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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의 쓸모
    Books 2022. 10. 10. 17:29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85025123?query=%EC%B2%A0%ED%95%99%EC%9D%98%20%EC%93%B8%EB%AA%A8&NaPm=ct%3Dl98nc494%7Cci%3D1093d6df57a95b47718c84d4fd9eedbf89c6060a%7Ctr%3Dboksl%7Csn%3D95694%7Chk%3Df9129289d9e13864e0cdf91d34269bbb9ddd5ae2 

     

    철학의 쓸모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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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

     

     

     

     

    들어가며


    여행을 하다가 앞길이 막히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막히지? 사랑을 하다가 실패하면 묻습니다. 왜 실패했지? 공부를 하다가 좌절하면 묻습니다. 왜 안 되지? 살다가 의미를 잃으면 묻습니다. 왜 살지?   길이 잘 뚫리면, 사랑에 들떠 있으면, 공부가 잘되면, 잘 살고 있으면 물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하지만 가던 길 막히면, 사랑이 떠나가면, 공부가 안 되면, 인생의 의미를 잃으면 물음이 시작됩니다. 철학의 시작입니다.

    물음이야말로 철학의 본령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물음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의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물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철학은 발원합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물음입니다. 좋은 답을 얻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잘 묻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의 쓸모는 물음이고 의문입니다. 철학은 상식의 확인이 아닙니다. 다수가 동의하는 것을 따르는 합의도 아닙니다. 차라리 철학은 상식에 대한 반격이고, 다수결에 대한 의문이며, 진리에 대한 회의입니다. 이 물음의 대상에서 권력도, 재력도, 심지어 진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에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아무런 권력도 없으나 권력자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아무런 재력이 없으나 재력가의 근본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진리의 담지자라 자부하는 종교도 철학의 물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에 모든 것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철학입니다. 물음을 억압하는 것을 독재라고 합니다. 단 하나의 진리만이 용인되고,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인정받는 사회를 독재 사회라고 합니다.

    물음이 사라진 곳에 독재의 독버섯이 자랍니다. 물음이 넘치는 곳에 민주주의의 꽃이 핍니다. 물음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면 철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그러나 물음이 필요한 세상이라면, 철학은 필수불가결입니다. 철학의 쓸모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1강, 차라리 당당한 소인이 낫다 - 공자와 플라톤에 관하여

     

    화이트헤드의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

    주나라는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폭정에 저항했던, 은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신하의 나라였어요. 은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주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강태공(姜太公)의 강(姜)족과 연합해서 자신의 군주국에 쳐들어간 것이죠. 역성혁명, 한마디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중국을 장악했지만, 그 권력이 강대하지는 않아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은나라 정복에는 성공했어도, 자신과 함께한 다른 나라들을 다시 무력으로 정복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요. 마땅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나라는 자신을 중심 국가로 세우되, 다른 나라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종법(宗法) 제도와 봉건(封建) 제도입니다. 종법 제도가 권력의 계승과 관련된 제도라면, 봉건 제도는 권력의 분할(더 정확히 표현하면 토지의 분할)과 관련된 제도입니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왕이 자기 첫 번째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고 나머지 아들에게는 변방에 성 하나를 만들어서 주는 겁니다. 가까이 있으면 권력 다툼이 일어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자기 피붙이 또는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도 땅덩어리 하나씩을 물려주지요. 그러니까 지배 세력들끼리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거죠. 그렇게 어느 지역에 두 번째 왕자가 내려갔다 하면 그 두 번째 왕자가 제후국의 제후가 됩니다. 그러면 이 제후의 많은 자식 중에 또 그 첫 번째 아들만 제후가 되고 나머지 자식들은 그 통치 지역의 변방으로 내보냅니다. 그렇게 통치 영역을 분할하면서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이죠. 중국 전역을 그런 식으로 분할 통치하면서 지배 계급을 혈연으로 연결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기 식구, 자기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서쪽 오랑캐가 침범해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이 불타버리고 왕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도를 더 안전한 동쪽의 내륙 지역인 낙읍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른바 동주(東周)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요.

    이렇듯 서쪽에서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제후국들의 충성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후국들은 각각 독립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나라를 다 차지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야망도 갖게 되지요. 아수라장이 될 게 불 보듯 뻔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주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나라가 망하지 않고 세력이 남아 있던 시대, 질서가 혼란스럽긴 하나 질서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시대가 바로 춘추 시대(春秋時代)입니다. 그러한 춘추 시대 말에 공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전국 시대(戰國時代)는 말 그대로 ‘전쟁하는 나라’입니다.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지요.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전쟁 양상이 굉장히 신사적이었습니다. 전쟁도 어디서 만나자, 얼마의 규모로 만나자, 어떻게 싸우자 등 약속을 하고 벌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져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끝나곤 했지요. 그런데 전국 시대가 되면서 평야가 아니라 적국에 직접 들어가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규모도 엄청나고 전쟁 기간도 길어지지요.

    공자는 춘추 시대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나라가 세워진 것은 주공(周公) 덕분이지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장악한 것은 무왕(武王) 시대였지만, 주나라의 제도를 정비하고 주나라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주공이라는 탁월한 인물 덕이었습니다. 주공은 자신의 형제인 무왕이 죽자, 무왕의 아들인 어린 성왕이 성장하여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주나라를 지켰어요. 신하의 신분을 지키면서 자신의 조카를 보호하는 아주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런 주공의 충성스러움에 감동해 주공의 후예들에게 준 나라가 바로 노나라입니다.

    이렇듯 공자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시기는 중국에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기이자 왕이 왕 노릇을 못하고 제후도 제후 노릇을 못하는, 모두 각자도생의 길을 도모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파르타의 왕이 죽고 나자 함께 응전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에서는 창피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스파르타를 공격하는 양상이 너무 잔인하니까요. 씨도 안 남기고 죽여버리니, 자기 나라의 운명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연합군을 만들어 페르시아와 해전을 치르게 됩니다. 승승장구하는 페르시아 군과 보잘 것 없는 해군들을 수습하여 출전한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의 싸움은, 전력 면에서 페르시아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800척의 대형 갤리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리스 연합군은 370여 척의 소형 갤리선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페르시아는 이 해전을 통해 지중해 전 지역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와 살라미스 해협에서 치른 해전에서 기적처럼 페르시아군을 대파한 것입니다.

    그 결과 스파르타와 더불어 도시 국가인 폴리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아테네가 일약 지중해의 패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지중해 주변 도시 국가들과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맺고 페리클레스 통치 아래 민주 정치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약 50년쯤 이어진 이 시기에 아테네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황금시대를 누렸습니다. ‘아테네 제국 시대’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에 아테네는 주변 동맹 국가들에 동맹 기금을 강요하고 정치적으로 절대적 힘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지나친 성장과 독선적 행위에 불만을 품은 나라들이 하나둘 생겨납니다. 이 나라들은 회의를 열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하지요. 그러니까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겁니다. 무려 27년 동안이나 싸웠던 이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입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결과를 말하자면, 스파르타가 승리합니다. 패전국이었던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게 인도하고, 델로스 동맹을 해산합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민주 정치가 후퇴하면서 ‘30인 정치(과두 정치)’를 수립하게 되지요. 이후로 아테네는 다시 민주 정치를 회복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하여 쇠퇴의 역사를 걷습니다.  

    이 모든 시기가 바로 플라톤과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가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아테네 제국 시대에 아테네가 모든 상권, 정치 권력의 중심이 되자 해외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이 하나둘 아테네로 들어옵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소피스트(sophist)라고 부릅니다. ‘소피(sophy)’라는 말 자체가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지식인들이 아테네로 다 모이지요.

    귀족의 정치에서 이제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말 굉장히 드문, 당시로서는 아테네만이 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실험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다 정치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재판을 할 때면 아테네 시민 중에서 추첨을 통해 재판을 할 사람을 뽑았습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그 민주주의에 의한 재판을 통해 사형당했다는 겁니다. 굉장히 큰 사건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본토 사람이거든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를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다 지혜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대중이 다스리는 민주주의 정치보다는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귀족 정치를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대세는 귀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였습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참 귀찮은 인물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재판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친 스파르타 과두 정권이 아테네 시민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자 중에는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정권이 얼마 후 실권을 하자 다시 아테네 민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거죠.

    공자의 아버지는 대부(大夫)의 신분이었습니다. 귀족이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그 밑에서 서자로 태어난 공자는 대부가 아닙니다. 대부의 적장자(본처의 맏아들)만이 대부의 지위를 계승하고, 나머지 자식들은 사(士) 계급이 되지요. 선비라 해석되는 사(士)! 문제는 대부까지가 귀족이고, 사(士) 계급부터는 평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조선조 때 통치 계급을 사대부(士大夫)라고 말하지요. 그건 이 사(士)와 대부(大夫)를 합친 말입니다. 이 사대부가 조선 시대에는 귀족 계급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공자의 시대에는 대부의 맏아들만 대부가 되고 대부 계급만 귀족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 자식들은 사(士) 계급, 즉 평민인 것이지요. 우리가 보통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이라고 말하는데, 원래 사농공상은 평민의 역할에 따른 호칭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선비와 농민과 공인과 상인은 같은 평민 계층에서 직종만 다른 거예요. 같은 급, 다른 직종.

    대부였던 공자의 아버지가 일흔 살에 공자 엄마를 만났습니다. 공자의 엄마는 무당 출신이었습니다. 아주 하찮은 신분이지요. 열네 살에 공자를 낳았다고 하네요. 일흔 먹은 양반이 결혼 안 했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공자 엄마는 본처가 아닙니다. 첩이지요. 첩 중에서도 정식으로 들인 첩이 아니라 들판에서 야합(野合)한 첩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사생아와 같은 자식이 공자인 거죠. 그러니까 공자는 결코 아버지의 대부 지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지요. 게다가 아버지가 공자 나이 세 살에 사망합니다. 끈 떨어진 연이라고, 자신을 지켜줄 아버지는 일찍 죽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밖에 없는 불우한 서자(庶子)가 바로 공자였습니다.

    공자는 쉰하나의 나이에 중도재의 벼슬에 오릅니다. 중도라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인데, 지금으로 치면 무슨 지방자체단체장쯤 되는 거예요. 쉰셋이 되니까 사공(건설부장관)의 벼슬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구(법무부장관)로 승진하지요. 대사구의 벼슬에 오른 후, 공자는 먼저 삼환씨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어요. 이 삼환씨가 아까 말했던 노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세 대부들의 성씨인 맹손, 숙손, 계손씨입니다. 재미난 점은, 노나라가 하나의 나라라면 성(城) 하나로 나라 전체를 커버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점이지요. 대부들이 자기네 영토에 또 성을 쌓아 나라 안에 나라를 만든 겁니다. 왕이 그 성에 들어갈 때도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 하고 따로 사병들도 있으니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건 예법에 맞지 않는다. 한 나라는 하나의 권력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비록 너희들이 권력을 가진 대부들이지만 그건 동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나라가 갈라지면 되겠느냐, 알아서 성곽을 헐어라’, 그렇게 설득하니 명분에 밀려서 두 대부가 자신의 성곽을 헐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하나만 더 부수면, 공자의 개혁 정책, 왕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개혁 정책이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 성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다시 세 성씨가 모입니다. ‘공자가 우리 집안 다 말아먹는 거 아냐? 그럴 것 같지? 공자를 없애야겠어!’ 이렇게 모의하지요. 공자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대신 세 명의 대부들이 작당을 해서 그다음 해 공자의 관직을 박탈해버려요.

    공자가 돌아다니면서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는데 그 중에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공자는 이미 정치 세력화되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권력자들은 공자를 뽑아 쓰게 되면 그 제자들까지 권력의 지분을 나누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공자보다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한두 명을 뽑아서 쓰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 중에는 벼슬 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자는 10년 넘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변변한 벼슬 한번을 제대로 못합니다.

    공자에게는 아주 뛰어난 세 명의 제자가 있는데요. 안회(顔回), 자로(子路), 자공(子貢)입니다. 안회가 인(仁)을 대표한다면 자로가 용(勇)에 해당하고, 자공이 지(智)에 해당합니다. 공자의 뜻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안회고, 싸움을 제일 잘하는 게 야인 출신의 자로였지요. 그다음 나름대로 CEO 출신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게 자공입니다.

    그런데 마침 노나라에서 공자의 제자 중 하나가 무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지금 우리 공자 선생님께서 쉰다섯의 나이에 나라를 떠나서 예순여덟이 되도록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자님을 모셔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공자는 그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늙어 중앙 정치판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자는 자기의 원래 고향인 곡부로 내려갑니다. 공자는 곡부에서 조그마한 학교를 만들어서 제자를 양성하고 책을 쓰기 시작하지요. 직접 저술을 하지는 않고 많은 책을 편찬해요. 공자가 유일하게 자기의 관점으로 쓴 책이 딱 한 권 있어요. 이 책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리라 자평했던 책이지요. 바로 《춘추》입니다.

    공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춘추》때문이 아니에요. 《춘추》는 역사학도도 잘 안 읽는 책입니다. 공자는 죽고 나서 제자들이 공자의 어록을 모아놓은 책으로 유명해집니다. 그게 바로 《논어》예요. 그러니까 논어는 공자가 쓴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쓴 것이죠.

    3남 1녀 중 막내였던 플라톤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리스토클레스라는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였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스 같은 몸매였나 봐요. 그래서 체육선생이 넓다, 평평하다는 뜻의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죠.

    플라톤은 원래부터 정치가를 꿈꾸었어요. 정치를 하려면 말을 잘해야 하지요. 말을 잘하는 것의 최고봉은 시를 쓰는 겁니다. 당대 시 장르 중에서 최고는 비극이라고 해요. 그래서 비극을 연마하고 스무 살 때 비극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그때 소크라테스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흠뻑 빠져버려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죽게 돼요.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사형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의 법정에서 법에 의해 사형을 당한 거지죠. 그로 인해 플라톤은 정치에 환멸을 느낍니다. 다시는 정치를 꿈꾸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떠돌아다녀요. 방랑의 시기죠. 그때 만났던 여러 지식인들 중에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사상 같은 것이 느껴져요. 피타고라스는 수학자거든요. 플라톤은 자기 학교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면 들어오지 마라’라고 아예 써놓았어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시라쿠사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서 참주 디오니시오스와 그의 처남 디온을 만나게 되지요. 여기서 디온이 플라톤의 사상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디온은 플라톤에게 자신과 함께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해보자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어요. 10년 동안이나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좌절되고 말지요. 이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우리는 플라톤을 단순히 철학자라고 생각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플라톤이 만든 유명한 교육기관 이름이 뭔지 아시죠? 아카데미아. 오늘날 학원이라고 하는 ‘아카데미(academy)’의 어원이죠.

    공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개념은 인(仁)과 예(禮)입니다.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공자에게 “선생님, 인이란 게 뭡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답합니다.

    ‘극기복례’에서의 ‘나’는 ‘사람다운 나’가 아니고 ‘이기적인 나’입니다. 그렇다면 ‘예’는 ‘사람다운 나’가 갖춰야 할 자질이 되는 거고요. 이기적이고 개인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버리고 이타적이고 공동체적 가치로 돌아가자는 것이죠.

    가족이 공자가 생각하는 모델이에요.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골고루 세상에 나누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극기복례’라는 말 자체가 공동체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공자는 욕망의 시대였던 춘추 시대 말, 모든 사람이 자기 것만 뜯어서 취하려고 하던 시대에 자기 것만이 아니라 골고루 나누어주는 세상을 꿈꾼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한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어요. “나라가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나라의 재산이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

    주나라의 질서를 복원하려면, 또 그런 것을 주장하려면 원래 기득권이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주나라 황실의 기득권이 있는 사람이 주장해야 자연스럽잖아요. 그런데 공자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런 출신이 아니에요. 옛날에는 사람이 두 계층으로 나누어졌어요. 인(人)과 민(民). 인(人)이 귀족이라면 민(民)은 평민이에요. 공자는 평민이니 원래 기득권이 하나도 없던 사람이라고요. 그러니까 공자가 꿈꾸는 구상은 자기가 살아왔던 것을 지키기 위한 구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구상인 것이죠.

    그렇듯 질서 정연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개념 정립입니다. 개념을 정리해 나가는 게 정명(正名)이에요. 바를 정(正), 이름 명(名)을 합쳐 정명(正名)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지요.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 중에 정명에 해당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혼란기잖아요. 혼란기에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유행했던 사상이 법가(法家)예요. 법가는 새로운 질서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자는 것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세력인 거죠. 그런데 공자는 법가를 제일 싫어했어요.

    공자처럼 인과 예로 다스리는 정치를 왕도 정치라고 한다면, 힘과 법을 통해서 다스리는 정치를 패도 정치라고 하지요.

    공자의 위대함이 인간성의 본성인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대안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지극히 과거 지향적이고 지극히 온정적이었다는 것도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소인’이라는 개념은 ‘대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대인’은 본처의 장자에게만 붙여지는 호칭이고, ‘소인’은 본처의 자식이라도 둘째나 셋째, 또는 후처나 첩의 자식에게 붙여지는 호칭이었지요. 대인은 ‘대종지인(大宗之人)’의 약자이고, 소인은 ‘소종지인(小宗之人)’의 약자예요. 대인은 권력 승계를 하는 귀족이라면, 소인은 권력 승계에서 멀어진 귀족이지요. 권력의 안정성을 꾀하려면 룰이 있어야 하겠지요. 본처의 맏아들(적장자)에게만 권력이 계승되는 것이 종법 제도의 핵심입니다.

    평민 계급이 바라는 이념이 곧 ‘평등’이거든요. “귀족하고 내가 뭐 다를 게 뭐 있어?”라며 평등을 추구하지요. 그래서 소인은 동(同), 이퀄리티(equality)를 원했던 것이죠.

    그에 반해서 적장자 귀족 계급은 화(和)를 바랍니다. 화는 바로 조화예요. 조화라는 말은 의미는 멋있지만 계급의 질서, 다시 말하면 신분 질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형태로 있어야 가능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논어》에 보면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즉 평등을 원하나 조화롭지 않고, 반대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조화를 추구하고 평등을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논어》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도 있어요. 의로움은 분배죠. 분배는 전에 말씀 드린 대로 가족을 유지하는 질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利)는 뭐예요?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자기가 스스로 취하는 것이죠.

    끊임없이 군자는 이러하고 소인은 이러하다는 대비의 개념이 논어에 계속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기존의 질서인 신분 제도를 끝까지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그 위계에 올라가려 하는 서자 출신의 소인 공자가 품은 탈신분적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말씀드렸다시피 스승의 죽음을 경험하는데, 그 죽음의 배경에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그 전에는 과두 정치라고 해서 귀족이 다스리는 정치였지요. 그리고 귀족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요. 플라톤은 원래 귀족이었고, 귀족이 다스리고 싶은 통치 시스템을 원했던 겁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귀족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탁월한 귀족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도덕적으로 탁월한 귀족이 가져야 하는 항목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선의 이데아예요.

    판단의 가장 추상적 기준이 되는 것, 그건 눈에 안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이데아라고 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판단을 할 수 없는 것. 그런 것처럼 가장 선한 정치인은 선한 정치의 이데아를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그러한 역할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철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구성원을 통치자와 수호자, 일반 시민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런 세 상징은 계급을 나눌 때에도 사용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인간 속에는 사람과 사자와 괴물이 공존하지요. 그런데 사자의 힘이 인간 쪽으로 붙으면 지혜로운 힘이 되지만, 괴물 쪽으로 붙으면 무질서한 폭력이 되는 겁니다.

    이성과 격정과 욕구, 이 셋 중에 무엇이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성이 결정 난다는 거죠.

    다시 말해 철학자는 이 세 가지 항목 중에서 이성적 요소가 가장 발달한 인간이고 수호자들은 격정적 요소가 잘 발달한 사람이고, 평민들, 노동자들은 괴물적인 요소가 발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자를 컨트롤하고 괴물을 다스려야 하듯이, 인간 사회도 질서 있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탁월한 소수인 철학자가 통치를 하고, 그 통치자의 통제 하에 수호자들인 군인들이 있어야 하고, 군인들의 통치 하에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철저히 판타지적인 구도를 그려놓은 것이죠.

    플라톤의 주저인 《국가》의 원 제목인 ‘폴리테이아’라는 말은 ‘국가’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정치 체제’를 뜻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들은 플라톤의 《정체》라고 번역한 책들도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국가론》으로 변역되어 있습니다.

    민주 정치의 가장 끝은 뭐냐, 독재자의 탄생과 더불어 민주 정치의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참주 정치로 끝난다고 본 것입니다. 참주 정치는 오늘날로 치면 독재 정치죠. 그러면 레벨로 치면 지금 민주 정치는 밑에서 두 번째, 망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이라는 거죠. 이게 플라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이지만 진짜 추구했던 정치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바로 스파르타예요. 아테네의 철학자가 꿈꾸는 정치 모델이 스파르타의 귀족 정치였던 것이죠.

    질서가 완전히 엉망진창이고 유일하게 ‘나는 자유다!’ 하는 이념만이 퍼져 있는 사회, 그게 바로 플라톤이 바라본 민주주의 사회였습니다.

    소인과 일반 시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품었던 것은 오히려 공자의 반대편에 있었던 장자나 묵자 그리고 플라톤의 반대편에 있었던 소피스트들의 몫이었지요.

     

     

     

     

    제2강,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 맹자와 루소에 관하여


    맹자는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년) 사람입니다. 한비자보다는 두 세대 선배라고 보면 되지요. 한비자가 순자의 제자라고 알려졌는데 맹자는 순자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서양의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년)가 살았던 시대는 계몽주의 시대, 다시 말하면 근대가 막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배가 이루어지고, 종교적으로는 교황을 중심으로 지배되었습니다.

    공자가 태어난 나라가 노나라입니다. 노나라 밑의 조그만 나라가 추나라입니다. 맹자는 거기서 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잘나가는 귀족이 아니라 몰락한 귀족 집안이었지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물론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가 노나라 때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올라갑니다. 법무부장관쯤 되면 왕이 자동차 한 대쯤 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자동차 한 대 격인 수레를 준 것이죠.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노나라에서 쫓겨날 때는 월급도 못 받고 땅도 도로 반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레는 반납을 안 해도 되었나 봐요. 어쨌든 공자가 이 수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제자가 죽어 장례를 치르려고 해도 수레를 부수지 못하게 합니다. “관이 없어 관을 짜야겠는데 수레를 부수어 관을 짜면 어떨까요?” 하니까 “안 된다, 내가 이걸 부수면 어쩌겠느냐, 나의 근거가 사라진다.” 하며 거부하지요. 심지어는 아들이 죽었을 때도 수레를 못 부수게 해요. 당시로 치면 수레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였던 셈이지요.

    맹자가 전성기 때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양(梁)나라 혜왕(惠王)입니다. 양 혜왕은 원래 위(魏)나라의 혜왕이에요. 위나라는 전국 시대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거든요. 그런데 잦은 전쟁을 치르면서 땅도 많이 빼앗기고 수도도 안읍(安邑)에서 동쪽인 대량(大梁)으로 옮기게 됩니다. 위나라의 땅이 엄청 줄어든 거죠. 그 후로 위 혜왕이 아니라 양 혜왕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전국 시대를 제패했던 패군중의 하나였지만, 이제는 기운이 떨어져버린 사람이 바로 양 혜왕입니다.

    혜왕은 당연히 자기네 나라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 맹자가 오면 자기네 나라를 다시 중흥을 시킬 비책을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맹자더러 그냥 놀러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맨 먼저 “그대는 먼 곳에서 오셨는데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맹자는 엄청난 돈을 받고 왔으니까 무슨 이익을 줄 거라고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맹자는 오히려 쌀쌀맞게 굴어요. “저를 여기까지 불러놓고서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되물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나에게는 인(仁)과 의(義)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맹자가 뛰어난 사람이란 걸 알았기에 계속 붙잡아둡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양 혜왕은 죽고 맙니다. 양 혜왕이 죽자 아들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바로 양왕(襄王)이지요. 맹자가 아들을 살펴봤더니 약간 상태가 안 좋아요. 혜왕은 그래도 자신을 잘 대접하는 왕이었는데 양왕은 대접도 안 해줘요. ‘아,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 여기면서 딱 일어섭니다.

    그래서 옮겨간 나라가 제나라입니다.   전국 시대 가장 큰 나라가 세 곳이 있었는데 동쪽으로 제(齊)나라, 남쪽으로 초(楚)나라, 서쪽으로 진(秦)나라였습니다. 그중 맹자가 자신의 전성기 때 가장 오랜 기간 있었던 나라가 제나라예요. 그때 맹자가 만났던 왕이 바로 제나라 선왕입니다. 제선왕은 맹자를 아주 잘 대접합니다. 참 재미난 게 맹자는 제선왕의 신하가 된 적이 없어요. 신하가 되면 왕 밑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신하는 왕의 말을 들으며 자기 직분을 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 맹자는 제나라 왕의 신하가 되기 위해서 간 게 아니에요. 왕의 자문 위원, 곧 왕의 스승이 되기 위해 간 것이죠. 그러니까 신하 급이 아닌 겁니다. 맹자는 제나라에 가서 최고 자문위원쯤 되는 경(卿)의 대접을 받습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

    맹자에게 물어보죠. “연나라를 쳐야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맹자는 “연나라가 어려우니까 연나라를 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해요. 그걸 쳐도 된다고 듣고 연나라를 쳐요.

    이 사건은 맹자와 제선왕의 관계가 틀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맹자는 나와야 된다고 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계속 거기 있으면 폭군이 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요. 그러나 이 땅이 워낙 큰 덩어리거든요. 제선왕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맹자는 제나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아요. 그러고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보다 생각하고는 자기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로 맹자는 큰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추나라 주변에 있는 조그만 나라들만 돌아다니지요.

    나라의 초청을 받아 돌아다니면서 인정을 베풀기 위해 여러 조언을 했으나 이것을 실행할 나라는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맹자는 말년에 더 이상 돌아다녀봐야 정치적 효과가 없겠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자기의 책을 썼습니다. 《맹자》는 맹자가 정리한 책인 동시에, 맹자 문하의 많은 제자들이 맹자와 함께 토론을 하면서 맹자의 책을 정리한 것입니다.

    루소 생애의 특징은 ‘광기와 방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의 광기와 방랑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운명 지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으면서 돌아가십니다. 아버지가 키워야 하는데 키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목사에게 루소를 맡기고 제 갈 길을 갑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조실부모(早失父母)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루소는 자기의 불우한 나날을 독서를 통해서 버텨냅니다. 옛날에는 논문 같은 걸 공모해서 1등을 하면 상 주는 게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논문 공모한다는 전단을 우연히 딱 보고서 ‘어라? 저거 해볼 만한데?’ 하고 논문을 순식간에 딱 써서 냈어요. 어떻게 됐게요? 1등으로 뽑힙니다. 그 논문이 바로 《학문 및 예술에 관한 논고》(1750)입니다. 루소가 살았던 시대의 지배적 사조는 계몽주의였습니다. 그러면 1등으로 뽑힌 루소의 논문이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루소는 정반대의 논조로 썼어요. 학문과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자가 자기의 간악한 지배를 미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모든 학문은 가짜다, 모든 예술은 가짜다! 이렇게요.

    그다음에 응모한 작품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입니다. 자기가 학문과 예술에 관한 논고를 쓰고 나서 그 논지가 좀 아쉬웠는지, 논지를 강화하면서 보다 근본적으로 근대 사회를 분석하려고 했던 논문이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지요. 지금 루소가 살고 있는 시대가 불평등한 시대라는 거예요. 사실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중세보다 훨씬 사회가 평등하다고 믿었어요. 인간은 자유, 평등, 박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데 거기에 뜬금없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딱 내민 것이죠. 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루소 사상의 정수입니다. 왜 인간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가를 논증한 아주 기가 막힌 책입니다.

    그 이후에 루소는 교육소설 《에밀》과 《사회 계약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사상에 근간을 두고 쓴 책 입니다. 그리고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루소의 책은 금서로 낙인찍히고, 동시에 루소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루소는 도망을 시작하지요. 그런 도발적인 반항아 루소를 호의로 받아준 사람이 많았어요.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경험주의 철학의 대가 흄(David Hume)을 들 수 있지요. 그런데 이때 이미 루소는 약간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고, 감시하고, 자기한테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도 혹시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하나의 함정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의심하고, 성마르게 화내고, 천재성을 발휘하다가도 갑자기 휙 토라지곤 했습니다.

    루소가 결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시중들던 하녀와 결혼했지요. 그리고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다섯 아이를 모두 직접 키우지 않고 고아원으로 보내버렸습니다. 루소가 쓴 교육 소설 중 《에밀》은 어찌 보면 고아원에 보내버린 자기 자식을 생각하며 쓴 건지도 모르지만, 교육 소설을 쓴 사람이 다섯 이나 되는 자기 자식을 전부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을 통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 법가 사상이지요? 그것은 법이 없는 사회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생각을 전제할까요? 인간은 악하다는 생각을 전제하겠지요. 악하니까 악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그런 폭압적인 정치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잘 살려주면 인간의 삶은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선하다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또는 그보다 좀 더 순정적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은 태어날 때는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데 선한 환경을 만나면 선해질 수 있고, 악한 환경을 만나면 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원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선과 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자는 성무선악설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사례를 듭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물을 듭니다. 물은 탕탕히 흘러갑니다. 막히면 고이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넘쳐흐르기도 하지요. 고자가 보기에 물의 성질은 인간의 본성과 유사합니다. 막 움직이고 싶어 하지요. 그런데 움직이고 싶어 하는 물의 물길을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흘러가겠죠? 서쪽으로 트면 물이 서쪽으로 흘러가고요? 그처럼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저 물처럼 흘러가고 싶은 것인데, 그것을 선한 쪽으로 이끌면 선하게 되고, 악한 쪽으로 이끌면 악하게 된다는 것이 고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선과 악 이전에 인간의 본원적인 생명력, 탕탕하게 흘러가는 본원적인 생명력을 좀 더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자가 이런 말을 해요. “인간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이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것이 버드나무가 원하는 것이겠느냐? 버드나무는 그냥 버드나무로 살고 싶은데, 인간이 거기에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더해, 다시 말해 버드나무를 자르고 휘고 파서 그릇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버드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본성은 아니다.” 이런 고자의 말에 맹자가 대꾸합니다. “버드나무가 부드럽게 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휘는 본성이 없다면 그릇을 만들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버드나무가 부드럽게 휘어서 그릇을 만드는 것은 버드나무의 본성에 위배되는 게 아닙니다.”라고요. 이렇듯 《맹자》에 들어 있는 ‘고자 편’을 보면 고자는 굉장히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인간은 선하다, 악하다 하는 주제로 끊임없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자기 본모습 그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능력, 충동 등을 강조합니다. 그에 반해 맹자는 그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다양한 비유를 들면서 강조하지요.

    순자가 자기 책을 통해서 맹자를 비판합니다. “만약에 인간이 본성상 선하다고 한다면 법률이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맹자는 끊임없이 교육을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선하다면 교육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을 법률로써 행동을 제약하고, 교육으로 순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인간을 선하다고 봤을까요, 악하다고 봤을까요? 공자의 문헌을 아무리 뒤져봐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굳이 꼽자면, “공자님께서는 하늘과 본성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같은 말이나 “인간은 태어날 때는 가까운데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점점 멀어진다, 예를 따라가는 사람은 보다 성인에 가깝고, 예를 버리고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점점 더 나빠지더구나. 처음엔 비슷한 자리에서 시작해도 조금만 각도가 틀어지면 나중에는 한없이 멀어지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삶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더구나.” 하는 것이 공자의 기본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을 종합해 보면 공자는 인성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인간이 바르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주목했던 사람이지요.

    맹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이 있다고 보았고, 그 속성이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이건 나중에 맹자의 ‘사단(四端)론’으로 좀 더 정교해집니다. 사단론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사단(四端)이라고 하는 네 개의 단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밭으로 보자면 마음 밭에 네 개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죠. 그 네 개의 씨앗을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고 말합니다.

    이 측은지심을 잘 키우면 자기도 모르는 새 어진 마음, 인(仁)이 생깁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창피해하는 마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 커지면 정의[義]라고 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은 내가 먼저가 아니라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사양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잘 키우면 그게 바로 예(禮)가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 것처럼 옳고 그름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는 거지요. 그걸 잘 완성하면 지혜[智]가 됩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덕목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그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을 잘 발현시키면 완성된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맹자는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양심(良心) 좀 가지라고 말할 때 그 양심 있죠? 그 양심의 어원이 맹자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양’ 자는 ‘좋을 양’ 자예요. ‘굿(good)’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원래 ‘양’에는 좋다는 뜻도 있지만, ‘본래의, 고유한’이라는 뜻도 있어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좋은 마음입니다. 이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양지(良知), 좋은 앎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양능(良能), 즉 인간에게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역시 기본적으로 있다는 생각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상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맹자는 칸트와 비슷합니다. 칸트가 인간의 선함이나 이성 등을 신적인 영역으로 넘기지 않고 자기 내부의 영역에 설정해놓고, 인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을 펼치고자 한 사람이거든요. 칸트와 유사한 생각을 한 동양의 철학자를 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그런 비유를 들며 욕망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놓아버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을 방심(放心)한다고 하지요.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서 하늘이 주는 지위를 따라가라고 하는 것을 ‘천작(天爵)’이라고 합니다.

    맹자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임금도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 내가 요임금처럼 생각하고 요임금처럼 살면 내가 요가 될 수 있고, 순임금처럼 생각하고 순임금처럼 살면 나는 순이 될 수 있고, 요순도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고요. 맹자는 그 요순 임금조차도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맹자의 사상이 고스란히 전해진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왜 그렇게 임금한테 상소문을 써댔을까요? 사대부는 관직에 있을 때는 신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왕의 스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소신껏 상소문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상소문 올린다는 행위 자체가 왕을 가르친다는 꼬장꼬장한 정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맹자에게서 배운 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쉽게 말해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나라가 있으려면 군주가 있고, 사직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한다. 이 중에서 제일 가벼운 게 임금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금은 잘못하면 갈아 치우면 되지만, 사직은 쉽게 갈아 치울 수 없고 백성은 더더욱 갈아 치울 순 없다. 그러므로 백성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요,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라고도 했지요.

    루소뿐만이 아니라 로크, 홉스 등도 인성론을 언급합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계약론자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신(神)이 임금을 임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임금을 세워서 쓰는 것이지요. 그러면 나라의 땅은 누구의 것일까요? 임금의 것이죠. 그래서 임금이 자신의 국가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소유 개념이 생깁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땅은 왕의 것이 아니라 노력한 사람의 것이라는 개념이죠.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땅을 소유하는 새로운 계급이 생기는데, 그 계급이 바로 근대의 부르주아입니다. 과거에는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이 이제는 여러 부자들도 소유하는 땅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소유한 재산 때문에 분쟁이 생기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만약 힘이 비슷한 부자끼리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가 엉망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보호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력자가 필요해집니다. 그 권력자에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해서 자기의 권리와 힘을 양도하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왕과 시민이 직접 만나서 ‘내 권리를 이만큼 드리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등의 행동은 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계약론은 일종의 가설입니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홉스는 국민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서로 물고 뜯는 늑대 같은 사이가 될 것이므로 이 늑대와 같은 인간들을 컨트롤하려면 어마어마한 괴물이 필요하다,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인 ‘리바이어던’과 같은 군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군주를 괴물에 비유한 것이죠. 괴물처럼 절대적 권력을 가지게 되는 군주요. 홉스가 상상하는 백성은 악한 존재들이고 이걸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절대 군주론 주장을 편 것이지요. 홉스가 쓴 책의 제목도 《리바이어던》입니다.

    살짝 유한 주장을 한 사람이 로크(John Locke, 1632~1704)입니다. 로크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은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흰 종이인 ‘빈 서판[타블라 라사]’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빈 서판에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변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백지 상태인 국민에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국민들을 잘 화합시키는 군주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만약 국민과 군주 간에 맺은 계약을 군주가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약이 파기되어야죠? 그러므로 로크는 일종의 혁명권, 저항권 등을 사회계약의 부대조건으로 넣게 됩니다. 이 계약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군주를 뒤집어엎고 끌어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본 것이죠.

    가장 급진적인 루소는 어떠했을까요? 루소는 국가 자체를 악으로 보았습니다. 군주와 권력이 악인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군주와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는 것을 찬성할까요? 당연히 아니겠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군주제가 보편적인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군주는 있다, 그러나 군주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의 일반 의지, 국민들의 선한 의지를 대행하는 자일 뿐이다. 그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일반 의지를 대행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루소가 가지고 있는 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루소는 민주주의가 역사에서 실제로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과연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소유를 시작하면서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루소는 기본적으로 소유 이전의 미개 사회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본연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던 사람이지요.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부터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된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 선도 악도 모르는 사회, 완전히 순진무구한 사회, 그것만이 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이라는 개념도 악이라는 개념도 없는 사회,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라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터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는지를 따져보니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소유 때문이라는 것이죠.

    로크에게 있어서 원래 자연은 아무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노동 덕에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다시 노동을 들여서 그 사과를 딴다면 그건 인간의 노동을 들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것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게 로크가 말하는 ‘소유권’입니다.

    그렇기에 루소는 차라리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소유도 지배도 없는 자연 상태야 말로 루소가 간절히 원했던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근대 소유권의 정당성은 루소가 보기에는 사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그 누구의 소유도 영원히 보장될 수 없는 세상을 주장합니다. 소유가 없으므로 선함도 악함도 없고, 선함과 악함이 없으므로 그걸 제재할 법률도 국가도 필요 없는 사회, 이것이 어찌 보면 루소가 차마 이야기는 못했으나 상상하고 추구했던 사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현실에서 나라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 권력이 왕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주권재민의 사상을 펼쳤던 것이 루소지요.  

    성인은 되지 못할지언정 괴물이 되지는 말아야겠지요.

     

     

     

    제3강, 영원한 물음, 신은 존재할까? - 노자와 스피노자에 관하여

     

    노자에 대한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만 나와 있지요. 그 외에는 이분이 어디에서 태어나 무얼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사기》도 사마천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1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이니 노자의 생애를 어림잡아 비교해도 대략 500년 후에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지요.

    《사기열전》에 보면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대목으로 공자보다는 앞선 시기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급에 해당하는 다른 분들은 다 성 뒤에 ‘자(子)’ 자를 붙이거든요. 공구(孔丘)는 공자, 맹가(孟軻)는 맹자, 한비(韓非)는 한비자, 순황(荀況)은 순자, 하는 식으로요. 그러면 이 양반은 이름이 이이(李耳)니까 이자(李子)라고 붙여야 하거든요. 그렇게 붙이면 되는데 ‘노자(老子)’라고 불리었어요. 그런 것을 보면 당대에 이미 다른 사상가들과 비교해서도 나이가 좀 많이 드시고 높은 지위에 계신 사상가라고 볼 수 있지요. 요즘으로 치면 어르신 같은 분이시죠. 늙을 노(老)자를 써서 노자(老子).

    노자의 본명이 이이(李耳)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름이 ‘귀 이(耳)’ 자예요. 귀가 아주 독특하게 생겼나 봅니다. 공자의 이름은 ‘언덕 구(丘)’ 자를 써서 공구(孔丘)거든요. 태어날 때 머리가 언덕처럼 생겼던 겁니다. 노자의 시호는 담(聃)인데요. ‘담(聃)’ 자에도 귀가 붙어 있어요. 그의 용모 중에서 눈에 띄게 귀가 특이했다고 보여요.

    노자는 주나라의 황실에서 사관을 지냈지만 이 양반은 본래 초(楚)나라 출신이라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서쪽으로 갔다는 것은 춘추 전국 시대 상황으로 보면 진나라 쪽으로 갔다는 것이지요.

    서쪽으로 가는 길목에 함곡관이라는 국경의 관문이 있었고, 그곳에서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만났습니다. 문지기는 노자를 단번에 알아보고, 노자가 가는 곳을 물었습니다. “나는 이제 나라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네.” 노자가 답했지요. 그러자 문지기가 노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선생님, 지금 떠나시면 선생님의 지혜는 누가 잇겠습니까? 여기 며칠만 머물면서 선생님의 지혜를 남겨 주십시오.” 하며 사정했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노자는 함곡관에 머물면서 책을 한 권 남겼습니다. 그때 쓴 책이 《노자》, 또는 《도덕경(道德經)》이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분량은 한자로 5천여 자 남짓이고, A4 용지에 빽빽이 채워 쓰면 한 석 장밖에 안되는 정도입니다. 그 책 한 권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읽은,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가 된 것이지요.

    유교는 공자가 만들어놓은 사상 체계인데 노자는 공자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잖아요. 그런데 노자가 쓴 책을 보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유교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노자라고 하는 인물을 공자 이전이 아닌 공자 이후의 인물일 거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노자》라는 책을 보면 유교적 용어가 많이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노자가 여러 명일까요? 그건 좀 무리한 추측이고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노자》는 노자 혼자 쓴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세대에 걸쳐서 노자 학파에 해당하는 분들이 글을 썼는데 그게 나중에 집대성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집대성 된 책을 노자에게 헌정한 것이죠.

    고전은 저자가 유일하지 않습니다. 《맹자》도 맹자 혼자 쓴 책이 아닙니다. 《논어》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공자는 자기와 관련된 책을 한 권도 안 썼거든요. 공자 사후에 공자의 제자들이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이지요. 《장자》도 장자 혼자 쓴 책이 아닙니다. 외편과 잡편 같은 경우 장자 이후에 장자 후학들이 쓴 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노자》도 초기 노자가 썼을 것 같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후기 노자 사상가들이 첨부해서 쓴 집단적인 저술입니다. 그것을 묶어 《노자》라고 이름 붙인 것이지요. 동양 고전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기독교의 성경 같은 경우에는 앞쪽 다섯 권의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쓴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때이니 중세 철학자도 아니고 근대 철학자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중세 철학자라고 하기도 하고, 근대 철학을 연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근대 철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지요. ‘데카르트’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성의 철학, 근대 철학의 아버지… 이런 게 떠오르지요? ‘스피노자’ 하면 “내일 하늘이 무너져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스피노자가 한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인데 스피노자가 한 말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지요. 마치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나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적이 없으나 그렇게 전해져 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믿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자고 한 이야기는 스피노자가 한 말은 아니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녔고, 마침내 찾은 곳이 네덜란드였습니다. 네덜란드는 모든 종교를 허용하는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거든요. 굉장히 드문 일이지요. 프랑스 사람이었던 데카르트도 네덜란드에 와서 철학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해서 공동체를 만듭니다. 회당을 차리고 학교를 짓고, 그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금도 많이 내고요. 스피노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자유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갔지요.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유대교의 엄격한 가족적, 종교적 분위기와 네덜란드라고 하는 자유로운 사상의 분위기, 이 두 가지 기운 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스무 살이 되자 스피노자는 예수회의 수사이자 급진주의적 정치가인 반 덴 엔덴(Van den Enden)의 강의에 참석해서 라틴어와 급진적 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와 데카르트 철학도 배우지요.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스피노자가 점점 이상한 사상에 물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스피노자를 검증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스피노자에게 난처한 질문을 하게 만들 젊은이를 파견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스피노자의 추종자 역할을 하게 하면서요. 그리고 젊은이에게 물어보라고 하죠. 예를 들면 천사가 있느냐 없느냐 같은 질문을요. 스피노자는 답을 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을 꺼냅니다. 천사 따윈 없다고.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가 쳐놓은 미끼를 덥석 물고 만 것이지요.   결국 스피노자는 유대인 공동체 사회의 종교재판정에 회부됩니다. 재판정에서 진짜 랍비들이 스피노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고백을 하라고요. “네가 이런 말 했다는 게 사실이냐? 신이 인격적이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냐? 너는 모세오경을 믿지 않는 거냐?” 스피노자는 타협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르쳐준 대로 답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적 신념대로 답합니다.

    재판정의 랍비들은 스피노자의 진술에 깜짝 놀라지만, 스피노자를 잃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안을 제시하지요. ‘너만의 성서해석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해석을 입 밖으로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학비를 대서라도 너를 지원할 것’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스스로 믿는 대로 살아갈 거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재판정은 스피노자에게 파문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오란녀 왕족과 얀 더빗이라는 공화주의자의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고, 얀 더빗이라는 공화주의 지지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정이었고, 사상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하고 내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족들은 프랑스하고 한번 크게 싸워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왕족이 중심에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공화주의자 얀 더빗 형제들은 프랑스와 전쟁을 해선 안 되며, 협상을 하자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니, 사람들이 누굴 더 따를까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싸우자는 쪽을 좋아했겠지요. 그래서 얀 더빗 형제가 길거리에서 군중들에게 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공화정이 무너지고 오란녀 왕정이 등장하게 됩니다. 왕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오란녀 왕정에 반대했던 자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스피노자는 공화주의자입니다. 사상의 자유, 정치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외쳤던 사람이지요. 오란녀 왕족들에게 스피노자는 원수 같았습니다. 스피노자의 책은 처음부터도 문제가 됐지만 왕정 복구가 된 후에 모든 책이 금서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스피노자가 마지막으로 출간하고 싶었던 책은 《에티카(Ethica)》라고 하는 저술이었습니다. 생전에 책을 다 썼지만 출간을 하지 못했지요. 이 책을 출간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스피노자는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으로 요절했습니다.

    스피노자가 죽자 네덜란드의 비밀 경찰들이 그 집을 급습해서 남아 있는 모든 자료들을 싹 거두어 갑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죽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주요 저술이 담겨 있는 상자를 고스란히 묶어서 자기 이름이 아닌 친구 이름으로 출판사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해두었거든요.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하게 원고 상자가 출판사로 넘어갔지요.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주사위 놀이는 우연성이잖아요. 세계는 우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된 것이라는 얘기죠. 그렇게 말했던 아이슈타인에게 한 기독교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느냐고요. 과학자인 아이슈타인에게 종교적 견해를 묻는 것은 부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신이라면, 나는 신을 믿습니다.”

    중국인들에게는 신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늘[天]이라는 개념이 분명하고, 그 하늘도 인간과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전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떠한 법칙, 또는 변화, 흐름 속에서 이야기하는 하늘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철학자들의 신관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적인 신관이에요. 여기서의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이 없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철학에서 서양의 신과 가장 가까운 개념어를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도(道)’입니다. 노자의 사상이 바로 ‘도’와 관련된 사상이라고 해서 노자의 책 제목이 《도덕경》입니다. 원래 《도경》과 《덕경》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합쳐지면서 도덕경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道)’가 이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한다면, 그러한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덕(德)’이라고 합니다.

    덕(德)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만물의 원리와 법도, 모든 만물이 가는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의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노자는 성인(聖人)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인(聖人)의 의미는 책마다 다르거든요. 공자의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군자(君子)라는 표현입니다.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형이 군자라면,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인간형은 성인(聖人)이라고 보면 됩니다.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비상명 無名天地之始 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물지모

    ‘도가도 비상도’. 도(道)는 ‘길, 진리’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저는 진리라 해석하겠습니다. 진리를 진리라 말하지만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쉽게 말해 진리는 파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명가명 비상명’, 이름을 이름이라 말하지만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쉽게 풀면 변함없는 이름이란 없으니 함부로 이름 붙이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이름 대신 신(神)으로 바꿔 표현하면, 신은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에다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름 붙이기, 다시 말해 개념화하기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리라든지, 길이라든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이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무명(無名)입니다. 이름이 없어서 천지지시(天地之始), 하늘과 땅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이름을 갖고 태어난 것은 없습니다. 반면 유명(有名), 만약에 이름이 생긴다면 만물지모(萬物之母),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됩니다.

    만물과 나를 구별하게 하는 데 이름이 있는 것은 중요하지만, 본래 모든 존재는 이름이 없는 거예요. 이름이 없는 것에 이름을 지어놓고 그걸 부를 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명(有名) 이전에 무명(無名)이 먼저입니다. 있음[有] 이전에 없음[無]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신도, 진리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신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게 노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첫 번째 신론입니다.

    生而不有 이불유 僞而不侍 이불시 功成而弗居 성이불거 夫唯弗居 유불거 是以弗去 이불거

    생이불유(生而不有). 정말 멋있는 문장입니다. 낳았지만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주는 걸로 끝이지 소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위이불시(僞而不侍), 행동하지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놓은 업적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일을 해놓고 의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키워놓고 의존하지도 않고 뭔가를 바라지도 않고 무심하게 행동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이루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뭔가 업적을 쌓으면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가 거주해야 할 것인 양 살지만, 하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뭔가 공을 세워도 결코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부유불거(夫唯弗居),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시이불거(是以弗去) 사라지지 않는다. ‘불거’가 두 번 나오는데요. 앞의 불거(弗居)는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고, 뒤의 불거(弗去)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거하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거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거예요. 고이면 썩고, 변하지 않으면 죽게 되요. 하늘의 이치입니다.

    爲無爲 위무위 則無不治 즉무불치

    ‘무위(無爲)’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하지 않음’이지요. 하지 않음을 한다, 이상하잖아요? 무위(無爲)는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위무위(爲無爲)는 무위로 다스린다는 뜻이고, ‘억지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가 무불치(無不治),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고요. 이게 하늘의 움직임이라는 겁니다. 하늘은 억지로 혹은 강제로 뭔가를 하지 않고도, 만물을 살리고 키우고 성장시키고 뭔가 이루게 만듭니다. 이게 바로 하늘의 원리예요. 노자가 본 하늘입니다. 반면 인간의 문명사회는 뭔가 억지로 계획하고 강제로 집행하지요. 그런 태도를 ‘유위(有爲)’라고 해요. ‘무위(無爲)’는 유위의 문명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는 개념이지요.

    道沖而用之, 或不盈, 도충이용지, 혹불영 淵兮! 似萬物之宗 연혜! 사만물지종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 여기서 ‘충(沖)’ 자는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은 마치 없는 것 같고, 진리는 텅 비었다는 것이지요. 용지(用之), 그것이 쓰임이고, 그래야 쓸 수 있지요. 이해가 어렵다면, 빈 잔을 떠올려봅시다.

    자꾸 뭘 채워서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뭘 비워내야지만 비로소 신이 깃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이게 신이야, 저게 신이야’ 하는 신의 개념을 자꾸 만들어내면 신은 거기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비워내야지만 머무를 수 있는 것, 그게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차지 않습니다. 혹불영(或不盈), ‘영(盈)’ 자가 ‘가득 찰 영’ 자입니다. 가득 채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비어 있거든요. 우리가 하는 말 정도로는 채울 수가 없는 게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연혜(淵兮), 즉 그윽하구나! 사만물지종(似萬物之宗), 만물 중 으뜸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사(似)’는 ‘흡사’라는 뜻이지요. 노자의 하느님은 텅 빈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없는 것 같지만 그 없는 것 때문에 가득 비운 상태로 있는 것, 그게 노자의 하느님입니다.

    挫其銳, 좌기예 解其紛, 해기분 和其光, 화기광 同其塵, 동기진 湛兮!似或存, 담혜! 사혹존 吾不知誰之子, 오부지수지자 象帝之先. 상제지선  

    좌기예(挫其銳), ‘좌(挫)’는 ‘꺾는다’는 뜻이고, ‘예(銳)’는 ‘날카롭다’는 뜻입니다. 해석하면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해기분(解其紛), ‘분(紛)’은 어지러운 것이니 실타래가 얽혀 있는 것을 풀게 하고, 화기광(和其光), 그 빛을 온화하게 하고, 동기진(同其塵), ‘진(塵)’은 ‘먼지’이니 풀이하면 먼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노자를 좋아하는 분들은 ‘화기광 동기진’ 이 여섯 글자를 네 글자의 성어로 만들어 최고로 좋아합니다. 이른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합니다.

    화광(和光),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빛이 뭔지 아세요? 상대방을 알 수 없게 비추는 빛입니다. 밤중에 누군가가 나를 향해 정면으로 손전등을 비추었다고 상상해봅시다. 상대는 내가 훤히 보이겠지만, 나는 빛이 눈부셔 상대가 누군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찬란한 빛이 제일 무서운 겁니다. ‘화광’은 그러한 빛을 온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동진(同塵)이라는 말은 먼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인데요, 우리는 만날 신이 저 높은 곳에 있는 고귀한, 고결한, 인간과 다른 차원의 무엇이라고 여기지만, 노자가 보는 신은 동진이에요. 먼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죠. 먼지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하의 것이잖아요. “에이, 먼지 같은 놈아.” 그러면 존재 자체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노자의 신은 바로 그 먼지와 하나가 되니, 도가 먼지와 같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도는 있다는 것, 어디에나 신은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모든 자연 만물의 법도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우리의 삶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天地不仁 천지불인 萬物爲芻狗 만물위추구

    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은 어질지 않다. 이 문장 때문에 노자는 공자보다 후대 사람이라고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유교에서는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거든요. 인은 ‘인자하다, 사랑한다’는 뜻이잖아요. ‘천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은 불인(不仁)하다는 것입니다. 인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인격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격입니다.

    이 세상 만물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비과학적인 태도인 거예요.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면 내가 잘못해서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뭔가 잘못하신 분들이 천둥 번개 치면 조심조심 하시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벼락 맞을 사람은 어쨌든 맞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맞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한다고 안 맞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마치 인간이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주고 하는 식으로 하늘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게 노자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과 땅은 인격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만물위추구(萬物爲芻狗)라고 말하지요. ‘추구(芻狗)’는 ‘짚으로 만든 개’입니다. 짚으로 만들어서 제사상에 올리는 도구인데 제사가 끝나면 그걸 버리고 다시 재활용하지 않습니다. 제사 때 지방(紙榜)을 사용한 후에 태워서 버리는 것처럼요. 그렇게 쓰임새가 다 끝나면 버리는 게 천지의 일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인격적인 눈으로 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신은 인격성에 포함될 수 없는, 인격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谷神不死 곡신불사 是謂玄牝 시위현빈  

    곡신불사(谷神不死), 곡신(谷神)은 계곡의 신,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시위현빈(是謂玄牝), 현(玄) 자는 그윽할 현, 빈(牝)은 암컷, 여성, 골짜기 빈입니다. 풀면 그윽한 여인이라 불립니다.

    산을 보면 꼭대기에 생물이 살까요? 못 살지요. 모든 생명체는 골짜기에 삽니다.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니까요. 생은 그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 있는 것입니다. 생은 남성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 가치에 있는 것이지요.

    天長地久 천장지구 天地所以能長且久者 천지소이능장차구자 以其不自生 이기불자생 故能長生 고능장생

    천장지구(天長地久)는 천지가 장구하다는 뜻입니다. 장구(長久)하다? 우리말로 바꾸면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끝이 없다는 거지요.

    천지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 하늘과 땅이 능히 장(長)하고 구(久)한 까닭은, 이기불자생(以其不自生) 즉 그 스스로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고능장생(故能長生), 그래서 능히 영원히 살 수 있다. 신 또는 천지, 우주만물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서 영원한 것이지요.

    노자는 도를 실천하는 것을 덕이라 했고, 그 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은 영원하다. 그 영원함의 이유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여인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기르죠. 그렇지만 소유하지는 않아요. 키워줄 뿐이지 거기에 기대지 않아요.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안 머무르니 신인 것이지요. 자꾸 자기 것을 채우고 채우려는 게 신이 아니라, 자기 것을 비우고 비우려는 게 신이라는 겁니다. 텅 비려고 하는 자, 그가 신이라는 것이죠. 텅 비우니까 없어 보여요. 하지만 텅 빈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것이다. 아무리 거기에 부어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上善若水 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이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오 故幾於道 고기어도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로 선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 수선이만불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여기서 ‘선(善)’은 ‘잘한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거예요.

    물은 만물을 잘 키워내면서도 만물과 싸우지 않아요. 그것만이 아니지요.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여기서 마지막 글자는 ‘악’이 아니라 ‘오’라고 읽어요.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 갑니다. 물이 흘러가다가 똥이 있다고 똥을 피해 가나요? 아니지요. 같이 갑니다. 똥을 자기 몸으로 녹여버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더러운 곳을 피해 가잖아요? 물은 흘러가면서 그걸 다 끌어안고 갑니다. 성인이 되어, 하늘의 도를 따라 살아가려면 물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키우는 것, 그러나 싸우지 않는 것,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 이것이 물의 원리입니다. 그것이 상선, 최고로 좋은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 모습이 고기어도(故幾於道), 기(幾)는 ‘가깝다’는 뜻이지요, 도에 가깝다. 물처럼 살면 신에 가깝게 된다는 겁니다.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이 이루어지면 몸을 물려라. 그것이 천지도(天之道), 하늘의 도리다.

    太上下知有之 태상하지유지 其次親而譽之 기차친이예지 其次畏之 기차외지 其次侮之 기차모지

    노자가 이야기하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네 가지 등급이 정해져 있죠.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최상은 아랫사람들이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만 아는 존재이다.

    친이예지(親而譽之), 지도자가 친하고 명예를 아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겁니다.

    외지(畏之), 두려운 존재입니다.

    모지(侮之), 사람들이 그를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지도자입니다.

    이 지도자 순서는 다분히 당대의 권력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최상의 지도자는 물론 노자의 사상에 따르는 지도자지요. 그다음은 유가적 지도자, 그다음은 법가적 지도자, 마지막이 바로 독재자, 즉 폭군이죠. 진정한 지도자는 성인, 즉 있는 듯 없는 듯 살면서 남을 이롭게 하고, 싸우지 않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순리에 맞춰 살면서, 공을 세워도 그걸 자기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의 것으로 삼는 사람이지요.

    노자가 특정한 개념화를 거부하면서 비유적으로 접근했다면, 스피노자는 철저하게 기하학적 방법으로 신에 접근합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신관을 정리해놓은 책이 《에티카》거든요. ‘윤리’라는 뜻인데요. 그 책의 부제(副題)를 이렇게 썼습니다.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다 다르게 신을 생각하면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개별적 종교인들이 상상하는 신 말고 기하학적인 증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신을 한번 정의해보자는 겁니다.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첫 번째 정의는, ‘신은 무한하다’는 겁니다. 무한하다는 말은 공간적인 의미입니다. 외부가 없다는 것이죠.

    두 번째 정의는 ‘신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신은 완전하다는 이야기는 불완전한 게 없고, 결핍이 없다는 거예요.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모자람이 없는 존재가 무언가를 더 원할까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완전한 것은 결핍이 없으므로 원하는 것도 없지요. 인간이 신을 향해 헌금하는 등의 행동은 신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이미 완전한데 뭘 더 바랄까요. 신이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신의 완전성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정의는 ‘신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신의 무한성이 공간의 개념이라면 영원성은 시간의 개념이에요.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 세 정의는 우리가 신을 정의할 때 인정할 수 있는 정의입니다.

    신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완전한 존재라는 정의를 염두에 두고 다음 질문에 답해봅시다. 이 세상은 신 내부에 있을까요, 외부에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여기는 신 내부인가요, 외부인가요? 내부지요. 신이 저기에 계신 분이라면 여기는 신 바깥이지요. 저기 계신 분이 여기에 안 계시면, 저 신은 신이 아닌 거지요? 신은 무한하다는 정의에 위배되잖아요. 따라서 여기는 신의 내부입니다. 신의 내부에 있는 우리들은 신의 부분이지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_《에티카》 1부 정리1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두 신의 내부입니다. 이 자연이 바로 신의 모습이지요. 문학적으로 표현해보면, 우리는 다 신의 한 조각이에요. 이 중에 단 하나의 조각만 빠져도 신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완전해야 하니까요. 내가 미워하는 존재도 신의 일부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이 다 신입니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신은 곧 자연’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신의 내부이며, 우리는 신의 일부이며, 우리의 삶이 신의 모습

    우리가 이 모양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바쳐야만 칭찬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신의 영원한 일부로서 신의 속성을 가지고 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이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유한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형태가 사라진다고 우리가 사라지나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건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불변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 모양이 바뀔 뿐이지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우리를 구성하는 에너지는 있었고, 우리가 태어나서 그 에너지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 다른 에너지로 변환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만물, 삼라만상이 다 신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모습들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없어요. 신은 이미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 거예요.

    선악이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작위적인 개념인 것이지요.

    ‘신은 선하다, 그러니 너희들도 선하게 살아라’ 하고 말한 것은 진짜로 신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을 자기편으로 세우기 위해 그렇게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물 그 자체, 자연 그 자체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_《에티카》 4부 정의68 증명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곧, 신이 자기를 정죄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은 신의 의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인간이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빌려 쓴 것에 불과한 사기입니다.

    만약에 신이 자기를 부정하게 되면 신의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 세계는 무한 긍정의 세계지요.

    우리는 불행한 걸까요? 첫 번째는 우리가 거짓된 선과 악에 사로잡혀서 삶을 왜곡하기 때문이지요. 외부에서 주입된 선악의 개념으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스피노자는 외부의 선과 악, 종교적인 선과 악의 개념을 지웁니다. 그리고 다른 차원의 선과 악을 이야기했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은 내 바깥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롭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이라고요. 내 기쁨의 능력이 증가하는 것이 선이고, 내 기쁨의 능력이 감소하는 것이 악이며, 내가 점점 기뻐할 수 있는 그 앎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내 몸을 만들어내는 것이 선이지요. 그런 점에서 선은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스피노자는 선과 악을 제도나 종교의 차원에서 개인 윤리의 차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자신의 기쁨이 증가하는 방식으로 살라고 말하는 거예요.

    스피노자는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기쁨을 증대시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의 완전성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죠.

    바로 우리가 신이고, 이 세상 만물 모두가 신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일부로서 신을 느끼며, 신처럼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스피노자의 신관은 무신론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세상 만물이 신이라는 건, 신이 없다는 것과 똑같은 얘기거든요.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_《에티카》 4부 명제35 주석  

    노자도 스피노자도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내재하면서 이 세상의 모습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내재적 존재로 파악했지요. 외재(外在)의 반대로서의 내재(內在)가 아니라, 바깥이 없는 존재로서의 ‘내재(內在)’지요. 한편 노자와 스피노자는 신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인격(人格)이라는 좁은 관점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격(格)이 있잖아요. 어느 한 속성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 속성으로서의 신이 바로 그들이 파악한 신이지요. 한편 그들이 파악한 신은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으로 인도하고, 모든 생명을 끌어안으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입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으나, 살면서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진정으로 신을 만나고 싶다면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 가서 만날 수도 있지요, 거기에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신은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바깥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 바깥에 있는 신, 내 속에 있는 신, 당신 속에 있는 신, 그리고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속에 있는 신과 만나면서 신의 개념은 점점 확장될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보다 훨씬 큰 신을 우리는 경험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제4강, 소유의 삶, 무소유의 삶 - 장자와 디오게네스에 관하여


    결국 우리는 머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거거든요.

    인문학의 최종 목표는 인문학을 버리는 겁니다. 지식을 버리는 것이지요. 아는 것을 자기 삶으로 증명해내는 겁니다. 딱 그만큼이 인문학입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슬로건이기도 했습니다.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기 왕성한 힘을 실제로 보여주려면 프롤레타리아는 기독교 윤리, 경제 윤리와 자유사상가들의 윤리에 내포되어 있는 온갖 편견을 짓밟아 뭉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 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장자는 자서전을 남기지 않아 그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장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추정치를 따르면 기원전 3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중국으로 말하자면 전국 시대(戰國時代)입니다.

    《맹자》에는 ‘조장(助長)’과 관련된 고사가 하나 나옵니다. 어리석은 농부 이야기입니다. 이웃집 밭의 모는 길게 자랐는데, 자기 밭의 모가 짧아 보여서 하나씩 뽑아 길게 만들었다는 일화지요. ‘조장(助長)’이라고 하면 ‘잘 자라도록 도와줌’이라는 뜻이지만, 이 고사에서는 ‘억지로 뽑아 올려 결국 죽게 만들었다’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뜻으로 쓰입니다.

    장자 책을 읽다 보면 상당히 여러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장애인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장자》라는 책을 ‘장애인의 경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를 송나라 몽(蒙) 땅의 칠원의 관리라고 말합니다. 몽(蒙) 땅은 송나라 중에서도 지방에 해당하고, 칠원의 관리라고 하면, 귀족들의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사냥터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의 설이 있어요. 장자는 지금 비유하면 아파트 경비원 같은 일을 한 셈입니다.  

    《맹자》에는 장자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장자》에도 맹자가 나오지 않지요. 동시대에 살았고 분명히 서로 의식을 했을 텐데, 서로 언급을 안 했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둘은 동시대인이지만 처한 입장은 좀 다릅니다. 맹자가 왕을 중심으로 한 왕도 정치를 꿈꿨던 사람이라면, 장자는 왕이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이거든요. 한 명은 왕 편이 되어서 어쨌든 멋진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왕 따위가 없는 나라를 꿈꿨던 사람이지요.

    장자의 친구 중 가장 유명한 친구가 혜시(惠施, 기원전 370?~309?년)인데요. 혜시는 양혜왕 시절에 재상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제논의 역설’이라고 알려진 논법이 있습니다. 제논은 “아킬레스는 절대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지요. 이 말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합니다. 가장 느린 거북이가 가장 빠른 아킬레스와 경주합니다. 워낙 실력이 차이 나니 거북이를 먼저 달리게 합니다. 아킬레스는 굉장히 빨리 달리니까 금세 거북이가 이길 것 같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처음 출발한 만큼 가면 어쨌든 거북이는 그보다 조금 더 갔을 거 아녜요? 그렇게 간만큼 또 아킬레스가 쫓아가면 거북이가 쉬지 않는 한 조금 더 갔을 거고, 그럼 또 아킬레스가 거기까지 쫓아가면 또 거북이는 그것보다 조금 더 갔을 거고, 결국 그렇게 빨리 달리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쫓아갈 수 없다는 논리를 폈던 사람이 제논이란 사람입니다.

    니체도 그런 말을 합니다. 적이 될 수 없는 친구와는 친구 하지 말라고, 스승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는 제자를 제자로 삼지 말라고요. 고작해야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아야 한다는 둥 하며 스승의 뒤만 쫓아다니는 제자는 제자가 아닌 거죠. 스승이 쓴 면류관을 빼앗아서 자기가 쓸 줄 알아야 진정한 제자라고 합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실력이 있으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그것이 중국 어느 나라에서나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전국 시대는 제국의 형성기입니다. 전국 시대 후기로 가면 갈수록 약한 나라들은 대부분 멸망하고, 강한 나라들끼리 경합을 벌여 결국 진(秦)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제국의 시대를 열게 되지요. 그에 맞춰 전국 시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절대 권력을 추구하며 위로 향한 길을 걸어가죠.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장자는 그 반대방향인 아래로 향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장자 철학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이죠. 이 점은 노자와도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는 노장 철학이라고 해서 노자와 장자를 하나로 묶지만 노자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까지는 권력층을 염두에 두고서 철학을 했던 사람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보면 항상 왕이라든지 지도자가 등장하잖아요. 그 왕이나 지도자가 행동의 주체가 됩니다. ‘왕이나 정치가는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라’는 지도자의 철학을 펼쳤던 사람이 노자입니다. 노자의 무위(無爲)라는 개념도 통치자의 통치 원리에 해당한다면, 장자의 무위는 민중의 생활 철학 또는 생활 태도라고 보면 됩니다. 적용 대상과 범위가 확실히 다르지요. 노자와 장자는 노장철학으로 묶여 있지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제국의 이념에 해당한다면, 장자는 제국에 맞서는 약소국의 이념에 해당합니다.

    서양의 춘추 전국 시대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 시대입니다. 전국 시대에 일곱 개의 강대국이 경합을 벌였다면, 지중해 연안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중심이 되어 델로스 동맹이나 펠레폰네소스 동맹 등을 결성하여 서로 경합했던 시대지요.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서로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물러가자 지중해의 주도권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게 됩니다. 마지막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것은 마케도니아 왕국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알렉산더 대왕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로스가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왕국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기원전 330년)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합니다.

    서양철학을 보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종류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지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Diogenes, 기원전 412~323년)입니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 제자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제자하면 누가 떠오르죠? 플라톤이 떠오르죠.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르고요. 그런데 이 라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안티스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문하생으로,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삶을 계승하여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했던 철학자입니다. 디오게네스가 바로 그 안티스테네스의 제자지요.

    두 개의 라인은 동양철학으로 치면 주자학과 양명학처럼 완전히 다른 길을 걷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인은 어쨌든 권력의 길을 걷습니다. 이 라인은 끊임없이 온갖 권력에 어울리는 철학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기의 가장 멋진 나라를 만들고자 실험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디오니시오스라고 하는 참주와 만나서 그를 교육하려 하다가 번번이 실패하여 좌절합니다.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플라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자기가 꿈꾸는 나라, 철인의 나라를 만들고픈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편 가장 많은 범위의 지식을 다룬 인물은 플라톤이 아니라 알렉산더의 어린 시절 스승이자 그리스 철학의 집대성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한편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 라인은 권력의 길이 아니라 해방, 또는 자유의 길을 걷습니다. 주류가 권력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철학을 조율했다면, 비주류는 자유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철학을 연마했지요. 이 비주류를 철학적으로 견유학파라고 합니다. 안티스테네스가 견유학파의 원조이고요, 디오게네스는 그의 계승자이자 완성자에 해당하지요.  

    소크라테스가 청빈(淸貧)하게 살았다면, 디오게네스는 청빈 정도가 아니라 극빈(極貧)한 삶을 살았습니다.

    견유(犬儒)라고 부를 때 견(犬) 자가 개 견 자예요. 영어로는 시니시즘(cynicism)이라고도 하고 더 쉽게 도기즘(dogism)이란 말도 씁니다.

    이 사람은 글을 한 줄도 안 썼습니다. 물론 다른 문서상으론 여러 개의 글을 썼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디오게네스가 워낙 기행을 많이 저질렀기에 후대 그리스 철학자가 디오게네스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식으로, 전부 남의 기록에 의해서만 전해지는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디오게네스가 추구하는 삶의 모델은 자연 그 자체였습니다.

    신이라고 한다면 가장 위대한 자요, 가장 완전한 자지요. 완전한 자는 불완전하지 않으므로 결핍이 없습니다. 결핍이 없으므로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앞에서 스피노자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했었지요.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결핍되어 있지 않다. 결핍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무언가가 엄청나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그것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죠. 어마어마하게 많은 걸 소유하려고 하는 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결핍감을 가지고 있는 자예요. 그렇다면 많은 것을 원하는 이는 완전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죠. 완전에 이르기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진짜 신에 가까운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디오게네스의 최종 목표는 삶을 살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삶에까지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이 태어나 자기 삶을 살다가 수명대로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들 또한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자연의 일부로 살면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다가 제 명이 다 하면 죽는 삶이 가장 자연과 어울리고 신에게 적합한 삶이라고 말한 사람이 디오게네스입니다.  

    공자의 이력서는 아주 심플해요.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했고, 마흔이 되어서는 혹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이 되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공자는 성인되기를 목표로 살아왔다고 한다면, 디오게네스는 신이 되기를, 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장자는 지극한 인간[至人], 참다운 인간[眞人]이 되길 바랐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소비의 욕망 중에서 그것이 욕망해야만 하는 욕망인지,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또는 남과 비교되니까 만들어진 욕망인지를 구분해서 자기 삶에 꼭 필요한 욕망을 살리고, 쓸데없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삶의 완성에 사용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이고 성공한 사람이고 21세기에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슈퍼맨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그 고리를 끊었던 사람, 그 고리를 다르게 해석했던 사람, 그 고리를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시도로 새롭게 모색했던 사람들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미래죠. 과거에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과거의 그 삶이 우리 미래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가 되는 거고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미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게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교양만 쌓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보다 이런 거 많이 안다, 너 공자 읽어봤어? 너 허행 알아? 몰라? 선생님 강의 좀 들어라?’ 아니에요. 몰라도 됩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잊어도 됩니다. 공자, 예수, 부처… 우리가 인류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의 이름이나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모두 잊어버려도 됩니다. 결국 우리는 머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거거든요. 몸으로 살아가고 실천하는 경지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자기의 지식을 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것을 ‘뗏목 버리기’라고 합니다. 어떤 이가 격랑이 이는데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일종의 지식이죠. 자기를 그 격랑에서 건너게 해준 지식이 얼마나 고마울까요. 그렇다고 다 건넌 마당에 그 뗏목이 고맙다고 이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 뗏목은 또 그 격랑을 건너는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수 있죠. 그게 오히려 좋죠. 그 격랑을 건넌 사람은 또 뚜벅뚜벅 자기의 길을 자기 발로 걸어야 되는 겁니다. 뗏목을 이고 걷는 짓은 하면 안 되지요. 인문학의 최종 목표는 인문학을 버리는 겁니다. 지식을 버리는 것이지요. 아는 것을 자기 삶으로 증명해내는 겁니다. 딱 그만큼이 인문학입니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은 글로 되어 있어요. 글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 글로는 살 수가 없어요. 사는 건, 몸으로 사는 겁니다. 제가 하는 강의도 말과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말과 글로 이루어져 있는 이 강의가 몸으로 체화가 되서 깨달은 만큼, 살고 싶은 만큼 살아갈 수 있다면, 모든 지식은 없어져도 됩니다. 사실은 그게 지식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디오게네스의 일화인데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지요.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괴짜 철학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디오게네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왕이 간다고 하니 주변에 친위대가 먼저 좍 깔렸겠지요. 보통은 누가 왔는지 감이 잡히잖아요? 웬만한 사람 같으면 술통 속에 있다가도 살아 있다면 바깥으로 나오기는 했어야 될 거 아녜요? 근데 디오게네스는 술통 속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기가 꺾이지 않은 거지요.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자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다. 너는 누구냐?” 누군지 몰라서 물었을까요? 아니지요. ‘너는 누구냐’고 정체를 묻는 것은 너는 어떤 놈이기에 내가 등장했는데도 인사를 하지 않고 이따위로 구느냐는 협박의 언어입니다. “넌 누구냐!” 이건 관등성명 대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거죠. 그때 디오게네스가 여전히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내다보면서 “나는 개올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죠.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참을성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라고 나를 소개했는데,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 화가 좀 나긴 났었나 봅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당신은 좋은 왕이냐, 나쁜 왕이냐?”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좋은 왕이다.”라는 답이 들리자 디오게네스는 “왜 내가 좋은 왕을 무서워해야 하느냐?” 하고 답합니다. 말인즉슨 그렇죠.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디오게네스에게 여러 번 패한 것입니다. 지위나 무력으로는 안 되니, 권력이 가지고 있는 세 번째 카드를 사용합니다. 재물 카드죠. 재물은 권력이 행사할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카드 중 하나인데 어마어마한 힘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거의 백지수표를 내민 겁니다. 만약 우리에게 누군가가 그런 제안을 한다면, 이미 굉장히 많은 목록을 말했겠죠? “여러 개 얘기해도 되나요?” 혹은 대충 액수를 계산한 후 “이 정도?” 이렇게요. 근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지요.” 알렉산드로스가 완전히 참패하고 뒤돌아 가면서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넋두리가 있습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텐데.”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건 다 나중에 알렉산드로스를 높이면서 디오게네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엉뚱한 말일 겁니다.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할 리도 없고요. ‘비켜달라’고 말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디오게네스가 그렇게 당당한 태도로 알렉산드로스를 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이야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아무 것도 원하는 게 없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원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마르크스를 전공한 철학자 고병권은 디오게네스에 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굉장히 독특하게 해석한 부분이 있는데, 공산당 선언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선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이러한 사회에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선언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선언, 가장 멋진 선언 중에 하나이지요.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에게 권력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이 길거리에서 직접 샐러드(채소)를 씻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았다. 플라톤이 말했다. “네가 디오니시우스 왕에게 조금만 더 공손했더라면 너는 네 샐러드를 직접 씻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플라톤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철인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찾아갔던 왕입니다. 물론 실패하고 말지만요. 그래도 디오니시우스는 플라톤이 끝끝내 섬겼던 왕이자 권력자죠. 네가 조금만 왕에게 아부했더라면 지금 길거리에서 샐러드를 씻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왜 이러고 사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네 샐러드를 직접 씻는 법을 배우면 너는 디오니시우스 왕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디오게네스가 원래부터 가난했던 건 아닙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의 노예가 도망을 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노예가 도망쳤는데 왜 안 잡느냐고 물었죠. 디오게네스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노예는 나 없이도 잘 사는데, 내가 노예 없이 못 산다면 누가 노예냐?”라고 되물었답니다. ‘노예가 주인 없이 잘 산다면 노예가 삶의 주인이다. 그런데 나는 주인인데 노예 없이 못 살아?’ 이렇게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노예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은 아무나 못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 하는 것을 하는 능력입니다. 그게 디오게네스의 위대함이에요.  

    “사람은 물욕에 집착이 심하면 허약해진다. 그리고 스스로 결박을 한다. 언제든지 죽음을 생각해보는 사람만이 참된 자유인이다. 이미 죽음을 예감해본 사람은 어떤 욕망도 그를 노예로 할 수 없고 그 아무것도 그를 결박하지 못하니까.”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다르게 표현하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되겠네요. 오늘을 살아라! 이 말은 오늘을 비굴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너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인데요.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나는 자유다. Είμαι λέφτερος.

    위대한 개인은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이며, 위대한 개인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것이 곧 삶의 주인이고,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제5강, 정의로운 욕망은 없는가? -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에 관하여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233년)는 춘추 전국 시대로 치면 전국 시대 말기의 사람입니다. 공자가 춘추 시대 말기 사람이지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춘추 시대는 아직 주나라의 예법이 남아 있던, 요즘 말로 하면 매너가 있는 시대였죠. 전쟁을 하더라도 매너 있게 했습니다. 저쪽에서 한 번 쏘면 나도 한 번 쏘고요. 주로 전차전, 말을 타고 전쟁을 했기 때문에 싸울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었죠. 산악 지대에서 마차를 달릴 순 없으니 평야에서 했고요. 미리 약속을 하고 모여서 길어야 하루 정도를 싸웠습니다. 진 사람이 항복을 하면, 이긴 쪽에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전쟁이 끝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반면에 전국 시대에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주나라를 상징적 중심으로 삼았었는데, 전국 시대에는 주나라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강대국끼리 서로 경합하게 된 것입니다. 주나라는 전국에 영향력을 거의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해버렸습니다.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제후국이 군사를 움직이려 할 때는 주나라를 보필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했습니다.

    춘추 시대에 다섯 나라의 패자가 있었다면, 전국 시대에는 일곱 나라의 강자가 있었습니다.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처음엔 모두 비슷비슷했는데 점점 강력하게 부각된 나라가 진(秦)나라입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사람입니다. 당시에 이탈리아는 각 도시를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도시 국가의 형태였으며, 도시들이 상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부와 재산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 국가로서의 이탈리아가 아니라 도시끼리 독립하고 경쟁하는 분열된 이탈리아였지요. 이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귀족 중에서 메디치 가문이 유명한데요. 메디치 가문은 상업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재산으로 문화와 예술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메디치 가문 같은 후원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마키아벨리 같은 야심찬 정치가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귀족 가문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가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된 한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에 있었던 사상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유가는 문사(文士), 글줄이나 좀 아시는 선비들이 유가 사상을 많이 주장했고요. 공자나 맹자가 대표적 인물이지요. 묵가를 주장한 이들은 대개 전쟁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무사(武士)들이죠. 묵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 사상을 주장했지요. 그래서 전쟁이 나면 방어 전쟁을 치렀습니다. 후대로 가서 묵가 사상가들 중 일부가 ‘어차피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할 거라면, 진나라에 들어가서 천하통일을 빨리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진나라로 투항하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들을 진묵이라고 합니다. 도가(道家)는 노자, 장자 등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주로 정치일선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은사(隱士)가 많아요. 숨어 사는 선비들이죠. 법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굴까요? 모사(謀士)입니다. 이 모사에는 ‘꾼’자를 붙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분히 유가적인 발상인 것이고요, 실제로 모사는 자기의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왕을 보필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던 사람들이 바로 모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비자 또한 모사가 되는 거죠.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꿈꾸는 나라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의 예법을 이상적 모델로 삼았습니다. 묵가는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을 모델로 삼았지요. 묵가는 실제로 왕들이 정말 열심히 백성들과 더불어 일했고, 백성들이 힘들어 할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둑도 쌓으며 정강이 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던 우왕을 이상향으로 삼아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도가는 레벨이 많이 오릅니다. 역사 이전 태곳적으로 가요. 인간이 인위적인 무언가를 쟁취하기 전, 자연 그 상태를 모델로 삼지요.

    잘 보면 유가, 묵가, 도가 사상가들은 자기 삶의 모델을 전부 다 과거로 설정을 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고주의죠. 이샹향이 과거입니다. 현실은 문제가 있으니,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어떤 모델을 설정해놓고 그 과거의 모델로 현실을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법가는 복고적이지 않습니다. 법가는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어떠한지에 더욱 관심이 있었지요.

    《한비자》에 보면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가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죽자, 어느 농부가 그 토끼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토끼 잡는 방법이 이거였구나, 하면서 나무뿌리 옆에 앉아 다른 토끼가 또 쓰러지기를 가만히 기다렸지요. 하지만 토끼가 잡히나요? 안 잡히죠. 토끼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던 것은 우연히 일어난 과거의 일에 불과합니다. 그 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지요. 그러니 나무 밑에 앉아서 토끼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한비자가 보기에 과거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며 현실에서 토끼를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우연히 한 번 잡힌 또는 과거에 잡힌 토끼를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잡으려고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은 집단에 불과했어요. 그럼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거기서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토끼몰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법가 사상가들의 핵심입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화씨지벽(和氏之璧)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한 농부가 땅을 파다가 귀한 돌을 구했습니다. 보니까 엄청나게 귀한 옥이라 왕한테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검증을 했더니 옥이 아니라 돌이라고 판명이 난 것입니다. 화가 난 왕은 “저 자식이 나한테 감히 돌멩이를 바쳐?” 하면서 돌을 돌려주며 한쪽 다리를 잘라버려요. 시간이 지나 다음 왕이 또 왕위에 오르자 다리 한쪽을 절룩거리며 쫓아가요. “이게 진짜 보석입니다, 옥입니다.” 왕은 돌을 감정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돌로 판명이 되어서 남은 다리마저 잘립니다. 이제 움직이지도 못해요. 세 번째 왕이 등극하자 왕에게 가지도 못하고 왕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엉엉 웁니다. 왕이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으니 농부가 말하기를 상왕 때도, 직전 왕 때도 이 보석을 옥이라고 바쳤는데 옥을 돌이라고 하셔서 다리가 다 잘렸다고 말합니다. 왕은 “그러냐? 그럼 다시 한번 감정을 해보자.” 하고 울퉁불퉁한 돌을 깼습니다. 그러자 그 속에서 엄청나게 큰 옥이 나옵니다. 국가적 보물이었지요. “아이고, 잘못했다.” 하며 왕이 그 돌을 고맙게 받았다는 이야기가 화씨지벽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법가 사상은 참으로 옥처럼 귀한 사상인데, 사람들이 이 사상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돌처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한비자는 어렸을 때부터 현실주의 정치에 눈을 뜨고 현실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유학자들이 《논어》, 《맹자》를 읽으며 공부했다면, 한비자는 커리큘럼이 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관중, 상앙, 오기 같은 인물을 연구합니다. 관중은 제나라의 환공과 함께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명재상이고요. 상앙은 진나라를 엄청나게 부강하게 만들었던 명재상이었습니다. 오기는 손자와 더불어 병가(兵家)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병가 사상은 명령에 대한 복종, 상벌이 분명하지요. 인정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법에 따라 정치를 합니다. 이처럼 한비자는 나라를 부드럽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강력하고 철저하게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많이 공부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한비자가 이사와 더불어 순자에게 배웠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순자’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다른 건 몰라도 성악설은 아실 겁니다. 성악설이라는 게 ‘인간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욕망을 따라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되는 거죠. 순자는 그런 욕망들을 서로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와 교육을 통해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비자는 순자에게 배우고 배운 것을 종합하여 현실주의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비자도 비참하게 죽지만, 상앙(商鞅, 기원전 395~338년)이란 사람도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는 위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는데,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진나라로 와서 당시 약소국이었던 진나라를 강력하게 만든 재상이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개혁 정책은 법가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집을 한 단위로 묶어 납세와 징병을 관리하는 오가작통법을 실행하고, 백성의 삶이 나아지도록 농업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요. 법령으로 세워진 것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따르도록 했고, 이를 어길 시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처벌했습니다. 심지어는 태자가 법을 어기자, 그의 스승을 잡아다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코를 베어버리는 형벌을 내릴 정도였지요. 그렇게 철저하게 개혁 정책을 실시하던 상앙도 자신을 지지하던 진효공이 죽은 후 태자인 혜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귀족들과 측근들의 탄핵을 받아 팔다리가 묶이고 사지가 잔인하게 찢기는 거열형을 당합니다. 한편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 기원전 440?~381년)도 상앙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됩니다. 그는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 등을 돌아다니며 많은 공을 세우고, 높은 지위에 오르지요. 마지막에 초나라에서 재상의 지위에 올라 철저한 개혁 정책으로 법치를 실행하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구 귀족 세력에게 미움을 사, 오기를 지원하던 초왕이 죽자 화살에 맞아 피살되고 맙니다.

    당시 귀족들은 초법적 존재로 대우받았었는데 법가 사상은 그러한 초법적 대우를 받는 존재를 없애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마키아벨리는 가난하게 태어나 독학을 했지만 욕망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려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었죠. 물론 그만한 실력도 있었고요.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중심 가문이어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 쪽에 줄을 섭니다. 그래서 메디치 가문에 협력을 하게 되지요.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약소국이기에 강대국과 친교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마키아벨리는 문서 정리와 외교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도 되고요, 외교 사절로 여러 외국 군주들을 만날 기회도 잡게 됩니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많은 고위 관료들을 보는데 그 중에 마키아벨리의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년)였지요. 체사레 보르자는 《군주론》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입니다. 무자비하고 거짓말도 잘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거짓말을 할 사람이었지요. 공포 정치를 펼쳐 강력한 힘으로 주변 나라들을 침략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폭군이죠.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보며 ‘지금 이탈리아에 필요한 사람이 저런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교황령을 포함하여 각기 분열된 형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지요. 개별 공화국들은 강력한 힘도 없고, 외침이 들어오면 방어도 잘 못해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이탈리아는 기본적인 상비군조차 없었지요. 그러니 전쟁이 나면 돈으로 용병을 사서, 그들에게 전쟁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체사레 보르자는 다른 나라 사람을 용병으로 쓰는 게 아니라 민병대를 구성합니다. 자신의 영토에서 군인을 모아 훈련시킨 후 자국 군대로 하여금 공국을 지키게 했습니다. 용병은 지면 도망가버리면 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면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것이라 죽기 살기로 싸웠거든요.

    마키아벨리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자국의 힘으로 국방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속으로 ‘이렇게 이탈리아를 통일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체사레 보르자가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가 통일된 이탈리아의 강력한 군주로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그 기대와는 정반대로 너무 일찍 죽어버렸어요.

    외국 사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재무성 장관까지 역임했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치 활동을 해 나갑니다. 그러다 1513년 스페인의 침공으로 피렌체 공화국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자, 마키아벨리를 공직에서 추방해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복귀하고자 메디치 가문에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이탈리아를 강력하게 만들 온갖 정치적 방책들을 수록하지요. 하지만 메디치 가문에서는 이 책을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 혐의로 투옥시키죠. 교황의 특별 사면이 아니었다면 한비자처럼 감옥에서 생애를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감옥에서 나온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로마사 논고》를 쓰고, 1527년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채 결국 죽게 됩니다.  

    메디치 가문은 몰락했으나 《군주론》은 살아남아서 그 후 많은 사람들에게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지요. 왜냐하면 당시의 정치학 책은 대부분 종교를 끼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중심에 놓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치를 했거든요. 또는 하느님까지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초한 정치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신학이나 윤리학을 정치학의 배색으로 깔지 않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종교도 윤리도 도덕도 제거한 ‘권력 그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그런 도덕적 잣대, 윤리적 잣대가 없습니다. 어떻게 군주가 만들어지고 어떻게 권력이 확산되는지, 그리고 권력을 통해서 어떻게 강력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서술합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책이지요. 도덕과 윤리가 없는 책 보셨나요? 착하게 살자는 메시지가 없는 책, 그게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이 점은 한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비자》 역시 착하게 살자는 도덕론이 없어요. 엄격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군주가 자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서술한 책이지요.

    “이빨 빠진 호랑이는 개에게 당한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와 친한 측근들에게 권력을 계속 나눠주는 것은, 호랑이가 이빨을 뽑아 개한테 하나씩 꽂아주는 격입니다. 그러다 보면 호랑이 이빨은 다 없어지게 되고, 호랑이 이빨을 갖게 된 개는 더 이상 개가 아니며, 결국 이빨 빠진 호랑이를 물어 죽이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지요. 그래서 군주의 권력은 절대로 나누어주면 안 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생각이었습니다. 한비자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군주 중심의 마인드였습니다.

    군주는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칼자루 병’ 자를 써서 두 개의 칼자루라는 뜻의 이병(二柄)이에요. 첫 번째 칼자루가 형(刑)입니다. 형벌. 잘못하면 반드시 처벌하는 칼자루지요. 두 번째 칼자루는 덕(德)이에요. 잘한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상(賞)과 벌(罰), 이 두 개의 칼자루를 정확히 구분해서 상을 줘야 할 때 정확히 상을 주고, 벌을 줄 때는 정확히 벌을 주는 거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도 유사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군주는 여우와 사자를 동시에 모방해야 합니다.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정을 만나면 여우처럼 되어야 하고, 늑대를 물리치려면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라고 불립니다. 법가 사상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勢), 법(法), 술(術)입니다.

    술(術)은 그야말로 통치 기술입니다. 이때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 같은 역할을 말합니다. 신하들과 주변의 동정을 정확히 잡아내는 정보, 그래서 신하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다음은 법(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굉장히 진보적인 측면입니다. 당시에 법을 제정하는 것은 백성을 위해 제정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말 잘 듣는 백성과 강력한 군주, 부국과 강병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지요.

    법가가 이야기하는 법은 당시에는 굉장히 혁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가 이전의 법은 평민들에게만 적용되었거든요. 귀족들에게는 법이 적용되지 않았지요. 쉽게 말하면 왕, 공, 대부, 이 귀족층은 잘못을 해도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예라는 것은 형벌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마.” 하는 경고일 뿐이지요. 사, 농, 공, 상, 그리고 노비 이런 계급은 두말할 것 없이 형(刑)으로 다스려왔습니다. 하지만 법가의 법은 그게 아니에요. 군주조차도 지켜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진효공 시절에 상앙이 법을 만들었는데 태자가 그 법을 어긴 일이 있었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죽일 수는 없으니 태자의 시중을 죽이고, 태자의 스승이자 효공의 형인 건의 코를 잘라버렸어요.

    옛날 귀족들은 법 위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법가의 법은 귀족들은 물론 왕까지, 누구나 다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법이라는 칼을 휘두르려면, ‘권세’라는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제나라 제상 신도(愼到, 기원전 395~315년)가 세(勢)를 강조했고, 진나라 재상 상앙(商鞅)이 법을 강조했고, 한나라의 명재상 신불해(申不害, 기원전 420?~337?년)가 술을 강조했다면, 한비자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해야 군주가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가 사상의 집대성자답죠.

    그중에서도 특히 한비자가 강조했던 것은 세(勢)였습니다. 세력이라는 말이지요.

    “짧은 것이 높은 데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위치 때문이며, 어리석은 자가 어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勢)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자기가 모시는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왕자가 되는 이가 엄청나게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하면서 품성까지 갖추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유학자들은 이처럼 성군의 가능성이 희박한 왕세자를 성군으로 만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비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게 아니다. 착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왕도 평범한 사람이다. 왕에게 엄청난 지식과 엄청난 능력을 요구하지 마라.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세(勢) 덕이다. 왕 중에서도 정말 나쁜 왕의 대표격인 걸왕, 주왕이 나오는 것도, 요순처럼 아주 뛰어난 임금이 나오는 것도 모두 하늘의 별따기죠. 그러니 보통 사람이, 심지어는 어리석은 사람이 왕이 된다고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리석은 왕이 어진 사람을 선발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가 가진 위치, 높이, 세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군주는 자기의 권력, 세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키아벨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도자상을 이야기하며 켄타우로스를 예로 듭니다. 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半人半馬), 반인반수, 인간 반쪽 동물 반쪽인 종족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지혜가 있고, 동물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동물은 뭔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추진력이 있지요.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인간에게, 둘째 방법은 짐승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비자가 세, 법, 술을 이야기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세와 법을 이야기합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요. 맹자는 이러한 입장에 반대했죠. 맹자가 본 인간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아주 착한 본성이 있어서 그 본성을 잘 발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됨의 길이라 여겼습니다. 성선설이죠. 반면 순자가 본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을 따라 살면 반드시 어지러운 사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을 잘 다스려서 예의가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 법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순자는 유가 쪽에 있는 사람이지만 유가 중에서도 살짝 법가 쪽으로 기운 사람입니다. 순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거든요. 유가의 마지막 스승인 순자에게서 한비자와 같은 법가 사상의 총 집결자가 나오게 되는 거죠. 법가는 유가를 반대해서 나온 것인데 그걸 집대성한 사람의 스승이 유가라는 게 놀랍습니다.

    한비자는 왕을 포함한 인간은 본질상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굳이 그렇게 나쁜 것도, 굳이 그렇게 착한 것도 없는 평범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다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고요. 평범한 우리가 법에 따라 살면 상을 받고, 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게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부귀해 지기를 바란다. 관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바란다. 그것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자애롭고, 관을 만드는 사람이 잔혹해서가 아니다. 부귀하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즉, 관을 만드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죽음에 의해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도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든 충성을 바칩니다. 그렇지만 정작 당신이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등을 돌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악설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익에 따라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원하지, 손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잖아요.

    한비자는 아무도 군주의 마음을 모르게 하라고 말합니다. 《한비자》를 살펴봅시다.   “현명한 군주가 힘써야 할 일은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군주는 권력을 보이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모르게 하라’는 노자의 아이디어지요. 노자 이전에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적에 대해서 많이 알수록, 한편 적은 나에 대해서 모르면 모를수록, 내가 적을 이길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진정한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지켜볼 뿐이죠. 그런데 군주가 정책을 열심히 내고 부지런하다면, 한비자가 보기엔 하급 군주일 겁니다. 군주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천하의 사람들이 할 일을 자신이 전부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면 군주의 결함이 반드시 드러납니다. 결함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군주를 우습게 봅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서서 하지 말고, 다방면에서 훨씬 뛰어난 신하들을 골고루 잘 발탁하는 것, 그것이 군주의 임무라는 말입니다. 대신 군주는 항상 두 자루의 칼을 쥐고 있어야 하는 거죠. 잘하면 상을, 못하면 벌을 줄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요. 그게 한비자가 노자를 읽으면서 배운 ‘하지 않음으로 다스리는[無爲之治]’ 방법입니다. 한비자는 노자를 철저하게 제왕학적으로 해석해요. 군주야말로 노자 철학을 자기의 통치 이념으로 삼아 다스려야 한다는 게 한비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군주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성품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군주는 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뛰어나다, 용감하다, 씩씩하다, 지혜롭다 하는 성품들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예요. 실제로 뛰어나고 용맹스럽고 똑똑할 필요는 없어요. 만약에 그러한 성품을 갖추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성품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갖춘 척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능력이 없어도 짐짓 그런 척할 수 있는 사자의 배짱이 필요합니다.

    마키아벨리는 말년에 공화주의자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했어요. 공화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절대 권력을 반대하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군주론》을 쓸 때에는 이탈리아에 통일을 가져올 강력한 군주 체제를 주장합니다.

    백성들을 윤리적 대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 파악했다는 점은, 종교나 윤리가 지배하고 있었던 당대를 감안해보면 참으로 선진적인 인식입니다. 심지어 군주조차도 윤리적 주체가 아니고, 일반인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지도자를 우상화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접근했다는 것도 뛰어난 지점이지요.

    생물학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인간 사이에 차별의 굴레를 덮어씌우는 데 종교나 윤리만큼 크게 위력을 행사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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