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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정치 성의 권리Books 2020. 4. 2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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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정치 성의 권리
‘성’에 관한 담론들을 새롭게 이야기하다!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하이브리드 총서」제 11권『성의 정치 성의 권리』. 이 총서는 지난 2~3년간 계간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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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착
- mtf 트랜스젠더
- 젠더가 권력관계의 문제라면 섹슈얼리티는 주체와 권력,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차이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 한편에는 행위자 없는 행위를 욕망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여 현실 속 이야기의 축을 바꾸고 있고 또 괴물을 창조하여 치료와 관리를 주장하며 허구의 안정망으로 세상을 기만한다.
- 여자들의 대표라는 말에 여성운동가보다
- 여성운동가보다는 미스코리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여성이라는 성역할을 거부하면서도 여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또 이를 대표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 2012년 19대 국회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5.7%이다. 1998년 3.6%
- 한국의 경우 2000년 2월에 정당법에 여성공천 할당에 대해 명시한 이후에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0%를 넘어설 수 있었다.
- 남자 대표가 남자만을 대표하지 않듯이, 여자 대표가 여자만을 대표하는 것에 그쳐서는 여성의 대표성이 확장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여자라면 여자를 찍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 여성의 대표성을 확장하기보
- 확장하기보다는 제한하는 구호이다.
- 대표되는 여자들과 대표하는 여자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어머니나 아내, 딸로 존재할 때 그녀는 남성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지 여자 개인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대표성 문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해왔던 남성 사회의 힘에 균열을 내고, 여자를 인간(개인)으로 그리고 다시 여성(집단)으로
- 호명하는 (여성) 사회Women’s society의 기획과 함께할 때만이 ‘변화’ 혹은 ‘혁신’이 가능하다.
- 여의사, 여교수, 여공, 여류작가 등 직업군 앞에 여성을
- 붙이는 습관은 여성이 그 집단의 보편적 형태가 아니라 예외라고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환기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메모여교사는?
- 여자라는 점이 강조되면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게 되고, 여자라는 점이 지워지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차이가 삭제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 배제를 폭로하고 포함을 요구하는 정체성의 정치학은 역사적 인과관계 속에서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시작된다.
- 대의제에서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에서 강조하는 차이를 넘어서,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가진 존재로 재현되어야 한다.
- 1848년 12월, 프랑스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 그러나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대중들은 쟁쟁한 혁명파의 지도자들은 물론 정통왕정파를 모두 물리치고 나폴레옹의 후예를 자처하며 도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분할지 농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는 군사
-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을 황제로 명명한, 가장 반혁명적인 인물로 악명을 떨친다.
- 마르크스는 국민들이 종종 자신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때로는 위임된 권력의 한계를 확장하여 독재를 허용하기도 하는 데에는 보통선거제의 대표-표상 시스템
- 이 대표되는 자와 대표하는 자 사이의 구체적인 연계를
- 단절하는 내용적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가리타니 고진은 대의제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은 결코 왕정시대의 왕이나 황제를 대체할 수 없는 ‘구멍’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대의제 하에서의 대표-표상 시스템에서 계급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 참칭
- 봉건제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시대에 지대를 지불하는 자기 소유의 농지를 소유한 분할지 농민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자본가적 이해를, 지대를 지불한다는 측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대에 대한 세금 감면을 찬성하면서 동시에 토지 소유의 안
- 안정성을 위해 (세금을 많이 쓰는) 강력한 행정권력을 원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바로 이 틈새에서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가 대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 “이들 사이에 지방적 연계만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 간의 이해의 동질성이 그들 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전국적 결합, 정치조직 등을 산출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건 국민공회를 통해서건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 계급의 이해를
- 관철시켜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 이 선거에서 프랑스 여성들은 참정권을 부여받지 못했다. 국민들의 절반 이상은 대의제 자체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대표되는 자와 대표하는 자는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동등한 추상한 개인이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를
- 대표했지만, 그 역은 성립할 수 없었다.
-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은 공통된 이유는 사실상 여성들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세대주의 가족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여자는 여자를 찍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은 가족 내 여성들과 가족 밖 여성들이 모두 대표될 수 없는 상태였던 당대의 역
- 모두 대표될 수 없는 상태였던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몇몇 여성 정치인들의 성공이 여성의 대표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 추상적 개인으로 인지되지 않고 여성 집단의 범주로서 이해되는 상황에서 대표로 출마하는 여성들은 특수하고도 예외적인 여성으로
- 취급되는 징표화의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징표화의 위험성에 대해 “하나의 징표token로서 비추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침묵당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최초의 여성이 징표적 대표에 머물러 기존의 규칙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최초의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은 계속 최소한도로 좁혀지고, 자리에 일부 특권층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앉게 되면서 공적 의미를 점차 상실한다.
- 이 예외적인 인물들은 여성이라는 성별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남성 중심적인 정당정치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싸워왔던 여성들이다. 이들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능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다져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이
-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일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 징표적 대표에 머무를 수도 없고, 이중 구속도 통과해야 하며, 평범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평범한 보통 여성들을 대변해야
- 수잔나 D. 월터스Suzanna Danuta Walters는 “더 많은 여성, 더 나은 이미지가 우리의 문화적 지평을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가부장적 시각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그러한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데 관여한 의미화 과정의 심층적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
- “서민들의 마음을 1%의 특권층이 어떻게 알겠어”와 유사한 형식으로 발화되는 “저 잘난 여자들이 우리 같은 보통 여자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와 같은 말은 대의제의 대표-표상 시스템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를 노출시킨다.
- 뉴마미즘New Momism
- 성차를 부인하면 여성이 사라지고, 여성을 강조하면 다시 성차에 갇히는 역설적인 상황
- ‘성평등 할당제Gender Quota-System’
- 세계 최초로 여성할당제를 실시한 국가인 핀란드는 1907년에 치러진 최초의 보통선거에서 “여성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여성”이라는 슬로건으로 10% 여성 의원 할당제를 실시한다. 이후 점진적으로 여성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1993년에는 40% 성평등 할당제를 도입하
- 도입하였고, 2010년에는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공기업의 이사직에도 최소 40% 이상의 여성들이 배치되도록 법안을 개정했다.
- 스웨덴의 정치학자 드루드 달럽Drude Dahlerup은 1988년 여성이 상징적 존재에 머무르
- 머무르지 않으려면 집단 내에 일정 정도 이상의 수(최소 30%)가 확보되어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임계 수치Critical Mas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 북유럽 및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여성할당제가 보편적 대표성에 대한 성별 고려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것이었다면, 미국에서의 할당제는 유색인종에 대한 ‘우대정책’의 일환으로 1961년 케네디 정부에서 고안한 정책이었다.
- 여성 친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 중 하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했으나 여성들의 참정권은 유보했다. 1849년에는 잔느 드로앵Jeanne Deroin이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입법부의 의석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1880년 위베르틴 오클레르Hubertine Auclert는 도지사에게 “투표권이 없다면 세금 납부도 안 하겠다”라는 도전적인 편지를 보내고 보통선거
- 보통선거제도에 여성이 완전히 접근할 것을 요구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 이후 1919년 1차 세계대전 후 잠시 하원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이 역시 부결되었다.
- 1944년 드골 정부에 의해서 가까스로 여성의 투표권이 허용되었지만, 프랑스의 여성 의원 비율은 1946년 6.8%,
- 1958년 1.5%, 1978년 3.7%, 1993년 6%로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 할당제와 같이 특수집단을 특별 보호하는 권력 배분의 정치는 프랑스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 추상성이라는 것은
- 특수하고 구체적인 사물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전형성typicality을 기반으로 형성되지만, 추상성은 전형성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전형성이 차이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전형화stereotype의 위기를 내포한 개념이라면, 추상성은 언제나 이미 드러난 과거 시점의 전형성에 덧붙여 아직 오지 않은 잠재성을 포함하여 구성되기 때문에 새로운 보편성을 생성할 수 있다.
- 실비안느 아가젠스키Sylviane Agacinski는 1998년 출간된 『성의 정치』에서 추상적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남성 편향을 깨기 위해서는 ‘혼성mixité(믹시떼)’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모든 사람을 추상적 개인으로 동등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공화주의는 매우 아름답게 들
-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남성의 권력 독점을 유지하는 술책이며 남성 중심주의는 전적으로 남성적 인간성 속에서 모든 인간성을 보며 그 나머지를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반드시 하나가 둘로 이어져야 한다. ‘둘’은 복수로, 수천으로, 수만으로 열린 길이다. 말하자면 둘은 첫 번째의 복수이며, 열림이며, 탄생”
- 아가젠스키는 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리의 보편성만을 설명했을 뿐 차이화된 성차의 추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시 이성애에 기반한 문화적 전형성으로밖에 답하지 못했다. 성차로 분리된 여자와 남자를 추상적 개인이라는 하나의 기표작용을 하는 총체성으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이성애
- 경험은 문화적으로 보편적이며 생명 탄생에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계기로서 본질화된다. 따라서 ‘혼성’은 결코 새로운 보편주의적 주장이 될 수 없었다.
- ‘이성애적 커플의 상보성’의 문화적 편재遍在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각인시키면서 입양, 한부모 가정, 동성 커플, 대리모 등 비전형적이고 비이성애적인 모든 관계는 보편성을 상실한 상태로
- 간주할 위험이 있었다.
- 2000년 6월 ‘남녀동수’ 법이 마침내 통과되는데, 이 법은 추상적 개인으로서 여성의 대표성을 획득하려는
-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보호주의적 ‘할당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즉 배제의 근원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배제라는 현재의 차별적 사실에 입각해서 단순하게 여성들을 더 포함하는 형태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해부학적 성차와 문화적 성차를 각각 섹스/젠더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페미니즘 비판
-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는 (어머니와의) ‘분리’, (어머니의) ‘상실’, 그리고 거세 공포와 남근 선망이라는
- 상실의 ‘수용’이라는 도식으로 성차를 가장 근원적인 차이로 공식화한다.
-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공동체의 아이러니이며, 스피노자의 표현대로라면 여성은 그 유혹적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근원적으로 배제된다.
- 인정투쟁
-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범주로서 민족과 계급이 사고되는 것과는 달리, 성차는 주체 구성 과정의 ‘결여’라는 형식적 차원, 즉 유사-초월적이거나 근원적인 토대로서 인식되어온 경향이 있다.
- ‘남녀동수’는 민주주의에서 차별되고 배제되었던 집단에 더 많은 기회와 완전한 평등을 추구
- 집단에 더 많은 기회와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려는 기획으로 이해되었고, ‘성차’는 그러한 정치적 차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보편적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가젠스키가 ‘남녀동수’를 남녀의 분리에 입각한 ‘혼성’으로 재정의하면서 차츰 성차 문제는 차별의 시정과 권력의 공유에 대한 문제에서 성차 자체의 보편적 ‘조건’을 증명하는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 이후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연대 협약과 관련된 논쟁에서 ‘보편적 토대’로서의 성차는 명백하게 이성애적 상보성을 의미하는
- 것으로 동성 커플들이 보편적 결혼 제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 이성애 중심적인 성차에 대한 이해는 동성애를 특수하고 예외적이며 비생산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즉, 동성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타자성alterity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추상적 자기 초월 능력을 방해하는 욕정에 불과하다거나, 동성 커플들은 분리에 기반을 둔 상보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할 수 없다는 등의 논의가
-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 선출직 대표는 대중들의 대리인이라는 점에서 대중들 중 한 명으로 환원 가능한 ‘보통’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출직 대표는 그 자리의 유한성 때문에 그 자신의 특이성, 즉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차이를 강조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 ‘보통’ 사람이라는 수사로 당선되었다. 진짜 보통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 보통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대의민주제에서의 기대되는 대표성의 핵심이다.
- 특정한 학벌, 신분, 계급과 같은 것이 대표의 자격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표는 통치하되 권력의 사적 행사가 금지된다. 선출된 대표는 결코 사적
- 행사가 금지된다. 선출된 대표는 결코 사적인 존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사화私事化된 권력은 특권의 남용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된다. 따라서 대표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사적 개인을 ‘넘어서’ 공인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여기에서 공인으로서의 자질이란 ‘사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해관계가 모두의 이해와 모순 없이 녹아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인이 사적 개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은 사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곧 공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회 청문회에
- 공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회 청문회에서 ‘재벌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 길이다’,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합법적인(?) 부의 증식 과정까지 문제 삼으면 어쩌란 말인가’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라는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 모성정치, 할당제, 남녀동수 등은 여성이 소수자가 아니며 사회의 보편적 일원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모성정치의 경우, ‘모성’의 내용을 바꾸지 않는 한 여성의 정체성을 모성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할당제는 여성이 너무 적게 대표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전까지 일정 정도의
- 소수자 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근거한 정책인데, 문제는 이 경우 소수자로서 대표의 자격을 얻자마자 소수자로서의 자기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 더구나 현행 선거제도에서 소수자가 소수자로서 대표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적으로 대
- 대표되기 어려운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다수결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하여 대의제를 보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비례대표조차 소수자로서 소수를 대표하기보다는 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결코 성적
- 타자로서의 여성을 대표할 수 없으며, 최초의 여성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것이 여성 집단 전체의 권한이 강화되는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 자유주의 정치에서 개인들은 추상적 개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개인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 문제는 자유주의 ‘정치’의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 성적으로 타자화된다는 것은 오직 사생활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익숙한 이웃들이 순식간에 낯선 타자가 되기도 하며 낯선 타자들의 이질성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 ‘혼성’의 민주주의는 여성/남성이 커플로서 인간 전체를 대표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산출된 성적 차이를 대칭적이며 평등한 차이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때 이성애적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 성적 타자들은 보편성의 조건 바깥으로 완전히 퇴출되어 소수자로서만 인정될 뿐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예외의 영역에 놓이
- 보편화될 수 없는 예외의 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대표가 된 여성들은 타자로서의 여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성중립화된 추상적 개인으로 행동한다.
-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만들기의 과정에서 정상 가족에 기반을 둔 특정한 문화적 전형들을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타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거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이 관계 맺기에 대한 상상력이 문화적으로 더 익숙한 형태로만 반복될 때, 타자들의 정치적
- 요구는 쉽게 사랑과 가족의 이름으로 낭만화되기 쉽다. 이때 보편적인 것과 대표 가능성의 영역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고, 나와 관계된 ‘우리’를 다시 재구성하자고 요청하는 보편주의적 요구 자체가 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 여성의 과소대표성에 대한 요구는 여성도 정치에 평등하게 참여할 자유주의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의 남성 중심성을 제거·해체·재구성하겠다는 선언이어야 하며, 소수자 대표는 소수자의 지위를 소수자 정체성으로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입장에서 소수자의 지위가 앞으로 잠재적으로 어떻게 변화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공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누구에게 어떻게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투표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진보가 아니라 퇴행에 가깝다.
-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이나 자서전류의 작품에서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진부한 방법 중 하나는 험상궂은 날씨나 자연재해다.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거나, 무더운 여름날 갑자기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식이다. 자연 풍경을 어둡고 또 불안하게 연출하여 앞으로 발생할 ‘재앙’을 암시한다. 물론 이 사건을 기다리는 이들은 여유롭다. 혹은 별일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저 갑자기 변한 날씨에
- 조금 놀랄 뿐, 여유로운 기분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대비는 매우 진부하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지금도 자주 쓰인다.
- 지배적 몸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 존재는 늘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자 관리·통제의 대상이며 의학 실험의 대상이다.
- 만약 누군가가, 별볼일
-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생애사를 쓴다면, 지금 이 경험은 내 일생을 암시하는 상징적 사건이 될까?
- 날씨와 날짜, 혹은 특정 사건으로 개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서사는 괴물스러운 몸·존재가 불길함과 불안을 품고 있는 존재이자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전통적 인식을 답습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적 불안을 그들에게 쏟아붓는다. 사회는 그 불안이 ‘그들’/‘우리’의 운명이자 그들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우리’/‘그들’을 추방한다. 날씨 등의 묘사는 이를 정당한 일로, 자연질서로 (재)생산한다. ‘우리’가 불길한 것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것도 모두 제 운명이라는 것처럼.
- 2010년 부산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의 용의자 김길태 씨의 이름을 두고 ‘길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라며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이를 통해 규범적 이성애 가족 내에서의 출생만을 정상화·규범화하고 (지배)규범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와 출생은 그 자체로 불행이자 사회적 악의 원흉이라고 암시했다. 아울러 사건 가해자의 권력과 사회적 맥락을 삭제하고 모든 문제를 가해자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길에서 태어났기에 살해자가 되었다는 식이다.
- 화학적 거세(법에서의 용어는 ‘성충동 약물치료’)
- 나는 이 글에서 지배규범은 순수하고 안정된 장치이자 제도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낯선 몸, 위반하는 몸, 그리고 법을 어기는 몸을 발명하고 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역사와 방법을 살피고자 한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스런 몸은 언제나 동일하거나 유사한 제도를 통해 감금되었고 통제되었다. 그렇다면 괴물을 발명하고 관리하려는 지배규범의 욕망은 무엇일까? 사회 구성원은 괴물 창조를 통해 무엇을 실천하
- 실천하고 싶은 것일까? 화학적 거세를 통해 한 개인을 괴물로 추방할 때, 이 추방의 실질적 효과는 무엇일까?
- 메리 셸리Mary Shelly의 유명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피조물은 그
- 그를 만든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달아나고 부인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인가?”
- 라는 말을 했다.
- 피조물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괴물 형상이란 점은 꽤나 흥미롭다. 괴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담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출처 없이 갑작스레 출현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가 구축한 문화적 해석, 사회제도가 괴물을 만든다. 아울러 빅터와 피조물의 관계는 의사와 트랜스젠더의 관계를 암시하고, 괴물 형상은 장애인, 외국인, 이방인, 퀴어 등의 알레고리기
- 알레고리기도 하다. 그래서 피조물·괴물은 내게 타자일 수 없다.
- 피조물이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기절할 만큼 끔찍한 형상이란 걸 깨달았단 구절을 읽고 심란했다. 글자도 모르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없는 피조물은, 어떻게 제 모습이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을까?
- 시대는 프릭쇼freak show가 인기를 끌었고, 근대적 남성 이상理想을 기획하던 시기다. 아울러 식민주의·인종주의가 등장하며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적합한 인간만을 인간 범주에 속한다고 얘기하던 시기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바로 이런 시대의 비-인간非人間 혹은 괴물스러운 타자를 상징한다.
- 지금도 의학도서관에 가서 결합 상태의 일란성 쌍생아에 관해 조사해보려면 ‘우롯츠이’의 항목을 찾아야 한다. ‘우롯츠이чудовище’란 도깨비나 괴물이라는 의미다.
- 인터섹스
- 프릭
- 무대에 선 프릭을 구경하며 놀라고 공포를 표현하는 관음증은 그 시절의 윤리적 행동이었다. 사실 관음증은 금
- 금기된 행동도 아니며 금기된 적도 없다. 시선의 권력과 관련한 논의에서 기본 전제는 ‘보는 자-보여지는 자’란 이분법이다. 이런 이분법에서 ‘보는 자’는 시선권력을 행사하며 타인을 대상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관음증은 이런 믿음(혹은 망상)을 실천하는 방식일 뿐이다. 따라서 프릭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프릭이 아님을 확인하는 일이며, 자신에게 시선권력이 있음을 객석의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실천이었다.
- 20세기
- 들어 프릭쇼 관람이 윤리적 문제로 변했을 때 사람들은 프릭쇼를 보지 않기 시작했다. 동시에 프릭도 보지 않았다. 프릭(이나 퀴어)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 보르네오에서 온 야만인으로 소개된 히람 데이비스와 바니 데이비스. 데이비스 형제는 미국 오하이오에서 살았던 발달장애 백인이었다. 마샤와 다샤에 따르면 소련은 자국에 장애인이 없다고 홍보했는데, 데이비스 형제를 이국의 원주민으로 소개한 미
- 미국의 문화는 소련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 릴리푸트
- 빅토르 위
- 위고Victor Hugo는 1879년 노예 해방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아프리카에는 역사가 없다. 일종의 드넓고 어두운 신화가 아프리카를 감싸고 있다. (……) 이 거칠고 무뚝뚝한 아프리카는 두 가지 모습밖에 없다. 사람 사는 곳은 야만이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원시다. (……) 19세기에 백인은 흑인을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프릭쇼 무대에 선 배우를 피해자로만 재현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황과 무대에 선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다.
- 프릭쇼 무대는 비규범적 존재가 제 몸으로 노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프릭쇼 매니저는 이들을 서커스에 데려오기 위해 납치할 때도 있었지만, 때때로 커다란 냄비 한가득 금과 은을 채워 부모에게 지급했다. 이 금액은 가족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며 프릭이 서커스단에 입단하여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이 매매의 윤리를 간단하게 단정하긴 어렵다.
- 무대에 선 배우는 ‘보여지는 자’인 피사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서커스이자 무대라는 점을 상기하자.
- 이럴 때 피해자란 지위를 누군가에게 부여해야 한다면 누가 피해자인가? 무대에서 제 몸을 전시(해야)한 배우인가, 이들의 연기가 사실이라 믿으며 놀람에 놀람을 반복하고 제 몸의 규범성을 확인받으려 한(아울러 ‘보는 자’의 시선권력이 있다고 믿는) 관객인가?
- 물론 프릭쇼 무대가 괴물스러운 몸, 낯선 몸으로 태어난 이들에게 노동 공간이었고, 매니저는 “프릭을 장애차별과 인종차별로 대하지 않았다”
- 고 해도 당대 지배적 몸 규범으로 수익이 발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무대에서 (재)생산한 것은 장애와 인종에 바탕을 둔 차이였고, 이를 낯설어 하는/낯선 것으로 반응해야 하는 관객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배우가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계속 머물렀다면, “장애인은 죄악”이자 “도덕을 결여”한 몸
- 으로 여기는 당대의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생
- 생존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무대 배우로서의 활동은 복잡한 이슈를 생산한다.
- 몸·외모는 곧 정신이며 비규범적 몸은 인간 조건에 미달하며 열등, 미개함을 상징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는 데카르트식의 근대 철학이 주류였다. 몸과 정신은 별개였다. 정신은 육체를 초월
- 정신은 별개였다. 정신은 육체를 초월한다는 논의가 지배 담론이었다. 인간은 몸 없는 존재·기관이며, 생각하는 존재라서 몸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프릭쇼에 등장한 인물을 괴물로 대하며, 그의 정신과 내면도 ‘괴물’이라고 가정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근대적 인간이 가정하는 인간 범주의 경계·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태도일 뿐이다. ‘생각하는 존재’와는 다른 형태의 몸은 인간이 아니었다.
- 관음증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 사회라고 해도 관음의 대상이 인간 범주에 들지 않을 때 관음(증)을 문제 삼는 이는 드물 가능성이 크다.
- 흥미로운 것은 비이성애 실천을 추함과 죄악으로 여기는 인식이 프릭쇼가 흥행하던 바로 그 시대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 자본주의 발달이 한창이던 19세기의 주요 기획 중 하나는 근대적 남성성의 기준
-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남성성이 공손하고 부드러우며 노동하지 않는 몸이었다면,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 확장에 따라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했다.
-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양식이었고, 규범적 남성성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 역할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남성이었다. 철학자이자 건강한 신체를 갖추
- 갖추었으며 항해라는 거친 모험을 경험하고 지혜를 갖춘 존재로 (재)구성된 고대 그리스의 남성은 제국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의 표본이었다. 특히 아테네 출신 철학자가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남성 간의 동성애는 누락되었다. 성적 실천은 우정과 이성애 관계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 도덕 윤리가 성적인 것을 그 자체로 죄악시하며 섹슈얼리티를 금기하는 것과 밀접하다.
- 시각 경험을 지배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보이는 것이 곧 믿어야 하는 것인 시대에 막연한 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구체적 형상이 필요했다. 그것이 제 민족의 모습을 대표하는 남성이건 타락한 몸이건 마찬가지다.
- 민족을 대표하는 존재는 남성이어야 하지만 타락한 존재는 남성일 필요가 없었다. 비규범적 남성과 ‘타락한 존재’는 모두 ‘남성’ 범주에 속하지 않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즉 젠더 이분법이 새롭게 발명된 이 시기에 비규범적 존재는 여성 범주로 설명되었다.
- 그의 뇌세포는 미쳐서 기능을 못한다기보다 쇠약해져 허탈 상태에 빠진 것 같다.
- 1800년대 정신병원 견학은 프릭쇼처럼 일종의 유흥이었고, 병원 입장에서
- 프릭쇼처럼 일종의 유흥이었고, 병원 입장에서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 “자연의 섭리를 거역한 악행”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위였다. 자위를 금지하려고 사내아이의 손을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자도록 했을 정도로 ‘남성의 생산성 없는 성적 행위에 대한 금기’는 그 시대의 강박이었다. 자위를 하다 발각되었을 경우 정신병원에 구금
- 정신병원에 구금
- 구금된 이상 처방이란 명목으로 행해진 다양한 고문을 겪으면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성적 실천에 따른 병든 외모는 정신병원에서 겪은 고초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위행위 자체, 호모섹슈얼리티 실천 자체로 인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 쇠약하고 병든 몸은 그 시대 비규범적 존재의 규범적 모습이다. 따라서 호모섹슈얼리티, 비유럽인, 장애인·프릭 등은 모두 현생 인류의 이전 단계의 ‘원인原人’이자 죄악의 표상이었다. 이들은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전시되거나
- 서커스 무대나 우리에 갇혀 전시될 뿐이었다. 이것은 그 시대 과학의 이름으로,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정당한 실천으로 소비되었다. 그래야만 소위 규범적이라고 여길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차이는 언제나 매 시대 지배규범의 기획에서 발생한다. 차이는 동질성에 바탕을 두며 동질성은 차이를 필요로 한다. 정말 ‘다르다’면 굳이 차이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정말 ‘같다’면 굳이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른’ 몸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규범적 몸 이미지에 따른 발명품이다
- 프릭쇼나 정신병원 관람은 차이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유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문화의 토대·한계를 반영한다.
- 아마 프릭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효과는 몸의 상당히 다양한 차이를 타자로서, 프릭이란 단일 기호에 그 모든 것을 융합하여 삭제한 점이다.
- 프릭쇼 무대는 프릭 개개인의 ‘차이’를 동질한 것으로 만들었다. 무대의 배우가 인간인 것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그 어떤 존재란 점에서 몸의 ‘다양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차이’는 지배규범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초과한다. 지배규범이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차이’만 의미 있
-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차이’만 의미 있을 뿐이다. 그래서 관객에게는 ‘나와 다르다’라는 점만이 중요했다. 관객은 자신이 규범적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울러 감당할 수 없는 차이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형·해석되었고 이를 ‘치료’라고 명명했다. 이런 점에서 프릭쇼는 정신병원과 함께 근대적 인간을 (재)생산하는 핵심 장치다.
- 근대 이후 끊임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주요 인식 중 하나는 몸과 정신 사이의 분리를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식의 몸-영혼 이분법과 데카르트식의 이분법에 바탕을 둔 개인은 개별적이고 분리된 존재다. 모든 인간은 공의존적이고 상호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음에도 개별적 몸, 독립된 몸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 근대 인식론은 샴쌍둥이 혹은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가 두 개인의 몸이 붙어 있는 것인지, 한 개인이 둘로 나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은 매우 명징하게 구분되며 개인은 자신만의 주체성이
- 구분되며 개인은 자신만의 주체성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마샤와 다샤의 몸은 이런 가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지배규범의 인식에서는 “그들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결정할 수 없다.”
- 그래서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면 의학은 분리수술을 시도한다. 지배규범은 결합한 몸을 인식할 수 없고 견딜 수 없어 ‘괴물’, ‘기형’, ‘장애’란 범주로 설명한다. 괴물은 곧 질병이란 점에서 유일한 처방은 분리수술이다.
- 하지만 분리수술이 최선이라는 것은 누구의 판단일까? 마샤와 다샤는 아니다. 쉴드릭이 지적했듯, 결합한 몸을 참지 못하는 이는 쌍둥이가 아니라 사회다.
- 지배규범의 불안을 증폭하는 몸은 치료해야 하는 몸이며 사회생활을 할 수 없어 병동에 갇혀야 하는 몸이다. 지배규범의 한계(‘차이’라고 부르는 것)를 생산하고 폭로하는 몸은 언제나 단지 괴물일 뿐이다.
- 관객은 괴물을 통해 제 몸의 규범성을 확인받고 싶었다. 관음증 의례는 지배규범의 한계를 공유하고 은폐하는 ‘유희’였다. 즉 프릭쇼와 정신병원은 근대적 인간의 몸을 발명하려 한 규범의 봉합사다.
- 생명 있는 개개인의 몸은 자신이 관리하지 않는다. 개인에게는 자신의 몸을 ‘결정할 권리’, 자신의 건강을 단언할 권리가 없다. 의사의 소견서를 통해서만 건강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건강 강박인 사회에서 아프다는 것은 큰일에 해당한다. ‘우리’는 아플 순 있지만 ‘우리’에게 아플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건강은 자기 관리의 징표다. 건강해야 하고 아파선 안 되며(2010년 가을 즈음, 라디오에서
- 젊은 것들이 아프고 감기에 걸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광고를 들은 적 있는지?) 회사나 경제 성장에 지장이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푸코는 20세기 후반 들어 “원할 때, 필요할 때 아플 권리”, “일을 중단할 권리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법과 제도가 아플 때 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사실상 규범적으로 건강할 의무만 있다.
- 피터 콘래드Peter Conrad는 의료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의료화는 비의료적 문제가 병고나 장애 같은 언어를 통해 의료 문제로 정의되고 다뤄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 이전까지는 의학에서 개입하지 않고 넘어갔던 문제가 의학에서 조사하고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는 과정이 의료화다.
- 과거에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집이나 친척집에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출산했다면 지금은 병원에서 의사의 관리하에 출산이 이루어진다. 출산만이 아니라 임신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양수 검사, 태아의 장애 여부, 성별 판단 등이 임신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월경 전후 증후군 역시 마찬가지다. 월경 과
- 전후 증후군 역시 마찬가지다. 월경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몸의 ‘자연스러운’ 징후가 의학에서 진단하는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다.
- 현대사회에 의료가 만연하다고 해서 처음부터 사회적 행동이 모두 의학용어로 설명된 것은 아니다. 콘래드는 이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죄악sin에서 범죄crime로, 범죄에서 질병sickness으로 바뀌어간다고 설명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기준으로 삼은 시대에는
- 위법행위를 죄악으로 해석했고, 구금시설이 등장한 20세기 초중반엔 범죄로, 1960~1970년대 즈음부터는 질병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단계라기보다는 일종의 경향이다. 지금도 질병을 죄악으로 비난하거나(대표적으로 HIV/AIDS), 범죄인 동시에 질병으로 다루는(성폭력 가해자의 정신 감정과 심리 검사) 등 위법행위를 다루는 태도는 단순하기보다는 복합적이다.
- 19세기에도 ‘위반하는 몸’을 의료과학의 이름으로 관리했다. 모든 질병은 계량화된 ‘정상’ 범주에서 벗어날 때 발생하며 시각을 통해 병터를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병든 몸’을 관리하는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 카미유 클로
- 나혜석
- 사혈
- 많은 병원이 구속복을 입힌다거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가두거나, 물고문, 채찍질 등 다양한 형태의 고문으로 입원인을 길들였다. 의사가 관리하기 쉬운 몸으로 만들어 사회를 위협하지 않게 충분히 유순한 몸일 때에야 비로소 퇴원할 수 있었다.
- 정신병원이 만든 유순한 몸은 유순하되 규
- 규범적이지 않은 몸이다. 즉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퇴원을 하더라도 특정 코드를 통해 정신병원 경력을 누군가는 파악할 수 있는 몸을 만들었다. 구속된 범죄인의 몸에 문신을 새겨 공공시설에서 옷을 벗는 순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이나 퀴어에게 낙인을 찍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순하되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의 유순함을 만드는 것, 이것이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 시설이 기획하고 생산한 몸이다.
- 의료 실천은 생명을 살리는 실천을 지향함에도 사실상 죽이는 실천이었다.
- 서구 과학은 종교적 믿음을
- 입증하거나 유럽인의 믿음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 아프리카 여성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한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과학은 그 시대의 지배적 인식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서유럽이 식민지를 침략할 때의 태도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함께한 집단은 선교사였다. 서유럽의 문명과 과학기술이 우월하다고 증명할 윤리적 근거는 기독교라는 종교였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우월하다고 입증할 수 있는 실체적 근거는 과학기술이었다. 둘은 일견 모순되고 갈등하는 양상을 드러내
- 일견 모순되고 갈등하는 양상을 드러내지만 거의 항상 공생했다. 19세기는 과학의 시대이자 종교의 시대였다. 위법행위는 종교적 죄악이며 과학적(생물학적) 문제였다. 그리고 규범을 위반한 사람은 모두 정신병원에서 관리되었다. 이 시기 정신병원은 종교와 의학으로 개인의 일상을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 우생학은 단순한 절멸 실천이라기보다 몸의 위계를 구축하고 의학으로 국민을 관
- 관리하는 기획이다.
- 보어전쟁
- 출산 관리는 우생학이 등장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처음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19세기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근대적 자본주의 발달, 공장 중심의 산업구조는 노동(인구)의 재생산을 중시했다. 이것은 공사 구분과 성별 분업 구조로 나타났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남성과 남성이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하는 여성이라는 성별 분업은 근대성 형성에 핵심
- 핵심이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노동’이 아니라 ‘역할’로 은폐하는 구조는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밑절미 삼는 동시에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규범으로 만들었다.
- 남성 생계 부양자/여성 가사노동자라는 구분은 젠더 질서로 정착했다. 규범적 이성애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만이 적법한 가족 형태로 승인되었다.
- 국가의 재생산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곧 모든 인구의 증가를 중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민족·국가에 이득이며 대표로 내세울 만한 인구 증가가 주요 목적이었다.
-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개념의 등장과 함께 인종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국가 구성원을 퇴화degeneration하지 않은 이들로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 ‘교양’ 있는 인구로 분류하는 중산층 이상의 인구 증가는 권장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인구가 필요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 적절한fit 출산과 그렇지 않은unfit 출산이라는 구분은 당시 영국에서 중산계급의 출산율이 하락하는 데 비해 하층계급의 출산율은 상대적으로 높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 당시 가족계획 운동을 하며 우생학을 지지한 마리 스톱스Marie Stopes는 “인종적 가치가 낮은 하층계급의 자녀가 많이 태어나 사회에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피임법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양수 검사가 장애 태아를 판별하기 위한 수단이듯 우생학은 적절한 사회 구성원을 여과하는 장치다.
- 출산을 규제하고 국가의 미래 구
- 구성원을 관리하여 국민의 미래에 위협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우생학의 기획이다.
- 근대 이후 의학은 통상 질병 치료라고 여기는 범위 이상의 것을 제 영역으로 삼고 있다.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는 모든 행동에 의학이 관여한다.
- 당신이 여성이라면 그것은 의학에서 당신이 여성이라고 승인했기 때문이며 남
-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 본인의 의견이 아니라 의사인 머니의 진단과 처방이 더
- 중요했다.
- 의학과 국가권력이 결탁하여 개인의 범주(여기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관리·통제하는 것은
-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실천이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은 정부의 적극적 독려와 개인적 필요로 공장 노동에 적극 참여했다. 많은 남성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경제 발전과 전시 물품 생산은 여성의 몫이었다. 이 시기 여성은 ‘공적’ 노동을 해야 하는 몸이며, 공장 노동은 여성의 성역할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남성 군인이 귀향하면서 분위기는 바뀌
- 바뀌었다. 남성이 실직자로 지내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던 정부와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공장 노동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성에게 적합한 공간은 가정이며 가사노동만이 여성의 성역할이라고 주장했다. 공장 노동은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며 남성의 성역할이라고 주장했다. 공장 노동을 비롯하여 ‘공적’ 노동을 하던 많은 중산층 백인 여성은 가정에 갇혔고 ‘과학적’ 가사에 전념해야 했다. 물론 하층계급 여성은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공적’ 노동에 참여했다. 중하층 여
- 여성의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주류 미디어는 여성이 머물 곳은 가정이며 가사노동이야말로 여성이 행복을 느낄 유일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 소도미 법
- 동성애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병진단편람DSM에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동성애’는 범죄인 동시에 질병이었다.
- 맥카시 광풍이 한창이던 시기에 공산주의자와 ‘동성애자’는 동급으로 처벌되었다.
- 컴튼스 카페테리아 항쟁the Compton’s Cafeteria Riot
- 크로스드레서
- 스톤월 항쟁the Stonewall Riot
- LGBT
- 1973년에는 우여곡절 끝에 DSM에서 호모섹슈
- 호모섹슈얼리티가 삭제되었다.
- 1980년 DSM에 젠더 정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GID(성 주체성 장애로 번역되기도 함)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 근대 의학에서 최초의 성전환 수술은 20세기 초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 한 독일인이 의사를 찾아가 성전환 수술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필두로 성전환 수술 관련 의료 기록은 꾸준히 등장한다.
- 호르몬을 구하거나 가슴 수술 혹은 외부 성기 재구성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하기에 트랜스젠더는 의학과 결별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의 적극적 요구와 교육 활동으로 발달한 의료 기술은 트랜스젠더를 진단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응집한 것이 DSM에 등재한 GID이
- 응집한 것이 DSM에 등재한 GID이다. GID는 트랜스젠더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진성true/authentic 트랜스젠더라고 판정하는 진단 범주이다.
- mtf의 경우, 남자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고 여성의 성역할을 고집한다. ② ftm의 경우, 여자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고 남성의 성역할을 고집한다.
- 호모포비아
- 트랜스섹슈얼
- 트랜스베스타잇
- 규범적 이성애자로서 적법한 남성성/여성성을 실천하지 않을 경우 그의 젠더는 관리·치료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 이후의 젠더는 의학의 진단 범주다.
- 위로 떠올랐고,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입법 논의를 본격 시작했다. 그러다 김수철 사건이 2010년 6월 초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달 말 통과되었다.
- 보도되면서 여론은 들끓었고, 화학적 거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보다는 지지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 이 법은 최초 발의 당시인 2008년 9월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9년 조두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화학적 거세 논의가 다시 수면 위
- ‘성폭력 범죄자의 성충동 약물
-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이다.
- 이 법이 화학적 거세법으로 알려진 계기는 2009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두순 사건에서 비롯한다. 판사는 음주 상태를 ‘정상 참작’하여 가해자 조두순에게 검사의 구형을 감형해서 선고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
- 이 법의 공식 약칭은 ‘성충동 약물치료법’이다
- 역사적으로 모든 위반
- 위반행위가 처음부터 범죄로, 질병으로 다뤄진 것은 아니다. 종교의 시대, 서구 기독교의 시대에 위반행위는 범죄라기보다는 죄악이었다.
- 신을 향한 신실함이 인간이기 위한 핵심 조건인 시대에 파문은 곧 인간이기 위한 존재 조건의 박
- 박탈이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종교적 행동이었다. 이것이 19세기, 20세기 초반 즈음엔 위반행위를 국가의 존립 문제로 다루면서 범죄로 해석되었다. 그전까지 정신병원에 일괄 구금되었던 이들을 (재)분류하고 범죄화하여 교도소와 같은 형태의 시설에서 별도로 관리했다.
- 어떤 사건의 범죄자가 어떤 종류의 범죄자인지, 정말 범죄자인지, 어떻게 가해행위를 했는지를 밝히는 모든 과정에 의학·의료가 개입한다.
- 가해자 김수철은 “내 안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언설은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라는 조두순 식의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 의학의 역사는 살림의 역사라기보다는 죽임의 역사이며, 의학의 오진은 무지가 아니라 정당한 의료적 조치와 의료 지식을 적극 활용하여 발생하는 측면이 있
- 부작용 자체를 하나의 처벌로 여긴다면, 예측할 수 있는 부작용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부작용을 통해 비규범적 존재를 추방하여 지배규범의 안전을 꾀할 수 있다면 법을 제정하려는 입장에서 부작용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 부작용은 비규범적으로 여기는 존재를 추방하여 규범적 존재를 (재)생산하는 주요 수단이다.
- 치료라는 명목의 개입은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 가해자 개인을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사회와 개인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에 대한 공격을 유발한다. 질병disease이나 병고illness에 대한 의료 진단은 그 병을 앓고 있는 개인을 향한 혐오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 범주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결국 기존의 규범성, 소위 ‘정상적 몸’이라고 불리는 이상理想만 강화할 뿐이다. 구분할수록 트랜스젠더는 비규범적 존재라는 ‘편견’만 강화할 뿐이다.
- 이 법을 공표함으로써 비규범적 존재와 규범적 존재를 구분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완화하는 것이 실질적 목적이다. ‘비규범적 존재와 규범적 존재는 분명하게 다르다. 행여나 구분할 수 없다면 화학적 거세법과 같은 형식의 조치를 통해 가시적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런 의지를 입법이란 형식으로 실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이미 괴물스러운 존재로 불린 이들은 여전히 비규범적 존재로 살겠지만, 규범적
- 존재로 불린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안정적 토대로 만들 수 있다.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지 않은 ‘나’,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나’는 위법한·폭력적 행동을 하지 않는 규범적 존재란 차폐막을 칠 수 있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법은 비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존재의 차이를 지우는 용광로가 된다.
- 괴물스러운 몸 자체는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괴물스러운 존재는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를 드러내고, 국민국가가 요청하는 규범적 인간상을 위협할 뿐이다. 그래서 지배규범은 약물이나 수술과 같은 의료 실천으로 ‘괴물’을 관리하려 든다.
-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화학적 거세법 제정은 비규범적 존재
- 화학적 거세법 제정은 비규범적 존재를 의학의 실험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적법하다는 선언일 뿐이다.
- 부작용은 과학이나 의학 실험에서 예측하는 결과 중 하나다. 실험 결과가 예측과 다르게 나오면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에 부작용이나 실패는 성공의 다른 판본이다.
- 화학적 거세 조치를 시행한 성폭력 가해자에게 몸 변형이 발생하여 단박에 파악
- 파악할 수 있는 몸이 된다면, 즉 부작용이 생긴다면 이는 ‘성공적’ 결과다. 인터넷으로 신상명세를 조회할 필요도 없다. 프라이버시 침해 운운할 필요도 없다. 화학적 거세법으로 가해자 몸에 ‘부작용’이 생긴다면 언론은 이를 보도할 가능성이 크다. 독자·관객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가해자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몸이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될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 화학적 거세법은 성폭력 가해자 중 일부를 관리함으로써 의료적 조치를 바라는 mtf 트랜스 여성 다수를 위협하고 젠더를 자연질서로 통제한다.
- 거세란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거세란 명칭을 고집한
- 이들은, 거세까지 대책으로 가지고 있음을 공포公布해 (잠재적) 가해자를 위협하려 했다. 이는 거세와 남근·음경이 남성-남성성에 차지하는 비중을 암시한다.
- 거세란 용어 대신 선택한 약물 처방이란 용어는 거세라는 용어가 남성성에 가하는 위협과 불안을 완화할 뿐이다.
- 사실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이 아니다. 거세의 대상은 규범적 남성상에 부합하는 존재에게나 해당하는 형벌이다. 거세는 규범적 존재를 비규범적 남성·존재로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이미 비규범적 괴물이기에 ‘남성’ 범주에 들지 않는다. 이럴 때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일 수 없다. 약물치료의 대상일 뿐이다. 화학적 거세를 대신한 약물치료란 용어는 가해자를 남성 범주에서 추방한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남성’이 아니라 그저 ‘괴물’일 뿐이다.메모너무 나갔네. . .
- 화학적 거세법은 남성의 성욕, 남성성이 아무리 강해도 국민국가의 지배규범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실천하는 존재만 남성이라는 선언이다.
- 사회는 언제나 규범이 아니라 비규범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제 토대를 형성했다. 프릭쇼가 그랬고, 정신병원이 그러했다. 프릭쇼는 무대 배우와 관객 사이의 구별짓기를 통해 관객에게 규범성을 부여했다.
- 정신병원은 궁극적으로 유순하지만 여타의 구성원에 섞일 수 없는 몸을 만든다. 사회에 순응하되 다른 구성원과 변별할 수 있는 몸을 생산한다. 이것은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 시설이 훈육하는 몸의 기본 규율이다. 비규범적 존재는 변별할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지 사라져선 안 된다. 규범은 언제나 비규범적 존재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변별점이 사회의 불안을 자극
- 자극하고 가중한다. 사회는 비규범성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모종의 불안을 자극해야 한다.
- 문제의 심각성은 화학적 거세법이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성폭력 사건도 ‘해결’하지 않는다. 이 법은 성충동 약물치료 처분을 받지 않은 이들의 성폭력 가해를 은폐할 뿐이다. ‘사회적 안전’ 혹은 ‘공공의 안전’이란 명목으로 끊임없이 ‘괴물’을 생산하는 정치 행위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정치는 언제든 비규범적 존재를 위법한 존재로 추방할 여지를 내재하고 있다. 화학적 거세법이 정착된 이후 언젠가 ‘여성스럽거나 성별이 모호한 남성의 외
- ‘여성스럽거나 성별이 모호한 남성의 외모’는 성폭력 가해자의 외적 특징이라고 말하며 혐오 폭력을 조장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 기지촌
- 도시형 엔터테인먼트 문화공간UELC, Urban Entertaining Lifestyle Center
- 타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직시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박제
- 박제화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론과 이들의 삶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생겨서 이들은 점점 더 타자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또한 이들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일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 성노동자 담론에서 성판매 여성들은 자본주의의 대표적 상품인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로 자신을 명명하고자 한
- 한다. 이들은 성매매 정치학에서의 젠더 라인 외에, 노동자라는 호명을 통해 여기에 존재하는 계급 라인을 드러낸다.
- 모든 지식과 언어는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분리될 수 없다.
-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그의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생산수단이 공동 소유가 되어 노동이 갖는 사회적 가치가 평등해지면 여성의 지위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 고대사회의 씨족적 조직에 이어 자녀들의 재산 상속제를 수반하는 부권제가 등장하면서 한 가족에 의한 재화의 축적이 조장되었고 가족이 씨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어졌다. 이 가족은 사회의 성별 시스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국가의 탄생과 맥을 같이한다. 즉 씨족 제도는 화폐경제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발전해가는 재산 획득의 새로운 형태를 승인할 제도로,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할 권리를 영구화할 국가가 만들어진
- 만들어진다. 사유재산제의 결과로서 가족,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제도는 처음부터 가족과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런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등장으로 여성의 필연적 종속이 예고되며, 이런 종속은 여성의 노동과 관련이 있다.
- 엥겔스의 논의는 개인의 사적 시간을 공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사회적 성인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한다.
- 사회진화론자인 엥겔스에게 가내노동은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없는 체제 유지적 노동이다. 하지만 생산수단이 공동 소유로 되면서 ‘사사로운 집안 살림’은 사회적 산업이 되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것은 공공사업이 된다. 이처럼 노동이 갖고 있는 사회적 가치가 평등하게 만들어지면서 여성의 지위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을 위태롭게 만드는 성판매 여성들의 존재에 반대하는, 그들이 없어져야 가정과 사회에 평화가 온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빈곤을 문제화하는 것과 빈곤한 사람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 엥겔스는 성매매가 없어질 가능성에 대해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되면서 임금 노동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소멸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여자가 돈을 받고 몸을 팔 필요도 소멸할 것이라고 답한다.
- 엥겔스의 아이디어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성매매를 문명 시대의 가족이 진정한 일부일처를 이룰
- 수 없도록 만드는 걸림돌로 간주하면서 결과적으로 매춘 여성의 존재를 가족이라는 단위와 완전히 분리된 ‘위협적인 개인’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성판매 여성들의 존재는 흔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여자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 성매매 공간에서 많은 여성은 가족들 때문에 노동하고,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며, 가족과 함께 노동한다.
- 여성들의 존재를 ‘어머니’와 ‘창녀’라는 이분법에 의해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로서 성노동을 지속하며,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노동을 지속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 1970년대 여공들의 노동의 흔적을 기록한 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
- 저자는 여성 노동자성을 구축한 지배 담론이 여성의 욕망을 삭제한 채 여성들을 과잉 신성화 혹은 무성화했다고 지적한다. 즉, “여공들의 공장 동경 욕망을 삭제한 희생양 담론 혹은 다락방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공들은 익명적 지식에 의해, 그리고 가족
- 가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공장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공들이 노동자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이들의 여성성, 젠더화된 조건, 욕망 등이 가려졌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채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여자’로 분류된다.
- 이런 배경 때문에 여성 노동자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욕망의 기호를 배제하고 무성적인 노동자성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범주’에 일단 위치시키려는 전략이었다.
- 성스러운 이성애 가족 울타리 내에서 식모의 존재는 위험한 존재다. 이들은 홀로 도시로 이주한 ‘울타리가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당시 식모의 존재를 근대적 가족 형성의 장애물로 사고하며 한국부인회가 주축이 되어 ‘식모 폐지론’ 운동을 벌인 장면도 이와 같은 맥락과 겹쳐진
- 겹쳐진다. 울타리 외부에 위치한 주변부 여성들이 잠재적 윤락여성으로 간주되는 것과 동일한 시선이다. 도시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충원된 주변부 여성들은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노동과 별개로 질서를 균열 낼 수 있는 위험한 여자가 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잉여적이고 익명적인 존재로 과잉 성애화되었다.
- 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 역시 언제든 또 다른 중심부가 만들어진다면 주변화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주변부 여성들의 대립항으로 중심부 여성들을 다룰 것이 아니라 주변부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노동자성이 남성 노동자성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
- 남성 노동자성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 Truth
- 투쟁을 위해 선택한 맥락적인 정체성을 통해 여성들은 단일하게 여겨진 노동자 범주에 포섭되길 욕망하기도 하고, 노동자성의 단일함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 피자 회사의 매장에서 5년 넘게 일해 점장이 된 친구는 스스로를 ‘피자 전문가’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회사 매장 일이 특별히 싫지 않지만” 늘 다른 회사의 구인 정보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피자 전문가가 아닌 이유는 이 매장에서 오늘 알바를 시작한 초짜도 자신이 만든 피자와 똑같은 피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 피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주문된 음식을 요리한다는 것은 이미 조리된 소스들을 다듬어진 토핑들에 버무려 피자 도우 위에 올리는 단순 작업, 매뉴얼 북을 따라 간단한 조립을 하는 과정 이상이 아니다. 매번 바뀌는 메뉴 탓이기도 했고, 모든 매장에서 같은 맛을 보장하고자 하는 본사의 평준화 전략이기도 해서 피자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 필요도, 외울 필요도 없다. 간을 볼 필요도 없고, 내가 만든 피자가 맛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할 필요도 없다.
- 단기, 계약, 임시 노동이 보편화된 세상 속에서 아무도 장기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 홀거 하이데Holger Heide는 『노동 사회에서 벗어나기』
- 에서 “노동 사회에서 탈출할 것인가, 노동에 헌신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 “노동은 모든 인간 문명의 토대다”라고 말한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과 “오늘날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
-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한 앙드레 고르Andre Gorz
-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방지법
- 캐슬린 배리Kathleen Barry의 “자유로운 노예를 찾을 수 있는가?”
- 우리 사회에서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자들에 대한 다양한 지시어, 이미지들에는 이미 성적 낙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낙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인을 소비하고 유통하는 사람들을 향한 외침이 필요하다.
- 민들레 씨처럼 흩어져 갔다.
- 뿌리가 없는 섬이므로 여기 사는 여자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여자들이 기둥서방을 두거나 미국행을 열망하는 것은 섬의 허망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TPO(시간, 장소, 상황)
- 에스닉ethnic
- 몇 년 전 한국에서는 NFL 슈퍼볼 MVP로 선정된 한국계 혼혈 흑인 하인스 워드Hines Ward가 큰 화제가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하인스 워드 덕분에 그의 어머니도 덩달아 유명세를 치렀다. 이 어머니는 동두천에서 일하던 스물다섯 살 때 주한 미군을 만나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지 불과 1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억척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 한다. 하인스 워드 어머니에 대한 전 국민의 칭송은 가족에 헌신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라면 여성들의 과거는 삭제될 수도 있다는, 관대함의 조건을 알려준다. 기지촌 출신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진입해야 자신을 향한 공적 낙인이 비로소 삭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공간인 ‘먼 곳’에서 안전하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진입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 김은실은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경제 발전을 통한 국가 건설을 위해 빠른 시간 내에 노동자들을 근대적인 개별 노동자나 계층적 범주라기보다는 ‘생산성 있는 민족주의적 집합체’로 만들어내야 했다고 지적한다.
- 이때 ‘일’은 노동자
-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약을 통한 거래라기보다는 국가와 가족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관계로서 형성된다. 반면 여성적 노동은 한국 사회에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 헌신’의 개념으로 규정되어왔다.
- 초남성화된 개발국가에서 사회는 수동적이고 무력한 지배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노동의 여성적 속성 혹은 여성의 노동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의미화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은 민족주의적 집단주의가 여성에게 부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의 개념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
- 시작되어야 한다고 김현미는 지적한다.
- 깁슨-그래함Gibson-Graham
- 그들의 공동 저작 『자본주의의 종말』에서 노동시장에 여성이 유입되고 파트타임과 임시직이 증가하면서 노동을 정체성의 기본적인 근간으로 경험하지 않
- 않는 노동 인구가 생겼다는 시대적 특성에 주목한다. 여성의 프롤레타리아화에도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과 관련된 노동 경험과 의식 모두 감소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의문시한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 담론이 쇠퇴하는 것을 계급의 정치적 관련 정도가 변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에 깁슨-그래함은 사회를 중층적인 계급 형태를 가진 복합적인 분절체disunity로 이해해야 하며, 원시 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코뮤니즘적 계급 과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함을 지적하였다.
- 이 사회를 복잡하고 불균질한 것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계급의 재개념화를 제안하는 것이다.
- 장소가 실제 계급의 중요한 구성 요소
- 동네 거주민으로서 정체화하면 당장 닥친 재개발 이슈에 대해 집결지 구멍가게 상인들이나 구두방 아저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을 수 있다.
- 내가 사는 세상이 바뀌어야 이들이 사는 세상이 바뀌고, 이들이 사는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사는 세상도 바뀔 것
- 그 시절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꿈도 꿉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흩어졌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만 미워하다가 이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의 싸움은 성을 위계화하려는 그 잣대에 대한 저항이지 그 질서에 편입되어 새로운 주류가 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 LGBT
- 상대가 동성애자인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상대의 성 정체성에 대해 모
- 모른다는 그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거나 고향을 말할 때마다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정보라는 것을 미리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조차 모를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 만약 자녀의 성 정체성이 동성애자여서 부모가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부모의 근거 없는 예상과 믿음에 의해 발생하는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 아무도 모를 일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종, 성별, 장
- 장애, 연령, 임신, 출신 국가와 민족, 언어, 국적 등과는 달리 동성애자는 피부 색깔, 외모, 언어, 신분증 등으로 단박에 식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눈에 구별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안전장치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이는 그 정체성도 투명하게 만들어버리기에 종종 동성애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존재로 취급되곤 한다. 이러한 투명화는 바로 ‘강제된 비밀’에서 기인한다. 강제된 비밀이란 자신이 일부러 비밀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갑자기 ‘비밀’을 갖게 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 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하는 것은 비밀의 내용이 아니라 비밀을 가졌다는 바로 그 자체다. 다시 말해 커밍아웃은 나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비밀을 가진 사람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커밍아웃을 통해 정작 드러나고 깨지는 것은 나의 비밀이 아니라 자기 주변엔 동성애자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환상이다.
- 환상이 깨지는 경험을 자신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커밍아웃은 감동으로 해석되지만,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 동성애를 다룬 영상물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며 상영을 반대하는 이들조차도 동성애자가 악당으로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 드라마는 거의 반대하지 않는다. 대신 동성애자가 평범한 이웃으로 다루어지고 나누는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강하게 거부하는데 바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 이런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가 있다. 바로 동성애자의 식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사회는 역으로 ‘보이지 않는’ 차이를 눈에 쉽게 띄는 전형적 이미지로 바꾸어 효과적인 통제 수단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여성스런 말투나 몸짓을 보이는 남성 패션 디자이너가 게이의 전형성이 되거나
- 모든 트랜스젠더는 하리수와 같을 것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은 매우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류의 전형성에 가까워지거나 조금이라도 닮은 점이 곧 정체성의 노출/발각으로 이어질까 봐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며, 자신이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려 해도 도리어 그 전형성에 부합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리 논리가 뒤집혀도 편견은 그대로 유지된다. 역의 성립을 인정해도 ‘만약 내 옆에 있다면 구별되지 않기에 위험하다’는 식이다. 구별된다는 편견은 구별되지 않는 것을 속인 것으로 만든다.
- 이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벽장이기에 커밍아웃을 한 다음에도 여전히 그 벽장 안에 머물러 있다. 그 벽장 안에서 나는 당신들과 똑같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기에 커밍아웃은 오히려 벽장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다.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라고 전제된 사회에서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본인이 그 사실을 알기 전부터, 또 알게 되는 그 순간에도, 알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비밀이 되는 까닭에 그런 비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그 자체가 곧 안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탓에 성판매 경험 여성이나 HIV 감염인들도 많이 경험했다시피 종종 친
- 친하다고 믿었던 이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비밀을 공유한 사이로서의 유대감이 생기는 대신 도리어 “왜 하필이면 나에게 말했느냐, 차라리 평생 숨기고 살지……”라는 원망을 듣기도 한다.
- “나는 네가 동성애자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아”라든지 “나는 괜찮아”와 같은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 열린 자세와 마음으로 커밍아웃한 친구를 위로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크게 차이가 없다. 왜냐면 그런 태도는 한편으론 친구가 그동안 이성애자인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때론
- 이성애자인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때론 견뎌왔다는 사실을 아주 가볍게 지워버린다. 상관없거나 괜찮으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이 아님에도 동성애자인 것을 개의치 않는 태도를 굉장한 관용적 자세로 착각하고, 자신은 어찌하여 지금 ‘상관하지 않아’라는 말을 던질 수 있는 위치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을 생략한다. 마치 선처를 구하는 요청에 답하는 양 커밍아웃의 의미를 전유해버리는 셈이다.
- ‘강제된 비밀’은 비밀의 내용을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비밀이 없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비밀 유지’ 자체를 덕목으로 만들면 그 유지에 동참하는 것은 질서로 포장된다. 그래서 비가시적 낙인이 찍힌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
-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할 때 ‘굳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과시하지 않아도 돼. 우린 너희를 인정해’라는 반응은 관용이 아니라 사실 더 교묘한 차별에 불과하다.
-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이하 DADT)
- DADT는 1993년에 동성애자의 군 입대와 복무를 허용할 것이냐를 두고 찬반 논쟁이 격렬해지자 당시 클린턴 정부가 내어놓은 타협안이었다.
-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은 동성애자의 표를 얻기 위해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금지한 법의 폐지를 약속했었다. 하지만
- 1993년 대통령 당선 이후 그 공약을 지키는 데 보수적인 국방부와 의회의 반대가 거세자 양쪽 모두를 달랠 수 있는 절충안으로 DADT를 제안했다. 이 법은 그해 11월에 제정되었다. 부시 정권을 지나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는 DADT의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고 대통령이 된 후 DADT를 없애겠다는 약속은 수없이 했지만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시간만 끌었다.
- 군대에서 군인들에게 동성애자인지 여
- 여부를 묻지 않고 동성애자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동성애자 군인인지 공식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동성애자 군인을 퇴출시키는 규정이 있어도 강제전역을 당하는 차별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확실히 이 정책을 시행한 이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복을 벗는 일은 감소했다. 신병을 모집할 때 동성애자인지를 물을 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예전보다 마음 편하게 군에 지원할 수 있었고, 군부대 내에서 동성애자인지를 묻는 것도 금지되었기에 굳이 대답해
- 대답해야 할 부담 없이 복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는 것은 동성애자를 일부러 색출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 동성애자를 군대에서 퇴출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역 군인이 동성애자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군대는 즉각 조사를 할 수 있고, 그가 동성애자이거나 동성 성교를 한 것이 확실히 드러나면 여전히 해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이성애자 군인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이성애자 군인도 이성애자라는 이유로, 이성 성교를 했다는 이
- 이유만으로 해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차별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동성애자 군인은 자신이 요령껏 잘 숨기는 한 원하는 만큼 군인으로 지낼 수 있을 뿐이다. 즉 DADT 정책은 한 명의 동성애자가 군인이 될 수는 있게 했지만 한 명의 군인이 동성애자로 살 수는 없도록 만들었다.
- DADT는 매우 악랄한 차별 정책이다. 동성애자는 좋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그대로 둔 채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받아들였다. 이는 동성애자에게서 동성애자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모든 능력은 가져다 쓰겠다는 것이며, 동성애자에게는 자신에 대해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임을 숨기면 군인으로 살 수 있지만 동성애자임이 드러나면 군대에서 쌓은 모든 업적을 한순간에 날리고 불명예 제대
- 제대를 해야 한다. 구조적 차별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마치 동성애자 개인의 선택이나 요령부득의 탓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DADT의 효력이 공식적으로 정지된 것은 2011년 9월 20일이었다.
- DADT 정책이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환경 속의 안전을 약속했다
- 약속했다면 이 정책의 폐지 운동은 자유롭게 ‘묻고 말하는’ 환경 속의 안전을 요구한다. 묻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권리가 될 수는 없다.
- 아웃팅Outing(본인의 동의 없이 상대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밝히는 것)
- 만약 A가 고의성과 악의 없이 B를 동성애자라고 급우들에게 소문을 내어 B가 왕따를 당하는 사건이 생겼다면 주로 아웃팅 피해 사례로 분류된다. 당사자의 동의 없는 누설이라는 점에서 ‘아웃팅’인 것은 맞지만, 이런 명명 방식은 B가 당한 왕따의 책임과 원인이 마치 A에게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왕따는 폭로 때문이 아니라 급우들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A가 폭로를 해도 급우들의 의식이 달랐다면 동성애자임을 꼬투리
- 잡아 놀리지 않을 수 있고, 설사 A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성역할에 고정관념이 강한 급우들은 B의 말투나 몸짓을 핑계삼아 괴롭힐 수도 있다. 즉, 동성애자인 B가 괴롭힘을 당할 가능성은 A의 폭로와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며, 이런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학교 내에서 소수자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과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교육의 실시가 필요하다. A에게 좀 더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한 원망은 할 수 있지만 범죄는 B를 향한 폭력과 폭언이며, 이런 상황은 안전한 공간을
- 만들지 못한 학교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아웃팅 방지가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 폭로의 위험성을 아웃팅을 방지하는 것으로 줄이고자 할 때 커밍아웃에 대한 공포가 함께 늘어난다
- 아웃팅이란 것은 누군가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았을 때 가능하므로, 그 전에 반드시 내가 누군가에
- 누군가에게 동성애자임을 직접 말했거나 내가 동성애자임을 상대가 알아챌 만한 증거를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아웃팅을 방지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절대 커밍아웃하지 않거나 부주의하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아웃팅을 둘러싼 우리의 논의는 좀 더 폭넓게 변화해야 함에도 점점 동성애자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침해로 다루어지는 것이 우려스럽다. 동성애자에게도 사생활은 있지만, 동성애자라는 사실 자체를 사생활로 만들어버려서는
- 사실 자체를 사생활로 만들어버려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이 행복을 말하는 대신, 이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보편적 권리임을 상기시키는 대신 대사회적 커밍아웃만을 개인적 용기와 결단으로 미화해 영웅시하고 아웃팅을 단순하게 범죄화해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모순에 맞물려 있는 건 아닐까.
- 동성애를 자발적 선택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말이 마치 원래는 이성애자인데 후천적으로 바꾸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 동성애자에게 선택이냐고 물어보는 일은 있어도 이성애자에게 이성애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으며 애당초 선택의 여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된다.
- 자기 인생에 좋은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계발의 실패일 뿐이며 그런 차원에서 인과응보다.
- 성구매 경험 남성들이 성판매 경험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음에도 이들에게 왜 성구매를 선택했는
- 많음에도 이들에게 왜 성구매를 선택했는지는 질문하지 않고, 성판매 경험 여성들의 선택만을 문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성판매 여성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더 위험한 존재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 2006년에 나온 성구매 남성의 실태조사
- 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성 중 58.5%는 일생 동안 최소 1번 이상의 성구매 경험이 있으며, 일생 동안 성을
- 구매한 총 횟수는 14.6회, 첫 구매 경험의 평균 연령은 22.1세라고 한다. 1년 동안(2004년 9월~2005년 8월) 전체의 21.3%가 성구매를 한 적이 있으며, 소득이 많을수록 성구매 빈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같은 시기의 다른 연구에서는 성구매 경험자들에게 향후 성구매할 의도에 대해 물었더니 절대 하지 않겠다는 17.1%에 불과했고, 기회만 된다면 하겠다는 8%였다. 하지만 가급적 하지 않겠다(38.2%),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다(36.6%) 등 적당히 분위기만 맞으면 굳이 거부하지
- 않겠다는 의견이 74.8%로 성구매가 남성들에게는 특별히 거부감이 없는 문화임을 알 수 있다.
- 성구매 남성은 외부의 방문자로 성매매 현장에 왔다가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돈을 지불하고, 다시 유유히 소위 그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성판매 여성들에게 성매매 현장에서
-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 곳이라고 제시하는 사회란 어디인가. 바로 그 성구매 남성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회다. 다시 말해 탈성매매를 한 여성의 입장에서 돌아갈 사회란 이전의 성구매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인 셈이다.
- HIV를 사람이 감염되는 바이러스의 한 이름으로, 에이즈를 사람을 아프게 하는 병의 한 이름으로는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서 겪는 일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캠프에 함께 온 사람들 중에 감염인이 있을 가능
- 가능성도, 하다못해 감염인의 친구나 가족이 있을 가능성조차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에이즈에 대한 지식의 부족보다, 도덕적 삶에 대한 유치한 강박보다 바로 이런 태도가 더 문제이지 않겠는가. 인간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은 항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감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익히 지적한 것처럼 ‘은유로서의 질병’에 갇힐 때 우린 훨씬 더 참혹한 현실에 갇혀 서로에게 잔인해진다. 처음엔 낯설었던 공포가 사회적으로 완전히 공유되고 정착되면 그 자체로 도구화된다. 여기에 사람은 사라지고
- 도구화된다. 여기에 사람은 사라지고 혐오만이 날을 바짝 세워 모든 것을 베어버린다.
- 감염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여전히 감염되지 않았다는
- 안심 또한 그 검진을 통해 얻을 수 있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 사회적 약자들이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회가 예상하는 것보다 반드시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 1985년 12월에 첫 내국인 감염인 발견
- 특수업태부
- 동성애와 에이즈를 분리하려는 이런 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질환이든 그것을 이성애자의 병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성애자의 99.9%가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성애자의 병으로 불리지도 낙인찍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리는 병으로 불릴 뿐이다.
- 조류독감과 구제역이 발병했을 때 엄청난 구덩이에 파묻혀 죽임을 당하는 건 닭과 오리, 돼지와 소
- 소임에도 공포는 우리가 먼저 느낀다. 하지만 타자화는 내 안의 공포를 직시하는 대신 외부의 삶의 맥락을 지우는 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인한다.
- 분기마다 발표하는 HIV 감염인 통계는 현재 우리 사회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의 규모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무서워하고 조심해야 할 감염체의 숫자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얼마나 빠르게 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수가 통계에 누락되었는지, 그마나 파악된 이들이나마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감독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
- 이야기가 구성된다.
- 일을 하다가 감염되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의 흔적일 수도 있으며, 기억하기도 싫은 폭력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또 언제였을지도 모를 만큼 사소한 어떤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 LGBT는 Lesbian, Gay, Bisexual,Transgender의 약칭.
- ‘B・L’은 Boy’s Love의 약자로, 남성 동성관계 표현물 중에서 미소년이 주축인 이야기를 말한다. 관련된 용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절정 없고(ヤマなし 야마나시), 완결 없고(落ちなし오치나시), 의미 없다(意味なし이미나시)의 첫 음절을 딴 ‘야오이’가 있다.
- ‘야오이 혹은 야오녀’와 중첩되어 쓰이는 ‘동인계 또는 동인녀’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커뮤니티적 창작 실천에 중심을 두
- 두고 사용되었다. 그 밖에 ‘장미물’이라고도 하는 남-남관계 표현물에 대비해, 여-여관계 표현물을 지칭하는 ‘백합물’도 있다. 물론 B・L에 대응하는 G・L Girl’s Love 등도 통용되고 있다.
- “계집에겐 관헌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한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헌의 자격을 지닌 사
-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 강상綱常
-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 한문眞文
- 로망스는 애초 라틴어에 대해 방언이었던 ‘노만스’어로 쓰여진 이야기였다. 대체로 기사들의 황당무계한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다룬 기이하고 모험적인 특징을 가진다.
- 재자가인才子佳人
- 오락을 추구할 뿐이라는 이야기들에서 때로는 모럴, 그 이상이 생성되는 경우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 거관수학居館修學
- 여화위남女化爲
- 팬픽과 야오이물이라는 인터넷이나 동인계 중심의 문화를 ‘팬픽 문화’로 일컫는다. 이것이 드라마나 영화 등 일반 대중의 보편 문화로 확대생산된 것은, 오히려 “동성애가 금지의 형식으로 문화 한가운데로 들어와 선취된 배제로 작동”한 때문이다.
- 임윤지당
- 강정일당
- 『박씨전』, 『숙향전』, 『홍계월전』, 『방한림전』 등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성균관 정도가 아니라 전쟁에 나가고 국난을 극복하고 결국 왕의 인정까지 받는다. 전술했듯 이 여성 영웅들 역시
- 공적 참여를 위해서 우선 남장여자가 되어야 했다. 이 장치를 통해 여성은 자신에게 놓인 시련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일정한 젠더 질서를 위반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임진・병자 양란兩亂 이후 기존 사회질서가 동요하는 틈을 타서 새로운 젠더 의식이 싹튼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 남성들이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자임하기 전, 소설은 여자들이나 읽는 것이었다. 그러다 리얼리즘을 중심으로 근대소설의 골간이 만들어지자 여자들의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어떤 것이 되었다. ‘패관소설’이 ‘소설문학’으로 전환한 데는 여성의 자취가 사라지는 소설이라는 단어 자체의 젠더화가 있었다.
- 방각본
- 세책가
- 동성서사를 읽고 쓰는 일군의 여자를 지칭하는 ‘일본의 후죠시腐女子’, 중국의 ‘푸뉘족腐女族’, 그리고 한국의 ‘부녀자腐女子’가 바로 그들이다.
-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팬픽은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결합하여 여타의 비판과 배제에도 불구하고 번성했다. 오히려 금전의 대가가 필요 없고 제도적 지원과 상관 없었기에 사회적 성규범 및 이성애 섹슈얼리티 중심의 금기와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이반queer’
- 팬픽의 이중 젠더화, 즉 오로지 여성이 그를 향유하는 주체이면서, 또한 단지 남성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 이 대상과 주체의 확연한 구분,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을 자발적으로 소거하고 남성으로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극단적 실천
- 팔루스적 상징 법칙
- “포르노는 에로틱한 표현물을 소비하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억압에 그 개인이 어떻게 자의 타의로 공모하는가 하는 문제에 더욱 가깝다.”
- 남성 ‘오타쿠’는 성범죄적 측면에서 문제시되는 게 많은 한편, 여성 ‘동인녀’는 연애-결혼-출산 등 자연화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탄받는 경우가 다수라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근대적 주체로 ‘교정’되어야 할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후자는 아직 어떤 취향에서 ‘졸업’하지 못한 상태 그 자체로 인식된다.
- 사이토 다마키는 ‘오타쿠’의 성에 대한 태도에 있어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즉, 남성은 우선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확립하여 시각적인 실현에 몰두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여성은 자신을 말소한 무대에서 연기되는 남성끼리의 관계성에 열광한다. 이때 전자는 대상을 ‘가지고 싶다’고, 후자는 대상 그 자체가 ‘되고 싶다’고 바란다. 이 소유와 수행의 차이는 중요하다.
- “대부분의 야오녀들이 실제 동성애자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환상과 현실 사이에 어떤 쉼표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 다름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 이야기들이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환상을 만들어내었다는, 그 효과에 대한 증거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 ‘팬픽 이반’에 대한 호들갑스런 우려는 남성 동성서사를 즐기는 여성
- 여성이 어떻게 탈규범적 실천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질문하지 않는다. 결국 이 존재들은 무분별한 팬덤 문화라는 비판 속에서 흐려졌다.
- 여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잘 휘둘린다는 비판은, 아마 일말의 진실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금지가 욕
- 욕망을 낳는다고 할 때 여성은 그 폐쇄된 사회적 위치로 보다 많은 것을 소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 가능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이야기는 나타나고, 낯선 상상에서 더 나은 현실이 움트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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