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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Books 2022. 10. 23. 14:48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36440967?query=%EA%B0%80%EB%82%9C%EC%9D%B4%20%EC%A1%B0%EC%A2%85%EB%90%98%EA%B3%A0%20%EC%9E%88%EB%8B%A4&NaPm=ct%3Dl9kxepeo%7Cci%3Dae78b6f8f755c1af052707208ccefb44ce9cce02%7Ctr%3Dboksl%7Csn%3D95694%7Chk%3D5e3fae5fefd6b2723640f66a0a93e1b05c1d711e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 네이버 도서

    네이버 도서 상세정보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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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미국인들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가난은 진정한 문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느끼는 진짜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출신도 나쁘고, 일터에서도 불량하게 처신하며, 사회생활에 부적합한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난을 일종의 질병 비슷한 무언가로 생각한다. 개인적인 실패의 유감스런 결과물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2008년 미국 인구 조사국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에서 빈곤층은 약 4,000만 명 규모로, 전체 인구의 13.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 하위 그룹에서의 빈곤율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해당 그룹의 빈곤율은 각각 어린이 18.5%, 흑인 24.7%, 흑인 어린이 34.7%, 히스패닉 23.2%, 히스패닉 어린이 30.6%로 나타났고, 여성이 가장인 가정의 빈곤율은 28.7%에 달했다.

    가난에 대한 정부의 공식 통계는 1960년대에 고안된 ‘절대치’, 즉 빈곤선을 기준으로 작성되고 있다. 빈곤선은 특정한 소득 기준, 즉 최저 생활수준을 겨우 유지할 정도의 수입에 맞추어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에 대한 정의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빈곤층을 분류하는 기준은 196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극빈층이란 빈곤선의 50%에도 못 미치는 소득(2000년 기준 1인당 4,397달러)으로 생활하는 계층이다.

    1970년대 이후, 시기를 불문하고 미국 인구의 11~15%가 해마다 빈곤을 겪었다.

    소득은 개인이 정기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합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임금과 개인연금, 정부 지원금(복지, 실업 급여, 사회보장연금) 등을 포함한다. 한편, 부는 축적된 자원의 총합으로서 저축, 주택, 사업용 자산,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을 포함한다. 오늘날 부의 분배 구조는 소득의 분배 구조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 있다. 1997년에 미국의 상위 1% 가구는 소득 기준으로는 국가 총소득의 16.6%를 차지했으나, 부를 기준으로는 국가 전체 부의 38.1%를 차지했다. 반면 하위 40% 가구는 국가 총소득의 10.5%를, 전체 부를 기준으로는 불과 0.2%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1979년에서 1994년까지 경제 성장으로 창출된 부의 99%를 미국의 상위 5% 가계가 차지했다. 1990년대 후반을 잠깐 제외하면, 오늘날의 경제 상황 하에서는 생산성 증가와 부의 창출로 인한 혜택이 낙수효과로 빈곤층까지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부유층에게만 더욱 편중되고 있다. 1979년에서 2003년 사이에 소득 하위 20% 계층의 평균 세후 소득은 불과 4% 증가한 반면, 소득 상위 1% 가계의 평균 세후 소득은 무려 129%나 급상승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얻은 교훈은 확실하다. 경제 성장 자체가 가난을 해결하는 답이 되지는 않는다. 불평등이 계속해서 심화되는 현실에서는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은 별로 개선되지 않는다. 이제 단순히 자유 시장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거나 부자 감세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치적 공약만 해서는 가난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주요 세 가지 이론인 빈곤에 관한 유전 이론, 문화 이론(빈곤문화론), 인적자본론

    사회학자 리처드 J. 헌스타인(Richard J. Herrnstein)과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가 쓴 《벨 커브: 미국사회에서의 지능과 계급구조The Bell Curve: Intelligence and Class Structure in American Life》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벨 커브》는 현재까지 가난과 불평등에 관한 유전학적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널리 인용되는 저작이다. 1994년 이 책이 시중에 출간되자 폭발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와 관련하여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의 서평과 논평, 반향과 비평이 이어졌다. 《벨 커브》를 쓴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 미국 사회는 사회적 계급의 불평등 정도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계급 시스템에서 계층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가족 배경이 아니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인지 능력’이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지능의 차이에 의해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차이는 더욱 더 벌어진다. 또한 저자들은 인족과 민족에 따라 지능이 천차만별이어서, 일반적으로 흑인이 백인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지능 차이는 차별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인종별로 서로 다른 지능은 인종 간 불평등이 지속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제안한다.

    헌스타인과 머레이는 미국 사회에서 계급의 차이가 곧 인지 능력의 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부유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계급의 최상층을 이루고, 가난하고 아둔한 사람들은 계급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두 학자가 낸 결론을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타고난 유전자에 따라서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벨 커브》의 주장은 인간 지능에 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네 가지 전제에 기초한다. 첫째, 지능은 ‘인간의 핵심적인 정신 능력’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현상이다. 이런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은 모든 ‘복잡한 정신 작용’의 근간이다. 둘째, 표준화된 지능 검사는 일반 지능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개인의 지능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셋째, 지능이란 ‘원래 거의 타고난’ 것이다. 유전자는 개인의 인지 능력에서 최소 40%, 최대 80%를 차지한다. 넷째, 축복받은 지능이든 아둔한 지능이든 자고로 지능이란 태어날 때부터 거의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낮은 아이큐를 타고난 사람은 제아무리 사회 차원에서 교육을 통해 훈련시킨다 하더라도 그 인지 능력을 신장시킬 수가 없다.

    지능에 대한 다차원적인 관점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흔히 아이큐 테스트로 통용되는 ‘일반 지능’ 같은 단 한 가지 속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일반 지능 검사는 개인의 전반적인 능력이 아니라 과제 수행 능력만을 직접적으로 평가할 뿐이다. 응시자의 기분이나 안정감, 응시 횟수 같은 외부적인 요소들이 지능 검사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런 시험들은 개개인의 능력을 간접적으로만 측정할 뿐이다.

    표준화된 시험들은 지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서 또 다른 한계도 있다. 이런 시험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필기시험으로 측정한다. 즉 정해진 시험 기술과 역량만을 평가할 뿐이다. 그런 종류의 시험은 일상생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개인의 실질적인 지능과 능력, 학교 교실이나 일터에서 요구되는 폭넓고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지적 기능’을 측정하는 데는 취약하다.

    두 사람은 아이큐의 유전 확률이 80%에 달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보다 더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행한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확률은 훨씬 더 낮아서 30~50% 정도에 불과했다.

    두 사람도 인정한 것처럼, 아이큐 자체를 높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이용 가능한 수단’에 한계가 있고 그 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일 뿐이다. 문제는 강구할 만한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이큐를 끌어올릴 수 있는 비용이 덜 드는 신뢰할 만한 방법을 찾기 어려운 탓’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한 이유는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그만큼 적어서일 뿐이다.

    ‘지능이 낮기 때문에 열악한 처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 때문에 아이큐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것이다.’와 같은 주장을 간과한다. 가난은 인지 기능이 완전히 발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범이다.

    취업 시장에서 구직자는 인지 능력이라는 변수 이외에도 여러 요인들에 의해 불이익을 당한다. 인종, 민족, 성, 나이 그리고 성적 선호에 따른 차별이 대표적이다. 기업이 특별히 선호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여 다른 구직자들만큼 유리한 위치에 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 일자리에 필요한 완벽한 자격을 갖추었더라도 그런 자리가 있다는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일하기에 충분히 머리가 똑똑한 구직자라고 할지라도, 구직자의 사회·문화적 배경, 자격 조건, 출신 지역, 인맥, 신체조건, 억양 등이 지원 회사와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의 지적 능력은 간과될 수도 있다.

    ‘생활 임금(living wage, 근로자들의 주거비, 교육비, 문화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수준 — 옮긴이)’

    헌스타인과 머레이가 제시한 이론의 결점은 제아무리 개인이 약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그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요컨대 경기가 호황일 때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남들 못지않은 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불황이 찾아오면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능력에 특별한 변화가 없어도 실업자 신세가 되어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개개인의 지능과 실력을 떠나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느냐 마느냐는 괜찮은 일자리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다.

    1989년에 12.8%였던 빈곤율이 2000년에 11.3%로 떨어진 이유는 그 사이 미국인들의 평균 아이큐가 급격히 높아진 탓일까?

    지능이 낮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유전자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공공 정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벨 커브》에 등장하는 수많을 오류들을 여기서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중 몇 가지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헌스타인과 머레이는 자신들만의 통계치를 내놓았지만 이후 진행된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인의 임금과 소득을 결정하는 데 아이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는 저마다 다르므로, 사람들이 가난이 빠지는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 선천적이든 아니든 한 사람의 인지 능력은 그의 삶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는커녕 부차적인 요소에 속한다. 둘째, 가난과 지능 사이에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어린 학생들의 지능 지수에 사회·경제적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방증할 뿐이다. 가난에 대한 유전 이론은 지능이 낮아서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은 과대평가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지능 지수가 낮게 나타날 가능성은 과소평가한다. 셋째, 《벨 커브》의 추정과는 다르게 사회, 정치 및 교육 정책이 어린 학생들의 인지 능력을 신장시키고 성인기의 소득 수준도 향상시킬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넷째, 가난이 유전자 탓이라는 유전 이론은 자원과 기회의 분배, 빈곤율, 빈곤층이 겪는 혹독한 시련 등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히 많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압력들을 철저히 무시한다.

    두 사람의 분석은 가난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미국 사회에서 가난과 불평등의 진짜 원인에 대한 관심을 희석하는 역할만 했다.

    미치는 개인이나 가구를 빈곤층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빈곤문화론의 관점에서는 가난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므로, 가난은 돈 문제와 큰 관련이 없다. 미국에서 빈곤층은 사회에서 겪는 차별이나 생활고로 인하여 정책적인 관심을 받기보다는 그들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 때문에 관심을 받는다. 빈곤층은 미혼모로 아이를 출산하거나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에 빠지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업 수당을 타갈 때나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 왜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성장하는 것일까? 왜 어떤 민족은 빠르게 발전하고 다른 민족은 뒤처지는 것일까? 이와 관련한 한 가지 널리 알려진 대답은 국가나 민족의 고유한 문화의 영향으로 한 국가나 민족의 경제적 번영의 속도는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유대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이 특히 흑인들에 비해 두드러진 경제적 성취를 이루는 까닭은 그들의 이른바 우수한 문화적 관념 덕분이다. 특정 문화는 다른 문화에 비해 경제적 성취를 이루는 데 더 적합하므로, 문화적 속성이 곧 경제적 성취로 이어진다는 논리인 듯하다. 이 같은 논리를 개인과 집단을 가리지 않고 가난 문제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바로 빈곤문화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빈곤층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에게 경제적 성취를 이룰 만한 심리적 특성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빈곤문화론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문제는 빈곤층이 일탈을 일삼는 하위문화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보다는 주류의 규범을 자꾸 벗어나려는 빈곤층의 겉과 속이 다른 태도에 있다.

    빈곤층 자녀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그리고 자기 부모의 나쁜 선례를 보고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을 되풀이한다. 빈곤문화론에 따르면, 빈곤과 빈곤문화가 지속되는 이유는 빈곤층이 빈약한 지적·감정적 발달 수준과 함께 자신들의 불량한 태도와 생각을 자기 자녀들에게 대물림하고, 그러면 대개 그 자녀들도 인생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빈곤문화론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성에 바탕을 둔 이론으로, 그 논리는 단순하다. 도덕성이 높고 책임감이 강한 중산층은 긍정적인 태도 덕분에 사회에서 성공한다. 반면 빈곤층은 도덕성이 낮고 무책임하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빈곤문화론의 주요 주장 5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와 세계관은 중산층의 지향과 뚜렷한 차이가 난다. 빈곤층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경제적 성취를 촉진하는 태도와 믿음 그리고 헌신이 부족하다. 빈곤층은 일과 결혼 그리고 책임감의 가치에 대해 기껏해야 미약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둘째, 빈곤층은 자신들의 일탈적인 문화와 비뚤어진 심리적 특성 때문에 고단한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삶을 스스로 힘들게 하는 생활방식으로 인해 빈곤층은 복지 의존과 미혼 출산, 만성적인 실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 경제적 조건이나 기회의 부족, 사회적 차별 때문이 아니라 문화와 행위 면에서 빈곤층의 일탈이 가난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넷째, 빈곤층의 취약한 심리 상태와 성취에 대한 동기 부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대를 이어 대물림된다. 기존의 빈곤문화에서 비롯된 이러한 결함들은 거의 개인의 특성으로 고착되어 있으므로, 단순히 빈곤층의 사회적 환경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 다섯째, 빈곤문화 자체를 고쳐야만, 다시 말해 빈곤층이 각종 사회 정책의 영향을 받아 결혼·취업 등의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하고, 올바른 윤리의식도 함양할 수 있게 해야 비로소 빈곤 문제를 퇴치할 수 있다.

    의문이 드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빈곤문화론이 한 가지 주요한 원인, 즉 빈곤층의 취약한 심리적 특성을 근거로 가난을 설명하려 든다는 점이다. 어떠한 이론이든 단일 요인을 근거로 이론을 정립해서는 외적 타당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가난처럼 극히 복잡하고 다면적인 현상에 이론을 적용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칫 잘못하면 빈곤문화론은 우리들에게 가난 문제에서 개인의 가치와 태도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이며, 그보다 거시적인 정치·경제적 압력은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빈곤문화론의 옹호론자들은 가난을 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조적 압력들을 간과하곤 한다.

    실제로 미국인 대다수는 성인기에 적어도 1년 이상 가난을 경험한다. 랭크의 주장에 따르면, 가난은 이제 주류적 사건이다.

    빈곤문화론은 빈곤층과 비빈곤층 사이의 유사점은 은폐하고, 빈곤층을 미국 주류 사회에서 완전히 도태된 계층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론의 신빙성을 획득하고 있다. 오직 이런 전략을 통해서만 가난이 빈곤층의 자업자득의 결과이고, 종종 사회에서 존중받는 사람들조차 곤란을 겪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압력과는 거리가 먼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빈곤층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브래들리 실러(Bradley Schiller)가 강조하듯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과 달리 굳이 차별받아야 할 내재적 속성을 찾기 어렵다.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이란, 단지 자신의 심리적·문화적 특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일련의 연구 결과가 내린 결론에는 두 가지 현저한 특징이 있다. 첫째, 빈곤층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열망은 중산층의 그것과 눈에 띄게 다르지 않다. 둘째, 많은 빈곤층이 만성 실업자로 지내거나, 한 부모 가정에서 살거나, 때때로 복지 지원금을 받는 등 사회 주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결과는 그들에게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지 그들의 일탈적인 가치관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빈곤층도 부유층 못지않은 열망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

    최하층과 사회의 나머지 계층을 구분하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기준은 ‘자신의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바꾸고 실현시킬 수 있는 차별화된 능력’에 있다.

    열정이나 이상 면에서 빈곤층과 중산층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빈곤층과 중산층은 일과 교육, 개인의 책임감 그리고 양부모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별로 차이가 없다. 하지만 두 계층이 처해 있는 환경은 사뭇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은 주류적 가치관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일자리를 얻으며,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생계의 수단이다. 빈곤층이 가진 문제는 가난 그 자체이지 그들의 문화가 아니다.

    비주류적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 주류처럼 행동하기는 한층 더 어렵다.

    주류 경제학에서 개인 취향이란 변수 자체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다.

    교육과 훈련 정도는 오로지 개개인의 선택에만 달려 있지 않다. 미시적으로는 가정의 재력과 기회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고, 거시적으로는 기업의 전략과 정부의 정책에 달려 있다. 이런 요소들은 개개인의 힘으로는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

    인적자본론에 따르면, 빈곤층은 그들의 배움과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에 가난하다. 그리고 그런 결과는 개개인이 자신에 대한 투자를 잘못해서 벌어진다. 빈곤문화론과 마찬가지로, 인적자본론에서도 가난을 불러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빈곤층 스스로 자초하는 일탈과 잘못된 의사결정의 탓이라고 바라본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의사 결정은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수단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존 엘스터(Jon Elster)가 말하듯 선호는 ‘적응적’이다. 선호는 개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각자 바라는 소망을 품는다. 부유층 자녀들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나중에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런 꿈을 꿀 만한 재원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빈곤층과 서민층 자녀들은 개인적 성취를 이루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집안 환경을 감안하여 처음부터 자기 꿈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훗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대학에 지원할 꿈조차 품지 못한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의 야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정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 시장에서 빈곤층이 불리한 이유는 그들에게는 인적자본에 온전히 투자할 만한 기회와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적자본의 차이는 불평등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인적자본이 부족해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인적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인적자본론은 기회의 풍부함과 자유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신봉하지만, 인적자본에 투자한다고 해서 꼭 그에 따른 보상이 저절로 따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고용주가 원하는 인력은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다.

    개개인 간의 소득과 고용 격차는 단순히 인적자본의 격차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보유한 사회적 자본의 차이도 반영한다.

    미국 사회에서는 인맥이 개개인의 지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인종적 차이를 감안하면 그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인적자본론은 노동자의 자질에만 전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개인의 자질에 관계없이 일자리의 특성이 각자의 경제적 전망과 귀중한 인적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 인적자본론의 전제와는 다르게,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단지 개인의 지식에만 달려 있지 않고 직장의 우열에도 달려 있다.

    인적자본론의 관점에서 가난을 야기하는 원인은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기술이 부족한 노동자들 자신에게 있다. 그러니 해결책은 덜 교육받은 노동자를 잘 교육시키는 길뿐이다. 인적자본론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많은 도시들에서도 문제를 일자리 부족이 아닌 개개인의 일하려는 의지와 기술 부족에서 찾는다.

    2002년의 통계에 따르면 풀타임 노동자 중 20%에서 55% 정도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72년에 비해 2배나 증가한 수치다. 이제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사회에서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그 대가를 충분히 보상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이 최고의 호경기를 누리던 시절에도 괜찮은 일자리는 항상 부족했었다. 일자리 부족은 미국이 갖고 있는 빈곤 문제의 핵심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일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인적자본론에서는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원인이 교육의 부족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는 가난하기 때문에 교육 수준이 낮다고 해야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일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그보다 더 큰 사회적 압력들에 영향을 받는다.

    미국인들의 경제적 안녕은 그 당시의 경제 상황에 따라서 좌우된다. 이보다 더 명약관화한 사실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역사를 뒤돌아볼 때, 미국 역사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73년까지이고, 그다음 시기는 1973년부터 현재까지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로도 불리는 이 첫 번째 시기에 미국의 생활수준은 엄청난 경제 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2배 이상 높아졌다. 실질 임금은 꾸준히 높아졌고, 1960년대 초 20%를 상회하던 빈곤율은 1973년에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며 크게 하락했다.

    이제 경제 성장은 현 상황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빈곤을 줄이는 수단으로서도 약발이 떨어졌다.

    경제가 성장해도 빈곤율이 줄어들지 않는 현상은 1980년대에 처음 나타났는데, 이는 미국 사회에서 소득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과거에 비해 그 증가 속도는 느려졌을지 몰라도 미국의 경제적 파이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1970년에서 1998년 사이에 국가 총소득 중 상위 1%가 가져간 몫은 8%에서 15%로 크게 증가했다. 이와 같은 소득 불평등 심화 현상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소득 상위 30만 명의 총소득은 소득 하위 1억 5천만 명의 소득을 합친 것과 맞먹었다.

    저임금 노동자 중 3분의 1 이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 대학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그중 약 10%는 대졸자들이다. 기술 이론의 맹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새로운 경제 상황에서 특권층만 득세하고 나머지 다수는 설 자리를 잃고 있는 너무나 극명한 상황 때문에 개개인의 기술력에 따라서 각자의 소득이 정해진다는 주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기술 발전은 미국 노동자들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기술 발전과 관련한 임금의 증가 혹은 감소, 빈곤율의 상승 또는 하락, 소득 분배의 공정성 증가 혹은 감소는 정책 입안자들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기 규칙을 정하는 그 주변의 ‘제도적 틀’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고, 이는 결국 정치 및 경제 권력의 지형을 그대로 반영한다.  

    최근에 진행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66년에서 2001년까지 전 기간을 통틀어 미국인 중 상위 10%만이 생산성 증가율을 상회하는 실질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1989년에서 2000년 사이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평균 5.9% 감소한 반면, 최고 임원들의 평균 보수는 무려 342%나 증가했다. 그리고 2006년에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보수는 일반 노동자들 보수의 364배에 달했는데, 이는 1980년의 40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지난 30년 동안 저임금 노동자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 핵심 원인은 기술 진보에 따른 노동 수요 변화라기보다는 기업 전략에 의해 촉발된 경제 및 정치권력의 균형점 변화이다.

    빈곤 문제 역시 사회 구조적인 것으로, 그 원인은 질 낮은 노동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구직 기회에 있다.

    제조업 쇠퇴는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미국 전역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다. 1959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의 제조업 근로자 수는 1,530만 명에서 1,86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1999년에 전체 노동 인구는 2배 가까이 늘었지만, 제조업 일자리는 1,730만개로 줄어들었다. 제조업 고용은 2000년대 들어 급감했는데, 2005년 말에는 제조업 근로자 수가 1,430만 명에도 못 미쳐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전반적인 고용 경향에 따르면, 제조업 일자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품 생산’ 부문의 노동자 비율이 급감한 반면 ‘서비스 제공’ 부문의 노동자 비율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1959년에서 2005년 사이에, 비농업 분야 민간부문 제조업 고용은 29%에서 11% 미만으로 감소했다. 오늘날 비농업 분야 민간부문 일자리의 약 85%가 서비스 직종이다. 이러한 고용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2016년까지 미국 경제에서 가장 많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30개 직종이 모두 서비스업에 포진해 있다. 미국의 제조업 쇠퇴로 인해 노동시장이 변모했으며, 고용 기회의 구조도 완전히 탈바꿈했다. 제조업의 쇠퇴와 서비스업의 부흥은 오늘날 구직 가능한 일자리의 성격과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직업의 종류 그리고 안전한 미래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크게 변화시켜 놓았다.

    일반적으로 서비스업은 제조업보다 급여가 적고, 임금 면에서도 제조업에 비해 훨씬 더 편차가 크다. 같은 서비스업 종사자라 할지라도 변호사나 의사, 투자 은행가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는 반면, 아동양육시설 종사자, 웨이트리스, 개인 간병인의 임금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이처럼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고용의 구성이 변화하면서, 전반적으로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고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했다. 제조업 분야는 상대적으로 저임금 일자리가 적고 소득 불평등도 심하지 않은 반면, 서비스업 분야는 저임금 일자리가 많고 소득 불평등도 심하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쇠퇴가 유감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또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고용의 형태가 바뀐다고 해서 미국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푸대접을 받는 이유는 무슨 경제학의 철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더 나은 보수와 근로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없고, 현행 노동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노조 결성률이 미미하고, 최저임금은 여전히 턱도 없이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서비스업 부문 저임금 일자리의 질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서비스업 근로자들은 제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하더라도 생활 임금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화는 노동 조건을 열악하게 만드는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일 뿐이며, 세계화가 필연적으로 일자리 감소와 임금 하락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를 유발하는 주범은 엄밀하게 말해서 세계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 양식, 즉 일부에서 말하는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신자유주의 정권들의 두드러진 특징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의 규제나 관세 장벽처럼 국가의 시장 개입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관행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정책 철학을 지니고 있다. 둘째, 세계무역기구(WTO)처럼 운영 면에서 민주주의적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국제기구가 존재하고, 이런 기구에서 체계적 규칙을 통해 무역 행위를 규제한다. 셋째,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최대한 부합하는 정책을 좋은 무역 정책이라고 전제한다.

    주당 35시간 미만의 노동을 시간제 근로라 지칭하는데, 시간제 근로는 비정규직 중에서 가장 흔한 고용 형태로, 미국 전체 노동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1990년대 경기 상승기에서조차 약 1,400만 명의 ‘잠재적 근로자’가 실업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경기가 호전된다 하더라도 경기 호전 자체만으로는 취업을 원하는 모든 구직자들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창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99년 기준으로 미국인 가장 중 약 3분의 1 이상이 경제 호황기에도 시간당 10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렸다. 하루 종일 일한다고 해도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가정을 공식적인 빈곤선 이상으로 부양하기에도 벅찬 시급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사회적 채용 기회를 근본적으로 늘릴 수 있는 정책의 시행만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일자리 부족 현상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또한 그 원인은 미국 노동자 개개인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작동 방식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가 얻는 경제적 파이는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일을 열심히 하고, 뛰어난 인적자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에 비례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개인들이 누리는 경제적 파이의 크기는 과거와 현재에 걸쳐 나타난 무수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선택, 입법 전쟁과 법정 소송의 산물에 가깝다. 앞선 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국가의 경제 상황은 국민들의 경제적 성패를 좌우한다.

    빈곤층이 겪는 불리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빈약한 정치적 자산도 그들이 겪는 고통 중 하나다.

    가난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은 경제적 문제이면서, 그와 동시에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전체 빈곤율은 부유한 여타 18개 선진국 평균 빈곤율의 2배를 넘었고, 아동과 노인의 빈곤율은 전 세계 평균의 약 3배에 달했다. 2000년 들어 미국의 빈곤율은 역대 최저치에 가까워졌지만, 세기의 전환기였던 그 시점에도 미국은 여전히 선진국 중 최고로 빈곤이 만연한 국가였다.

    미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어느 나라보다도 현금 보조금, 복지 서비스에 대한 지출, 복지 목적의 세금 우대 조치 같은 공공복지 지출이 적은 국가다. 사회보장제도를 비롯한 미국의 사회복지 지출액은 유럽 평균의 절반 수준에 간신히 머물러 있고, 실업 급여를 비롯한 노동시장 프로그램을 위한 지출액은 1998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의 0.4% 수준에 그쳤다. 이는 같은 시기 유럽이 평균적으로 GDP의 2.7%를 고용 정책에 투자한 것과 대비된다. 특히 미국의 비노년층 대상 복지 지출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GDP 대비 캐나다가 6%, 독일이 8.9%, 스웨덴이 12.6%를 지출하는 데 비해 미국은 고작 2.8%를 지출할 뿐이다.

    세전 빈곤율과 세후 빈곤율을 비교해보면 정부가 운용하는 사회 복지 제도의 효과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세전 빈곤율은 정부의 복지 및 세제 혜택의 효과가 미치기 전에 빈곤선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인구의 비율을 따져서 계산한다. 세후 빈곤율은 정부의 복지 및 세제 혜택의 효과가 나타난 뒤에 빈곤선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인구의 비율을 따져서 계산한다. 이 둘을 서로 비교하면 빈곤 퇴치를 위한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측정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의 복지 정책 시행 전과 후를 서로 비교해보면 정부가 빈곤을 줄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세전 빈곤율은 실제로 선진국 평균보다 약간 낮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아서 세후 빈곤율과 세전 빈곤율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8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티머시 스미딩(Timothy Smeeding)의 연구에 따르면, 연구 대상국들은 정부 지출과 과세로 빈곤율을 평균적으로 26.1%에서 9.8%까지 낮추었다. 반면 미국은 23.7%에서 17.0%로 낮추는 데 그쳤다.

    미국에서 한부모가정과 양부모가정의 세후 빈곤율은 각각 41.4%와 13.1%로, 세전 빈곤율 48.6%와 13.9%에서 불과 몇 %만 낮아졌다. 이에 비해 조사 대상인 8개국의 평균 정부 지출과 과세는 훨씬 더 큰 정책 효과를 발휘해서, 한부모가정에 대해서는 52.3%에서 25.2%까지 빈곤율을 끌어내렸고, 양부모가정에 대해서는 12.2%에서 6.6%까지 빈곤율을 끌어내렸다. 이렇듯 미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부양 자녀가 있는 가정의 가난에 훨씬 더 취약하다.

    미국 사회가 겪는 빈곤은 고치기 힘든 사회문제가 아니다. 통제 불가능한 인구가 낳은 부작용도 아니고, 신성한 경제 법칙의 산물도 아니며, 지식과 기술력이 부족한 사람이 겪는 자업자득의 결과물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빈곤은 하나의 정치적 현상이다. 빈곤은 엄연히 인간이 만든 제도인 정치적 정책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미국 사회에서 빈곤율이 높은 이유는 빈곤층을 지원하는 정치적 노력이 그만큼 부족해서다.

    미국에서 정부는 가난을 퇴치하거나 평등의 가치를 증진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미국의 정치 구조 자체가 재분배 개혁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양당제를 기반으로 한 승자 독식의 정치 구도, 정치 형성 과정에서의 다양한 거부권 행사와 정밀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 그리고 중앙 정부와 주들 간의 정치력을 분할하는 연방 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정치 제도는 본래 빈곤층의 욕구에 부합하기보다는 특권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미국의 국회와 각 주 그리고 지역의 입법 기관의 대표를 선발하는 주된 방식은 소선구제의 승자 독식 구조다. 하원의 경우 입후보자들이 서로 다른 435개 선거구에서 2년마다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각 선거구에서 가장 많이 득표한 입후보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마치 민주적인 절차로 보이지만, 오히려 소선구제는 갖가지 비민주적인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 예컨대 한 정당이 한 주의 모든 선거구에서 51%를 득표했다면 그 정당은 입법부 의석 전체를 독식하게 된다. 거의 50%에 육박하는 나머지 유권자들이 정부에서 자신의 이익을 변호할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승자 독식 구조의 선거제도에서 정당들은 유권자들 과반수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어야만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될 수 있다.

    미국에서 유권자들에게 주어지는 실질적인 선택지는 공화당과 민주당뿐이다. 이런 구조에서, 제3의 정당에 대한 지지표는 대개 사표(死票)가 되고, 그런 소수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서민들의 상당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대개 입법부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세우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승자 독식의 선거 제도는 대체로 평등주의적 대의를 내세우는 좌파 정당의 출현을 억제하고, 보다 더 보수적인 정권의 등장을 부추긴다. 국가 간 비교 연구로 확실하게 드러난 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복수 정당에 기초한 비례대표제는 소득 재분배를 우선시하는 좌파 중심 정권을 낳고, 다수결 방식을 채택한 양당제는 소득 재분배에 적대적인 우파 중심의 정권을 낳는다.

    미국에서 근본적 개혁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는 조직적인 이익 단체들이 거부권을 행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 수립 자체가 많은 부분에서 타협과 양보, 수용의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기업들의 이익에 영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빈곤층의 삶을 실질적으로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개혁 조치들을 국회의원들이 자꾸만 솎아낸 결과, 입법절차를 통해서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중산층을 위한 정책들만 통과되기 마련이다.

    미국 사회에서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는 미국의 경제 구조 탓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 구조 탓이기도 하다.

    정치 무대는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예컨대 특정 계층에 편향적인 정치 참여 과정을 한 번 떠올려보자. 미국 사회에서 저소득층은 부유층에 비해 투표를 하고, 정치 조직에 참여하고, 선거를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하거나 그 밖의 정치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작다. ‘사회적 불평등(Social Inequality)’에 관한 일련의 연구들에 따르면, 정치 참여에 대한 빈부 격차는 현저하다. 그리고 이런 격차는 민주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미국이 두드러지고, 통계 추산에 의하면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2006년 기준으로 임금과 연봉 근로자의 12%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고, 민간 부문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률은 7.4%에 불과했다. 1950년대 중반에 비해 3분의 1이상 떨어진 수치다. 이처럼 노조 가입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기업의 반노조 정책과 취약한 노동 법규 탓이 크다.

    노조는 기업이 막대한 자본력을 그대로 정치력으로 치환할 수 없도록 막는 없어서는 안 될 견제세력이다.

    인종 간 반목을 부추기는 정치는 소득 재분배를 약화시키는 법이다.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국가의 사회 복지 지출은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사회 복지 지출보다 현저히 낮다.

    노조의 쇠퇴, 자유주의의 변신, 시민 사회의 변화, 인종간 반목을 부추기는 정치. 이 네 가지 이유와 그 밖의 많은 이유들로 인해 노동 계급과 빈곤층은 꾸준한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가 없고, 이 때문에 자본 편향의 정치 구조는 더욱 공고히 다져지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불평등을 낳는다.

    전쟁 같은 예비 선거를 치르기 전, 입후보자들은 으레 ‘정치 기부금을 받고, 모금 행사를 주최’함으로써 자기 힘을 과시해 보인다. 물론 돈이 선거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기부금을 모으지 못하는 정치인은 결코 선거에 뛰어들 수가 없다. 미국에서 공직에 나서는 후보들은 당선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정치 자금을 민간의 기부금에 의존한다.

    사적인 선거 자금 모금 때문에 민주적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정치적 논쟁의 범위가 축소되며, 부유층의 이익에 편향된 정부 정책이 유발된다.

    2005년에 등록된 로비스트 수만 3천 명을 넘었는데, 이는 2000년의 2배를 넘는 수치다. 그중에서 많은 로비스트들이 미국 수도에 상설 사무실을 두고 있는 기업에 채용되어 일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빈곤층의 관심사보다는 부유층에 관심사에 훨씬 더 민감하다.  

    가난의 책임을 빈곤층 스스로의 결함 탓으로 보는 개인주의 이론은 명백한 사실, 예를 들어 정부의 역할에 민생 경제는 큰 영향을 받으며 1970년대부터 점점 더 부유층에 편향된 정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가난은 자업자득의 결과가 아니라 빈곤층의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정치 시스템의 실패 탓이다.

    최저임금은 1938년에 미국 의회를 통과한 근로기준법의 일환으로 법제화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물가를 감안한 최저임금의 실질 가치는 상승세를 보이다가 1968년에는 시간당 7.73달러(2006년 달러 가치 기준)로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1970년대에 들어서는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였다. 1980년대 들어 미국 정치는 우경화했고, 그와 동시에 최저임금은 급속도로 하락했는데, 레이건 정부 시기 최저임금은 30% 가까이 하락했다. 1981년 1월부터 1990년 4월까지 의회는 최저임금을 동결하기로 결의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97년까지 총 4번에 걸쳐 최저임금이 소폭 인상되었으나, 1997년 구매력 기준 최저임금은 여전히 1968년 수준에도 훨씬 못 미쳤다.

    비관리직 근로자 평균 임금 대비 연방 최저임금의 비율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각각 44%와 56%를 기록했으나, 2007년 연방 최저임금은 고작 31% 수준에 그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한편, 최저임금 노동자와 부유층의 소득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졌다. 1968년에서 2004년까지, 기업 수익은 85% 증가한 반면 최저임금은 41% 감소했다. 그리고 1980년에서 2004년까지, 최저임금 대비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평균 소득은 97배에서 952배로 급증했다.

    실업 보험 제도는 1935년 사회 보장법의 일환으로 제정되었다. 주된 목적은 비자발적 실업자들에게 임금을 대체할 수 있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자금을 지원해주기 위해서였다. 실업 보험 제도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관리한다.

    미국 정치의 보수 편향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1996년 제정된 개인책임과 근로기회조정법(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Reconciliation Act)이다. 이 법의 제정으로 부양 아동 가정부조(AFDC)가 없어지고, 연방 정부가 주에 지급하는 정액 보조금(block grant)으로 운영되는 이른바 빈곤가정 일시부조(TANF)가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으로 도입되었다. 애초에 공화당원들이 입안하여 시간이 가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슬그머니 허락한 이와 같은 복지 제도의 재정비는 빈곤층의 복지 의존성을 퇴치하고 일자리와 결혼, 양부모 가정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홍보되었다. 빈곤가정 일시부조는 복지혜택을 받을 때에도 기간 제약을 두어, 빈곤층 가구의 여성 가장이 정부로부터 평생 최대 6개월까지만 원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주에서 허용하는 수급 기간은 더욱 짧았다. 수급자들이 복지 의존성을 탈피하고 경제적 자립을 빨리 달성하라는 취지로, 빈곤가정 일시부조는 수급자들의 근로 조건까지 의무화했다. 다시 말해 빈곤층 가구의 여성 가장은 복지혜택을 받는 대가로 반드시 일을 해야만 했다. 복지 수급자가 공부를 포기하거나 자기 자녀들을 신뢰할 수 없는 양육 기관에 맡기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빈곤가정 일시부조는 그 집행 방식에 있어서, 수급 대상자들이 의무 근로 규칙과 그 밖의 복지 규제를 따르지 않았을 때에는 복지혜택을 축소시키는 벌칙을 부과하는 등 체계적인 제재 수단을 마련해두었다.

    빈곤가정 일시부조 프로그램은 1990년대 후반 활황을 구가했던 경제 상황과 맞물려 한 가지 특별하고 의미심장한 효과를 남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지 수혜자 규모의 대폭 감소였다. 현금 복지 지원금을 받는 가구의 수는 1995년 5백만 가구를 상회했으나 최근에는 약 2백만 가구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 성인과 어린이들 합쳐 1,400만 명을 상회하던 복지 수급자의 수는 이제 채 5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이후 빈곤율과 빈곤의 수위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오히려 복지 수급자들의 규모는 꾸준히 축소되었다. 2000년에서 2005년까지 빈곤층 어린이 수는 백만명 이상 증가했고, 여성이 가장인 빈곤층 가구의 수는 2백만 가구 이상 증가했으며, 빈곤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극빈층의 수는 역대 최고인 1,600만 명에 육박했다. 1996년 이후 복지 수급자 규모가 줄어든 주된 이유는 수급 자격이 되는 빈곤층 가구의 수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까다로운 자격 기준에 맞춰 빈곤가정 일시부조 프로그램에 등록된 빈곤층 가구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는 복지 개혁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즉, 빈곤층 여성 가장과 그 자녀들을 위한 정부의 안전망은 크게 훼손되었고, 그에 따라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며 근근이 버티는 저소득 가구는 더 많아졌다.

    피터 하트 연구소(Peter Hart Research)가 2006년에 실시한 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동자의 53%가 노조에 가입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이런 결과를 감 때, 민간 부문에서 8%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낮은 노조 가입률을 노동자들의 선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노동권법(right to work law, 근로자가 조합에 가입하지 않아도 직장을 유지할 수 있는 법 — 옮긴이)’

    제2차 보이콧(쟁의와 직접 관계가 없는 거래선을 보이콧하는 일 ‐옮긴이)

    동정 파업(불만은 없으나 다른 파업 단체와 단결력을 과시하기 위한 파업 ‐옮긴이)

    미국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이 그렇듯이, 미국의 문화 시스템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힘겨루기의 장이다. 이 문화 시스템 내에서 일어나는 내용과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용어와 줄거리의 종류에 따라서 평범한 미국인들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보 입수 여부가 결정되고, 빈곤층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계층인지 자격이 없는 계층인지에 대한 인식이 정해지고, 정부가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할지 줄여야 할지에 대한 일반 미국인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가난과 복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곧 대중들의 정치적 선호와 투표 행태로 이어지므로 문화 시스템은 중요하다.

    사회 전체의 빈곤 정도와 빈곤층이 겪는 가난의 수위는 중산층 문화의 속성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은 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가난은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

    빈곤층은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의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사회 통념이나 여론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 대중의 사고방식을 탐구한 사회과학자들은 빈곤을 다루는 두 가지 뚜렷한 이론이 있음을 밝혀냈다. 한쪽 진영에서는 가난의 책임을 주로 개인이나 내적 요인, 요컨대 검소한 태도의 부족, 비도덕적인 행동 혹은 게으름 탓으로 돌린다. 다른 쪽 진영에서는 가난의 책임을 주로 사회 구조나 외부 요인, 요컨대 사회적 차별, 질 낮은 학교 혹은 일자리 부족 탓으로 돌린다.

    가난의 책임이 빈곤층 스스로에게 있다는 대중들의 개인주의적 의식 성향은 빈곤층이 각종 부문에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인들의 90% 이상이 가난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개인의 노력 부족을 언급했다.

    따라서 많은 미국인들은 정부가 빈곤층을 돕기를 원하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정부의 역할은 제한적이어야 하고, 자립해야 할 개개인의 의무를 대신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정치 문화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개인주의와는 달리, 구조주의의 영향력은 상대적 미약하고 불확실해서 그로 인해 강력한 사회 구조적 해결책이 시행될 가능성이 낮다.

    ‘구조적 장벽들’이 빈곤층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미국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거기에 ‘누구든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면 그런 걸림돌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끼어들면 구조주의적 인식의 영향력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다수의 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큰 병폐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성공하지 못한 것을 사회 제도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오로지 자기 탓으로 돌려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여성들과 유색 인종 및 소수 민족이 사회적 차별을 당한다는 견해에 대해 설문 조사를 해보면, 응답자들은 그런 차별이 자기가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는 못한다고 응답한다. 미국인들은 이처럼 성공을 부르는 개인적 노력의 효험과 사회 구조적 장애물의 존재를 동시에 믿는다.

    가난을 다루는 언론 보도는 대중 의식의 각성을 이끌어내거나 본질적인 논의를 유발하기보다는 사회적 통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 매체의 역할은 대중들이 스스로 시민의 책무를 다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정치 및 경제 지도자들이 공적인 책임을 다하는지 감시하는 일이다.

    뉴스 매체의 시선은 거시적인 문제가 아닌 미시적인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패턴을 관찰하기보다 특수한 사례들에 집중하고,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개인의 환경에 집중하며, 정치·경제의 불평등 문제보다는 개개인의 결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뉴스 매체는 기사를 가공한다. 그리고 이런 기사들의 일관성과 효과는 그런 기사들을 어떻게 ‘프레임’하느냐에 따라서, 즉 사실 관계들을 어떻게 묶거나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복지 여왕(welfare queen, 순수하게 복지 혜택에만 의존해서 사는 여성 — 옮긴이)’

    마틴 길렌스(Martin Gilens)가 입증하듯이, 미국 흑인들의 얼굴은 언론이 복지 중독이나 복지 의존성 같은 이슈들을 다룰 때처럼, 주로 부정적인 논조로 기사를 쓸 때 훨씬 더 자주 등장한다. 반면 백인들의 얼굴은 빈곤층에 대한 긍정적인 뉴스 기사에서 더 빈번하게 등장한다.

    만약 언론이 보다 더 장기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장기적인 추세에도 초점을 맞춘다면, 가난을 빈곤층 스스로가 자초한 자업자득의 결과로 보거나 개인의 불운쯤으로 치부하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구도 줄어들지 모른다. 언론학자 마이클 셔드슨(Michael Schudson)은 만약 언론사가 일간이 아니라 월간이나 연간 단위로 운영된다면, 뉴스 지면에 그 동안 간과되어왔던 사회적·역사적 요인이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텔레비전은 특정 문제를 묘사하고, 희생자를 찾아내며, 그 증상을 밝혀낼 수 있지만, 가난과 불평등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원인을 밝히는 데 필요한 재원이 부족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심층 보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뉴스 매체는 기술적인 문제들에 집중함으로써 시청자들을 시민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지식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취급한다. 할린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기술적인 방법론에 집착하는 이러한 저널리즘의 행태는 거시적인 사회 이슈에 대한 논의를 유발하거나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 혹은 살아가고 싶은 사회에 대해 성찰해볼 수 있는 뉴스 기사를 생산하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 주류 언론 매체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편에 선다. 주류 언론은 가난의 구조적인 원인들을 조명하지 않고,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적 관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우파의 수사에 따르면, 가장 큰 폐단은 사람들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생활을 마치 쉴 새 없이 경쟁해야 하는 경주인 것처럼 상상하는 듯하다. 모든 참가자들은 똑같은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똑같은 규칙과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어떠한 경주든 간에 비참가자들은 그저 구경꾼일 뿐이다. 그리고 경주가 공평한 경쟁의 장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개개인의 성패는 오로지 참가자 본인의 기량과 훈련 수준 그리고 투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생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경주는 공평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참가자들이 공정한 규칙의 적용을 받는 것도 아니며, 개인의 기량만 뛰어나다 해서 성공하는 것만도 아니다. 게다가 실제 경쟁의 장에서 우리는 아예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거나 혼자의 힘으로는 출발선에서부터 결승점까지 완주하지도 못한다. 우리들은 종종 낯선 사람의 친절함에 기대고, 분명히 친구들로부터 작은 도움도 받는다. 내 주변의 타인들은 그저 단순한 구경꾼들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에 따라서 우리가 경기장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펼칠지 아니면 형편없는 경기력을 펼칠지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만약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내 지인들은 중요한 경주가 언제 어디서 펼쳐지는지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해줄 것이고, 틀림없이 나는 가장 유명한 대회에 참가하게 될 것이며, 지인들 덕분에 경주 관계자들을 소개받고, 유리한 출발점을 확실히 지정받고, 성공적으로 경주를 펼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제공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주가 시작되고 나서도 지인들은 경주가 펼쳐지는 내내 나를 돕는다. 지인들은 내게 유리한 위치를 안내해주고, 내 경쟁자들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고, 심지어 자신들의 어깨로 나를 부축해가며 전진시켜 주기도 한다. 반면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주변에 끊임없이 지원을 해줄 만한 위치에 있는 지인들이 없다면, 인생의 경주는 몹시 고된 일이 될 수 있고, 경주를 끝마치는 일조차 어려울 수 있으며, 승리는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다. 현실이라는 실제 경주에서, 강력한 조력자들의 지원이 없다면 달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조차 경주에서 홀로 뒤처지게 될지 모른다.

    특권 집단에 속함으로써 누리는 혜택은, 예를 들어 남성 집단의 사례처럼, 심지어 집단 내 구성원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개 자연스럽고 확연하게 구성원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거주민의 계급적·인종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극빈층 거주 지역은 보통 ‘게토(ghetto, 빈민가)’나 ‘바리오(barrio, 스페인어 사용자들의 빈민가 — 옮긴이)’로 불리는데, 주로 흑인들과 히스패닉이 거주한다.

    고트로 프로그램(Gautreaux Program, 연방 정부 주도 하에, 약 5,000명의 저소득층 가구를 대도시 근교 백인 지역에 재배치하는 프로그램 — 옮긴이)

    MTO 프로그램(Moving to Opportunity program,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이사라는 뜻으로 아이가 있는 저소득층 가구의 이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 — 옮긴이)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도헌(Daniel Dohan)이 미국의 ‘바리오’ 지역 내 일자리를 “분명한 기회의 발판이기보다는 현재 겪는 고난의 근원”이라고 표현했듯이, 극빈층 거주 지역 내에서는 비록 일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장래성이 없고, 불안정하며, 저임금에다 불만과 갈등이 만연한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거주 지역이 구성원들의 삶의 기회를 결정하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관찰 결과는 성공이 단순히 개인적 능력과 노력의 산물일 뿐이라는 개인주의적 관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과학자들은 사회적 연결망 속에 내재된 뚜렷한 사회적 자원을 표현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금융 자본은 자신의 은행 계좌에, 인적자본은 자신의 머릿속에 각각 들어 있지만, 이러한 자본들과는 달리 사회적 자본은 유일하게 사회 구조적 자원이다.

    이처럼 ‘개인적’ 자원과는 별개인 ‘사회적’ 자원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사회적 자본 개념은 경제적 성패는 오직 자업자득의 결과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의 경제적 운명은 각자가 지닌 타인과의 인간관계 그리고 크든 작든 타인의 도움이나 훼방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결정된다.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이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노래하듯이 타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아는’ 사람이다.

    공공 정책 전문가 캐서린 오리건(Katherine M. O’Regan)과 경제학자 존 퀴글리(John M. Quigley)의 추산에 따르면, 전체 일자리의 절반가량이 인맥을 통해 구해진다. 따라서 사회 연결망의 질은 보통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취업을 하느냐 못하느냐, 좋은 일자리를 얻느냐 나쁜 일자리를 얻느냐, 정상까지 올라갈 것이냐 밑바닥에서 맴돌 것이냐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자원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개개인이 사회에서 얻는 기회가 많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적어지기도 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줄 금전적·사회적 여력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 연결망에서 배제되기 쉽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한 스스로 유대 관계를 끊기도 한다.

    패트리샤 켈리(Patricia Kelly)에 따르면, 사회 연결망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 특히 가치가 높다. 느슨한 유대 자체도 강력하지만, 느슨한 유대 관계의 구성이 다양할 때, 즉 느슨한 유대가 서로 다른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 믿을 만한 인맥이 포함되어 있을 때,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자본은 “승수효과를 발휘한다”.

    사회적 자본의 부재는 정치 영역에서도 중요하다. 사회·경제적으로 상류층 인사와 눈곱만큼의 인연도 없는 저소득층은 정치 시스템과 단절된 경향이 있다. 이베 알렉스·어센소(Yvette Alex-Assensoh)의 연구 결과가 밝혀냈듯, 사회적으로 고립된 빈곤층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고, 정치 단체에 가입할 가능성도 낮으며, 선거에 참여할 가능성도 더 낮다. 특히 극빈층 거주 지역에 사는 흑인들의 사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적 자본의 부재는 빈곤층의 정치의식과 빈곤층의 정치 동원 능력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저차원의 사회적 자본이 저차원의 정치적 자본으로 이어진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빈곤층, 특히 대도시 극빈층 거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 연결망은 상대적으로 협소하고, 느슨한 유대 관계보다는 끈끈한 유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사회 연결망은 주로 서로 잘 아는 이웃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하고 분산된 형태를 띠기보다는 협소하고 응집된 형태를 띤다. 그리고 연결망 내에는 주로 자신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연결망은 그들에게 귀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빈곤층이 겪는 일상적인 문제들은 결코 ‘소수의 개인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우연히 일어나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지배적인 사회 제도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비단 빈곤층뿐만 아니라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실질적인 고난을 가져다준다.

    가난은 결코 동등한 기회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에 미국에서 가장 큰 소수 집단인 흑인과 히스패닉의 빈곤율은 각각 24.9%와 21.8%를 기록해, 비히스패닉계 백인의 빈곤율 8.3%를 크게 웃돌았다. 미국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를 차지할 뿐이지만, 빈곤층의 약 50%, 극빈층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사회학자 데바 페이저(Devah Pager)의 놀랄 만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과가 없는 흑인 남성과 그와 자격 조건이 똑같고 범죄 전력이 ‘있는’ 백인 남성이 이력서를 냈을 때, 흑인 남성은 백인 전과자에 비해 전화 회신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도 높지 않았다. 흑인들은 노동시장에서 적어도 출소자들만큼이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고, 흑인 전과자들의 취업 기회는 굉장히 부족하다.

    마리안 버트런드(Marianne Bertrand)와 센딜 물라이나산(Sendhil Mullainathan)은 다수의 가짜 이력서를 만들어 보스턴과 시카고 지역신문에 실린 수백 건의 구인 광고에 회신을 보냈다. 그 결과, 에밀리(Emily)나 그레그(Greg) 같은 대표적인 백인 계통의 이름을 쓴 이력서는 라키샤(Lakisha)나 자말(Jamal) 같은 대표적인 흑인 계통의 이름을 쓴 이력서보다 인터뷰 제의를 50% 이상 더 많이 받았다.

    부유층과 빈곤층의 지역적 분리는 1970년대부터 심화되었고, 그 결과 부와 빈곤 모두가 점점 더 특정 지역에 편중되고 있다. 미국에서 지역 분리가 가장 심한 도시들의 주거 양상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2000년도 인구조사에 따르면 흑백 간 인종 분리는 1980년 이후 약한 감소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백인과 아시아인, 백인과 라틴계 간의 인종 분리 수준은 약간 증가했다.

    미국에서도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도시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흑인들과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라틴계가, 히스패닉이 아닌 백인들과 서로 동떨어진 거주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20세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21세기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거주지 분리는 잘 알려져 있는 인상과는 반대로, 사람들이 원래부터 비슷한 부류끼리 살아가는 습성이 있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물론 개인의 선택은 중요하지만,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종차별적 거주지 분리 양상은 흑인보다는 백인들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이고, 자기 집단 편애 현상이라기보다는 인종 간의 두려움과 선입견이 표출된 결과이다.

    ‘백인 이주(white flight, 도심지의 범죄를 우려한 백인 중산층의 교외 이주 — 옮긴이)’

    백인들의 인종 편견은 ‘이중의 재난(double whammy)’을 불러온다. 백인들의 인종 편견은 백인들의 거주지 결정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거주지 결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서 인종 간 통합을 저해한다.

    2003년과 2004년 통계에 따르면, 유색 인종 학생이 적어도 학교 정원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학교가 미국 전체 학교의 14%를 차지했고, 그런 학교들 중 4분의 3 이상이 빈곤층 가정 학생들이 대다수인 학교였다. 거주지 분리 현상, 그리고 도시와 교외 간, 빈곤층 거주지와 부유층 거주지 간의 경제적 격차가 확대되면서 거주지와 부모 경제력에 따른 어린이들의 교육 격차와 교육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거주지 분리의 결과로 거주 지역의 평판이 달라진다. 거주 지역이 좋은지 나쁜지, 안전한지 위험한지는 거의 전적으로 그 지역의 인종 구성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

    인종 간 부의 격차는 인종 간 소득 격차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중위 소득 가구 기준으로,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과 백인 간 상대적 소득 비율은 60% 수준이다. 그러나 백인 가구 대비 흑인과 라틴계의 부의 축적 수준은 10% 미만에 불과하고, 흑인 가구의 약 3분의 1 그리고 히스패닉 가구의 4분의 1 이상이 순자산이 제로(0)이거나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거주지 분리는 빈곤층의 사회적·경제적 소외를 부추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소외도 부추긴다. 빈곤층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공간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어서 더 큰 정치적 힘이 있는 백인 및 도시 근교 주민들과 연대를 이루어 공유할 만한 이해관계가 거의 없다. 사실상 도심과 교외 주민들의 이해관계는 연대하기보다는 서로 충돌할 공산이 큰데, 특히 정부 축소와 긴축 재정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정책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반적인 가정은 가계 총소득 중 주거비 비중이 30% 이하여야 감당이 가능하다고 한다. 가계 전체 소득 중 주거비 비중이 30% 이상이면 보통의 주거비 부담으로, 50% 이상이면 심각한 주거비 부담으로 분류한다. 2004년 현재, 전체 가구의 약 3분의 1(약 3,500만 명)이 적어도 보통의 주거비 부담을 떠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이후 거의 400만 명이나 증가한 수치다. 심각한 주거비 부담을 안고 있는 사람도 200만 명 가까이 늘어나 1,580만 명을 기록했다. 한편 소득 하위 25%에 속하는 가구 중에 주거비의 50% 이상을 소비하는 가구는 역대 최고인 46%를 기록했다.

    연간 정부에서 지원하는 1,500억 달러 규모의 주택 보조금 중에서 3분의 1이상이 주로 주택담보대출 이자 지불액과 부동산세에 대한 세금 감면 형태로 최상위 소득 20% 가계에 돌아간다. 이와 같은 부유층을 위한 주택 관련 조세 지원 규모는 소위 ‘섹션 에이트(Section 8)’ 임대료 보조 제도로 대변되는 빈곤층을 위한 정부의 주택 지원 비용을 훨씬 초과한다.

    자격이 되는 모든 가구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는 조세지출과는 달리, 주거 지원 보조금은 수급자 가계의 자금이 바닥나야만 지급된다.

    학교 재정은 지역 내 지방세 규모에 크게 의존하는데, 빈곤층 거주 지역은 거둬들이는 세금이 많지 않으므로 빈곤층 및 소수자 학생들을 위한 교육 지출은 중산층 학생들을 위한 교육 지출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교육재단(Education Trust)에서 발간한 2005년 연구 자료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극빈층 거주 지역의 연간 학생 1인당 교육비 지출액은 빈곤층 거주 지역에 비해 900달러 더 적었다. 극단적인 경우 타 학교에 비해 2~3배에 달하는 교육비를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학교도 있다. 또한 학군별 그리고 주별로 나타나는 교육의 불평등 때문에 많은 빈곤층 어린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이런 교육 격차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누적된다.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은 공정한 기회의 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모의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도록 부추긴다.

    24세 이하 성인의 경우, 소득 상위 25% 중에서 71%가 대학을 졸업한 반면 소득 하위 25% 중에서는 오직 10%만이 대학을 졸업한다.

    미국의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 중 소득 상위 25% 가정 출신은 약 4분의 3을 차지하지만, 소득 하위 25% 가정 출신은 3%, 소득 하위 50% 가정 출신은 10%에 불과하다.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에 빠지기 쉽다. 만약 교육 시스템이 더욱 공정했더라면 분명히 그 덕을 보았을 터이다. 하지만 리처드 로스스테인(Richard Rothstein)이 주장하듯이, 심지어 전면적인 교육 개혁을 하더라도 계급에 따른 불이익과 인종 차별이라는 거시적인 사회적 폐해를 상쇄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본질적이고, 교육 문제는 나타나는 증상이다. 보다 공정한 학교를 만드는 일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만 빈부 간의 교육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빈곤층이 당면한 문제는 자동차를 구입하고 보험료와 유지비를 감당할 만한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2000년에 빈곤층의 약 20%와 준빈곤층(빈곤선의 100~200% 소득을 올리는 계층)의 약 12%가 자동차를 전혀 이용할 수 없는 가구였다.

    사커맘(soccer mom, 자녀가 방과 후 축구를 하러 갈 때 데려다주는 교육열 높은 중산층 어머니들 — 옮긴이)

    싱글맘(24.1%)은 싱글대디(17.9%)보다 경제난에 노출되기 쉽다. 싱글맘 가정의 빈곤율(28.7%)은 양부모 가정의 빈곤율(5.1%)의 5배가 넘는다. 다시 말해 싱글맘 가정의 구성원 중 3분의 1에 육박하는 1,300만 명 이상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가난에 시달린다.

    여성들은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전담하기 때문에 고용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상당수가 낮은 임금을 받는 시간제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래 일어난 미국 사회의 많은 변화들 중 여성 인력, 특히 아내와 어머니들의 사회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만큼이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없다. 1947년에는 18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진 여성들 중 18.6%, 자녀가 취학 전 아동인 여성들 중 12%만 직업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5세 이하 아동을 자녀로 둔 여성들의 취업률이 여전히 30%에 미치지 못했다. 오늘날은 아이들의 연령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직장에 다니고 있다. 양부모 가정의 어머니들은 66.8%, 싱글맘 가정의 어머니들은 72%에 이른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칭송받던 가족 모델인 ‘아버지는 돈을 벌고, 어머니는 집안일만 하고, 아이들은 온전히 부모가 돌봐주는 가정’은 예외적인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은 어머니가 돈을 벌고 아이들은 보육시설에서 책임지는 것이다.

    가난은 건강에 해롭다. 가난한 사람들은 20%가 건강이 보통이거나 안 좋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 빈곤선 2배 이상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6.3%만 그러하다고 보고한다.

    계층 구조에서 최하위 계층의 조기 사망률은 최상위 계층의 3배에 이르기도 한다.

    2004년, 수입이 하위 20%에 속하는 근로자 중에서 24.4%만이 직장에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았고 그에 비해 상위 20%에 속하는 근로자들은 77.5%가 건강보험 혜택을 받았다.

    노인들의 경제 상태는 수백만 명의 미국 노인들에게 적절한 소득을 보장하지 못하는 은퇴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제도는 다리가 셋인 의자, 즉 ‘사회보장제도, 개인 저축, 근로자퇴직연금’으로 설명되곤 한다. 가난한 미국인의 경우, 상황이 가장 좋을 때에도 이 세 다리가 그다지 튼튼했던 적이 없었다.

    은퇴 제도가 합리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어도 대략적으로 열 명 중 한 명의 미국 노인은 빈곤선 아래로 떨어진다.

    2004년 상위 25%의 고소득층 가구 중에서는 64.1%, 하위 25%에 속하는 저소득층 가구 중에서는 18.7%의 근로자들만이 연금가입의 혜택을 입었다.

    개인연금의 변화는 노후 불안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금기 동안, 연금 가입이 된 근로자들은 보통 ‘확정급여형(DB) 연금’의 혜택을 누렸다. 사회보장연금과 비슷한 이 전통적인 연금제도는 근로자들에게 은퇴 뒤 평생 매월 고정적인 연금을 보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고용주들은 떼지어 확정급여형 연금 가입을 중지하고 대신 ‘확정기여형(DC) 연금’으로 대체했다. 주로 401(K)형이었다. 이런 연금제도는 근로자들에게 세전 수입을 자신의 투자자금에 불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고 고용주가 기금 관리를 하는 제도다. 1975년에서 1998년 사이에 확정급여형 연금 가입자 수는 전체 연금 가입자 중 대략 70%에서 30%로 떨어졌다. 이런 패턴은 개인연금 부문에서 더 두드러진다. 연금수급자의 20%만이 확정급여형 연금을 받고 있고 그 수는 이후 10여 년이 지나면 거의 전무한 상태가 될 것이다.

    확정급여형 연금에서 확정기여형 연금으로의 전환은 대부분의 미국 근로자들에게 은퇴 후 위기를 증가시켰다. 새로운 제도에 따라 고용주보다는 근로자 자신이 기금과 퇴직 예금 계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 퇴직자에게 지급될 금액은 주식시장의 변동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투자 위험은 모두 근로자가 감당한다. 고용주는 근로자들에 대하여 장기적인 재정적 의무가 전혀 없다. 게다가 확정기여형 연금은 확정급여형 연금과 달리 연방정부가 보증하지 않는다. 401(K)의 연금 자산이 부유한 근로자들 사이에 상당히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확정급여형에서 확정기여형으로의 전환은 ‘연금 자산의 불평등’을 급증시키기도 했다. 많은 상류층 근로자들은 1990년대에 치솟는 주가의 혜택을 입어 확정기여형 연금제도의 덕을 보았지만, 엔론, 월드콤을 비롯하여 방만한 경영을 하고 스캔들이 너무 많은 회사의 경영주들은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수입이 적은 근로자들에게 확정급여형 연금이 없어졌다는 것은 은퇴 뒤 받을 수입의 감소를 의미했다. 중산층 미국 근로자들의 경우에도 확정기여형 연금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들 아마도 생활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다. 확정기여형 연금에 가입되어 있는 4,000만 가구를 대상으로 할 때 연금의 중간값은 고작 28,000달러밖에 되지 않고, 퇴직하기 바로 직전에 있는 근로자(55세에서 64세)를 대상으로 할 때에도 그들의 확정기여형 연금의 중간값은 61,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부시 정부가 구상한 사회보장개혁 모델인 확정기여형 연금제도가 늘어나자 수백만 명의 미국 근로자들은 안정된 노후를 바라기 어려워졌다.

    현장 전문가들은 퇴직자들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대략 퇴직 전 수입의 75%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미 서비스 노조(SEIU)의 대표 엔드류 슈테른(Andrew Stern)은 오늘날 젊은 노동자들의 은퇴 계획은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쉬플러(David Shipler)는 “가난이나 어느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은 한 가지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여러 문제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라고 논평한다. 그 문제들은 점층적으로 쌓여서, 서로 강화시키고,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종차별은 주거지를 분리시키고, 주거지가 분리되면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주택시장을 둘로 갈라놓고, 불평등한 두 가지 학제를 만들어낸다. 열악한 주택과 주거 환경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더 나은 주택, 새 차를 구입하거나 양질의 보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돈을 다 써버리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어른들이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이 공부에 열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가난을 떨쳐내기 어려워진다. 교통문제가 있으면 가난한 가족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데 어려움이 생기고, 양육문제는 다시 성차별을 부추기며, 성차별과 양육문제와 교통문제가 모두 뒤섞이면 부모들, 특히 싱글맘들은 좋은 직업을 찾아서 직장생활을 계속 유지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결국 이런 문제들은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병이나 질병에 지나치게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계속하여 생기며 악순환이 지속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한 탓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진정한 문제는 탐탁하지 않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들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냉혹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우리는 빈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특성에 집중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의 역학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개인의 결점에서 사회제도의 결함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나는 빈곤을 개인의 자멸적인 가치관이나 습성 탓으로 보는 관점 대신 구조적 관점을 제안한다. 오늘날 빈곤 문제는 깊이 뿌리박힌 소득과 부, 권력의 불균형에 기인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어떠한 빈곤 완화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빈곤은 구조적인 문제이며, 구조적인 해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스티븐 룩스(Steven Lukes)는 권력을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빈곤은 단순히 소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비범한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한 개혁을 실행에 옮길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빈곤 문제는 권력이라는 문제와 맞붙어 씨름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력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고군분투할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순전히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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