인 음악가와 흑인 리듬을 기록했던 음반 제작자였는데, 1950년대 전반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흑인(Negro) 목소리를 지닌 단 한 명의 백인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10억 달러를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프레슬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버디 홀리(Buddy Holly)와 빌 헤일리(Bill Haley)-영화 〈블랙보드 정글(Blackboard Jungle)〉에서 사용된 그의 1955년도 노래 〈Rock Around the Clock〉은 수백 만의 청년에게 로큰롤의 도래를 알리는 데 공헌했다-와 같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 록 음악의 급속한 성장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 혁신에 상당히 큰 도움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한때 라디오가 수행했던 오락 기능을 텔레비전이 주로 차지하게 되자, 라디오 방송국은 더 이상 생방송을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많은 라디오 방송국은 전적으로 녹음된 음악 연주를 들려주는 데 대부분 전념했다. 1950년대 초반, ‘디스크자키(disk jockeys)’로 알려진 신종 라디오 아나운서가 특별히 록 음악의 젊은 팬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 1957년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는 로큰롤 히트 음악이 텔레비전에 방송되는 공개 공연이었는데, 여기서는 녹음된 음악에 맞춰 현장의 관객이 춤을 추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록 음악이 대중적으로 퍼졌으며, 사회자였던 딕 클라크(Dick Clark)는 미국의 젊은이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 레코드 판매는 1950년대 중반과 후반에 급속히 증가했는데, 특히 분당 45회전(45rpm, revolutions per minute) 형태로 앞뒷면에 한 곡씩 수록한 저렴하고 대중적인 조그만 판이 많이 판매되었다. 또한 중요했던 것이 주크박스(juke boxes, 자동 전축)였는데, 그것은 45회전 판에 있는 각각의 노래를 연주했다.
- 1960년도 어느 때에서도 미국 전체 가정의 5분의 1 이상(3,000만 명 이상)이 정부가 정의한 빈곤선(poverty line)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15년 전에는 전체 가정의 3분의 1이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했다). 수백만의 사람이 겨우 공식적인 빈곤선 위에서 살았으나, 그 정도의 소득으로는 편안함이나 안정감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80퍼센트에 이르는 대다수의 빈민은 간헐적으로나 일시적으로 빈곤을 경험했다. 그러나 빈민 중 대략 20퍼센트는 빈곤이 지속적인 현실이어서 빈곤을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빈민에는 미국의 고령 인구의 약 절반과 흑인 및 히스패닉(Hispanics)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인디언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단일 집단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hard-core)’ 빈곤은 경제성장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번영으로 이끌 것이라는 주장, 즉 많은 사람이 말하듯이 “상승하는 파도가 모든 배를 끌어올린다(a rising tide lifts all boats)”는 가정을 비웃었다.
- 농민은 1948년에 국민소득의 8.9퍼센트를 차지했으나, 1956년에는 단지 4.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러한 몰락은 어느 정도는 농촌 인구의 꾸준한 감소로 나타났다. 1956년도에만 농촌인구의 거의 10퍼센트가 도시로 이동했거나 도시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농산물 가격(farm prices)의 하락을 반영했다. 이 시기 동안 국민 전체 소득은 50퍼센트나 상승했지만 기본 작물은 잉여 생산량이 엄청나 가격이 33퍼센트나 떨어졌다. (대다수가 흑인인) 소작인은 남부 농촌 전역에서 생존 수준 혹은 그 이하로 살고 있었는데, 그것은 1944년에 목화 따기의 기계화가 시작되었고 합성섬유가 개발되어 목화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남부 목화 재배 지역의 3분의 2는 1930년에서 1960년 사이에는 목화 농사를 아예 짓지도 않았다). 이주 농업 노동자도 이와 유사하게 비참한 상황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특히 서부와 남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이 중에는 멕시코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 상업화된 농업(commercial agriculture)이 많이 없던 농촌 지역(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 같은 곳으로, 그곳에서 석탄 경제가 쇠락한 것은 그 지역을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의 감소를 의미했다)에서는 지역사회 전체가 절망적인 빈곤 속에 살고 있었으며, 점차 시장경제로부터 단절되었다.
-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흑인 남녀 300만 명 이상이 남부에서 북부 도시로 이동했다.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뉴욕, 기타 동부 및 중서부 산업도시에서는 흑인 인구가 대대적으로 팽창했다. 같은 시기에 그 만큼의 백인이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절대 숫자, 나아가 전체 백분율에서도 흑인 인구가 많아졌다.
- 동시에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에서 같은 종류의 이민자가 들어와, 미국의 많은 도시에 존재하던 빈곤한 히스패닉 주거지역을 팽창시켰다.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100만에 가까운 푸에르토리코 사람이 미국의 도시(가장 큰 집단은 뉴욕으로)로 이동했다. 멕시코 노동자는 텍사스 주와 캘리포니아 주의 국경을 넘어 들어와 샌안토니오, 휴스턴, 샌디에이고,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에 이미 상당한 규모였던 라티노(Latino) 지역사회를 팽창시켰다(특히 LA에는 1960년에 대략 50만 명이라는 가장 많은 수의 멕시코계 미국인이 살고 있었다).
- 1954년 5월 17일, 연방 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 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사건의 판결을 발표했다. 대법원은 캔자스 주의 공립학교 체제의 법적 인종 분리를 심리하면서, 지역사회는 백인의 시설과 같은 것을 제공하기만 한다면 흑인이 사용하는 시설을 분리할 수 있다고 규정했던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을 기각했다. 브라운 판결은 인종에 기초한 공립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가 명백히 헌법에 어긋난다고 선언했다.
- 대법원장인 얼 워렌(Earl Warren)은 동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공립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분리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원칙이 설 자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다음 해, 대법원은 1954년 결정을 실행하는 규칙들을 제공하는 (‘Brown II’로 알려진) 또 다른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에서는 지역사회가 ‘할 수 있는 한 신중한 속도로(with all deliberate speed)’ 학교에서 인종을 통합해야만 한다고 했으나, 일정을 확정하지는 않았고 구체적인 결정은 하위 법원에 맡겼다.
- 1956년에는 100명이 넘는 남부 출신 하원 의원이 브라운 판결을 비난하면서 유권자에게 판결에 저항하라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남부의 주지사, 시장, 지역 학교 위원회, (수백 개의 백인 시민 협의체를 포함한) 비정부 압력 단체 등이 모두 인종 통합에 저항했다. 1957년 가을까지 남부에 있는 3,000개의 학군(school districts) 중에서 단지 684개만이 학교에서의 인종 통합을 시작했다.
-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인종 통합 전투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7년 9월, 주가 연방 권위에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경우에 직면하게 되자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연방 법원은 아칸소 주의 리틀록(Little Rock)에 위치한 센트럴(Central) 고등학교에 인종 통합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흥분한 백인 군중이 학교 입구를 막아 명령 집행을 방해하려 했으며, 주지사인 오벌 포버스(Orval Faubus)도 방해를 차단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기를 거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마침내 연방군을 리틀록에 보내 평화를 유지하고 법원 명령이 집행되도록 했다.
- 1955년 12월 1일, 흑인 여성 로자 팍스(Rosa Parks)가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체포되었다. 그녀가 몽고메리의 한 버스에 올라타 (그 도시와 대부분의 남부 지역에 걸쳐 인종 관계를 규정했던 짐 크로우법이 규정한) 백인 승객용 좌석에 앉아 일어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 그 도시의 흑인 사회는 분노했고, 버스 회사에 좌석 분리의 종식을 요구하면서 조직적으로 승차 거부를 했다. 승차 거부의 효과는 거의 완벽했다. 버스 회사뿐만 아니라 몽고메리의 많은 상인에게 경제적 압력이 미쳤는데, 왜냐하면 버스 승차 거부자가 도심의 상점에 가기 어렵게 되자 그 대신 가까운 이웃에서 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승차 거부는 1956년 후반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가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없었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판결은 어느 정도는 저항에 의해 고무되었다. 몽고메리의 버스는 차별적 좌석 정책을 포기했으며, 승차 거부는 끝이 났다.
- 승차 거부가 일단 시작되자 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지역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였다. 그는 애틀랜타의 저명한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강렬한 연설가이면서 타고난 지도자였다. 흑인의 저항에 대한 킹의 접근 방식은 비폭력 원칙(doctrine of nonviolence)에 입각해 있었다. 즉, 직접적인 공격에 직면해서도 불의(injustice)에 비폭력적 저항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인종 투쟁에 있어 하나의 접근 방식을 고안해낸 것으로, 지지자에게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필요한 방식이었다. 향후 13년 동안 그는 버스 승차 거부 직후 만든 여러 인종이 포함된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의 지도자를 맡았다. 향후 13년 동안 그는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널리 존경받은 흑인 지도자였다. 그가 대표하게 된 민중운동은 곧 남부 전체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은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전쟁 중 수백만의 흑인 여성과 남성이 군에 복무하거나 군수공장에서 일했으며, 그 경험에서 1940년대 이전에 상대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할 때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다른 요인으로는 도시의 흑인 중간계급의 성장을 들 수 있는데, 그 계급은 수십 년 동안 발전해왔으나 전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민권운동을 추진하는 힘은 대부분 목사, 교육자, 전문인 등 도시 흑인 사회 지도자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상당 부분은 이전 수십 년 동안 엄청나게 팽창한 흑인 대학의 학생에게서 나왔다.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이해관계가 있는 남성과 여성은 더 가난하고 억압받던 사람보다 장애물을 더 많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 지주의 직접적인 감독에 있던 농촌의 흑인보다 서로 협력하여 독자적인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를 종종 더 많이 누렸다.
- 아이젠하워는 내각에 부유한 대기업의 변호사와 기업의 대표를 임명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배경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의 회장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은 국방부 장관 인준을 검토하던 상원 의원에게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이 전혀 없음을 보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나라에 좋은 것은 제너럴모터스에 좋은 것이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 아이젠하워의 변함없이 연방정부의 활동을 제한하고 사적인 사업을 장려하려고 했다. 그는 자연 자원의 공공적 개발보다는 사적인 개발을 지원했다. 농민은 괴롭겠지만, 그는 농산물 가격에 대한 연방의 지원을 줄였고, 또한 트루먼 정부에 의해 유지되어온 최종 제한 임금과 가격 통제를 없앴다. 국가 의료보험 같은 새로운 사회 서비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반대했으며, (심지어 1958년의 경기 후퇴 시기에도) 연방 지출을 줄이려고 애썼고 예산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아이젠하워는 공직 마지막 해인 1960년에 10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남겼다.
- 그는 재직 기간 동안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여 수혜자를 1,000만 명 추가하고 400만 명에게 실업 보상금을 추가적으로 지불하는 데 동의했으며, 시간당 최저 임금을 75센트에서 1달러로 올리는 것도 동의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가장 의미심장한 입법 조치는 1956년의 연방 고속도로법(Federal Highway Act)일 것이다. 그 법의 내용은 4만 마일이 넘는 주간(interstate) 고속도로를 10년에 걸쳐 250억 달러를 투입하여 건설한다는 것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공공사업이었다. 이 공공사업 프로그램은 연료, 자동차, 트럭, 타이어 등을 구입할 때 세금을 새로이 부과하는 고속도로 ‘신탁 기금(trust fund)’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이젠하워는 전해에 심각한 심장 발작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1956년 대통령직 재선에 출마했다. 아들라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과 다시 한 번 대결했지만, 그는 일반투표에서는 거의 57퍼센트를 획득했고,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스티븐슨의 73표에 비해 457표를 얻어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민주당은 1954년에 승리를 되찾아 상하 양원을 계속 지배했다. 심각한 경기 후퇴 중이던 1958년, 민주당은 상당한 의석 차로 그러한 지배력을 증가시켰다.
- 매카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첫해에 무사히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1954년 1월, 육군부 장관 로버트 스티븐스(Robert Stevens)과 육군 전체를 공격했다. 그 시점에서 정부와 함께 의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는 육군-매카시 청문회로 알려진 그 혐의를 다루기 위해 특별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중개된 최초의 의회 청문회 중의 하나였다. 매카시가 하던 행동, 즉 증인 위협하기, 근거 없이 (때로는 잔인하게) 비난 퍼붓기, 문제 피하기 등을 지켜보면서 많은 대중은 그를 악당으로, 심지어 광대로 보기 시작했다. 1954년 12월, 상원은 67 대 22로 그가 ‘상원 의원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판결했다. 3년 후, 그는 분명히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 아이젠하워 때의 국무 장관이며, (대통령을 제외하고) 1950년대 외교정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공산주의에 대해 엄격한 도덕적 반발심을 지닌 귀족풍의 기업 변호사였다. 그는 장관직에 취임하면서 트루먼 시절의 봉쇄정책이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고 비난하고,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반격(rollback)’할 ‘해방’의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단 장관직에 오르자, 그는 대통령의 좀 더 온건한 견해를 존중해야만 했다. 덜레스가 쇄신한 일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54년에 발표한 ‘대량 보복(massive retaliation)’ 정책이었다. 그는, 미국이 동맹국을 위협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할 때 국지전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재래식 무기를 쓰지 않고(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좌절감에 이르게 한 정책이었다), ‘대량 보복적 힘에 의한 억제’(그는 이것이 핵무기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혔다)를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1953년 7월 27일, 한국의 판문점에서 교섭 당사자는 마침내 휴전 동의서에 서명했다. 두 적대 세력은 각자의 군대를, 전쟁 이전의 남북한 경계선인 38선을 따라 현 전선에서 1.5마일씩 후퇴시켜야 했다. 한국을 평화적으로 재통일할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1954년에 제네바 회담이 열렸지만, 사실 그 회담에서는 어떠한 합의도 끌어내지 못했으며, 휴전선은 양국 간에 명백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 1945년 이후 프랑스는 한때 식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포기해야만 했던 베트남에서 예전의 권위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반대하는 호찌민(Ho Chi Minh)의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은 독립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호찌민은 대서양헌장의 반(反)식민지적 수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에 기초하여, 1945년에 미국의 지원을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싸울 때 미국의 정보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호찌민을 무시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냉전 우방 중의 하나인 프랑스를 지지했다.
- 호찌민은 1954년까지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0년 이래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벌이는 성과 없는 전투의 비용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었다. 1954년 초, 1만 2,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라는 부락에서 위험스런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이 개입해야만 프랑스 군대가 완전히 괴멸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국무 장관 덜레스, 부통령 닉슨, 그 외 여러 사람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의회나 미국의 여타 우방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거절했다. 미국의 원조가 없게 되자, 프랑스의 디엔 비엔 푸 방어는 마침내 1954년 5월 7일에 붕괴되었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의 협정을 고려하던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재빨리 갈등의 조정에 동의했다. 미국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던, 1954년 7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 협정은 17도선을 따라 베트남을 잠정적으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북쪽은 호찌민이, 남쪽은 친서방 체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 선거는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할 토대가 되었다. 그 협정은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이 끝나고 베트남에서 미국이라는 존재가 확대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협력했으며, 정권의 우두머리로 소수 세력인 가톨릭교도 응고 딘 디엠(Ngo Dinh Diem)을 세웠다. 패배를 예상한 디엠은 1956년 선거를 허용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어떤 공격을 가해 와도 미국이 군사원조를 풍족히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디엠은 선거를 거부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 1948년 5월 14일, 여러 해 동안의 시온주의자(Zionist)의 노력과 새로운 유엔의 결정으로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 날로 새로운 유대인의 조국을 승인했다. 이스라엘의 성립으로 몇몇 갈등은 해소되었지만, 다른 갈등이 생겨났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은 자신의 국가라고 생각해온 곳에서 추방되지 않으려 했고, 이스라엘의 이웃 아랍 국가와 결합하여 1948년에 새로운 국가와 결연히 싸웠다. 이것이 여러 차례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의 첫 번째였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 편이었지만, 석유가 풍부한 중동 지역에 있는 아랍 정권의 안정과 우호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미국의 석유 회사가 그 지역에 상당히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자인 이란의 수상 모하메드 모사데(Mohammed Mossadegh)가 1950년대 초에 이란에서 서방의 대기업의 존재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경계심을 가지고 반응했다. 1953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모사데를 쫓아내기 위해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이란의 군부 지도자와 손을 잡았다. CIA는 모사데를 대신하여 이란의 젊은 국왕인 모하메트 리자 팔레비(Mohammed Reza Pahlevi)를 명목상 입헌 군주에서 사실상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도록 협력했다. 팔레비 국왕은 향후 25년간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장군의 지도에 있던 이집트의 민족주의 정권을 다루는 데는 효과가 적었다. 나세르 장군은 1950년대 초반에 소련과 무역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56년, 덜레스는 공산주의자에게 우호적인 나세르를 징벌하려고, 나일 강을 가로지르는 아스완 댐 건설에 필요한 협력 제공을 철회했다. 일주일 후, 나세르는 운하에서 나오는 수입을 댐 건설에 사용하겠다면서, 영국의 수에즈운하 통제권을 빼앗는 것으로 보복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를 선제공격했다. 다음 날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이집트인을 운하에서 몰아내기 위해 상륙했다. 덜레스와 아이젠하워는 수에즈 위기로 인해 아랍 국가가 소련을 지지하게 되고 새로운 세계 전쟁이 촉발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국은 침공 지지를 거부하고 침공을 비난하는 유엔에 합류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이 물러나게 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휴전에 동의하도록 했다.
- 1954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중앙정보국에 과테말라의 새로 탄생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 좌익 정권 타도에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그 정권은, (아르벤스를 두려워했던 과테말라의 주요 투자자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회사의 간청에 응했던) 덜레스의 주장에 의하면, 잠재적인 공산주의 정권이었다. 그 지역에서 쿠바보다 더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없었다. 쿠바의 지도자는 플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로서, 1952년 미국의 도움으로 좀 더 온건했던 정부를 쓰러뜨린 이후 군사 독재자로서 쿠바를 지배해왔다. 상대적으로 번창했던 쿠바 경제는 사실상 미국 기업의 영지(fiefdom)가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 기업은 거의 모든 자연 자원을 통제했으며, 필수적인 설탕 경작의 반 이상을 매점했다. 미국인 조직 범죄단이 아바나의 수지맞는 호텔과 향락 산업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1957년에 시작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대중적 저항운동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지도로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고, 카스트로는 아바나로 입성해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트로는 과격한 토지 정책을 시행하여 외국인 소유의 기업과 자원을 빼앗기 시작했다. 1960년, 쿠바가 소련에게 원조를 받기 시작하자, 미국은 쿠바가 미국에 유리한 가격으로 수출했던 설탕의 ‘할당량’을 축소했다. 1961년 초, 아이젠하워 정부는 마지막 조치의 하나로서 카스트로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미국에 의해 고립된 카스트로는 이윽고 소련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했다.
- 소련과 서방의 관계는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대응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1956년 11월, 헝가리의 반체제 인사는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적 봉기에 착수했다. 그달이 지나기 전에 소련의 탱크와 군대는 부다페스트로 진입해 봉기를 진압하고 정통적 친소 정권을 복귀시켰다.
- 1958년 11월, 그해 초 소련의 수상겸 공산당 서기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나토 세력이 서베를린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임자의 요구를 새로이 천명했다. 예상했듯이 미국과 그 동맹국이 거절했을 때, 흐루쇼프는 아이젠하워에게 서로의 나라를 방문하여 이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토론하고, 1960년 파리에서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동의했다. 흐루쇼프의 1959년 미국 방문에 대중은 냉정하면서도 정중하게 반응했다. 정상회담에 뒤이어 아이젠하워의 모스크바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리 회담이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 소련은 소련 영공을 비행하던 미국의 고공 첩보 비행기인 U2기를 격추시켰다고 발표했다. 비행사인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Francis Gary Powers)는 체포되었다. 흐루쇼프는 미국의 소련 영공 침입에 화가 나서 파리 정상회담을 결렬시키고, 아이젠하워를 소련으로 초청하는 것을 취소했다.
- 1950년대의 정치와 문화를 형성한 것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그 배경이 된 냉전에 대한 우려였다. 대다수 미국인에게 1950년대는 개인적 번영이 증대하던 시기였다.
-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젊은 두 후보는 국가를 적극적인 지도력으로 이끌어가겠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후보는 경쟁 상대 없이 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온건한 개혁을 약속했다. 한편, 민주당은 활발한 예비 선거를 통해 다소 어렵사리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아래 단합했다.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매력적이고 사리가 분명한 상원 의원으로, 1956년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자리를 아깝게 놓쳤던 적이 있다. 존 케네디는 전 주영 대사였던 부유하고 유력하면서,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던 조지프 케네디(Joseph P. Kennedy)의 아들이었다. 그는 선거전에서 ‘미국민은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있어 현재의 표류 상태에 불안해한다는 유일한 가정’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그의 매력적인 대중적 이미지 또한 그의 정치적 위치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는 젊음(1960년에 그는 43세였다)과 종교(그는 가톨릭교도였다)에 대한 의구심을 극복하여 일반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닉슨의 49.6퍼센트 대 49.9퍼센트)로, 그리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약간 더 안전하게(303 대 219) 이겼다.
- 1963년 11월 22일의 비극이 일어나자 대중은 극명한 반응을 보였다. 케네디는 부인과 부통령 린든 존슨과 함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텍사스로 떠났다. 대통령의 자동차 행렬이 댈러스(Dallas) 거리를 천천히 지날 때 총 소리가 울렸다. 두 발의 총알이 대통령을 관통했는데, 한 발은 목에, 또 한 발은 머리에 맞았다. 케네디는 근처 병원으로 신속히 이송되었으나, 몇 분 후 사망했다. 그날 늦게 대통령 살해 혐의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는 혼란스럽고 격분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그는 이틀 뒤 다른 감방으로 이송되던 중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Jack Ruby)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미국인은 존슨 대통령이 암살 조사를 목적으로 임명한 대법원장 얼 워렌(Earl Warren)이 위원장인 연방 특별 위원회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워렌 위원회는 오스월드와 루비는 각자 행동한 것이며, 더 큰 음모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훗날 많은 미국인은 워렌 위원회 보고서에서 그 살해 뒤의 광범위한 음모의 증거를 무시했다고 믿게 되었다. 암살의 진실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많은 사람은 케네디의 후계자인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의 성향과 직무 수행 능력에 안심했다. 존슨은 서부 텍사스의 가난한 ‘구릉 지대(hill country)’ 출신으로서 야심을 갖고 엄청나게 노력하여 상원의 다수당 지도자가 된 인물이었다. 존슨이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실패한 뒤에 케네디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자,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은 놀랐다.
- 1964년 11월 선거에서 존슨은 역대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많은, 61퍼센트가 넘는 대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골드워터는 출신주인 애리조나와 최남부(Deep South)의 5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존슨의 승리로 민주당 의원이 의석을 많이 얻게 되어 상하 양원에서 민주당이 기록적인 다수를 차지하자 대통령은 목표 중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연방정부가 노년층에게 의료 비용을 지불하는 ‘노인 의료보험(Medicare)’이었다. 노인 의료보험은 국가 건강보험을 신뢰한 사람들과 그것을 ‘사회주의적인 의술’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20년간 신랄하게 논쟁한 끝에 1965년이 되어서야 입법화되었다. 그러나 노인 의료보험은 많은 반대를 잠재웠다. 하나는, 노인 의료보험 급부금을 (사회보장 연금이 그러했듯이) 미국의 모든 노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복지(welfare)’라는 인상을 받지 않게 했다. 프로그램은 대규모 중간계급을 구성원으로 했다. 또한 의사가 노인 의료보험 환자를 개별적으로 진료하고 (처음에는) 정상 진료비를 청구하게 하여 의료계의 반대를 분산시켰다. 즉, 노인 의료보험은 의료 수가를 지불하는 책임이 환자에게서 정부로 옮겨간 것 뿐이었다. 1966년, 존슨은 연방 의료 지원을 사회복지 수혜자와 모든 연령의 가난한 사람에게 확대하는 ‘빈민 의료 보조(Medicaid)’ 프로그램을 통과시켰다.
- 존슨이 명명한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의 핵심에는 경제 기회국(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 OEO)이 있었고, 여기서 새로운 교육·고용·주택·보건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경제 기회국은 출발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는 ‘지역 행동(Community Action)’의 개념에 대한 공약 때문이었다. ‘지역 행동’은 가난한 지역민을 돕는 프로그램 계획과 행정에 지역민을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 ‘지역 행동’ 프로그램은 많은 빈민에게 일거리를 제공했고, 빈민이 행정 및 정치적 작업에서 귀중한 경험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지역 행동’식 접근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행정적으로 실패했고, 소수 기관이 명백히 지나치게 행동하여 ‘지역 행동’ 프로그램의 대중적 이미지와 나아가 빈곤과의 전쟁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 전반적으로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 1961년의 주택법은 49억 달러의 연방 교부금을 여러 도시에 제공하여 공유지를 보존하고, 대중교통 체계를 발전시키며, 중간 소득자 주택에 보조하게끔 했다. 1966년, 존슨은 새로운 정부 부처로 주택 및 도시 개발부(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를 만들고, 첫 장관으로 최초의 흑인 출신 각료인 로버트 위버(Robert Weaver)를 임명했다. 존슨은 또한 도시재개발 파일럿 프로그램에 필요한 연방 보조금을 제공하는 시범 도시(Model Cities) 계획에 착수했다. 케네디는 공공 교육에 필요한 연방정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교육 지원을 얻으면 학교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될까 봐 염려했다. 또한 가톨릭교도는 연방정부의 지원이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교구(parochial) 학교에도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슨은 1965년의 초등 및 중등교육법과 일련의 후속 조치로 위의 두 가지 문제를 피해갔다. 이 법안은 사립학교와 교구 학교에까지도 지원을 확대하되, 그러한 지원은 학교 자체의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학생의 경제적 조건에 기초하도록 했다.
- 1965년의 이민법은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법안 중의 하나였다. 그 법으로 새로운 이민자는 매년 17만 명으로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세계 여타 지역보다도 북유럽 출신의 이민을 선호했던 1920년대의 ‘국적 기원(national origin)’ 제도는 없어졌다. 이민법은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지역의 이민은 여전히 제한했지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미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새로운 국가 집단의 사람, 특히 아시아인이 대규모로 미국에 들어와 미국 인구의 특징을 변화시켜서 1970년대 전반에는 미국 이민의 성격이 상당히 변화했다.
- ‘위대한 사회’ 개혁 실시로 연방 지출이 엄청나게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세금이 증가하여 일정 기간은 새로운 지출을 거의 상쇄시켰다. 1964년, 존슨은 케네디가 경제성장을 증진시키기 위해 1962년에 처음 제기했던 115억 달러 규모의 세금 감면 법안을 통과시켰다. 감세로 연방 적자는 증가되었으나, 여러 해에 걸친 실질적인 경제성장이 처음에 손실된 세입 중 상당액을 보충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이 늘어나자, 특히 점증하는 미국의 군사 비용과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연방 예산은 세입의 증가를 급속하게 앞섰다. 1961년, 연방정부는 944억 달러를 지출했다. 1970년, 그 총액은 1,966억 달러로 증가했다.
-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으로 미국 역사상 빈곤이 가장 많이 줄었다. 일반적인 추산에 따르면, 1959년 미국인의 21퍼센트가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었으나, 1969년에는 단지 12퍼센트만이 빈곤층에 속했다. 이러한 진보의 상당 부분은 경제적 성장의 결과였으나, 일부는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 1960년 2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스버로(Greensboro)에서 흑인 대학생들이 흑백 분리된 울워스(Woolworth)의 점심 판매대 앞에서 연좌 농성을 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데모는 남부 전체로 퍼져나가, 많은 상인이 시설을 흑백용으로 통합하게 만들었다. 1960년 가을, 연좌 농성에 참여했던 학생 중 일부가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를 형성했는데, 그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결성한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의 학생 지부였다. 그 조직의 활동으로 저항 정신이 계속 살아 있게 되었다. 1961년, 인종 평등 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흑백 학생은 ‘자유를 위한 승차(freedom rides)’라 명명한 운동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버스로 남부를 돌아다니면서 버스 대합실의 흑백 통합을 강행했다. 그들이 몇몇 장소에서 백인으로부터 너무나 야만적인 폭력을 당하게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마침내 연방군을 보내 평화를 유지시켰고, 모든 버스 대합실과 기차역에 흑백 통합을 명령했다.
- 그해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Birmingham)에서 일련의 비폭력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국장인 유진 ‘불’ 코너(Eugene ‘Bull’ Connor)는 수백 명의 시위자를 체포하고, 평화로운 행진을 경찰견, 최루탄, 전기봉, 소방 호스 등을 사용하여 잔인한 방식으로 해산시켰다. 때때로 어린아이까지 진압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다. 두 달 후, 주지사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는 앨라배마 대학의 한 건물 입구에 서서, 흑인 학생 몇 명이 법원 명령에 따라 등록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는 연방군이 도착한 다음에야 물러났다. 같은 날 밤, 미시시피 주에서는 전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임원인 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9월에는 버밍엄의 한 흑인 교회에서 폭발이 일어나 흑인 어린이 4명이 목숨을 잃었다.
- 며칠 후, 그는 ‘공공시설(상점, 식당, 극장, 호텔)’에서 흑백 분리를 금하고 고용 차별을 금하며 학교 흑백 통합을 위한 소송을 제기할 정부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입법안을 새로이 제안했다. 그 입법안을 지지하기 위해, 그리고 증가 일로에 있던 운동의 힘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20만이 넘는 시위자가 1963년 8월 워싱턴의 몰(Mall) 지역을 행진하여 링컨 기념관 앞에 모였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민권 시위였다.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구절을 반복하면서 시작하는 기도 형식의 연설로 대중을 고무시켰다.
- 석 달 후 일어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은 민권법 투쟁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했다. 케네디가 1963년 6월에 제기했던 야심찬 법안이 비교적 쉽사리 하원을 통과한 뒤 상원에 계류되어 있었다. 1964년 초, 존슨이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압력을 가한 후에야, 민권법 지지자는 마침내 남부 출신 상원 의원의 의사 진행 방해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3분의 2라는 다수로 결집했다. 그리고 상원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 1964년 여름 동안,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 남부와 북부 민권운동가가 남부(우선적으로는 미시시피 주) 곳곳에 퍼져나가 흑인의 투표 등록과 참여를 위해 일했다. ‘자유를 위한 여름(Freedom Summer)’으로 알려진 그 운동에 대해 일부 남부 백인은 폭력적으로 반응했다.
- ‘자유를 위한 여름’ 운동으로 인해 정규적인 주 정당 조직의 대안으로서 흑백 통합의 미시시피 자유 민주당(Mississippi Freedom Democratic party; MFDP)이 창설되었다. 파니 루 해이머(Fannie Lou Hamer)의 지도로 미시시피 자유 민주당은 그해 여름 전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규적인 당권에 도전했다. 존슨 대통령은 킹 목사의 도움으로 타협의 중재자가 될 수 있었는데, 타협안은 정규 당은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고, 미시시피 자유 민주당에게는 당의 개혁을 약속하면서 참관자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많은 미시시피 자유 민주당 사람은 합의안을 거절하고, 격분해 전당대회를 떠났다. 1년 후인 1965년 3월,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의 셀마(Selma)에서 흑인의 투표 등록권을 요구하려고 중요한 시위를 조직했다. 셀마의 보안관인 짐 클라크(Jim Clark)는 지역 경찰관을 이끌고 시위대를 잔인하게 공격했으며,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 앨라배마 주 사건에 뒤따라 전국적으로 분노의 물결이 일어나 존슨 대통령이 1965년에 제안한 민권법이 가결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투표권법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법안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려는 흑인이 연방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 1966년까지 흑인의 69퍼센트는 대도시 지역에 살고 있었고, 45퍼센트는 남부 지역 이외에 거주하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의 경제적 조건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흑인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던 가난한 도시지역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악화되고 있었다. 1960년대 초 백인이 아닌 미국인 인구의 반 이상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따라서 1960년 중반에 인종 문제는 남부에서 나머지 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형식적이고 법적인 흑백 분리를 넘어 종종 흑백 차별을 지지하는 비공식적 관습에 대한 공격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투쟁은 북부 도시로 옮겨갔는데, 그곳에는 짐 크로우법이 없었으나 흑백 분리가 많이 존재했다. 흑인 지도자(그리고 그들의 백인 지지자)는 직업 차별에 대한 투쟁이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고용주가 흑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은 소수 세력(minorities)을 고용하고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요하다면 고용주는 소수 세력을 고용하기 위한 적극적 방법을 채택해야 했다. 린든 존슨은 1965년에 ‘소수자 차별 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를 지지했다.
- 1970년대를 통해 소수 세력 우대 정책 지침은 점차적으로 (초중등학교와 대학을 포함하여) 연방정부로부터 자금을 받거나 거래하는 거의 모든 기관(그리고 많은 다른 기관)에까지 확대되었다. 운동의 새로운 방향이 제기했던 문제에 관한 하나의 상징은 킹 목사가 주도적 역할을 했던 1966년 여름 시카고에서 있었던 주요 캠페인이었다. 시카고 캠페인을 조직했던 사람은 북부 산업도시에서의 주택 및 고용 차별에 대해 전국적 관심을 끌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시카고 캠페인은 그 도시의 백인 거주자로부터 사악하고도 때로는 폭력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남부에서의 사례와 같은 방식으로 광범위한 관심을 끌어 모으거나 지지받는 데 실패했다.
- 블랙 파워 이념의 가장 지속적인 효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흑인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블랙 파워는 또한 정치적 형태를 지녔으며, 민권운동 내에 깊은 분열을 만들었다. 동조적인 백인과의 협력을 강조해왔던 전통적인 흑인 조직-전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도시 동맹(Urban League), 킹 목사의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등-은 이제 좀 더 급진적인 조직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와 인종 평등 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는 비교적 온건한 흑백 조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러한 조직과 여타 조직은 백인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해 더 급진적이고 때때로 폭력을 수반하는 행동까지 요구했으며, 나이든 기성의 흑인 지도자의 접근 방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블랙 파워 이념의 가장 급진적 표현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기반을 둔 ‘블랙 팬더(Black Panther)’나 분리주의자 단체인 ‘이슬람 국가(Nation of Islam)’ 같은 혁명 단체에서 나왔다. ‘이슬람 국가’는 백인을 ‘악마’라고 비난하면서 흑인에게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일 것과 완전한 인종 분리를 호소했다. 가장 유명했던, ‘흑인 이슬람 교도(Black Muslims)’는 말콤 리틀(Malcolm Little)이었다. 그는 말콤 엑스(Malcolm X, ‘X’는 잃어버린 아프리카의 성姓을 의미했다)라는 이름을 선택했고, 백인들도 그를 종종 그렇게 불렀다. 추정컨대 말콤 엑스는 ‘이슬람 국가’ 내의 경쟁자의 명령을 받은 흑인 총잡이에 의해 1965년에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많은 흑인 공동체 내에서 주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이 아이젠하워 시절의 원자무기 지향적 방어 전략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유연한 방식으로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응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특히, 케네디는 제3세계의 ‘부상하는 지역(emerging areas)’에서 공산주의 위협에 대처하는 미국의 능력을 불만스러워했다. 케네디가 보기에 그 지역은, 장래에 공산주의에 대한 진정한 투쟁이 일어날 곳이었다. 그는 특수군(얼마 후 ‘그린베레’로 알려지게 됨)의 확대를 열렬히 지원했다.
- 케네디는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도 선호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와 상당히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진보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제안했다. 이것은 그 지역 국가의 평화로운 발전과 안정을 위한 일련의 프로젝트였다. 또한 해외 원조를 조정하기 위해 국제 개발국(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ID)을 창설했다. 케네디는 그가 제안한 가장 대중적 혁신 중의 하나인 평화 봉사단(Peace Corps)을 만들었다. 평화 봉사단에서는 미국의 젊은 자원자를 해외의 개발 도상 지역에 보내 일하게 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외교정책에서 최초의 모험 중 하나는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에 대항한, 재난을 가져온 공격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그 계획을 기안했으며, 케네디가 정권을 잡았을 때 중앙정보국은 여러 달 동안 중앙아메리카에서 반(反)카스트로 쿠바 탈주자로 구성된 소수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1961년 4월 17일, 새 대통령의 동의하에 무장한 망명자 2,000명이 쿠바의 피그스 만(Bay of Pigs)에 상륙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미국 공군이 지원해주고, 다음에는 쿠바 국민이 자발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상황이 굉장히 악화되자 케네디는 미국이 너무 직접적으로 침공에 개입하는 것이 두려워 공군 지원을 취소해버렸다. 기대했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대신, 잘 무장된 카스트로 병력이 침략자를 쉽사리 분쇄했으며, 이틀 만에 전체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 1961년 6월에 케네디는 소련 수상 니키타 흐루쇼프를 처음으로 만나기 위해 비엔나로 갔다. 두 사람 간의 냉냉한 의견 교환은 양국 간의 긴장을 거의 없애지 못했다. 게다가 동독의 한복판에 위치한 비공산주의 서베를린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흐루쇼프의 은밀한 위협도 줄어들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특히 동독 거주자가 베를린 중심의 경계를 쉽사리 가로질러 서독으로 대량 탈출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러한 탈출을 막기 위한 간단한 방법을 알아냈다. 동독 정부는 소련의 명령에 따라 1961년 8월 13일 동이 트기 전,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설치했다. 수비대는 계속해서 탈출하려고 했던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후 거의 30년 동안, 베를린 장벽은 공산 세계와 비공산 세계 간의 갈등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물리적 상징이 되었다.
- 1962년 여름 동안 미국의 첩보 기관은 쿠바에 소련의 기술자와 장비가 새로이 도착하고 있다는 것과 군사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10월 14일, 공중 판독 사진에서 소련이 공격용 핵무기 부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 터키 내에 있는 미국 미사일에 맞서기 위한 (그리고 쿠바에 대한 장래 미국의 침입에 대한 저지 방책으로도) 합리적이고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드는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케네디와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미사일 부지는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 행위를 의미했다. 거의 즉각적으로 대통령은 그 무기가 쿠바에 남아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10월 22일, 그는 모든 공격 무기에 대한 ‘차단’으로, 쿠바 주변을 봉쇄하라고 해군 및 공군에 지시했다. 10월 26일 저녁 늦게, 케네디가 흐루쇼프로부터 미국이 쿠바에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소련도 미사일 기지를 제거하겠다는 제안을 받을 때까지, 미국은 미사일 기지에 대한 공중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여타의 더 강압적인 소련의 메시지를 무시하며, 소련의 제안에 동의했다. 위기는 곧 끝났다.
- 1961년 라파엘 트루히요 장군(General Rafael Trujillo)의 억압적 독재 권력이 암살로 붕괴되자, 이후 4년 동안 이 나라의 여러 당파가 지배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1965년 봄, 다양한 집단이 좌파 민족주의자 후앙 보쉬(Juan Bosch)를 위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보수 정권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존슨은 (어떠한 증거도 없이) 보쉬가 친카스트로 공산 정권을 세울 계획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질서를 탄압하기 위해 미군 3만 명을 파견했다. 미군은 1966년 선거에서 보수파 후보가 보쉬를 누르고 승리한 이후에야 철수했다.
- 미국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남베트남(South Vietnam)의 새로운 지도자로 응고 딘 디엠(Ngo Dinh Diem, 吳廷淡)을 지지하고, 그 협정이 요구했던 1956년의 선거를 디엠이 거부하는 것도 지지하면서, 이 분열된 새 국가의 불안정한 정치 속으로 점차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디엠은 중부 베트남 출신의 귀족적 가톨릭 교도이며 남부의 국외인이었으나, 또한 프랑스에 협력하지 않아 훼손되지 않은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간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도움을 받아 디엠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던 몇몇 강력한 종교 분파와 남베트남의 마피아에 대해 효과적인 군사행동을 취했다. 그 결과, 미국은 디엠을 호찌민에 대항하는 강력하고도 인상적인 대안으로 여기게 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쏟아부었다.
- 디엠은 초기에 베트남의 분파를 억누르는 데 성공하자 1959년 월맹의 호찌민 지지자를 제거하려는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호찌민은 분단 이후 남부의 배후에 머물러 있었다. 디엠의 군사행동으로 호찌민 민족 통일을 위한 무장투쟁을 재개하게 되었다. 1959년, 남베트남에 있던 월맹의 간부는, 많은 미국인에게 베트콩(Viet Cong)으로 알려진 민족 해방 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을 조직했다. 그 조직은 북쪽의 월맹 정부와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다. 1960년, 호찌민의 명령에 따라 북베트남으로부터 물질적, 인적 지원을 받은 민족 해방 전선은 남쪽에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미국인은 이것이 베트남전쟁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1961년, 민족 해방 전선 세력은 베트남의 많은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디엠은 군부를 포함하여 남베트남의 많은 여타 집단의 지지도 잃고 있었다. 1963년, 디엠 정권은 가톨릭을 남베트남의 지배적 종교로 만들기 위해 남베트남 불교도를 탄압하고 규제하여 심대한 위기를 촉발시켰다. 불교도는 엄청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 동안 여러 명의 승려가 가솔린을 몸에 뿌리고 사이공의 중심가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분신 자살했는데, 이 모습이 사진기자와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혔다. 미국의 관리는 디엠에게 당시 휘청거리는 정권을 개혁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나, 그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63년 가을에 케네디는 남베트남의 일부 장성이 디엠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동의했다. 1963년 11월 초, 그들은 (미국이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디엠과 그의 형제이자 주요한 고문이던 응고 딘 누(Ngo Dinh Nhu)를 암살했다. 그러고는 일련의 새로운 정권 중 첫 번째 정권을 수립했는데, 그것은 향후 3년 동안 그들이 붕괴시킨 정권보다 훨씬 더 불안정했다. 쿠데타 몇 주 후, 존 케네디도 암살당했다.
- 그는 임기 첫 몇 달 동안 5,000명의 군사고문단을 추가로 파견하고, 5,000명을 더 보낼 준비를 하여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약간 확대했다. 그런 다음 1964년 8월 초, 대통령은 통킹 만(Gulf of Tonkin)의 공해상에서 순찰하던 미국의 구축함이 월맹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훗날의 정보는 행정부가 그 공격을 정확하게 보고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 사건을 심각한 공격 행위로 보는 존슨의 설명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원에서는 416 대 0으로, 상원에서는 88 대 2로, 의회는 서둘러 통킹 만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 결의안은 대통령에게 미군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수단’과 동남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공격을 방지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 결의안은, 적어도 존슨의 견해로는, 분쟁이 격화될 경우 제약 없는 합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남베트남의 지도력이 여전히 자리를 못 잡고 남쪽에 대한 공산주의의 군사적 압력이 강해지면서, 베트콩에 대한 대항이 미국의 몫으로 지워졌다. 1965년 2월, 공산군이 플레이쿠(Pleiku)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기지를 공격한 후, 존슨은 미군에 북베트남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공격은 북베트남 군인과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는 책임을 맡고 있는 보급선과 보관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폭격은 1972년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한 달 후인 1965년 3월, 미국 해병대 2개 대대가 남베트남의 다낭(Da Nang)에 상륙했다. 이제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 그해 말까지 베트남에는 미국 전투 요원이 18만 명 이상 주둔했고, 1966년에 그 숫자는 2배로 증가했으며, 1967년 말에는 미군이 50만 명 이상 주둔했다. 그 와중에 공중전은 격화되었다. 1966년 봄까지, 미군이 4,000명 이상 전사했다.
- 북베트남을 공습하면 공산주의자가 전쟁을 포기할 것이라고 본 미국의 기대가 틀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북베트남은 현대 산업사회가 아니어서 폭격의 효과가 나타날 만한 목표물도 거의 없었다. 북베트남 사람은 폭격에 지혜롭게 대응했다. 즉, 지하 터널, 상점, 공장의 연결망을 만들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실제적인 원조를 확보해놓았으며, 미군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호찌민 통로를 계속 이동시켰다. 폭격은 월맹의 결의를 분쇄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에 대한 민중의 참여를 강화시켰다.
- 미군은 마을 주민을 고향에서 내쫓아 난민 수용소 캠프나 도시로 보냈고(1967년에는 300만 이상의 난민이 생겼다), 그런 다음 텅 빈 마을과 마을 주변을 파괴했다. 전쟁이 시간만 질질 끌고 승리가 손에 잡히지 않자, 미국의 일부 장교와 관리는 대통령에게 군사적 지원을 확대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존슨 행정부는 저항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국내에서 장애와 좌절에 부딪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위대한 사회’ 개혁을 지속하면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존슨의 공약은 1960년대 전반 2퍼센트에 머물던 인플레율이 1967년에는 3퍼센트로, 1968년에는 4퍼센트로, 그리고 1969년에는 6퍼센트로 상승하는 데 일조했다. 1967년 8월, 존슨은 더욱 파멸적인 인플레를 피하기 위해 의회에 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자 의회의 보수주의자는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에서 60억 달러를 축소하라고 요구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하는 노먼 포도레츠(Norman Podhoretz), 귄터 류이(Guenter Lewy), 스미스(R. B. Smith) 같은 학자와 작가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의 공격은 아시아 전체에 혁명을 전파하려는 중국과 소련의 계획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베트남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그 자체도 미국 임무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베트남이 함락된다면 곧바로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게 될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도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개입은 미국의 정당한 안보상의 이해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합리적이면서도 필연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는 이에 회의적이었다. 좌파 역사가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제국주의의 한 형태로서,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 특정한 정치·경제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미국의 더 큰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 1982년의 저작에서 래리 버먼(Larry Berman)은 다소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존슨이나 그의 보좌관이 베트남에서 성공을 막는 장애물을 의식하고는 있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승리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의심했다. 대통령은 잘못 인도되지도, 그릇된 정보를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존슨이 군대를 보낸 까닭은 베트남이 함락되면 국내에서 ‘위대한 사회’를 세우려는 희망이 파괴되거나 정치적으로 몰락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1968년 1월 31일, 베트남인의 새해 첫날(Tet, 음력 1월 1일), 공산군은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미국의 본거지를 대규모로 공격했다. 후에(Hue) 같은 몇몇 도시는 일시적으로 공산군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 보도를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시청하던 미국인은 공산군이 사이공 한복판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남베트남의 관리들과 군인들에게 총격을 가해 쓰러뜨리며, (미 대사관 부지를 포함하여) 요새화된 지역을 무너뜨리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구정 공세는 또한 미국 대중에게 베트남전쟁의 잔인함도 보여주었다. 전투 도중 남베트남의 한 장교가, 사이공 거리에서 포로로 잡혀 무장해제된 젊은 베트콩 군인의 머리에 총을 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미군은 베트콩이 장악했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들을 곧 내쫓았다.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엄청난 수의 공산주의자에게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으며, 민족 해방 전선의 지위를 영구히 추락시켰고, 북베트남군이 이후의 전투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여론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구정 공세로 미국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을지는 모르나, 미국의 행정부에게는 정치적 패배였다.
- 전쟁 반대 여론은 거의 두 배가 되었다. 그리고 존슨의 인기는 35퍼센트로 하락해 트루먼 이후 가장 낮았다.
- 4월 4일, 파업 중인 흑인 청소부(sanitation workers)를 지지하기 위해 테네시 주의 멤피스로 왔던 킹 목사는 모텔의 발코니에 서 있던 중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암살자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는 두 달 후 런던에서 붙잡혔는데, 살해 동기가 분명치 않았다. 이후에 밝혀진 증거로 그가 누군가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레이는 청부인을 결코 밝히지 않았다. 킹 목사의 비극적 죽음으로 슬픔이 분출되었다. 흑인은 그의 죽음에 분노했다. 암살 후 며칠 동안 60개 이상의 도시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43명이 죽었다.
-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하나씩 하나씩 이겨 이른 시간 내에 확고한 승리자의 자리를 굳혀갔다.
- 6월 6일 늦은 밤, 로버트 케네디는 그날의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거둔 승리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 대연회장에 나타났다. 케네디가 승리에 대한 성명 발표 후 연회장을 떠나려는 순간, 그가 최근에 친이스라엘 발언을 한 것에 명백히 분개했던 젊은 팔레스타인인 써한 써한(Sirhan Sirhan)이 군중 속에서 나와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케네디는 죽었다. 두 달 새에 벌어진 두 번째 비극의 충격으로 이후의 대통령 선거전은 흥미를 잃게 되었다. 험프리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경선자인 8월 시카고 전당대회에 최종적으로 민주당원이 운집했을 때, 가장 낙관적인 관망자라도 소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했다. 전당대회장 안에 모인 대의원이 케네디와 매카시의 지지자가 선호했던 반전 조항을 당 정강에 올릴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몇 마일 밖, 시내의 공원에서는 반전 시위대 수천 명이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전당대회 셋째 날 저녁, 대의원이 이제 사실상의 지명이 불가피한 험프리에게 투표하는 동안, 시위대와 경찰은 시카고 거리에서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경찰이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다쳤다. 폭력이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중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시위대는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고 외치며 당국을 조롱했다. 여러 해 동안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꿈꾸었던 험프리는 그날 밤에 당시에는 거의 무가치해 보이던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 1960년 대통령 경선에서 패배하고 2년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한 이후, 정치적 경력이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던 리처드 닉슨이 그가 때때로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고 부른 사람의 대변인으로 재등장했다. 그는 안정에 대한 비전, 법과 질서, 정부의 축소,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평화’를 제안하면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쉽게 획득했다. 험프리가 마지막 순간에 상승했지만, 닉슨은 1960년에 패배했을 때만큼이나 작은 표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험프리가 일반투표에서 42.7퍼센트를 얻은 데 반해 (단지 50만 표차로) 그는 43.4퍼센트를 얻었으며,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험프리가 191표를 얻은 데 반해 301표를 얻었다.
- ‘프라하의 봄’-좀 더 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소련 지배의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부과된 많은 억압적 지배와 구조에 대한 거부
- 신좌파는 대부분 학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들의 급진주의적 성향은 상당 부분 현대의 대학과 관련된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 반전운동을 격화시킨 문제 중 하나는 징병(military draft) 반대였다. 종래에 징병 유예 조치를 받았던 많은 사람(대학원생, 교사, 남편, 아버지 등)이 점차 유예 폐지 조치에 따라 징집 대상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징병에 반대할 가능성이 컸다. 징집 연령이 된 수많은 미국인은 자칫하면 감옥에 오래 수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막무가내로 입대를 거부했다. 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캐나다, 스웨덴 등 여러 국가로 도주하여 군대에서 이미 탈주해 나와 있던 사람들과 합류했다.
- 1966년 이후 젊은이 사이에서는 마리화나 흡입이 거의 상용화되어 있었으며, 더욱 강력한 환각성을 지닌 LSD 같은 것도 사용되었다.
- 대항문화는 사회 전반에 흐르던 여러 자극에 대한 과장된 표현일 뿐이었다. 긴 머리와 기이한 복장은 히피나 급진주의자뿐만 아니라 세대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마리화나 흡입, 성에 대한 더 자유로운 태도, 인습 타파적인(더러는 외설적인) 언어, 이 모두가 대항문화의 진정한 신봉자를 넘어 폭넓게 전파되었다.
- 1960년대에 록 음악의 영향력이 커졌던 것은 어느 정도 비틀즈(Beatles)의 경이적인 인기 덕분이었다. 이 영국인 그룹이 1964년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놀랄 만한 선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대부분의 록 음악인은 한동안 대다수의 기존 대중음악가처럼 논쟁의 여지가 없는 낭만적 주제에 집중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는 록 음악이 그 시대의 인습 타파적인 새로운 가치를 많이 반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비틀즈는 대중에게 새롭고 실험적이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 위해 한때 단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던 스타일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태도는 마약과 동양 종교에 대한 대중적 매력이 증가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같은 여타 그룹은 더욱더 공개적으로 분노, 좌절, 반항에 관한 주제에 매달렸다. 특히 이 시기에 선두적인 포크(folk) 가수 밥 딜런(Bob Dylan)과 조언 바에즈(Joan Baez) 같은 많은 대중음악가는 음악을 명백한 정치적 급진주의를 표현하는 데 이용했다. 록의 휘몰아치는 듯한 리듬, 숨김 없는 관능(sensuality), 때로는 거칠면서도 분노한 듯한 음조, 이 모두가 1960년대 후반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는 적절한 방식이었다.
- 록 음악과 대항문화의 결합을 보여준 강력한 상징은 뉴욕 주 우드스톡(Woodstock)에서 열린 성대한 음악 축제였다. 1969년 여름 40만 명이 약 1주일 동안 한 농장에 모였는데 폭우, 진흙, 열악한 시설, 극도의 혼잡함에도 군중은 평화스럽고 화목한 상황에서 공연을 즐겼다. 당시 대항문화의 옹호자는 어떻게 우드스톡이 ‘우드스톡 나라(Woodstock Nation)’라는 새로운 청년 문화의 탄생을 대표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열광적으로 토로했다. 그러나 4개월 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알타몬트(Altamont) 경주장에서 열렸던 록 음악회에는 롤링 스톤즈가 출연하고 30만 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는 청년 문화의 어두운 면이 드러났다. 알타몬트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명이 죽었는데, 사고 혹은 약물 과다 복용에다 한 명은 ‘헬스 엔젤스(Hell’s Angels)’라는 오토바이 갱들에게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갱들은 음악회의 안전 요원으로 봉사하면서 여러 명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칼로 찔렀다.
-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는 인디언이나 히스패닉, 동성애주의자 등이 자신을 표현하고 정치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시대였다.
- 그들은 1960년대부터 반항적인 의미를 담아 스스로를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 내에서 가장 가난하고 여러 가지 질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가장 불안정한 집단이었다.
- 1953년에 통과된 두 개의 법안은 ‘종결(termination)’이란 이름을 붙인 새로운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 동안 인디언 부족은 주 정부의 행정적 관할에서 벗어난 채 법적인 존재로서만 인정받았으나, 연방정부는 종결 정책에 따라 그와 같은 관행을 철회하고 그들을 백인 거주민과 동일한 지역 관할권(local jurisdiction)에 종속시켰다. 동시에 연방정부는 인디언이 백인 세계에 동화될 수 있도록 장려하여 도시에 모여서 살아가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전체 사회에 적응하게 되고 문화적 특성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 정책에 인디언이 아주 극렬하게 반항했기 때문이다. 1958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해당 부족의 동의 없이는 더 이상의 ‘종결’ 정책의 추진을 금했다. 한편, 종결 정책에 대한 투쟁은 신세대의 인디언 전사를 동원했으며, 1944년에 만들어진 아메리카 원주민의 중심적 조직, 즉 전미 인디언 총회(National Congress of American Indians, NCAI)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60년대 민주당 행정부는 종결 정책을 되살리려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미미하지만 부족 자치를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공동체 행동(Community Action)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경제 기회국(OEO)의 자금이 부족민의 조직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하나의 뚜렷한 실례가 된다.
- 1961년, 67개 부족에 속해 있던 400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시카고에 모여 ‘아메리카 원주민 결의 선언서(Declaration of Indian Purpose)’를 발표했다. 그 선언서는 “우리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선택할 권리”와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보존할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아의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했으나, 이 모임의 결과로 만들어진 전국 아메리카 원주민 청년 협의회(National Indian Youth Council)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민족주의 이념과 부족 간의 단합을 증진시켰다. 1968년 일군의 젊고 호전적인 인디언이 아메리카 원주민 운동(American Indian Movement, AIM)을 창설했고, 그 단체는 도시지역 및 보호구역에서 동시에 지지를 끌어냈다.
- 1968년, 의회는 아메리카 원주민 민권법을 통과시켰는데, 그 법안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에 근거하여 일반 시민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많은 권리를 보호구역(reservation)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보장했으며, 또한 보호구역 내에서 부족법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 1968년, 인디언 어민은 콜롬비아 강과 퓨젯 사운드(Puget Sound, 워싱턴 주 북서부의 만)에 관한 옛 조약의 권리를 인용하면서 워싱턴 주의 관리와 충돌했다. 이듬해 여러 부족의 인디언이 샌프란시스코 만의 알카트래즈 섬(Alcatraz Island)에 있는 폐기된 연방 형무소를 점령하여 ‘발견’했다는 이유로 그 부지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압력이 거세지자 닉슨 행정부는 1969년 모호크-수(Mohawk-Sioux) 부족의 일원인 루이스 브루스(Louis Bruce)를 인디언 업무 국장(commissioner of Indian affairs)에 임명했고, 1970년에는 부족 자치 및 연방 지원의 증대를 약속했다. 그러나 저항은 계속되었다.
- 1969년 말, 닉슨과 키신저는 좀처럼 진전이 없는 군사적 대치 상태를 미국에 유리하게 돌려놓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있는 기지를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 캄보디아 침공은 문자 그대로 하룻밤 만에, 약화되고 있던 반전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5월 초 여러 날 동안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소란스러운 반전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5월 4일, 오하이오 주의 켄트(Kent) 주립 대학에서 반전시위자에게 주 방위군(National Guard)이 총격을 가하여 대학생 4명이 살해되고 9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자 분위기는 크게 고조되었다. 열흘 후, 미시시피 주의 잭슨(Jackson) 주립 대학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여한 학생 2명을 살해했다. 반전을 외치는 소리가 정부와 언론에까지 확산되었다. 분노한 의회는 그해 12월, 통킹 만 결의안을 폐지했다.
- 1971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거의 3분의 2에 달하는 사람이,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패배할 경우 국가 및 자신에 대한 신뢰가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FBI, CIA, 백악관 등등의 연방 기관은 때로는 비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반전 및 급진 단체를 불신하게 만들고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 1972년 4월, 대통령은 미군이 철수하기 전에 북베트남군을 남베트남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했던 오랜 주장을 철회했다. 한편, 헨리 키신저는 파리에서 북베트남의 외무부 장관인 레 둑 토(Le Duc Tho, 黎德壽)를 비밀리에 만나 휴전을 위한 제반 조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10월 26일, 키신저는 “평화가 눈앞에 있다”고 선언했다.
- 미국과 북베트남 정부는 휴전을 위한 키신저-토(Kissinger-Tho) 계획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남베트남의 응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이 남쪽에서 북베트남군이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하면서 협상을 방해했다. 키신저는 티우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에게 추가 양보를 얻어내려 애썼지만, 12월 16일 대화는 결렬되었다.
- 마침내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크게 약화된 남쪽 군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했다. 티우는 워싱턴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의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대통령이 의회에 추가 재정을 요구했지만 의회는 거부했다. 1975년 4월 하순, 혼란 속에서 티우 정권의 관리와 미 대사관 직원이 치욕스럽게 도망간 직후 공산군이 사이공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수도를 점령한 후 호찌민 시로 개명했으며, 하노이의 엄격한 지배하에 베트남의 재통일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캄보디아의 론 놀(Lon Nol) 정권도 크메르 루주(Khmer Rouge)라는, 살인을 일삼는 공산 세력에게 함락되었는데, 크메르 루주의 야만적 정책은 향후 수년 동안 전 국민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베트남전쟁에 직접 들어간 비용만 해도 약 1,500억 달러에 달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액수가 간접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미국 젊은이 5만 7,000명 이상이 죽고 30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신뢰와 자존심에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 공산주의자와 새로운 유대 관계를 맺기 원했는데, 거기에는 중국을 소련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서 강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도 나름대로 국제 무대에서 고립된 처지를 탈피하려고 애썼다. 1971년 7월, 닉슨은 헨리 키신저를 비밀 특사로 삼아 베이징에 파견했다. 키신저가 돌아오자, 대통령은 몇 개월 이내에 중국을 방문하겠다는 놀라운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가을, 국제연합(UN)은 미국의 찬성에 힘입어 중국 공산 정부를 받아들이고 타이완 정부 대표를 축출했다. 마침내 1972년 2월, 닉슨은 중국을 공식 방문했는데, 단 한 차례의 방문으로 중국 공산주의자와 미국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증오심을 크게 누그러졌다. 닉슨은 공식적으로 공산 정권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그해 들어 미국과 중국은 초보적 단계(low-level)의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 중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동시에 소련과는 프랑스어로 데탕트(détente)라 부르는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1972년, 미국과 소련의 외교관은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 SALT)을 끌어냈는데, 그 내용은 양측이 보유하고 있는 핵미사일(ICBM,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해 5월 대통령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협정에 서명했고, 이듬해에는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 제3세계에 대한 닉슨-키신저 정책은 미국이 지역 분쟁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않으면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69년과 1970년에 대통령은, 미국이 “동맹국과 우방국의 방어와 발전에 참여하겠”지만, ‘우방국’의 장래를 위해 당사국에 ‘기본적 책임’을 맡기겠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실제적으로 닉슨 독트린은 제3세계 발전에 기여하려는 미국의 관심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했다.
- 1970년, 중앙정보국(CIA)은 공산주의의의 도전에 직면한 칠레의 기존 정부를 돕기 위해 상당한 돈을 쏟아부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마르크스주의 대통령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공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게 되자, 미국은 새 정부를 흔들기 위해 칠레의 반대 세력에 더 많은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1973년, 군사 평의회(military junta)가 아옌데로부터 권력을 탈취했고, 아옌데는 즉각적으로 살해되었다. 미국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의 압제적인 새 군사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발전시켜나갔다. 중동에서는 1967년 전쟁의 여파로 상황이 더욱 뒤숭숭해졌는데,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상당히 많은 새 영토를 차지했으며 그곳에 살던 수많은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을 몰아냈다. 망명자가 옮겨간 요르단과 레바논 등의 주변 국가는 커다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1973년 10월, 유대인의 명절인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일’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의 가장 엄숙한 종교 절기임)에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열흘 동안 이스라엘은 갑작스런 공격으로부터 전세를 만회하고자 분투했으며, 마침내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군에 효과적인 반격을 가했다. 그러한 시점에 미국이 개입해서는, 이스라엘에게 우위에 서기보다는 휴전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는 버스 통학 강제 규정에 따른 학교에서의 인종차별 금지를 폐지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보건·교육·복지부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라는 법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학군(school district)에 연방 재원을 주지 않았던 종래의 방침을 중단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위대한 사회’와 ‘뉴프런티어’의 많은 사회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없애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존슨 시대의 빈곤 퇴치 계획의 핵심 부서였던 경제 기회국을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닉슨의 국내 정책에는 진보적이고 창조적 요소가 있었다. 그는 환경보호청을 설치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엄중한 환경 규제를 두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노동자를 위해 연방이 재정을 지원하는,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 프로그램을 최초로 명령했다. 닉슨 행정부의 가장 과감한 노력 중의 하나는 국가 복지제도를 개조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가족 보조 계획(Family Assistance Plan, FAP)을 제시하면서 이것으로 기존의 제도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사실상 모든 미국인에게 연간 보장 소득(guaranteed annual income)을 제공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즉, 4,000달러까지 외부 소득으로 보충할 수 있도록 1,600달러의 연방 교부금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계획은 1970년 하원에서 동의를 얻어냈으나, 상원에서는 거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닉슨은 트루먼 이래로 의회에서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던, 국가 건강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 계획을 제안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 얼 워렌(Earl Warren)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
- 인종 문제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은 남부와 북부를 막론하고 전통적 사회 형태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엄격히 보장하는 조처는 많은 미국인의 눈에 범죄와 무질서,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는 데 직접적인 공헌을 한 것처럼 비쳤다. 엔젤 대 비탈(Engel v. Vitale) 사건(1962년)에서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종교 의식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자와 그 외 여러 사람의 분노를 샀다. 로스 대 국가(Roth v. United States) 사건(1957년)에서는 음란물(pornography)을 억압하는 지방 정부의 권위에 심각한 제한을 가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연이은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형사 피의자의 민권을 크게 강화했는데, 많은 미국인은 이 판결이 임무에 충실한 법률 집행관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기디온 대 웨인라이트(Gideon v. Wainwright) 사건(1963년)에서 대법원은 중죄를 범한 모든 피고인은 수임료 지불 능력과 관계없이 변호사 선임 자격이 있다고 판시했으며, 이스코비도 대 일리노이(Escobedo v. Illinois) 사건(1964년)에서는 피고인이 경찰에게 취조받기 전에 변호사와 만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또한 미란다 대 애리조나(Miranda v. Arizona) 사건(1966년)에서는 사법 당국이 범죄 피의자에게 그의 권리를 알려줄 의무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1968년에 이르면 워렌 법원은, 미국에서 권력의 균형추가 중간계급의 희생 위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이나 또는 범죄자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다고 여기는 사람으로부터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 새로운 대법원도 대통령과 많은 보수주의자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대법원은 사회 개혁의 성향에서 후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더 나아갔다. 스완 대 샤롯-메클렌버그 교육 위원회(Swann v. Charlotte-Mecklenburg Board of Education) 사건(1971년)에서 대법원은, 학교에서의 인종차별 폐지를 위한 강제 버스 통학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보스턴과 켄터키 주 루이빌(Louisville) 등 다양한 지역공동체의 집중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반대조차도 인종 통합에 대한 사법부의 성향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퍼먼 대 조지아(Furman v. Georgia) 사건(1972년)에서 대법원은 기존의 사형에 관한 법규를 뒤엎고 미래의 법안을 위한 엄격한 새 지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법원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판결에 속하는,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1973년)에서는 낙태 금지법을 파기했다.
- 닉슨은 역사상 가장 큰 표차로 재선되었다. 일반투표에서 37.5퍼센트를 얻은 맥거번에 비해 그는 60.7퍼센트를 얻었으며,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17표를 얻은 상대에 비해 그는 520표를 얻었다. 민주당 후보는 단지 매사추세츠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만 승리했을 뿐이었다.
- 여러 해 동안, 석유 수출국 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는 제3세계 국가의 석유 판매에 있어 비공식적 교섭 단위로서 역할을 해왔으나 실제적 힘은 거의 행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OPEC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석유를 경제적 수단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73년 욤 키프르 전쟁의 와중에서 OPEC의 아랍 회원국은 이스라엘 지원 국가-즉, 미국과 그의 서유럽 동맹국-에게 더 이상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OPEC 국가는 석유 가격을 500퍼센트(배럴당 3달러에서 15달러로) 올리는 데 동의했다. 두 가지 충격으로 유럽은 일시적인 경제 혼란에 빠졌으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초의 연료 부족을 겪었다. 비록 그 위기가 몇 달 뒤에는 완화되었지만, 에너지 가격은 계속해서 급상승했다.
-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산업은 전 세계 다른 국가와 거의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서유럽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피해를 입은 제조업 분야가 되살아나 1970년대 초에는 세계 시장과 미국 내에서 자동차와 철강을 비롯한 많은 상품 판매에 있어 미국 회사와 맹렬히 경쟁하고 있었다. 일부 미국 회사가 도산했고, 그렇지 않은 회사는 다시 한 번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구조 재편에 나섰다. 그래서 수많은 낡은 공장이 폐쇄되었고, 한때 수지맞았던 제조업 분야의 일자리 수십만 개도 사라져버렸다. 1940년대 이래로 미국 생활의 보증수표였던 높은 임금과 높은 고용의 산업 경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 연방 지불 준비 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의 의장직에 보수적 경제학자를 임명하면서, 그는 이자율을 크게 높이고 통화 공급을 축소하겠다고 보증했다. 그럼에도 닉슨의 첫 임기 2년 반 동안 국민의 생활비는 누계로 15퍼센트나 상승했고 그 와중에 경제성장은 둔화되었다. 미국은 새로운 딜레마, 즉 가격 상승과 보편적인 경제 침체의 결합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직면하고 있었다.
- 1971년 여름, 닉슨은 모든 임금과 가격을 당시 수준에서 90일 동안 동결하도록 했다. 그 후 11월에 그는 경제계획의 2단계, 즉 연방 부서가 다루어야 할 임금 및 가격 상승에 대한 의무적인 지침을 마련하는 데 착수했다. 인플레는 잠정적으로 수그러들었으나,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경기 후퇴가 인플레보다 더 타격이 클 것을 우려한 닉슨 행정부는 1971년 말 정책을 뒤집었다. 즉, 이자율이 어느 정도 떨어지는 것은 허용하고 정부 지출을 증가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예산 적자를 낳았던 것이다. 이 새로운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인플레는 크게 증가했다. 1973년에 물가는 9퍼센트 올랐으며, 1974년에는 아랍의 석유 수출 금지와 OPEC의 가격 인상 이후 물가는 12퍼센트나 올라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 수준이었다. 이때, 새로운 에너지 위기가 순식간에 국가적 중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닉슨은 자주 ‘에너지 자립’을 달성할 필요성에 관해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제안은 거의 하지 않았다.
- 1972년 6월 17일 이른 아침, 경찰은 워싱턴 D.C. 워터게이트(Watergate)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한 남자 5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2명을 침입 방조죄로 체포했다. 그때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피의자의 배후를 취재하다가 범죄 가담자 중에서 예전에 대통령 재선 위원회(Committee for the Re-Election of the President, CRP)에서 일했던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백악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민주당 사무실을 침입한 대가를 재선 위원회의 비자금에서 받았는데, 자금은 공교롭게도 백악관의 비서진이 관리하던 것이었다.
- 1973년 초, 워터게이트 범죄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았다. 연방 판사인 존 시리카(John J. Sirica)의 끈질긴 추궁 끝에 피의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매코드(James W. McCord)가 대배심(grand jury) 및 노스캐롤라이나 주 상원 의원인 샘 어빈(Sam J. Ervin)이 위원장인 상원 특별 조사 위원회에 협조하기로 동의했다. 매코드의 증언은 자백의 물꼬를 텄으며, 여러 달 동안 백악관과 선거전의 공직자가 줄줄이 불법 행위를 했음이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백악관의 측근으로서 대통령 고문역을 담당했던 존 딘(John Dean)이 닉슨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것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조사 후 두 가지의 추문이 불거져 나왔다. 하나는 흔히 있는 권력 남용으로, 백악관과 닉슨의 대통령 선거 위원회가 연루되어 있었는데, 선거 위원회의 경우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 사건 외에 다른 혐의도 있었다. 두 번째 추문은 거의 2년 동안 국민으로부터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으로, 행정부가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과 그 외의 권력 남용-사건의 ‘은폐’ 행위-에 관한 조사를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침입 사건을 사전에 계획했다거나 승인했다는 확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조사를 방해하려는 불법 행위에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는 늘어나고 있었다. 닉슨은 추문과 연관된 행정부 요원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은 결백하다고 계속 주장했다. 만약에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동안, 문제가 된 시기에 대통령 집무실에 사실상 거의 모든 대화를 녹음하는 백악관 테이프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 폭로되지 않았더라면, 사태는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 ‘통치상의 특권(executive privilege)’을 내세우면서 닉슨은 그 테이프 제출을 거부했다.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워터게이트 사건을 맡은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당시 그는 하버드 법대 교수였다)는 닉슨에게 녹음 기록을 받아내기 위해 1973년 10월 그를 법원으로 소환하였다. 닉슨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콕스를 해임했으며, 법무부 장관 엘리오트 리차드슨(Elliot Richardson)과 차관보가 저항의 의미로 사임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 ‘토요일 밤의 학살’은 대통령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국민의 압력에 못 이긴 대통령은 신임 특별검사로 텍사스의 변호사인 리언 자워스키(Leon Jaworski)를 임명했는데, 자워스키는 테이프를 법원에 강제 제출케 한 콕스에 못지않게 단호한 인물로 밝혀졌다. 게다가 이 일은 탄핵이 가능할 정도로 하원의 조사를 촉진시켰다.
- 1973년 말, 부통령인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도 메릴랜드 주지사와 부통령 재직시 뇌물을 받고 횡령했다는 증거가 노출되자 추문에 휘말리게 되었다. 법무부가 그 사건을 수사하지 않겠다고 합의해준 대가로, 애그뉴는 소득세 포탈이라는 가벼운 죄를 받아들이고 사직했다. 논란의 대상이 된 애그뉴가 더 이상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없게 되자, 닉슨의 백악관 축출은 더욱 쉬워진 것처럼 보였다. 신임 부통령(1967년에 채택된 헌법 수정 조항 25조에 따라 최초로 임명됨)은 하원 소수당의 지도자인 제럴드 포드(Gerald Ford)로서, 미시간 주 출신의 우호적이고 인기 있는 의원이었다. 탄핵 조사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1974년 4월, 향후 법원의 테이프 강제 제출 요구를 막아보려고, 대통령은 결백을 증명해보일 수 있는 다수의 관련 대화 녹취록(transcripts)을 제출했다. 조사관과 많은 국민의 생각은 대통령과 달랐다. 이렇게 편집된 테이프는 닉슨이 은폐에 연루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7월, 사태의 긴박함은 절정에 달했다. 우선, 대법원은 ‘국가 대 리처드 닉슨(United States v. Richard M. Nixon) 사건’에서 대통령이 그 테이프를 특별검사 자워스키에게 제출할 것을 만장일치로 판결했으며, 며칠 후 하원 법사 위원회는 세 가지 조항의 탄핵 건의를 표결했다.
- 추가 증거 없이도 닉슨은 하원 전원으로부터 탄핵되고 상원으로부터 유죄로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8월 초, 그는 마침내 ‘확실한 증거(smoking gun)’-닉슨이 유죄라는 구체적 증거-를 제출했다. 그것은 닉슨의 변호인이 분실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온 자료였다. 대법원이 닉슨에게 제출하도록 한 녹음 테이프 속에는, 그가 이론의 여지없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증거가 들어 있었다. 녹음 테이프에서 알아낸 것은, 건물 침입 사건 사흘 후에 대통령이 FBI로 하여금 건물 침입에 대한 조사를 멈추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었다. 탄핵과 유죄 결정은 이제 불가피해 보였다.
- 마침내 1974년 8월 8일,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임을 발표한 대통령이 되었다. 다음 날 정오, 닉슨과 그의 가족이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서부로 향하고 있을 때, 제럴드 포드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었다.
- 신임 대통령은 확고한 정치적 통합의 상징이 되고자 했지만, 취임 한 달 후, 닉슨 대통령이 재직시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모든 범죄에 대해 ‘완전하고, 속박 없는, 절대적인 사면’ 조치를 내렸을 때, 역풍을 맞고 말았다. 그 사면으로 포드의 인기는 떨어졌고, 완전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 고금리를 견지하고, (거부권을 빈번히 행사하여) 연방 지출의 증대를 반대하며, 세금 감면에 대한 압력에 저항한 후, 포드는 1974년과 1975년에 심각한 경기 침체에 대처해야 했다. 경제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에너지 위기가 존재했다. 1973년 아랍의 석유 금수 조치 이후 OPEC 카르텔은 석유 가격을 올렸는데, 1974년 한 해에만도 4배나 인상했다. 이 때문에 1976년 인플레율이 11퍼센트에 달하게 되었다. 포드는 닉슨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헨리 키신저를 유임시켰으며, 닉슨 시절의 여러 가지 정책을 고수했다. 1974년 말, 포드는 시베리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를 만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의 기초가 되는 무기 통제 협정에 서명하여, 닉슨 행정부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표를 달성했다. 한편, 키신저는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점령지의 많은 부분을 이집트에 돌려준다는 내용의 새로운 협정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국은 장래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 경제에 대한 불만과 포드에 대한 폭넓은 환멸 때문에 민주당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일반투표에서 50퍼센트를 얻은 카터에 비해, 포드는 47.9퍼센트를 얻었으며,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카터가 297표, 포드가 240표를 얻었다.
- 실업은 줄었으나 인플레가 급등했는데, 이는 OPEC이 에너지 가격을 계속해서 큰 폭으로 인상했기 때문이었다. 카터의 임기 중 후반 2년 동안 물가는 연 10퍼센트 이상 올랐다. 카터는 닉슨과 포드처럼, 통화 긴축에 이어 소비의 자발적 억제를 권유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카터가 연방 지불 준비 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의 의장으로 임명했던 보수주의 경제학자는 인플레를 중지시키려는 데 단호하여 금리를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까지 올렸으며, 그래서 때로는 금리가 20퍼센트를 넘기도 했다. 1979년 여름, 중동 지역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미국은 제2차 연료 부족 사태를 겪었다. 그러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OPEC은 또다시 큰 폭의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
- 카터가 국가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우리 국가 의지의 핵심”에 타격을 가한 ‘신뢰의 위기’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 연설은 (비록 카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불안(malaise)’ 연설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대통령이 자신의 문제를 국민에게 전가시키려 한다는 비난을 가열시켰다. 며칠 후 카터는 갑작스레 내각의 몇몇 장관을 해임했는데, 그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더욱 어려워졌다.
- 카터는 많은 국가(특히 소련을 포함함)의 인권 침해에 대해 날카로운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 카터는 수년 전에 시작된, 파나마운하의 통제권을 파나마 정부에 넘겨주는 쌍무 조약(a pair of treaties)에 관한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격렬한 토론 끝에 상원은 68 대 32로 조약을 비준했는데, 이것은 3분의 2 이상의 정족수보다 단지 1표가 더 많았다. 카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조약 체결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중동 협상은 1977년 11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대통령이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수상의 이스라엘 방문 초청을 받아들일 때까지 절망적인 답보 상태로 보였다. 텔아비브에서 사다트는, 이집트가 이제는 이스라엘을 정통성 있는 정치적 실체로서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카터는 1978년 9월 사다트와 베긴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 초대했다. 그리하여 카터 진영에서는 양자 간의 논쟁을 조정하려고 두 사람을 2주 동안 그곳에 머물게 하면서 설득 작업을 벌였다. 9월 17일, 카터는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을 위한 기초안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발표하면서 두 지도자를 동반하여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1979년 3월 26일, 베긴과 사다트는 다시 한 번 백악관으로 와서, 이른바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이라는 양국 간의 공식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제안에 기꺼이 화답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을 외부 세계에 개방하고자 애쓰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1978년 12월 15일, 워싱턴과 베이징은 양국 간의 공식적 외교 관계를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몇 달 후 카터는 비엔나에서, 연로한 데다 병까지 겹친 브레즈네프를 만나 양국의 장거리 미사일과 폭격기, 핵탄두 등의 보유에 한계를 정하는 새로운 SALT II, 즉 전략무기제한협정의 초안을 완결했다. 그러나 곧바로 SALT II는 미국 내 보수파의 치열한 반대에 부딪혔다.
- 1950년대 초부터 미국은 이란의 샤(Shah, 국왕의 존칭, 여기서는 리자 팔레비 왕을 가리킴―옮긴이) 정부에 정치적 지원을 한 데 이어 나중에는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는 중동에서 이란을 소련의 팽창에 대항하는 요새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 샤는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많은 이란인은 샤가 독재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해왔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책략에 분개했다. 동시에, 이슬람의 성직자와 철저한 신앙심으로 무장된 많은 군중은 이란 사회를 근대화하고 서구화하려는 그의 노력에 반대했다. 이러한 분노가 결합하여 강력한 혁명운동을 낳았다. 1979년 1월, 샤는 이란을 탈출했다. 1979년 말, 이란에서는 광신적인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철저하게 서구와 미국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1979년 10월 하순, 권좌에서 물러난 샤가 암을 치료받기 위해 뉴욕에 왔고, 그로부터 며칠 뒤 11월 4일,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무장 폭도가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건물 안에 있던 외교관과 무관을 구금한 후, 인질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샤의 귀환을 요구했다. 그 후 53명의 미국인은 1년 이상 대사관에서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
- 1979년 12월 27일, 소련군은 소련과 이란 사이에 위치한 이슬람 산악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사실상 소련은 여러 해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1978년 4월부터는 지배 세력이 되었다.
- 카터는 격분하여 소련에 대해 여러 가지 경제적 제재를 가했고,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는 한편, SALT II에 대한 상원의 심의를 무산시켜버렸다.
- 선벨트에는 동남부(특히 플로리다 주), 남서부(특히 텍사스 주), 그리고 1964년에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기록한 이후 계속해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캘리포니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에 이르러 선벨트의 인구는 북부와 동부의 오랜 산업 지역을 추월하게 되었다.
- ‘세이지브러쉬의 반란(Sagebrush Rebellion)’
- 20세기 후반의 수십 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인구학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으로 인구가 집중해 있던 북동부와 중서부에서 이른바 ‘선벨트(Sunbelt)’ 지역으로 인구가 이동한 것이었다.
- 사이언톨로지 교회(Church of Scientology)[론 허버드(L. Ron Hubbard)가 1965년에 만든 신흥 종교―옮긴이]
- 복음주의자는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함으로써 ‘거듭 태어난다(born again)’는 의미의, 개인적 신앙 갱생에 대한 믿음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복음주의 종교는 미국에서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기독교 내의 주류를 이루는 종파로서 19세기 말부터 상당한 세를 모았던 하부 문화였다. 그 현대적 형태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같은 복음주의자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같은 오순절 교회주의자(Pentecostal)가 열정적인 부흥 운동을 펼쳐 미국 및 전 세계에서 엄청난 추종자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던 1950년대 초에 점차 가시화되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더욱 눈에 띄고 더욱 독단적으로 되었다. 7,0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이제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예수와 개인적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 주장했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는 자신들만의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소유했으며 학교와 대학도 운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원인 지미 카터는 백악관의 주인까지 되었다. 그는 1976년 선거 유세 도중에 자신의 ‘신앙 갱생의 경험’을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는 자신의 ‘거듭난’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계속 밝혔다.
- 1970년대의 일부 기독교 복음주의자는 정치적·문화적 우파와 관련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부도덕과 무질서가 파급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며, 그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속적인 문화가 지역사회와 학교, 가정에 침투하는 양태를 우려했다. 많은 남녀 복음주의자는 페미니즘의 성장이 전통적 가정을 위협한다고 믿고 두려워했다. 또한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이 여성운동의 목표를 앞당기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에 분개했다. 이들에게 더욱더 놀라운 일은, 학교에서 모든 종교의식을 금지한 데 이어, 나중에는 여성에게 낙태의 권리마저 보장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 ‘기독교 우파’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 한때 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던 레이건은 1960년대 초에 정치에 입문했고, 1964년에는 골드워터를 위한 인상 깊은 텔레비전 연설을 한 바 있었다. 골드워터가 실패한 후, 그는 공화당 보수파의 지도자로 급성장했다. 이어 1966년에는 부유한 보수주의자의 지원을 받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후 재임에도 성공했다.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것도 또한 우파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드는 아마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우파의 가장 민감한 면을 건드렸다. 포즈는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공화당 뉴욕 주지사였고, 미국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의 상속인이었다. 결국 많은 보수주의자는 록펠러와 그의 가족을 20년 이상이나 악마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포드는 징병 거부자를 위한 사면 프로그램을 제안한 데 이어, 이전에는 증오했던 닉슨-키신저 데탕트 정책을 확대하기까지 했으며, 임기 중에 베트남이 함락되고 파나마운하를 파나마에 양도하는 것에 동의했다.
- 197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레이건이 포드에게 도전장을 내밀자, 대통령은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제외키로 하는 동시에 보수파의 주도로 작성된 당의 정강(platform)에 동의함으로써 간신히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 1978년 캘리포니아의 보수주의 운동가인 하워드 자비스(Howard Jarvis)가 처음으로 주민 발의 13호(Proposition 13)를 통해 캘리포니아 주 과반수 시민의 찬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세금 반란 운동이 시작되었다. 주민 발의는 재산세율을 인하하는 주(state) 단위 시민 투표를 할 것인지를 묻는 일반투표(referendum)를 하자는 것이었다.
- 미국 인질의 이란 억류 사태 1주년이었던 1980년 선거일에 레이건은 총 유권자의 51퍼센트를 얻어, 41퍼센트를 얻은 지미 카터와 7퍼센트를 얻은 존 앤더슨(John Anderson, 독자적으로 선거전을 치른 일리노이 출신의 온건한 공화당 하원 의원)을 꺾고 승리했다. 공화당은 1952년 이래 처음으로 상원을 지배하게 되었다. 비록 민주당의 하원 의석 수가 약간 더 많았지만, 하원 역시 보수주의자의 손에 확고히 장악된 것처럼 보였다.
- 레이건의 취임식 날, 이란에 억류되어 있던 인질은 444일의 시련 끝에 풀려났다. 인접국인 이라크와 엎치락뒤치락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란 정부는 전쟁 비용이 절실했고, 그래서 카터 행정부가 미국의 은행에 동결해놓은 수십억 달러의 이란 재산을 풀어주는 대가로 인질 석방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지 못했던 기쁨과 애국심을 표현하면서 인질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러나 1945년의 축제가 위대한 미국의 승리를 표현한 것인 반면, 1981년의 환희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즉, 곤경에 빠진 국가가 자신감을 다시 되찾은 것을 기뻐했던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 레이건 연합에는 자본주의와 규제 없는 경제성장을 뚜렷이 지향하는,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아주 유력한 소수의 미국인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장이 대부분의 문제에 최선의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시장에 개입하는 대부분의 정부 간섭에 깊은 반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 레이건 연합의 두 번째 요소는 소수지만 영향력 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s)’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우파에게 여러 해 동안 없었던 ‘여론 주도자’-가장 영향력 있는 여러 공공 포럼에 근접해 있는 사람-라는 튼튼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한때는 자유주의자였으며, 그 이전에는 사회주의자였다. 신보수주의자는 자본주의자의 불만과 요구에 동정적이었으나, 그들의 주된 관심은 정통적 권위를 재천명하고 서구의 민주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가치와 공약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 그는 취임 후 몇 주 되지 않아서 일흔 살이 되었고, 대통령으로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 1981년, 그는 암살 미수 사건으로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으러 가면서도 의사와 농담을 나눴으며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다.
- 그 때문에 일부의 민주당원은 그를 ‘테플론(Teflon, 열에 잘 견디는 조리 기구 상표 이름―옮긴이) 대통령’이라 부르기도 했다.
- 레이건은 1980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이른바 ‘공급 중시(supply-side)’의 경제학 또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경제를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공급 중시의 경제학은 미국의 경제난이 대체로 과도하게 거둬들인 세금 때문이며, 그것은 투자자에게 성장을 유도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자본을 남겨주지 못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해법은, 새로운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기업과 부유한 개인에게 아주 관대한 혜택을 주는 동시에 세금도 줄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정부는 공급 중시의 개념에 기초한 법안을 서둘러 조합해냈다. 그 법안은 400억 달러의 예산 삭감을 제안했고, 거의 원안 그대로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게다가 대통령은 개인 및 법인에 대해서 3년 동안 30퍼센트 세율 감축이라는 과감한 제안을 했는데, 1981년 여름, 의회는 이것도 세율을 25퍼센트까지 낮추어 통과시켰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국정 운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원에 잘 단련된 공화당 다수파가 있었던 반면에 하원의 민주당 다수파는 허약한 데다 이탈자 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 카터 대통령 시절에 많은 민주당 사람이 채택했던 개념인 ‘탈규제(deregulation)’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거의 종교가 되었다.
- ‘세이지브러쉬 반란(Sagebrush Rebellion, 서부 보수주의자가 연방의 환경 규제에 대항해 싸웠던 운동)
- 세이지브러쉬 반란에 참가했던 사람은 규제가 특히 지역 경제를 황폐화시킨다고 생각했다.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도 지도부가 부패 혐의로 기소되기 전까지는, 주요한 환경법과 규제의 집행을 완화시키거나 전적으로 제거해버렸다. 그러나 1982년 초, 미국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후퇴 상태로 빠져들었다. 경제 프로그램에 있어 레이건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신속한 해법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1982년 실업율은 11퍼센트에 달해 지난 40년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불경기 때문에 레이건이 크나큰 곤경에 처하게 된 일은 없었다. 경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뚜렷하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1983년 말에는 실업률이 8.2퍼센트로 떨어졌으며, 이후 여러 해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 국민총생산(GNP)은 한 해에 3.6퍼센트 성장하여 1970년대 중반 이후 가장 큰 성장세를 보였다. 인플레는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경제는 계속 성장했으며, 인플레와 실업률은 거의 10년간이나 낮은 상태를 유지했다.
- 연방 지불 준비 위원회가 여러 해 동안 통화 긴축정책을 시행한 것이 인플레를 낮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동 위원회가 경기 후퇴에 대응하여 1983년 초에 이자율을 낮춘 것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었다. 세계적인 ‘에너지 공급 과잉’과 함께, OPEC 연합이 실제적으로 붕괴된 것도 치솟기만 하던 연료비의 인플레성 압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적자로 편성된 어마어마한 연방 예산 수십억 달러가 쇠약해가는 경제에 투입됐다. 그 결과 소비자 지출과 기업 투자가 증가했고, 증권시장은 1970년대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지속적이고 역사적인 호경기를 맞았다. 1982년 8월,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는 777에 이르렀으며, 5년 후에는 2,000을 넘어섰다. 1987년 가을에 있었던 경악할 만한 주식 폭락 사태에도 증권시장은 이후 10년 이상 성장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2000년 초에는 다우존스 평균 지수가 간단히 11,000을 넘을 정도가 되었다.
- 경제가 회복되었지만 많은 국민이 우려하던 엄청난 액수의 연방정부 예산 적자(한 해의 수입과 지출 사이의 격차)가 줄지는 못했으며, 또한 국가 부채(국가의 1년 단위 적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누적된 부채) 증가도 완화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재정적 위기 심화가 정치의 핵심 문제로 떠올랐다. 레이건은 4년 이내에 균형예산을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예산 적자 기록의 주역이었으며, 대통령으로 있던 8년 동안 늘어난 부채는 이전 행정부의 총부채보다 더 많았다. 1980년 이전에 미국 역사상 1년 단위의 최고 예산 적자는 1976년의 660억 달러였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매년 예산 적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1,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1991년에는 2,680억 달러로 정점에 달했음), 국가 부채는 1980년의 9,070억 달러에서 1991년에는 거의 3조 5,000억 달러로 치솟았다. 엄청난 적자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많았다. 인구가 고령화되고 의료 비용이 크게 증가한 결과, 특히 사회보장과 빈민 의료 보조(Medicaid)와 같은 ‘자격(entitlement)’ 프로그램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예산이 많이 부족했다. 1981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액수로 세금이 감면된 것도 적자에 공헌했다.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요구하여 늘린 국방비 지출 액수가 컸기 때문에, 이전에 국내 지출에서 삭감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연방 예산을 추가해야 했다.
- 카터 행정부 말기에 악화 일로를 달렸던 소련과의 관계는 레이건 행정부 첫 해까지도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대통령은 소련을 세계 테러리즘의 후원자라고 비난했고, 군비 협상을 할 경우에는 소련이 다른 지역에서 취하는 행동과 연계된 협상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등 소련 체제를 혹평했다. 미국은 한때 소련을 ‘사악한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대통령은 SALT II라는 전략무기제한협정이 미국에 불리하다고 오랫동안 비난해왔지만 그 조항을 계속 준수했다.
- 여러 해에 걸친 새로운 군사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그것은 ‘스타워즈(Star Wars, 과학 영화에서 따온 이름)’라고 널리 알려진 전략적 방위 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이었다. 레이건은 레이저와 인공위성을 사용하는 SDI만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미사일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으며, 따라서 핵전쟁을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소련은 새 계획으로 무기 경쟁이 더욱 위험한 단계로 가속화될 것이며(이는 미국에서도 나온 불평이었다),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전략무기제한협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냉전의 긴장이 가속화되고 선제 군비 제한(arms control initiatives)이 지지부진해지자 유럽과 미국에서는 핵무기의 증강을 끝내라고 요구하는 중요한 대중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운동의 근본 목표는 ‘핵 동결’, 즉 양 초강대국 간에 원자무기를 증강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중 시위가 발생했다. 1982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뉴욕 시 센트럴파크에 모여 핵 동결을 지지했다. 레이건 행정부가 1983년에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시험적인 노력을 시작한 것도 아마 이러한 압력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집단을 도와주기 위해 레이건 독트린이라는 정책을 새로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행동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1982년 10월, 정부는 미 육군과 해병대를 카리브 해의 조그만 섬나라인 그레나다(Grenada)에 파견했는데, 그것은 소련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반미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엘살바도르(El Salvador)에서는 정부가 좌익 혁명 세력과 싸우고 있었는데, 미국은 여기에도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늘려주었다. 그리고 그와 이웃한 니카라과에서는 1979년 ‘산디니스타(Sandinista)’ 해방군이 친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수립하였고, 1980년대 초부터는 점차 반미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성향의 국가로 성장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소위 콘트라(contras)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운 게릴라 세력이었다.
-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군대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 PLO)를 몰아낼 목적으로 레바논에 침공했을 때, 미국의 평화 유지군은 베이루트로 들어가 PLO의 철수를 감독했다. 그런 다음 미국 해병대는 허약한 레바논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베이루트에 남았다. 이렇게 하여 서로 투쟁하고 있던 어느 한쪽을 편들게 되면서 미국인은 스스로 테러리스트의 목표가 되었다.
- 레이건 행정부는 테러리즘 응징책을 과감하게 표명했다. 1986년, 대통령은 미국 공군에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폭격할 것을 명령했는데,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Muammar al-Qaddafi)는 테러리즘의 후원을 주도하는 문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 레이건은 1984년 단합된 공화당의 확고한 후보로 지지를 받으면서 대통령 선거전을 진두 지휘했다. 민주당은 전임 부통령이자 가장 유력한 후보인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을 지명했는데,
- 뉴욕 주의 여성 하원 의원인 제럴딘 페라로(Geraldine Ferraro)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여 민주당 선거 유세에 잠시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녀는 전국적 규모의 선거에 출마한 최초의 여성 후보였다.
- 1984년 선거는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라기보다는 구시대의 마지막 선거였다. 즉, 냉전기의 마지막 선거전이었다.
- 소련 제국이 붕괴하는 데는 많은 요인이 영향을 끼쳤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장기간에 걸쳐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전쟁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겪은 바와 마찬가지로 소련에도 손실을 끼쳤다. 모스크바 정부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경찰국가의 고압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이 소련 제국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눈에 띄는 일은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소련 지도자의 직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 자신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매우 빠르게, 최소한 40년 내에서는 세계 정치에서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 되었다.
- 번째는 개방, 즉 ‘글라스노스트(Glasnost)’로, 반세기가 넘게 소련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자리 잡은 억압적인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개혁, 즉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로, 개인 재산의 소유와 이윤 동기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직되고 비생산적인 소련 경제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심각한 경제문제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더 이상 외부 세계를 향한 팽창적인 역할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87년에 이미 그는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불과 몇 달 사이에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동독,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 유럽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권이 전복되거나 본질적으로 비공산주의 (그리고 일부는 적극적인 반공) 정권이 들어섰다.
- 1989년 5월, 중국의 대학생은 더욱 강도 높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월, 강경파 지도자가 중국 정부의 통제권을 쥐고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 결과 1989년 6월 3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피로 얼룩진 학살극이 벌어졌다.
- 1990년 초,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백인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체제)’라는 인종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오랫동안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이 그 인습에서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십 년 동안 억압했던 주요 흑인 정당인 아프리카 민족 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를 합법화했다. 또한 ANC의 지도자로서 27년 동안 감옥에 있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석방했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인종 격리법(apartheid laws)을 폐지했다. 그리고 1994년, 모든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에게 참여를 보장한 전국 선거가 있었으며, 그 결과 넬슨 만델라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 1991년 공산주의는 소련에서부터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해 8월 19일, 강경파 소련 지도자가 일으킨 쿠데타가 불발로 끝나면서 공산주의 세력은 극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단 며칠 만에 대중과 군부 내 핵심적 요원의 저항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권좌에 되돌아왔으나, 공산당과 중앙정부의 권위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8월 말, 소비에트연방의 많은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정부는 그러한 분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고르바초프 자신도 무력한 공산당과 소련 정부의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렇게 해서 소비에트연방 공화국은 사라져갔다.
- 1986년, 아이슬랜드의 레이캬비크(Reykjavik)에서 레이건과 마주한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쌍방의 핵무기 보유를 50퍼센트 이상 축소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미국의 전략적 방위 구상(SDI) 프로그램을 확실히 밀고 나가려는 레이건의 태도 때문에 논쟁이 계속되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8년, 세계 최강의 이 두 나라는 핵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전략무기제한협정, 즉 유럽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 핵무기(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INF)를 제거하자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와 함께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랫동안 끌었고 결국 실패한 군사 개입을 철회했다.
- 레이건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준 스캔들은 정부가 이란의 혁명정부에 무기를 판매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일은 1986년 11월에 백악관이 사실을 시인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 무기 판매는, 중동의 급진적 이슬람 단체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미국인을 석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더 부담스러운 점은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받은 돈의 일부가 비밀리에 그리고 불법적으로 니카라과 반군의 지원금으로 흘러들어갔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공격적인 보도와 연이은 의회 청문회에서는 백악관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비밀스럽고 때로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부의 외교정책 목표를 추진했던 갖가지 형태의 은밀한 활동이 폭로되었다.
- 비록 이 조사에서 대통령이 심각한 범법 행위를 했다고 밝히지는 못했지만,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은 레이건의 대통령직에 중차대한 위해를 끼쳤다.
- 부시는 듀카키스를 당시 미국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자유주의자(liberals)’로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공격했다. 부시는 11월 선거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반투표에서 듀카키스가 46퍼센트를 얻은 반면, 부시는 54퍼센트를 획득했으며, 선거인단 투표에서 듀카키스가 112표를 얻은 반면, 부시는 426표를 획득했다. 그러나 부시가 대통령직에 취임할 때는 공화당 의원이 소수에 불과했으며, 민주당은 상하 양원에서 안정적인 다수를 유지했다.
-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한 1989년, 소련과의 냉전은 비록 몇 년 전보다 긴장이 많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1993년, 그가 퇴임하면서 냉전도 끝났다. 한때 ‘구속’을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며, 소련 자체도 흐트러져 해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야기한 큰 동력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 노력은 소련 내 여러 세력에 대한 구속력을 풀어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결국에는 그 자신도 여러 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에 그는 미국과 여러 가지 역사적 합의를 이루었는데, 그와 같은 합의 가운데 일부는 정상 회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 부시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국내문제는 1990년 말에 시작되어 1991년과 1992년에는 더욱 어려워진 경기 침체에 대해 대통령이나 의회가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업과 국민이 1980년대에 누적해놓은 엄청난 수준의 부채 때문에 경기 침체는 파산을 부지기수로 야기했다. 이는 또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미국인에게 공포와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무시무시한 정치적·군사적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따져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러한 힘을 정당화시켜주었던 소련의 위협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1989∼1991년의 사건은 두 가지의 대처 방안을 생각하게 했는데, 양자 모두 정책에 어느 정도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이 군사력을 크게 줄이고 그 힘과 자원을 국내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의회와 행정부 내에서도 그 방향으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다른 방안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1989년, 부시 행정부는 파나마 침공을 명령하여, 지지를 받지 못하던 군사 지도자 노리에가(미국에서 마약 거래 혐의로 기소됨)를 축출하고 선거를 통해 친미 정권으로 대체했다. 1990년에도 그러한 욕구 때문에 미국은 중동의 위험한 정세 속으로 빠져들었다.
- 1990년 8월 2일, 이라크 군대는 작고 석유가 풍부한 이웃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재빨리 제압했다. 이라크의 호전적인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곧바로 쿠웨이트를 병합했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는 듯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다른 국가와 연합하여, 가능한 한 경제적 제재를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내기로 합의했다. 몇 주 동안, 부시는 소련과 대부분의 아랍 및 이슬람 국가를 포함하여 전 세계 거의 모든 중요 국가에게 유엔의 대이라크 무역 금지 조치에 가담하라고 설득했다. 그와 함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우방과 함께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선을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동원된 병력은 69만 명에 이르렀다(그 가운데 42만 5,000명이 미군이었다). 1월 16일, 미국과 연합국 공군은 쿠웨이트에 있던 이라크군과 이라크 내 군사 및 산업 시설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폭격은 6주 동안 계속되었다. 2월 23일, 노먼 슈바르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의 지휘로 연합군(주로 미군이었음)이 대규모 지상 공격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연합군은 쿠웨이트 국경을 따라 중무장한 채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이라크군이 아니라 그 북쪽의 이라크를 공격했다. 저항은 거의 없었으며 단지 경미한 사상자(141명 사망)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라크 군의 사상자 추산은 10만 명 이상이었다. 2월 28일, 이라크는 연합국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고, 그렇게 해서 페르시아 만의 짧은 전쟁도 끝이 났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라크에 대한 신속하고도 비교적 작은 손실로 이루어낸 승리라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후세인 독재 정권은 살아남았으며, 약화되기는 했지만 호전적 야심을 철회한 징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 부시 대통령의 인기는 걸프 전쟁 직후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1991년 말, 경기 침체가 악화되고 정부가 그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자 휘황한 승리의 광채 역시 곧 퇴색해버렸다.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다가올 1992년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여 일찍부터 정략적인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에 민주당의 많은 지도자급 인사는 선거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아칸소 주지사이며 5선의 젊은 정치인인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다른 후보를 제치고 일찌감치 선두 주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과거 민주당원들 사이에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인종 및 문화적 이슈 대신, 경제 전반에 걸친 문제를 강조한 세련된 선거운동으로 기회를 얻었다. 클린턴은 치열한 예비 선거와, 그리고 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이전투구도 불사해야만 하는 몇 차례의 개별 논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예비 선거에서 보수주의 언론인 팻 뷰캐넌(Pat Buchanan)의 도전을 이겨내고 다시 한 번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 1976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당은 1992년의 선거에서 백악관에 입성했다. 제3당 후보였던 로스 페로가 등장하여 빌 클린턴의 압도적 다수 표 획득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클린턴은 일반투표 및 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큰 차이로 부시를 눌렀다.
- 선거전을 복잡하게 한 것은 무뚝뚝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을 가진 텍사스의 억만장자 로스 페로(Ross Perot)의 출현이었다. 그는 연방 관료제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호소하는 한편, 재정 위기와 정부의 다른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강하고도 원칙에 충실한 리더십을 약속하면서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해 봄, 여론조사에서 페로는 클린턴과 부시를 여러 번이나 앞섰다. 7월, 언론의 적대적인 정밀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돌연 대통령 선거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월 초 그는 다시 선거전에 돌입했으며 초기에 얻었던 많은 지지를 (전부는 아닐지라도) 다시 얻었다.
- 클린턴은 3자간의 경쟁에서 일반투표로는 43퍼센트를 얻었고, 대통령은 38퍼센트, 페로는 19퍼센트(1912년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제3당 또는 독자적인 후보로는 최고의 지지율)를 차지했다. 클린턴은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370표, 부시는 168표를 얻었으며, 페로는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민주당은 상하 양원에서 확고한 우세를 지켰다.
- 2001년 9월 11일 태양이 밝게 비치는 아침 8시 45분에 민간 항공기가 뉴욕에서 가장 높은 세계무역센터의 한 빌딩의 측면을 들이받고 폭발하여 빌딩이 화염에 휩싸였다. 30분이 채 되지 않아 또 다른 항공기가 다른 빌딩을 들이받고 두 번째 화염이 치솟았다. 그 후 1시간쯤 후에 엄청난 열기에 강철 구조물이 녹아내리면서 두 빌딩은 붕괴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워싱턴에서는 민간 항공기 한 대가 미국의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을 들이받았다. 그리고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항공기가 피츠버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추락했는데, 이는 승객들이 조종실을 장악하여 비행기 납치범들이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비행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 같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네 가지 재앙은 3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클린턴은 중대한 정치적 약점이 있었다. 유권자의 지지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민주당은 의회에서 다수당이긴 하지만 힘이 약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매우 적대적이어서 여러 문제에서 비정상적인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반대했다.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무모한 일을 벌여서 많은 적이 여러 차례 그를 불신임했다. 그래서 클린턴 시기는 어느 때보다도 당파적 갈등이 심했다.
- 동성애자의 군입대를 금지하여온 오랫동안의 관행을 종식시키려고 대통령이 나서자 엄청난 반대가 일었다. 클린턴은 내키지 않는 타협을 하도록 종용받았다.
- 그의 오랜 친구이자 백악관 고문으로 일했던 빈스 포스터(Vince Foster)가 1993년 여름에 자살했다. 빈스 포스터의 죽음으로 클린턴과 그의 부인 힐러리는 1980년대의 화이트워터(White water) 사건으로 알려진 은행과 부동산 투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문이 더욱 고조되었다. 1993년에 특별 검사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2000년에 클린턴 부부가 화이트워터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모두 밝혀졌다).
- 비록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대통령은 레이건-부시 행정부 때 실행된 정책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았다. 그중 부자로부터 걷는 세금을 대폭 올리고, 정부 지출을 상당히 삭감하며, 저임금 노동자에게 세액공제를 늘려주기 위한 예산이 포함되었다.
- 그는 누구보다도 로스 페로, AFL-CIO, 그리고 의회의 여러 민주당원을 상대로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벌인 끝에 미국, 캐나다, 멕시코 사이의 무역 장벽을 대부분 없애는 북미 자유무역 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을 승인받았다. 그 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eneral Agreement on Trade and Tariffs, GATT)에서 협의된 또 다른 중대한 무역 협정을 승인받는 데도 성공했다.
- 1993년 초에 그는 아내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을 의장으로 하는 특별 전문 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특별 전문 위원회는 모든 미국인에게 의료 혜택을 보장하고, 의료보험비를 낮추는 획기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개혁이 정부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안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 유고슬라비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칸 반도 주변의 자그마한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 독립한 국가였는데 1989년에 사회주의 정부가 와해된 후 다시 몇 개의 나라로 분열됐다. 그중 보스니아는 곧 주요 두 인종 간 피비린내 나는 내란에 휩싸였다. 즉 이슬람교도와 이웃한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도 세르비아인 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이 이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추진한 협상은 1995년까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1995년에 미국의 협상가 리처드 홀부룩(Richard Holbrooke)이 분쟁 당사자를 한자리에 불러 보스니아를 분할하는 데 합의를 얻어냈다.
- 의료보험 제도 개혁의 실패는 1994년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공화당이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상하 양원을 석권했다.
- 1995년 내내 공화당은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 하원 의장의 공격적 지도력으로 소위 ‘미국과의 협약(contract with America)’이라 불린 야심차고 과격한 입법 계획을 고안하려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공화당 의원은 연방정부의 중요한 권력을 주 정부에 양도하는 일련의 법안을 제안했다. 그들은 경비를 절감하려고 한때 신성불가침이던 노인 의료보험 제도의 개편을 포함한 연방정부 지출의 과감한 삭감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들은 연방정부의 규제 기능을 축소시키려고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중간 선거 결과에 대응해 세금 삭감과 균형예산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책을 확실하게 중심 의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1995년의 의회 정책이 1996년 대통령 정책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의회는 타협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1995년 11월, 그리고 다시 1996년 1월에 대통령과 의회가 예산에 합의하지 못하여 연방정부는 문자 그대로 며칠 동안 문을 닫았다. 공화당 지도자들은 (협상 중에 정부가 계속 업무 처리하는 것을 허가하는) ‘업무 처리 속개(續開) 결의’를 통과시키기를 거부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요구에 대통령이 동의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는 정치적으로 큰 실수였다. 여론의 방향은 공화당 지도자와 그들이 내건 의제에 급속하고도 강력하게 반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뉴트 깅리치는 가장 인기 없는 정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전락했고, 반면에 여론조사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율은 조금씩 올라갔다.
- 클린턴이 마지못해 서명한 사회복지 개혁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지난 50년 동안 부양할 아이가 있는 가장에게 연방정부가 보조해오던 정책을 없애고, 연방 복지 기금을 배분하는 책임의 대부분을 주 정부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는 누구보다 실직자가 복지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왔는데, 이 사회복지 개혁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이제는 저임금 근로자가 혜택을 가장 많이 받게 되었다.
- 대통령은 일반투표에서 49퍼센트를 넘는 지지율을 확보했다. 반면 돌 후보는 41퍼센트를, 개혁당(Reform Party) 후보로 출마한 로스 페로가 8퍼센트 넘는 지지율을 확보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돌이 159표를 얻고 페로는 한 표도 얻지 못한 반면, 클린턴은 379표를 얻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을 다시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 빌 클린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재선된 민주당 대통령
- 1998년 말에 이르러 연방정부 예산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 클린턴은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후부터 부패했다는 비난의 화살과 스캔들의 목표가 되었다. 화이트워터 사건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고, 각료와 내각이 부패했으며, 1996년 선거전에서 불법 선거 자금을 모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전 아칸소 주 정부 직원이었던 폴라 존스(Paula Jones)가 첫 번째 임기에 제기한 성 희롱 관련 민사소송이 진행됐다.
- 1998년 초에 폴라 존스와 관련된 조사는 대통령이 젊은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고소로 이어졌고, 그는 존스의 변호사 앞에서 한 진술 조사에서 거짓말을 했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사법부 판사이자 관리였으며 화이트워터 사건을 맡았던 특별 검사 케네스 스타(Kenneth Starr)가 이 사건을 새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 연방 대법원 판사는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폴라 존스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이 추문은 1998년 8월 르윈스키가 특별 검사와의 거래에 끌려 클린턴과의 관계를 증언하자 다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스타 검사는 클린턴을 소환했고, 대배심에 소환될 상황에 처한 클린턴은 결국 르윈스키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인정했다.
- 1998년 12월 19일, 하원은 대배심에 대한 거짓 증언과 사법 정의 방해라는 두 가지의 탄핵 사유에 대해 투표했다. 하원이 거의 모두 당의 성향에 따라 투표해, 가까스로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이 문제는 상원으로 옮겨갔고, 1868년 앤드류 존슨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탄핵 재판이 이듬해 1월 초에 열렸다. 그리고 대통령의 무죄판결로 마감되었다. 두 가지 탄핵 혐의 중 어떤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판결에 필요한 3분의 2는 고사하고 반수도 찬성하지 않았다.
- 1999년 클린턴은 발칸 반도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인이 우세한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코소보 주민은 대부분 알바니아 이슬람교도였다. 1998년에 이곳에서 코소보 민족주의자와 세르비아인 사이에 잔악한 내전이 일어났다. 1999년 5월에 미국이 이끈 나토군은 세르비아인에게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고,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인 슬로보단 밀로세비치(Slobodan Milosevic)로부터 공격을 중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세르비아 군대는 코소보에서 모두 철수했고, 대신 나토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감으로써 이 지역에 불안정한 평화의 시간이 되돌아왔다.
- 클린턴은 전후 대통령 중에서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이었다. 그의 임기는 끊임없는 스캔들로 얼룩졌지만, 재임 기간 동안 국내 경제는 놀랍게 번영했고 세계는 전반적으로 안정을 이룬 시기였다.
- 플로리다 주의 투표 집계가 계속해서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주가 지난 뒤, 그러한 논란을 대법원이 중재함으로써 마침내 부시가 승리자로 결정되었다.
-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이며 텍사스 주지사를 두 번 지낸 조지 W. 부시(Geroge W. Bush)가 공화당 후보로, 테네시 주 상원 의원과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앨 고어(Al Gore)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은 5석 차이로 간신히 하원을 장악했지만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양분되었다(상원 의원 중에는 뉴욕 주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전 영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고어는 약 1억 표 중에서 54만 표(0.5퍼센트)를 더 획득하여 일반투표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선거일 저녁, 플로리다 주에서 실제로 당선자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후보 모두 당선에 필요한 270석을 넘는 선거인단 표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다음 이틀 동안 강제로 검표가 이루어진 후에 조지 W. 부시는 플로리다 주에서 300표를 조금 더 얻어서 고어보다 앞섰다. 고어의 선거 본부는 중요한 카운티 3곳에서 천공기 투표용지를 수작업으로 검표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플로리다 주 대법원에 이를 청원했다. 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수작업 재검토와 최종 마감일 이후의 결과를 수용할 것을 받아들였다. 이 같은 재검토는 3개 카운티 중 2곳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마지막 카운티인 마이애미가 포함되어 있는 데이드 카운티(Dade County)에서 지역 선거 관리 본부가 주어진 시간 안에 재검표 작업을 끝마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재검표를 갑자기 중단했다. 법원이 정한 새로운 마감일이 되자 공화당의 주무 장관인 캐서린 해리스(Katherine Harris)는 조지 W. 부시가 플로리다에서 500표 이상의 표차로 승리했음을 신속하게 인증했다. 고어의 선거 본부는 즉각 선거 결과에 대해 플로리다 주 법원에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법원은 아직 검표되지 않은 플로리다 카운티 전체에 이전에 검표되지 않은 모든 투표용지를 수작업으로 재검표할 것을 명령했다.
- 12월 9일 토요일, 연방 대법원은 5 대 4로 검표 중지를 명령했다. 재검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리고 화요일 늦게 연방 대법원은 미국 역사상 가장 특이하고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또다시 정파와 이데올로기 노선에 따라 첨예하게 갈린 5 대 4 결정에서 연방 대법원의 다수를 차지한 보수주의자는 플로리다 주 대법원의 재검표 명령을 번복하고 어떤 재검표도 12월 12일까지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분명히 불가능한 요구였는데 왜냐하면 연방 대법원은 12일 저녁 늦게 이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방 대법원은 천공 투표용지에 대한 평가 기준은 헌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재검표 없이 플로리다에서 조지 W. 부시의 승리가 인정되었고, 전국적으로 조지 W. 부시가 승리했다.
- 조지 W. 부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인 1조 3,500억 달러라는 세금을 절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공화당이 간신히 과반수인 의회에 기대었다.
- 그는 전혀 통과될 가능성이 없는 동성 결혼 금지라는 헌법 수정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란을 공공 담론의 중심에 밀어넣으려는 방안이었다. 그는 도덕적·종교적 근거를 들어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했고 낙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계속했다. 부시 행정부 전략의 큰 부분은 바로 거대한 보수 집단과 복음주의 기독교인에게 호소하고 그들을 공화당 단결의 적극적인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2004년 선거는 이 전략의 혜택과 비용을 모두 보여주었다. 조지 W. 부시와 그의 상대였던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존 케리(John Kerry) 모두 열렬하게 캠페인을 벌였다. 유권자는 캠페인 내내 거의 비슷하게 양분되었고, 결국 투표수가 결정을 냈다. 민주당은 2000년에 그들이 얻었던 표보다 훨씬 많은 표를 얻었지만, 공화당 투표수 증가가 더 컸다. 조지 W. 부시는 유권자 투표의 51퍼센트, 그리고 선거인단 수는 35명을 앞서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조지 W. 부시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국민의 통치 위임을 주장했고 사회보장(Social Security)의 재구축 및 세금을 더 낮추는 야심찬 계획을 선언했다. 그러나 여러 상황이 행정부를 수세에 몰아서 논란이 되는 조치에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능력도 줄어들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2003년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국내 정책의 실패 역시 그의 인기 하락에 크게 공헌했다. 2006년 중반 무렵에는 주요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3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 2005년 8월 말에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의 걸프 만을 강타한 엄청난 위력의 허리케인은 해안을 따라 수많은 지역에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뉴올리언스였다. 허리케인은 도시를 보호하는 제방 일부를 붕괴시켰고, 거대한 홍수는 뉴올리언스의 상당 지역을 파괴했다. 1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났으며 도시는 마비되었다. 그 이후 수 주 동안 사실상 도시의 전체 인구가 대피했고, 느린 재건 과정이 시작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느리고 불완전하게 대처해 큰 비난을 받았다. 많은 사람에게 대통령은 비극에 무관심한 것으로 보였다. 광범위한 비난을 받은 후에야 대통령은 불행에 휩쓸린 도시를 방문했다. 부시 행정부는 연방 재난관리국(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FEMA)에 미숙한 정치적 협력자를 스태프로 기용함으로써 카트리나 재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수천 명의 뉴올리언스인을 여러 날 동안 적절한 음식과 물과 위생시설 없이 도시의 풋볼 경기장인 슈퍼돔(Superdome)에 묶어두었다. 많은 미국인은 카트리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부시 행정부의 능력과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 공화당의 로비스트 잭 에브라모프(Jack Abramoff)를 포함한 일련의 스캔들은 대통령의 측근 의원 다수와 그의 행정부 구성원 일부의 명성을 손상시켰다. 비밀 CIA 요원(이라크에 대한 조지 W. 부시 정책 비판자와 결혼한)의 불법적인 정보 누설에 대한 조사를 통해 부통령의 수석 보좌관인 로렌스 리비(Lawrence Libby)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밀 누설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은, 부시 행정부가 국가 안보국(National Security Admini-stration)을 이용하여 테러리스트와 연관되었다고 의심되는 미국 시민을 도청한 사건이었다. 도청 등 내국인을 감시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 미국에서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의 총액인 GNP(Gross National Product)는 1980년에 2조 7,000억 달러에서 2000년에 9조 8,000억 달러로, 20년 만에 거의 4배로 증가했다. 이 시기 동안 인플레이션은 낮았는데 어떤 해에도 3퍼센트를 넘지 않았으며, 1990년대 말에는 한동안 2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주식 가격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거의 막힘없이 사상 최대 수준으로 치솟았다. 주식 시황의 가장 일반적인 지표인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Dow-Jones Industrial Average)는 1980년대 말에 1,000이었다. 그러나 1999년 말에, 그리고 다시 2007년에 다우지수는 14,000을 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붐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의 회장인 알란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1999년에 미국인이 주식시장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비이성적 과도함’을 경고했다. 몇 달 후에 주식시장은 그의 경고가 타당함을 입증했다. 2001년 4월, 부흥하던 새 경제 영역인 ‘닷컴(.com)’ 기업이 갑작스럽고 비참하게 붕괴했다. 이 회사는 인터넷과 관련해서 이윤을 창출하던 새로운 사업체와 신생 회사로 구성된 기업군이었다. 처음에 ‘기술 거품(tech bubble)’의 붕괴는 경제 전반에 별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1년 초에, 지난 몇 십 년간 중요한 성장 엔진이었던 주식시장이 상당히 하락하기 시작해서 거의 1년간 지속되었다. 2001년 가을에 경제 전반이 침체기로 흘러들어갔다. 경제는 2002년에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1990년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2008년에 주택 담보대출 시장의 엄청난 몰락은 주식시장과 국가 경제를 모두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 1980년과 2000년 사이에,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부유한 20퍼센트의 평균 가계 수입은(1년에 10만 달러가 넘어설 정도로) 거의 20퍼센트 성장했다. 차상위 계층 20퍼센트의 평균 가계 수입은 8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나머지 60퍼센트 대부분의 수입은 늘어나지 않았고, 최하위 계층 20퍼센트의 수입은 사실상 감소했다.
- 미국의 빈곤은 서서히 감소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극적으로 줄어들어서, 1970년대 말에 빈곤 인구는 12퍼센트로 떨어졌다(1960년대에는 약 20퍼센트였다).
- 1980년대에 빈곤율은 다시 증가해 15퍼센트까지 오르기도 했다. 2008년에는 다시 13퍼센트로 떨어졌지만, 그것은 20년 전과 거의 같은 수치였다.
- 1971년에 처음 소개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통합 회로 기술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여주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를 소형화함으로써, 과거에는 매우 큰 기계가 수행하던 계산을 작은 기계가 할 수 있게 했다.
- 1977년에 애플(Apple)사가 신상품으로 내놓은 애플 II 개인 컴퓨터는 대중이 널리 사용한 최초의 컴퓨터였다. 몇 년 후 아이비엠(IBM)이 최초의 ‘PC(Personal Computer)’를 만들어 개인 컴퓨터 시장에 진입했다. 아이비엠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작은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로 하여금 아이비엠의 새 컴퓨터를 위한 작동 체계를 설계하게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S-DOS(DOS는 ‘디스크 운영 체계’를 말함)로 알려진 프로그램을 생산했다. 어떤 개인 컴퓨터도 도스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다. PC와 MS-DOS는 1981년 8월에 등장하여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3년 후에 애플사가 만든 매킨토시 컴퓨터는 컴퓨터 기술에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DOS와는 다른 매킨토시의 운영 체계는 PC보다 사용하기 더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플은 아이비엠의 판매력을 따라갈 수 없었고, 1980년대 중반에 PC는 번성하던 개인 컴퓨터 시장에서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비엠의 우위는 1985년에 DOS를 대신하여 나온 새로운 소프트웨어 패키지의 도입으로 더 가속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윈도(Windows)는 많은 개념(특히 그래픽 사용자 장치인 GUI, Graphic User Interface)을 애플의 운영 체계에서 빌려왔다. 컴퓨터 혁명은 컴퓨터 제조업, 컴퓨터 작동에 필요한 작은 실리콘 칩 제조업, 그리고 소프트웨어 제조업 등 수익성이 높은 수많은 새 사업을 창출했다.
- 인터넷은 과학 연구 프로젝트에 연방 자금을 투입하게 한 미국 정부의 고등 연구 프로젝트 기관(ARPA)에 의해 1963년에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에 ARPA의 정보처리 기술국의 수장인 리클리더(J. C. R. Licklider)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컴퓨터를 연결하는, 알파넷(ARPANET)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여러 해 동안 알파넷은 몇 개의 컴퓨터 네트워크 설비를 원격 사용하여 여러 집단의 사람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점차 네트워크의 규모와 이용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팽창은 두 개의 중요한 신기술 때문에 일정 정도 가능했다. 하나는 1960년대 초에 미국의 RAND 주식회사와 영국의 국립 물리 실험실(National Physical Laboratory)에서 개발한 시스템이었다. “저장 및 전송 다발 전환(store-and-forward packet switching)”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시스템은 여러 컴퓨터를 전선으로 직접 연결하지 않고도 컴퓨터 간에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게 했다. 이 시스템에 있는 중앙 통신 중추를 통해 메시지와 정보가 개별 컴퓨터로 전달된다. 그것은 마치 전보와 전화 시스템이 각 지역 회로로 갈라져 나가는 중앙 설비를 사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또 다른 혁신은 개별 컴퓨터가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발전이었다. 그것은 인터페이스 메시지 처리기(IMP, Interface Message Processor)를 말한다. 1971년에 23대의 컴퓨터가 알파넷에서 서로 연결되었는데 주로 연구 실험실과 대학을 위한 것이었다. 점차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시스템에 연결된 컴퓨터의 수도 늘어났다. 2009년에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컴퓨터는 10억 대가 넘었다(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더 많은 컴퓨터도 있다).
- 1980년대 초에 알파넷 개발의 초기 파트너였던 국방부는 보안상의 이유로 프로젝트에서 물러났다. 곧 인터넷(Internet)이라고 다시 이름 붙여진 네트워크는 이제 자유롭게 개발될 수 있었다. 특히 전자우편(혹은 이메일)을 가능하게 한 기술이 발명되고, 개인 컴퓨터가 등장한 후에 인터넷이 급속히 발전해 잠재적 사용자 수를 크게 증대시켰다.
- 1989년에 제네바의 실험실에서 일하던 영국 과학자인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전 세계 정보망(World Wide Web)을 개발했고, 그로 인해 전자정보의 유통과 회수를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이 가능해졌다.
- 1944년에 영국의 과학자, 오스월드 에이브리(Oswald Avery), 콜린 맥리어드(Colin MacLeod), 맥린 맥카티(Maclyn McCarty) 등이 DNA를 발견했고, 1953년에 미국의 생화학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영국의 생물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DNA의 이중 나선형 구조를 극적으로 발견함으로써 유전암호 해독 열쇠를 발견할 토대를 놓았다.
- 1989년에 연방정부는 인간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을 가속하기 위해 미국 인간 게놈 센터(National Center for the Human Genome)에 30억 달러의 기금 지출을 승인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2005년경에 모두 10만 개 이상의 유전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위한 신기술과 그밖에 사적으로 자금을 지원받는 프로젝트와 경쟁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빠르게 진척되어 2003년에 이와 같은 성과를 냈다.
-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논쟁은 2000년 선거전에서 이슈가 되었다. 조지 W. 부시는 일단 취임하자 낙태를 반대하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데, 2001년 여름에 자신이 결정을 내릴 당시 과학자가 이미 남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를 지원하는 데 연방정부의 기금을 쓰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2009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금지를 부분적으로 철회했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동안에 출생한 사람을 지칭하는 엄청난 ‘베이비붐’ 세대는 중간 연령층을 꾸준히 두껍게 만들었다(1996년에 34세에서 2009년에는 36세로 그리고 2035년경에는 39세로 추정됨).
-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에 25~54세(통계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노동인구로 알려진)의 인구수는 2,6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이 연령집단에 속하는 미국 태생의 노동자 수는 전혀 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태생 인구의 완만한 증가와 이 때문에 나타난 노동인구의 부족은 이민이 급성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2009년에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 태생의 수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3,900만 명 이상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퍼센트가 넘는 수치였다. 이들 이민자는, 입국 허가의 기준에서 출신 국적 조항을 제거한 1965년의 이민 개혁법(Immigration Reform Act) 제정의 결과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곳으로부터 왔다. 외국 태생 인구의 증가 추세는 미국에서 백인 주민의 비율을 1965년 90퍼센트에서 2008년에는 80퍼센트로 상당히 줄이는 데 기여했다(히스패닉을 뺀 백인 인구는 단지 65퍼센트를 상회했다).
- 대학에 들어가는 흑인 고등학교 졸업생의 비율은 21세기 초에 사실상 백인 고등학교 졸업생의 비율과 같았다(비록 백인보다 더 낮은 비율의 흑인이 고등학교를 마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24세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17퍼센트 이상이 2005년에 학사 학위나 그 이상의 학위를 보유했는데, 이는 백인의 비율이 29퍼센트에 달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20년 전에 비해 상당한 진전이었다.
- 2005년 미국에서 고용된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숙련된 화이트컬러 일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인의 삶에서 더 이상 흑인이 완전히 배제된 분야는 거의 없었다.
- ‘최하층(underclass)’으로 묘사되는 이들 빈곤 상태에 빠진 사람은 미국 흑인 인구의 3분의 1을 상회했다.
- 2006년에 도심 저소득층 밀집 지역의 젊은 흑인 중 절반이 채 안 되는 흑인만이 고등학교를 마쳤고, 60퍼센트 이상은 취업을 못했다. 흑인의 가족 구조는 마찬가지로 도시 빈곤의 혼란을 겪었다. 홀어미 즉, 여성이 가장인 흑인 가구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1970년에는 18세 미만의 전체 흑인 어린이의 59퍼센트가 양친 부모와 함께 살았다(이는 10년 전의 70퍼센트에 비해 한참 내려간 수치였다). 2009년에는 비(非)히스패닉 백인 어린이의 77퍼센트가 양친 부모와 함께 사는 데 비해 흑인 어린이의 35퍼센트만이 양친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살았다.
- 이 유행병은 곧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라고 이름 붙인 새롭고 치명적인 질병으로, 1981년에 최초로 보고되었다. 에이즈는 인체 분비액(혈액이나 정액)으로 전염되는 인류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의 산물이다. 이 바이러스는 인체의 면역 체계를 점차 파괴해, 감염자는 자연적인 저항력이 없어져 몇 가지 질병(특히 다양한 형태의 암과 폐렴)에 쉽게 걸리게 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즉, HIV 양성)은 에이즈로 발전되지 않고 오랫동안 살 수도 있지만, 여러 해 동안 앓게 된 사람은 반드시 사망했다. 최초의 미국인 에이즈 희생자는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이 질병에 걸린 가장 많은 수의 사람이 속해 있던 집단은) 남성 동성애자였다. 하지만 1980년대 말경 게이(gay) 공동체가 예방책을 쓰기 시작하자, 이 질병은 이성 간에서 가장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감염자 중 많은 수는 정맥주사로 마약을 투여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감염된 주삿바늘을 함께 사용해 이 바이러스를 확산시켰다. 2008년 약 100만 명의 미국인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감염자 수는 2007년 3,3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 세계 HIV 감염자 중에서 매우 낮은 비율이었다. 감염자의 3분의 2 이상은 아프리카에 집중되었다.
- 미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새로운 감염자가 1995년의 7만 명에서 2005년에는 대략 4만 4,000명으로 줄었다. 1990년대 중반 에이즈 퇴치 연구자는 수년간 실패를 겪은 후에 이 질병의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에이즈가 비교적 꽤 진행된 환자에게 단백질 분해 효소 억제제를 포함한 강력한 약품 혼합물을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증세를 상당히 완화시켰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감염자의 혈류에 남아 있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신약(新藥)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생명을 처음으로 거의 정상적인 수명까지 극적으로 연장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약은 에이즈 치료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약의 복용을 중단한 대부분의 사람에게서는 에이즈가 다시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약의 효능은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더욱이 이 약은 매우 비싸고 관리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가난한 에이즈 환자는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하는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빈곤 지역에서는 이 약이 매우 부족했다.
-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중절할 수 있는 선택을 허용하자고 했던 사람들은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1973) 판결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겼다. 1980년대 무렵에 낙태는 미국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외과적 처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낙태에 대한 반대는 강력한 민초(grassroots)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말뜻 그대로 ‘임신 중절 반대(right-to-life)’ 운동은 가톨릭교도가 가장 열렬하게 지지했고,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합법화된 낙태에 반대하는 투쟁에 제도적 권위를 더해주었다.
-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사법부의 분위기가 바뀌자 낙태 옹호자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정도로 결집했다. 그들은 ‘낙태 합법화(pro-choice)’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낙태 자체를 옹호한다기보다는 모든 여성이 아기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제 낳을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를 보호하는 운동이었다.
- ‘낙태 합법화’의 지지자인 클린턴 대통령이 1992년에 당선되면서 ‘로 대 웨이드’ 판례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은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1996년 클린턴의 재선은 여러 가지 중에서도 낙태 합법화 운동이 상당한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 클린턴의 후임자인 조지 W. 부시는 낙태를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버락 오바마는 낙태 합법화 지지의 편에 섰다.
- 여러 해에 걸쳐 지구온난화의 속도와 심지어 실재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 이 문제를 둘러싼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갔다. 합의의 일부는 이 문제에 대한 주의를 이끌어낸 노력으로 말미암아 2007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전직 부통령 앨 고어와 같은 주요 인물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1997년에 주요 산업국가의 대표가 일본 교토에서 만나 탄소 배출을 감축하고 지구온난화를 늦추거나 역전시키기 위한 조치를 확정하는 광범위한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연방의회 공화당 의원들이 이 조약에 반대함으로써 클린턴 대통령은 조약 비준에 실패했다. 2001년 3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 조약이 미국에 너무도 커다란 부담을 준다고 비난하고 이에 대한 비준을 거부했다.
- 1984년의 보팔(Bhopal) 참사로, 인도의 보팔에 위치한 유니온 카바이드(Union Carbide) 살충제 공장에서 가스가 새어 나와 3,000명에서 1만 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 2년 후, 핵원자로 사건이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체르노빌(Chernobyl)에서 발생하여 56명이 사망했고, 방사선 등의 노출로 인해 수천 명이 더 사망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체르노빌 주변 지역은 부분적으로 플루토늄-239의 핵반응 평균수명의 절반 정도인 2만 4,000년간 핵에 오염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에서 발생한 핵관련 사고는 대재앙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미국 내 반핵 정서를 증대시켰다.
- 유조선 엑슨 발데즈 호(Exxon Valdez)가 알래스카의 프린스 윌리엄 해협(Prince William Sound)에 있는 블라이트 리프(Blight Reef)라는 암초에 좌초되어 원유 약 1,090만 갤런을 유출했을 때 재확인되었다. 결국에는 기름이 수천 평방 마일의 바닷물(그리고 알래스카 해안선 1,300마일)을 뒤덮어버려 수십만 마리의 동물을 즉사시켜 해협의 허약한 생태계를 유린했다.
- 1977년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에 의해 시작된 케냐의 그린벨트 운동(Green Belt Movement)은 삼림훼손과 황폐화, 토양 침식, 그리고 물 부족이라는 도전에 대응하여 전국에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도록 장려한 여성운동이었다.
- 1997년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도록 요구하여 지구온난화를 억누르려는 국제적 노력이 2009년 6월에 185개국이 비준을 마친 교토 의정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미국은 분명한 예외로 하고).
- 미국 부통령 앨 고어였으며 2006년에 그의 저서와 동명의, 그가 출연한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라는 영화―미국과 많은 다른 국가에서도―는 근래의 다른 어떤 사건보다 지구온난화 위기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런 노력으로 고어는 2007년 노벨 평화상―그가 주창한 운동의 전 지구적 성격을 고려해보면 적절하게 다른 이들과 수상의 영예를 함께하며―을 수상했다. 공동 수상자는 1988년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국제연합과 제휴한 기후변동에 관한 정부 간 패널(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이었다.
- 1990년대 GATT 조약의 적용을 감시해왔던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국제 간 채무와 외환 비율을 조정했던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많은 국가의 개발 프로젝트에 자본을 제공하는 세계은행(World Bank)이 있었다. 1999년 11월 7개 산업국가(G7)의 지도자(러시아의 지도자를 포함함)가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연례 회담을 갖기 위해 모였을 때, 수만 명의 시위대(그들 중 대부분은 평화 시위를 하였으나, 일부는 폭력적이었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상점 창문을 깨뜨렸으며 도시를 거의 마비시켰다. 몇 달 후, 앞선 경우보다는 소규모이나 여전히 상당 규모의 시위가 발발하여, 워싱턴에서 열린 IMF와 세계은행 회의를 방해했다. 그리고 2001년 7월, 이탈리아의 제노아(Genoa)에서 열린 7개국 정상회담에서 약 5만 명의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며 경찰과 충돌하는 난투극을 벌여, 시위대 중 1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시위에 대응하여 회담 참석자들은 개발도상국의 에이즈 확산과 싸우기 위해 12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약속하고, 다음 회담을 캐나다의 외딴 휴양지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 1979년의 이란혁명은 정통적 이슬람교도가 근대적 서양 문화의 많은 면을 받아들였던 전제 정권을 축출한 사건으로, 이슬람 세계를 넘어 전 세계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초로 분명하게 보여준 증언의 하나였다. 이슬람 국가에서 근본주의의 물결이 서양의 침투에 대항하여 전통적 문화의 수호를 내걸고 연이어 등장했다. 이러한 분노가 낳은 한 가지 결과는 서양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데 폭력에 의존하는 빈도가 늘었다는 것이다.
-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는 1790년대 프랑스혁명 도중 프랑스 정부에 대한 급진적인 자코뱅(Jacobins)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19세기와 20세기 전반까지 사람과 정부에 대한 위협의 한 형태로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간헐적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테러리즘을 현대적 삶의 한 주요한 요소로 폭넓게 이해하게 된 것은 대체적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들어와서다.
- 아일랜드 혁명주의자는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영국에 대항하여 주기적으로 테러리즘에 호소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에 영국인에 대항하여 테러리즘을 이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해 테러리즘을 이용했는데,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 심했다.
-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미국 내에서 테러 사건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났으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대부분의 미국인은 테러리즘을 주로 다른 국가에서 만연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가공할 사건의 결과, 미국인은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동요하게 되었고, 계속되는 위험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러한 자각은 9월 11일 이후 수년간 증가했다. 새로운 보안 조치로 인해 미국인의 여행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새로운 규제가 이민정책을 바꾸고 국제금융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테러리스트 공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로 긴장과 불안감이 만연했다.
-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호전적 탈레반(Taliban) 정부가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을 보호하고 지원했다고 확신하여 탈레반 정권에 대한 일련의 폭격을 개시하였고 지상군을 파견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곧 붕괴되었으며, 탈레반 지도자-그들과 연합한 알카에다의 전사와 함께-는 수도 카불에서 도망쳤다. 미국과 반 탈레반 아프간 군대는 그들을 산악 지역으로 추적하였으나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의 다른 지도자를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 전투 후에,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은 탈레반과 알카에다와 연류된 혐의가 있는 수백 명을 체포해 종국에는 이들 수감자를(다른 이들도) 쿠바의 관타나모(Guantanamo)에 있는 미군 기지의 시설로 이송했다. 그들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연방정부에 의해 제정된 테러리즘을 다루는 새로운 기준으로 처리된 첫 번째 테러리스트 용의자 중 일부였다. 수개월간, 어떤 경우에는 수년간 수감되어 변호인 면담도, 공식적 기소도 없이 강도 높은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이 만들어낸 사람으로, 많은 비판자가 주장한 기본적 시민적 자유를 위협한 예가 되었다. 백악관에 들어온 첫 달, 오바마 대통령은 관타나모 감옥을 폐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의회 상하 양원 합동 연설에서 ‘악의 축(axis of evil)’을 언급했는데, 거기에는 이라크, 이란, 북한이 포함되었다. 이들 국가는 모두 반미 정권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거나 갖고자 애쓰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 1년 넘게, 부시 행정부는 천천히 이라크를 침공할 공적인 사례(public case)를 만들었다. 사례의 많은 부분은 두 개의 주장에 근거해 있었다. 하나는 이라크가 미국에 적대적인 테러 집단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이라크가 핵무기와 생화학전 약품을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개발 중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게, 이러한 주장보다 덜 본질적인 것은 후세인 정권이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이었다. 마지막을 제외하고 어느 주장도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03년 3월, 미군은 영국 등 소수 국가의 협조와 유엔의 부분적 위임(partial authorization)을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후세인은 숨어버렸으나 마침내 그해 12월에 체포되었다. 2003년 5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발진한 항공모함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임무 완수’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 앞에 서서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 2009년 중반까지 이라크에서 사망한 미군이 4,000명이 넘었는데, 그중 3,600명 이상이 ‘임무 완수’ 연설 이후에 죽었다.
- 미국 내에서 전쟁 지지는 최초의 승리 주장 이후 여러 해 동안 점차 감소했다. 대통령이 주장했던 대량 살상 무기의 증거를 찾는 데 점령국들이 실패한 것은 전쟁의 신빙성에 타격을 가했다. 또 다른 타격은 바그다드에 위치한 아부 그래이브(Abu Ghraib)와 이라크의 다른 지역, 그리고 전 세계에 걸친 감옥에서 미군이 이라크 포로에게 가한 고문과 모욕에 관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이라크 침공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줬다. 봉쇄정책이 세계 속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시금석이 된 1940년대 후반 이래로, 미국은 자신의 적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힘썼다. 심지어 냉전이 끝난 후에도,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전받지 않은 우위에 있음에도 봉쇄의 수준을 계속적으로 유지했다. 조지 W. 부시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미국의 지도자는 미국의 국제적 목표를 달성키 위해 예컨대, 유엔 및 나토와 밀접하게 협력했으며 일방적인 군사적 행동은 자제했다.
- 이러한 제약을 비판하는 사람은 항상 있어왔다. 그들은 미국이 안정 유지 이상을 해야 하고 비민주적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미국의 잠재적 적을 파괴해야 한다고 믿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이러한 비판 세력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정책을 새로 짜기 시작했다.
- 2005년 5월 라트비아(Latvia)에서 부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말 동유럽의 소련 지배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당시 미국의 결정에 대해 언급했다. 그 결정은 소련 지배에 도전한다면 미국을 또 다른 전쟁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조지 W. 부시는,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1945년 얄타회담에서 타결한 논쟁적인 합의안은 폴란드와 여타 동유럽 국가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막지 못한 ‘정당치 않은 전통’의 일부이며, 이로써 강대국이 약소국의 이해를 희생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안정을 위해 자유를 희생시킨 이러한 시도는 유럽 대륙을 분할해 불안정한 상태로 남겨놓았다”고 말했다. 또 미국과 여타의 강대국은 안정보다 자유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만 하며, 폭정과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세계는 더 큰 위험을 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 조지 W. 부시의 국내 정책은 그를 정치적으로는 거의 강화시키지 못했다. 2001년의 대규모 감세안은 고르지 못하게 매우 부유한 미국인에게 돌아갔다. 이는 최선의 성장 정책은 투자를 가장 잘 할 사람들 수중에 돈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백악관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감세 정책 이외 조지 W. 부시가 성취 주요 정책은 “어떤 어린이도 뒤처져서는 안 된다(No Child Left Behind)”로 요약되는 교육개혁안으로, 표준 시험을 치는 학생의 성적과 결부해 연방 자금을 학교에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통과된 지 7년 후, 그 법안이 두드러지게 학생의 수행능력을 개선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합의는 없었다. 여전히 사회보장제도의 몇몇 측면을 민영화하려는 노력을 비롯한 여타의 제안들은 의회에서 결코 대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민주당이 의회를 다시 지배한 2006년 이전에도, 조지 W. 부시는 많은 중요 법안을 진행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특히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주어진 행정명령(executive orders)-의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법과 정책-을 아주 광범위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 인기 없는 이라크 전쟁은 대통령에 대한 동의율을 급격히 하락시켰는데, 2008년 중반에는 그 평가가 여론조사 사상 최저의 수준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지 W. 부시의 인기에 더욱 타격을 입힌 것은 아마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일 것이다. 법무부에서 드러난 추문, 시민권을 불법적으로 제약했다는 폭로, 테러리스트로 의심된 사람에게 사용한 책략으로 일어난 극단적인 혐오감, 2008년 전반에 시작된 재앙에 가까운 재정 위기로 절정에 이른 절망적인 경제 전망 등이 대통령의 인기 하락을 가속시켰다.
- 2008년 대통령 선거는 1952년 이래 현직 대통령이나 부통령을 포함하지 않는 최초의 선거였다.
- 2000년 공화당 지명전에서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했던 애리조나 주의 상원 의원인 존 매케인(John McCain)이 조지 W. 부시의 지명을 확고히 받으면서 초기 예비선거(primaries)를 통해 부상했다. 민주당 선거전에서는 예비선거에서 두 명을 제외한 모든 후보자가 탈락했다. 그 둘은 뉴욕 주의 상원 의원이자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과 일리노이 주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상원 의원이었다. 오바마는 젊고 카리스마 있는 정치인으로 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와 캔자스 주 출신 백인 어머니의 아들이다.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큰, 최초의 여성과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서, 클린턴과 오바마는 커다란 열광을 끌어냈다.
- 매케인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단언했다. 오바마는 일정한 시기에 걸쳐 미군을 점차 감소시킬 것을 제안했다. 매케인은 국가 의료보험에 반대했으나 오바마는 지지했다. 매케인은 투자를 유발하기 위한 추가적 감세를 지지한 반면, 오바마는 최상층 미국인의 증세를 촉구했다. 선거운동은 부시 행정부 정책에 대한 실로 가속되는 논쟁과 계속적으로 약화되는 경제를 목전에 두고서 진행되었다.
- 대통령 선거 결과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친 것은 2007년 중반에 시작하여 2008년 여름에 위기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점차 악화된 일련의 재정 문제였다. 재정 위기가 확대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주택 시장의 심대한 침체인데, 이는 곧이어 주택 담보대출 위기(mortgage crisis)의 방아쇠를 당겼다. 여러 해 동안, 재정 기관은 대출을 좀 더 쉽고 싸게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용대출 상품을 개발해왔는데, 이로써 수백 만 명이 매우 낮은 단기 금리-종종 전통적으로 안전하다고 간주된 것보다 훨씬 큰-로 대규모 주택 담보대출을 하도록 유혹받았다. 이 중 많은 것이 초기 몇 년 후에 급격하게 올라갔다. 종종 주택 가격보다 비싸진 대출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수백만 명의 채무 불이행자가 자신의 주택을 포기했다. 우선, 채무 불이행은 대개의 경우 주택 담보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영향을 미쳤으나, 대부분의 담보 잡힌 집들이 급히 팔리고 종종 여러 번에 걸쳐 되팔렸기 때문에 악성 채무는 금융계를 통해 널리 퍼져갔다. 이해 여름 동안 미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 기관 일부가 파산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연방정부에 의해 구제-효과적으로 접수-되고 나머지는 더 큰 기관에 의해 매우 낮은 가격에 인수되었다. 더욱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던 투자 은행 중의 하나인 리만 브러더스(Lehman Brothers) 등 몇몇은 완전히 파산했다. 9월 중순, 금융 위기는 통제를 벗어나 연쇄적 악순환의 조짐을 보였다. 재무 장관인 헨리 폴슨(Henry Paulson)은 여러 경제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은행을 살리기 위해 연방 자금을 대규모로 지출하는 예산안(appropriation)을 내놓았다. 상당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부시 행정부는 비틀거리는 금융기관을 떠받치기 위해 모두 7,500억 달러로 편성된 예산을 의회에서 승인받았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많은 멕시코인이 미국에 들어왔으며, 그중 상당수가 남서부와 태평양 연안의 여러 도시에 눌러 살았다. 1960년 무렵 로스앤젤레스는 멕시코시티를 제외하고 멕시코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였다.
- 1960년의 인구통계를 보면 미국에 사는 라티노 인구가 300만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70년에는 그 인구가 900만에, 그리고 2000년에는 3,500만 명에 이른다. 히스패닉은 1960년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합법적 이민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불법 이민자도 매우 많았다(이들은 700만에서 1,200만 명으로 추정된다).
- 1969년 6월 27일, 경찰은 뉴욕 시의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위치한 동성애자 나이트클럽인 스톤월 인(Stonewall Inn)을 급습하여, 단지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는 이유로 단골손님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급습이 별난 것은 아니었으나, 그에 대한 반응은 뜻밖이었다. 구경하던 동성애자가 경찰을 비웃더니 그들을 공격했다. 누군가 스톤월 인 안에서 분노를 터뜨렸고, 곧 경찰을 내부에 가둘 뻔한 지경에 이르렀다. 폭동은 그리니치빌리지(뉴욕의 동성애자 중심 구역) 전체에 걸쳐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전통적 가치와 시대적 통념(assumption)에 도전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스톤월 폭동’은 동성애 해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지표가 되었다. 1969년 뉴욕에서 창설된 동성애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과 같은 새로운 조직이 전국에 걸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동성애에 대한 대중적 토론과 대중매체의 기사가 급격히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 1993년, 군대 내의 동성애자 복무 금지를 폐지하려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노력이 의회와 군대 내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 1963년 출간된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의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는 흔히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첫 번째 사건이라고 일컫는 책이다. 1950년대에 여러 여성 잡지에 글을 써왔던 프리던은, 1947년에 스미스 칼리지(Smith College)를 졸업한 여자 동창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대부분 전후의 미국 사회가 열망했던, 안락한 교외에서 유복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꿈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또한 적지 않은 사람이 지식이나 재능, 교육에 걸맞은 활로를 찾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 불만스러워했다. 프리던의 책은 페미니즘을 부활시키는 동기를 제공했다기보다 이미 활성화되고 있던 운동을 대변한 것이었다.
- 《여성의 신비》가 출간되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여성의 지위에 관한 대통령 특별 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만들었고, 위원회는 성차별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 동등 임금법(Equal Pay Act)의 제정에도 일조했다. 법은 동일한 일을 하는 여성에게 남성보다 임금을 덜 주는 보편적 관행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1년 후 의회는, 흑인이나 기타 소수 세력에게 시행하고 있던 것과 동등한, 차별을 금하는 많은 법적 보호 조항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하는 수정 조항(7장)을 1964년의 민권법에 포함시켰다.
- 1966년 프리던은 여러 페미니스트와 함께 전국 여성 협회(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만들었는데, 그 기구는 전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조직이 되었다.
-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는 결혼, 가족, 심지어 이성애 관계에 관한 전반적인 관념을 배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일부 여성은 이성애 관계를 남성 지배의 수단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은, 심지어 많은 페미니스트조차 극단적 생각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많은 여성은 자신을 착취받는 집단으로 파악하면서 억압에 대항해 단합을 꾀하고 여성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전국에 걸쳐 수많은 도시에서 페미니스트는 여성 전용의 서점이나 술집, 다방을 개설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 신문과 잡지를 창간했으며 여성을 위한 병원과, 성폭행과 학대의 희생자를 돕는 기관, 유아 탁아 시설(day-care centers), 그리고 특히 1973년 이후에는 낙태 시술소(abortion clinics)를 만들었다.
- 전문직 세계의 경우 여성의 결혼 상태를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미시즈(Mrs.)’나 ‘미스(Miss)’ 대신 ‘미즈(Ms)’를 사용하는 등 중요한 상징적 변화도 있었다.
- 1972년 의회는 평등권 수정 조항(Equal Rights Amendment, ERA)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을 승인하고 각 주로 내려보냈다. 얼마 동안은 추인이 거의 확실해 보였으나 1970년대 후반에 그 수정 조항은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이는 수정 조항이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깨뜨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사람(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많은 여성을 포함)의 반대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추인에 필요한 10년이 다 지난 1982년, 그 수정 조항은 마침내 폐기되었다.
- 1920년대 이래 미국 페미니즘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과 임신에 더 큰 재량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노력은 별다른 논쟁 없이 1970년대의 성폭행, 성적 학대, 가정 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피임 및 산아제한에 관한 정보는 20세기 초와 비교하여 훨씬 더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고, 많은 논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주제중 하나인 낙태는 그 시대의 어떠한 문제보다도 더욱 대중적 감정을 자극했다. 낙태는 한때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이었으나, 20세기 초 대부분의 지역에서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1960년대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낙태는 법망을 피해 조용히, 때로는 위험한 상태 속에서 시술되고는 했다. 여성운동은 낙태의 합법화를 위해 다시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다. 1960년대 말 몇몇 주에서 낙태에 관한 규제를 포기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이 내린 결정에 따라 임신한 지 ‘첫 3개월’ 동안의 낙태를 금한 모든 법은 무효화되었다. 그 결정은 불과 수년 전에 처음으로 인정된 헌법상의 ‘사생활권(right to privacy)’이라는 새로운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 1962년에 출간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농약의 위험성을 폭로하여 선풍을 일으켰는데, 책은 생태주의자의 인식을 확고히 한 생각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1945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 내 전문 생태학자의 수는 3배나 늘어났고, 1960년과 1970년 사이에는 다시 2배로 증가했다. 생태학은 정부 기관과 대학, 재단, 마침내는 일부 대기업에서까지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서서히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주요 대학에 생태학과와 생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