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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박시백의 대하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 제5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원전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각 권마다 20여 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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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근정문 ::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즉위식은 근정전 앞에서도 하고 근정문 앞에서도 했는데 단종은 근정문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열두 살 소년 임금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 여덟 살이 되던 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되고 2년 뒤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제 열두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새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가 수렴 뒤에서 섭정하는 게 관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다.) 하여 의정부가 나랏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 정승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였는데, 몇 달 뒤 남지가 병으로 물러나면서 김종서가 좌의정을 맡고 정분이 우의정을 맡게 되었다. 왕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고 실제 모든 결정은 의정부에서 이루어졌다. 본래 인사는 담당부서에서 복수로 추천해 올리면 임금이 이중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결정하였는데 이를 낙점이라 한다. 그러나 어린 단종의 경우 후보들의 신상과 자질을 잘 모르는 관계로 의정부에서 미리 후보 중 한 사람에게 ‘노란 표시’를 하여 올렸고 임금은 그 위에 낙점을 하는 식이었다. (황표정사)
그러나 비록 어리지만 4년간 임금 수업을 받았고 세종으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던 그다.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돼 대신들의 앵무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단종실록>의 진실
《단종실록》은 본래는 《노산군일기》란 이름으로 편찬되었는데 편찬 경위는 물론 편찬 일시나 편찬자의 이름조차 나와 있지 않다. 뒷날 숙종조에 이르러 단종이란 묘호가 추증된 뒤 《노산군일기》도 《단종실록》으로 개칭된다. 그러나 제목만 바뀌었을 뿐 본문에서는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내용은 사관이 기록한 사건 기사와 수양대군 측의 일방적 증언, 주장이 섞여 있는데, 그런 까닭에 수양대군이 사저에서 측근들을 만나 나눈 얘기들도 상세히 실려 있다.
《단종실록》의 기본 서술방향 및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어리고 불안한 임금,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안평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수양대군의 영우적인 면모와 우국충정)
김종서의 전횡에 대한 기록을 보자.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거라곤 그의 성묘 길에 환송객이 장안을 메웠다거나 김종서나 황보인의 아들, 사위들이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정도다. 소극적인 황보인, 황보인과 김종서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정분. 주요 결정은 좌의정 김종서의 몫이었고, 그만큼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던 것이 사실이다. 《단종실록》은 김종서의 매관매직이나 치부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싣고 있지 않다. 김종서의 집은 사대문 밖에 있었는데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의 절도를 잘 지켜 나갔음을 보여준다.
야심가 수양대군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유교경전과 역사서는 물론, 역법·병서에도 두루 통달했고 풍수 또한 전문가 수준이었다. 음악이론과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이런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세종은 여러 일을 맡겼고 그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건강한 신체와 타고난 운동신경! 힘이 세서 강궁을 다루었고 솜씨 또한 족히 명궁 소릴 들을 만했던 모양. 《세조실록》 ‘총서’엔 그의 활솜씨가 숱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의 무인적 자질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소맷자락을 남보다 훨씬 크게 하여 입었고 추운 겨울 강무 때면 홀로 얇은 차림으로 근육과 건강을 자랑하곤 했다. 또 일부로 늙고 둔한 말을 골라 타기도 했다.
수양대군은 직설적이고 속을 잘 감추지 못하는 사람. 그런 까닭에 《세종실록》이나 《문종실록》에 이미 야심의 일단을 드러내 보인다.
불교를 숭상했던 그가 세종 말년의 어느 날 했던 말이다. (부처의 도가 공자의 도보다 낫다. 정자, 주자가 불도를 그르다고 한 것은 깊이 몰랐기 때문이다. 불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배척하는 자는 망령된 자, 내 취하지 않겠다.) 왕명을 맡아 전하면서는 도승지 위에 군림하는 듯한 인상도 풍겼다.
문종 시절의 일이다. (도첩(승려 신분증)도 없이 돌아다녀서 칼을 씌우고 호송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일로 칼까지 씌우고 이 무슨 짓이냐? 당장 벗겨라!) 하고는 승려를 데리고 가버렸다. 이는 사헌부의 정당한 공무 집행을 방해한 것으로 명백한 월권이자 불충으로 취급받을 행동이었다. 다음 날 보고서를 올려 해명했다. 그렇다고 대간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 그 일은 문종의 적극적인 비호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이때는 이미 수양대군의 힘이 막강해진 상황이어서 문종으로선 만일을 위해서라도 다독여야 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의 야심은 단종의 즉위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문종이 죽은 나흘 뒤로 단종의 즉위식이 있었던 날의 기록이다.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즉위교서를 반포하였다... 이날 위사와 백관들은 소리 없이 울었다. 세조가 가장 비통해 했다. 이용(안평)은 승하한 뒤 대궐에 들어오면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대행(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아직 묘호가 정해지기 전에 칭하던 말)의 은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나더러 바르고 충성스러우며 지식이 남다르다고 항상 더불어 의논하셨지. 진법을 만들었더니 ‘제갈량인들 수양보다 나을까?’ 이러시는 거야. 또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셨어. 형제 간의 정이 이와 같았거늘.”)
그렇게 ‘비통해’ 했다는 그가 그날 보인 또 다른 행동. (대간의 청을 좇아 의정부 당상관 및 대군의 집에 분경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옵니다.) 분경이란 사사로이 세력가의 집을 찾아 청탁하거나 하는 일로 평시에도 금지된 일이었다. 어린 임금으로 인해 신하들 간의 합종연횡과 붕당이 발생할까 두려워 소장파인 대간들이 제안한 것으로 의정부 대신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라이벌이자 정적이기도 한 동생 안평대군까지 끌어들여 분경금지안을 종친들에 대한 압력이라고 몰아붙인다. 예상 밖의 강력한 반발을 접한 의정부,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수양과 안평의 세력 대결
세종의 대군 중용정책의 결과 그들은 각기 무시 못할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이가 수양대군과 더불어 또 한 사람, 안평대군이다. 세종은 수양과 안평에게 동일한 비중의 일을 맡겼고 중요한 일은 둘이 같이 맡도록 했다. 보현봉에 올라 북극고도를 잰 일이나 《운회》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의 감독, 세종의 수릉터를 잡는 일에도 둘은 같이 참여했다. 불당 건립 등 불사를 벌일 대와 말년에 왕명을 전하는 일에도 둘은 함께 움직였다. 아무래도 어느 한 쪽이 너무 커져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는지.
수양의 자랑이 무인적 자질이라면 안평은 타고난 예술가. 시와 그림에 능했고 글씨론 당대 최고의 명필이란 평을 얻은 그였으니 자부심에 관한 한 결코 형인 수양에 뒤지지 않았다. 힘이 커진 두 사람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둘의 관계가 경쟁적인 관계로 자리잡자 조정 안팎엔 친수양파, 친안평파가 형성되어 은근히 대립하게 된다. 단종 즉위 직후에 이미 조정과 종친은 물론 세종의 후궁들, 환관, 시녀들에 이르기까지 양 세력은 뚜렷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대군 그룹에 맞설 만한 힘의 보유자는 역시 국가권력을 합법적으로 장악한 정승 중심의 대신 그룹이다. 《단종실록》은 60대 노인들인 세 정승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왕위를 찬탈하여 안평을 옹립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록》의 주장대로 모든 것을 틀어쥔 그들이라면 어린 왕을 폐하고 안평을 옹립하여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장성한 왕을 옹립함으로써 그동안 누려 온 권세가 끝날 게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어쨌든 권력은 그들의 것이었으니 비판의 표적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같은 대신 그룹 내에서도 권력 핵심에서 빗겨난 정인지 등은 비판적이었는데 중심 세력은 집현전 출신의 소장파들! 신숙주,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유성원 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당시 주로 언관 일을 맡고 있었다. 왕이 성장할 때까지 나라를 맡아 관리하게 된 대신 그룹으로선 아무래도 막강한 힘을 보유한 대군들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두 분 대군 중 한 분을 끌어들입시다. 종친들의 소외감을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그들의 힘도 약화시키는...) 집권 그룹은 안평대군의 손을 잡았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안평대군은 한순간에 형인 수양을 제치고 최강의 종친 실세로 부상한다.
안팎의 힘이 안평에게로 쏠렸지만 종친 쪽엔 수양과 가까운 사람이 더 많았다. 대표적인 수양 쪽 종친들로는 신망은 없지만 큰 어른 격인 양녕대군,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 이구,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등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아들들이었다. (신빈 김씨는 세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다.)
수양 측에 의해 안평 쪽 종친으로 분류된 이들로는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 이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아들들인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등이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숙부들 중 단종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 세종은 문종과 함께 온천으로 떠날 때면 세손인 단종을 금성대군 집에 맡기곤 했다. 혜빈 양씨는 단종을 키운 유모이기도 해서 단종이 궐 내에서 가장 믿고 의지했던 여인이었다. 이렇듯 수양 측에 의해 안평의 일당으로 규정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종과 무척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수양은 단종이 즉위한 지 한 달도 안 돼 자신과 가까운 도승지 강맹경을 만나 혜빈 양씨에 대해 의논한다. 혜빈 양씨는 당시 궐 내에서 빈의 첩지를 받은 유일한 인물. 홍귀인은 문종의 후궁으로 슬하에 자식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위로 보나 서열로 보나 혜빈 양씨가 대비도 중전도 없는 궁궐의 관리자가 되는 게 순리였다. 더욱이 임금의 유모 아닌가?
홍귀인은 빈으로 책봉되어 혜빈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한명회의 등장
권람. 개국 초 대 유학자인 권근의 손자. 아버지 권제가 첩을 가까이하며 어머니를 박대하자 그 길로 집을 나와 산천을 유람하며 보냈다.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에도 응하지 않았지만 그의 총명함과 재주는 널리 알려져서 사람들은 그를 ‘백의 재상’이라 불렀다. 이 시절에 그가 사귄 벗이 있었으니 바로 한명회다! 조선 개국 직후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승인받고 돌아온 한상질이 그의 할아버지다. 명문가 출신인 셈인데, 일곱 달 만에 태어난데다 어려서 부모를 잃어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야 했으니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다. 권람과는 달리 세상에 나가 뜻을 펴보고 싶은 욕망이 강렬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쓴 잔을 들어야 했다. 같이 산천을 유람하여 보내던 둘은 서른을 훌쩍 넘기고 나서 세상에 복귀하기로 한다. 권람은 장원급제하며 복귀에 성공하지만 한명회는 또 낙방. 할 수 없이 자존심을 꺾고 음직으로 벼슬을 얻었는데 ‘경덕궁직’이란 자리였다. 경덕궁은 태조가 잠저 시절에 살던 개성에 있는 집을 말하는데 그곳의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서울 출신으로 개성에서 벼슬을 하는 이들이 송도계라는 친목계를 만들기로 했는데 (저기... 나도 좀 낍시다. 경덕궁직도 벼슬 축에 들어가나?)
결심을 굳힌 그는 친구 권람이 온천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갔다. 실록엔 이날의 대화를 멋지게 기록하고 있다. (주상께서 어리시니 대신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나라가 날로 잘못돼 가고 있어. 안평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소인배들을 끌어들이고 흉모를 꾸미고 있단 말일세. 수양대군께선 영명하고 정직하며 사심이 없으신 분이니 잘 말씀 드리게.) 《역대병요》(역대의 전쟁에 대한 기록으로 수양대군이 집현전 학자들을 이끌고 편찬하였다.)를 함께 편찬하며 수양과 이미 친한 관계인 권람, 친구 한명회의 제안을 좇아 수양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한명회가 했던 말들을 전한다.
그러나 《실록》에 둘이 실제로 만나는 장면은 9개월이 지나서야 나온다.
2. 계유정란
돈의문 :: 4대문의 하나로 서대문이라고 불렸는데 일제 때 철거되고 지금은 없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수양대군 일당은 도성 문을 모두 닫게 하고는 돈의문으로 들어가 권력을 장악했다.
거사를 위한 준비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일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한명회는 안평, 김종서, 황보인 쪽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정보를 얻고 내금위 소속 등 주요 위치에 있는 무사들을 포섭했다. 이후 한명회는 그동안 끌어들인 무사들을 한두 사람씩 데리고 와 충성 서약을 하게 하니, 홍달손, 양정, 유수 등이 그들이다.
수양은 수양대로 동조자들을 규합했으니 홍윤성, 문과 급제자 출신이나 힘이 장사고 무예에도 능한 인물이다. 신숙주, 소장파의 선두 주자. 집현전에 오래 있으면서 수양, 안평과 두루 친했던 그는 이후 수양의 사행길에 서장관으로 동행하고 난 뒤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된다. 황희의 아들 황수신. 이징옥의 형인 이징석과 아우인 이징규 등등...
내실을 다져 가던 수양, 측근들과의 상의도 없이 돌연 고명사은사를 자청해 나선다. (새 임금의 계승을 황제가 승인해준 데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하러 중국으로 가는 사신. 주로 주요 종친이나 재상이 갔다.) 안평의 최측근인 이현로가 안평에게 가기를 권하여 안평으로 결정되었던 것인데(이 역시도 수양측의 주장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양이 자신이 가겠노라고 고집한다. 결국 수양으로 결정되었다. (무슨 걱정인가? 안평은 내 적수가 못 돼. 김종서, 황보인 또한 호걸이 아니니 어찌 움직이겠는가?) 이는 수양 측의 기본 주장을 정명으로 뒤집는 말이다. 안평과 대신이 결탁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게 이들의 가장 기본주장 아니었던가? 큰소리를 쳐 놓고도 못내 걱정이 되었는지 수양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을 종사관으로 데리고 가기로 한다. 명나라로 떠난 건 한 달쯤 지나서이다.
이 행차로 수양은 두 가지 중요한 수확을 얻었으니, 중국 조정에 얼굴을 알린 것이 그 하나요, 수양에 대한 조정의 의심을 누그러뜨린 것이 그 둘째다. (4개월이나 비운 걸 보면 ‘다른 뜻’은 없는 게 아닐까?)
한결 여유를 되찾은 수양, 공개적으로 우호 세력 확대에 나선다. (《역대병요》가 완성되었는데 이에 참여한 이들에게 ‘가자’(자급을 더해 줌. 즉 품계를 올려줌)하여 그간의 노고를 위로해 주소서.) 결국 수양의 청은 받아들여졌는데, 사헌집의 하위지가 강력히 반발했다. (집현전은 본래 책을 만들고 교열하는 곳으로 할 일을 한 것일 뿐 신은 상을 받을 만한 공이 없사옵니다. 더욱이 듣자 하니 수양대군께서 상 줄 것을 아뢰었다는데, 이는 사사로운 은혜를 베푼 것으로 심히 부당하옵니다. 종실의 어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행하여 공공연히 사람들을 추천해 올린다면 은혜가 누구에게서 나오게 되겠습니까? 종실의 도리에 크게 어긋나옵니다.)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서를 제출해버리고, 성삼문도 이에 동조한다. 논란 끝에 결국 엇던 일이 되었다.
홍달손, 내금위 출신 무장으로 한명회와 동갑내기 친구. 변방의 수군첨절제사로 있다가 때마침 해임되어 돌아온 것이다. 순장(巡將)이란 궁궐, 도성의 야간 순찰을 담당하는 군대의 책임자! 때는 단종 1년 5월, 즉위 1년이 되는 시점인데 이미 거사를 계획하고 있음을 실토하고 있는 그들이다.
잘못된 판단
순장에 임명됨으로써 수양의 준비에 화룡정점이 되어준 홍달손. (이징옥이 비밀리에 경성의 무기를 서울로 옮기도록 했답니다.) 북방의 무기를 한양으로 빼돌렸다는 이 주장은 안평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중요한 증거로 《실록》은 설명한다.
역모를 도모하는 건 고사하고 수양 측에 대한 경계조차 게을리한 그들이다. 홍달손이 감순 책임자를 맡은 직후 수양은 양녕을 비롯한 종친들을 거느리고 단종을 찾았다. (전하께오선 종사와 만민의 주인이시옵니다. 비록 상 중이오나 종묘사직을 위해 중전마마를 맞이하시옵소서.) 그들의 청은 백관들 사이에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수양은 이런 효과는 얻었을 것이다. (대군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나 염려했었는데, 그건 아닌가 봐. 그러지 않고서야 국혼을 청할 리 없잖아.)
그리고 넉 달 뒤 9월 25일, 수양은 치세와 관련된 의견을 담은 상소를 봉해 올린다. 내용은 뻔한 얘기들을 나열한 것이었지만 단종은 크게 반색한다. (수양숙부께 진정 다른 마음은 없는 모양이구나.) 사행기르 국혼 주청, 충성심을 담은 상소까지. 이쯤 되자 노련한 김종서, 황보인도 오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호를 쳐라
(저의 집에 갖바치 일을 하는 계수란 종이 있는데 같은 일을 하는 친구 중에 황보인의 종도 하나 있답니다. 그 애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 영상이 김정승 등 여러 재상과 더불어 장차 임금을 페하고 안평대군을 새 임금으로 삼으려 하고 있거든. 오는 10월 12일에서 22일 사이에 거사하기로 했는데...) (권람)) 이 정보가 《실록》에 기록된 안평 측 역모계획의 증거이자 수양 측 거사의 결정적 명분이다. 어떻게 일개 종이 거사계획의 내밀한 부분가지 샅샅이 알게 되었는지는 고사하고 그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날은 수양이 상소를 올린 바로 그날로 상소가 단종과 김종서 측의 눈을 돌리기 위한 책략이었을 분임을 보여준다. 며칠 뒤 그들은 10월 10일로 거사 일을 정했다.
그 전 10월 2일자엔 재미있는 기록이 실려 있다. (황보인이 우리의 계획을 알고 김종서에게 알린 모양입니다. 걱정 없어. 저들이 알더라도 회의에 3일, 조치에 3일, 약속에 3일이 걸릴 테니 우리가 10일 거사의 계획만 지킨다면 탈이 없을 거야.) 역모를 도모하는 자가 계획이 누설되었다는데 이토록 태평할 수 있을까? 전후의 정황으로 보건대 이 기록은 상황의 급박함과 수양의 배짱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창작으로 보인다.
10월 10일! 단종 1년, 계유년이다. 날이 밝자 수양은 활쏘기를 명목으로 무사들을 불러모았다. 막상 무사들을 모아놓고 보니 이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인 수양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 저녁이 되었다. 홍달손은 먼저 나가고, 드디어 수양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언질을 받았거나 낌새를 알아차렸던 이들은 적극 찬동했지만, 그저 와서 활이나 쏘고 술이나 얻어마셨던 이들은 기겁을 했다.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도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상 밖의 상황! (본래 길가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사도 완공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공께서 분연히 일어나시면 모두 따를 것입니다. (한명회)) 이에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가지고 와서 입혔다 하는데 이 역시 적극적 협력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창작인 듯.
수양은 평상시 차림으로 종 임어을운을 데리고 길을 나섰고 양정 등 세 명의 무사가 뒤를 따랐다.
세종을 도와 북방을 개척하고 돌아온 맹장, 김종서! 그 뒤에도 몽고족이나 여진족의 준동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면 총사령관이 되어 노구를 이끌고 변경으로 달려갔던 그다. 지춘추관사, 지경연사, 지성균과사를 두루 역임한 유학자로 《고려사》, 《세종실록》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강직한 성격에 엄정한 일처리, 문무 양면에서 정상에 이른 그를 당시 사람들은 대호라 불렀다고 야사는 전한다.
이날 김종서는 듯밖에 권람의 방문을 받았다. 그가 왔던 목적이 ‘정탐’이었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얼마 뒤. (아버님, 수양대군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뫼셔라. 여러 번 청해도 잠깐 뵙고만 가신다며 들어오시려 하질 않습니다.) 임어을운, 양정 등 수양을 따라온 이 4명,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의 친구들. 객쩍은 소릴 늘어놓으며 틈을 보았지만 아무래도 김승규와 그의 친구들이 거슬렸다. (내 사실은 김정승께 비밀리에 드릴 청이 있느니라. 그대들은 물러나 있으라.) 뭔가 미심쩍었는지 김승규 등은 겨우 몇 발짝만 뒤로 물러섰다.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보는데,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생과 사
권람은 순청에 이르러 홍달손을 만났다. 사람을 보내 숭례문, 서소문을 닫게 한 뒤 돈의문을 열어두게 조치했다. 그런 다음 수양이 돌아오고 한명회가 무사들을 이끌고 합세한 뒤 수양은 홍달손 휘하의 순졸들을 뒤따르게 하고는 입궐했다. 김종서만 해치우면 나머지는 신경쓸 것도 없다는 수양의 장담은 과연 옳았다. 입직했던 승지 최항을 불러 (안평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공모하여 불궤한 짓을 저지르려 하였다. 형세는 위급한데 주상 곁에 저들의 패거리가 있어서 아뢰지 못한 채 적괴인 김종서 부자를 먼저 베었고, 이제 전하께 아뢰어 잔당들을 토벌하려 하네.) 입직한 도진무, 병조참의 등과 의논한 뒤 대신들을 불렀다. 단종에게 알리는 일은 내시 전균이 맡았다. 대궐로 들어오는 길목의 요소요소에는 군사들을 배치해 엄중 경계토록 했으며 들어오는 대신들은 네 겹의 검문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문 너머의 책임자는 한명회! 김종서 일당으로 분류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이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야사에서 한명회가 직접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들어오는 대신들에게 생 혹은 살의 신호를 보냈다 한다. 일국의 재상들의 운명이 백수 한명회의 손에 결정난 것이다.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 등은 집으로 사람을 보내 죽였고 안평과 그의 아들은 강화로 압송되었다가 얼마 뒤 사사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그런데 이때를 전후한 안평 관련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며칠 전 100여 명을 거느리고 사냥을 즐겼다는 것과 압송되며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정도. (급히 김정승께 가서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여라.) 명색이 ‘왕위 찬탈 음모 사건’의 수괴인 그인데 《실록》의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 않은가?
또 한 사람의 수괴(?)인 김종서, 그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여장을 하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서소문도 숭례문도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어 있었는데, 이튿날 순진하게도 김종서는 자신이 투옥될 것으로 생각했다. 향년 71세.
수양 측은 안평과 김종서 쪽에 일방적으로 역모 혐의를 씌워놓았을 뿐 믿을 만한 증거는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도 잡아다 국문하여 역모의 전모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서둘러 죽일 뿐이었다.
정분, 조수량, 안완경 등은 유배되었다. 허후는 꼬장꼬장한 보수주의자 허조의 아들, 수양은 그를 끌어들이고 싶어 좌찬성으로 삼았는데 사양한 괘씸죄와 황보인 등의 효수를 논의할 때 눈물이 맺혔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에 이른다. 유배되었던 정분, 조수량, 안완경 등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가족들에게도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아비와 열여섯 살 이상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으며, 15세 이하의 아들은 관노로 전락했다. 처, 첩, 딸은 노비 신분이 된 뒤 원수격인 공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공신과 역적
정난 다음 날 수양은 ‘영의정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궁궐 시위대인 별시위 감사 등 1백여 명이 호위토록 했으니 이때 이미 신하의 지위는 넘어섰다 하겠다. 좌의정엔 정인지가 우의정엔 한확이 제수되었다. (수양대군의 사돈)
쿠데타 이후 정국을 무리없이 이끌어가려면 명망 있는 대신들의 협조가 필요한 법이다. 홍달손, 권람, 한명회를 뺀 나머지 아홉 명이 1등공신에 책봉된 이유다. 2등공신에는 정난에서 역할을 한 무사들이 주로 선정되었고 신숙주와 내시인 엄자치, 전균도 포함되었다. 3등공신엔 성삼문의 이름이 올라 있어 눈길을 끈다.
김종서와 함께 북방을 개척한 이징옥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란 평가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 충직성으로 인해 널리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징옥의 아비가 유언하기를 ‘나를 북쪽산에 묻어다오’ 하였다. 그러나 맏아딜은 이징옥의 형 이징석은 장지를 다른 곳으로 정해버렸다. 이징옥이 유언대로 하자고 설득하자 다른 데도 아닌 빈소에서 하염없이 두들겨 팼더랬다. 얼마나 맞았는지 며칠 뒤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호랑이도 맨 손으로 때려잡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힘이 세고 용맹한 그가 반항 한 번 안 하고 맞기만 한 것이다.
세상에 나선 이래 거의 대부분을 함길도에 보낸 그가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된 건 3년 전인 문종 1년 때.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도관찰사가 보다 못해 문종에게 편지를 올렸다. (도절제사 이징옥은 가사는 돌보지 않고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는 일만 맡았는데 살림이 본디 가난한데다 아내가 죽은 지 오래니 누가 옷바라지를 하겠습니까?) (옷 세 벌을 우선 보내주어라. 그리고 겨울이 오면 겹옷을 따로 보내겠다.)
멀리서 군대까지 거느린 그를 섣불리 다룰 순 없는 노릇이다. 우선 그의 힘을 뺏는 게 필요했다. 새로 도절제사가 되어 온 이는 박호문으로 김종서를 모함했던 자다. 한양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이징옥의 물음에 사실대로 정난의 일을 얘기해준다. 순순히 인수인계하고 귀경 길에 오른 이징옥은 심란했다. 60리를 갔던 이징옥은 발길을 돌렸고, 박호문을 죽인 다음 종성으로 향했다. 종성진과 이웃 진의 군사를 좌우에 거느리고 폭탄선언을 한다. (이 땅은 대금 황제가 일어난 땅! 내가 감히 하늘의 명에 따라 대금 황제로 즉위하니 대소신민들은 그리 알라!) (각색된 게 아닐까? 수양의 정변을 성토하는 대목도 없고)
어쨌든 이징옥이 야인을 기반으로 근거지를 세우려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경상도 출신으로 이 일대에 연고가 없는데다 야인들에게 있어서도 공포의 대상이었지 존경은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했으면 모를까 궁지에 몰려 우발적으로 시작한 일, 실패가 불 보듯 뻔하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거라.) 종성진 절제사 정종, 휘하 군졸들과 계획을 세운 뒤 이징옥에게 건의했다. (폐하! 오늘은 추우니 군사들에게 술을 마실 수 있게 하소서. 폐하께서도 한 잔 하시옵소서.) 거병 후 칼과 활을 차고 등불을 켠 채 잠조차 자지 않는 이징옥이었다. 그의 목은 오래도록 북방의 찬바람 속에 내걸렸다.
3. 한 마리 원통한 새
청령포 :: 영월에 자리한 청령포는 동, 서 북쪽은 물로 막히고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감옥이다. 단종은 이곳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죽임을 당한다.
주공의 길, 수양의 길
공은 세웠으되 공신 책봉에서 제외되었던 종이나 시녀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다. 죽은 자들의 재산을 분배해준 것인데,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수양의 종 임어을운은 황보인의 집을 받았고 시녀 내은은 김종서의 집을 종 막동은 이보인의 집을 시녀 소근은 조극관의 집을... 사헌부에서 공신 책봉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가볍게 정리되었다.
임금이 명했다. (수양대군과 상피되는 사람은 법에 구애받지 말고 벼슬을 제수하라!) 대간이 이를 문제 삼자 정인지가 다시 반론을 펴기를, (영의정은 다른 신하의 예가 아니고 주공의 예로 보아야 합니다. 주상께서 어리시어 영의정이 섭정을 하는 이때에 어찌 일반적인 예로 논할 수 있겠사옵니까?)
수양을 옹호한 대신들은 그를 주공으로 표현했고 수양 자신도 단종도 그렇게 비유하였다. 공자가 진정한 성인의 표본으로 여겼다는 주공, 그는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시대를 연 주 무왕의 동생이다. 주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게 되자 주공은 섭정을 하게 된다. 사실상 왕의 권한을 가지고 그는 강력한 정치를 펴 나갔다. 반발하는 세력은 힘으로 제압하는 한편 후세의 규범이 된 예·악을 정립하고 중국식 봉건제도를 완성하는 등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쯤 되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이 생길 법도 하건만 조카인 성왕이 성년이 되자 두말 없이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신은 일반 신화로 복귀했으니, 섭정 7년 만의 일이다.
소년 임금은 최대한 몸을 낮춰 숙부를 예우하되 임금의 자리만은 지키기로 다짐했다. 단종은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 나갔다. 조회에 참석하고 윤대를 시작했으며 경연 또한 더욱 열심히 참석했다. 사방에 수양의 눈들이 번득이고 있었으니 어떤 의도를 가진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었겠지만, 왕과 신하의 잦은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왕의 세력’을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수양은 정난 이후 얼마 안 있어 예전에 주장했던 단종의 국혼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번엔 종친만이 아니라 대신들과 대간들까지 합세했다. 단종은 반대했지만 수양은 단종의 국혼을 추진해 나갔다. 간택을 하고 불과 두어 달 만에 송현수의 딸을 신부로 결정해버린다. (김사우, 권완의 딸은 후궁으로.) 그렇게 단종은 강제로 부인을 맞았다.
아마도 정변 이후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세간에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종의 국혼으로도 민심은 가라앉지 않아서 급기야 단종이 직접 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근일에 이르러 수양숙부께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다 죽일 것이라거나 혹은 장차 숙부께서 나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이는 간교한 무리가 헛소문을 퍼뜨려 군신을 이간시키고 나라를 흔들려는 것이다. 수양숙부는 주공과도 같은 분, 그의 공훈은 나뿐 아니라 종묘와 사직이 모두 힘입은 바 크다. 이후로도 이런 말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고하도록 하라. 중한 상을 내리겠다.) (유언비어를 공론화하면서 나를 묶어두려는 계산인가 본데...)
수양은 한 무제와 당 태종을 좋아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당을 세우는 데 결정적 공훈을 세운 당 고조의 둘째. 그의 인망과 위세를 우려한 첫째 태자가 셋째와 손잡고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를 사전에 간파한 이세민은 선수를 쳐서 그 둘은 물론 그들의 자식까지 모두 죽인 뒤 황제가 되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다.
수양에게 가장 큰 근심은 단종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열다섯. 2~3년만 지나면 친정도 가능한 나이. 그런 수양의 걱정을 간파한 한 이복동생이 찾아왔다. 계양군 이증이다. (금성대군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얼마 전엔 화의군에게 면포 3백 필을 선물했답니다.) 수양은 우회적으로 단종을 압박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화의군 이영을 비롯해 최영술, 김옥겸 등이 금성대군 집에서 모여 활쏘기를 하고도 이를 숨겼으니 이들을 벌하소서.)
(단종 2년 12월부터 당상관 이상은 흉배를 착용토록 했다. 대사관 양성지의 의견을 다른 것으로 각 품마다 문양을 달리했다.) (금성대군의 고신을 거두고 화의군은 귀양 보내고 김옥겸 등은 변방의 군졸로 삼으라.) 화의군은 세종의 서장자. 정종은 문종의 유일한 사위로 단종의 자형. 상궁 박씨는 단종이 동궁 생활을 시작할 때 문종이 직접 보내준 상궁이다.
단종 3년(1455) 윤 6월 11일, 수양이 대신들과 승지들에게 말하기를 (혜빈 양씨, 상궁 박씨,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정종, 조유례 등이 난역을 도모했으니 가벼이 넘길 수 없소,) 수양의 말에 진위 여부를 묻거나 사실 조사를 주장할 신하는 더 이상 없는 상황, 수양의 말은 그대로 진실이 된다. (혜빈과 박상궁,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정종을 각기 유배하라. 그리고 내관은 속히 의정부에 알려라. 내가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하려 한다.)
대보(옥새)를 받아들고 온 이는 동부승지 성삼문. 야사에선 이때 성삼문이 통곡을 했고 엎드려 있던 수양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한다. 단종이 직접 대보를 건네받아 수양에게 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태종의 선위 파동 때처럼 몇 날 며칠을 밤낮으로 울며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나리의 신하가 아니오!
상왕이 된 단종은 경복궁을 세조에게 내주고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조회도 경연도 윤대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신하들을 볼 일도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세조가 문안을 오거나 사냥에 단종을 초청하곤 했다.
보위에서 물러난 지도 어느덧 1년 가까이 지났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곧 단종의 외할머니가 단종에게 고한다. (성삼문, 하위지 등이 장차 전하를 복위시키려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조정은 세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상황이다. 잘못될 경우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단종은 위험을 감수하고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그들의 움직임은 몇 차례 더 보고되었다.
세조 3년(1457) 6월 1일. 거사가 예정된 날이다. 이른 아침 성삼문 등과 함께하는 외숙부 권자신이 찾아오자 칼을 내려주었다.
핵심주모자는 성삼문과 박팽년. 그들은 정난 직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주청하는 등 정난을 지지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이에 이들이 계유정난엔 동의했으나 왕위 찬탈엔 반대했다는 해석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
정난 직후 성삼문은 사헌부 관원이었다. 이른바 언관으로서 당시 상황에 침묵을 지켰다면 아마도 다른 뜻이 있을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성삼문은 어차피 처형될 안평의 처형을 주장함과 동시에 이런 주장도 폈다. (정인지, 최항 등이 무슨 공이 있어 1등 공신이 된단 말입니까? 신을 3등 공신에 책봉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쿠데타의 명분이 취약한 수양은 대신들을 공신으로 삼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성삼문의 주장은 그 구도를 깨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박팽년은 단종의 국혼 이후엔 비록 문종의 대상이 끝나지 않았어도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어야 한다는 수양의 주장에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이다.
진작부터 수양을 경계해 온 하위지는 정난 이후엔 또 이런 말로 수양을 분노케 했다. (영상께선 문종대왕의 자자손손을 마음을 다해 보필하셔야 합니다.) 이들이 계유정난을 지지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게 하는 사례들이다.
유학자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둘의 아비인 성승, 박중림과 동생들, 옛 집현전 동료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단종의 외숙부인 권자신, 다시 그들의 가까운 지인들... 그렇게 제법 만만찮은 세력이 구축되어 가는 동안 비밀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준비가 매우 치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던 차에 갑작스럽게 기막힌 기회가 찾아왔다. 명나라 사신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을 위해 세조가 베푸는 연회 자리에 뜻을 같이하는 성승, 유응부, 박쟁이 별운검으로 결정된 것이다. 별운검이란 무장을 하고 임금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2품 이상의 무반을 말한다. 박팽년의 족친인 김문기는 바깥경호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우연인지 한명회가 초를 친다. (별운검을 배는 게 어떻겠습니까?) 성삼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명회의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야사는 그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일단 결행키로 한 것은 해야 하네. 아닙니다. 세자도 마침 들어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별운검마저 들이지 않는다 하니 이는 하늘의 뜻인 듯 싶습니다. 후일로 미루는 게 맞습니다.) 잠깐의 옥신각신 끝에 결국 주모자 격인 성삼문, 박팽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후일 도모) 말리는 이들을 발로 차며 결행한 수양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었다.
계획이 틀어지자 바로 이탈자가 나왔다. 실패한 이튿날,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간 것. 일찍이 성삼문은 김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성공하면 인망이 두터운 자네 장인이 영의정이 될 걸세.) 정창손은 사위로부터 자초지종을 듣자 곧바로 사위를 이끌고 대궐을 찾았다. 김질이 밀고했음을 안 성삼문, 박팽년은 순순히 사건 전모를 진술했다.
《실록》엔 국문 과정을 진술 위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야사에선 국문의 참혹함에 대비시키며 성삼문 등의 기개와 충성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나리가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지 않았소? 우리는 상왕전하의 신하지 나리의 신하가 아니오. 네놈들이 나를 나리라 부르는데 그럼 내가 준 녹은 왜 받아 먹었느냐? 우리 집 창고에 가 보시오. 나리가 준 녹은 손도 대지 않았으니. (성삼문))
(네 이놈 박팽년! 너는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 내게 장계를 올리며 신이라 칭했던 것을 잊었느냐? 그런 적 없소이다. 조사해보니 ‘신(臣)’ 자가 들어갈 자리의 글씨는 모두 ‘거(巨)’자가 대신 쓰여 있었다나.)
신숙주는 성삼문과 절친한 친구였으나 세조의 측근이 된 신숙주는 국문을 담당하는 입장이었다. (옛날에 그대와 집현전에 있었을 때 세종대왕께서 상왕전하를 안고 걸으시며 하신 말씀을 다 잊었는가? ‘내가 죽거든 그대들이 이 아이를 잘 보살펴다오’라고 하신 당부를 정녕 잊었단 말이더냐?)
시종 당당한 성삼문을 부끄럽게 한 이는 동료인 유응부였다. (자고로 서생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들 하더니 과연 그렇더군. 그대들이 말려서 이 꼴을 당하세 되었다. 너희는 책을 읽었으되 꾀가 없으니 짐승과 마찬가지야.)
하위지 (반역죄라면 베면 그만이지 뭘 더 묻는게요?)
이개 (법전 어디에 인두로 지지는 형벌이 있소?)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고 박팽년은 고문으로 옥사했으며 성삼문 등 수십여 명은 능지처사된 뒤 3일 간 효수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우리는 ‘사육신’이라 부른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기도 한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으며 그렇게 명명한 까닭이다. 사육신이 충신의 대명사로 이름을 얻으면서 거기서 빠진 성승, 김문기, 권자신 등은 상대적으로 세인의 관심에서 밀려나기도 했지만, 현실의 패배자인 그들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부활했다.
한편 고발자인 정창손,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각각 영의정, 좌의정까지 이르렀다.
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고개 돌려 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가는 곳 주막 하나 없으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 밤 누구 집에 잘 것인가?
예정된 비극
단종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온 건 반 년이나 지나서였다. 이후 상왕을 내치라는 주장이 계속된다.
얼마 뒤 또 모호한 사건이 발생한다. 백성 김정수란 이가 예문제학 윤사윤에게 알리기를, (판돈녕 부사 송현수와 행돈녕부 판관 권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송현수는 단종의 부인 송씨의 아비이고 권완은 후궁 권씨의 아비이다. 백성 김정수가 어떤 이인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서 살게 하라!) 그 뒤 20여 일이나 지나서야 권완이 겨우 자복(?)했을 뿐 송현수는 끝내 부인하였다. 자복한 권완은 능지처사되고 송현수는 유배조치되었다.
단종을 영월로 내보낸 직후 세조는 의정부의 건의를 빌려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능도 개장하여 서인의 무덤으로 바꿔버린다.
다음 날엔 금성대군 이유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순흥부에 안치된 금성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지역의 향리들과 역사들을 포섭하고 순흥부사 이보흠을 반강제로 끌어들였다. 순흥부의 군사와 포섭한 역사들로 거병하고 상왕 복위를 주장하는 격문을 인근 고을에 돌려 참여를 촉구하면서 금성의 토지와 노비가 많은 안동으로 간다.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 관노의 고발로 들통나고 말았다.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라!)
‘화근’인 단종에 대해선 아무 말을 안 했다? 금성과 송현수를 사형에 처한 세조 3년(1457) 10월 21일자 《실록》엔 이렇게 다음 한 문장이 덧붙여져 있다. (노산군(단종)은 이(금성, 송현수의 죽음)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명백히 다른 기록이다.
단종이 처음 유배된 곳은 유명한 청령포. 우물을 파는 등 수선을 떨었지만 그곳에 머문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여름이어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며 영월 객사로 옮겨 살게 한데다 그 해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연산 때의 유학자인 음애 이자는 《음애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노산이 영월에 있다가 금성대군의 옥사를 듣고 자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실록》편찬자들은 모두 세조를 좇던 무리 아닌가?)
야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고는 줄을 창 밖으로 빼내 당기게 했다. 사약을 거부한 자살이었다. 즉위한 지 5년, 그때 나이 열입곱이었다.
전설 속으로
예로써 장사지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단종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는데 고을 향리인 호장 엄홍도가 거두어 장사지냈다. (옳은 일 하고 화를 입는 건 괜찮다.) 이는 중종조에 이르러 단종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로 하면서 무덤을 찾는 과정에 알려졌다. 오늘날처럼 능으로 단장된 것은 숙종 때의 일로 단종이란 묘호도 이때 올려졌다.
열입곱의 나이에 부모와 남편을 잃고 폐서인된 당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는 동대문 밖에 조그만 초가를 짓고 살았다. 그녀는 여든두 살까지 장수했다.
백성들은 단종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더러는 야사에 전하고 더러는 민간 속에 구전되어 전해졌는데 사실로 잘못 알려진 이야기들도 있다.
그 중에 하나,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를 했다 한다. (네 놈이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여야겠다.)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가 병을 앓다가 죽은 것은 단종이 죽은 것보다 시기적으로 한 달 넘게 앞서서였다.
신숙주 부인의 충의를 보여주는 다음의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성삼문 등이 죽은 날이다. (나는 당신이 늘 성학사(성삼문) 등과 가가이 지냈기에 오늘 그 분들과 함께 죽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통지가 오면 나도 따라 죽으려 하였는데 당신이 살아오시다뇨?) 변명을 하고 눈을 들어보니 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더라 하는 얘긴데 이 이야기는 이광수나 박종화의 소설에 그대로 수용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신숙주의 부인이 죽은 때는 1년도 더 전으로,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였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이 야사로, 전설로 전한다.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는 바람에 세조에게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는 얘기, 현덕왕후의 이장에 얽힌 전설들, 정순왕후가 영월 쪽을 보려 날마다 올랐다는 동망봉 전설, 부임하면 죽어나가곤 했다는 영월 부사 이야기, 단종이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는 등... 그렇게 단종은 전설의 세계로 들어가 백성들의 가슴속에 더 깊숙이 남게 되었다.
4. 세조의 치세
탑골공원 :: 탑골공원은 옛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다.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는 대규모 불사를 많이 벌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공을 기울인 것은 원각사 증건이었다. 팔각정 옆에 서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보인다.
강력한 왕권을 향해
대대적으로 불경을 간행하고 원각사를 창건하는 등 불교 중흥을 이룬 것을 놓고 세조의 죄책감과 속죄의식에 연관시켜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조의 성격이나 《실록》의 기록으로 본다면 과연 그가 죄책감으로 고통받았는지 의문이 간다.
불교에 관해서라면 이미 왕자 시절에 심취했던 바이고,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공공연히 자신은 호불의 군주라는 말도 했다. 죄책감보다는 왕이 되었다는 성취감과 제대로 한 번 해보리란 의욕이 그를 지배했다.
(삼공은 세세한 사무를 보지 않고 6경이 그 직무를 맡는 것이 옛 제도다. 이제부터 6조의 일은 직접 보고하라! (6조 직계제)) 이는 신권의 약화로 귀결될 게 뻔한 이치여서 오리혀 권한이 강화된 6조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는 개국한 이래 대소사를 모두 의정부로 하여금 의논토록 하였습니다. (의정부서사제)) 예조참판이었던 하위지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주나라 제도에 3공이 비록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총재가 겸임하여 다스렸습니다. 옛 제도를 따르소서.) (당장 저 하위지의 관을 벗겨라! 총재에게 위임한 건 훙(薨)했을 때의 제도다. 너는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내가 어려서 정사를 볼 수 없다고 여기느냐?) 그러고는 하위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가 의금부에 가두도록 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목을 베어 경계로 삼으리라!) 세종·문종은 어려서 의정부 서사제를 했던가? 그러나 누구도 그런 항변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다만 하위지의 구명을 호소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6조 직계제는 부활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들이 집현전 출신이라는 게 직접적 원인이 되긴 했지만 집현전을 폐지해버린 것은 효율을 중시하는 세조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리라. 유사한 이유로 경연도 폐지해 버렸다.
세조 4년 2월의 일이다. 사정전에서 공신들을 모아 잔치하는데 정인지가 한마디 했다. (성상께오선 이미 법화경 수백 벌과 대장경 오십 벌을 인쇄토록 하셨는데 이제 또 《석보》를 간행케 하시니 이는 옳지 못한... 오늘 잔치는 끝내도록 하라!) 다음 날 정인지에게 묻기를 (내가 암자를 세우고 불경을 인쇄할 종이를 조달할 때는 아무 말 않더니, 어제 나를 욕보인 것은 무슨 때문이오? 어제 일은 취중이라 기억이 나질 않사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취하지 않았으니 답하오. 부처의 도는 어떠하고 유학의 도는 어떠하오? 임금이 묻는 말에 대답을 않다니 불경하다.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토록 하라.) 그리고 이틀 뒤 풀어주었다. 영의정을 거친 최고 원로이자 공신이 술자리에서의 의견 개진을 이유로 갇혀 국문받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동료 대신들은 물론 언론 역할을 하는 대간들조차 입도 벙긋 못했다. 오히려 석방조치에 대해 앞다투어 부당함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년에 세종이 불사를 자주 일으키자 신하들은 끈질기게 반대했다. 대간은 물론 전·현직 대신들과 종친들까지 나서서 몇 달이고 강경히 반대했다. 연좌 농성에다 사직서 제출 등도 빈번했다. 그러나 세조 시절엔 불경 간행, 절과 암자의 신축·개축이 훨씬 많았지만 누구도 비판하지 못했다. 원각사를 세울 때엔 민가 2백여 채가 헐리고 청기와 8만 장이 소요되었으며, 종을 주조하는 데엔 4만 근의 구리가 쓰였다. 신하들의 반응은 비판 대신 이런 것이었다. (경하드립니다. 원각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뻗쳤다 하옵니다.)
세조식 리더십
모든 권한을 한 손에 틀어쥔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였음에도 세조와 신하들의 관계는 의외로 거리가 없었다. 그 비결은 잦은 술자리에 있었다. 세조는 조참 등 신하들과의 회동이 끝나면 언제나 크고 작은 술자리를 열었다. 술자리는 군신간의 거리를 좁혀주는 자리였을 뿐 아니라 많은 것이 결정되는 정치의 장이기도 했다. 뽐내기를 좋아한 만큼이나 신하들을 칭찬함에도 인색함이 없었다. 물론 이런 칭찬들은 어디까지나 지위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세조가 최고라는 전제가 성립된 아래에서의 얘기다.
평나도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잔치를 열었는데, 평양, 개성, 한양에 대한 풍수상의 의견이 오갔다. (평양은 주산이 미약하고 개성은 남산이 너무 멀어 한양만 못합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풍수학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간다면 전하께선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 (정인지)) 세조는 풍수에 관한 한 스스로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세종, 형 문종, 아들 의경세자의 장례에 두루 관여했던 터였다. (경은 무슨 소견이 남보다 월등해서 교만하게 남을 업신여기고 깔보는가? 경박하기가 당대 제일이다! 경이 세종조에 비록 총애를 받았다지만 나는 단지 옛 원로로 여길 뿐이다. 죄를 주어 마땅하나 취중실수라 참는다.)
당대 최고의 학자란 명성과 함께 영의정을 지냈고 치부 또한 잘해 조선 4대 부호에 들었다는 정인지, 그러나 술에 취하면 긴자잉 풀려버리는 그는 세조의 술자리 정치와는 잘 안 맞았다. 세조를 ‘너’라고 불러 분노를 산 적이 있고 세조 말년엔 ‘태상’이라 불러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다른 이였다면 벌서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르지만 정인지는 끝까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술자리에선 종종 강연도 행해졌다. 본인은 경연도 폐지했지만 신하들, 특히 성균관 학생들과 무장들에겐 끊임없이 공부를 권했다.
술자리에선 가끔 인사도 행해졌다. 어느 날의 술자리에서 이조참의 어효첨이 세조의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마시고도 전혀 실수를 않는군. 이보게 이참, 그대를 판서로 삼겠다. 맡고 싶은 부서가 있으면 말하라.) 참의에서 참판을 건너뛰고 판서가 된다는 건 파격적인 승진이다. (명하여 신을 판서로 삼으신다면 명에 따를 뿐이옵니다. 신하된 자가 어찌 갈 곳을 정할 수 있겠나이까? 과연! 경을 이조판서에 제수하겠노라.) 이런 즉흥적인 인사 이외에도 사실 세조의 인사는 아버지 세종의 인사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정승을 중시한 세종은 한 번 검증된 인물이라면 죽는 날가지 정승으로 썼지만 세조는 길게는 3~4년, 쉴 새 없이 갈아치웠다.
중전의 생일을 하례하는 잔치가 강녕전에서 있었는데, 영의정 강맹경, 우의정 권람이 입바른 소리를 했다. (전하! 풍악까지 울리며 놀자니 소신들의 마음이 편치 않사옵니다. 풍악을 올리며 노는 것은 행한 지 오래된 일인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오? 그럼 그동안 나를 그르게 여기고 있었단 얘긴데, 그런 거요?) 그 즉시 둘을 파직해버리니 영의정, 우의정에 임명된지 5일 만이었다.
그런데 기록은 곧 깨졌다. (신숙주를 영의정에, 이인손을 우의정에 제수한다. 단, 강맹경, 권람에게 봉록은 전과 같이 지급하라.)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대궐 밖에 나와 사례를 표했고 소식을 들은 세조는 그들을 대궐로 불러 위로한 뒤 원직 복직시켜주었다. 이에 영의정 신숙주는 좌의정으로 돌아가고 우의정 이인손은 4일 만에 자리를 비워야 했던 것.
정승 인사만이 아니었다. 북방의 방어를 맡는 직책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교체가 빨랐다. 그런 만큼 주요 재상들이 40대인 젊은 내각이 유지되었다. (왕권 위축 우려 견제)
세조 시대의 치적들
세조는 상당히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준 임금이다. 기생관도 독특해서 기생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두텁고 하얗게 화장하게 했다. 그가 아낀 여인은 오직 한 사람.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뿐이었다. 궁중의 연회나 온천행, 활쏘기 구경 등 어디든 부인을 대동하길 좋아했다.
세조는 또한 검소했다. 자신의 생활은 물론 나라 살림에도 낭비가 없도록 조치했다.
신하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그의 다음 목표는 중앙집권의 강화. 태종 때에 잠시 시행했던 호패법을 부활시켰고 (재질, 색깔 만으로 지위, 신분 구별이 가능. 뒷 면에 주소, 호적, 인상착의 등을 기록) (거주 이전을 어렵게 하고 각종 부역과 세금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속셈이지. 백성들의 반발로 별 성과는 없었다.)
북방의 경우 지역 유력자를 수령으로 삼던 관례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가 하면 세종 때의 사민정책도 계속해 나갔다.
산재한 각종 법령을 정비하여 체계화하는 데도 힘을 쏟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의 총결산이라 할 《경국대전》은 세조 때에 거의 완성되었으나 검토가 끝난 〈호전〉과 〈형전〉만 반포되고 나머지는 수정, 첨삭을 거듭한 끝에 성종 때에 최종 반포)
우리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동국통감》(고대사에서 고려사까지 수록. 성종 때에 완성), 《국조보감》등을 편찬케 했고 《동국지도》를 제작했다.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는 아예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으로 인쇄하게도 했다.
군사부문의 편제가 완성된 것도 이때의 일.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을 5위로 나누었으면 (지방군은) 전국에 55개의 거진(巨陳)을 두어 도절제사의 지휘 아래 자체 방어를 맡도록 진관체제가 마련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일언지하에 세종 때에 제정된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해버린다. 몇 해 뒤에 다시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었다. (관찰사에게 징계를 맡기면 될 것이옵니다. 징계가 제대로 되지 않을 시엔 관찰사에게 책임을 지우소서. 수령은 여럿이고 관찰사는 한 사람인데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느냐? 여러 말 말라.) 세조는 또 지속적으로 분대를 파견하여 수령들의 비리를 감찰하였다. (분대가 돌아온 곳의 수령이나 아전들이 불리한 증언을 한 백성들에게 보복을 가할지 모르니 암행규찰단을 따로 파견해야겠다.)
분대(分臺) :: 분사헌부와 분사간원, 즉 분(分)대간을 말한다. 이때 이들이 어사로 파견되었다.
세조 11년, 세조가 온양 온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와 도사 강안중은 백성들에게 규정 외로 곡물을 거두어서 임금을 따라온 의정부, 6조, 승정원의 대신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이는 예전부터 있어온 관례로, 세종도 온양에 왔을 때 그런 정보를 듣고 대노했었다. 그러나 관례란 걸 알고는 문제 삼지 않았는데... 세조는 달랐다. 철저히 조사하고 난 뒤 뇌물을 건넨 김진지와 강안중을 참형에 처하고 이어 8도 관찰사에게 글을 내려 엄중 경고했다. (뇌물을 거부한 단 한 사람 구치관)
부국강병을 꿈꾸며
세조 시대에도 외교 주 대상은 중국과 북방의 야인이었다. 야인 부족의 추장들이 복종의 뜻으로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하면 이에 답례품을 내리고 적당히 벼슬도 주고 하는 것. 그러나 조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방에서의 소요는 계속되었다.
(소요의 원인은 저들끼리의 알력이오. 경이 가서 저들을 화해시키도록 하오.) 특명을 받고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로 떠난 신숙주가 각 부족의 추장들을 한데 불러모아 잔치를 베풀고 화해를 시켰는데 분란의 주역 중 하나인 추장 낭발아한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종의 인질로 한양에 와 있던 낭발아한의 아들 낭이승거. (신병 치료를 위해 길주 온천에 다녀오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소서.) 선물까지 주며 길주행을 승낙했는데 낭이승거의 길주행은 아비인 낭발아한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란 믿을 만한 정보가 들어왔다. 화가 난 세조는 낭발아한과 낭이승거는 물론 그 일족까지 처형해버린다. 그러자 낭발아한의 살아남은 아들 등 일족들은 반조선 감정을 자극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변경을 기습하기에 이르렀다.
세조는 정벌을 겸심하고 다시 신숙주를 도체찰사로 삼아 보낸다. 그런데 두만강 건너에 명나라 사신이 조선과 야인 간의 갈등 조사차 와 있는 상황이어서 대신들이 우려를 표명했다. (황제께서 화해시키려 사신을 보냈는데 군사를 일으키는 건 온당치 못하옵니다.) 그러나 세조도 신숙주도 완강했다.
이때 명 사신은 무척 곤궁한 처지에 있었다. 거처는 야인의 초가였고 물자도 부족하고 돌아갈 길도 걱정스럽기만 했다. 회령절제사 이극배는 성안에 맞아들이지 않았고 세조의 명이라며 조선의 안길을 통해 요동으로 가게 해달라는 부탁도 거절했다. 명 사신이 길을 떠나자 신숙주는 행동을 개시했다. 적 430여 명을 죽이고 900여 채의 집을 불태웠으며 우마 1000여 마리를 확보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세조 6년 초가을의 일이었다.
신숙주와 한명회
세조와 신숙주, 한명회가 술자리를 같이했다.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비틀고는 자신에게도 해 보라 시켰고 신숙주는 진짜로 힘을 다해 팔을 비틀었다. 술자리가 끝나 각자 집으로 갔는데 (신대감은 평소 아무리 취해도 조금만 깨면 반드시 일어나 책을 보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 밤엔 그러면 안 되니 내 말이라 하고 그만 두십사 해라.) 세조는 누워 생각해보니 괘씸했다. (가서 신숙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보고 오너라. 불을 끄고 자고 있었사옵니다.) 하여 신숙주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야사의 한 토막.
신숙주와 한명회는 세조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들이다. 세조가 즉위 초에 말하기를 (한명회는 나의 장량! 신숙주는 나의 위징!) 장량이 한 고조를 도와 천하를 얻게 해준 전략가의 대명사라면 위징은 당 태종을 도와 ‘정관의 치’를 이끈 명재상의 상징인 인물.
신숙주는 학식, 업무능력, 정치감각이 모두 출중했다. 세조 집권 후 승정원, 예문관, 병조, 성균관 등을 두루 거치더니 마흔한 살의 나이에 백관의 꿈인 정승이 된다. 신숙주는 뒷날 정인지나 최항, 정창손 등의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사림과 민간의 집중 포화 대상이 된다. (녹두나물 = 숙주나물) 신숙주는 세종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신장의 아들로 호는 보한재다. 초시·복시는 장원으로 문과는 3등으로 급제했다. 집현전 학사가 되어 《훈민정음해례본》작업에 참여했고 운서인《동국정운》편찬의 핵심필자였다. 이 과정에서 성삼문과 함께 요동을 열세 차례나 드나든 얘기는 유명하다. 그곳에 명나라의 유명한 음운학자인 황찬이 귀양 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진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서장관으로 일본엘 갔다. 이르는 곳마다 그의 시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쉴 새 없이 병풍, 족자 등을 써주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엔 대마도주와 담판을 벌였다. 도주가 조선에 보내는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제한하지 말자고 고집하자 신숙주가 설득하여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께 돌아갈 것이지만 정해지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도주에게 부탁을 하겠소이까?) 하여 조약이 체결되니 ‘계해약조’가 그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풍랑이 거셌다. 당시 배에는 왜구들이 납치해 갔던 백성들이 많았다. (왜인의 아기를 가진 여자가 있습니다. 바다로 내던져 용왕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만 두어라!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해서야 되겠느냐?)
중시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세조가 즉위하자 이를 알리는 주문사로 또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다. 함길도 체찰사를 맡아 야인을 정벌하기도 했는데, 기본작전을 세우고 장수들을 불러 반복해서 지시했지만 몇 년째 함길도 절제사를 맡고 있는 양정은 신숙주를 믿지 못했다. 명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했다가 큰 손실을 입는다.
돌아온 뒤에도 북방과 관련한 최고 전문가로서 일만 생기면 세조는 신숙주를 찾았다. 중국과의 외교문서는 거의 그의 손을 거쳤고 과거시험의 단골 감독관이기도 했다. 마흔여섯의 창창한 나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올랐다.
권람과 한명회는 세조의 집권을 가능케 한 쌍두마차. 그러나 권람은 잦은 병치레와 눈치 없는 발언으로 인해 신숙주와 한명회 급으로 대우받지는 못했다. 한명회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신숙주의 북정 때엔 평안도 체찰사가 되어 혹시라도 있을 서북쪽에서의 침공을 대비했고 신숙주가 돌아오자 함길도·강원도 체찰사를 맡아 영북진을 재설치하고 2차 북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마흔여섯 살에 정승이 되었고 세자의 장인이 되었다. 세조는 공교롭게도 며느리를 모두 청주 한씨가에서 골랐다. 세조의 맏며느리로 의경세자의 배필은 청주 한씨 한확의 딸, 뒷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다. 둘째인 세자(예종)의 배필로는 역시 청주 한씨인 한명회의 딸을 고른 것. 세자의 장인이 됨으로써 다음 대까지 영화를 보장받은 한명회, 그러나 세자빈 한씨는 1년 뒤 원손인 인성대군을 낳은 뒤 후유증으로 죽고 인성대군마저 2년 뒤 죽고 말았다. 이에 세조는 세자의 후비 중에서 새 세자빈을 골랐는데 청추 한 씨 한백년의 딸이다. 한명회의 둘째딸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과 혼인한다. 왕위와는 인연이 없을 것으로 보였던 자을산군은 예종이 요절하면서 형을 제치고 보위를 잇게 되니 곧 성종이다.
5. 이루지 못한 꿈
광릉 ::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곳이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곽과 석실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최초의 동역이강능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이후의 조선 왕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역이강능이란 동역(같은 영역, 즉 한 능호)안에 왕과 왕비가 독립된 봉분으로 조성된 능을 말한다.
공신의 나라
말년에 세조가 온양 행궁에 가 있을 때였다. 윤덕녕, 나계문이란 자의 아내라 했다. (제 남편은 고을 유향소의 업무를 맡아 하였는데...) 고을 출신인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유향소에선 선물로 노비 두 명을 바쳤다. 그런데 홍윤성은 그 노비들이 튼실하지 않다며 노비를 고른 담당자인 나계문을 불러다 초죽음이 될 정도로 곤장을 쳤는가 하면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나계문이 자기 땅에 수십 년 간 가꾸어 온 나무를 베어가 버리기도 했다. 급기야는 홍윤성의 집 여종의 남편인 김석을산이란 자가 시비를 걸어와서는 엄동설한 발가벗겨서 집단구타를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 그런데 홍윤성의 위세를 두려워한 관아는 김석을산을 불문에 붙이고 가담자 세 명만 구금했을 뿐 아니라 그들마저도 홍윤성 집 종들이 몰려와 탈옥시키도록 방치했다. 이에 아내 윤덕녕과 친지들은 계속 진정을 내고 상급 관아에 고발했지만 오히려 윤덕녕 일가 사람들을 구속해버렸다. 합법적으로 억울함을 풀 길이 없음을 안 윤덕녕은 며칠을 걸어 행궁에 와서 직접 임금에게 고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관련자들이 줄줄이 붙들려 와 조사를 받고 벌을 받았다. (김석을산을 능지처사하고 폭행 가담자 세 명은 목을 베어라. 충청 관찰사는 고신을 거두고 관련 아전들은 곤장 백 대, 유형 삼천 리에 처한다.) 반명 윤덕녕은 상을 받았다. 구속되었던 친지들이 풀려났음은 물론이다. 이후 행궁 주변엔 날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백여 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의 발단이 된 홍윤성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 조사 과정에 홍윤성의 집안엔 군역을 피해 도망한 이들이 상당수 숨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홍윤성은 용서받았다. 이 외에도 홍윤성은 여러 번 패악을 저질렀다. 오죽하면 야사에서 그를 일러 살인마 정승이라 했을까? 그런데도 번번이 용서받았다. 바로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모두 세 차례나 공신을 책봉했다. (계유정난을 도운 정난공신, 즉위를 도운 좌익공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적개공신) 계속된 공신 책봉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특권층이 날로 확대되자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바닥나고 말아서 이른바 직전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기로 한다.) 세조는 또한 2000명이 넘는 원종공신을 책봉했다. 이들에겐 비록 토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벼슬을 한 직급 올려주고 자손에게 음직을 주는 등의 특권이 부여되었다.
세조의 공신 사랑은 유별났다. 어느 날 공신들과의 술자리, 권람이 세조를 한 고조에 비유하여 찬양하는 시를 지어바쳤는데, (이 시는 나에 대한 모독이다! 한 고조는 공신인 한신, 영포, 팽월 등을 모조리 제거한 인물로 배울 게 없는 위인 아닌가? 나는 끝까지 공신들을 보호할 것이다! 사직과 관련한 일이 아니면 공신을 죄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세조 12년(1466) 공신에 의한 하야 권유 사건이 발생했다. (10년 넘게 변방에서 고생한 양정의 귀환을 환영하고 또 위로하는 자리이니 모두 마음껏 마시라.) 계유정난 시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찌른 그 양정이다. 이즈음 세조는 술자리에서 ‘논쟁 공연’을 즐겼다. 단골 배우는 최호원, 안효례로 타고난 입심들이다. 그들에게 주제를 주어 논쟁을 시키는데 이론적인 논쟁이 아니라 누구의 입심이 더 센지를 겨루는 입씨름 공연이었다. 이날도 술이 오르자 그들에게 논쟁을 시켰는데 서로가 신경전을 펴며 먼저 입을 데려 하지 않았다. (임금이 명하는데 대답하지 않는 신하가 어디 있단 말이냐? 저 둘을 당장 하옥하라.) 술자리가 썰렁해졌는데 (전하께오선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되셨으니 그만 한가하게 지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결국 양정은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참수된다. 《실록》의 사관은 오랜 변방에 두고 불러주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썼다. 그보다는 세조와 한양의 대신들이 노는 꼬락서니에 순간적으로 속이 뒤틀렸던 게 아니었나 싶다.
이시애의 난
함길도의 오랜 지배자들인 토호들, 사병을 거느려 자체 방어를 하면서 군림해 왔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래 사병 해체 작업이 진행되면서 크게 힘을 잃은 형편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들의 자제를 고을의 수령으로 삼아 지배권을 유지시켜준 것인데, 세조가 집권하면서 이 또한 폐지되고 말았다. 토호들의 불만이 쌓여 가는데 호패법이 실시되면서 백성들도 자극됐다. 남도에서 이주해 온 이들도 불안했다. 여기에 관리들의 학정이 더 해졌다.
태조의 친구인 이원경의 손자로 길주의 대표적 토호 이시애. 미리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민심을 뒤흔든 다음 순찰차 길주에 들른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는 것으로 난을 시작했다. 함길도 21개 군현 중 남쪽 7개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고을 수령들이 피살되고 곧바로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그 중엔 이시애가 올린 보고도 있었다. (역적 강효문이 신숙주, 한명회, 노사신, 김국광 등의 대신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하였길래....) 이시애의 술수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신숙주와 한명회가 강효문과 가까운 것은 사실이고 또한 둘 모두 함길도 체찰사를 지냈지 않은가?)
고민 끝에 세조는 깜짝 인사를 단행한다. 1년 전에야 무과에 급제한 스물여섯의 조카 구성군 준을 총사령관 격인 병마도총사로 삼은 것이다. 다만 그 휘하에 북방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 강순을 두어 실전을 지휘하게 했다. (신숙주와 그 아들들, 한명회의 아들들을 의금부에 가두고 몸이 아픈 한명회는 자택에 연금시켜라.) (신 대감 등의 칼이 너무 헐겁게 채워져 있었사옵니다.) 담당관은 극형에 처해진다. 도승지를 역임한 신숙주의 아들 신면은 이때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함흥으로 떠났는데 이미 반군에게 넘어간 함흥 본영의 관원들에게 살해되고 만 것. 신숙주 등이 풀려난 것은 보름도 더 지나서였다. (신숙주와 한명회를 가둔 것은 무례했기 때문이다. 숙주는 노골적으로 나의 처리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곤 했고 한명회는 수령을 임명할 때면 반드시 자기가 추천한 사람으로 앉히도록 고집하곤 했다.) 이시애에게 놀아나 구속했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꺼낸 궁생한 변명이다. 그러나 세조는 풀려난 그들을 마주하자 이내 자기 잘못을 시인했다.
병마도통사를 맡은 구성군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열흘 넘게 안전한 지대인 회양에 머무르다가 응원병이 이르러서야 철령을 넘었다. 계속적인 지원 요청도 빠뜨리지 않았다. 함흥에 진주한 관군은 선봉대를 보내 북청을 점령한 뒤 서둘러 목책을 설치하여 반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반군답지 않게 이시애군은 전면적인 포위공격전으로 나왔다. 강순은 말의 두 발을 묶어버리면서 방어에만 집중할 것을 분명히 주지시켰다. 격렬한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날이 새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관군이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 끝장인가 싶었는데, 이시애측에서 먼저 휴전을 제의해 왔다. (사실 나는 반역할 마음이 없는데 조정에서 역적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공격을 멈추시면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북청전투는 끝났고 이 전투 이후, 관군은 응원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갈수록 힘이 커졌지만 다 이긴 싸움을 놓친 반군엔 작은 동요와 함께 이탈자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공격전으로 흐름을 바꿔놓으리라 생각하고 계획을 수립했는데 정찰나갔던 척후병이 관군에게 붙들리면서 작전계획이 누설되고 말았다. 반군의 거점들을 하나씩 깨면서 (이 일은 남이, 어유소의 특공대가 맡았다.) 압박해 오는 관군.
사실 이시애 반군은 출발부터 명분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고 목표도 모호했다. 이시애는 시종일관 스스로 함길도 절도사임을 자처했고 역적은 강효문, 신숙주 일당이란 주장을 폈다. 사실 이시애가 바랐던 것은 요런 정도였다. (예전처럼 우리 토호 출신으로 수령을 삼아달라 이거외다.) 한때 2만여 명에 달했던 이시애군은 거짓말처럼 와해되어버렸다. 이시애는 길주로 도망쳤는데 뒤쫓아온 옛 부하들에게 생포되었다. 이시애 형제는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형장에서 구성군 준의 명에 의해 능지처참되었다. 이로써 3개월 가까이 조선을 진동시킨 이시애 난은 끝났다.
오랫동안 조선의 서북 방면에서 세력을 이루고 한편으론 조선에 복종하는 듯하면서 각종 소란을 일으켜 온 이만주! 명나라가 북원 공략에 집중하는 사이 요동을 노렸는데 이것이 명의 분노를 샀다. 이에 이시애난 진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강순, 남이, 어유소가 출정했다. 협공하는 흉내만 내고 오라 했는데... 조선군이 오리란 예상을 못했는지 이만주와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고스란히 근거지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하여 태종 이래 조선과 명나라의 골칫거리였던 건주 여진의 추장 이만주 일당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
퇴장을 위한 준비
이시애의 난은 세조에게 공신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공신드르이 힘이 너무 큰 것은 엄연한 사실이야. 적개공신으로 옛 공신을 견제하자!) 적개공신은 이시애의 난 진압으로 공신에 책봉된 이들을 말하는데 구성군, 남이 같은 인척들과 강순, 어유소, 유자광 같은 무장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구성군에 대한 총애는 각별해서 남이의 질투를 사기까지 했다.
스물여덟 살의 구성군과 남이, (영의정 구성군, 오위도총관 남이) 남이는 한 달 뒤 병조판서로 옮긴다. 그런데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 (구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키워놓은 신공신이 오히려 세자에게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질 않은가? 구공신과 신공신이 권력투쟁을 하게 되면 세자가 조정해낼 수 있을까? 구공신 그룹은 세자의 힘을 약화시킬 우려는 있어도 세자의 자리를 위협하진 않을 것이야. 더욱이 한명회는 세자의 장인 아닌가?) 장고 끝에 다시 구공신의 손을 들어주는 원상제란 해법을 내놓는다. (17명의 대신들을 원상에 임한다. 원상들은 4교대로 돌아가며 세자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고 처결하라.)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보위를 세자에게 넘겨준다. 예종의 즉위식이 있은 다음 날, 세조는 거짓말같이 세상을 떴다. 재위 13년 3개월, 향년 52세였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곽과 석실은 만들지 않도록 하라) ...라는 유언을 남겨 과거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력과 비용으로 산릉을 조성할 수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광릉이 세조가 묻힌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