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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 부자들Books 2020. 4. 3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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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 부자들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남들과 다르게 움직인 61인의 놀라운 통찰력!『한국의 젊은 부자들』은 네이버 모바일의 인기 코너인 ‘잡&’ 콘텐츠 중에서 사용자들이 가장 열광했던 이야기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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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없이 전화하고 옷을 만드는 현장을 보고 있으니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회사가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 모두가 20대 CEO가 지휘하는 ‘로켓’에 올라탄 사람들이다.
- 이 회사가 경쟁이 치열한 온라인 패션 업계에서 이처럼 빠른 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패션 업계에서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에 세상이 환호했기 때문이다.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으로 새 옷을 만드는 역발상적 접근을 한 것이다. “LG패션, 제일모직 같은 큰 기업에서는 쓰다 남은 ‘자투리’ 원단이 하루에 5톤 차량으로 20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투리 원단을 버리려면 돈을 내야 해요. 저희는 그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을 무료로 혹은 돈을 조금 주고 가져와서 새로운 옷을 만듭니다. 어차피 버리려면 돈이 드는데 저희가 돈을 주고 사 간다고 하니 너무 좋아하셨죠.”
- 의류 업계의 가장 큰 고민은 비용 절감이다. 글로벌 유통망을 가진 유니클로, 자라 같은 세계적인 스파(SPA)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도 빠른 속도와 규모의 경제로 원가를 줄인 데 있다.
- 자투리 원단을 이용해 비용을 40%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좋은 품질의 옷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선보이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결국 통한 것이다.
- 맨투맨 티셔츠(칼라나 모자가 달리지 않은 면 소재의 스웨트 셔츠,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용어)나 패딩 점퍼를 만들 때 앞판은 자투리 원단을, 뒤판은 새 원단을 쓴다. 50% 정도를 자투리 원단으로 구성하는 맨투맨 티셔츠의 온라인 소비자가는 5000원. 백화점에선 1만 원 정도에 팔린다. 원가는 1300원 선.
- “원가가 2000원이 넘는 게 없어요. 이게 경쟁력입니다. 새 원단 같은 경우 보통 의류 업체는 1야드를 3000~4000원에 떼어 와요. 자투리 원단은 1야드(0.9미터)에 300원이면 되니까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습니다.”
- 누구나 가지고 있는 패션이라는 취미는 점점 그녀의 ‘업’으로 발전해 갔다.
- ‘호랑이를 쫓아가면 고양이라도 잡는다’
- 가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 대부분이 부모의 도움에 질색한다는 점이다. 일부는 부모가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일궈 보고 싶다’며 밑바닥부터 뛰어들었다. 부모에게 돈을 빌린 사람도 돈을 벌자마자 은행 이자보다 훨씬 많은 이자를 계산해 바로 갚아 버렸다.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부모를 직접 고용해서 월급을 주면서 일을 하거나, 부모가 세운 부진한 사업체를 이어받은 사례뿐이었다.
- 그의 부모는 고깃집 주인이었다. 어렸을 때 삼겹살과 갈비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매일 먹었다. ‘배달의민족’ 같은 서비스는 그의 꿈 ‘버킷 리스트’에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기로 마음먹자 무한정 확장되는 모바일 플랫폼에서 자신의 디자인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 무조건 모험에 뛰어들거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패를 무작정 받아들이거나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충분히 도전할 만한 준비가 되었을 때, 남들에게 없는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인맥, 실행 계획이 준비됐을 때 뛰어들었다.
- 완벽하게 준비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더 빨리 실패하고 많은 것을 경험했기에 성공에 이르렀다
- 더 이상 남들처럼 살아서는, 똑같은 열차에 올라타서는 성공할 수 없다
- 우리나라는 지금 2006년 이후로 11년째 1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2300만 원)대에 머물러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87년 2만 달러에 오른 미국은 9년 만에 3만 달러(3400만 원)를, 영국은 1995년 2만 달러에 오른 뒤 2004년 3만 달러를 달성했다. 일본은 1987년에 2만 달러를, 1992년에 3만 달러를 달성했다. 주요 선진국들이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후 3만 달러를 넘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8.2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2만 달러 턱걸이에서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 1~2%대의 경제 성장률은 고령화・저출산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당분간 3만 달러 시대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 대기업들도 ‘수평적인 기업 문화 만들기’란 명목으로 조직의 틀을 바꾸고 있다. 기존의 대리・과장・차장・부장 직급을 없애고, 임원을 제외한 직원들을 모두 ‘매니저’로 통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상사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으로 기업 문화를 혁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속내는 고액 연봉을 줘야 하는 자리를 줄이고 고용 인력을 유연하게 관리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의 공무원 열풍은 맥 빠지는 일입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은 관료 사회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가를 뻔히 보면서도 이런 악습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한국 젊은이들의 창의적인 비즈니스 시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 고령화 시대, 퇴직하는 베이비부머들의 고용 창출을 늘려야 하는 가장 큰 책임은 다름 아닌 젊은 세대가 어떤 경제 주체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숱한 실패를 경험한 것처럼 언제든 넘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지금의 성공은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지금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99명이 삐딱한 시선으로 봐도 단 한 사람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공개했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을 때려치우고 창업에 나서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의 성공 방식이 다 다른 만큼 우리도 우리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들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에게서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면 그리고 시련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잠자고 있던 당신의 성공 본능이 다시금 꿈틀거렸으면 좋겠다.
- 야나가와 노리유키 일본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내 한 콘퍼런스에서 ‘생애 주기에서 최소한 세 번의 직업 전환이 필요해질 것’이라고도 했다. 직업 주기를 20~30대, 40~50대, 60대 이상으로 나누는 고용 방식도 제안했다. 사회가 급속히 바뀌고 있고 그에 따라 필요로 하는 역량과 기술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16년 10월, 벤처 업계에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매출 500억 원 청년 신화’인 신발 업체 스베누의 황효진(29) 대표가 갑자기 폐업한다는 소식이었다. 10~20대를 겨냥한 가성비 좋은 운동화로 큰 인기를 누린 스베누의 몰락에 벤처 업계가 놀랐다. 폐업 이후 이 신발은 ‘땡처리’로 팔리고 있다. 한때 5만 원 이상으로 팔리던 제품들이 일부 쇼핑몰에서 990원에 팔리기도 했다. 강원도 출생인 황효진 씨는 2007년 아프리카 TV에서 ‘BJ소닉’이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다. 각종 스타크래프트 강좌와 경기 중계로 인기를 얻던 그는 2012년 BJ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신발팜’이란 온라인 멀티숍을 오픈했다. 그 후 빚을 내 오프라인 시장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는데 핵심은 공격적인 광고 마케팅이었다. 톱스타인 아이유, 송재림, 걸그룹 AOA와 전속 모델 계약, MBC 수목 미니 시리즈 〈앵그리맘〉 협찬, 여기에 할리우드 배우 클로이 모레츠까지 모델 계약을 맺었다. 유명 셀러브리티와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으로 효과를 본 스베누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3년간 장기 공식 스폰서십 계약까지 체결했다. 창업 후 100억 원의 매출에, 이듬해 5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황 대표는 언젠가 수억 원대에 이르는 세계적 명품 스포츠카를 별도의 차고지에 모으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롤스로이스를 리스해 운행하는 소식이 SNS에 퍼지면서 수많은 20대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폐업 직전까지 101개의 매장을 오픈했다.
- 그처럼 과도한 수익을 추구하는 동안 기업은 썩어 가고 있었다. 매출은 나고 있지만 드라마 협찬을 할 여건이 부족한데도 무리하게 밀어붙이며 투자하는 등 너무 과도한 마케팅비를 썼기 때문이다. 중소기업현황정보시스템을 보면 2014년 말 스베누의 매출액은 104억 원이지만 영업 손실이 2억 원이었다. 광고비로만 무려 20억 7000만 원을 쓴 결과였다. 건물 임차료, 인건비 등을 빼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출혈 마케팅은 2015년에도 계속되어 광고비로 82억 8700만 원이나 썼다. 이는 위메프(76억 원), 삼성화재(71억 원), 한국P&G(56억 원) 등 대기업 마케팅비보다 많은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비자들로부터 신발에서 물 빠짐(이염 현상)이 심하다는 불만이 쇄도했다. 비 오는 날 스베누를 신으면 양말이 운동화색으로 바뀔 정도였다. 그러나 스베누는 품질 개선보다는 ‘땡처리’로 긴급하게 현금을 늘리는 전략을 택했다. 소비자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황 대표는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전국에 신발 연구 개발(R&D) 센터를 열어 품질을 개선하겠다고 밝혔고, 2014년에 문제가 된 물 빠지는 신발을 리콜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모든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방만한 경영이 드러나면서 일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산 지역 신발제조 공장 50여 곳이 6개월간 대금을 못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밀린 금액이 200억 원에 달했다. 황 대표는 매출이 줄어들자 ‘땡처리 판매’에 나섰다. 1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신발을 시장에 뿌린 것이다. 이 때문에 101곳의 가맹점은 엄청난 피해를 봤다. 결국 2016년 10월 온오프라인 모든 직영 숍을 폐쇄하고 폐업을 선언했다.
- 기업의 기본인 고객과 거래 업체, 가맹점주들과의 상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빚을 내면서까지 자극적인 마케팅을 하며 수익 추구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비싼 해외 운동화보다 가성비가 좋으면서 디자인이 예쁘다는 점까진 좋았지만, 그 이상의 철학과 가치를 만들지 못했다. 고객이 찾으면 찾을수록 그만큼 악성 고객과 민원도 늘어나게 마련이라 그에 대비한 품질과 서비스 개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스베누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의 핵심 파트너이자 자산인 가맹점주들의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고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심지어 스베누 대표는 슈퍼카 수집 등 자신의 부를 늘리는 데 치중한 ‘반쪽짜리 경영자’였다. 그는 사업의 목적과 비전 없이 막연하게 부자가 되겠다고 외쳤다. 현금은 없지만 끊임없이 투자를 받아 마케팅을 하면 잘될 거라며 앞만 보고 가다가 망한 것이다. 수많은 피해자를 낳은 스베누의 안타까운 몰락은 이름뿐인 성공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한때 젊은 CEO에게 향하던 뜨거운 열광이 순식간에 싸늘한 질타로 바뀌었다. 성공한 것보다 더 빠르게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성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성공은 독이다.
- 그들은 얄팍한 꼼수보다는 본질에 집중했고, 보상보다는 과정에 집중했으며, 주변의 시선보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했다. 받을 것을 생각하기 전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고, 하는 일의 의미를 중요시했다.
- “열심히 공부하는 학교 선배에게 ‘나중에 뭐 할 거냐’ 물으니 그 선배는 ‘삼성 가야지’ 하더군요. 멋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창업해도 SKY대 배경이 없으면 좋은 인재를 모을 수 없습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학벌과 무관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으로 2002년 무작정 건너갔습니다.”
- “한국말도 잘 못하는 낯선 나라 사람이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면 잘 되겠습니까.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루 3시간 자면서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했습니다.”
- 헬스케어를 스마트폰과 결합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눔을 떠올렸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운동량을 체크하고, 식습관을 통제하는 최초의 서비스 눔은 다이어트에 실패한 수많은 사람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2008년 11월 출시한 이후 2013년 누적 다운로드 1680만 건을 기록했다. 월 10달러(1만 1000원)를 내는 유료 모델도 안착했다. 지난 10년간의 창업도 꽤 성공적인데, 그는 진짜 성공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미국 정부 부처 질병예방본부(CDC)가 2018년 추진할 예정인 당뇨 예방 사업을 따낸 것이다. 미국에서 당뇨병 전 단계인 예비 당뇨 환자는 약 2200만 명. 그런데 2018년부터 정부가 직접 나서 당뇨병 전 단계 환자에게 눔 앱으로 체중을 빼도록 권유할 예정이다. 실제 사람들이 앱을 다운 받아 이용하면 정부가 1인당 630달러(72만 원)를 눔에 관리비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 많은 사업가가 어느 정도 성공의 반열에 오르면 진짜 부자를 꿈꾸게 된다. 자신이 보유한 회사 지분을 대기업에 파는 것이다. 2014년 정 대표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4000만 명 선에서 가입자가 더 늘지 않았고,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사회에서 회사를 매각하자고 했다. 실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글로벌 기업들이 거액의 인수 제의를 해 왔다. 그러나 그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제의를 모두 뿌리쳤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앱으로 대박을 내고 대기업에 수천 억 원에 팔아 단기간에 부자가 된 창업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매각한 회사가 대기업 품에서 망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습니다. 그건 싫었습니다. 또 회사를 안 팔고 가만히 월 10달러(1만 1000원)를 사용자에게 받으면 그런대로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비즈니스 없이 그대로 안주하면 그저 그런 ‘중소기업’으로 끝납니다. 그것도 싫고 두려웠습니다. 매출 100억 원짜리 회사 만들고 끝낼 거면 시작도 안 했습니다. 헬스케어에서 세계 최대 사용자 데이터베이스를 가졌는데 왜 팝니까.” 그의 목표는 매출 1000억 원 회사를 만들고 상장하는 것이다.
-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다이어트 앱’을 당뇨병 분야로 확장하면서 회사를 더 키우기로 했다. 당뇨병을 넘어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들까지 눔을 사용하는 꿈을 꾼다. 헬스케어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다. 그냥 3~4년 단기간에 대박을 쳐 회사를 팔고 수백 억 원대의 부자가 되어 돈방석에 앉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 사실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안 올 때도 많아요. 그러나 창업은 인생의 ‘안전지대’를 계속 넘어서는 희열 넘치는 도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관성을 깨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다르게 하는 것은 쉽지만 더 좋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 조니 아이브, 애플 최고 디자인 책임자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 직원 100명은 필요 없다. - 래리 엘리슨, 오러클 창업자 살아남는 방법은 잘 만드는 것이지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 세계 최초로 개발된 시각 장애인용 스마트 워치인 ‘닷 워치’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연결되는 이 시계는 스마트폰의 SNS 메시지·이메일·문자·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드리릭’ 움직이는 점자로 구현해 준다. 그 위에 손가락을 대서 각종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2016년 12월, 제품이 출시되기도 전에 이미 11개국에서 12만 대가량(350억 원어치)의 선주문이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순이익만 100억 원에 달한다. 출시 예정일인 2017년 말까지 선주문 물량 규모는 20만 대(약 500억 원어치)에 이를 전망이다.
- “전 세계 시각 장애인이 2억 8500만 명 정도 됩니다. 이 가운데 4000만 명은 아예 안 보이고, 8000만 명은 시력을 잃어 가는 중이죠. 그분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제품을 만든 겁니다.”
- “장애인들이 IT 기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를 적은 수요에서 찾는 사람이 많은데 전 반대로 생각했어요. 비율이 아닌 인원으로 보면 시장이 무척 넓더라고요. 모두 제가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입니다.”
- 시각 장애인 가수 스티비 원더, ‘천상의 목소리’ 안드레아 보첼리가 어디서 구했는지 이 시계를 찼다. 특히 보첼리는 이 시계를 차고 독일 통신사 도이체 텔레콤 광고를 찍었다. 광고는 유럽 전역에 방영됐다. “제가 한 번도 부탁드려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시계를 차고 나오셨더라고요.”
- 구글에 16억 5000만 달러(당시 2조 원)에 팔린 유튜브는 2006년 당시 약 20평(66제곱미터)의 공간에 직원 65명이 옹기종기 모여 일하던 회사였다.
- 구글이 먼저 ‘정말 뛰어난 기술’이라며 닷에 협업하자는 제의를 했다. 실제로 점자로 더 많은 콘텐츠를 구현하는 ‘닷 패드’를 만들기 위해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세계적인 차량 공유 업체인 우버도 ‘택시 호출 서비스에 닷 워치 기능을 넣자’고 제안을 해 와 협의 중이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 중 한 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 “3개월 학비가 1000만 원이었어요. 빨리 성공하고 싶었죠. 그런데 이런 조급함이 실패를 부르더라고요. 웹사이트는 자본금이 거의 들지 않는 창업 아이템이라 성급하게 뛰어든 것이죠.”
- 눈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한 청년이 목에 팔뚝만 한 점자 단말기를 매고 있었다. 가로 40~50센티미터에 무게가 2~3킬로그램에 달하는 철제 단말기였다. 시각 장애인들은 인터넷 검색이나 문서 작성을 할 때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한다. 컴퓨터의 문자를 점자와 음성으로 변환해 주는 기계다. 순간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손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폰을 쓰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은 왜 저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순 섞인 감정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 후 한 영국 기자가 쓴 《포브스》 기사를 접했다. ‘시각 장애인은 왜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할까’란 제목의 그 기사에 따르면 ‘장애인 시장이 작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국엔 시각 장애인이 50만 명밖에 없어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전 세계로 시각을 넓혔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 보니 시각 장애인이 2억 8500만 명이 있고, 8000만 명은 급속도록 시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겁니다. 커다란 철제 점자 단말기는 대당 400만~500만 원에 달해 가격이 비싼 반면 쓰기가 불편해서, 전체 시각 장애인의 10%만 쓰고 있더라고요.”
- 닷 워치는 없던 기술로 태어난 게 아니다. 자석에 코일을 감는 기술을 써서 점자 핀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오디오 업계에서 흔히 쓰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일반인들이 삼성이나 애플의 스마트 워치에 열광할 때 시각 장애인들은 소외돼 있었다. 시각 장애인들은 인터넷 검색이나 문서 작성 등을 할 때 ‘점자 정보 단말기’를 이용한다. 김 대표는 이처럼 일반인들은 모르는 ‘관심 밖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닷 워치에는 대부분의 단말기 기능이 탑재돼 있다. 그러면서 가격은 약 30만 원. 보통의 점자 정보 단말기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 크기 또한 20분의 1로 작아졌다. “미국에선 돈만 보고 창업했어요. 하지만 진정한 창업가라면 허무맹랑하더라도 세상을 바꾼다는 뜻을 품어야 해요. 기본적으로 ‘나는 큰일을 한다’는 생각 말예요. 그리고 절대 꺾이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자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콘트래리언(contrarian)
- 콘트래리언은 남들의 보편적인 의지와 반대로 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강렬한 반대의 힘’을 탑재한 인물이다. 남들이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할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시장의 정반대를 내다보는 정신을 갖고 있다.
- 젊은 20대에 사업을 시작해 세상을 바꾼 그들의 비즈니스 접근법에 세상은 열광했다.
- 닷 워치를 만든 김주윤 대표의 아이디어 역시 업종은 달라도 시네걸, 헤이스팅스와 비슷한 점이 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거나 안 될 거라고 내다본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작아서 안돼’라며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과 애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시각 장애인 IT 기기 시장을 새롭게 해석해 세계적인 대박을 만들지 않았는가. 사실 우리는 선진국의 젊은 부자 이야기에 열광한다. 부자의 꿈을 이룬 시점이 젊을수록 더 그러하다. 열여덟 살에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저커버그, 스무 살에 시카고대를 중퇴하고 IT 기업 오러클을 창업한 래리 엘리슨, 학교를 중퇴하고 청소부에서 세계 1등 부호가 된 패션 브랜드 자라의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 등은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대화 단골 주제다. 문제는 ‘젊은 부자 사업가는 선진국에서나 존재 가능하다’라며 우리나라에선 전혀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1. 평범하다 그들은 모두 평범하다. 부모의 지원을 발판으로 부를 이룬 사람이 없다. 2. 주변에서 시작한다 돈을 부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주변에서 찾았다. 3. 남다른 판단 기준이 있다 남들이 YES 할 때 그들은 NO라고 말한다. 세상의 유행이나 흐름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가장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한다. 4.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A=C, 또는 A=D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편견의 눈으로 보면 틀린 생각이지만 본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남과 다른 생각이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 5. 실패를 기회로 만든다 실패에서 성공의 씨앗을 찾았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역전의 기회는 온다.
- 6. 학력과 전공, 전통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과감히 학력과 전공, 집안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배경이 아니라 실력이 성공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간판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간판을 평가하지 않는다. 7. 사양 아이템에서 오히려 기회를 찾는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사양 아이템에서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찾는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할 수만 있다면 사양 산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8. ‘덕질’을 사업과 연결시킨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취미, ‘덕질’이 돈이 됐다.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사업의 기회를 발견하기가 쉽고, 좋아하는 일이기에 웬만한 시련에도 버틸 수 있다. 9. 주변 사람을 먼저 챙긴다 자기를 낮추고 주변 사람을 띄워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그들이 성장해야 내가 성장하고 그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고 있다. 10. 돈을 제대로 쓴다 부를 탕진하지 않으며 사회 환원에 적극적이다. 자신의 부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사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기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 ‘학교 수업을 통해 돈을 버는 영감을 얻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불편함에 착안했고, 틈새시장을 열어젖혔다. 젊은 부자들은 열려 있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움직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1980~1990년대에 태어났다. 아무리 못해도 386, 486 펜티엄 컴퓨터로 오락을 시작했고, 하이텔과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 통신으로 세상 넓은 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루에 아무리 못해도 몇 시간씩은 사이버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없던 새로운 온라인, 모바일 생태계에서의 여유 시간과 수많은 정보와 사람의 연결 속에서 젊은 부자들은 ‘A=D가 될 수 있다’는 역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뉴욕대의 소셜미디어 권위자인 클레이 셔키 교수는 이를 ‘잉여 시간(cognitive surplus)’이라고 부른다. 디지털 공간과 기기의 보급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다른 재능에 연결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들이 더 늘어나 궁극적으로 ‘1조 시간’의 사회적 자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2013년 뉴욕대에서 셔키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온라인의 등장으로 더 많은 젊은 혁신가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은 상상하지 못한 부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모두가 쓰레기라고 여기는 아이디어도 새로운 디지털 세상에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젊은 부자들은 고리타분한 관행을 따르지 않는다. 윗세대와 선배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 대학 선배들의 진로는 천편일률적이었다. 전공과는 전혀 다르지만 막막한 취업 현실 속에 영업, 기획, 경영 직군에 스스로를 던지는 사람이 많았다. 젊은 부자들이 가진 ‘내 윗세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곧 새로운 부의 창출로 이어졌다.
- 2010년만 해도 수험생들은 토익 고득점을 얻기 위해 한 달에 70만~100만 원씩을 쏟아부었다. 이때 에스티유니타스는 한 달 수강료가 채 안 되는 돈으로 1년간 무제한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프리패스’ 서비스를 도입해 대박을 쳤다. 연 27만 원을 내면 스타 강사들이 진행하는 영어 회화와 문법 강좌를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출석률이 높고 목표 점수를 달성하면 수강료를 전액 환급해 주기까지 했다.
- 2010년 첫해 매출은 20억 원. 이후 매출은 2015년 1250억 원, 2016년 4000억 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192개국에 진출한 숙박 공유 업체 에어비앤비는 2008년 시작해 2014년 매출 4800억 원(4억 2300만 달러)을 냈다. 1억 5600만 명이 쓰는 메신저 스냅챗도 창업 6년 차인 2016년 매출이 4500억 원(4억 달러)이었다.
- 서울대 공대를 수석 졸업(학점 4.3만점에 4.26)하고 건설 회사에서 인턴을 했는데 진로를 바꿔야 했다.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셔요. 건설 회사 인턴을 했는데 그곳 직원들이 ‘술도 못 먹으니 건설 회사는 절대 오지 마라. 차라리 사법 고시를 보라’고 하더군요. 진로를 다시 알아보는 차원에서 컨설팅 사에 갔습니다.”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에 잠깐 몸담았다가 교육 업체 이투스에서 병역 특례로 군 복무를 했다. 그때 교육업의 매력에 눈을 떴다. 무엇보다 당시 그 자신처럼 ‘맨주먹’인 사람들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비즈니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벌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교육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맨주먹’인 사람들에게 딱 맞는 비즈니스인 거예요. 제조업을 하려면 공장을 지어야 하고, 포털 사이트를 만들면 처음엔 수익이 안 나잖아요? 그런데 교육은 처음부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죠.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은 짧다. 훗날 죽을 때 뭐라고 말하면서 죽을 것인가.’ 몇 십억 원 벌었다고 해서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교육으로 4억 명, 5억 명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며 죽고 싶었습니다.”
- 처음 6개월은 고민만 했다. 후발 주자이기 때문에 메이저 교육 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들이 주지 못하는 것을 수강생들에게 줘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대표 상품 ‘프리패스’다. “대형 영어 학원은 다양한 코스를 가르치는데, 한 수업당 10만 원 이상입니다. 수강생 한 사람의 책값과 수험료를 합치면 한 달에 100만 원씩 쓰더군요. 보통 6개월 정도 학원 다니면 600만 원을 지출하는 겁니다. 그래서 ‘1%가 누리는 걸 99%가 누리게 하자’는 모토 아래 온라인 전용 강좌인 프리패스를 고안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고, 사무실에 인터넷 강의 촬영 시설도 구비했죠.”
- 후발 주자에게 저가 전략은 위험 부담이 매우 큰 길이다.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수익을 절대 낼 수 없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망할 것 같다’고 불안해하는 공동 창업자들을 ‘수익보다는 업계를 조금이라도 바꾸는 시도가 먼저’라고 설득했다.
- 영어를 인터넷으로 가르치는 ‘영단기’ 사이트를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둔 일은 좋은 강사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 일부 강사들은 원래 학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우리 쪽에서 인터넷 강의만 할 수 있도록 계약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강사가 부업을 하는 셈인데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학원 측을 설득한 겁니다. 무작정 학원 강의실 앞에서 강사들을 기다렸어요. 대부분 다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취지에 공감한 강사들이 연봉을 절반씩 낮추고 합류했습니다. 대신 수강생이 늘어날수록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 2010년 7월 ‘영단기’를 출범했다. 1년에 27만 원만 내면 수십 명에 이르는 영어 강사의 듣기·독해·회화·비즈니스 영어 수업을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프리패스를 업계 최초로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파격적인 가격이었지만 사람이 모일 것 같지 않아 강의 절반을 무료로 풀었다. 인터넷 강의 출석률이 높으면 일정 기간 이후에 환급을 해 주겠다고도 했다. 첫 달 100여 명이 몰리더니 순식간에 1000명이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무료 강의만 골라 듣던 수험생들의 90% 이상이 1년 뒤 유료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 “굳이 학생에게 적은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10분의 1 가격으로 수강료를 받으면 매출이 10분의 1로 줄어듭니다. 강의실 공간은 150석밖에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위험에 도전하기보다 현상 유지만 해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그가 교육 업계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 놓을 수 있던 이유는 얼마나 벌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무엇을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던 혁신적인 상품을 만들 수 있었고, 수강생들이 이에 응답한 것이다. 대체로 젊은 부자들은 받을 돈보다 줄 수 있는 혜택과 서비스의 질을 우선시한다. 그 덕분에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 업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업의 본질을 빠르게 파악하고 시장의 판도를 흔든다. 한국의 교육열과 IT 인프라는 세계 최고지만 한국의 교육 기업들은 내수 시장만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기존 메이저 업체들의 현실 안주가 오히려 에스티유니타스 같은 후발 업체에게 엄청난 기회를 안겨 준 꼴이 되었다. “많은 학생이 ‘이 회사 안 망했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내와요. 그중에서도 지적 장애를 가진 부모님 밑에서 어렵게 자라는 3남매가 프리패스로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메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지금까지는 돈이 없어도 공부하게 해 주자는 게 목표였으나, 이게 진짜 ‘꿈’을 이루어 주고 있느냐 하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시작한 것이다. “단지 시험을 잘 보는 게 아니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는 직업이 네댓 번 바뀌거든요. 학생들이 ‘창직(創職)’을 할 수 있도록 더 저렴한 직업 교육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 나와도 취업이 어렵지 않습니까. 직업 교육만 전문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할 작정입니다.” 그는 2017년 2월 말 벤처 업계에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 입시 교육의 자존심’이라는 교육 기업 프린스턴 리뷰(Princeton Review)를 인수한 것이다. 1981년 설립된 교육 업체 프린스턴 리뷰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전 세계 150만 명 학생에게 온오프라인으로 GRE·SAT·GMT 시험 강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원은 1000여 명. 전 세계 20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소속 강사만 6000여 명에 이르는 미국 1위 교육 기업이다. 그러므로 에스티유니타스의 프린스턴 리뷰 인수는 미국 한인들이 ‘일본 소니가 미국 영화의 자존심인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한 것과 맞먹는 사건’이라고 미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만큼 충격적인 뉴스였다.
- “사실 프린스턴 리뷰 인수는 10년 전부터 꾼 꿈입니다. 물론 그 당시 주위 사람들이 ‘너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말처럼 꿈이 이루어진 거예요. 3년 전부터 끊임없이 연락했는데 거절당했어요. 변방에 있는 이름 모를 업체니까 ‘너희들 누구냐’는 식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다 보니 최근 급물살을 탔습니다. 사실 프린스턴 리뷰를 인수하려는 경쟁사가 많았는데 우리가 낙점을 받았습니다.”
- “한 가지입니다. 단지 돈을 벌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창업하지 마세요. 정말 바꾸고 싶은 현실, 그 ‘분노의 지점’을 찾아 바꾸려는 노력을 할 때 돈이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창업하지 않았는데 돈과 비즈니스가 따라왔습니다. 제가 진입한 분야는 모두 레드오션이었고, 주위에서 모두가 망할 것이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말이 틀렸습니다.”
-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원칙일 것이다. 그런데 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진짜 중요한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 아닐까.
- 불편한 환경에서 자라난 혁신가들은 ‘불편함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상상의 그릇이 커지게 되고, 담는 음식의 크기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공유 차량 업체 우버, 숙박 공유 업체 에어비앤비를 보라. ‘왜 꼭 택시를 타야 하나’, ‘왜 꼭 호텔에서 자야만 하나’라는 근본적인 역발상적 물음이 시초가 돼 글로벌 대박을 만들지 않았는가. 불편한 환경이 역발상을 하게 만든다. 상식 밖의 질문들을 마구 던지게 되는 것이다. 상상할 필요가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쏠림 현상은 뼈아픈 문제다. 친구가 공무원 하면 나도 공무원 하고, 대기업에 지원하면 나도 지원한다. 자기소개서 내용도 다 비슷하다. 네이버 JOB&에 있으면서 보게 된 수많은 취준생의 자기소개서는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이었다.
- 그저 ‘합격 자소서’를 참고해 그 형식에 맞추고 없던 개성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남의 것을 따라만 하는 이유는 더 넓은 세상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불편함을 느끼며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엽적일지 몰라도, 집 근처에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한국의 환경은 일상에서 역발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 생각한다.
- 그들은 근본적으로 남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1%의 무관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던 것이다.
- 소재다. 이것은 단순히 남들이 YES 할 때 무조건 NO만 외치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생각을 바꿔 새로운 생각을 내놓는, 모순을 읽는 작업이다. 역발상 연구의 권위자인 동국대 여준상 교수에 따르면 역발상은 A=B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A=D가 될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말한다. 모순은 두 사실이 배척돼 절대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 진리가 있다. ‘찬란한 슬픔’, ‘소리 없는 아우성’,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산다’는 명언은 모순적 표현으로 진리를 전달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모순이란 인간의 본능, 즉 속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 캘리포니아의 지역 패스트푸드점인 인앤아웃 버거를 살펴보자. 300개가 넘는 매장을 가진 인앤아웃은 맥도날드 연간 매출의 1%밖에 안 되지만, 순이익률은 2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에는 5억 7500만 달러(6500억 원)의 매출을 냈다. 그 비결은 ‘패스트푸드점’의 관행을 깨 버린 데 있었다. 첫째, 1948년 설립 당시 세계 최초로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매장에서가 아니라 차를 탄 채로 주문하고 포장해 가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당시 패스트푸드점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었다. 둘째는 ‘미친 단순함’이다. 메뉴는 햄버거, 치즈 버거, 더블더블 버거, 감자튀김, 음료수 등 다섯 가지에 불과하다. 보통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 깨알 같은 글씨로 엄청나게 많은 메뉴가 카운터 위에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앤아웃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덜어 주면서 핵심 제품의 품질에만 집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장에 냉장고가 없다. 당일 공급 받은 신선한 재료만으로 음식을 만드는 원칙 때문이다. 단순한 메뉴 구성으로 재고 관리가 쉽기 때문에 이런 전략이 가능한 것이다. 역발상을 주 무기로 삼는 젊은 부자들은 오히려 위기에 솟아오른다.
- 미국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한 길만 파고들며 상식의 전환 없이 달려간 AIG, 리먼 브러더스 같은 기업들은 무너졌다. 그러나 상식을 뒤집어 모순을 찾아 진리를 추종한 사업가들은 위대해졌다.
- 헤지펀드 매니저 존 폴슨은 모든 사람이 주택 가격 상승에 베팅하는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혼자 주택 가격 하락에 베팅했다. 그 결과 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사상 최대의 대박을 터트렸다. 그는 주택 가격이 떨어졌을 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인 신용 부도 스와프(CDS)라는 신종 파생 금융 상품을 이용했다. 이 한 방으로 2007년 한 해 폴슨앤드컴퍼니는 150억 달러(17조 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고, 폴슨은 이 가운데 40억 달러(4조 5000억 원)를 챙겼다. 업계에서 무명에 가깝던 그가 한순간에 전설이 된 것이다. 폴슨은 이렇게 말했다. “제 인생의 신조는 남들과 반대로 가는 콘트래리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택 가격은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의 주택 시장 움직임을 그래프로 분석해 본 결과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해졌습니다. 주택 시장의 정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품이 곧 꺼질 거란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주주의 압박을 받는다. 주주들은 분기마다 폭발적인 성장을 원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CEO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분기마다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잘 팔릴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연구 개발(R&D) 조직을 갖췄다 하더라도 혁신의 질이 낮아지게 된다. 상식을 뒤집는 파괴적인 혁신보다는 기존의 제품을 수정하고 조금 더 개선하는 점진적 혁신밖에 하지 못한다. 결국 상식 너머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고 기존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다.
- 문제는 기업마다 아이디어가 비슷하니 가격 출혈 경쟁을 벌이다 동반 몰락한다는 데 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랄프로렌, 코치, 마이클코어스, 타미힐피거 등은 한때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명품 브랜드였는데 지금은 사시사철 할인 판매되고 아울렛에서나 팔리는 중저가 브랜드로 전락했다. 싸게 팔면 박리다매 전략이라도 통해야 할 텐데, 최근 수년간 이들의 브랜드 매출은 10~20%씩 줄어드는 상황이다.
- 이 기업들은 1990년대 말~2000년대 들어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수익 증대’라는 주주 압박에 시달렸다. 판도를 바꾸는 제품 혁신보다 막연한 비용 절감이 중요해지면서 매스티지(masstige, 명품의 대중화)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같은 가방을 갖게 되고,누구도 탐내는 물건이 아닌 ‘흔한 물건’으로 전락해 버렸다.
-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늘 틈새는 존재한다.
- 원래 기계를 만들고 정비하는 제조업자였다가 식당으로 크게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다. 바비큐를 파는 고깃집 ‘철든놈(Iron Nom)’을 창업해 중국 난징, 일본 신주쿠, 미국 애틀랜타, 호주 시드니에도 진출했다. 2014년 80억 원 매출을 기록했고 2016년에는 100억 원을 돌파했다. 순이익률은 20%가 넘는다. 300g에 9800원짜리 삼겹살로 해외까지 진출한 보기 드문 사례다.
- 철든놈은 시중에서 파는 불판을 이용해 고기를 굽는 여느 식당과는 다르다. 직접 미니 사이즈의 구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고기를 구우면 당연히 연기가 나게 마련이지만 그가 만든 구이기에서는 연기가 안 난다. 숯이 고기 아래쪽이 아니라 옆에 놓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옆에서 불로 구우면 고깃기름이 불에 떨어지지 않아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 저마다 바비큐라고 식당 이름을 짓지만, 그저 생고기를 굽는 것도 바비큐라고 이름 짓는 요식업자가 많았다. 그러나 바비큐의 본질적인 뜻 자체는 ‘은은한 불로 오랜 시간 훈증하면서 익힌 것을 구워 먹는 것’이다. 박 대표는 4시간 동안 훈연한 훈제 고기를 내온다.
-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찾아봤다.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고깃집이었다. 연기가 몸에 배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런데 그게 기회였어요. ‘연기가 나지 않는 바비큐 고기를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연기가 몸에 배는 것이 싫은 사람도 먹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 자신의 기계 장비 기술을 발휘해 연기가 나지 않는 구이기 개발에 힘썼다. 창고 공간에 마련해 둔 간이침대에서 먹고 자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개발에 몰두했다. 1년 동안 시행착오를 네 번 거친 끝에 개발에 성공해 특허도 냈다. 사람들 입맛에 딱 맞는 훈연된 고기 레시피도 만들었다. “동네에선 저를 바보라고 불렀죠. 왜 역세권이 아닌 철공단지에서 창업을 했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이 모여들지 않는 곳에서 성공하고 싶었어요. 이게 되면 역세권에선 당연히 성공하거든요.”
- 생각을 호떡처럼 뒤집는 시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약간의 발상 전환만으로도 대중의 환호를 받을 수 있다. 이쯤 되면 확실해지는 게 하나 있다. 역발상은 그저 남들이 만든 틀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오히려 근본적으로 성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접근 방식이다. 박경준 대표는 특정 사안을 쫓아가는 쏠림 현상을 거부했다. 도리어 사안의 과거 맥락과 패턴, 의사 결정의 큰 그림을 보는 것을 자신만의 원칙으로 세웠다. 결국 본질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지혜를 연결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데 있다.
- 기술 개발, 영업, 제품 마케팅, 조직 경영, 전략…….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면 차별화 포인트가 없는 회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술 개발에 적당히 투자해 그럴듯한 시제품을 만들고, 평범한 마케팅과 ‘눈요기’ 수준의 홍보 전략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많다. 문제는 ‘와우 요소(wow factor)’가 없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와우 요소란 말이 자주 쓰인다. 고객들의 예상과 예측을 뛰어넘어 뛰어난 제품과 서비스 경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 회사가 주로 집중하는 일이 바로 와우 요소다. 단번에 ‘와우~’라는 말을 나오게 하는 마법의 원천을 말하는데 내가 가장 잘하는 요소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는 것이다. 기술 개발이든 영업이든 마케팅이든 물류든 뭐든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력한 ‘와우 요소’를 만드는 것이다.
- 미팩토리는 요즘 온라인상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기업이다. 화장품 등 뷰티 제품을 파는데 대표 제품이 코팩인 ‘3단 돼지코팩’이다. 코에 붙였다 떼면 피지가 빠지는 팩으로 포털 사이트에 ‘돼지코팩’이라고 치면 관련 제품 사용 후기가 무수히 나온다. 이 제품은 1000만 장 팔리면서 올리브영 판매 1위를 달성했다. 5장에 1만 2000원. 마스크팩 하나가 1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꽤 고가지만 그럼에도 돌풍을 일으켰다. 2014년 말 창업, 2015년 매출 80억 원을 달성한 데 이어 2016년엔 120억 원의 매출을 냈다. 직원 30여 명으로 창업 2년 만에 낸 성과다. 영업 이익률은 20% 내외. 이제 갓 창업한 회사인데 인기는 대기업 저리 가라다. 2016년 13명을 뽑는 공채에 1500명이 몰렸다. 경쟁률 127 대 1. 웬만한 대기업, 중견 기업에서도 볼 수 없는 ‘핫한’ 인기가 아닐 수 없다.
- 미팩토리는 화장품 회사가 아니다. 직원 34명 중 20명이 마케팅 직원이다. 나머지 연구 개발, 생산 등은 모두 외주를 준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만 집중한다. 전문 제조 업체와 계약을 맺고 마케팅을 하는데 매출의 25~40%를 제조 업체에 준다. 미팩토리가 돈을 번 전략은 ‘SNS, 한 놈만 팬다’는 것이다.
- “돼지코팩은 새로운 제품이 아닙니다. 이미 시중에 나와 있어요. 대기업에서도 팔고 있고요. 우린 좋은 제품을 개발해 대박 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소비자가 제품을 몰랐다는 거예요. 우연히 아이템을 발견하고 한 제조 업체를 찾아가 공동 마케팅을 제안했어요. 이름을 ‘돼지코팩’이라 짓고, 제품 캐릭터와 디자인을 만들어 특허까지 냈죠. 그리고 SNS 마케팅을 시작했어요. TV 대신 페이스북에 광고를 한 거죠. SNS 이용자가 급증하는 현상을 반영했습니다.” 이곳의 화장품 SNS 마케팅은 독특하다. 첫째는 직관적인 욕망을 마구 건드리는 것이다. 사용 전과 후 모습(before and after)을 보여 주는 게 대표적이다. “요즘 긴 영상은 안 봅니다. 대신 자극적이어야 하죠. 코팩 영상이 딱 맞습니다. 코팩을 붙였다가 떼면 피지가 우수수 빠져 나옵니다. 누구나 호기심을 갖게 마련이죠.” 광고 효과는 대박을 쳤다. 포털 사이트에 ‘코팩’ 키워드 검색량이 한 달 5만 건에서 광고 후 10만 건으로 늘었고, 돼지코팩은 키워드 검색량이 3000~4000건에서 13만 건으로 급증했다. “SNS 한 달 광고비로 1억 원을 써서 돼지코팩으로만 매출 10억~15억 원을 냅니다. 광고비가 매출의 10% 정도니까 광고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닙니다.”
- 신의 한 수는 ‘신조어’다. 미팩토리는 ‘오르가즘’이라는 말에 착안해 ‘피르가즘’을 SNS에 히트시켰다. 코피에서 피지가 떨어져 나갈 때 느끼는 쾌감을 ‘피르가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은 소비자와 유명 크리에이터의 사용 리뷰를 이용한 ‘광고 같지 않은 광고’ 전략이다. 평범한 직장인 등 일반인의 사용 후기를 받아 올렸고,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크리에이터들을 적극 활용했다. “우리 회사 마케팅 담당자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입니다. 매일 소비자 행동 패턴을 분석해 ‘이 콘텐츠에는 왜 반응하지 않았는가’ 등의 과제를 해결하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 ‘광고 느낌이 들지 않게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 “솔직히 화장품은 명품 회사에서 만든 것이든 중소기업에서 만든 것이든 재료 성분이나 퀄리티가 다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화장품 개발에서 승부를 보면 안 됩니다. 가장 잘 팔릴 것부터 손을 대야죠.”
- 공동 창업자들은 선크림, 로션, 에센스 등 열 종류의 화장품을 모아 놓고 테스트를 했다. 어떤 제품이 사용 전후를 가장 잘 보여 주는지 따져 본 것이다. 로션은 손등에 바르면 사라지고, 선크림은 얼굴만 하얗게 될 뿐 실제 햇빛을 가리는 효과를 시각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코팩은 달랐다. 붙였다가 뗀 코팩에 묻은 코 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
- SNS 하나에만 집중해 사업하자는 ‘인사이트’를 얻은 것은 실패에서였다. 한국외대를 다니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그는 일찍 창업을 꿈꿨다. 2011년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돼 지인으로부터 아이템을 소개 받았다. 운동 전후에 몸에 바르면 근육이 이완되는 스포츠 크림이었다. 주로 골프 같은 운동을 하고 쓰는 화장품. 제품을 만드는 미국 회사를 찾아갔고, 한국에 판매 법인을 만들자고 설득했다. 월급으로 20만~30만 원만 받는 대신 회사 성장에 따라 지분율을 계단식으로 높여 달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게 ‘플렉스파워 코리아’다. 그는 차에 스포츠 크림을 싣고 전국을 누비며 각종 미용 박람회와 스포츠 박람회를 찾아다녔다. 부스에 찾아오는 아저씨들 어깨에 크림을 발라 주며 적극적으로 홍보했지만 그래도 잘 안 됐다. 주문이 들어오면 일일이 편의점 택배로 보내 주며 장사했지만 생각만큼 매출이 늘진 않았다. 그렇게 3년 했는데 연 매출은 겨우 5억 원. 순이익은 미미했다. 부모는 사업을 접으라고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고, 지분율을 30%까지 높여 첫 회사를 매각했다. 회사를 팔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패인은 두 가지였다. 이제 20대 후반인 청년이 스포츠 크림을 주요 타깃층인 40~50대에게 팔려는 것이 문제였고, 더군다나 대중에 대한 강력한 마케팅 없이 그저 박람회만 뛰어다닌 게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마케팅이 부실하면 소비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깨달았죠. 지금 일을 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제가 매각한 회사는 매출 50억 원으로 성장했어요. 중년의 대표가 맡으면서 마케팅을 하기가 훨씬 쉬웠던 거죠. 전 제 나이에 맞는 창업을 해야 했어요.”
- “마케팅의 데이터화, 그리고 정교화도 기술입니다. 제품은 누구나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제품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바일, SNS를 통한 마케팅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합니다. SNS로 마케팅 비용을 낮추면 불필요한 유통 비용을 줄여 제품 가격을 낮출 수도 있고요.”
- 한 가지에 확실하게 집중하는 것이 돈을 빨리 끌어모으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집중할 ‘한 놈’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무엇에 집중할 것이냐, 이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버는 원동력은 핵심 역량에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영 사상가인 게리 하멜은 이처럼 한 놈만 파는 핵심 역량의 조건에 대해 첫째, 다양한 제품에 응용돼야 하고, 둘째 최종 제품이 고객에게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경쟁자들이 모방하기 어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경험은 많이 하고 있지만 그 어디서도 나의 장점을 찾지 못하고 그냥 스펙 쌓기에 급급하다
-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연결 고리를 찾고, 내가 실제 뭘 얻었는지, 내 능력을 어떻게 쌓을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력서부터 이렇게 경험만 나열하다 보니 에세이 형식으로 쓰는 자기소개서는 터무니없을 수밖에 없다. 그저 이력서에 나온 내용에 양을 늘려 붙이는 수준에 불과하다.
- 무조건 정해진 양식에 따라 이력서를 채우라고 하거나 ‘지원 동기는?’, ‘위기 극복 과정은?’ 같은 천편일률적인 항목의 자기소개서를 당연하듯 써 온 문제도 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유년 시절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았는지, 토론식 교육을 받았는지 등의 문제도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의 개성, 나의 ‘한 방’은 사라져 간다. 흔해 빠진 것이라도 한 놈만 오랫동안 패면 그것엔 부가 가치가 만들어지는데 말이다.
- 학점 4.3만점에 4.28, 2014년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 삼성 SDS와 맥킨지의 입사 권유를 뿌리치고 창업
- 서 대표는 P2P 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어니스트펀드의 창업자이자 대표다. P2P 대출은 인터넷과 모바일 플랫폼으로 개인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서 대출을 원하는 다른 개인에게 돈을 빌려 주는 방식의 대출 서비스다. 빌리는 사람은 금융권 대출 이자보다 싸게, 투자자는 예금 금리보다 높게 돈거래를 하는 게 목적이다. 창업 1년 6개월 만에 거래 건수 14만 2000건, 대출액 100억 원을 돌파했다. 성장성을 인정받아 신한금융그룹 등으로부터 92억 원을 투자 받았다. 투자 받을 때 회사 가치는 100억 원이 넘었다.
- “가난하다 보니 성공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어요.” 동기들 대부분 고시 준비를 할 때 그는 혼자 경영학만 팠고, 매일 도서관에 가서 기업 케이스를 연구했다. 그렇게 4년간 두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A+를 받았다. A+를 받지 못한 두 과목 성적은 A0. 당연히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경영을 배우기 위해 인턴으로 맥킨지코리아와 삼성 SDS에서 일했다. 두 회사 모두 그에게 입사 지원을 권유하거나 정규직 전환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했다. “창업에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 도달하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믿음만으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 “수많은 직장인이 자격이 되는데도 대부 업체나 저축 은행 같은 곳에서 20%가 넘는 금리로 돈을 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금세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어요. 직장인이면 신용 등급이 7등급이더라도 돈을 갚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어떻게 할까요. 만약 연봉이 3000만 원이라면 여기에 150%를 곱해서 대출 한도를 ‘4500만 원’으로 정해 둡니다. 이걸 넘어서면 대출을 안 해 주죠. 연봉이 1억 원을 넘어도 월세 300만 원짜리 집에 살면 대출 상환 여력이 없을 수 있어요. 반면 연봉이 3000만 원이라도 부모 집에 살면 대출 상환 여력이 클 수 있죠. 은행들은 이런 상환 가능성을 따지지 않아요. 대출 한도란 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채의 크기’인데, 기계적으로만 계산하는 거죠. 이렇게 은행에서 거절당해 연 20%가 넘는 금리로 저축 은행이나 대부 업체 돈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 저희 고객입니다.”
- 그의 대출 금리는 연 3~17% 수준. 보통 4~6등급인 대출자의 신용도에 따라 달라진다. 투자자들은 평균 10.4%정도 수익을 내고 있다.
- “대기업도 공무원도 저에게 자극제가 되지 못해요.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 중요한 것은 나의 자질을 일찍 알아보고, 굳이 한국 사회가 강조하는 명문대와 대기업 간판을 갖지 않아도 살길을 미리 찾을 수 있다
- 그는 2006년 전 세계인의 ‘필수 프로그램’인 유튜브를 구글에 16억 5000만 달러(당시 2조 원)에 팔았다. 유튜브는 지금 세계 최대 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로 인터넷 사용자의 30%인 10억 명이 매일 수억 시간 분량의 동영상을 시청하는 최대 플랫폼이다. 당시만 해도 하루 히트수가 3억 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상위 19개 영상 히트수가 조회수 10억 건을 넘겼다(2016년 1월 기준).
- 이 딜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한국인 유기돈(47) 씨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팀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미식축구 구단)의 구단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포티나이너스의 신축 구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 200억 달러(22조 7100억 원)를 투자자들로부터 유치했는데, 이는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기록됐다. 스타디움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좌석 배달제와 앱으로 경기 실시간 동영상 시청 서비스 등을 도입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 그는 자기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스스로 물어보는 타입이다. 그렇게 늘 내면의 목소리에 100% 귀를 기울이며 그동안의 커리어를 구축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가 다닌 직장은 모두 ‘취미형 직장’이었다. 그에게 ‘하버드대를 나와 왜 글로벌 기업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왜냐하면 전 세상에 두 번 오지 않을 역사의 한 단면을 그려 나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업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길이었습니다. 첫 두 군데에서 실패를 맛본 뒤 한 지인이 ‘무엇에 열정을 느끼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인터넷과 기술이다’라고 답했더니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서비스 기업에 입사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야후였어요. 야후에서 빚도 다 갚았지요(웃음). 유튜브에 입사할 때도 하루 3시간씩 유튜브를 보다가 입사했고, 유튜브를 구글에 매각했을 때쯤 페이스북에 중독된 걸 깨닫고 페이스북에 들어갔습니다.” 맨 처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재무 분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작은 벤처 기업에서부터 야후까지 모두 재무 담당자로 일했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실제 기업을 사고파는 M&A 전문가로 커리어를 확장하고, 페이스북 최고 재무 책임자를 거쳐 미식축구 구단주가 됐다. “어느 날 그 지인이 말하더군요. ‘야, 잠깐만. 넌 미식축구를 사랑하고, 비즈니스를 좋아하고, 기술을 좋아하지. 그런데 포티나이너스는 이 모든 걸 다 하지 않느냐?’라고 말이죠. 처음엔 완전히 미친 생각이었죠. 전 기술 전문가였거든요. 사람이 열정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당신이 취미를 일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열정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따라갔습니다.”
- “유튜브를 구글에 매각했더니 인터넷이 바뀌었고, 페이스북에 자금을 댔더니 세상이 변했습니다.”
- 유튜브 매각 협상이 타결되자 당시 에릭 슈밋 CEO가 그에게 귓속말로 “우리가 유튜브를 더 비싸게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네!” 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저희가 유튜브를 더 싸게 팔 수 있었다는 사실도 회장님이 아셨으면 좋겠는데요!”
- 아버지의 꿈은 제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큰 회사에 가는 것이었죠. 그러나 전 대기업에 가지 않았습니다. 전 세상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역사를 쓰고 있었어요. 창업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엄청 큰 회사에서 손톱만 한 일을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대기업은 연봉도 작아요. 유튜브 매각 때는 서무 직원조차 100만 달러(11억 원) 연봉의 돈방석에 앉았거든요.
- 한국의 수많은 젊은 부자 역시 이런 핸디캡을 안고 살았다. 그만큼 부모 세대와의 간극이 커졌다는 것이고, 세상이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에 맞춰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가장 자극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에 충실한 것이 더 안전한 길일지 모른다. 어쨌든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더 지치지 않을 수 있고,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시작을 못한다. 이유는 수백 가지가 있다. 너무 위험하고, 지금에 만족하고, 용기가 없고, 돈도 충분하지 않고,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오래된 속담은 정말 맞는 말이다. 젊은 부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했을까? 돈도 없고, 경험도 없고, 인맥도 없고, 기술도 없던, 오로지 절실함과 성실함만이 무기이던 젊은 부자들. 그들은 완벽한 준비보다는 빠른 실행을 택했다.
- 바로 스테이크다. 고급 럭셔리 맛집에서나 먹는 스테이크를 길거리에서 파는 것이다. 남들이 푸드트럭으로 떡볶이나 토스트, 햄버거를 팔 때 이들은 최고의 프리미엄 음식 아이템을 길거리로 들고 나온 것이다. 원칙은 미국산 최고 등급(1++) 냉장 소고기를 무조건 3일 내에 구워 파는 것. 이들은 원래 학사 장교(ROTC) 임관 시험을 앞둔 친구들이었다. 한번은 스테이크를 먹으러 맛집에 갔는데 줄이 길었다. 그때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테이크는 호떡처럼 편하게 먹을 수 없을까?’
- 그들은 겁도 없이 덜컥 30%대 금리로 대부 업체에서 돈을 빌린 다음 중고나라에서 280만 원짜리 다코야키 트럭을 샀다. 돈이 없으니까 페인트를 사다 직접 칠하고, 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강 시간마다 작업했다. 친구에게 부탁해 트럭 디자인을 하고 로고를 만들었다. 스테이크 요리법을 모르는 그들은 무작정 당시 tvN의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 출연한 배우 출신 전봉현 셰프에게 메일을 보냈다. 백 씨는 당시 메일 내용을 언급하며 ‘글로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을 썼다. 다행히 전 셰프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했다며, 스케줄이 다 끝난 밤 11시에도 요리 법을 알려 줬다. 덕분에 그들은 무료로 스테이크 굽는 방법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고기는 마장동에서 산 다음 학교 인근 카페 사장님에게 냉장 보관을 부탁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고기를 찾아 집으로 돌아와 스테이크 요리 연습에 열중했다. 그렇게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어렵사리 푸드트럭을 열었는데 소위 대박이 났다.
-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고객들 불만이 커지자 조리 설비를 바꾸어 생산 속도를 높였다. 100명이 줄을 서도 30분 내로 받아 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첫 대출 600만 원은 3주 만에 갚았다. 이자는 15만 원이었다. 지금은 트럭을 한 대 더 늘려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알바생에게 시급을 1만 원씩 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 물론 푸드트럭만으로 10년, 20년 장사를 지속하기는 어렵다. 푸드트럭에서 시작된 브랜드로 매장을 내고 확장해 다양한 사업으로 이어 갈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스테이크를 호떡처럼 팔자’는 상식 밖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열차를 탄다고 해서 반드시 종착지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오른다. 중간에 내려 출발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길이 닦여 있지 않은 숲속으로도 뛰어든다. 깔끔하고 매끈한 포장도로만 고집하기보다 내가 직접 걸어 새 길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무모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 무모한 선택을 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작하는 방법에 정해진 법칙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장에서 만나게 될 젊은 창업가들은 각자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뛰어들었다. 돈이 많든 적든, 준비가 철저하든 부실하든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택한 길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가구·인테리어 회사로 들어가거나 석사 과정을 밟아 아티스트가 되는 길. 아니면 대기업 디자인 부서로 입사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4년 동안 배운 목공예 기술 다 버리고, 삼성·LG에 들어가기 위해 인적성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제 자신이 한심했어요. 우리가 대학교 1학년 때 꿈꾼 건 그런 길이 아니었죠.”
- 핵심 비결은 수종별 최상 등급의 원목을 사용해 무늬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명품 하드웨어(헤펠레 사, 블룸 사 등)를 이용해 친환경 도료로 수제식 암수 짜임 방식으로 만든다. 다른 이음 부품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나무와 나무를 결합시키는 암수 짜임 방식으로 가구를 만들면 견고하고 틈이 생기지 않아 오랫동안 부드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전공 지식을 활용한 것이다.
- 26제곱미터(8평)인 월세 60만 원짜리 반지하 사무실을 얻었다. 사무실 임대료를 마련하기 위해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디자인에 몰두했다.
- 어렵게 에스토니아산 자작나무를 구입해 디자인 샘플을 공장에 맡겼는데 실제 제작된 가구를 보니 너무 형편없었다.
- 대량 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중소기업 공장은 소량 생산을 하면 손해를 보기에 스타트업의 부탁을 껄끄러워한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규모의 경제’에 입각해 많은 물량을 반복적으로 생산해야 이윤이 남는다. 이런 환경에서 운이 따랐다. 유명 가구 회사에서 40년 동안 일한 장인이 ‘선금을 받지 않고 샘플을 만들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덕분에 완벽한 샘플이 탄생했고, 그때부터 카레클린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 다음 내세운 전략은 ‘보여 주는 투명함’이었다. 가구 제작의 전 과정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가구 제작 과정을 사업 기밀로 여기는 가구 업계에선 파격적인 일이었다. 100% 수제로 만드는 원목 가구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또한 위탁 경영 없이 ‘디자이너가 만든 가구를 직접 배달한다’는 방침을 지키고 있다. 2011년부터 3명의 창업자는 10년 넘은 냉동 탑차에 가구를 싣고,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낮에는 가구 디자이너, 밤에는 가구를 배달하는 짐꾼’인 것이다.
- “서로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모였기에 같이 고생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전공을 살려 우리 일을 해 보자는 일념이 평범한 대학생인 저희를 사업가로 만들었고요.”
- “부잣집 아이들은 재능이 있는 인재로 커 갈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러나 진짜 천재는 나쁜 환경에서 자라는 이상한 경향이 있다.”
- 좌절감과 실패는 성공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실패를 맛봐야만 뭘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미처 모르던 나의 재능도 발견할 수 있다.
- 그녀의 아이템은 역발상적이다. 손에 장갑, 발에 버선 모양의 마사지팩을 끼우면 에센스 물질이 보습 효과를 내는 ‘손발팩’이 그것이다.
- 편안한 삶이었지만 꿈이 없었습니다.
- 열심히 뛰는 건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거래처에서 문전 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열심히 뛰어 볼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 “제품을 그냥 쓰라고 하기가 뭐하니까 손에 로션을 발라 드렸죠. 그런데 어르신들 대부분이 손과 발이 차가우신 거예요. 수족 냉증, 수족 번열증을 겪는데 마사지를 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제품을 찾지 못한 것이죠. 머릿속에 어머니가 떠올랐어요. 어머니도 수족 번열증이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어느 순간 발이 뜨거워지고 부어올랐거든요. 결국 관절염 기계 영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겁니다. ”
- 전문대에서 관광학을 공부한 그녀가 팩 만드는 법을 알 리 만무했다. 대신 그녀에게는 오기와 설득력, 끈기가 있었다. 100편이 넘는 각종 전문지와 논문을 뒤져 가며 화장품 팩 공부를 했고, 스타트업 거래처의 병원 의사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온열 기능이 있는 화학 제품을 어디서 수입하고, 보습 성분이 있는 에센스를 어떻게 혼합할지 연구했다. 보고, 묻고, 듣기를 수개월 반복하다 2013년 초 퇴사한 후 곧바로 창업했다.
- ‘실패에서 항상 기회가 온다’
- “홍콩의 제품 박람회에 정식으로 초대 받지 못했어요. 그냥 아는 중소기업 대표에게 부탁해 ‘우리가 부스를 쓰지는 않겠다. 그냥 앞에서 홍보만 하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런데 현장에 갔더니 그 중소기업 실무자들이 아예 공간을 못 쓰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홍콩 거리로 뛰어나왔어요. 한 사람이라도 잡자는 생각에 벤치에 앉아 있는 호주의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옆에 앉아 손에 손발팩을 끼워 주고 2~3시간 몸짓, 발짓으로 대화했죠.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제가 사실 화장품 바이어입니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다. “그분과 따로 미팅을 잡아 사업을 확장시켰어요. 사실 실패의 골목에서는 두 가지가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첫째, ‘A가 아닌 B에 가능성이 있다’는 지혜를 얻습니다. 둘째, 무엇보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노력하다 보면 운이 따를 때가 많습니다.”
- 중졸 학력으로 1993년부터 2005년까지 12년간 일본 사업 소득 고액 세납자 종합 순위 10위 안에 들어간 거부 사이토 히토리. 화장품과 건강 식품 판매 회사인 긴자마루칸 및 일본한방연구소 창업자인 그의 책 《부자의 운》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실력보다 운이 좋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운(運)은 결국 ‘옮겨 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일로 옮겨 가는 기세와 힘을 뜻한다. 그러므로 운이 좋다는 것은 옮겨 가는 기세가 좋다는 것이며, 그건 빈둥거리는 상태가 아니라 일을 척척 해치울 때 생긴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잘하는 사람이란 평판을 얻고, 돈보다 사람을 먼저 만족시키며, 매사에 웃는 얼굴로 애정 어린 말을 하는 것이 운을 부른다.”
- 그가 만든 버즈빌은 스마트폰의 잠금 화면을 이용해 모바일 광고를 하는 회사다. 잠금 화면에 기업들의 광고나 이벤트, 앱 다운로드 서비스를 띄우고 소비자가 광고를 보면 돈과 같은 포인트를 쌓아 준다. 쌓인 포인트는 통신비나 쇼핑비로 이용한다.
- 벤처 기업이 외부 투자를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당장은 돈을 못 벌지만 앞으로 벌 가능성을 제시하고 투자를 받아 그 돈으로 인건비나 개발비를 충당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이런 때는 대개 벤처기업이 먼저 벤처 캐피털 회사를 찾아간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3600억 원의 투자 펀드를 운영하는 국내 대표 벤처 캐피털 사) 대표는 ‘통상 먼저 찾아오는 벤처 기업은 뭔가 사업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와는 다르게 돈은 많지만 해외 진출을 위한 네트워크를 확보하기 위해 투자를 받는 회사들도 있다.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벤처 캐피털은 해외 기업, 투자처에 다양한 인맥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벤처 캐피털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 일부러 투자를 받는 것이다.
- 광고를 600원에 수주하면 150원의 포인트를 지급하고, 나머지 450원의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다.
- 성공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 기업들은 성장 곡선이 ‘J’ 모양이다. 초기에는 J자 모양처럼 아래로 성장선이 내려가면서 적자가 난다. 그러나 모바일이나 온라인 플랫폼에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모이고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매출과 이익 폭이 은행 복리 이자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 번이나 해제합니다. 저희는 바로 그 부분을 노렸습니다. 스마트폰 메인 화면에 들어가 수십 개의 광고 앱에 접속하는 일은 귀찮죠. 그걸 스마트폰 맨 앞으로 끄집어낸 거예요.
-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운영하지만, 여러 통신사와 소셜커머스 업체에도 아에 잠금 화면으로 광고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서비스 모듈을 공급하고 있다. B2C(기업 대 소비자) 비즈니스는 물론 B2B 비즈니스까지 확장했다.
- 그의 첫 발명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루어졌다. 집 현관문 하단의 고정 장치(도어 스토퍼)가 부러진 것을 관찰했다. 왜 매번 고리를 발이나 손으로 걷어 올려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발로 버튼만 눌러 고리가 자동으로 올라가게 할 수 없을까? 그는 집 현관문에 있는 도어 스토퍼를 떼어 내 분해했다. 그리고 스프링을 넣는 방법으로 기어 장치를 개발했다. 버튼만 누르면 저절로 고리가 올라가도록 한 것이다. 중학생의 발명은 국내에서 화제가 됐다. 1996년 특허청 발명 대회에 출품해 대상을 탔을 뿐 아니라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그를 불러 격려한 것이다. 일본 등 해외 바이어들이 ‘기술을 사겠다’고 그를 찾았다. 혼자 재활용 센터를 돌아다니며 버려진 싱크대를 주워 제품을 뜨는 금형틀을 만들었고, 공장에서 2000개를 만들어 단가 2만 원에 철물점에 팔았다.
- 고교 시절, 휴대폰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막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때 문자를 길게 보내면 전송 비용이 건당 200원이나 든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고치려고 했다. 결국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문자를 보낼 때 특수 코드로 문장 길이를 줄여 전송 비용을 8~10원으로 낮출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교수 등을 찾아다니며 얻은 조언으로 동료 개발자들과 만든 것이다. 이 기술은 네이버가 35억 원에 인수했다.
- 소셜커머스는 물건을 파는 업체라면 전부 제휴하는데, 이 대표는 맛집을 다니다 ‘맛이 있는데 왜 안 팔릴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맛집 100여 곳을 반값에 이용하는 서비스를 만들었고, 이 회사는 티몬에 95억 원에 팔았다. 본인은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남들이 막연하게나마 불편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포착하고 그 해결책을 내놓았기에 이런 행운이 가능했던 것이다.
- 잠금 화면 아이디어는 지하철에서 얻었다. 좋은 광고가 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만 걸리는지 의문이 든 것이다. 그 광고를 스마트폰 메인 화면에 가져오면 훨씬 집중도가 높고, 많은 사람이 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사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이미 전 세계에서 15명 이상이 생각하고 있고, 5명 이상이 만들고 있으며, 3명은 출시를 준비합니다. 좋은 관찰력으로 아이템을 개발하고, 그것을 속도감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 방콕에는 가짜 치아 교정기를 파는 가판대가 있다. 최대 소비자는 10대 소녀들로, 그들은 명품 가방엔 관심이 없다. 가짜가 횡행하는 방콕에선 명품 가방보다 치아 교정기가 부를 상징한다. 부모가 자신의 치아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을 파악한 장사꾼들은 관찰력이 대단한 것이다. 칩체이스는 ‘관찰이란 그냥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보고 있는 것을 끝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일상 속에 많은 비즈니스 아이디어가 있다. 단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 얀 칩체이스
- 저서 《관찰의 힘》에서 그는 ‘드러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현상을 꿰뚫어 봐야 한다’고 했다.
- 빨간색 신호는 철도 신호 체계에서 정지를 뜻한다. 그 이유는 전 세계 문화권을 불문하고 빨간색이 위험의 신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이해가 가는데 왜 주의가 주황색일까? 원래 1800년대만 하더라도 산업 혁명이 시작된 유럽에서는 ‘주의’가 초록색, ‘진행’이 하얀색이었다. 그러다 1900년대 초 한 기관사가 정지 신호를 진행 신호로 착각해 마주 오던 기차와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빨간색 신호의 유리판이 깨져 하얀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진행 신호가 하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주황색이 주의 신호가 됐다는 것이다. 초록색은 또 심리적으로 세 가지 색상 중 가장 보기 부담스럽지 않고, 눈을 편안하게 해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효과도 있다. 이런 차이를 면밀히 관찰하는 데서 혁신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 2005년까지 소규모 무역 중개업을 했다. 잘 팔릴 것 같은 이탈리아산 명품 가방과 신발, 인테리어 건축 자재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유통했다. 전체 매출의 10% 정도를 수수료로 받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인생 직업이 될 수 없었다. 점점 해외 인기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 상륙하면서 일감이 줄었기 때문이다.
- 무역 업체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남 성형외과의 해외 마케팅팀에 취업했어요. 중국에 매달 한 번은 출장을 갔습니다. 성형외과 의사, 사업가, 바이어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국인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 평소에는 성형외과 의사들을 만나 한국의 발전한 의료 기술을 소개해 주고, 중국 환자들을 대거 국내에 유치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른 시장이 눈에 보였다. 중국 찜질방과 목욕탕에서 중국인을 관찰하면서부터였다. “출장 갈 때마다 중국 찜질방과 마사지숍을 갔습니다. 2010년 초에도 한국 마스크팩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제가 얻은 느낌은 달랐어요. 중국인들에게는 발 마사지가 핵심 휴식 문화입니다. 마스크팩을 1년에 여섯 번 이상 사는 소비자가 10% 정도이고, 한 번 이상 사는 사람은 45%입니다. 연인끼리 마사지를 받고 나서 얼굴에 붙인 마스크팩에서 떨어지는 에센스를 목과 어깨, 몸 전체에 바릅니다. 찜질방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중국인들은 목욕 가방에 샴푸, 린스, 보디젤과 함께 마스크팩을 꼭 챙깁니다. 그러나 특징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마스크팩에서 온몸으로 뚝뚝 떨어지는 에센스에 열광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마스크팩은 그렇게 만들지 않았어요. 얼굴에 붙이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말라 버렸죠. 그건 중국인들의 특징을 확실히 이해한 제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 중국인을 수년간 관찰한 결과 네 가지 결론을 얻었다. 우선, 싼 마스크팩이 아닌 비싼 마스크팩을 팔아 보자는 것이다. 보통 마스크팩은 10장에 3만 원인데, 그는 3만 9000원을 적정가로 생각했다. 대신 어떤 마스크팩보다 에센스가 넉넉하게 만들었다. 너무 촉촉해 에센스가 목과 몸까지 뚝뚝 떨어지도록 원가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여행을 자주 다니는 중국인도 노렸다. 마스크팩을 하나 사면 클렌징폼과 에센스 제품을 묶음으로 제공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다양한 화장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숯을 이용한 검은색 마스크팩처럼 시중에서 볼 수 없던 재료로 우리나라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제품을 만들었다.
- “만나는 화장품 제조 공장마다 ‘마스크팩 시대가 끝났다’, ‘이미 지나치게 포화 상태다’라며 거절했습니다. 화장품은 보수적인 제품입니다. 기존에 쓰던 것보다 월등히 좋아야 자기 돈을 주고 삽니다. 비슷하기만 해도 원래 쓰던 것을 고수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여성들이 화장품을 한번 바꾸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진입만 잘하면 매출이 떨어지기 어려운 아이템이란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어필해 10만 장의 시제품을 생산했습니다.”
- 그의 창업 시기는 화장품 전문가들도 ‘이제 마스크팩을 하기엔 늦었다’고 만류하던 2015년 1월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특징을 완벽하게 간파한 마스크팩이 없다는 그의 자신감은 성공으로 이어졌다.
- 펜실베이니아대 훠턴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가 쓴 《오리지널스》에서 눈길을 끄는 요지는 세계적인 부자들은 상당수 ‘위험 회피형’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1962년 오리건 주립대를 졸업하고 1964년부터 자동차 트렁크에 러닝슈즈를 싣고 다니면서 팔았다. 가격이 저렴하면서 품질이 좋은 일본의 러닝화 브랜드인 ‘타이거’를 수입해 미국 서부 지역에 팔러 다녔는데, 그 와중에 그는 신발 장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 포틀랜드에서 회계사로 취업했다. 약 5년간 신발 판매를 하면서 회계사로 ‘투잡’을 뛰었다. ‘창업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1969년에야 회계사를 관두고 나이키에 매진했다. ‘애플 I’ 컴퓨터를 개발한 스티브 워즈니악은 1976년에 스티브 잡스와 함께 창업했지만, 1977년까지 본래 다니던 직장인 휼렛패커드에서 엔지니어 일을 계속했다. 구글의 창업주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스탠퍼드대 박사 학위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회사를 창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래리 페이지는 1996년에 인터넷 검색 기능을 획기적으로 향상하는 법을 개발했다. 그런데 스탠퍼드 대학원 과정을 휴학하고 사업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 그로부터 2년 후인 1998년이었다. 페이지와 브린은 검색 엔진 개발에 정신이 팔려 박사 과정 연구에 소홀해지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래서 1997년에는 200만 달러(23억 원)가 채 안 되는 값에 회사를 팔려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랜트 교수는 이에 대해 ‘잠재적 인수자가 오히려 구글 인수를 거절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 일단 무엇에 꽂히더라도 내 직업을 유지하면서 그걸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최적의 타이밍이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이 비단 ‘레드오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한국 골드만삭스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며 연봉을 2억 원 넘게 받던 스물아홉 살 청년이 2015년 말 돌연 퇴사했다. 그는 대표적인 레드오션으로 꼽히는 부동산 금융 업계에서 대형 은행들이 시도해 보지 않은 대출 틈새시장을 파고들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피스텔·다세대 주택을 짓는 소형 건축 업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부동산 P2P 대출 업체 ‘루프펀딩’ 민충기(31) 대표 이야기다.
- 건축주는 돈을 싸게 빌려(연 18% 내외) 건물을 짓는다. 투자자는 예금 금리보다 높은 수익(연 17% 내외)을 얻을 수 있다. 물론 투자이기 때문에 원금을 까먹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 루프펀딩은 주로 서울 지역의 오피스텔과 다세대 주택을 6개월~1년 동안 짓는 건축주들에게 대출을 해 준다. 대출 액수는 10억~20억 원이고, 1년 안에 공사가 끝나는 건에 투자한다. 이는 그동안 은행이 외면해 온 영역이다. 은행은 중견 기업 이상이 시행하는 최소 수백 억 원 규모의 공사에 대출을 해 준다. 2~3년 동안 안정적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성 면에서도 큰 규모의 대출이 낫다. 10억 원 규모든, 1000억 원 규모든 건축 대출 심사 과정에 드는 비용과 노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은행은 큰 대출에만 관심을 갖는다. 루프펀딩은 바로 이 틈새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바로 수수료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해 사업 첫해에만 무려 10억 원의 순익을 낼 수 있었다.
- “골드만삭스에 입사했을 때 국내 주식 시장 펀드 설정 금액이 약 300조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빠져나가는 겁니다. 3년간 무려 100조 원이 빠져 2014년 말쯤 주식 펀드에 남은 돈은 200조 원 수준이었습니다. ‘100조 원이 어디 갔나’ 의문이 들더군요. 알고 보니 부동산 같은 대체 투자 분야로 흘러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의 흐름을 좇자’고 결심했습니다.”
- 미국과 홍콩에서는 지방 은행이나 신협에서 소형 건축 업체 대출 상품을 많이 취급하는데 우리나라엔 그 시장이 없었다. P2P 방식으로 소형 건축 업체를 묶으면 저금리 시대에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률을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축주에게도 고금리 이자 부담을 낮출 좋은 기회였다. 부동산 시장 전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구 증가는 둔화하지만, 가구수는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형 아파트 수요는 줄어들지만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한 오피스텔 같은 소형 주택 수요는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 “무턱대고 위험을 피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회사에 남아 있을수록 연봉은 매년 올라가지만 반대로 나올 용기는 매해 줄어듭니다.”
- 부동산으로 돈이 몰린다 해도 부동산 P2P라는 낯선 신상품으로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오는 건축업자에게 대출하지 말고 직접 믿을 만한 대출자를 발굴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다양한 데이터 분석이 그 시작이었다. 동사무소 단위로 연령대별 인구 유입량을 5년치씩 봤다. 예를 들어 매년 1인 가구가 5000명씩 불어나는 곳이면 매년 5000명이 살 만큼 주택이 지어졌는지 파악하는 식이다. 인구 유입량보다 필요한 주택이 적으면 대출 가능 지역으로 분류했다. “인구를 분석하는데 다른 방식을 더 봅니다. 구별로 등록된 자동차 대수와 종류(경차・중형차 등), 지역 상점의 포스 단말기 매출 현황, 지방세 데이터 표본 등을 구해 지역별 소득 수준을 역계산하는 것입니다. 직업과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차의 경우 ‘재산의 10% 정도를 투자한다’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점 매출로 20~30대의 일상적인 소비 추이를 봅니다. 꾸준히 월세를 낼 현금 흐름이 있는지 파악하는 겁니다. 이런 정보가 대출을 결정하는 데 참조 사항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지역별로 건물을 짓겠다고 구청에 허가 신청을 한 사업체 리스트를 보고 가장 전망이 좋은 지역의 사업성 좋은 업체를 찾아갔다. 그런데 매번 거절당했다. “‘겨우 서른 살짜리가 뭘 아느냐’는 소리만 듣고 다녔습니다. 그동안 진짜 편안하게 살았다는 것을 절감했죠. 설득 대상은 건설 현장에서 오래 일한 40~50대 사장님들이었습니다. 우선 눈높이를 맞춰야 했어요. 그래서 투자 은행 시절 입에 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결론부터 말하는 습관’부터 없앴습니다. 느긋하고 인간미 있게 대화를 이끌어야 하더군요. 나이도 더 들어 보여야 할 것 같아 나이 들어 보이는 가발을 구해 쓰고 다녔습니다. 건설 현장 식당에서 소주도 마실 줄 알아야 했고요.”
- “기업가로서의 제 철학은 ‘일자리를 얻으려 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라’입니다. 지금은 소형 업체 대출만 하지만 나중에는 부동산에 관한 모든 자금을 취급하는 ‘부동산 자금 센터’로 키워 직원을 많이 뽑고 싶습니다. 2017년에도 10명 이상 채용할 계획입니다. 조직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요. 저희는 골드만삭스와 달리 야근을 안 합니다. 무조건 ‘6시 칼퇴’ 원칙을 지킵니다. 모든 직원이 함께요.”
- “레드오션 안에 블루오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업(業)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빠를 것 같습니다. 다만 한 치의 머뭇거림이라도 있다면 창업하면 안 됩니다. 저는 그 머뭇거림이 생길 만한 문제가 창업하고도 나타날지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 “한국 청년들은 왜 서울대만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대를 가면 20대 초반엔 들떠 있겠지요. 그러나 40대가 되면요? 그때 회사에서 쫓겨나면 뭘 할 것입니까? 대안이 있나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 로저스 홀딩스 회장은 2016년 10월쯤 수화기 너머로 필자에게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72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만들어 10년간 4200%의 수익률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자자로 약 30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옥스퍼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관련 분야로 진출하지 않았다. 우연히 발길을 들인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 그런데 한창 투자자로 잘나가던 1980년, 돌연 그는 뉴욕 월가를 떠났다. 투자 혜안을 넓히겠다며 116개국, 총 24만 5000킬로미터 거리를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여행한 것이다. 지구를 여섯 바퀴나 도는 거리다. 그때도 주변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데 제정신이냐?’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식견을 가지고 투자 업계로 돌아온 뒤 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 “월스트리트에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만 알면 월급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주 7일, 하루 14~15시간씩 높은 업무 강도의 일을 소화하면서 원래 계획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여행을 하며 투자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오토바이로 말입니다. 늘 ‘행복하게 죽을 거야’란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월가에서 투자자로 일하다 뉴욕 시내 버스에 치여 죽는다면 행복한 죽음이 아니죠. 흥미 있는 분야에서 모험하다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제 신조가 뭔지 압니까? ‘미쳤다’가 아니라 ‘미쳤다’의 강도를 두 배로 올려 듣는 겁니다. 남들이 비웃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직업이거든요.”
- 삼성은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장한 삼성에 간다는 건 고리타분한 일 아닙니까.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 2009년 360만 명이던 초등학생 숫자는 2035년 230만 명으로 줄어든다.
- 한국 경영자총협회가 전국 주요 306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6년 신입 사원 채용 실태 조사’를 보면 1년 이내에 퇴사하는 신입 사원 비율이 27.7%로 나타났다. 이는 2014년 진행된 같은 조사보다 2.5% 증가한 숫자다. 이들이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조직 및 직무 적응 실패(49.1%)’였다.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상관없이 무조건 ‘간판’만 보고 입사했다가 실망한 나머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 서울 역삼동에 가면, ‘레스토랑에 날개를 달다’란 문구가 달린 푸른색 배달 오토바이 수십 대가 주차돼 있는 곳이 있다. 2011년 출시된 맛집 음식 배달 서비스 푸드플라이(Food Fly)다. 고객들은 이곳을 통해 부자피자, 온더보더, 사보텐, 캘리포니아 피자치킨 등 1500곳의 유명 맛집과 프랜차이즈 음식을 배달 받을 수 있다. 앱으로 주문을 넣으면 130여 명의 푸드플라이 소속 기사들이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받은 뒤 고객에게 전달한다. 서울 강남구에서 시작해 서울 전역으로 확장한 푸드플라이의 2016년 거래액은 약 300억 원으로, 매출액은 80억 원이었다. 창업 4년 만에 거둔 성과다.
- 외식 사업 전체 시장 규모는 약 60조 원. 이 가운데 배달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집, 분식집, 치킨집, 보쌈집 등이 10조 원을 차지하고, 일반 음식점과 고급 레스토랑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문제는 품질이 좋기로 소문난 일반 음식점과 외식 업체들은 배달을 하지 않고 온라인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고급 음식점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많이 팔아야 이익률이 올라가는 박리다매 비즈니스거든요. 사실 음식 사업 마진은 별로 높지 않아요. 10% 영업 이익도 괜찮다고 보는데, 이익을 늘리려면 더 많이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맛집을 찾아가 보면 매장에 줄이 길게 늘어선 곳은 상당수 수용 인원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음식 생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 집 근처의 5000원짜리 자장면은 공짜 주문이 당연하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유명 셰프가 만드는 3만~4만 원짜리 피자와 파스타를 먹는데 배달 팁으로 4000~5000원씩 기꺼이 쓰겠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 “대기업에선 대부분 선택하지 않은 상사와 일해야 하는데, 그들의 의사 결정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자괴감이 커집니다. 내가 만약 대기업에서 1억 원, 2억 원을 받더라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직접 주도적으로 이끌 것이냐, 이걸 삶의 기준으로 삼았어요.”
-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는 2020년까지 로보어드바이저 관리 자산이 2000억 달러(227조 3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로보어드바이저 펀드 시장도 출범 8개월 만에 설정액 규모가 700억 원으로 늘었고, 업체는 30곳이 넘는다.
- “돈은 출신과 학벌을 따지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좋은 수익률을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옵니다. 그 믿음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어요. 30명을 만나 1명의 마음만 얻으면 성공합니다. 본인이 ‘흙수저’라고 생각한다면 금융 분야 창업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공간이 대학입니다. 제가 필요하면 찾아서 공부합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주도적 학습을 하는 거죠. 투자자와 시장의 마음을 얻는 게 대학 졸업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 결국 돈은 돌고 돌아 수익률이 좋은 곳으로 몰린다. 돈의 본질적인 속성을 꿰뚫은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 “놀랍게도 똑똑한 사람들이 오히려 타이밍을 못 잡습니다. 파괴적 비즈니스의 예술은 10년 후를 상상하는 겁니다. 10년 후의 기술은 지금 기준으로는 빨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10년 후를 대비하는 비즈니스를 미리 만들어 가야 하는 겁니다. 폭발 시점(explosion point)을 기다리면 너무 늦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DVD로 스트리밍의 시대를 준비한 겁니다.”
- 그는 1997년 블록버스터에 맞서 DVD 배송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업은 DVD 우편 배송 사업을 위한 발판이었다. 헤이스팅스는 창업 10년 뒤인 2007년 사업의 100%를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갈아타겠다는 계획을 짰다. 그 생각으로 1999년 세쿼이아 캐피털의 전설적 벤처 캐피털리스트인 마이클 모리츠를 찾아갔다. “제가 시작한 DVD 배송 사업은 전초전입니다. DVD 시장은 머지않아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체제로 전환될 겁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당했다. ‘이미 내년이면 모든 게 디지털화되지 않느냐, 새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닷컴 버블의 시기였다. 인터넷의 모든 기술이 단 1~2년 안에 완벽히 실현된다는 믿음이 모두를 지배했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2013년 9월 마이클 모리츠 회장을 만났을 때 ‘넷플릭스에 투자하지 않은 것이 최대 후회’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구글, 유튜브, 링크드인을 발굴한 모리츠 회장도 트렌드 예측에 실패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 워치를 세계적으로 처음 만든 회사는 페블이었다. 그땐 엄청난 돌풍이었다. 그러나 애플 워치, 삼성 워치, 핏빗 등장 이후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기능성 스마트 워치 회사인 핏빗이 인수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실 스마트 워치는 전 세계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3분기 글로벌 시장에서 스마트 워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51.6% 급감한 270만 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헤이스팅스는 2013년 필자를 만났을 때 ‘스마트 워치는 5~10년 뒤에 제대로 된 시장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창업한 최 대표가 개발한 팔찌형 밴드인 시그널은 상대방의 말소리에 따라 보내는 진동을 손목을 거쳐 손가락 끝까지 흘러가게 한다. 손가락을 귀에 대면 이 진동이 귓속 공기와 만나 소리로 바뀌어 들리게 된다. 전화기에서 음성으로 들리던 음파가 한 번 더 변환 단계를 거쳐 우리 귀로 전달되는 셈이다. 손목에서 만들어진 진동은 초음파나 다른 유해한 신호를 사용하지 않고 안전한 주파수의 신호를 사용하기에 신체에 해로운 영향도 없다. 이 팔찌를 차고 전화가 왔을 때 손가락을 귀에 대면 통화가 가능하다. 이 제품의 가격은 139달러(15만 8000원)로 미국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서 펀딩을 진행했다. 목표 모금액은 5만 달러(5700만 원). 그런데 모금 개시 37일 만에 8000명이 넘는 후원자로부터 147만 달러(16억 7000만 원)가 모였다.
- “스마트 워치가 처음 등장했을 때 한 선배가 통화하는 걸 봤어요. 스피커 모드로만 통화할 수 있더라고요. 주변에서 통화 내용을 다 들었죠. 민망해하는 선배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스마트 워치에 이어폰까지 꼽으면 불편할 것 같았어요. ‘손가락으로 전화를 받을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죠.”
- “많은 분이 골전도 헤드폰과 원리가 비슷하다고 하십니다. 진동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골전도 헤드폰은 머리에 낀 헤드셋이 진동하면 뼈와 달팽이관이 떨리며 소리가 전달되는 형태지만 시그널은 손가락 진동이 귓속 공기와 만나 소리로 바뀌는 방식이에요.” 삼성전자에서부터 혁신이 시작됐다. 회사에서 아이디어 공모를 했는데, 그의 아이디어가 뽑혔다. 삼성은 그의 아이디어를 독특하게 여겨 스핀오프 1호 기업으로 내보냈다. 삼성 DMC연구소에서 5년간 빅데이터와 영상처리 분야를 연구한 그는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포기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는 스마트 워치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스스로 만들어 올라탔다. 현재 그냥 시계에 입을 대고 통화하는 스마트 워치 기술 자체는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통화하면 남들이 다 들어서 불편하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 기술적인 진화가 부족해 판매량이 떨어졌지만 ‘별도의 기계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면서 통화하고 각종 스마트폰 서비스를 편안하게 누리고 싶다’는 근본적인 욕망 자체에 대한 갈급함과 수요는 넘쳐 나고 있다.
-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보다 더 괴로워한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와 사업 모델을 가진 청년들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곤 한다. 이것은 ‘실패’를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국 부모들의 고질적인 병이다. 실패 속에서 더 강해질 수 있는데도, 무조건 안전지대 안에만 자녀를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 구글, 유튜브, 링크드인 등 세계적인 기업을 처음으로 발굴한 투자 회사 세쿼이아 캐피털의 마이클 모리츠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투자했을 때 그들의 나이가 스물두 살,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야후에 투자했을 때는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 나이가 스물다섯 살, 스물여섯 살이었죠. 당시 한 지인이 ‘전체 직원이 3명인데 이들의 나이를 모두 더해도 예순네 살밖에 안 돼’라고 했어요. 미래 세대는 그것보다 더 젊어질 겁니다. 앞으로는 스물두 살, 스물세 살들이 시대를 이끌어 갈 겁니다.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가진 그들이 세상을 바꾸게 되는 것이죠. 그들이야말로 미래의 내비게이터예요.”
- 9번가에 있는 ‘첼시 마켓’
- 원래 첼시 마켓은 1890년대 과자 회사 나비스코에서 오레오 쿠키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이후 공장을 확장해 뉴저지로 옮기면서 건물만 남았다. 그러다 1990년 들어 건축가인 어윈 코언이 이 건물을 사들여 180도 변신시켰다. 100년 전통의 ‘낡음’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새로운 멋을 준 것이다. 천장 곳곳에 노출된 파이프로 앤티크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공장에서 작업용으로 쓰던 엘리베이터도 그대로 활용해 시간 여행을 떠나게 했다. 버려진 송수관을 살려 인공 폭포를 만들었고, 공장 건물을 관통하던 기차 선로는 인테리어 장식으로 썼다.
- 첼시 마켓에 입점해 있는 상점 대부분은 평범한 가족이 대대로 운영해 온 소규모 가족 회사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는 찾아볼 수 없다. 엄선하고 엄선한 ‘장인 정신’을 가진 자영업자들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치즈케이크와 빵을 만든다. 어떤 골목을 가도 대기업 프랜차이즈 외식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꼭 하나씩 끼고 있는 뉴욕 시에서 첼시 마켓은 보물 같은 차별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첼시 마켓을 재탄생시킨 어윈 코언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35곳의 가족 상점이 만들어 내는 다채롭고 창의적인 물건과 음식이 이곳을 맨해튼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로 변신시켰다’고 했다.
- 기존에 있는 것을 재포장해 보여 주는 것은 놀라운 힘이다. 쉽게 말해 통념을 폐기하고 관점을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청년은 ‘재포장’에 약하다. 오래되고 낡은 관행이나 습관, 제도를 바꾸거나 새롭게 포장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늘 그렇게 해 오던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왜 호텔은 당일 예약이 안 될까?’란 일상생활에서 생긴 평범한 질문으로 4년 만에 수십 억 원 자산가가 된 20대 여성이 있다. 당일 숙박 예약 회사인 봉봉랩(서비스명은 호텔나우)의 김가영(29) 대표다. 그녀가 만든 서비스는 국내 2000개 호텔과 제휴하고 있어 당일 예약이 가능하다. 예컨대 아침 9시나 10시에 앱을 켜고 그날 나온 특급 호텔을 비롯한 주요 숙박 업체의 방을 예약할 수 있는 것이다.
- 유명 5성급 호텔의 공실률은 약 30%, 그 이하의 호텔은 50% 정도다. 그러나 호텔들은 방을 팔 때 항상 사전예약을 하는 관행을 지켰다. 빈방으로 그냥 방치하면 돈이 날아가는데도 말이다. 김 대표는 호텔들을 설득해 1박에 14만~15만 원 하는 방을 6만~7만 원으로 낮췄다. 거래 금액의 10%를 매출로 삼고 있다.
- 사업 아이디어는 뜻하지 않은 때 불쑥 튀어나왔다. 2012년 가을, 당시 서강대 로스쿨 입학을 확정한 김 대표는 부산 해운대로 여행을 떠났다. 숙소 예약을 하지 못하고 떠나면서 ‘쉽게 당일 예약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방이 모두 꽉 차 손님을 못 받는 호텔은 그렇다 해도, 설령 빈방이 있어도 당일 숙박 시스템이 없는 호텔들은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못 받는다고 거절했다.
- 2013년 중반 첫 서비스를 출시했는데 첫날 5명이 구매했다. 지금은 하루 2만~3만 건의 예약이 들어온다.
- 공무원인 아버지의 바람대로 서강대 법대에 들어간 그녀는 막연하게 ‘변호사가 되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왜 해야 하지?’란 의심이 들더라고요. 저 자신에게 솔직해져 봤어요. ‘대단히 잘하는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싸우는일이라 법원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게다가 3년간 등록금이 5000만 원이 넘고 이런저런 생활비까지 합하면 1억 원 정도는 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접었죠.”
- 창업 결심을 하던 순간부터 ‘내가 안 하면 누군가 먼저 하겠지’란 강박 관념이 들었다
- “저는 창업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예쁜 모바일 앱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다였어요. 대신 ‘내 관심사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자,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쓰는 걸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고, 이게 창업으로 이어졌어요.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도전해 보세요. 저도 문과생이라 재무·IT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끊임없이 물어보면서 하면 돼요.”
- 2007년 설립돼 2013년 야후에 인수된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 텀블러(Tumblr)는 3억 2470만 개의 블로그에, 매달 5억 5500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주제 큐레이션 사이트다. 매일 3900만 개의 새로운 포스트가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 텀블러의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블로그 주제 가운데 큐레이터(Curator)라는 항목이 있다. 흔히 큐레이터는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안내하고 설명해 주는 사람을 일컫지만, 여기서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들은 글도 안 쓰고, 사진도 안 찍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콘텐츠를 끌어들여 자신만의 뚜렷한 관점으로 새롭게 보여 주는 것이다.
- 재가공에 이어 기존의 올드함을 새로움으로 바꾸는 방법은 ‘융합’이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A와 B를 잇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귤껍질로 명함을 만들 수 있을까?’ 또는 ‘라이터에 USB 기능을 담으면 어떨까?’ 같은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 24│ YG 양현석 대표가 새벽에도 수시로 전화하던 디자이너, 싸이와 G드래곤의 획기적 앨범 디자인 비결은?
-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고민을 남들이 보편적으로, 수동적으로, 무감각적으로 감수하면서 생활하고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사업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 만약 내가 열 살 때 겪은 불편이 10년, 20년 뒤에도 여전히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불편을 느낀다면, 그것은 돈을 부르는 아이템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 프라이탁은 마커스 프라이탁과 다니엘 프라이탁 형제가 1993년 스위스에서 설립한 가방 회사다. 전 세계 22개국의 470곳에서 매년 5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년간 300만 개 이상의 가방을 팔았다. 가방 종류가 5000여 개인 만큼 똑같은 모델을 메고 다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많은 가방 회사 가운데 프라이탁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이 회사의 가방들은 다른 회사의 가방과는 달리 독특한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가방 천은 폐차에서 뜯어낸 안전벨트로, 접합부는 자전거 바퀴에서 떼어 낸 고무 튜브로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 쓰레기로 만든 가방인 것이다. 쓰레기로 만든 가방이지만 가장 싼 것이 15만 원이고, 비싼 것은 60만 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매년 전 세계에서 20만 개가 팔린다. 더러워 보이는 재활용품인데도 학생들은 이를 ‘명품’으로 받아들인다. 매년 35만 톤의 방수포와 1만 8000개의 자전거 튜브, 15만 개의 중고 안전벨트 버클을 재활용한다.
- 그래픽 디자이너이던 프라이탁 형제는 기후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작업한 창작물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그러면서 기능성도 뛰어난 가방을 찾았다. 그들은 살던 취리히 집에서 영감을 얻었다. 교차로를 오르내리는 트럭을 봤는데, 트럭을 덮은 가지각색의 타폴린(tarpaulin, 흔히 타프라고 하는 타르를 칠한 방수포) 천이 매력적이었다. 방수가 되면서도 질기고 튼튼했다. 형제는 그 길로 트럭 방수천으로만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칙은 간단했다. ‘재활용되는 재료를 이용할 것’이었다. 그것도 5년 정도 이용해 때가 묻은 방수천이어야 했다. 이 회사의 직원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트럭 운송 업체에서 가방 제작에 사용할 방수천을 구한다. 절대 새 원단이나 새 천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형제가 처음부터 ‘재활용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트럭 방수천이 튼튼해 그것으로 가방을 만들었더니 물도 안 새고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연한 아이디어는 결국 그들의 경영 철학이 됐다. 다니엘은 프라이탁 홈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환경과 사회를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지 따져야 합니다. 쓰레기로 만든 프라이탁 제품들은 강하고, 방수가 되며, 기능적으로 쓸 만하며 자원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 ‘업사이클(upcycle, 오래되고 낡은 재료에 부가 가치를 더해 새롭게 만든 제품)’
- 사람들이 업사이클이라는 가치 자체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30만 원짜리 프라이탁 가방을 사면 사람들은 ‘최소 3만~4만 원은 내가 사회에 환원하고 기여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스트팩이 잘나가던 시절만 하더라도 물건에 업사이클 같은 가치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다. 오로지 ‘남들이 멋있다고 하기에, 내가 메면 예쁠 것 같기에’ 샀다. 욕구를 하나만 충족하는 셈이다.
- 탐스슈즈의 슬립온 신발은 값싼 재료를 이용해 만든다. 주로 동대문에서 물건을 떼어 오는 대학로의 신발가게에서는 슬립온을 한 켤레당 5000원에도 팔고 있다. 그러나 탐스슈즈는 4만~5만 원대에 불티나게 팔린다. 비슷한 ‘스펙’의 슬립온인데도 왜 탐스슈즈는 더 비쌀까? 하나를 사면 하나를 취약 계층에 기부하는 원포원(One For One)의 가치와 브랜드 스토리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때문이다.
- ‘합리적인 소비’라는 말은 이제 ‘가치 소비’로 재해석해 받아들여야 한다. 큰돈을 들여 품격 있는 제품을 구입하려 할 때 내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이유가 그럴듯하면 산다는 것이다. 사회에 뭔가 보탬이 되자는 욕구와 가격이 비싼 제품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베블런 효과(가격이 오르는데도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 때문에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것)’가 결합된 현상이다. 경기 불황으로 소득차가 커지면서 집과 자동차를 예전처럼 좋은 걸 살 수는 없지만, 그보다 작은 소비에서는 이처럼 ‘사치’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전혀 새로운 업사이클 제품은 뭔가 ‘혼란스럽고 망가지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쿨하면서 유니크하고, 무엇보다 ‘남들과 전혀 다름’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는다.
- 그는 미대에서 학생들이 버리는 그림을 받아 가방을 만든다. 보통 100호(162×130센티미터)짜리 그림에서 적게는 2개, 많게는 4개의 가방이 나온다. 한 학년 정원이 120명인 미대에서 한 사람당 2장씩만 그림(100호)을 보내도 240장이 생긴다. 한 학년 학생들의 그림으로 최대 960개의 가방을 만들 수 있다. 미대생들에게 같은 양만큼 새로운 캔버스를 돌려준다. 버리는 그림이지만, 시간과 노력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다. 그의 가방들은 온라인에서 12만~13만 원에 팔린다. 팝아티스트 찰스장과 협업한 가방은 온라인에서 74만 5000원에 팔리기도 한다. 그가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2013년 졸업 전시회에서였다. 1년간 애써 그린 그림이 전시 후에 대부분 버려졌다. 일부 그림을 가져와 패션 소재로 쓸 수 있는지 실험했다. “다양한 배합으로 코팅제를 만들어 직접 바르기도 했고, 상태를 얼마나 오래 보존할 수 있는지도 살폈습니다. 그림을 가방에 입히기까지 반년이 걸렸어요. 연구해 보니 가방은 세탁을 자주 안 하니까 오랫동안 그림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디자인적으로 사람들이 열광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 피카소나 앤디 워홀처럼 세계적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미술을 사랑한다’는 가치와 ‘쓰레기가 될 수 있던 보물을 살렸다’는 환경 보호적인 가치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용인할 만한 수준인 품질을 갖췄을 때, 파격적인 가격 할인은 또 다른 소비층을 발굴하는 새로운 ‘잭팟’ 전략이 될 수 있다.
- 정육 업계에서는 삼겹살이나 등심 같은 부위를 정리한 뒤 상품 가치가 별로 없어 버리는 머리, 엉덩이, 귓밑 부위의 고기를 ‘뒷고기’라고 한다. 옛날에는 뒷고기를 파는 가게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돈육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원가 절감 차원에서 경상도 부산과 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1인분에 몇 천 원밖에 하지 않는 뒷고기를 팔아 성공 사례를 만든 곳이 생겨났다. 자투리 원단은 이런 뒷고기처럼 버리는 원단을 상품화하는 전략이었다.
- 자투리 원단을 새 원단처럼 가공하는 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자재비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기 때문에 원가를 40% 이상 줄일 수 있었다.
- “자투리 원단은 옷의 매무새 등 품질이 떨어져요. 그냥 옷으로 만들면 실밥이 터지는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거든요. ‘ㄱ’ 모양 블록과 ‘ㄴ’ 모양 블록을 맞추는 게임 테트리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원단을 ‘ㄱ’과 ‘ㄴ’ 모양으로 봉제하니 트임 없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어요.” 버려지는 원단은 가공하고 염색을 거쳤다. 그래도 자투리 원단만 쓰기에는 품질이 떨어져 티셔츠 앞판은 자투리 원단으로, 뒤판은 새 원단으로 만들었다. 자투리 원단 여러 개를 이어 만든 ‘퀼트’ 스타일의 디자인 의류도 개발했다. 새 원단으로 맨투맨 티셔츠를 만들 때 원가는 2000~3000원이다. 그러나 짜투리 원단을 이용하니 원가가 1500원으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만든 옷이 동대문에선 4000~5000원, 백화점 편집 매장에선 1만 원에 팔린다. 경쟁 의류 업계 어디서도 생각하지 못한 이 발상은 히트를 쳤다. 원가를 낮추니 여러 백화점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의류 판매 행사로 이어지면서 입소문을 탔다.
- 유통 기한은 음식을 먹어도 안전한 마지막 날짜가 아니다. 유통 기한의 의미는 유통업자가 제품을 판매할 법적 기한을 의미한다. 유통 기한의 의미가 잘못 쓰이고 있어 2012년 정부에서 유통 기한과 소비 기한(use by date)을 병행 표시하는 시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소비 기한은 해당 식품을 소비자가 먹어도 건강이나 안전에 이상 없는 최종 시한을 말한다. 취지는 좋았지만 홍보 부족으로 실패했다. 어쨌거나 소비자들이 음식을 사 먹을 때 ‘유통 기한의 함정’에 빠져 있는 셈이다. 신상돈 대표는 이러한 소비자들의 고정 관념을 파고들어 B급 제품을 싸게 팔아 성공을 거뒀다. 여기서는 세계적인 청과 회사 돌(Dole)의 곡물 선식을 990원에 살 수 있다. 유통 기한이 1주일 남은 정가 9900원짜리 상품을 90% 할인해 판매하는 것이다. 시중에서 13만 5000원 하는 훈제연어포는 2만 3900원. 유통 기한이 2주일 정도 남은 ‘신선하지 않은 제품’이다. 대신 할인율은 90%가 넘는다.
- 신 대표는 2010년 홍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식품 온라인몰을 운영했다. 특별할 것 없는 유통 구조의 회사였다. 그러다 우연히 한 거래 업체 직원에게서 ‘유통 기한이 1개월 이상 남은 제품도 소비자들이 꺼리고 마트도 받아 주지 않아 폐기 처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유통 기한이 임박한 아사이베리 음료를 시험 삼아 팔았다. 2만~3만 원짜리 제품을 4500원에 내놓았더니 준비한 100개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엄마들이 활동하는 카페와 블로그에서 입소문이 난 것이다.
- 떠리몰의 대표 상품은 ‘못난이 과일’. 대표적인 배 상품 이름이 ‘못생겨버린 나주 배’ 다. 상품 이름 자체가 단점투성이다. 그러나 만약 이 과일 이름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배’ 혹은 ‘싱싱한 나주 배’로 지었다면 망했을지도 모른다. B급 떨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나 못생겼다’고 강조하면 소비자들의 호감을 얻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신뢰를 만든다. 《호감이 전략을 이긴다》의 저자 로히트 바르가바는 ‘라이코노믹스’(likenomics)란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like(호감)와 economics(경제학)를 합성해 만든 조어인데, 신뢰가 위기에 처한 시대엔 진실성과 호감이 불신을 잠재우고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떠리몰은 기준 규격보다 작거나 상처가 있어 밭에 버려지는 배, 감자, 당근, 키위, 오렌지, 레몬 등의 농산물을 선별해 들여와 판다. 전국의 영농조합 5~6곳과 거래를 하는데 농가들은 좋아한다. 농가들은 폐기될 운명에 처한 농산물을 싸게라도 팔아 좋고, 소비자들은 값비싼 고급 과일을 절반 이하 가격에 맛볼 수 있어 좋다.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으로 옷을 만들어 성공한 김소영 대표의 전략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팔 수 있는 한도 이상의 상품을 생산한다
- 재고를 처리하는 것도 모두 ‘돈’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간극은, 마른 수건도 다시 짜야 하는 요즘 같은 불황에 돈을 버는 역발상 전략이 될 수 있다.
- 그는 대학교 재학 시절 ‘태양광 압축 쓰레기통’인 클린큐브를 개발했다.
- 그가 만든 쓰레기통은 쉽게 말해 보통 쓰레기통보다 세 배 이상의 쓰레기를 담을 수 있는 쓰레기통이다. 이른바 태양열 압축 쓰레기통이다. 태양열 가판으로 배터리를 충전하면 특별히 제작한 압축기를 활용해 쓰레기를 최대 여덟 배 넘게 압축할 수 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태양광의 힘을 얻어 자동으로 움직이며, 쓰레기가 쌓이면 단계별로 꾹꾹 눌러 준다. 태양광에 사물 인터넷(IoT) 기술까지 덧입혔다. 쓰레기 용량 부피, 수거 날짜, 어떤 경로를 통해 수거하면 되는지 알려 주는 솔루션까지 만든 것이다. 대당 100만~200만 원으로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쓰레기 수거 횟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쓰레기 산업이 민영화되어 있는 해외에서 오히려 인기 폭발이다. 그가 이 쓰레기통을 발명한 것은 2010년 대학 3학년 시절, 친구와 홍대 거리를 걸으면서 발견한 쓰레기 때문이었다. 술병, 과자 봉투 등 온갖 쓰레기로 거리가 몹시 지저분했다.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장 청계천 공구 상가를 돌아다녔어요. 나름대로 도안을 만들어 갔는데 구체적이지 않다고 손을 내저었어요. 그래서 환경미화원을 직접 도와 드리며 쓰레기 수거의 업무 강도와 불편한 점을 몸소 체험해 개선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 섹시하지 않은 사업일수록 섹시한 기회를 가질 수 있어요. 경쟁 압박이 낮기 때문이죠.
- 보통 파력 발전은 수심 30미터의 먼바다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해야 가능하다. 비용도 100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그는 3미터의 낮은 수심에서도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치를 개발해 해저 케이블 비용 없이 가까운 바다에서도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부력체에 로프를 연결해 가까운 바다에서 전기를 끌어오면 약 1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전기 요금이 월 5만 7000원 나오는 집에서 보통 0.5킬로와트를 쓴다. 1메가와트가 1000킬로와트인 점을 감안하면 수백 가구에 전기를 보급할 수 있는 것이다. “제 기술은 전 세계 섬을 타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섬은 전력 수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거든요. 대부분 배로 디젤 연료를 수송해 디젤 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거나, 육지에서 케이블로 전기를 공급해요. 이 때문에 국내 130여 개 섬에 전기를 공급하는 한국전력은 연간 1200억 원의 적자를 봅니다. 그런데 제 방식의 파력 발전은 설치비를 10억 원까지 낮출 수 있어요.”
- 잘나가던 SK에너지의 플랜트 엔지니어링 담당 과장이던 그는 2008년 파력 발전 신기술을 고안했다. 곧 공장 설비를 바꿔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사업을 회사에 제안했다. 약 730억 원을 절감할 수 있는 사업이었고, 투자금 회수도 3년이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애써 준비한 보고서는 회사 심의 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백지화됐다. “그 과정이 매우 정치적이었어요. 회사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는데, 유야무야 없어지는 걸 보면서 더 이상 실패를 경험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창업이 답이었어요.”
- 2015년 492억 달러(55조 8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공룡 IT 회사 시스코를 보자. 시스코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라우터(router)를 세계 최초로 상업화한 회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네트워킹 회사로 성장한 시스코는 사물 인터넷 등 미래를 혁신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상징 같은 곳이다. 그런 시스코를 대학교 직원으로 일하던 커플이 창업했다면 믿겠는가. 데이비드 버넬이 쓴 시스코 창업기 《시스코 커넥션, 인터넷 슈퍼파워에 숨은 스토리(Cisco connection, The story behind the real internet superpower)》를 보면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컴퓨터 랩 담당 매니저인 산드라 러너와 스탠퍼드대 컴퓨터 부서의 엔지니어 레오나드 보삭은 서로 사귀는 사이이면서 컴퓨터 덕후였다. 그들은 이메일을 통해 ‘러브 레터’를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과 컴퓨터 부서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아서 이메일 교신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네트워크끼리 연결할 수 있는 멀티 프로토콜 라우터를 개발했다. 결혼까지 한 부부(현재는 이혼)는 스탠퍼드대를 나와 1984년 시스코를 창업했고, 그들이 만든 라우터는 1987년 150만 달러(17억 원)의 매출을 거두며 폭발 성장했다. 컴퓨터 덕후인 두 사람은 결혼 후 거실의 가구를 치우고 이 라우터를 개발했다고 한다. 버넬은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컴퓨터에 미친 두 사람은 스탠퍼드대에서 주변 건물에 있는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하려고 했다. 맨홀 구멍과 하수구 사이로 컴퓨터를 연결하는 케이블을 이어 운영 체계가 달라도 컴퓨터끼리 네트워크가 연동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혁신을 위해 주택 담보 대출까지 받아 가며 1주일에 100시간 이상씩 일했다.”
- 시스코는 세쿼이아 캐피털에서 투자를 받게 되는데, 마이클 모리츠 세쿼이아 캐피털 회장은 필자를 만나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수많은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시스코에 ‘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마치 기도문(mantra)을 외우듯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린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한다(We network the network)’란 말이었죠.” 이 두 컴퓨터 덕후는 지금 시스코에서 퇴사해 각자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러브 레터’에서 출발한 연애 사생활은 자신들의 공통 취미이자 직업인 컴퓨터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스탠퍼드대를 그만두고 창업해 성공할 만큼의 몰입으로 연결됐다.
-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창업자는 DVD를 빌려 보는 취미가 있었는데, DVD 연체료가 싫어 온라인 DVD 배송을 꿈꾸게 됐다. 세계 1위 창고형 할인점 코스트코를 창업한 제임스 시네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소리는 마트에서 캐셔가 계산할 때 들리는 ‘링링’ 소리다. 열여덟 살 때부터 그의 취미이자 일은 마트에서 짐을 나르는 것이었다.
- 아리아나 허핑턴이 창업한 글로벌 온라인 매체인 〈허핑턴 포스트〉. 2016년 기준 월 1억 5000만 명이 방문하며 온라인 방문자수 기준 세계 1위 언론사로 발돋움한 이 매체 직원은 기자와 편집자, 엔지니어를 합쳐 전 세계에 675명에 불과하다. 미국 〈뉴욕 타임스〉의 직원 숫자는 3500여 명으로 〈허핑턴 포스트〉보다 많다. 그러나 〈허핑턴 포스트〉는 자발적으로 글을 쓰는 블로거가 4만 명에 달한다. 쉰다섯 살에 창업한 허핑턴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가 취미였다. 그녀는 스물세 살에 첫 책을 썼고, 마리아 칼라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전기를 쓰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취미인 글쓰기를 사업으로 연결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본인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다.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당시 그녀의 경쟁 상대는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널드 슈워제네거. 허핑턴은 선거 운동 두 달 만에 슈워제네거에게 지지율에서 밀려 중도 사퇴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온라인을 통해 선거 자금을 100만 달러(11억 원)나 모은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며 ‘실패(failure)가 모험(venture)을 위한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온라인으로 이렇게나 돈이 많이 모이면, 온라인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한 곳에서 보는 강력한 컬렉터 블로그(collector blog)를 만들 경우 대박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동안 인쇄 매체에서 줄곧 글을 쓰며 유명해진 그녀는 글의 힘을 믿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녀는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 가수 마돈나, 영화배우 존 큐잭,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 등 유명 인사들에게 글을 직접 쓰라고 했다. 이들에게 제시한 원고료는 0원. 글이 인기를 끌면 개인의 브랜드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면서 원고료 이상의 큰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사회 저명인사들을 돈으로 설득하기는 어려워요. 대신 그들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를 확보하는 데 관심이 많죠. 존 케리 상원 의원에게 5만 원이나 10만 원을 줄 테니 블로그에 글을 쓰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유명 인사들의 글과 함께 소년 가장, 서점 주인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도 블로거로 내세웠다. 블로거 500여 명으로 출범한 창립 첫 달인 2005년 8월 방문자수는 51만 명에 불과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성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2005년 500만 달러(57억 원)를 투자했고, 그 후 24시간 실시간 콘텐츠 생산 및 보급 플랫폼으로 바뀌었다. 2009년 9월엔 월 방문자수가 940만 명을 돌파하면서 〈워싱턴 포스트〉를 추월했고, 2010년엔 2400만 명을 넘으면서 〈월 스트리트 저널〉을 넘어섰다. 마침내 2011년엔 3600만 명을 넘으면서 〈뉴욕 타임스〉를 추월해 세계적인 언론사로 발돋움하게 됐다.
- 시절부터 피부 콤플렉스가 심했기 때문이다. 중・고등 학교 시절부터 피부가 까만 데다 여드름이 많아 피부 관리에 목숨을 걸었다. 용돈을 받으면 좋은 화장품을 구해서 얼굴에 발랐다. 학원비로 받은 60만 원을 화장품 사는 데 모두 쓰고 부모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군복무 시절에는 100일 휴가 후 마스크팩과 피부 관리기를 들고 복귀했다가 군대 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화장품 수집은 결국 취미가 됐다. 그리고 그는 이 취미를 돈으로 만들었다. 남성 최초의 뷰티 분야 파워블로거로 이름을 알리다가 2012년 화장품 회사 ‘코스토리’를 세웠다.
- 코스토리 최고의 히트 상품은 마스크팩. 중국 사람들은 색조 화장을 잘 하지 않는 대신 운전할 때도 얼굴에 붙일 정도로 팩을 좋아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마스크팩은 이미 수백 가지가 넘는데 코스토리의 마스크팩이 특별한 이유는 뭘까? 마스크팩을 쓰는 사람 대부분이 불만을 갖고 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점, 즉 얼굴에 완벽하게 달라붙는 팩이 없다는 점을 노렸다. 마스크팩 사용자들은 굴곡진 코 옆과 눈 부분이 들뜨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그가 만든 마스크팩은 얇고 뜨는 부분이 없다. 그게 바로 수백 가지 마스크팩 중에서도 유독 인기를 끈 이유다.
- “화장품을 바른다며 꼴통이라고 부르던 선임들이 피부 관리를 해 달라고 줄을 선 거예요. 내무반의 슈퍼스타가 됐죠. 화장품 지식이 남에게 도움이 되겠다 판단했어요.” 2009년 대학을 졸업하고 아모레퍼시픽에 입사했다. 이후 아토팜, 그루폰을 옮겨 다니며 신제품 기획과 온라인 마케팅을 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화장품 연구원들을 찾아가 화장품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자신의 취미를 제품 생산으로 연결하는 꿈을 키운 것이다.
- 당시 그는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갖게 됐다. 배 속의 아이가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딸을 피부가 좋은 행복한 아이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출생부터 돌까지 쓸 수 있는 제품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국내 제품부터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까지 유아용 화장품을 모두 구입해 제품 하나하나 성분을 따져 보고 효과를 알아봤다. 그런데 유기농이라는 유아용 화장품에도 화학 성분이 많이 들어 있었다. ‘천연’, ‘무향’을 강조하는 제품도 실상 파라벤이나 페녹시에탄올 등의 방부제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 갓 태어난 딸 한별이는 심한 건성 피부였고 산후조리원 시절부터 ‘건조한 아이’로 불렸다. 산후조리원에 ‘우리 아기는 그 화장품 쓰지 말고 이것만 써 달라, 목욕하고 이것만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2012년, 마침내 아기 오일을 개발했다. 호호바씨오일, 마카다미아씨오일 등 천연 유기농 성분이 열 가지 넘게 들어간 오일이었다. 우선 딸 한별이와 조카들, 주변 지인들에게 테스트를 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호응에 힘입어 ‘아빠가 딸을 위해 직접 만든 화장품’을 출시하기로 했다. ‘아빠가 만든 화장품’이라는 브랜드로 아기 오일을 만들어 블로그 이웃들에게 나눠 줬다. 건성 피부인 한별이를 목욕시키고 직접 오일을 발라 주어 피부가 좋아진 100일 된 딸의 모습을 블로그에 공개하자, 구매 요청이 밀려들었다. 하루 최고 방문자수가 10만 명에 이르는 그의 블로그에서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100개, 500개, 1000개씩 판매량이 늘었다. 2013년부터는 현재 히트 상품이 된 마스크팩 개발에 돌입했다. 목표는 얼굴에 붙여도 몰라볼 정도로 얇은 팩이었다. “마스크팩이 얼굴 전체에 잘 붙지 않는다는 점이 늘 찜찜했는데 이 부분을 해결한 마스크가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다른 팩은 몇 분만 지나도 들뜨지만 저희 제품은 20분이 지나도 얼굴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붙어 있도록 만들다 보니 얇아야 했고, 접힌 부분을 펼 때 쉽게 찢어지는 문제가 생겼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름지를 끼워 넣었어요. 덕분에 찢어지지 않고 쉽게 펼 수 있는 마스크팩을 만들 수 있었지요.”
- “대학 친구가 별로 없어요. 빡빡한 아르바이트 일정 때문에 엠티 같은 것을 한 번도 못 갔거든요. 하지만 더한 것도 포기할 수 있었어요. 화장품을 위해서라면 말이죠.” 친구들이 놀 때도 그는 오로지 화장품에만 집중했다. 피부 관리와 메이크업에 관한 자격증을 6개나 땄고, 기업으로부터 화장품을 받아 관련 리뷰를 작성해 자신의 블로그(완소균이)에 올렸다. 화장품 회사가 주최하는 각종 공모전에 응했고 인턴십에도 열심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화장품 매장 에뛰드에서 했다. “다른 화장품 매장은 ‘남자라 안 된다’고 퇴짜를 놓았는데, 유일하게 저를 받아 주었죠. 10곳이나 돌아다녔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남자 사장님이 있는 가게를 찾았더니 ‘나 혼자 남자라 심심했는데 잘해 보자’고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그는 이 매장의 300여 개 화장품 이름을 모두 외우는 우수 알바생이었다고 한다. 자기 피부에 맞는 좋은 화장품으로 피부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그것을 취미이자 지식으로, 그리고 창업으로까지 발전시킨 케이스다.
- 31│ 군대에서도 화장하던 남성 화장품 블로거, ‘6개월 매출 500억 원’ 회사 만들기까지
- 사실 우리나라 청년들은 누구나 취미가 하나씩 있다. 누군 어렸을 때부터 우표를 모으고, 누군 영화 감상을 좋아하고, 누군 김 대표처럼 화장하는 것을 몰래 즐긴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이 취미를 살리지 못한다. 대개 취업할 때는 사람을 많이 뽑는 영업직이나 경영 기획 직군으로 자신이 살아온 길을 애써 끼워 맞춘다. 사실 영업이나 경영 기획은 진짜 취미와 관련이 없는 ‘회사를 위한 회사 일’이다. ‘저는 열 살부터 취미가 영업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꿈을 짜 맞추는 동안 내가 사랑하는 취미 열정은 사라진다. 취미를 여전히 사랑하면 직장인 동호회에서 열정을 불태운다. 취미는 직업이 되는 것보다 직업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가 된다. 왜 취미가 직업이 될 수 없을까? 취미로 큰돈을 벌 수는 없을까? 취미를 오랜 기간 갖게 되면 한 분야에 대한 나만의 차별화된 취향과 관점, 철학이 생긴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만들어 줄 수 없는 나만의 경험에서 나온다. 또 오랜 기간 그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더라도 흐름을 꿰뚫을 수 있다. 바로 그런 경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다. 물론 취미를 단순히 즐기는 소비자 관점에서 판매자 관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숙제가 놓여 있긴 하다. 이 점을 해결한다면 내가 즐기는 취미를 마니아들이 즐기는 틈새시장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를 공략하는 글로벌 사업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 두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웹툰 플랫폼이 돈이 될 것 같으니 해 보자’고 결심한 것은 아니다. 사업의 뿌리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사랑한 ‘덕후’ 정신이었다. 권 CTO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만화가게를 하셨어요. 초등학생 때 만화책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슬램덩크》 등 각종 만화를 사랑했죠. KT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만화 시장이 온라인화되면서 점점 무료로 바뀐 거예요. 웹툰이 생기면서 말이죠. 그러다 보니 무료 만화 말고 품질 높은 만화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만화를 정말 잘 그리는 사람도 돈을 벌기 어렵고 자신을 홍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유료로 정말 재밌는 만화책을 팔자고요. 다시 만화 시장을 부흥시켜 보자고요.” 권정혁 CTO는 온라인 모바일 플랫폼 운용 수수료 비용은 빼고 수익의 약 60%는 작가가, 40%는 레진코믹스가 가져가는 구조를 짰다. 작품마다 1회부터 일정 회까지 무료이고 이후 부분은 구입하는 ‘부분 유료화 모델’이 시작됐다. 그랬더니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열광했다.
- 재무, 회계, 디자인, 인사 등 직원 78명이 모두 만화 덕후다. 채용 지원 자격에서부터 ‘만화를 매우 좋아해야 하며, 입사 후에는 만화를 하루에 1시간씩 읽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권 CTO는 면접을 보면서 출신 학교는 체크하지 않지만 덕후인지는 철저하게 검증한다고 한다. 아무리 명문대를 졸업했어도 덕후가 아니면 안 뽑는다. “만약 재무 담당자가 만화를 안 좋아하면 ‘이런 거에 돈을 왜 쓰지?’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고는 만화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왜 이렇게 예산을 많이 썼느냐고 추궁합니다. 만화를 이해해야 투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에 빠져 있으면 업무에서도 뛰어난 집중력을 보입니다. ‘덕질’ 하는 분야를 업무와 연결할 수도 있지요.”
- 취미를 사업으로 연결하는 것의 강력함은 단지 ‘내가 그것을 잘 안다’는 정도를 넘어선다. 권정혁 CTO는 ‘우리 회사가 만화 덕후만 뽑는 이유는 몰입의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은 5시간이고, 10시간이고, 또는 밤을 새워서라도 몰입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일이 아니게 된다. 취미를 돈으로 연결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정신이 있다. 또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은 정말 혐오할 정도로 싫어한다. 레진코믹스 창업자들이 자신의 취미인 만화를 일로 연결한 배경은 무엇일까? 만화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취미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대가는 터무니없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 주인공의 실패와 성공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오면서 흥미와 흥분을 느끼던 창업자들이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취미의 흐름을 오랫동안 추적하며 가슴으로 느껴 오지 못했다면 새롭게 생태계를 바꿔 보자는 도전장을 쉽게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국내 작가들이 연재할 수 있는 곳은 주요 포털 사이트 두 군데뿐이었어요. 연재하는 작품수도 제한이 되어 있었죠. 저희 출발점은 무조건 만화가를 행복하게 해 주자는 것이었어요. “
- 레진코믹스의 웹툰 작가들은 연재 기간에 웹툰 유료 판매가 전혀 없어도 월 200만 원의 기본 월급을 받는다. 현재 계약한 작가는 400여 명이다. 일부 작가는 인기를 얻으면서 월수입이 500만 원이 넘기도 한다. 소비자들에게도 새로운 만화 시장을 열어 주는 동시에 웹툰 작가라는 ‘사양 직업’을 ‘만화를 그려도 먹고살 수 있다’는 ‘유망 직업’으로 바꿔 놨기 때문이다. “웹툰 공모전을 매년 여는데 우승 상금을 1억 원씩 겁니다. 매년 700~ 1000명의 작가가 몰려요. 만화가와 행복한 생태계를 만들어 갈 겁니다.”
- 취미를 살리더라도 나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취미라면 별 소용이 없다. 나의 취미를 확장해 남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을 파고들 줄 알아야 한다.
- 그는 국내 1호 ‘로케이션 매니저’다. 영화, 드라마, CF 등의 배경으로 쓸 만한 장소를 섭외하는 일을 한다. 그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이 직업을 소개하면서 50명 정도의 로케이션 매니저가 생겨났다.
- 그는 하루에 15~16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가장 좋은 장소를 미리 찍어 둔다. KTX 호남선 철길을 따라 벚꽃이 가장 예쁘게 핀 곳, 멋진 고층 건물 배경이 한눈에 보이는 주유소 등이다. 이런 장소 사진을 데이터화한 것만 160만 컷이다.
- 원래 수원과학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사진이 취미가 되면서 다시 수능을 준비해 신구대 사진과에 입학했다. 1998년 졸업 이후 촬영 일을 시작해 스튜디오에서 졸업 앨범이나 학사모 사진 찍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다 ‘내가 멋진 사진을 찍어 파는 것도 좋지만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를 남들에게 안내해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갖게 됐다. 동시에 영화 업계에서는 장소 섭외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보통 조감독들이 지도책을 하나 들고 1~2주간 전국을 누비며 촬영 장소를 물색해 왔다. 좋은 장소만 점찍어 놓는다고 해서 바로 촬영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지자체나 기업에 일일이 허가를 받는 과정이 귀찮다. 영화 제작팀의 막내들인 조감독들이 하기에는 다소 험하고 사고 위험성도 있다. “시장성이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제 취미가 여행이라서 재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영화 프로덕션에서도 이 일을 누군가 대신 해 줬으면 하는 욕망이 있는 일이었거든요. 대학 동기 2명과 500만 원씩 내서 숙대 앞 건물 지하에 13제곱미터(4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해외에서는 영화나 CF 촬영 장소를 안내해 주는 로케이션 매니저란 직업이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국내엔 아직 없었다. 기획서를 들고 장소를 물색해 발견한 각종 장소 사진과 홍보 영상물 CD를 모든 영화 프로덕션에 발송했더니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SK엔크린 주유소 광고 건이 최초의 일이었어요. 주유소 근처의 전봇대는 깔끔해야 하고, 자동차가 들어오는 입구의 배경도 탁 트이고, 도심이 한눈에 배경으로 보여야 했죠.”
- 처음에는 영화 촬영 장소만 섭외해 주는 일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점점 일을 확장했다. 영화 대본을 보고 적절한 장소를 추천하는 것에서부터 주차, 물품 운송, 숙소, 식사, 장소 섭외 예약까지 모두 짜 준다. 촬영 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를 맡는 것이다. 사진을 예쁘게 찍는 것부터 촬영장의 운영과 통제까지 모두 책임진다.
- 15년간 이동거리가 무려 60만 킬로미터. 지구를 열다섯 바퀴 정도 돈 셈이다. “예쁜 공간을 사진으로 담는 일을 하다 멋진 공간을 사람에게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공간을 찾아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발견해 사람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김 대표 회사의 직원들에게는 특별한 직함이 있다. 바로 ‘전투 요원’이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진을 잘 찍는 사진작가들이라는 점, 그리고 강력한 근성과 추진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에 스물세 살 된 사원이 있어요.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고 3주간 이백일곱 번 히치하이킹을 해 전국 일주를 하고 장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왔어요. 그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든 돈은 15만 원이었대요. 숙박은 무료로 공급 받거나 길거리 벤치, 경기장 라커 룸에서 해결했고요.” 국내에 없던 새로운 직업을 만든 그는 이제 세상에 없던 시장을 만들고 있다. 전투 요원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업무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1년 전 로케이션 마켓(LOMA)을 오픈했어요. 촬영 장소를 온라인으로 검색하고 비교할 수 있는 유료 플랫폼입니다. 15년간 모은 130만 컷 이상의 국내 로케이션 정보를 제공합니다. 1000만 원을 지불하는 고객 1명이 아니라 이용료 10만 원을 내는 고객 100명을 유치하기 위해 개설했습니다. 미디어 콘텐츠 종사자를 위한 교육 콘텐츠를 만들고, 웨딩이나 여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어요. 최종 목표는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직업이 필요 없어질 정도로 로케이션 마켓을 활성화시키는 겁니다.”
- “매일 취미를 즐기는 기분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햇살이 비치는 장소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여행도 가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습니까. 제 직업이 변호사나 의사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남들을 압박하거나 옥죄지는 않거든요.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멋진 공간을 찾는 것이 제 임무니까요.”
- 졸업생 학사모를 찍는 사진작가에서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를 섭외해 주는 매니저’로 자신의 전문성을 재해석한 것이다. 처음엔 대학교 강의부터 시작해 CF, 내로라하는 영화 작업에 이어, 이젠 IT 플랫폼까지 확장했다. 자신이 구축한 영역에서 ‘로케이션 마켓’이란 시장도 만들어 가고 있다. 그저 사진만 찍어 판매하는 사진작가에서 세상에 없는 부가 가치를 만들어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사업으로 연결한 부자들은 이렇듯 자신의 전문성을 다양한 브랜드로 넓혀 나간다. 작게 시작해 확신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일을 하다가 확실한 타이밍에 뛰어드는 것. 실패 가능성을 줄이면서 조금씩 자신의 전문성을 재해석하고 브랜드를 확장해 가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미래를 마주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자신의 취미와 사랑하는 일에 미리 투자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생직장이 아닌 취미형 직장을 갖고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사랑하는 일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이 모든 도전을 하기 전, 자신이 사랑하는 취미로 직업에 도전하기 전, 한 가지 고정 관념을 없애야 한다. 이제 평생직장 시대가 사라지고 취미형 직장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취미란 결국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고, 좋아서 하는 일은 내가 더 열정적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드시 취미를 가지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생을 덜컥 올인하는 대신 적절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입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양하게 경험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잘 알아 가는 과정인데, 그것이 노후 연금보다 백 배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투자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적절한 사업 아이템을 발견하고 그것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춰지고 사회가 그런 사업을 용인할 수 있는 타이밍이 되면, 그 일에 뛰어들어도 좋을 것이다.
- 33│ 국내 골목골목 안 다녀 본 곳 없는 국내 1호 로케이션 매니저
- 자신의 트라우마가 성공의 기회가 되는 경우도 많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짓누르는 깊은 상처이다. 내가 입은 상처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 2000년 행동경제학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교수를 보자. 《생각에 관한 생각》이란 책으로도 유명한 카너먼 교수는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출신이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非)경제학 전공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다. ‘사람들은 통제력이 없으며, 대부분 지나치게 직관적인 결정에 의존한다’고 주장한 카너먼 교수는 앵커링 효과(숫자를 하나 설정해 두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생각), 휴리스틱(문제의 답을 경험에 의한 추측이나 직관적 판단으로 하는 것) 등 경제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개가 넘는 심리 이론을 만들었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사람은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그의 노벨상 수상의 원동력은 유년 시절의 아픔에 있다. 유대인인 그의 가족은 1920년대부터 프랑스 파리에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Star of David. 유대교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삼각형 2개를 겹쳐 놓은 문양) 배지를 스웨터 속 티셔츠에 달고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와 놀다가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독일 군인과 맞닥뜨렸다. “저는 진땀이 났어요. 속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죠. 설마 하면서도 서둘러 도망치려는데 그 군인이 진짜로 저를 쫓아오는 거예요. 그가 다가와 저를 번쩍 들었죠.” 하지만 공포의 순간도 잠시, 그 군인은 어린 카너먼을 포근하게 안아 주는 것이 아닌가. “그 군인은 독일말로 저에게 뭐라고 하면서 지갑을 열더니 자기 아들 사진을 보여 주었어요. 그러고는 돈을 주고 보내 줬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했죠. ‘내 티셔츠에 달린 다윗의 별을 봤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말입니다.” 진짜 그 군인이 카너먼의 스웨터 속에 달린 ‘다윗의 별’을 봤다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살려 줬을 수도 있지만 즉시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트라우마가 대니얼 카너먼이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된다.
- “저는 독일군을 만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찼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경험은 인간이 끊임없이 복잡하고 흥미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람의 생각과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에 입문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 명문 히브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UC버클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지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인간이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잘못된 의사 결정을 방치할 수 있으며, 과신과 낙관주의, 편향적 판단을 일삼는 존재라고 봤다. 이런 주장이 전제가 된 그의 연구가 결국 노벨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 “스무 살이 되지 않았는데도 머리숱이 적어 원래 나이보다 열 살 이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인생에 회의가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요.” 탈모는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상처이자, 자신감을 떨어트리는 취약점이었다. 그러나 취업 때문에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시중을 둘러봤더니 자신에게 맞는 탈모 샴푸가 없었다. 대부분 한약 냄새가 진동하고, 막상 써도 머릿결이 뻣뻣해지는 탈모 샴푸뿐이었다.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니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청년이 많았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됐는데 머리털이 푹푹 빠진다’, ‘모자 쓰고 다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식의 고민이 넘쳐 났다. 점점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한국 사회에서는 2030뿐 아니라, 청소년들에게서도 탈모가 나타난다는 뉴스가 속속 등장했다. “이거다 싶었어요. 2030이 정말 좋아할 만한 탈모 샴푸, 그거 내가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를 시작했죠.”
- 아직 불확실한 상태라서 검색 끝에 미국에서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탈모 샴푸 소량을 수입해 자신이 개설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팔았다. 최초 수량 120개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탈모 전문의를 찾아갔다.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탈모 연구의 권위자이신데, 그분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같이 탈모 샴푸를 만들어 보자, 매출이 나면 수익의 상당 부분을 정기적으로 제공하겠다고 설득했죠.” 효모, 멘톨, 감초처럼 머리에 좋은 여러 가지 재료를 샴푸에 첨가하면 탈모 예방에 좋다는 그 전문의의 주장은 미국의 권위적인 의학 학술지에 여러 번 등재됐다. 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1년간 제품을 개발했고, 한국피부임상과학연구소에서 이 제품을 쓰면 피지량과 각질이 감소하는 대신 두피 탄력과 모발 힘이 증가한다는 인증도 받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2014년 홈쇼핑에 출시한 후 지금까지 350만 개가 팔렸다. 세계적인 투자 대가인 짐 로저스도 투자했다. 외부 투자를 몇 차례 받으면서 2년 만에 회사 가치가 700억 원이 넘었다. “머리털이 20대 초반부터 빠지지 않았다면 창업할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나 취업 준비생 신세가 됐을 거예요.”
- 트라우마에서 비롯되는 아이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대 놓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쉬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창업 아이템으로 잘 연결해 포장하면 폭발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내 속에서 잘 찾았다고 해서 바로 성공할 수는 없다. 핵심은 아이디어의 성공 가능성을 잘 타진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전 조사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시장을 방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발로 뛰어야 하는 것이다.
- 다음은 관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 “한 기업체 회장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이 ‘이 집은 한동안 장사가 잘된다. 여기 테이블이 20개가 있는데 계산하면 총 80명이 먹는다. 점심때만 3회전이 가능할 것 같다. 1인당 2만 원으로 잡으면 매출이 상당하지? 게다가 식육점을 직접 하니까 마진율이 30% 이상이다. 그렇다면 수익은……’ 이러면서 꼼꼼히 보시더라고요. 이런 계산을 하는 분이 많아요.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남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거든요.”
- 사실 이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실패를 권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패하지 않길 원한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을 공부하는 것보다 위대한 일이다. 실패의 끝자락에는 항상 우연처럼 새로운 성공의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거듭하는 젊은 부자들은 새로운 시도로 실패를 타개하려고 한다. 창업 분야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피벗(pivot)이라고 한다. 쉴 새 없이 개선하고, A가 안 되면 A에서 얻은 교훈으로 B를 해 보는 등 온갖 노력 끝에 대중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깨닫는다. ‘실패를 함구하는 건 성공을 뽐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프랑스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의 말처럼 실패를 드러내 놓고 배우고 새로운 도전에 적용해 봐야 한다.
- 이들은 성공하는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 실패의 갈증을 느낀다. 동시에 실패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성공의 갈증을 느낀다.
-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성공의 과정에서도 실패의 극복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루지만 그것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저스는 미국 경영 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 인터뷰에서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큰 성공은 수십 번의 실패가 쌓인 후에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실패에 대해 아무 걱정이 없다’고 했다. 전기차와 우주선을 만들면서 숱한 실패를 경험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실패는 필수 옵션이다.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혁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존은 실패의 연속이 만들어 낸 보석이다. 2007년에 출시한 송금 서비스인 웹페이는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에 출시돼 2014년 철수했다. 너무 이른 타이밍을 잡은 것이다. 아마존의 ‘파이어폰’은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쇼핑까지 지배하겠다며 2014년에 나왔다. 그러나 최악의 실패를 했다. 약 1억 7000만 달러(2000억 원)의 손실만 보고 판매가 중단됐을 정도다. 이외에도 DVD 우편 배송, 아마존 월릿, 아마존 뮤직 임포터(음악 재생 플랫폼) 등을 내놨지만 모두 접었다. 그러나 베저스의 원칙은 실패가 계속되더라도 끊임없이 실험하는 것이다. 그는 지루하게 성공한 직원들은 회사에 불필요한 존재라고도 했다. 파이어폰의 실패는 전용 스마트폰을 넘어서 모든 디바이스에서 통하는 앱과 웹사이트를 구축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연결됐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한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 웹서비스도 초창기엔 ‘돈 먹는 하마’였다. 남는 서버 공간을 임대하는 사업인 클라우드 컴퓨팅은 고객들이 온라인 서버를 기반으로 사이트를 구축하거나 앱을 만드는 작업이다. 실패작이라고 욕먹던 이 서비스는 2015년 90억 달러(10조 2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MS, 구글, IBM을 압도하고 있다.
- “아마존을 가장 성공한 회사보다 가장 편안하게 실패하는 회사로 만들고자 합니다. 실패와 혁신은 쌍둥이입니다. 우리가 1000억 달러(113조 6000억 원)의 매출을 내면서 끊임없이 실패에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 성공한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2006년 한국 1호 우주선 탑승자로 뽑혔다가 2008년 발사 한 달을 앞두고 탈락한 ‘비운의 우주인’ 고산(41) 씨. 훈련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우주선에 타지 못한 그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2년간 일하다 2010년 미국 하버드 케네디 스쿨 유학길에 올랐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최근 서울 종로의 어느 빌딩 사무실 지하 1층, ‘에이팀벤처스(A-Team Ventures)’라는 간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엔 가정용 프린터보다 두 배쯤은 큰 직사각형 모양의 기계 여러 대가 있었다. 요즘 화제인 3D 프린터다. 3D 프린터는 플라스틱, ABS수지(열가소성 플라스틱) 같은 재료를 700도 이상의 온도에서 녹여 0.25~0.8밀리미터 두께로 뿌리는 기계다. 재료를 얇게 계단처럼 층으로 쌓아 올려 물건을 출력한다.
- “만약 제가 진짜 우주를 다녀왔다면 인생을 다이내믹하게 살지 못하고 ‘박제’처럼 살았을 것 같습니다. 남들이 ‘우주인’에게 기대하는 삶을 살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과학 정책을 연구하며 사는 것은 굉장히 안정적인 삶입니다. 실제 여러 기업이나 기관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다면 인생에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우주를 안 간 것이 인생의 기회였습니다.” 서울대 수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석사(인지과학) 과정을 밟은 그는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으로 일해 오다 2006년 1만 8000 대 1이라는 천문학적 경쟁률을 뚫고 우주인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우주인 자격 박탈 이후 항공연에서 2년 일하며 ‘우주 연구원 또는 행정가’의 진로를 그렸다고 한다. 여러 단체에 꿈을 주제로 한 강연을 400회 이상 다니기도 했다. “400억 원에 이르는 국민 세금으로 러시아 우주 훈련을 다녀왔는데 사회에 환원해야 하잖아요. 그중에서도 보육 시설에 있는 소외된 아이들을 많이 만나러 다녔습니다.”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에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우연히 수강한 미국 실리콘밸리 싱귤래러티 대학(singularity) 창업 프로그램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싱귤래러티 대학은 항공우주국과 구글이 공동으로 만든 창업 기술 교육 기관이다. “30개국 출신 예비 창업가 80여 명이 바이오·나노·컴퓨터 과학 기술을 배우고, 2~3개의 창업 아이디어를 내면 벤처 캐피털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과정이에요. 여기서 3D 프린터를 목격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문제를 꼭 우주에 가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는 취업 때문에 힘들어 하며 스스로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청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싱귤래러티 같은 창업 기관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 진학 1년 만에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을 자퇴했다. 귀국하자마자 예비창업자, 대학생들을 모아 무박 2일 동안 3D 프린터로 제품을 만드는 ‘메이커톤(Make-A-thon)’ 행사를 네 차례 주최했다. 행사 후원금으로 3000만 원 넘게 들어왔는데, 이 돈으로 예비 창업가들에게 3D 프린터, 레이저 커터, CNC 머신 등 산업용 기계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 타이드 인스티튜트(Tide Institute)를 서울 세운상가에 열었다.
- 있다. 3D 프린터는 기존의 공장 위주 제조업은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제조의 민주화’ 시대를 몰고 왔다. 그는 이런 매력에 끌렸다고 한다. “누구나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 소유하는 상황, 이것이 제조 혁명입니다. 인공 지능이나 사물 인터넷만큼 3D 프린터의 전망도 밝습니다.”
-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성장하기 쉽지 않습니다. 평탄하게 살았는데 멋지게 성공한 사람이 더 적을 겁니다.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 해방 이후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60년 이상 존재해 왔지만 그 누구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은 아이템이 있다. 바로 종이 식권이다.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총무팀에서 나눠 주는 종이 식권으로 구내식당이나 회사 인근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교, 고등학교 등 학교에서도 종이 식권은 여전히 존재한다. 스마트폰과 스마트 워치는 물론이고, VR니 드론이니 새로운 신기술이 하루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판에 기업 총무팀의 식권 업무는 ‘구시대의 표상’이었다. 그들의 일상은 매달 몇 명의 직원에게 식권을 나눠 줄지 계산하고, 수량에 맞게 인쇄 업체에 맡기는 것이었다. 인쇄 업체가 손가락만 한 직사각형 모양의 식권을 대량으로 제작하면, 그걸 가위나 칼로 자른다. 그러고는 각 부서의 행정 직원을 통해 나눠 준다. 이것은 비효율의 극치였다. 미리 점심을 먹을 것으로 예상되는 직원에겐 식권을 줄 수 있지만, 야근을 할지도 모르는 직원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야근하는 직원에게도 저녁 식대가 나가지만, 언제 야근을 할지 모르므로 식권을 미리 줄 수 없다. 이럴 때 총무팀에서 식당에 ‘장부’를 만든다. 밥을 먹은 직원들이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하고 가면, 나중에 그만큼 정산을 한다. 그러나 총무팀이 바빠 정기적으로 식당에 못 나오면 식당 주인들이 손해를 본다. 당장 하루 매출이 급한 식당 주인들은 발을 동동거릴 수밖에 없다. 종이 식권은 여러모로 낭비가 심한 구시대적 문화인 것이다.
- 모바일 식권 앱에 직원이 로그인하고 들어가면 본인이 한 달간 쓸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이걸로 기존에 사용하던 2~3곳의 회사 인근 밥집 말고도, 디저트, 브런치 등 다양한 맛집을 이용할 수 있다. 기업 총무팀은 그저 약속된 날짜에 벤디스에 식사 대금을 입금하고, 벤디스는 그 금액을 이용 식당에 지급한다. 기존에 종이 식권 때문에 발생한 비용을 12% 절감하면서도, 직원들에게 많은 식당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 놀라운 혁신에 대기업들이 우르르 몰렸다. 한국타이어, 한솔, SK플래닛 등 84개 기업체가 쓰는데, 매달 사용 건수가 15만 건. 2015년 매출만 100억 원에, 순이익은 3~5%를 기록했다. 네이버와 본엔젤스가 잇따라 투자를 하면서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 “왜 기업 총무팀이 매번 식권을 가위로 자르고 그걸 직원에게 나눠 줘야 했을까요? 저는 여기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직원들은 매번 점심때 제휴가 맺어진 소수의 김치찌개와 생선구이 집을 갔어요. 기업 총무팀이 시간이 없거나 또는 귀찮아서 다양한 식당과 제휴를 맺어 직원에게 선택권을 주지 못했거든요. 저는 이런 낡은 관행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모바일을 통해서 말입니다.” 직장인의 식사 시장은 생각보다 크다. 연간 10조 원이다. 이 가운데 종이 식권이 3조 원, ‘장부 후불 정산’ 방법이 2조 원이다. 이걸 넓혀 초・중・고등 학교 종이 식권 시장으로 가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예정이다. 한마디로 새로운 시장을 아예 개척해 버린 것이다.
- 진짜 마지막 도전이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무조건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영업이 쉽지 않았다. 기업들은 ‘모바일 식권은 처음 들어 보는 개념’이라며 문전 박대했다.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직원 3명과 제주도로 고별 여행을 떠났다. “술 마시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수년간 고생만 죽어라 하고 성과가 없어서……. 마지막 여행을 간 거죠.” 그렇게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날 기적처럼 연락이 왔다. 벤처 투자사 본엔젤스였다. 7억 원을 투자할 테니 사업을 계속 해 보라는 것이었다.
- 37│ 세 번 실패 딛고 마지막 도전, 모바일 식권으로 100억 원 매출의 인생 역전
- 인천에서 창업한 케이크 전문 프랜차이즈 도레도레(DORE DORE)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케이크를 판다. 한 조각에 7500원, 비싼 것은 1만 원이 넘기도 한다. 신사동을 비롯해 판교 현대백화점, 타임스퀘어, 연남동 등 국내 내로라하는 ‘핫플레이스’에 모두 진출했다. 브랜드 전문가인 홍성태 한양대 교수는 ‘필요가 아닌 욕구를 충족시키길 원하는 인간 심리를 적절히 공략한 브랜드’라고 평가한다. 우선 케이크 크기가 기존 케이크의 두 배다. 1단짜리 케이크 중 가장 큰 3호 사이즈 케이크를 8등분해 판매한다. 그리고 안정제나 보존제 같은 화학 물질을 넣지 않으며 120년 전통의 프랑스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 도쿄 제과 학교 출신의 파티시에들이 만든다. 당일 생산, 당일 판매하면서 벨기에산 초콜릿과 100% 생크림 등 비싼 재료만 쓴다.
- 그녀는 2006년 대학생 때 도레도레를 시작했다. 최초 자금은 국가 과학 장학생 자격으로 나오는 장학금 1000만 원과 일곱 살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저금한 세뱃돈과 용돈을 모은 1000만 원 등이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지만, 딸을 금전적으로 돕지 않았다. 그는 ‘나도 자수성가했다. 내 돈으로 돕지 않고 딸이 자립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 단순히 ‘지금 잘 되는’ 아이템만으로 폭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외식 분야에서 선물로 값어치를 갖는 건 케이크밖에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이나 타르트는 선물용으로 적절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경기가 나빠지면서 사람들이 ‘작은 사치’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어요. 명품 가방을 사서 선물하지는 못하지만 비싼 케이크를 사서 선물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 거죠.
- 파리바게트, 뚜레주르처럼 큰 베이커리 가맹점 케이크 가격과 사이즈를 좇아가던 케이크 업계는 도레도레의 무식할 정도로 큰 케이크 사이즈에 깜짝 놀랐다.
- 코스트코의 전략과 맥이 닿아 있다. 부피를 경쟁 업체보다 두 배 이상 키우면서,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가격과 맛을 만드는 것이다.
- 실패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매장에서만 케이크를 먹고 떠나는’ 정도로는 큰 성공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사실 디저트가게들에겐 딜레마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손님으로 북적이는 가게라도 회전율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여성들이 주요 고객들인데, 한번 앉으면 오랫동안 수다를 떤다. 문제는 가게들이 주로 임대료가 비싼 역세권, 고급 주택가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가게 장사가 잘되는 것처럼 보이면 주변 부동산 값이 뛴다. 임대료도 덩달아 오른다. 하지만 정작 가게 매출이 제자리걸음이면 껑충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철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 대표는 ‘선물’ 개념을 도입했다. 이름을 붙여 감성을 불어넣었다. 케이크를 ‘고마워 케이크’, ‘축하해 케이크’, ‘사랑해 케이크’ 같은 선물용 상품으로 꾸민 것이다. 그래서 도레도레는 실제 매장에서 먹는 고객만큼 선물용으로 사 가는 고객도 많다.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큰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음식은 케이크예요. 또렷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넣는 것, 그것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이것은 7년간의 실패 끝에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왜 안 팔릴까’, ‘왜 이 넓은 매장 가지고 매출을 올리지 못할까’란 고민 끝에 ‘내 욕심으로만 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죠. 욕심만 가지고는 시장에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힘들었지만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 미국의 탐스슈즈도 사실 창업자의 실패가 만들어 낸 산물이다. 부드러운 밑창을 강조하는 이 제품은 창업 10년 만에 대박을 터트리는 히트 셀러가 됐다. 연간 매출은 2013년 3억 8500만 달러(4400억 원)에서 2015년 5억 달러(5700억 원)로 올랐다. 창업자인 블레이크 마이코스키의 개인 재산은 3억 달러(34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발이 불티나게 팔리는 원동력은 단순히 디자인이나 싼 가격에 있지 않다. 탐스슈즈는 창업 때부터 신발이 한 켤레 팔릴 때마다 신발 한 켤레를 가난한 아이에게 기부하는 이른바 일대일(one for one) 기부 전략을 펼쳤다. 풍토병이나 파상풍에 시달리는 저개발국 아이들에게 한 켤레씩 기부하는 것이다. 2016년 중순 기준으로 벌써 6000만 켤레를 기부했다. 내가 신을 신발 한 켤레를 사면서 다른 한 사람을 돕는다는 ‘원포원’ 아이디어는 세계적인 ‘구호’로 번졌다. 창업자인 마이코스키의 이런 ‘대박’ 아이디어는 한순간에 나오지 않았다. 10년간 네 번이나 창업을 하면서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매우 본능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 이미 수차례 실패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목적이 있는 창업이 절실했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담은 기업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진정으로 기분 좋은 창업을 한 적이 없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발 한 켤레를 팔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 켤레를 기부하는 것은 고객들이 매우 흥미로워하고 이해하기 편하며 또 공감할 수 있는 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신발을 샀을 뿐인데 그 행동이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사실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을 모두가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화한 것입니다. 쉬운 수학 아닙니까? ‘하나의 신발을 팔면, 하나의 신발을 기부한다.’ 물론 처음에는 사업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처음엔 매우 작은 아이디어에 불과했거든요.”
- 그는 다시 과거를 돌이켜 봤다.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샘 월턴 월마트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 등 위인의 전기를 읽으면서 얻은 공통점이 있었다. 성공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망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단, 실패의 상처가 깊을수록 이들은 실패를 이기기 위해 더 크고 위대하게 생각했다. 10년간 실패한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봤더니 공통점이 있었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만 창업했다는 것. “돈을 원했고, 성공을 원했습니다. 제 가장 큰 단점은 안정적이면서 단기적으로 수익이 보장된 것만 찾았다는 거예요. 그런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죠.” 결국 마이코스키는 머리를 식힐 겸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 인생이 달라졌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즐겨 신는 ‘알파르가타’란 신발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발에 상처가 나고 파상풍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바로 이거다’라는 외침이 들렸다. 알파르가타는 부드러운 캔버스 천으로 된 신발로 해외 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디자인과 형태의 신발을 팔고, 판 만큼 어려운 아이들에게 신발을 기부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처음에 250켤레를 만들었고, 250켤레를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작게 창업했다. 그들의 취지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실리자, 순식간에 그의 작은 생각은 글로벌 사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형 백화점인 메이시스, 노드스트롬을 비롯한 주요 대형 쇼핑몰에서 ‘고객들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2주 안에 3000켤레를 생산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문 요청이 쇄도한 것이다. “정말 큰 아이러니가 뭔지 아세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이 작은 사업이 제가 일군 기업 가운데 가장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일종의 업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군가를 돕겠다는 비즈니스 모델이 저에게 가장 큰 보상을 주었거든요.”
- 충남 논산이 고향인 그는 열일곱 살이던 고2 때 아이 아빠가 됐다. 그러자 친척들과 가족까지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놀기만 하더니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서울 청계천 시장으로 올라왔다. 아내는 분유값이라도 벌기 위해 평택에 남아 옷가게 점원과 식당 허드렛일을 했다. 1년 만에 1500만 원을 모았지만 갑작스럽게 망했다. 시 의원 선거에 나가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 돈을 다 썼는데, 당선이 안 된 것이다. 그사이 자녀를 하나 더 낳았다. 네 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송 씨는 솜바지를 입고 저녁에는 나이트클럽까지 찾아다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장비 등 돈이 될 만한 자격증을 무려 30개나 땄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장날을 빠짐없이 찾아갔죠. 지붕 있는 곳에서 아내랑 단둘이 장사할 점포 하나만 마련하자는 심정이었어요. 그렇게 1년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결국 서른 살이 돼서야 보증금 500만 원에 50제곱미터(15평)짜리 가게를 마련했다.
- “하도 오랜 기간 실패를 해 와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얻은 것은 절실함, 그리고 사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입니다. 주위에서 ‘많이 벌었으니까 쉬면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잘된다 싶을 때 망합니다.”
- 지난 30년간 창의성을 연구해 온 테레사 에머빌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봤다. 서로 업종이 다른 7개 기업 임직원 238명에게 매일 일기를 써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에 걸쳐 이메일로 제출하라고 했다. 그날그날 감정과 업무 진전 정도에 대해 7점 척도로 평가하게 했다. 1만 2000건의 일기를 분석한 그가 발견한 것은 기분이 좋은 날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가능성이 50% 높다는 것이다. 언제 기분이 좋아질까? 조사 대상자의 76%는 가장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을 때는 업무에서 뭔가 진전을 경험했을 때라고 밝혔다. 반면 가장 기분 나쁜 하루는 업무에서 좌절을 맛봤을 때라고 답한 사람이 67%에 달했다. 에머빌 교수는 ‘성과를 높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긍정적인 기분을 만들기 위해 일에서 업무를 하나라도 더 진전시키는 것’이라며 ‘그것이 안 되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체제가 완성된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매일 이런 실패를 경험한다. 아이디어나 제안이 통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면서 거절이나 무시를 당해도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조직의 입장을 옹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실패감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다.
- 인생이라는 건물에는 문이 수천, 수만 개가 있는데 어느 문이 하나 닫히면 어디에선가 다른 문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생의 의외성에 대한 비유
- 오랫동안 무엇인가에 푹 빠져 있는 ‘덕후’였다면 그 기회의 파급력은 엄청날 수 있다. 오랜 시간 투입한 전문성과 나만의 철학은 둘째 치고, 그 취미를 하는 이유 자체가 매우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하다 보니 돈이 따라오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취미로 사업했다’가 아니라 ‘취미를 사업으로 연결했더니 돈이 따라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몰입의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몰입 이론(flow theory)’을 만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에 따르면 몰입을 뜻하는 ‘플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드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외적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몰입 자체의 재미를 추구해 몰입을 한다. 이러한 몰입의 경지는 자신의 역량과 주어진 과제가 정점에서 만날 때 일어난다. 몰입의 힘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취미일 것이다. 그냥 재밌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이면 여건과 상황이 안 좋다 하더라도 언제든 도전할 수 있다.
- 지금 성공한 CEO가 됐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꿈도 희망도 없는 정리 해고자였다. 숙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화종합금융 입사 1년 차인 1997년 정리 해고를 당했다. 외환 위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실직 직후 실업자 직업 교육을 통해 제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TV를 보고 곧잘 쿠키를 만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자 완전 빠져들게 되었다. 다른 실업자들은 힘들다며 그만두었으나 그녀는 끝까지 남아 제과 자격증을 땄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아침에 벌떡 일어나게 되는 거 아세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사실 직장 다닐 땐 다음 날 아침이 오는 게 싫어 잠들기 무서웠거든요.” 그러나 제과점을 열 자본금이 없었다. 그리고 곧 결혼하면서 주부가 됐다. 1999년 말 일주일에 한 번 어린 딸을 시댁에 맡기고 제과 학원에 갔다. 그냥 취미 생활이었는데 재밌어서 결석 없이 1년 6개월을 다녔다. “어느 날 강사가 저에게 ‘주민들 대상으로 기초 수업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유모차를 끌며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는데, 3~4명을 대상으로 홈베이킹 수업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둘째를 임신하는 바람에 다시 일을 접었죠.” 시간이 흘러 2004년이 됐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마침 모교인 숙대에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세계 3대 요리 학교 중 하나)가 분교를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급, 중급, 상급 각 3개월씩 9개월 코스에 2000만 원. “남편이 취미를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말렸죠. 하지만 전 취미를 넘어 전문가가 되고 싶었어요. 학비는 제가 벌어서 가겠다고 설득했죠.”
- 대기업에서 신규 사업 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남편은 밤잠 설쳐 가며 베이킹에 미친 아내를 도왔다.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고 마케팅을 도운 것이다. 2007년에는 수제쿠키점을 열었다. 10제곱미터(3평) 남짓한 매장에서 첫 달 매상이 500만 원이 나왔다. “당시 시판 과자가 아이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유기농 재료만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응이 뜨거웠어요.”
- 취미가 없더라도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로 사업을 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고 남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다양한 사업 아이템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성공할 확률이 더욱 높다. 물론 취미와 사업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사업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좋아하던 일이 싫어질 수도 있다. 물론 좋아하는 일에 대한 사업성을 따지지 않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 비즈니스 감각과 의지,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타이밍)이 맞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취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일 못지않게 푹 빠져 몰입해 보는 것이다. 취미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공부가 취미다’, ‘독서가 취미다’, ‘영화 감상이 취미다’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취미 중에서도 특히 뭐에 빠져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똑같은 독서라도 남들처럼 자기 계발이나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무협 소설만 읽을 수 있다. 또는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프랑스 누아르 영화나 스릴러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단순히 머리를 식히는 취미인지, 또는 그 이상으로 열광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취미를 전망 좋은 사업으로 연결한 경우를 보면 단순히 시간이 남기에 한다는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었다. 몰입이 전제된 ‘덕후’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취미가 내 안에 있지 않을까?
- 열한 살 때부터 인터넷 홈페이지를 전문 프로그래머만큼 잘 만드는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2007년 SNS인 텀블러를 세웠고, 2013년 5월 IT 업계 최대 화제가 됐다. 야후가 텀블러를 11억 달러(1조 2000억 원)에 인수했기 때문이다.
- 텀블러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블로그의 중간쯤을 공략한 SNS다. 글자 수나 사진 크기 등에 제약이 없으며 특정 관심사 중심으로 블로그가 운영되는 특징을 보인다. ‘제2의 마크 저커버그’라 불리는 이 신화의 주인공은 데이비드 카프다. 회사 매각 대금 11억 달러(1조 2000억 원) 가운데 2억 달러(2300억 원)를 챙기면서 스물일곱 살에 벼락부자가 된 청년이다.
- “부모님이 먼저 고등학교 중퇴를 권유하셨어요. 처음에 반신반의했죠. 중퇴까진 너무 심하잖아요? 그런데 부모님은 제가 뭘 잘하는지만 보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그의 아버지는 열한 살인 아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갖자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HTML 서적을 구해 줬다. 그리고 학교보다 컴퓨터에 빠져든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권유했다. “아들, 학교를 그만두는 게 어떨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어 보지 그래?” 카프는 눈물을 지으며 말했다. “부모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았죠. 미국이나 한국이나 뭐가 다를까요. 아이들을 어른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똑같은 매너로 대할 수 없을까요? 열여덟 살 전까지는 ‘미성년자는 능력이 안 돼’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뭔가 증명해 보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로봇 인공 지능 관련 회사에서 1년 동안 일하는가 하면, 부부 사업가가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신분을 숨기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부모는 카프가 뽑은 최고의 창업 멘토다.
- 5000달러(570만 원)로 창업한 속옷 보정 업체 스팽스의 사라 블레이클리는 개인 재산이 1조 1200억 원에 달하는 세계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다. 디즈니랜드 인형탈 아르바이트, 팩스기 외판원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물건을 팔다가 밤이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 각종 스타킹을 늘어놓은 채 관련 특허 조항과 제품 판매처를 찾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발 없는 스타킹(footless pantyhose)’. 가위로 스타킹의 발 부분을 싹둑 잘라 낸 제품이다. 스타킹을 착용하면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통념을 깬 이 제품은 수백 만 족이 팔렸다. 구두 대신에 다른 신발을 편안하게 신을 수 있을뿐더러, 몸매 보정 효과도 볼 수 있다. 블레이클리는 이렇게 말한다. “1998년쯤 파티를 가려고 근사한 흰색 바지를 샀어요. 그런데 입고 보니 뒷모습이 끔찍한 거에요. 엉덩이 살은 튀어나오고, 팬티 라인은 그대로 비쳤죠. 스타킹을 신었는데 바지와 맞춰 산 오픈 토슈즈(발가락이 보이는 신발)와 어울리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스타킹의 발 부분을 잘라 내고 신었어요. 그때 감이 왔어요. ‘이게 여성들이 원하는 거야!’라고 말이죠. 실제 오프라 윈프리도 쇼에서 스타킹을 신을 때마다 발이 불편해 발 부분을 잘라 내고 신고 있었어요.” 그녀는 의외로 성공의 이유로 아버지를 뽑았다. 창업은 물론이고 글로벌 기업, 중소기업 근무 경력도 없는 그녀에게 아버지는 매일 숙제처럼 이렇게 물어봤다. “사라야, 너는 오늘 무엇에 실패해 봤니?” 그녀는 말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저와 오빠에게 ‘너는 오늘 무엇에 실패했니?’라고 물었어요. 우리가 그날 실패한 것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게 없으면 실망하시곤 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새로운 콘트래리언적 발상이었어요. 이제 어른이 된 제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아버지에게 너무 감사해요. 저에게 실패는 성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나은 일이었어요.”
- “실패는 인생을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당신을 옆에서 쿡쿡 찌르는 역할을 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발 없는 스타킹에 관한 아이디어에 대해 2년 동안 ‘그건 실패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수십 억 원이 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블레이클리는 창업 과정에서 노(No)라는 단어를 수만 번도 더 들었지만 실패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 덕분에 좌절하지 않았다. “스타킹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남성은 제 아이디어를 들어 줄 생각도 안 하는 거예요. ‘정신 나간 여자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죠. 그러나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 기계 자동화 설비를 갖춘 양산차 공장에서 차를 한 대 만드는 데는 20~30시간이 든다. 반면, 모헤닉 게라지스에서 30여 명의 직원이 한 달에 만드는 차는 한두 대에 불과하다. 자동차 골격인 캐빈과 프레임 바만 남겨 놓은 채 엔진, 외관, 도장, 샌딩, 인테리어까지 모두 손으로 조립하고 만들고 디자인한다. 이런 작업을 ‘리스토어(restore)’라고 한다. 기계 설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수제로 차를 만드는 글로벌 기업인 페라리, 롤스로이스, 파가니 같은 곳이다.
- 오로지 현대자동차의 구형 갤로퍼만 작업한다. 1991년에 시장에 나온 현대자동차 갤로퍼 구형 모델을 완전히 해체하고, 처음부터 새로운 차로 만들어 낸다.
- 이들이 만든 자동차의 성능이나 편의 장치가 일반 시판 자동차에 비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판매가는 웬만한 외제차보다 비싸다. 모델과 옵션에 따라 3000만~8000만 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2018년 2월까지 주문이 밀려 있다. 2014년 창업 이후 50대가 팔렸고 누적 매출은 수십 억 원에 달한다. 차를 팔아 남기는 영업 이익률은 30%다.
- “수제차는 기술력이 뛰어난 요즘 차처럼 편의 장치가 많지 않습니다. 시속은 150~160킬로미터를 찍죠. 그러나 수제 차는 인간 본연의 감성적 가치를 건드립니다. 지금 시대에 최첨단 기술력은 흔합니다. 투박하지만 손으로 만드는 것에 사람들이 훨씬 더 공감합니다. 가령 저희가 만든 계기판은 바늘로 표시됩니다. 숫자, 디지털에 사람들이 질려 있거든요.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맞는 가장 감성적인 디자인의 차는 1960~1970년대에 많이 나왔는데 그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공략한 것입니다.” 김 대표는 20여 년 전부터 차에 미쳐 있는 ‘차 덕후’다. 1996년 PC 통신 하이텔에 ‘엘란’과 ‘아우디 TT’ 등 이른바 자동차 덕후들을 위한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했다. 동호회 회원들끼리 평일이건 주말 밤이건 만나 자동차 경주를 즐겼고, 술 한잔 기울이면서 자동차 이야기를 해 왔다. 그러나 일은 전공을 따라갔다. 홍대 목조형학과를 졸업하고 ‘더 디자인’이라는 가구 회사를 차려 10년간 운영했다. 고급 원목 등의 재료를 이용한 디자인 가구로 한때 전국 40여 곳에 매장을 내고 70억~8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다 저렴한 중국 카피 제품이 늘면서 사업이 기울었다.
- 2013년 캠핑을 떠나기 위해 차를 알아봤다. 4륜 구동의 갤로퍼가 눈에 띄었다. “1992년 출시된 갤로퍼는 사실 1982년 미쓰비시에 나온 파제로를 기반으로 한 자동차예요. 당시에도 큰 인기를 얻은 베스트셀러였고, 내구성이 좋은 클래식한 차였죠.”
- 차를 새로 뜯어고치는 과정과 자신의 디자인 작업을 블로그에 꾸준히 올렸는데 차 마니아들이 이에 열광했다. “사실 자동차 창업은 전혀 꿈꾸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 디자인으로 개조한 차가 인기를 얻으면서 저를 폄하하는 사람이 많았죠. 주로 경쟁사라 할 수 있는 실내 복원 업체들이 ‘저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겁니다. 거기에 화가 나서 ‘내가 직접 새롭게 디자인한 차를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것이죠.” 그는 갤로퍼 구형 차량을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이 담긴 차로 개조해 주겠다고 인터넷 카페에 올리고 희망자를 모았다. 자신이 직접 리스토어 디자인을 하고 작업은 자동차 공업사에 맡기려는 계획이었다. 개조 비용이 대당 3000만 원 정도로 비싸서 4~5명만 참여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려 40여 명이 개조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며 돈을 냈다. 순식간에 10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 그는 이 돈으로 아예 파주에 공장을 짓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디자인 관점을 담은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기간 사랑해 온 자동차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창업 아이디어가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성공은 10%의 가망성을 크게 볼 줄 알 때 찾아옵니다. 저는 사업은 지나치게 이성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90%의 창업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창업은 10%의 가망성을 진짜 성공하게끔 집념을 가지고 집중하는 미친놈이 해야 합니다.”
- 대표가 창업 3년 만에 상장까지 바라보게 될 정도로 회사를 키우게 된 데는 다섯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 기존에 해 오던 일을 하다 창업에 확신이 들 때 기존 일을 접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단 자신의 패션 잡지 《헤니하우스》를 기반으로 티셔츠를 꾸준하게 팔았다. 월수입은 수백 만 원 선으로 나쁘지 않았다. 부족한 수입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보탰다. 그는 그간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적도 있지만, 밑바닥으로 추락한 적도 있다. 그런 그가 얻은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실패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경험이지만, 아무런 ‘플랜 B’도 없이 무작정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다. 김 대표는 자신의 직업은 유지하면서 본인이 개조한 갤로퍼 차량 디자인을 내세워 고객들을 모집했다. 40여 대를 만들어 달라며 확실한 창업 자금이 들어왔을 때, 그 돈으로 파주에 공장을 세우면서 기존의 일을 접었다. 자신의 자본금은 ‘0’원을 쓴 것이다. 일반인들로부터 뜻밖의 ‘크라우드 펀딩’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타이밍이 적절했다는 점이다. 그가 창업에 나선 2014년은 LTE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스마트 워치, 사물 인터넷, 드론 등 수많은 최신 IT 기술이 우후죽순 나오며 주목을 받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수제로 만든 클래식한 감각의 자동차가 오히려 인기를 얻을 것으로 봤다. “사람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상황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가령 스마트폰이 2G에서 3G로 가는 것은 체감이 가능합니다. 그때는 빨라진 스마트폰을 사람들이 좋아하죠. 그러나 3G에서 4G로, LTE로 갈 때 속도의 큰 차이를 못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약간 더 빨라졌다’는 정도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데려가기는커녕 인간을 버리고 가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 2016년 초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들었다. 당시 이 대결만으로 구글의 시가 총액이 58조 원 늘었다. “만약 알파고와 알파고가 대결했다면 구글의 시가 총액이 올랐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세돌이라는 ‘인간’에 사람들이 감정 이입을 하면서 응원했기에 가능한 것이라 봅니다. ‘클래식’과 ‘사람 본연’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 사이에 생긴 겁니다.”
- 셋째, ‘자동차 덕후이면서 비전공자’들로만 차를 만든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차 덕후이지만 자동차를 직접 조립하는 자동차 기술은 없는 ‘비전공자’다. 그러나 그는 최초에 본인을 ‘차를 만드는 사장님’이 아니라,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정의했다. 가구를 만들든 잡지를 발행하든 공통점은 ‘상상하는 것을 디자인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생각으로 자동차의 외관과 내부의 디자인에 자신의 상상을 현실화했다. 자동차를 실제 조립하고, 배선을 찢고 연결하며, 도장과 도색 작업을 하는 것은 6개월에서 1년이면 배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전공과 전문성이 모인 ‘융합’의 정신이다.
- 사업 초창기에는 자동차 정비업에 종사한 사람들과만 일을 했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다. “자동차에 대한 세세한 지식과 이론, 기술력은 물론 좋지만, 자동차를 A~Z까지 재창조하는 작업에서 그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자동차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전문성이 오히려 새로운 개념의 차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파격적으로 ‘비전공자’만 뽑기 시작했다. 넷째, 위험에 대한 대처법이다. 초기 기업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인재 확보와 인건비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3000만 원 이상의 연봉을 주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5000만 원~1억 원의 고연봉을 주며 데려온다. 이 때문에 사업 비용이 높아져 회사가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모헤닉 게라지스가 인재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아낌없이 스톡옵션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2000만~3000만 원, 1억 원 상당의 주식을 준 직원도 있어요. 지금 그 가치가 3억 원으로 뛰기도 했고요.” 이러한 방식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주목받는 많은 스타트업의 성공 방정식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성장의 기쁨을 직원들과 같이 나눌 수 있는 체계를 만들면서, 인건비에서 오는 사업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너의 지분율은 줄어든다. 그러나 회사가 당장 현금을 소진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성장기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다섯째, 브랜드 확장이다. 사실 모헤닉 게라지스의 주력 비즈니스인 수제 자동차 제작은 장기적으로 아주 큰 대박을 칠 만한 사업 아이템은 아니다. 김태성 대표 역시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수제 자동차를 넘어 더 큰 그림을 보고 계획하고 있다. 장기적인 비전은 이 브랜드를 가지고 전기차를 양산하는 것이다.
- 성공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때 대부분은 위험을 겪는다. 사실 창업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는 내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부자들, 국내의 내로라하는 젊은 부자들은 ‘올인’을 즐기지 않는다. 매우 오랜 기간 조심스럽게 준비한다. 일부는 ‘올인’의 쓰디쓴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그래서 상당수가 ‘실패해도 그만’인 아이템으로 성공한다. 뭔가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그동안 닦아 놓은 안전지대를 과감하게 떠나지 않는 것이다.
- 헤지펀드 매니저 존 폴슨을 보자. 미국 서브프라임 위기 당시 집값 폭락에 베팅했을 때 그가 투자한 금액은 1억 5000만 달러(1700억 원) 정도였다. 반면 그의 자산 규모는 60억 달러(6조 8000억 원)였다. 자산의 2.5%만 베팅한 것이다. 투자금을 몽땅 잃어도 명성에 먹칠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패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 마블의 작품들은 만화책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만화책에서만 볼 수 있던 캐릭터들을 영화나 애니메이션처럼 다양한 분야에 빌려 주고, 그 판권으로 로열티를 받는 사업을 운영해 왔다. 예컨대 〈스파이더맨〉은 대표적인 라이선싱 영화다. 〈스파이더맨〉 영화 전체 수입은 2억 5000만 달러(2800억 원)였고 로열티 계약을 맺은 마블은 이 가운데 5%인 1300만 달러(147억 원)를 챙겼다. 영화 라이선싱을 통한 로열티 수입으로 2007년 2억 7200만 달러(3000억 원)를 벌었다. 그러나 마블은 2007년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아이언맨1〉을 자체적으로 영화로 만들기 위해 5억 달러(5700억 원)의 자금을 빌렸다. 〈아이언맨1〉은 세계적 흥행에 성공하면서 12억 달러(1조 3600억 원)를 벌었고, 빌린 제작비 5억 달러를 일시에 갚을 수 있었다. 파이기 사장은 말한다. “실패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그냥 영화를 자체 제작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이전에 하던 대로 캐릭터 라이선싱 사업을 열심히 하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만약 〈아이언맨〉이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이미 연간 3억 달러(3400억 원)씩 버는 라이선싱 사업으로 길어도 2~3년이면 투자한 돈을 충분히 갚을 수 있던 것이다. 실패를 철저히 계산한 위험 감수법이다.
-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디자인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국민대 대학원에 진학한 데 이어 친구들과 플러스엑스라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를 만든 것이다. 그는 네이버에서 일하면서도 일종의 ‘투잡’으로 각종 디자인 시안을 작업해 왔는데 본격적으로 디자인 회사를 열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는 IT 전문가인 친형과 수시로 만나 ‘토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자본과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고 단순 아이디어에 비즈니스 기회가 있는지 가늠해 보는 사업을 그는 토이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영수증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자동으로 입력되는 서비스, 오픈 마켓 셀러의 주문량을 파악하는 서비스 등 종류는 많았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인 일에 가까웠다. 본업은 자신의 디자인 분야 일이었지, IT 기술과 접목된 앱 서비스는 본업보다는 ‘부업’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토이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배달의민족이었다. 배달의민족이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구글 앱스토어 등에서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다. 그러자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면서 아예 배달의민족에만 100%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제가 배달이나 음식에 관한 창업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 이처럼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그 전까지 창업 기업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리스트(venture capitalist)의 약자인 ‘VC’가 뭔지도 몰랐어요. 배달의민족이 주목을 받자 누군가 VC를 만나 보라고 소개해 주셨는데, ‘VC가 무엇인가요?’라고 되물을 정도였죠.” 전세 보증금까지 털어 시작한 가구 회사는 망했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 ‘망해도 그만’이라고 여긴 배달의민족이 대박을 친 것이다.
- 아리아나 〈허핑턴 포스트〉 창업자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의 성공 원동력을 ‘실패해도 그만’인 마인드라고 밝힌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항상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이다’라고 하셨어요. 또 하나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은, ‘천사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사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사업으로 연결하려면 ‘실패해도 그만’인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작게 시작한 일이 매우 커질 수도 있다. 《와이어드》 전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이 주장한 것처럼 지금은 ‘롱테일의 법칙’이 통하는 시대다. 과거에는 상위 20%의 핵심 제품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꼬리 부분의 80%가 더 중요한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가 됐다. 배달의민족도 어떻게 보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꼬리 사업’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 “사실 스타트업을 하면서 ‘사업으로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것 같아요. 그냥 장난스럽게 놀이처럼 시작하는 거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도 하버드대에서 이성을 사귀는 네트워크를 만들며 시작됐잖아요. 처음부터 진지하게 접근한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놀이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성공의 발판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절박한 마음 대신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과 사업을 ‘대충’ 운영하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충 운영해서 성공하는 사업은 없기 때문이다.
-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국산 팥으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시중 대형 제빵 프랜차이즈는 중국산 팥을 씁니다. 중국산 팥은 1킬로그램당 3500원이면 구합니다. 그러나 맛과 빛깔이 좋은 국산 팥은 시중에서 1킬로그램당 1만 6000원에 팔리거든요. 저는 좋은 국내 파트너를 구해 1킬로그램당 5000~7000원에 팥을 사들였습니다. 물론 요새는 팥 농사가 좋지 않아 1만 3000원에 사지만요. 둘째, 안 달아요. 시중 팥빵은 팥과 설탕의 비율이 일대일입니다. 설탕을 많이 넣으면 방부 효과도 있지만 너무 달아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거든요. 설탕 맛이 많이 나면 20~30대 고객은 좋아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40대 이상 중장년 고객은 다릅니다. 담백하고 은은한 팥 맛이 설탕 맛에 죽는 걸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팥고당은 팥과 설탕의 비율을 1 대 0.48의 비율로 섞습니다. 셋째, 팥을 한 번 삶고 물을 다 버립니다. 팥을 삶을 때는 한 번에 40킬로그램 정도만 삶고요. 그러나 공장에서 빵을 만드는 제빵 프랜차이즈는 수백 킬로그램 상당의 팥을 한 번에 삶고 물을 버리지 않아요. 워낙 양이 많아서 물을 버리는 작업 자체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을 안 버리고 계속 팥을 끓이면 결국 떨떠름한 쓴맛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빵의 두께를 얇게 해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대신 팥 앙금을 최대한 많이 씁니다.”
- “예전 명동에 있는 설탕을 넣지 않은 팥 도넛 집이 인기였습니다. 뜨거운 팥에 계피 향이 나는 앙금을 재료로 이용했습니다. 도넛인데도 설탕을 안 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빵집에서 팥빵을 사는 사람이 줄었습니다. 빵집이 대형화하면서 인건비에 초점을 맞추니까 재료비를 아끼는 거예요. 그 결과 자극적인 맛에 사람들이 질려서 팥빵이 죽어 갔습니다. 과거의 담백한 팥의 맛을 좋아하던 중장년층 이상 세대들이 떠나간 겁니다. 그래서 잠재 시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팥빵에만 집중해 다양한 메뉴를 만들어 부가 가치를 높이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예상이 적중한 셈이죠.”
- “백화점에서 ‘빵이 동났다, 더 보내라’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러나 거절합니다. 백화점 입장보다 우리 생산 스케줄이 더 중요하거든요. 하루에 7000여 개만 만들고 하루에 100개 이상 안 남기는 게 원칙입니다. 남은 빵은 사회 복지 기관 등 어려운 곳에 기부합니다.”
- 은행 홍보부에서 브랜드 전문가로 유명세를 타다 2000년 계약금 1억 원을 받고 삼성전자 사내벤처로 스카우트됐다. 삼성전자 1호 사내벤처 기업인 매직아이의 브랜드 팀장으로 잠시 일하다 2001년 창업했다. “지인에게 투자를 받고 직장 생활에서 모은 돈을 합쳐 17억 원으로 창업했습니다. 사진과 음악을 편집해 콘텐츠를 만들고 이메일로 전송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였어요. 그런데 사업 도중 동료 직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스카우트한 직원들이 핵심 기술자들을 데리고 별도의 회사를 만들어 나간 겁니다. 직원 40명 가운데 4명이 남았습니다. 바로 폐업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바닥을 하도 오래 기어서 더 이상 떨어질 데도 없었지요. 죽음도 각오했는데 뭘 못할까요. 제가 깨달은 것은 돈만 보고 창업하면 망한다는 겁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달려가면 빈털터리가 돼요. IT를 전혀 모르는데 쏠림 현상을 좇아 돈이 된다 싶어 따라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영화 기획사? 영화사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이걸 첫 창업하고 10년 지나서 깨달았습니다.”
- 모양이 똑같은 팥빵은 크기가 제각각인 다른 빵에 비해 선물용 포장을 만들기가 쉬웠다. 그런데 그 선물용 팥빵의 인기가 폭발했다. 오픈하자마자 고급차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서서 몇 박스씩 실어 갔다. “주택은행이나 삼성전자 사내벤처 동료들이 최고로 잘나갈 때 저는 혼자 빌빌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명예퇴직하고 있는 요즘 제 인생은 폈습니다. 아직 살아 계신 부모님이 처음으로 저에게 웃음을 보이십니다. 아내에게 월급도 꼬박꼬박 주고 있습니다. 나이 쉰이면 어떻고, 예순이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한 번은 성공하지 않습니까. 전 그 시기가 조금 늦은 쉰 살에 찾아왔을 뿐입니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그는 실패가 창업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회상한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언젠가 한 번은 실패가 찾아온다. 그래서 실패를 피해 가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는 예비 창업자들에게 성공 사례를 공부하지 말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방법론 없이 처음과 끝만 등장하기 때문에 환상만 생긴다는 것이다. “실패 사례를 더 공부하세요. 트렌드를 좇지 마세요. ‘아이템이 트렌디하다’는 소리가 나오면 이미 성숙 시장이고 시장이 꺼진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잠을 줄여야 합니다. 저는 하루에 3시간 잡니다. 밤 11시쯤에 퇴근하면 뉴스와 책을 보며 사업에 도움이 될 지식을 연구하고 새벽 3~4시에나 잠듭니다. 선천적으로 잠이 많은 사람은 창업이 어렵습니다.”
- 사업의 시작은 부모가 했더라도 젊은 20~30대의 감각으로 새롭게 재단장해 부활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취업이나 창업하는 것 이상의 부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무작정 귀농을 한 부모는 고구마 밭만 매입했을 뿐 고구마를 재배해서 내다 팔 줄을 몰랐다. 고구마 수확부터 보관까지 관련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5억 원 빚더미에 앉기까지 했다. 부모는 딸에게 국비 지원이 되는 한국농수산대학 진학을 권했다. 학교에서 농업에 대해 공부하고 부모에게 알려 달라는 취지였다. 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농업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딸에게 부모가 매달렸다. ‘네가 대표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결국 2013년 그녀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부모가 만든 농장의 대표가 됐다. 지속적인 적자에다 아무런 브랜드도 없이 헐값에 중간 상인들에게 넘겨 버리던 고구마가 이때부터 변신하기 시작한다. 첫째, 먼저 신품종을 구해 심었다. “대학 고구마연구소에서 60여 종의 고구마를 붙잡고 연구했어요. 부모님이 팔던 고구마는 맛있는 편이었죠. 다만 실습을 하면서 신품종을 알게 됐어요. 당시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만 있을 땐데 두 고구마의 장점만 살린 ‘꿀고구마’를 심어 보자고 부모님께 제안했어요. 당도가 높고 신선도에서도 뒤지지 않거든요. 아예 종자를 바꿔 본 것이죠. 다행히 잘 팔려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판로 개척이 미진했다. 고민하던 강 대표는 홈페이지와 블로그 개설에 이어 ‘강보람고구마’란 브랜드명을 만들고 포장 박스에 캐리커처를 넣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실제 고구마의 재배 과정부터 막 캔 고구마의 통통한 모습까지를 젊은 감각으로 재미있게 만들어 올렸다. 중간 상인들에게 고구마를 헐값에 공급하는 것은 중단했다. 대신 새로운 품종의 고구마를 경매장에 내보내 경쟁을 시켰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고구마 박스에 고구마를 출하하니 가격이 치솟았다.
- 경매사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어떻게 경매에 고구마를 낼 생각을 했느냐며 인기가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 대표는 지상파 방송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대박을 쳤다. 청년 농부가 많지 않다 보니 주문이 폭발한 것이다.
- 그녀는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중앙대 대학원에서 창업 경영을 공부하는 중이다. 전문적으로 경영을 배워 사업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 15년간 고구마 농사를 해 온 강 대표의 부모는 고구마를 심고 수확하는 일은 알았지만 그것을 요즘 시대의 언어로 어떻게 팔고 마케팅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런 간극을 딸이 대표를 맡으면서 메운 것이다. 상품을 잘 만들어 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어떻게 팔지를 고민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쉬운 점은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케팅적으로 새로운 혁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나물은 건강에 좋은 식품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그러다 보니 손질하고 데치는 것을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나물 사기를 꺼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역발상’으로 나물에 접근했다. 첫째, 나물을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데쳐서’ 온라인으로 배송하는 방법이다. 이때 당일 구입, 당일 배송 원칙을 지켜 나물이 항상 ‘싱싱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당시 온라인으로 나물을 배송해 주는 업체가 이미 있었지만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근 40~50대 여성들의 인터넷 쇼핑이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한 그의 방식은 역시나 시장에서 통했다. 둘째, 판매 후기를 같이 보내는 방법이다. 일반 가게는 고객이 구매 후기를 온라인에 올린다. 그러나 서 대표는 고객이 나물을 주문하고 받기까지 총 세 번, 즉 주문 접수, 받기 직전의 알림 메시지, 판매 후기를 보낸다. 레시피와 작업 과정 등 오늘 하루 나물을 판매한 과정을 그대로 고객과 공유한다. 포장 용기에는 일일이 손 글씨를 써 ‘감성’을 입혔다. 이런 방식으로 나물을 팔다 보니 재구매율이 높아졌다. 단골이 늘고 입소문을 탄 것이다. 그는 새벽 1시에 일어나 도매 시장에서 나물을 사고, 새벽 4시에 돌아와 물건을 내린다. 쪽잠을 자고 아침 10시부터 나물을 데치고, 2시부터 포장과 배송 작업에 돌입한다. 저녁 7시가 되면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결국 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나물’에 IT 트렌드를 바탕으로 하는 감성을 입힘으로써 성공할 수 있던 것이다.
- CHAPTER 5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답을 찾은 사람들
- 오죽하면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레가(기다리라는 이스라엘 말)’였을까. 한 과일 가게에서 오렌지를 사려고 기다리는데, 상인이 뭉그적뭉그적 자기 볼일을 봐야 한다며 오렌지를 봉지에 담아 주지 않았다. 빨리 가 봐야 한다고 독촉했더니 손끝을 모아 흔들면서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레가, 레가’를 외쳤다. 자기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녹색 신호등이 켜진 좁은 건널목을 막고 자기 차를 유턴하거나 후진하면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채 발이 묶인 시민들에게 ‘레가 레가’를 외치는 운전자들도 있었다.
- 키파(Kippah)
- 개인 재산만 47억 달러(5조 3000억 원)에 달하는 월스트리트의 제왕, 세계 최대 사모 펀드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밑창이 닳아 버린 구두였다. 실밥이 보이고 때가 어찌나 많이 탔는지 내 돈으로 구두를 하나 사 주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그런 그에게 ‘투자 원칙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첫째도 돈을 잃으면 안 되고, 둘째도 돈을 잃으면 안 되며, 셋째도 돈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성공 원칙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던 것이고, 둘째는 해외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슈워츠먼과 루벤스타인 모두 미국 내 부자들의 돈을 운용하기보다 전 세계 시장을 노리고 출발한 사람들이다. 슈워츠먼은 주로 유럽과 미국 동부 유명 호텔 체인과 부동산을, 루벤스타인은 남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 진출해 기업들을 사들였다. 루벤스타인이 ‘나의 최고 투자처’로 밝힌 투자처가 한미은행(지금의 한국씨티은행)이다. 그는 2006년 중국의 생명 보험 회사 퍼시픽 라이프의 지분 25%를 8억 달러(9000억 원)에 매입, 다음 해 증시에 차례로 기업 공개를 해서 50억 달러(5조 7000억 원)를 벌었다. 루벤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아직 아무도 해 보지 않은 시도를 할 때, 사람들은 흔히 ‘너 미쳤다. 아무도 안 한 것을 왜 하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라는 단어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투자를 권유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예스’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금을 모을 때 당신은 ‘노’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빌 게이츠에게 ‘넌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 수 없을 거야’라고 했고, 스티브 잡스에게도 ‘컴퓨터 회사를 만들 수 없을 거야’라고 했으며, 제프 베저스에게도 ‘인터넷으로 책을 팔 수 없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희에게 미국 기업에 투자하지 않고 해외로 나가면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바로 그 글로벌화 전략으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 사무실을 차려도 그 사업을 적용할 모델은 런던과 뉴욕, 싱가포르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해외 진출할 곳에 작은 지사를 만들어 놓고 시작하기도 한다. 인구가 800만 명 수준, 영토 면적은 2만 770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의 10분의 1 수준이며, 팔레스타인과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고, 사막밖에 없는 나라에서 내수 시장에 의존해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과 역발상 정신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은 창업이 일상이다. 이스라엘의 벤처 기업 수는 인구 1540명당 1개꼴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의 2016년 보고서를 보면, 2015년 기준 이스라엘의 벤처 캐피털 투자액이 국내 총생산(GDP)의 0.38%로 1위였고, 2위는 미국(0.35%)이었다. 한국(0.08%)의 다섯 배 수준이다.
- 미국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이스라엘 회사만 94개(2016년 기준)에 달한다.
- 이스라엘의 내비게이션 앱인 ‘웨이즈’는 2013년 구글에 1조 2000억 원에 팔렸다. 사실 지명 검색도 잘 되지 않고 오류가 자주 발생해 지적도 받았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전 세계 스마트폰 사용자끼리 도로와 교통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 지성’ 형태의 서비스다. 2012년 기준으로 4만 5000명이 지도를 편집하고, 5000명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지도 정확성을 관리했다. 세계 각국에서 ‘문어발’처럼 적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겠다는 사명으로 시작됐다.
- ‘롤앤올’이 만든 앱 ‘김기사’가 대표적이다. 김기사는 다음카카오에 626억 원에 팔렸다. 웨이즈와 비교하면 매각 대금이 한참 작다. 이스라엘 요즈마 펀드(이스라엘 정부와 민간이 6 대 4 비율로 세운 벤처 캐피털로 지금까지 40여 개 벤처 기업에 투자했고 20개가 넘는 창업 기업을 나스닥 증시나 글로벌 대기업에 매각함)의 이갈 에를리히 회장은 ‘김기사가 겨우 626억 원에 팔렸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같은 내비게이션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비교하기는 사실 어렵다. 웨이즈는 2006년, 김기사는 2010년에 생겼다. 김기사도 사용자가 앱을 이용하면서 생성한 빅데이터로 실시간 교통 정보를 제공하는 사용자 기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은 있다.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목적으로 만들었느냐, 아니면 내수 시장에 적합한 모델로 출발했느냐다. 김기사는 후자다. 김기사는 국내에 안착한 다음인 2015년부터 해외 시장 진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김기사가 처음부터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쓸 목적으로 앱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예단할 수 없다. 지금 다음카카오에 팔린 김기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임팩트가 강한 성공 사례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 4개 식당을 운영하면서 월 매출 4500만 원을 올리고 있다. 연간 매출은 5억 원이다. 적다고 느낄지 몰라도 인도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1719달러(195만 원)로 전 세계 143위다(국제 통화 기금 2016년 자료).
- “2011년 12월, 스물다섯 살 때 무작정 인도로 날아갔어요. 시장 조사를 해 보니 제대로 된 카페나 24시간 편의점이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한 사람에게 10원씩만 팔아도 120억 원을 벌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 아버지는 말렸다. ‘정 사업을 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3~4년 직장 생활을 하다 도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씨는 ‘한국에서 2~3년 직장 생활로 얻어지는 안정감이 두려웠다’고 한다. “직장을 다니면 금방 5년, 7년이 지나가는데 그때 제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하면서 사업을 시작할 자신이 없었어요.”
- 국세청에서 발표한 2015년 〈국세통계연보〉를 보면, 2014년 창업자 65만 2285명 가운데 요식업이 16만 3988명(25.1%)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신규 창업자 4명 가운데 한 사람이 음식점을 연 셈이다. 신규 창업 중 3년 이내 폐업률은 68%에 이르며, 이 가운데서도 요식업 폐업률은 23%를 차지한다.
- 잠금 화면에 광고뿐 아니라 쇼핑과 택시 예약, 배달, 뉴스를 한 번에 띄우는 ‘올인원’ 슈퍼 앱을 만든 것이다. 바로 ‘머니 락커(Money Locker)’다. 잠금 화면 상태에서 왼쪽으로 드래그하면 뉴스를 볼 수 있고, 오른쪽으로 드래그하면 택시 예약, 쇼핑이나 배달 앱을 이용할 수 있다. 머니 락커 앱 하나만 설치하면 자동으로 수십 개의 다른 앱 서비스에 가입돼 잠금 화면에 노출된다. IT 창업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강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스마트폰 안의 세상을 잠금 화면으로 꺼내 오자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에서 다양한 앱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잠금 화면을 해제하고 스마트폰 메인 메뉴에 들어가 앱을 찾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하나같이 스마트폰 메인 화면에 뜰 앱을 만들려고 노력하잖아요. 저는 반대로 잠금 화면을 노렸습니다.”
- ‘스마트폰 메인 화면’을 ‘잠금 화면’으로 옮겨 오는 방법은 중국 소비자들이 원하는 서비스였다. 한국보다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가게에 들어가 모바일 결제를 하기 위해 잠금 화면을 풀고 수십 개에 달하는 앱 중에서 알리 페이 결제 앱을 찾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 머니 락커는 잠금 화면을 켜자마자 알리 페이가 떠 매우 편하다. 잠금 화면에 모든 서비스를 옮겨 온 것은 세계 최초다.
- 역발상적 창업자들은 모순에 숨어 있는 진실을 파헤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모두 손을 댔지만 제대로 성공한 것은 없었다. 당장 3개월, 6개월은 매출이 발생할지 몰라도 ‘판도’를 바꿀 만한 혁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회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월급을 1원으로 깎았다. 상장할 때까지 집과 차, 월급을 안 받겠다는 선언도 했다. “회사 지분의 30%를 갖고 있었어요. 회사가 성공하면 제가 가장 큰 성공을 맛보는 셈이었죠. 저와 함께한 인재들이 저와 일하는 이유를 만들고 싶었어요.”
- 50│ 집안 파산 후 상하이에서 창업 4년 만에 매출 380억 원
- 필자가 만난 한국의 젊은 부자들이 뛰어넘어야 할 가장 큰 허들은 사실 사업 아이템도, 영업도, 자본금도 아니었다. 차별화한 아이디어와 발품을 파는 노력, 집중력과 역발상적 접근으로 그들은 웬만한 장애물은 오히려 쉽게 뛰어넘었다. 이들에게 ‘넘사벽’은 다름 아닌 부모였다. 대체적으로 젊은 부자들의 부모는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무조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밀어 주기형, 둘째는 ‘절대 안 된다’는 극구 반대형이다.
- 박 대표는 삼양그룹에서 유럽 시장에 플라스틱 원재료를 직거래 방식으로 유통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삼양그룹은 원래 플라스틱 원재료를 중간 도매상(vendor)을 거쳐 유럽에 납품했다. 중간 도매상에게 매출의 일부를 수수료로 떼어 주는 구조였다. 그는 입사 1년 차 때 유럽인 유학생으로 구성한 아르바이트팀을 꾸려 유럽 기업과 접촉하면서 영업에 성공했다. 평소 회사가 내던 연간 유럽 시장 매출을 40%나 늘렸다. 덕분에 그는 사원급이지만 회사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다.
- 부사장은 삼성물산에서 중동 플랜트 철강 영업을 했다. “보통 무역 상사는 납품하는 물건을 부두까지만 갖다 주거든요. 저는 집(공장) 앞까지 갖다 주는 풀 서비스 방식을 도입했어요.” 덕분에 퇴사할 땐 중동 철강 시장 시장 점유율 1위 업체 자리에 올랐다. 둘은 회사에 들어간 이유가 창업을 대비해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5% 안에 들어야 창업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퇴사하기 전에 중국 광저우, 선전, 샤먼 등 여러 지역을 다녔는데 어딜 가나 한국 제품이 보였다. ‘맨땅에 헤딩하는’ 영업 정신으로 해 보자고 결심했다.
- “저흰 화장품 전문가가 아니고 영업과 물류에 강점이 있거든요. 중국 시장을 잘 아는 국내 유통 업체를 만나야겠더라고요. 중국엔 수천 개의 온라인 화장품 쇼핑몰이 있는데, 일일이 모든 업체를 직접 뚫어 영업하긴 어려웠어요.” 마침 중국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모레퍼시픽 팀장 출신 인사가 중국 영업을 전문으로 하는 유통 업체(씨메이트)를 차릴 준비를 했다. “의기투합했어요. 저희가 직접 중국 쇼핑몰에 납품하는 구조를 짜면 마진은 20% 이상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국내 브랜드 발굴만 하고, 중국 영업은 씨메이트에 맡기기로 했죠. 한 다리 거쳐 물건을 납품해 마진은 줄지만 큰 장점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중국 네트워크가 없는 저희가 브랜드를 발굴해 영업까지 성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 두 사람은 창업을 하면서 대기업에서 느껴 보지 못한 냉대를 받았다. “삼성물산에서 영업할 때도 ‘을’이었지만 회사 대표나 임원과 직접 협상했죠. 그런 제가 이런 작은 중소기업에 ‘이렇게까지 낮추어야 하나’ 철없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서 대기업 출신이란 쓸모 없는 자부심을 버리자고 되뇌었죠.”
- 박지영 부사장의 부모는 기사가 나간 후에야 아들이 창업한 것을 알게 됐다.
- 유튜브에 등장하는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를 오디션을 통해 뽑아 동영상 제작법을 가르치고 멘토링 교육도 한다. 교육을 받은 크리에이터가 데뷔하면 콘텐츠 제작을 돕고 광고도 유치한다. 유명한 유튜버인 다또아, 밤비걸, 미아 등 100명의 크리에이터가 있고, 각 크리에이터가 확보한 구독자수는 10만~50만 명에 달한다. 최 대표가 사업 초창기에 3~4주간 크리에이터에게 영상과 촬영, 편집, 기획, 디자인 등을 전반적으로 알려준다.
- “2년 전만 해도 이 시장은 황무지였습니다. 뷰티 크리에이터, MCN이란 개념조차 없었죠.”
- “사실 미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주식을 샀는데 나중에 대박이 났어요. 한 파워블로거 모임에서 뷰티 블로거들이 로드숍 제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그래서 명품 화장품을 집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사이트를 열었어요. 온라인상에서 정가보다 30~40% 싸게 팔고, 소비자가 백화점에 직접 가서 물건을 픽업하는 구조를 짰어요.”
- 내밀어 볼 ‘미끼’가 뷰티 블로거들이었다. 당시 최 대표는 국내 10~20명의 인기 뷰티 블로거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해 오며 친분을 쌓아 둔 상태였다. 블로거들이 블로그뿐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 명품 화장품을 홍보해 주는 조건을 걸어 보려고 했다. “창업 관련 경진 대회나 명품 화장품 회사 같은 데서 사업을 발표하며 마지막에 뷰티 블로거 이야기를 꺼내면 눈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사업은 별 재미가 없는데, 저 뷰티 블로거는 재밌네’라는 반응이었어요. 영상으로 뷰티를 홍보하겠다는 부분에 굉장히 큰 관심을 보인 겁니다.” 그는 2014년 1월 기존의 명품 화장품 판매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대신 영상으로 화장법을 알려 주는 뷰티 크리에이터 육성 교육 사업을 하기로 했다.
- 뷰티 크리에이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2014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한 창업 경진 대회에 나가기 위해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다. 뷰티 블로거들을 모아 동영상 교육을 시키고 인터넷 방송을 하겠다고 했는데, 심사 위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런데 다음 날 구글 지사의 임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침 유튜브 행사가 열리니 와서 네트워킹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도와주실 줄 알았는데, ‘즐겁게 놀다 가세요’ 하고는 그냥 사라지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현장을 통해서 유튜브 실무자를 만났어요. 그에게 1년간 제대로 된 크리에이터 1000명을 육성할 테니 장소와 장비를 빌려 달라고 했죠.” 2014년 9월 1기를 모집했다. 20명 모집에 100명 이상이 몰렸다. 순식간에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가 하루에 수백 만 건을 찍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2015년 3월 처음으로 유튜브 광고로 수익 50만 원을 냈다. 창업 3년 만의 결실이었다. 이후 그는 꾸준히 교육생을 유치해 뷰티 크리에이터로 키워 냈다. 그리고 사업 아이템을 바꾼 지 2년이 안 돼 중국・동남아 시장에 빠르게 진출했다.
- 그의 회사엔 대기업, 글로벌 기업 출신 인재들이 몰린다. 한 번도 헤드헌터를 통해 직원을 뽑은 일이 없다고 한다. ‘이건 확실히 되는 산업’이라는 생각에 인재들이 먼저 노크를 해 오기 때문이다.
-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디지털 구루(guru)인 돈 탭스콧 막시인사이트 회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위키노믹스, 프로슈머, 디지털 경제라는 용어를 대중화한 주인공이다.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이비부머 부모로부터 태어난 N(net) 세대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마우스, 인터넷을 접한 세대는 지능이 높고 협업에도 익숙해 이들이 경제와 정치, 사회를 바꿔 놓고 있습니다.” 그는 1997년 이후 태어난 더 젊은 세대에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N세대보다 더 젊은 S(social media) 세대로, 협력과 쌍방향 소통에 훨씬 더 능하다고 주장한다. “N 세대는 인터넷 활용도가 높아요. 인터넷 정보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잘 분별합니다. 예컨대 석탄 회사의 ‘석탄이 최고의 대체 에너지다’라는 주장이 거짓말이란 것을 잘 압니다. 또한 선택의 자유와 재미, 스피드를 추구하죠. 그러나 S 세대는 모든 인간관계와 인성을 인터넷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쌓고 있습니다. 이들은 학교 숙제를 인스턴트 메신저,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100% 해결하는 세대입니다. S 세대는 사용자면서 협력자지만 모든 것을 플랫폼으로 해결하죠. 이들의 뇌는 훨씬 더 발전돼 있습니다.”
-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Microsoft Surface)와 함께 발표한 미래 직업 보고서에서 ‘현재 대학에 다니는 65%의 학생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 지금은 화장법을 알려 주는 특정 1인 유튜브 뷰티 크리에이터가 인기다. 그런데 사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화장품 크리에이터가 진짜 생기면 어떻게 될까? 모든 여성이 각기 자신이 화장품을 고르고 쓰는 10~20년 패턴을 다 데이터화해 남에게 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화장법을 알려 주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 원하기만 하면 전 세계 여성들의 화장법 수천, 수만 케이스 가운데 골라 쓸 수 있고 이를 공유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굳이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1인 뷰티 크리에이터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불과 10~15년 전만 해도 우리는 스마트폰이 생겨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10년 후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미래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으로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 일본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10대에 뜻을 세우고, 20대 초반에 창업했으며, 50대 후반에 해외 시장에 나섰다. 그는 ‘30년을 하나로 보고 300년 동안 지속하는 회사를 지향한다’는 말을 남겼다. 손 사장의 성공은 미래의 흐름과 변화를 본인의 줏대로 감지해 실천한 결과다. 다음소프트의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부사장은 ‘최소 5년 전부터 내가 뛰어들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6개월 후에 이런 일을 하겠다’고 준비하는 것은 안 된다. 그건 경력 6개월짜리 일에 불과하다. 서른 살에 창업하겠다면 최소한 스물다섯 살엔 5년의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 더 좋은 것은 스무 살 때부터 미래 트렌드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다.
- 임 대표는 6년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서울대에 학적을 걸어 두고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자퇴하고 싶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퇴도 고려했다. 그러나 서울대 학력을 내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서다. 사실 사업의 핵심인 해외 마케팅은 학력과 관련이 없다. 다만 정부에서 발주하는 사업이 문제다. 대표의 학력이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술보증기금의 벤처 인증이 대표적이다. 이 인증을 받으면 3년간 법인세를 50% 감면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정부 사업에 입찰할 때도 가산점을 받는다.
- 벤처 업계에서는 정부 사업을 수주하거나 벤처 인증을 받으려면 학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울대, 카이스트 등 명문대 출신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술보증기금에서 벤처 인증을 받기 위해 제출하는 사업 계획 서류에는 대학명과 재학ㆍ자퇴, 학사ㆍ석사 여부를 써내는 난이 있다. 또 정부에서 사업을 외부 스타트업에 맡길 때 요구하는 평가에는 ‘경영자의 능력과 역량’이란 평가 요소가 있는데, 학력과 학벌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신용보증기금의 한 관계자는 ‘학력도 사업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 무시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벤처 인증의 경우 2년마다 재평가를 거쳐 갱신한다. 인증을 받았어도 다음 재평가를 위해 임 대표는 서울대생이란 타이틀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 청년들이 간판 대신 실력과 능력, 자질로 평가받는 문화를 국가에서 먼저 만들어 줘야 한다. 그리고 20대 초반, 아니 10대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하고 돈을 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명문대, 대기업, 전문직, 공무원 중심의 쏠림 현상을 막고 터무니없는 규제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 2015년 4월, 전 세계에 충격을 주는 뉴스가 등장했다.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의 신용 카드 결제 시스템 회사인 ‘그래비티 페이먼츠’의 CEO 댄 프라이스 이야기다. 그는 직원 120명의 연봉을 최저 7만 달러(8000만 원) 수준으로 올리고, 본인의 연봉 110만 달러(12억 원)를 직원과 똑같은 수준인 7만 달러로 낮추겠다고 발표해 화제를 일으켰다. 원래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4만 8000달러(5500만 원) 수준. 1년 만에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50% 상승한 7만 2000달러(8200만 원)로 올랐고, 본인 연봉은 90% 이상 깎였다.
- 회사는 성장하고 자신은 높은 연봉을 받는 동안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갔다. 이직률은 점점 높아지더니 2012년 7.2%에서 2013년 13.2%까지 올랐다. 직원들은 높은 업무 강도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또 낮은 연봉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기 어렵다는 불만이 고조됐다. 회사는 크고 있지만, 내부 조직은 곪아 가고 있던 것이다. 프라이스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봤다. 본인은 수영장 딸린 집에 살지만 직원들은 불행하다고 말하는 삶을 뒤돌아본 것이다. 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인 대니얼 카너먼과 앵거스 디턴 교수의 ‘행복 연구’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행복도는 소득이 연간 7만 5000달러(8600만 원)가 될 때까지 꾸준히 올라가다가 이 금액을 넘으면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최저 임금을 7만 달러(8000만 원)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 “저는 제가 파트너로 생각한 직원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역할은 돈을 더 버는 게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 공동 창업자인 친형 루카스 프라이스는 새로운 연봉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소송까지 냈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굴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최저 연봉을 7만 달러(8000만 원)로 올리면 향후 3년간 약 180만 달러(20억 4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자신의 연봉을 줄이고 연봉 상승에 따라 직원들의 생산성이 더 올라간다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감한 연봉 정책을 실시한 이후 이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 기적이 일어났다. 우선 이직률이 내려갔다. 2013년 13.2%까지 오른 이직률은 2015년 -18.8%로 떨어졌다. 이직하는 직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직원이 더 늘어났다. 실제 2015년 4월 이후 그래비티 페이먼츠가 받은 입사 지원서는 3만 개가 넘고, 이 가운데 50명을 채용했다. 회사가 조사한 직원들의 행복도는 신규 연봉 정책 이전엔 10점 만점에 8점을 못 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책 이후 9점까지 올라갔다. 이는 직원들의 실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호주머니가 두둑해지면서 많은 직원이 집값이 싼 시애틀 교외에서 회사가 있는 중심부로 이사를 왔고, 그 결과 통근 시간이 하루 평균 6시간 감소했다. 이사로 인해 직원들이 1년에 1560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베이비 붐’도 일어났다. 직원 120명이 일하는 회사에서 출산 소식은 1년에 한두 번 정도 있었다. 그런데 2015년 한 해에만 무려 10명이 아기를 가진 것이다. 이런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고객이 몰렸다. 2015년 4155명의 새로운 고객이 생기면서 고객이 전년보다 55% 늘었다. 당시 평균 고객 증가율이 5% 정도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2015년 매출은 전년보다 35% 상승한 2180만 달러(250억 원)를 기록했고, 순이익은 650만 달러(74억 원)로 크게 늘었다. 덕분에 프라이스는 단숨에 유명 인사가 되어 강연당 2만 달러(2300만 원)를 받으며 미국 전역을 누비고 있다.
- 내부 직원들도 행복해졌지만 이 소식을 들은 외부에서 ‘착한 기업’으로 여겨 고객이 대폭 늘어남으로써 경영상 실적도 좋아진 것이다. 물론 프라이스의 실험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모른다. 지분의 30%를 보유한 친형과의 소송도 진행 중이다. 일부에서는 이 정도 인건비를 지급하면 회사가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 실제 우리나라는 부의 절반 가까이를 상위 10%가 독식하는 구조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6년 9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는 44.9%로, 주요국 가운데 미국(47.8%)에 이어 2위였고 아시아에서는 1위였다. 외환 위기 전인 1995년만 해도 29.2%였다.
- ‘경영의 전설’로 불리며 교세라를 연 매출 50조 원 규모의 회사로 키운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그룹 명예 회장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달걀을 얻고 싶다면 닭을 소중하게 여겨라. 닭을 괴롭히거나 죽이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목표는 직원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한 직원이 즐겁게 일하면 성과는 자연히 따라온다.”
- 주 72시간 근무, 배달 50건을 소화하면서 보수는 월 200만 원 남짓 받는다는 ‘극한 직업’ 오토바이 배달 기사. 대표적인 ‘박봉’의 3D 직업으로 꼽히지만 이 회사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기존 배달 기사보다 적게 일하면서(주 60시간) 월급 1000만 원을 받기도 한다. 배달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배달 대행 기업 메쉬코리아(Mesh Korea) 이야기다. 메쉬코리아는 별도 콜센터 없이 오토바이 배달업에 뛰어든 회사다. 인공 지능 기반의 컴퓨터 솔루션 ‘부릉’으로 배송 가능한 합리적인 물건 무게와 개수를 파악하고 배달 기사에게 배송지를 안내한다. 이때 최단 주행 거리와 장애물도 알려 준다. 버거킹·맥도날드·CJ대한통운·이마트·신세계 등 수십 곳이 넘는 국내 기업(화주)들과 계약을 맺고 배달 음식과 각종 생필품을 배송한다. 전국에서 처리하는 배송 물량은 매달 50만~60만 건에 달한다. 이를 위해 전국 곳곳의 배달 대행 업체와 제휴를 맺고 배달 기사 1만 3000여 명(메쉬코리아 전담 기사는 3000여 명이다)을 간접 고용하고 있다. 배달 기사는 소속 배달 업체에서 기본급을 받고, 실적에 따라 메쉬코리아에서 지급하는 인센티브로 월급을 늘리는 구조다. 이들은 웬만한 대기업 직원 못지않은 수입을 올린다. 배달 기사들의 월평균 수입은 400만 원이 넘고 그중 일부는 1000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기사님들 월급이 제 월급보다 많아요. 그게 자랑스럽습니다. 제 창업 목표 중 하나가 처우가 열악한 배달 업계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이었거든요.”
-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1원을 만드는 회사’
- 메쉬코리아가 배달 기사들과 이익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비결은 혁신적인 배달 시스템에 있다. 타 경쟁 업체와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 우선 메쉬코리아에는 배달 콜을 전달하는 콜센터가 없다. 콜센터를 낀 배달 업체는 배송 건당 200원을 운임료에서 떼어 콜센터에게 준다. 메쉬코리아는 콜센터 대신 배송 데이터를 분석해 만든 알고리즘 솔루션이 배송을 관리한다. 그 덕분에 콜센터로 나가는 마진을 아껴 기사들에게 더 나눠 줄 수 있다. 이 알고리즘은 최적의 경로도 제공한다. 보통 배달 기사들은 습관 때문에 최단 거리가 아닌데도 자기가 아는 길로만 다니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알고리즘은 최적의 우회 경로를 앱으로 알려 준다. 그로 인해 시간이 생명인 배달업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비결은 멀티 로딩(multi loading)에 있다. “보통 배달 기사는 특정 외식 업체에 상주하면서 배달이 있을 때만 하나씩 배달하고 배달 콜이 올 때까지 대기합니다. 그러나 우린 오토바이로 한 번 출발할 때 여러 화주의 물건을 배송해요. A 햄버거집 → B 피자집→ C 음료수집을 차례대로 가는 겁니다. 건당 이동 거리는 1~3킬로미터로 길지 않습니다. 배달 거리를 최소화하고 배송을 늘리면 수익이 늘어납니다. 기존에는 아무리 배송 거리가 멀고 물건이 무거워도 더 많은 돈을 받기 어려웠어요.” 멀티 로딩의 효과는 컸다. 하루에 10건을 처리하던 A 햄버거 프랜차이즈점의 경우 부릉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배송 물량이 30건으로 늘었다. 배달 시간 지연으로 고객의 주문 취소율이 30%가 넘던 어느 업체는 취소율을 10%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 덕분에 경쟁사에 비해 화주들로부터 운임료도 꽤 높게 받고 있다. 배달 시간에 맞춰 정해진 배송 루트를 따라가면 되는 구조라 무리한 배달로 인한 사고도 크게 줄었다.
- “실적에 따라 A~D등급 기사로 나눕니다. A등급 기사는 하루 50건 이상, B등급은 30~50건, C등급은 10~30건, D등급은 10건 정도 배송합니다. 고객이 물건을 받았을 때 만족감과 약속 시간 엄수 여부도 실적에 들어갑니다. 화주로부터 받는 배송 건당 운임료의 90%를 A등급 기사에게 지급하는데, 월 1000만 원 이상 버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이렇게 받기 위해 주 6일을 넘어 주 7일을 일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거의 ‘역마진’입니다. 그러나 최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배달 기사에게는 마진을 거의 떼지 않습니다. B등급 기사는 운임료의 60%, C등급 기사는 40% 정도를 받습니다. 실적과 서비스 품질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겁니다. 물론 배달 기사가 소속된 배달 업체에게도 수익을 지급합니다.” “기존 배달 기사가 하루 14시간 일하고 30건을 배송했다면 우리 배달 기사들은 하루 10시간쯤 일하고 30건을 배송합니다. 근무 시간은 8시간으로 단축할 예정입니다. 월급은 기존 배달 기사가 받던 수준에서 30% 이상 오른 것 같아요. 기존에는 배달 업체 대표들이 임금을 수동으로 정산하면서 임금 체불이 많았거든요. 다행히 우리 배달 기사들은 목숨을 건 질주, 과도한 업무 없이도 충분히 돈을 법니다.” 급여 외에도 안전과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조치들도 챙겼다. 블루투스 통신 장비가 연결된 헬멧을 제작하여 모든 기사에게 지급했다. 덕분에 운전 중 전화 통화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크게 줄었다. 그리고 한 대당 300만~400만 원 하는 125㏄ 오토바이를 1000여 대 사서 기사들에게 무이자 할부로 제공했다. 배달 기사들이 많이 쓰는 50㏄ 오토바이는 가파른 언덕을 못 올라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배달 기사들을 사고 보상 보험에 가입시켰다.
- “사고율이 기존 배달 기사들에 비해 10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서 보험 가입이 가능했어요. 현장 배달 기사들의 처우 개선에만 지금까지 13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한때는 과도한 처우 개선으로 투자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2014년 한때 투자사들이 추가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나와 회사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안 하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끝까지 맞섰고,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 “아버지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주위에 사람이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사업에 실패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평생 금융인으로 살면 남의 삶에 고춧가루만 뿌린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너도 나중에 도움 받을 수 있다’라고요.”
- “3~4년 버티고 지금 드는 생각은 저 같은 사람은 창업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숫자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경영자는 남의 인생을 책임지는 공인입니다. 저는 회사 생활을 하며 수억 원으로 무작정 창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창업 후 2년 가까이 수익이 나지 않아 직원들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게 참 쉽지 않았습니다. 직원을 책임지지 못할 거면 절대 창업하면 안 됩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더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리고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단순히 선의가 아니라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
- 온라인으로 각종 주문을 접수 받아 오프라인으로 해결해 주는 서비스다. 이름은 ‘띵동’. 음식 배달부터 편의점에서 물건 사다 주기, 설거지해 주기, 형광등 교체 등 원하는 일은 다 들어준다. 심지어 바퀴벌레 잡기, 이별 통보 같은 요청도 있다.
- 이곳의 배달 기사(메신저라고 부른다) 100여 명은 월평균 460만 원을 받는다. 동종 업계 두 배 이상이다. 실적 상위 3명의 배달원은 연평균 8000만 원을 받는다. 이처럼 고연봉을 어떻게 받을까? 회사와 메신저는 4 대 6으로 매출을 나눠 갖는다. 평균 단가는 8000원. 한 달에 7만여 건을 처리한다. 현재 월평균 5억 6000만 원의 매출이 발생한다. 이 가운데 60%인 3억 5000만 원이 배달 기사에게 돌아간다. 분배는 주문 처리 건수에 따라 이루어진다. 주 5일 근무자는 월평균 300만 원, 주 6일 근무자는 500만 원을 받는다. 주 6일 근무자 중에는 베테랑이 많아서 연간 8000만 원을 받는 사람도 있다.
- “처음에 출범할 때 배달 기사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면서 동종 업계 최고 대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근태 불량, 고객 제휴사와의 트러블 문제가 많이 나오는 겁니다. 강한 불만으로 회사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고요.”
- “주문이 밀려 할 수 없이 저도 배달을 해야 했어요. 직접 해 보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음식점 점원이나 손님에게 무시도 당하고……. 어느 날 거울 앞에 서 봤습니다. ‘배달 일로 평생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할 수 있다, 좋은 직업이다’라는 말이 안 나오는 겁니다. 배달 기사의 고충을 해결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그는 배달 기사들에게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고 고백하며 사과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센티브제였다. “보상 체계를 새롭게 바꿨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영업이 잘되기 시작했어요. 하루 300건도 처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루 700건을 처리하는 수준으로 바뀐 것이죠. 이후 배달 기사가 계속 늘어나면서 지금은 하루 2000건 이상 처리하고 있습니다.”
- 배달 기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목숨과 안전, 품질까지 내던지는 것은 아니다.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배달 기사에게 ‘관제 배차’를 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O2O 배달 업체는 ‘전투 배차’를 했다. 각 배달 기사가 고객 주문을 직접 받아 움직이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의욕이 앞선 배달 기사가 동시에 여러 주문을 받는다. 그러다 보면 서비스가 지연되고 품질이 내려가고 급한 마음에 배달하다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수시로 스마트폰이나 PDA를 들여다보면서 배달 접수가 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문제였다. 허니비즈는 관제 직원이 고객별로 최상의 배달 기사를 배치해 서비스 품질을 높이고 있다. 대신 근무를 오래 할수록 인센티브를 많이 받는 구조를 만들었다. 허니비즈의 차별화 전략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로 대변되는 이른바 3저(低) 시대
- 우리나라는 야근만 줄여도 ‘복지 기업’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기업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 2013년쯤 독일 남부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을 취재한 적이 있다. 각종 의료 관련 산업용 장비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도착 시간이 오후 3시 30분쯤이었다. 그런데 2층짜리 넓은 사옥에 직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혹시 망한 회사에 잘못 찾아왔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CEO가 등장했다. ‘모두 퇴근하고 기자가 온다길래 나 혼자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멘붕’이 왔다. 한국은 지금 시간에는 당연히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밤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해 줬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회사의 정식 퇴근 시간은 오후 3시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뿐 아니라 독일,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상당수 기업은 야근이 거의 없다.
- 하루 법정 노동 시간 8시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 직장인은 경제협력기구(OECD) 평균보다 43일 더 일한다. 그러나 실질 임금은 3만 3100달러(3800만 원)로 22위다.
- 맥킨지와 대한상공회의소는 2016년 초 〈한국 기업의 조직 건강도와 기업 문화 보고서〉를 펴냈는데 한국 기업의 77%가 글로벌 기업 평균보다 조직 건강도가 낮다고 발표했다. 가장 큰 문제로 습관화된 야근을 꼽았다. 맥킨지 측은 ‘시간 때우기식 야근이 생산성을 갉아먹고 있다’고 밝혔다.
- 벤처 기업도 야근을 필수 요소로 생각한다. 우선 투자자들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집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1분 1초라도 더 일해서 생산성을 높여 많은 아이디어와 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기를 든 스타트업이 있다. ‘칼퇴를 하면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 회사의 원대한 목표다.
- “투자 업계의 유명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분에게 회사 철학을 소개했더니 2시간 동안 엄청나게 지적하시더라고요. ‘스타트업이 무슨 5시 30분 퇴근이냐. 누가 투자하겠느냐’라고요. 이런 투자자는 저희 경영 철학과 맞지 않는 분입니다. 근무 문화를 무시하고 성과만 내라는 투자자의 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 젊고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에선 직원이 생명이다.
- 페이스북이 여전히 가장 까다롭게 따지는 문제는 직원의 행복이다. 페이스북 코리아의 경우 성과급을 연초에 목표한 금액의 최대 300%까지 준다. 연초에 1000만 원을 목표로 했다면 실적에 따라 30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성과는 부서장이 평가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서로 직접 평가하기 때문에 매우 투명하다. 직원들의 실패를 귀하게 여기기에 매출 같은 숫자로 표시되는 정량 평가보다는 노력이나 환경적 요인을 더 중요시한다. 페이스북 주식도 입사 후 4년에 걸쳐 지급하고, 연간 102만 원 상당의 헬스 스포츠비, 연간 20일 휴가, 안경 비용(20만 원)까지 지원한다. 그리고 수시로 직원 만족도 설문 조사를 한다. 회사의 조직 문화나 사내 시설, 처우 혜택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하면 바로 반영한다. 직원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언제든 회사가 기울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딱히 출근 시간도 없고, 업무 성격에 따라 외근이나 재택근무도 많다.
- 나이 든 직원이 나이 어린 사원에게 ‘반말’하는 것도 금기시되어 있다.
- “맨날 시키는 것만 하다 보면 힘들잖아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들에게도 투자 전략을 직접 짜게 합니다. 저는 회사를 너무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급하게 성장하면 직원들 이름도 다 모르잖아요.”
- 그는 처음부터 ‘회사가 성공하면 내가 가장 큰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지분의 30%를 가진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받는 월급을 직원들에게 매달 인센티브로 나눠 주는 대신, 자신의 월급은 1원으로 깎았다. “제가 누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다른 회사에 비해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능력자들이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던졌습니다. 칭화대 등 명문대를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와서 솔선수범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장할 때까지 집과 차, 월급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들어서 제 월급을 5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조차 쓸 곳이 없습니다. 저는 1년간 옷 한 벌 사 입지 않았습니다. 쓸 일도 없지만 성공하는 인생보다 성장하는 삶을 우선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 2014년 창업한 광고 대행사인데, 전 직원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만 일한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은 출근하지 않는 주 4일 근무다. 광고 업계 최초다. 그런데도 이 회사의 초봉은 적지 않다. 대졸 신입 사원 기준으로 업계 최고 수준인 3000만 원을 준다. 성과가 높은 직원에게는 인센티브(기본급의 200% 이내)를 지급한다.
- 그는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창업했다고 한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9년간 근무 일수로 3000일이 조금 넘어갑니다. 이 가운데 80%는 자정을 넘겨 퇴근했어요. 일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없었던 겁니다. 업무가 많은 광고 회사의 기업 문화를 변화시켜 보자는 생각 끝에 창업했죠.”
- 광고 업계를 보면 ‘답이 없는 일을 답이 있는 것처럼’ 일하면서 시간을 오래 끄는 경향이 있어요. 에너지 소모가 많죠. 차라리 그 시간에 놀고 자기 계발을 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 휴가를 많이 가도 월급을 안 줄였다. 사람을 노동 자원으로 보지 않고 존재감 있는 구성원으로 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반려견 사망 시 반려견 애도 휴가, 입양 휴가처럼 신선한 휴가 제도도 운용한다. 하루 8시간만 일하면 자율 출퇴근이 가능하다. 가령 오전 7시에 나오면 오후 4시에 집에 간다. 무늬만 해외여행인 해외 워크숍을 여는 관행도 없앴다. 워크숍은 회사에서만 한다. 대신 1년에 한두 차례 며칠간 국내외 먹방 여행을 가서 진짜로 논다. 그는 ‘주 4일제를 하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줄 수 있게 생산성이 유지되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생산성이 좋아진다’고 답한다.
- “처음에 주 4일제가 어색했죠. 이전 회사에선 야근과 격무에 시달렸으니까요. 그런데 중간중간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면 주 4일을 해도 밤 8~9시면 퇴근합니다. 3일간 쉬며 얻은 경험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연결하고 있고요. 실제 금요일에 쉬면서 얻은 아이디어로 다양한 광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그는 이 같은 ‘직원 복지 혁신’이 생산성 향상으로 직결된다고 말한다. 회사의 핵심 역량은 바로 직원이고 아무리 창업 아이디어가 좋아도, 기술력이 뛰어나도, 인맥이 화려해도 결국 직원이 성장의 최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 원)의 매출을 올려 미국 경제 전문지인 《포천》이 선정한 2016 ‘500대 기업’ 15위에 링크돼 있다. 아마존(18위), 마이크로소프트(25위)보다 높다. 그러나 시네걸은 매년 자신의 연봉을 35만 달러(4억 원)로 동결해 왔다. 국내 대기업 임원 정도의 연봉이다. 심지어 IT 업계에서 낮은 연봉을 받는다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저스도 2013년 168만 달러(19억 원),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신임 CEO인 사티아 나델라도 2014년 기준 840만 달러(95억 원)를 받았다.
- “35만 달러(4억 원)조차 너무 큰돈이에요. 비용에 민감한 조직을 경영하려면 불균형을 없애야 합니다. CEO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보다 백 배, 이백 배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대신 그는 직원들을 핵심 자산으로 생각했다. 계산대 직원(정규직)의 연봉은 5만 달러(5700만 원)에 이른다. 경쟁 유통 기업 직원들은 연봉의 25%를 의료 비용으로 지출하지만 코스트코 직원은 연봉의 8%만 낸다. 차액을 회사에서 전부 내주기 때문이다. 직원 정년도 없다. 코스트코 매장에서는 60~70세의 노인들도 점원으로 상당수 일한다. 시네걸은 ‘혜택을 많이 주면 좋은 업무 분위기가 절로 생겨난다. 후배를 칭찬하는 문화 못지않게 후배가 상관을 칭찬하는 문화도 있다’며 ‘적자가 나더라도 기업은 직원에게 가는 혜택을 줄여선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의무의 일부다’라고 말했다.
- 상장 기업인데도 주주들이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을 안 쓴다. 계속 성장하기에 주주들도 뭐라고 태클을 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주주(株主)에 대한 보상은 맨 마지막으로 신경 쓸 일입니다. 월가는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실적으로 회사를 평가하지만, 저희는 50년 뒤까지 평가받고 싶습니다.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 직원들의 행복을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 마음만 먹으면 돈은 더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벌 수 없잖아요.
- 회사는 5년째 전 직원 주 4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0년 일부 도입해 2011년 직원의 80%, 2013년 전 직원으로 확장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관계자는 ‘국내 기업 가운데 주 4일제를 가장 먼저 도입해 성공적으로 유지해 오는 기업’이라고 말했다. 일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매출은 늘었다. 2013년 매출은 60억 원, 2016년 매출은 약 100억 원이다. 주 4일제를 전면 도입한 후 3년이 지나자 매출이 66% 올랐다. 원래 에네스티는 여느 회사처럼 주 5일,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근무하는 업체였다. 그런데 2010년 당시 디자인 부서의 한 직원이 ‘가사와 업무 때문에 5일 근무가 어렵다. 월급을 적게 받아도 되니 하루만 덜 일해도 되느냐’고 우성주(45) 에네스티 대표에게 속사정을 털어놨다. 우 대표는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지만 직원 중심의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직원들에게 주 4일, 주 5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주 4일 근무하면 임금 동결, 주 5일은 임금 인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직원의 80%가 주 4일을 선택했다. 대신 출근 시간을 조정했다. 주 4일 직원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일하도록 했다. 3개월에 한 차례 직원 한 사람이 금요일 당직을 서도록 했다. 거래처 등 외부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불가피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주말에 업무 지시가 오갈 수 있는 ‘단톡방’을 금지했다. 법정 연차 15일 가운데 직원들이 똑같은 시기에 쉬는 공동 연차(7일) 제도도 도입했다.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시기에 각자 연차를 따로 쓰면 업무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중국 지사도 똑같이 주 4일제를 시행했다. 제도 시행 이후 업무 중에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직원이 줄었다. 업무 집중도가 높아진 것이다. 이직률도 10%대에서 3~4%로 내려왔다.
- “일주일에 3일을 쉬니 장점이 많아요. 금요일과 토요일은 자기 계발에, 일요일은 제 여가를 위해 쓰고 있어요.”
- “주 4일제 덕분에 일주일 동안 직원들과 지내는 시간은 줄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더 오래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 1956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는 ‘성심당’이 그곳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범람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빵집이기도 하다. 성심당은 설립 이후 60년째 당일 팔리지 않는 빵을 모아 다음 날 아침에 기부를 하고 있다. 아동 센터나 외국인 노동자 센터 같은 복지 단체 150여 곳이 그 대상이다.
- 임 씨의 아버지는 평안도 함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다가 1951년 1·4 후퇴 때 구사일생으로 남한으로 넘어왔다. 당시 그는 ‘살아서 남으로만 갈 수 있다면 반드시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월남 후 대전역 앞에 10제곱미터(3평)짜리 허름한 찐빵가게를 차렸다. 찐빵 300개를 만들면 100개는 전쟁통에 버려진 고아나 노숙자들에게 나눠 줬다. 제빵 업체들은 그날 팔리지 않아 남은 빵을 다음 날 절반 정도 값에 파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성심당은 남는 빵은 단 하나도 팔지 않는다. 임 대표는 필자에게 말했다. “매일 빵을 6000개 정도 만드는데, 보통 400~500개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어요.” 남는 빵은 1000원짜리 모닝빵부터 2만~3만 원 상당의 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성심당의 ‘나누는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가뜩이나 빵집 앞에 서는 고객들의 줄은 더 길어졌다. 대표 메뉴인 튀김 소보루를 먹기 위해서 보통 1시간 30분 정도 줄을 서야 한다.
- “돈을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 일본 도쿄 기치조지역에는 일본 최고의 양갱가게 ‘오자사’의 이나가키 아츠코(85) 사장이 있다. 오자사에서는 양갱과 모나카(찹쌀과 팥소를 넣어 얇게 구운 과자)를 파는데 연간 매출이 3억 엔(30억 원)을 넘는다. 그리고 3.3제곱미터(1평)짜리 가게는 매일 새벽 4~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고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 이 가게는 양갱을 하루에 딱 150개만 만들어 판다. 7킬로그램짜리 작은 가마솥 3개에 팥소를 넣어 숯불에 40~50분간 졸이는데, 아주 짧은 순간 팥소에서 보랏빛이 나면 성공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실수로 땀방울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이 색깔이 나오지 않아요.” 쫀득하면서 탱글하고 입에 사르르 녹는 식감의 교차점을 찾고 이를 시간으로 기록해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이나가키 사장은 제품 품질이 좋지 않으면 그날 장사를 아예 접어 버린다. 그가 성공한 법칙은 제품 공급업자들과 수십 년간 쌓아 온 신용, 그리고 고객들에게 가격을 올리지 않는 정책, 나아가 크든 작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철학을 지키는 것이다. 1971년, 백화점 3곳이 생겨 존망의 기로에 놓인 오자사는 당시 3년간 국책 민간 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팥의 새로운 품종 개발 현장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전국의 팥 공급업자들과 세밀하게 분석했다. 매일 직원 3명이 업자들이 보내온 수천 개의 팥알을 밤을 새워 가며 검사하기도 했다. “재료 납품이 아니라 고객에게 같이 물건을 파는 걸로 생각해 달라고 접근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랜 기간 공급업자들과 신용을 ‘저축’하는 사이가 되었죠. 덕분에 내가 망하더라도 ‘이 사람이 만들면 함께하겠다’는 수십 년 된 공급업자들과 일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최근 15년간 한 번도 안 올렸다. 1951년(양갱 120엔, 모나카 10엔)과 비교해 지금 가격(양갱 200엔, 모나카 54엔)은 싼 편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GDP)은 1960년 443억 달러(50조 원)에서 2015년 4조 1230억 달러(4700조 원)로 성장했다. 경제 규모가 55년간 백 배 가까이 성장했는데도, 제품 가격은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 1990년대부터 26년간 전체 직원의 2~3명은 다른 기업에서 입사를 거절당한 장애인을 꼭 고용한다. 정부의 장애인 고용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작아도 무조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보자는 철학을 고수할 뿐이다.
-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음악의 본질은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 본질은 누구나 겪는 일상생활에서 나오거든요. 그래서 대중음악은 듣는 입장에서 만들어야 해요. 지금까지 만든 히트곡들은 가만히 있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출발점인 경우가 많았어요.”
- “예를 들어 유키스의 〈만만하니〉란 히트곡이 있어요. 이건 예전에 제 친구가 저에게 황당한 행동을 했을 때 제가 뱉은 말이거든요. 씨스타의 〈가십걸〉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수다 떠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진짜 가식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가십걸’이란 제목으로 곡을 지었어요. 그렇게 좋은 키워드가 떠오르면 곧바로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작업실로 뛰어갑니다.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원칙입니다.”
- 용감한 형제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경시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은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엇나가기 시작했다. 싸움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공부와 멀어졌고 고1 때는 큰 싸움 끝에 소년원에 수감됐다. 2년 후 보호 관찰에서 풀려난 뒤 룸살롱 영업부장으로 일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생에 회의가 들어 소주 10병을 마시고 죽으려고 자해도 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유명 힙합 가수인 사이프러스 힐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난생처음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어’라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2000년 들어 룸살롱 영업부장을 그만뒀다.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는 서울 망우리에 월세 10만 원짜리 지하 단칸방을 얻은 다음 각종 음악 장비와 음악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할 수 있는 종로 낙원상가를 매일 찾았다. “주변 지인들에게 1만~5만 원씩 빌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70만 원짜리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10만 원짜리 신시사이저를 구했습니다. 악보를 볼 줄도 몰라요. 코드 짜는 법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 거창한 음악 이론을 꼭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음악은 기술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매일 골방에 틀어박혀 건반을 눌러 보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비트를 짜고, 편곡을 했습니다.”
- 2년간 노력 끝에 형 흑철(41) 씨와 함께 ‘용감한 형제’라는 이름의 힙합 듀오를 결성해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기획사에 뿌렸다. 여러 기획사 가운데 YG 양현석 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YG에 들어와 앨범을 준비해 보라는 것이었다. “‘도라이’, ‘골 때리는 이야기’, ‘방아쇠를 당겨’ 등 제목을 보면 아시겠지만 수위 높은 가사가 많은 갱스터 음악이었어요. 양현석 사장님이 독특하지만 사회적으로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데뷔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양 사장님이 ‘가수 말고 프로듀서로 전향할 생각은 없느냐’고 하더군요. 음악을 너무 하고 싶고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바로 수락했습니다.”
-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번 돈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음악을 시작할 때 ‘이걸로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든 못 벌든 한 획을 그어야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지요. 돈 벌 목적으로 시작했다면 아마도 중간에 그만뒀을 겁니다.”
- ‘전 재산을 사회 빈곤층에 모두 환원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2016년부터 그는 매주 한 차례 탑골공원 등을 찾아 200~300명에게 도시락과 물품을 나눠 주는 봉사도 해 오고 있다. “칭찬받으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지금 밝히는 이유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약해지면 안 되니까요. 꼭, 꼭 실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르면 쉰 살에 음악 사업을 접고 일흔 살까지 20년간 밥 봉사만 하며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할 겁니다. 그 이후에는 시골에 내려가 노후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입니다.”
- 기부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웠다. 한 대당 하루 500~1000인분의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밥차 서른 대를 구입해서 독거노인과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1주일에 1만 5000인분, 한 달에 6만 인분의 식사를 제공할 계획이다. 그런데 지금 모은 돈으로는 장기적인 기부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한다. 1000억 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 다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기부 계획이 공수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주 하루를 정해 식사와 물품 봉사를 하고 있다. 기부 품목을 ‘밥’으로 정한 이유는 돈이 없어 밥을 못 먹을 때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뭔지 아세요? 밥 못 먹는 겁니다. 음악을 막 시작해서 가난할 때 먹고 싶은 치킨을 못 사 먹어 운 적이 있어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돈이 없어 밥을 굶는 사람들에게 밥을 사 줘야겠다.’ 가장 기본적인 기부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 그는 음악으로 성공하려면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음악 듣는 게 취미라며 덜컥 도전하면 안 됩니다. 음악으로 성공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르바이트를 정기적으로 하면서 음악을 병행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르바이트가 본업이 되고 정작 음악 활동은 취미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하루 20시간 음악만 해도 모자랍니다. 죽지 않을 정도의 돈만 있다면 무조건 음악에 몰입해야 합니다.”
- 만성 두드러기를 앓다 덕수상고를 중퇴한 그는 작은 화장품 회사에 입사해 10년간 영업 사원으로 일하다 만 스물여덟 살이 된 1992년 소망화장품을 창업했다. 1995년부터 매년 매출의 1~2%, 때론 이익의 30%를 기아대책·월드비전 같은 구호 단체에 기부해 왔다. 지난 20여 년간 누적 기부액이 100억 원을 넘는다. ‘꽃을 든 남자’, ‘다나한’ 등의 브랜드로 매출은 1999년 245억 원에서 2005년 892억 원으로 올랐고 2010년에는 1219억 원을 달성했다. 2011년엔 KT&G에 본인 지분의 60%를 607억 원에 매각하며 화제가 됐다. 소망화장품 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 해외 부동산 사업을 병행하면서 최근 천연 화장품 회사 미네랄바이오를 인수하며 화장품 업계에 복귀했다. 그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금부터 은퇴할 때까지 단계적으로 전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재산은 수백 억 원대에 이른다. “돈을 더 벌면 매출의 5%까지 기부를 늘리고 싶습니다. 꾸준히 기부하다가 은퇴 전까지 단계적으로 재산의 99%를 기부할 겁니다. 제 꿈은 1조 원을 벌어 9900억 원을 기부하는 거예요.”
- “쉽게 말하면 제가 버는 돈은 제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은 ‘잠시 맡아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원짜리 물건을 팔아 남은 100원은 무조건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필요한 사람에게 돈이 돌아가는 ‘공유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아깝지 않냐고요? 전혀요. 골프 치러 가는 사람이 골프 치는 돈을 아깝다고 합니까? 기부는 저한테 골프 같은 겁니다. 즐겁고 보람찹니다. 기부 세계에서 저는 명함 내밀 수준이 아닙니다. 몽골에서 사업하다 알게 된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월급 2000만 원 받던 의사였습니다. 그분은 고연봉 직장을 포기하고 몽골에서 월급 100만 원 받으며 의료 봉사 단체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봉사하면서 받는 100만 원도 기부하는 겁니다. 본인 전세금을 빼서 기부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런 영웅들에 비하면 저는 부끄럽습니다. 제가 번 돈을 다 낸 것이 아니라서요.”
- 초등학교 1학년 때 먼지가 쌓인 과자를 먹고 식중독에 걸린 강 회장은 제때 치료하지 않아 오랜 기간 피부병에 시달렸다. 1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중퇴했다. 공부만이 인생의 성공 요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 그는 1982년 두발 미용 제품을 파는 현대화장품(현재 웰코스)에 영업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가 기부를 시작한 것은 1987년 과장 시절부터다.
- 1987년 대우 르망 승용차를 타고 춘천에 있는 거래처를 방문하러 가다 16톤 트럭에 부딪혀 승용차가 박살 났다. 당시 현대화장품 김상희 회장은 새 차를 사라며 그에게 1200만 원을 건넸다. 그러나 강 회장은 그 돈으로 차를 사는 대신 당시 모은 월급 1200만 원을 합쳐 2400만 원을 실로암 안과에 기부했다.
- ‘더 큰돈을 벌어 기부하겠다’며 1992년 자본금 5000만 원으로 10제곱미터(3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직원 2명과 함께 소망화장품을 창업했다.
- 외제차를 타고 싶으면 타야 합니다. 다만 차가 ‘권위의 상징’이 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 많은 돈을 과시하는 사람은 타락합니다.
-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것은 기부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부=세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실 기업가는 나쁘게 말하면 고객들에게 돈을 뺏앗아 오는 사람 아닙니까. 당연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일부 돌려줘야 합니다.
-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행복하게 일하는 것,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 여러 기업에서 인턴십과 대외 활동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스펙을 쌓았지만 이 청년은 삶의 목표를 못 정한 것 같았다. 자신이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 그저 직업을 ‘쇼핑’처럼 생각했다. 어떤 직업은 좋아 보이지만 야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고, 또 야근을 별로 안 하는 직업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고……. 만약 이 청년이 자신이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다면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삼성전자를 나와 창업한 청년이 있다. 배기식(38) 리디북스(Ridibooks) 대표다. 2009년 말 전자책(e-book)을 파는 온라인·모바일 플랫폼을 시작해 2010년 매출 4억 원을 기록했다. 이듬해 매출 11억 원을 넘더니 2015년 317억 원, 2016년 505억 원으로 폭풍 성장했다. 지금은 직원 160명을 둔 리디북스는 종이책보다 30~40% 싼 가격으로 전자책을 사고 읽을 수 있는 ‘전자 책방’이다.
- 창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보문고, 웅진씽크빅, 북큐브의 전자책 분야를 제친 데 이어 후발주자로 뛰어든 삼성전자도 시장에서 몰아냈다. 현재 1000억 원 규모의 단행본 전자책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50%를 기록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기업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느냐는 겁니다. 두 가지를 잘하면 됩니다. 첫째, 자기 업(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 둘째 과도할 정도로 고객의 요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